프랑스에서 6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며 화제가 되고 있다는 스테판 에셀의 정치 팸플릿 <분노하라!>(2010)와 관련된 기사와 칼럼을 몇 개 모아놓는다. 그리고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본문 13쪽의 전체 30쪽짜리 책이라는데, 우리의 경우라면 300쪽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종의 분노의 시대, 분노를 부추기는 시대에 부치는 '격문'이다.   

한겨레(11. 01. 06) '분노하라!’ 프랑스 뒤흔든 ‘30쪽의 외침’

30쪽짜리 작은 책 하나가 프랑스 사회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앵디녜 부!>(Indignez vous!). 우리말로 ‘분노하라’는 제목의 소책자다. 지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독일 나치에 맞섰던 스테판 에셀(93·왼쪽)이다.

지난해 10월 초판 8000부가 출간된 이 책은 석달 새 무려 60만권이 팔려나갔고, 크리스마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데 힘입어 새로 20만권을 증쇄했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3일 전했다. 100살을 바라보는 레지스탕스 영웅은 이 책에서 프랑스인과 다른 모든 세계인들에게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되찾아,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자”고 촉구한다. 광고문구와 주석을 뺀 본문은 13쪽에 불과해, 책이라기보다 격정적인 정치 팸플릿(레드북)에 가깝다.

다분히 선동적인 이 책이 판매부수 2위의 소설책보다 8배나 많이 팔릴 만큼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것은 단지 3유로(약 4500원)라는 저렴한 책값과 읽기에 부담 없는 분량 덕에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독창적이거나 깊이 있는 분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근대적 시민사회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시장에 대한 맹신과 자본의 폭력에 ‘분노’하라는 칼칼한 외침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은이와 출판사는 “시장독재와 은행가들의 보너스와 재정위기가 전후 복지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시대에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민감한 신경을 정면으로 타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노 신드롬’이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해석되는 이유다.

에셀은 신년 메시지에서 자신의 책이 성공한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자신이) 1940년대에 나치즘에 맞섰던 것처럼 오늘날 젊은이들도 정치·경제·금융 권력의 공모에 맞서, 2세기에 걸쳐 이룩한 민주적 권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노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프랑스에선 미묘한 정치적 파장까지 일고 있다. 지은이가 일깨운 프랑스적 가치인 ‘레지스탕스’(저항)가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의 보수파 정권에 저항해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뜻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책의 한 대목은 이렇다.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조일준 기자)    

한겨레(11. 01. 10) [한겨레 프리즘] 분노의 시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드롬이 되는 문화엔 그 사회의 당대 정신이 녹아 있다. 지금 세계를 휩쓰는 코드는 ‘불안’과 ‘분노’다. 미국이라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중인 록뮤지컬 <아메리칸 이디엇>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펑크록 밴드 그린데이의 동명 앨범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2009년 초연 땐 작은 뮤지컬에 불과했지만, 미국의 깊은 불안을 드러낸 “아메리칸 레퀴엠”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화제가 되고 있다. 음악을 하다 마약에 빠진 젊은이와 9·11 이후 애국심에 떠났던 이라크 전장에서 한 다리를 잃은 또다른 젊은이, 그리고 우울증에 빠져 집에서 꼼짝 않는 또다른 친구. 1950년대 미국의 비트 제너레이션이라면 마약과 섹스에서라도 구원을 찾겠지만, 21세기 이들 세대에겐 출구가 없다. 싸울 줄도 분노할 줄도 모르고 하강하기만 하는 이들 청춘은 한국 영화 <마이 제너레이션>의 절망을 닮았다.

프랑스에선 이런 절망감에 놀랍게도 올해 93살의 레지스탕스 출신 노인이 분노의 불을 붙였다. 스테판 에셀의 13쪽짜리 본문의 소책자 <분노하라>(Indignez-vous)는 지난해 10월 영세출판사에서 8000부를 찍은 데서 시작해 현재 80만부 가까이 팔려나갔다.

새로운 시대의 ‘선언문’이 되기엔 독창성도, 깊이있는 분석이나 날카로움도 부족하다고 지적되는 이 책의 폭발적인 인기 배경엔 극적 에피소드들이 작용했을 수 있다. 유대인 출신 작가 아버지와 자유로운 정신의 화가인 어머니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줄 앤 짐> 원작의 모델이었다거나, 에셀 자신이 1944년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 직전 숨진 프랑스인과 신분증을 바꿔 가까스로 탈출했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 참여한 인물이란 점 등이 그렇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금융위기 이후 사람들의 절망에 대해 전세계 좌파들이 무능하게 대응할 때 “자신의 내러티브를 가진 ‘찬사받는’ 좌파인물의 등장은 울림이 크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의 삶과 말이 지금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실제 이제 프랑스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모토로 하던 그 나라가 아니다. 최근 53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프랑스는 응답자의 61% 이상이 2011년 경제를 어둡게 전망해 가장 ‘비관적인 국가’로 꼽혔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야만적인 이민자 정책, 복지 축소 등에 프랑스를 프랑스로 존재 가능케 했던 ‘평등’과 같은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각국 언론들은 이 책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 서구사회에 번져가는 대중적인 불안과 분노의 정서를 건드렸다고 말한다. 독일 출신의 철학자 안젤름 야페는 <죽을 때까지 빚진: 자본주의의 해체>에서 “2008년 붕괴는 단순히 재정위기가 아니라 문명의 위기”라고 지적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켰던 대한민국은 어떤가. 독주와 불통은 임계치를 넘고 모든 복지 주장은 이성적인 논의도 해보기 전에 포퓰리즘 딱지부터 붙는다. 전세금을 1억원씩 올려달라는 요구에 고민하는 사람들 얘기가 주변에선 끊이지 않는데, ‘전세보증금 증액 상한제’를 담은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은 2004년 이후 번번이 국회에서 무산되고 있다.

어떻게 선진국과 비교하냐고? 1970년대 이후 수십년간 이런 논리는 반복돼왔다. 하지만 복지는 부유할 때 나눠주는 ‘자선’이라는 사고가 박혀 있는 한, 언제까지나 복지는 자본의 팽창 욕망을 따라잡을 수 없다. 다시 에셀을 읽는다. “그들은 감히 우리에게 국가가 더 이상 시민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감히’라고 국가에 당당히 일갈하고 분노하라고.(김영희 국제뉴스팀장)   

경향신문(11. 01. 15) [목수정의 파리통신] 분노하고 행동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2011년이 열리고 나서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은 <분노하라(Indignez Vous!)>다. 가장 많이 지면에 등장한 인물은 이 책의 저자 스테판 에셀이다. 올해 그는 한국 나이로 95세에 이른다. 레지스탕스 영웅으로, 전후에는 외교관으로, 말짱한 정신과 몸을 가지고 한 세기를 살아온 이 다복한 남자는 단 13페이지의 짧은 책을 써서 3개월 만에 60만부를 팔아 치운 경이로운 사회 현상의 한가운데 서 있다.

연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이던 30여분 남짓, <분노하라>를 급히 사가는 사람들의 긴 행렬을 목격하면서 범상치 않은 사건이 프랑스 사회에 조용히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년 들어 프랑스의 모든 언론들이 <분노하라> 특집을 앞다투어 다루면서 바야흐로 2011년은 분노의 시대로 정의되고 있었다. 

이 책에 대한 폭발적 반응은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입속에 삼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적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연금파괴 정책에 반대하는 다수의 프랑스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이를 관철시킨 사르코지 정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지난 시대에 자신들이 건설해 온 사회체제를 망치로 때려 부수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지는 지금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하는 감정은 바로 ‘분노’다.

그러나 차마 사람들이 그것을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그 때,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어린 아이가 그의 벗은 몸을 거침없이 비웃던 것처럼, 한 세기를 살아낸,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이 당당한 노인이 거리낌없이 말했던 것이다. 바로 지금이 당신들의 분노를 끄집어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프랑스를 구해낼 때라고.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국민연금과 사회보장제도,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사회체제는 전후 프랑스 사회를 이끌어간 레지스탕스 정신의 산물이라고. 우리 모두 자랑스러운 사회를 지켜야 하며 이민자를 축출하고, 불법 체류자들을 차별하며, 언론은 한 줌 권력집단에 장악당해 있는 이런 사회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그 사회가 아니라고. 과거 그가 나치에 저항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지켜야 할 모든 사회적 덕목들을 훼손시키는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더 많은 정의와 자유를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프랑스 지성의 산실 에콜노말에 입학했던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독일군에게 잡혀있다가 탈출한다. 전후에는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외교관의 안락한 삶은 그를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보수적인 삶으로 주저앉히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노동자 교육협회를 창설하고, 인권자문위원회에 참여하며, 교회를 점거한 이주노동자와의 협상중재에 나서는 등 끊임없이 그를 분노케 하고, 열정을 부추기는 사건에 동참하면서 역사의 한 흐름을 지켜왔다.

우리에게도 점령당했던 역사와 그 치욕에 항거하여 몸을 불사른 용맹스러운 레지스탕스(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과 함께 역사의 주역이 되지 못했고, 그들의 진취적인 정신은 해방공간을 차지하는 시대정신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이 집권한 해방 후 이 땅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친일세력들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이들이 벌여놓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3·15 부정선거는 청년들의 분노를 샀고, 이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거리로 나섰다. 경무대로 찾아가 이승만을 마주한 청년들은, 눈 멀고 귀 먹은 이 식물 대통령에게 이 나라에서 벌어진 참혹한 민주주의 말살 행위를 고한다. 이 때 이승만은 “나라에 이런 부정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청년들이 들고 일어서지 않으면 나라는 망한다”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언했다.

해방 이후 잘못 끼워진 단추의 비극은 지금까지 우리를 불행한 역사의 질곡에 붙들어 매고 있지만, 거기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분노하고, 행동하는 청년들의 열정이었다. 그 분노와 행동은 눈먼 자에게도 한줄기 정의를 일깨울 수 있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분노할 일은 넘치고, 행동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 2011년의 초입이다. 

11. 01. 16.  

P.S.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 6장에서도 분노의 문제가 다뤄지는데, 슬로터다이크의 <본노와 시간>에 대한 논평을 겸하면서 지젝은 '분노 자본'의 축적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간단히 말해서 분노 자본이 한번도 충분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 민족적 분노이건 문화적 분노이건 다른 분노를 더 끌어오거나 결합시켜야 하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때문에 필요한 것은 분노의 국지적, 간헐적 표출보다는 '분노의 전지구적 은행'이라고 말한다. 분노의 시간은 분노의 축적과 폭발이란 두 계기를 포착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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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노가 세상을 바꾼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06 15:04 
    프랑스의 노(老)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의 소책자<분노하라>(돌베개, 2011)가 번역돼 나왔다. 원저가 20여쪽 분량이라고 하니까 '책'으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제목에 80%는 들어가 있는 '전언'이다. '부당한' 대학 등록금에 대한 대학생들의 분노가 마침 촛불로 번져가고 있는 즈음에 '분노하라!'는 전언은 더없이 강한 울림을 갖는다.경향신문(11. 06. 06) 분노하라, 전세계 뒤흔든 외침“젊은이들이여, 주위를 조금만 둘
 
 
자꾸때리다 2011-01-16 19:36   좋아요 0 | URL
그런데 프랑스에서 학생 시위는 흐지부지 끝난 모양이네요.

로쟈 2011-01-16 20:19   좋아요 0 | URL
겨울은 시위하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죠. 방학도 있고...
 

경향신문에서 '목수정의 파리통신'을 읽다가, 이게 또 책 얘기라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프랑스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카를라 브루니의 은밀한 사생활>과 <부자들의 대통령> 얘기다. 책의 두 가지 용도를 보여주는 듯싶다...  

  

경향신문(10. 09. 25) 브루니의 사생활 VS 부자들의 대통령 

2주 전, <카를라 브루니의 은밀한 사생활>을 파헤치는 책의 출간 소식이 요란하게 외신을 탔다. 집시들을 추방한 프랑스가 유럽의회에 의해 제소되고 거친 비난의 소리들이 프랑스를 향해 쏟아지던 바로 그 순간에. 우리나라에서 정치적으로 난감한 일들이 발생하면, 때마침 연예인 커플들이 이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듯. 엘리제궁이 이 책의 출간을 방해하려다 실패하였다는 소문마저, 실은 출판사와 엘리제궁이 짜고 치는 장난으로 보일 만큼, 상황은 매우 절묘했다. 사실 이 책의 등장이 사르코지에게 해가 될 것은 거의 없다. 카를라 브루니의 역할은 등장 초부터 그러했다.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시선을 끝없이 분산시키는, 대통령 옆을 공식적으로 차지한 화려한 바비인형. 연애와 정치가 뒤섞일 때, 사람들의 호기심은 최대치로 치솟는 것을 우린 익히 경험한 바 있다. 사르코지는 정치 지면에서 연예계 기사를 읽는 듯한 즐거움(!)을 국민들에게 선사하는 수법을 능란하게 구사하면서 집권 3년을 헤쳐왔다.

전 부인 세실리아가 임기 중,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찾아 사르코지를 떠난 후, 헤어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만난 브루니와 전격 결혼하면서, 사르코지가 언론에 전한 첫눈에 반한 이유는, “세실리아와 똑 닮은 외모”였다. 그가 브루니에게 선사한 결혼반지가, 세실리아에게 준 것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사진과 함께 신문에 보도될 만큼, 대통령의 연애는 그의 정치보다 흥미진진한 기삿거리들을 제공해 주었다.

참한 동네 서점에 들러 책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문제의 이 책을 사간다. 이 책을 사는 사람이 정말 있구나 싶어, 집에 와서 아마존 순위를 검색해 보았다. 31위. 생각보다 선전이다. 카를라 혹은 사르코지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시아버지의 여자친구였던 카를라가 어느날 남편과 연인이 되고, 아이까지 낳는 걸 겪었던 소설가 쥐스틴 레비는 이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토로해냈다. 그 밖에도 “카를라 브루니에 대한 진짜 스토리” “브루니와 야심가들” “사르코지와 그의 여자들”… 더 파헤칠 것도 없는 그들의 사생활은 이미 재탕 삼탕으로 우려먹은 지 오래다. 커버스토리로 다뤄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미 일부일처제의 지루함에 대해, 사랑은 오래가지만 열정은 2~3주면 사라지므로, 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의 방식을 선호한다는 견해를 피력한 터이다. 그녀는 사생활을 굳이 숨긴 적도 없고, 그것을 부끄러워한 적은 더더욱 없기 때문에, 이미 알려진 그녀의 사생활을 애써 “폭로”하는 책들은 그 누구의 정치적, 사회적 생명도 위협하지 않는다. 정치를 가리는 현란한 가십으로서의 효력을 계속 이어나갈 뿐이다. 



같은 시간 아마존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책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된 <부자들의 대통령>이다. 미셸 뱅송, 모리크 뱅송 샤를로, 두 사회학자가 저술한 이 책은 사르코지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이해를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부를 축적하며, 그들끼리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국가조직을 이용하는지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금융방패, 세금감면, 처벌대상에서 제외 등은 돈으로 만들어진 신흥귀족들을 위한 계급투쟁의 최전방에 선 사르코지가 구사하는 일부 가시적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가면 뒤에는 오로지 특정 계급만을 위한 정부가 작동하고 있음을 이 책은 신랄하게 폭로하고 있다. 출간 3주 만에 아마존 책 종합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맹랑한 책의 선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외신도, 혹은 프랑스 일간지들도 곱게 입을 다물고 있다. 아무렴. 그럴 테지. 

10. 09. 25. 

 

P.S. 국내에 몇권 나와 있는 사르코지-브루니 관련서는 대개 '가십'이나 '처세술' 쪽으로 분류될 만한 책들이다. <부자들의 대통령> 같은 책이 소개되길 기대해본다. 더 바람직한 건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그런 책을 써주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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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x3 2010-09-25 18:30   좋아요 0 | URL
역시,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세요^^ 저는 아침에 이 칼럼 읽고 책과 연관시키질 못했는데.. (안녕하세요. <책을 읽을 자유> 잘 읽고 있습니다^^)

로쟈 2010-09-26 10:20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주로 하는 일이죠.^^; 제 책은 내놓고 나니 들고다니기 좀 무거운 책이더군요.^^
 

이번주 지구촌 최고의 화제작은 스티븐 호킹의 <거대한 설계>가 될 전망이다. 무신론을 함축한 '자발적 창조론'을 주장하여 영국에서는 이미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국내 언론도 관련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시간의 역사>(삼성이데아, 1989)가 물리학 책으로는 드물게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전력이 있는 만큼 <거대한 설계>도 곧 한국어본이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그 사이에 20년도 더 되는 시간이 지나가버렸군... 

한국일보(10. 09. 06) [지평선/9월 6일] 호킹의 우주 

다음 주말을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열광 속에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천재물리학자로 불리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책 <거대한 설계(Grand Design)>의 출간이 예고된 때문이다. 대중을 위해 알기 쉽게 우주의 기원과 구조, 팽창과정 등을 설명한 책이라곤 하지만, 앞선 <시간의 역사>나 <호두껍질 속의 우주>처럼 초끈이론, M-이론 등 난해한 현대물리학에 대한 기본이해 없이는 도전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일 것이다. 그의 책은 매번 엄청나게 팔렸지만,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가장 읽히지 않는 베스트셀러' 소리를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어쨌든 <거대한 설계>는 서점에 풀리기도 전에 이미 거대한 논쟁에 휩싸였다. 영국언론은 지난 주 책 내용을 발췌 소개하면서 '신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도발적 제목을 달았다. 우주의 기원이 된 대폭발(Big Bang)은 물리학 법칙의 필연적 결과라는 그의 '자발적 창조론'을 압축한 표현이다. 더욱이 호킹은 "(창조를 설명하려) 종이에 불을 붙여 우주를 폭발시키는 신을 부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단다. 이 냉소적 비유는 기독교신앙에 바탕한 창조론자, 다른 말로 '지적 설계론자'들로서는 가히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 10년 전 책에서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던 그에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에게 선택된 지구'의 자긍심을 무너뜨릴 만한 또 다른 태양계의 발견이 첫 계기였다고 하지만, 보도내용으로 미루어 우주의 현상을 완벽하고 통일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도달한 것이 결정적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그런 이론 구축이 현실화한다면 창조론의 입지는 크게 좁아질 것이다. 우주와 생명, 인간의 기원과 발전과정에서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입증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이 지금까지 신이 머물러온 자리인 때문이다.

■ 모든 인간이 숙명적으로 갖고 있는 세계와 삶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이 조금씩 답을 얻어가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기꺼운 일이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론 두렵고 허망하다. 과학 발전에 따라 정신작용도, 사랑의 감정을 포함한 복잡미묘한 마음까지도 내분비계 화학적 성분의 조합으로 규명돼간다. 모든 것이 물리법칙과 화학반응으로 설명 가능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후련해서 행복할까?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의 존엄성이나 존재의미는 그럼 뭘까?…가을 문턱에서 호킹의 신작 소식에 접해 문득 어지러운 상념에 잠긴다.(이준희 논설위원) 

10. 09. 06. 

 

P.S. 책은 <위대한 설계>(까치글방, 2010)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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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주 탄생에 대한 스티븐 호킹의 대답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0-06 08:22 
    영어권에서는 지난달에 출간돼 화제를 모은 <위대한 설계>(까치, 2010)의 번역본이 나왔다(관련기사들에서 '거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로 옮겼었는데, 번역본 제목은 '위대한 설계'가 됐다). 교양과학서로는 이번주에 가장 크게 다뤄질 만한 책이다. 간단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알라딘에서도 이미 예약주문을 받고 있는 책인데, 나도 주문을 넣어야겠다...    
 
 
마일즈 2010-09-06 17:58   좋아요 0 | URL
그런 지적에 이견은 없습니다만, 과학에 관련된 글쓰기에 항상 따르는 운명같습니다. 특히 보편청중을 청자로 삼는 과학에서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 어떤 과학현상을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기존과 다른 입장에서 재구성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수식전개는 일반독자보다는 보편청중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의미가 있는거 같습니다.

현대물리학의 섬세한 성과를 비유적으로 차용한 문학글쓰기와도 과학글쓰기는 다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한 경향으로 스티븐 핑커의 글쓰기가 있습니다. 그의 글도 언어학에 관련된 여러 분야를 아우른 일종의 언어과학글쓰기로 보이는데, 맨 처음에 접했을 때 인상과는 달리 그가 전달하려고 했던 내용이 관련된 분야 책을 읽을수록 크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 약간의 당혹감이 듭니다.

거의 보편청중을 염두에 둔 과학을 일반독자에게 전달하는 과학글쓰기는 또 다르게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로쟈 2010-09-07 09:04   좋아요 0 | URL
그런 글쓰기가 아쉽게도 국내에선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 책을 쓸 수 있는 과학자뿐아니라 전문 저널리스트들이 더 나왔으면 하는데, 그럴 여건은 아직 못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부르주아 좌파와 우파 아나키스트의 만남

프랑스의 고전학자인 자클린 드 로미이와 소설가 미셸 우엘벡은 같은 프랑스인이라는 것 말고는 마주할 일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들의 <왜 그리스인가?>(후마니타스, 2010)와 <공공의 적들>(프로네시스, 2010)을 어제오늘 구한 터에, 원서의 이미지가 궁금해서 찾아봤다(알라딘은 아직 프랑스 원서까지는 판매하지 않는다).  

먼저, 자클린 드 로미이는 1913년생이므로 거의 100세에 육박하는 나이다. 1988년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 이어 여성으로는 두번째로 프랑스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으며, 작년 레비스트로스 서거 이후엔 최고령 회원이라 한다. 소르본느 대학 교수를 거쳐서 1973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그리스 고전학' 담당교수로 재임했다고 하니까 그리스 고전에 관한 한 프랑스 최고의  석학이다(2007년에 레지옹 도뇌르 최고훈장을 받은 걸로 돼 있다).   

놀라운 것은 90세가 넘은 후에도 거의 매년 한권씩의 저작을 발표하고 있다는 점이고, <왜 그리스인가?>는 1992년,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여든에 펴낸 책이다. 국내에 프랑스의 고전학자로는 장 피에르 베르낭이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합동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튼 프랑스 고전학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해서 소장도서로 손색이 없겠다. 드 로미이의 책은 영어로도 몇 권 번역돼 있다(<왜 그리스인가?>는 아직 영역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어서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서신교환선을 펴낸 미셸 우엘벡. "출간하는 책마다 거센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프랑스 문단의 대표 작가"로 소개된다.   

1985년에 시인으로 데뷔했고, 첫번째 장편소설 <투쟁 영역의 확장>(1994)으로 주목받은 뒤에 두번째 소설 <소립자>(1998)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전세계 30개국 언어로 번역됐다고 한다). 영상 수필집 <란사로테>(2000)와 소설 <플랫폼>(2001)을 더 펴냈고(<란사로테>는 소설로도 분류된다), 현재는 <어느 섬의 가능성>(2005)을 영화화하고 있다고(이미 끝낸 듯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rIA-_XOZeH8&NR=1 참조). 국내에는 그의 소설 네 편이 모두 번역돼 있다.

 

그리고 영역본들. <소립자>를 뺀 세 권의 소설 표지다.  

  

그리고 대표작인 <소립자>의 한국어본과 영어본 표지. 

  

그리고 아래는 프랑스어본의 표지와 영화 <소립자>(2006)의 포스터(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UQNQlxuE0pQ 참조).

    

마음에 드는 표지는 영화의 스틸컷을 집어넣은 영어판이다.

  

그리고, <공공의 적들>의 프랑스어판 표지.

  

표지 이미지들을 둘러보는 것이 머리가 무거울 때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여흥이다... 

10. 0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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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8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향신문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들을 담고 있다. 일본 NHK에서는 러일전쟁을 다룬 시바 료타로의 대작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방영중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하여 '조선병합'의 문제까지 짚어보고 있다(우리 TV에서는 어떤 특집들을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시바의 소설은 찾아보니 <언덕 위의 구름>(전10권, 명문각, 1991)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때도 때인 만큼 일본을 알기 위해서라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와다 하루키 교수의 신간과 함께.  

 

경향신문(10. 02. 02) 조선병합과 일본인의 역사관   

지난해 12월 일본 공영방송 NHK는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제1부를 5주에 걸쳐 방영했다. 이는 작가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이다. 메이지유신 100년을 맞아, 러일전쟁에 이르는 메이지시대 일본을 그린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은 1968년 봄 산케이신문 연재를 시작으로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해전의 전략·전술을 수립한 해군 형과 기병대 소속 동생, 또 같은 고향 출신인 문학가 등 세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시바는 제1권의 맺음말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긴 이야기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행복한 낙천주의자들의 이야기다.” 일본 국력 증강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군인 2명과 문학가의 이야기는, 똑같이 ‘언덕 위의 구름’만을 바라보며 죽을 힘을 다해 언덕을 오른 고도성장기의 일본인들이 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소설은 2000만부가 팔리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시바는 집필 과정에서 러일전쟁에서 우세승을 거둔 일본이 전후에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굴러 떨어지는 최후를 내다봤다. 러일전쟁 개전 전날 밤까지를 그린 제2권의 맺음말에서 작가는 전후 일본의 변화를 예리하게 꿰뚫었다. “요컨대 러시아는 패할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일본은 뛰어난 계획성과 적군의 이런 사정 때문에 아슬아슬한 승리를 줍다시피한 게 러일전쟁이다. 전후 일본은 이 냉철한 상대적 관계를 국민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국민 또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절대화하고 일본군의 신비적인 강인함을 신앙처럼 믿게 해 민족적 치매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주인공은 연합함대의 관람식에 참석하지 않고 고향 친구의 무덤을 찾는다.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시바는 소설에서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뿐 아니라 조약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일으킨 ‘히비야 방화사건’도 다루지 않았다. 마치 전후 일어난 일은 모두 괴로운 것뿐이므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언덕 위의 구름>은 72년에 신문 연재가 끝나고 같은 해 단행본 제6권이 출간되면서 완결됐다. 시바는 ‘낙천주의자의 이야기’를 쓰려 했지만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분은 매우 암울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그로부터 40년 후의 일본 패전을 초래했다고 시바는 생각한 것이다. 96년에 세상과 이별을 고한 시바는 생전에 <언덕 위의 구름>의 드라마화를 거절했다. 그 작품이 드디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소설 판권을 가진 출판사와 NHK 출판부는 시바와 관련한 잡지 특집호와 책을 각각 출간했다.

뜨거운 관심이 집중되는 한편으로 드라마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는 시점에 시작해 2011년까지 방영하는 것은 의도적인 게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이 그것이다. 앞서 조선 역사에 정통한 학자 나카쓰카 아키라는 시바의 역사인식에 의문을 제기한 책을 지난해 8월에 내놨다. 그는 시바가 메이지시대는 좋았지만 쇼와시대는 좋지 않았다는 기계적인 역사관을 세웠다며 <언덕 위의 구름>이 ‘조선’을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저지른 조선왕궁 점령과 동학농민군 몰살작전, 그리고 민비(명성황후) 살해사건 등을 무시한 채 메이지시대 일본을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실은 필자도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을 의식해 일본이 러일전쟁을 어떻게 일으켰는가라는 주제로 한 책을 구상해왔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상권을 지난해 12월18일 출간한 것은 NHK의 드라마 방영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하권은 오는 23일 나올 예정이다. 필자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러시아와 싸우는 것이 숙명적이고 국민적인 과제였다고 판단한 일본인이 전쟁을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 보고, 그러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옳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시바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제국은 이미 시베리아를 손에 넣고 연해주와 만주를 넘어 조선에까지 그 여세를 몰아가고 있었다. 일본은 절실했다. 조선을 차지한다기보다 조선을 다른 강국에 빼앗기면 일본 방위가 위태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 했고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을 빼앗기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는 게 시바의 생각이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에 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유신에 따라 자립의 길을 선택한 이상 타국(조선)을 괴롭혀 국가 자립을 꾀해야만 했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적 단계로서 조선을 고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를 버리면 조선뿐 아니라 일본도 함께 러시아에 먹히고 만다.”

이렇게 말한 시바는 작품에서 조선 자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한국은 어쩔 도리가 없다. 500년 역사를 이어온 이씨 왕조의 질서는 이미 노화됐기 때문에 한국 자신의 의사와 힘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능력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시바는 이것만 언급했다. 또한 동학농민군과 관련해 서술한 전봉준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조선인 이름이다. 청일전쟁 전부터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왕의 자리를 지켰던 고종에 대해선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의 왕비이자, 왕궁 안에서 일본인에게 살해된 민비의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시바는 러시아의 위협만을 강조한다. “러시아의 태도에는 변호해야 할 부분이 전혀 없다. 러시아는 일본을 의식적으로 죽음에 몰아넣고 있었다. 일본은 궁지에 몰린 쥐가 됐다. 사력을 다해 고양이를 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시바의 이런 시각은 60년대 일본인의 견해이자 실제로 러일전쟁을 경험했던 당시 일본인의 역사관이었다. 그 시대 일본인은 신문을 통해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매일 접하고 있었다. 1면 톱기사로 한국 정치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한국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시바의 소설 세계는 당시 일본인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메이지시대 일본인 인식 해체필요
필자가 러시아 문서관에서 자료를 꼼꼼하게 살핀 결과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일본인은 문명개화,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대외팽창이 필요하다고 보고 조선에 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웃 국가를 지배하고 침략하는 것은 비정상적 행동이라고 판단한 일본인은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 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러시아 침략설로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고종은 1880년대 중엽 청나라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를 방패로 삼아 저항했다. 철저하진 못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승인하는 협정은 맺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해, 중립국이 되겠다는 한국의 뜻을 지지했다. 러일전쟁의 기원은 이러한 3자 관계 속에 있다. 이처럼 역사를 새롭게 직시하면서 시바와 메이지시대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언덕 위의 구름’이 이웃 국가의 병합으로까지 치달은 심각한 과정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TV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제1부는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민비 살해사건은 사진을 이용해 설명했다. 그렇다고 문제시되는 시바의 역사관이 드라마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 본 시청자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관건이다. NHK에서는 지난해 특별 프로그램 <일본과 조선 2000년>을 통해 고대부터 이어져온 양국 관계의 역사를 진지하게 재평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통신사 얘기를 다룬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오는 4월부터는 새 프로그램 <한국병합 100년>에서 고종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문제점을 되짚는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 국민이 역사인식을 새롭게 고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필자의 책도 이런 변화에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 02. 02. 

 

P.S. 칼럼을 읽고 나니 1910년의 한일병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05년의 러일전쟁부터 알아두는 게 필수적이란 생각이 든다. 관련서들이 몇 권 출간돼 있는데, 언제 한번 도서관 나들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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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한국의 입장에서 일본 근대의 계기로서의 서양 제국주의 비판을 어떻게 볼 것인가?
    from 혼자 사는 남자가 조용히 공부하는 곳 2010-02-03 16:49 
    로쟈 님이 옮겨 놓은 와다 하루키의 칼럼을 가지고 현재 새움에서 근동이물 세미나를 같이 하고 있는 네오풀 님과 리플을 좀 길게 나눈 리플을 옮겨 놓아 본다. 원래 리플이 붙기 시작한 곳은 지갱프(http://cafe.naver.com/think2wice/1367)이고 새움 근동이물 세미나 게시판(http://club.cyworld.com/51536042187/130358493)에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미 뒤늦었지만 그냥 블로그에는 닉네임으로 옮겨 놓..
  2. 근대와 근대극복 사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06 21:11 
    출간시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는 책들이 있다. 오늘 관내 도서관에서 대출한 고사카 시로의 <근대라는 아포리아>(이학사, 2007)도 그런 책이다. 필요 때문에 일본 근대사와 근대문학에 관한 책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동아시아의 근대에 관한 상당한 다양한 주제들, 혹은 난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지난주부터 새삼 주목하게 됐다.   경향신문(07. 11. 2
 
 
푸른바다 2010-02-02 17:02   좋아요 0 | URL
고려대 한승조 교수가 조선이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 병합된 것이 축복이라는 글을 썼다가 문제가 된적이 있었는데, 그의 관점이 아마도 시바 료타로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의 시각과 비슷했던 것 같군요.
동아시아 근대사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중일 3국의 관계도 재정립될 텐데, 기존의 낡은 시각으로는 새로운 변화들을 이해하고 선도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시각 속에서 남북문제와 친일파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할 듯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을 읽었는데, 참신한 시각이 돋보이더군요. 전적으로 그의 의견이 옳은 것은 아니겠고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참고는 되리라 생각합니다.

로쟈 2010-02-03 09:33   좋아요 0 | URL
참고할 책들이 몇 권 나와 있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는데, 올해 좀더 나오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2 21:07   좋아요 0 | URL
<언덕위의 구름>은 시중에 번역본이 있습니다.동서문화사 박재희 번역 <대망> 제 30권 째부터 시바 료타로 장편이 몇 개 있는데 <언덕 위의 구름>도 있습니다.길지만 박진감있는 좋은 작품입니다.아마 <대망>이라는 제목때문에 야마오카 소하치 것만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을 거에요.

로쟈 2010-02-03 09:32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네요.^^ 한데, 그게 완역인가요? 분량이 다 들어갈 성싶지 않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3 16:18   좋아요 0 | URL
완역입니다.제1권은 청일전쟁부터 나옵니다.러일전쟁에 관해서는 전쟁 직전 제정러시아 말기의 궁중암투와 동아시아 정책이 상당히 자세합니다.전쟁 장면에서는 위에 소개한 쿠로파트킨이 참가한 전투도 자세히 나옵니다.

로쟈 2010-02-04 09:3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책이 상당히 두꺼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