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기 전, 막간에 번역됐으면 싶은 책을 하나 적는다. 말이 '하나'지 2500쪽이 넘는 분량의 방대한 책이다. 아니, 책이 아니라 3부작이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구체(Sphären)> 3부작.

 

 

'구체'라는 건 일본어 제목이고(일역본도 아직 안 나온 듯싶다), 우리말로는 '영역' 구역' '지구' 등으로 번역돼왔다(영어로는 'Spheres' 시리즈다). 기억에는 그렇다. <냉소적 이성 비판>과 함께 슬로터다이크의 대표작이 될 듯싶은데(사실 그만한 분량을 쓰고도 대표작이 안된다면 난센스이기도 하다), 1권은 1998년, 2권은 1999년, 그리고 마지막 3권은 2004년에 나왔다. 오늘 놀란 건 영역본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니, 나온 건 재작년이니까 뒷북이긴 하지만 2, 3권도 근간 예정으로 돼 있다.

 

 

 

표지만으로도 궁금증을 유발하는 책이다. 흥미로운 건 이 3부작이 러시아어로는 완역돼 있다는 점. 두꺼운 하드카바본인데, 가격도 상당히 세다(세 권 합계 15만원 가량).

 

 

 

 

현재로선 '그림의 책'에 불과하지만 여하튼 영역본이라도 완간되면 한번 구해볼 생각이다. 한국어본을 기대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얼마전에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와 사회>(새물결, 2012) 같은 대작이 나온 걸 고려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 전에 반쪽짜리 <냉소적 이성 비판>만이라도 완역되면 좋겠지만.

 

 

슬로터다이크의 신작 가운데는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만 한다> 같은 책도 있는데, 이 역시 500쪽이 넘어가는 분량이지만 베스트셀러라 한다. 3부작이 번역되길 기다리면서 막간에 읽어보면 좋을 듯싶다. 흠, '상당한' 막간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

 

12. 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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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을 다루는 게 '세계의 책' 카테고리인데, 찾아보니 지난 2월에 올린 페이퍼가 마지막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셈인데, 한해가 가기 전에 늦게라도 한권 더 올려놓는다. '슬라보예 지젝의 특별한 강의' <임박한 파국>(꾸리에, 2012)에 등장하는 책이다.

 

 

 

지난 6월말 방한강연 때 지젝이 언급한 책이고 곧 나올 <멈춰라 생각하라>(원제는 'The Year of Dreaming Dangerously')에도 같은 취지의 멘트가 들어가 있기도 하다. 야니쉬 바로파키쉬(Yanis Varoufakis)의 책 <글로벌 미노타우로스>(2011)다(나는 초판을 주문했는데, 2013년에 2판이 나올 예정이다. 분량이 좀 보태졌다).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괴물. 바로파키쉬('바로우파키스'라고도 표기)는 미국을 이 괴물에 비유한다. 2008년 이후의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그의 진단/분석을 지젝은 이렇게 요약한다.

애널리스트 야니쉬 바로파키쉬는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경제 위기가 닉슨 대통령 재직 때였던 1970년대 초반에 이미 예견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1960년대 후반까지 기계를 수출하는 나라였는데 그때부터 무역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닉슨 행정부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는데, 무역적자를 없애려고 고군분투할 것이 아니라 큰 액수의 무역적자를 그대로 놔두자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엄청난 양의 물품을 수입하는 데 쓴 돈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는 데 골몰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30-40년 동안의 전 지구적 시스템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시스템입니다. 미국은 끔찍한 중세 시대의 신 같은 존재이고, 우리들은 이 신을 위해 돈을 지불하면서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매일 미국에 10억 달러를 주고 있는 셈이니 말죠. 우리들이란 다름 아닌 유럽의 독일과 중국, 일본, 한국 등의 생산국들과 광물 등의 자연자원을 수출하는 후진국들입니다. 2008년의위기는 이 시스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의 균형은 미국이 빚을 갚지 못하는 깊은 불균형에 기초해 있었습니다.(18-19쪽)

이런 흥미로운(동시에 심각한) 내용을 담은 바로파키쉬의 책은 비교적 얇다. 경제 위기 관련서들이 숱하게 쏟아졌는데, 왜 이 책은 누락됐는지 좀 의아하다. 조만간 번역될 수 있으면 좋겠다.

 

 

 

<글로벌 미노타우로스>을 얼마전에 주문하면서 저자의 다른 책들도 검색했었는데, <경제학의 기초>, <게임이론>, <현대 정치경제학> 등이 눈에 띈다. 이중 '2008년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표방한 <현대 정치경제학>은 우리에게도 요긴한 책일 듯싶다.

 

 

현재 정치경제학을 다룬 국내서는 김수행 교수의 책들이 가장 대표적인데, 바로파키쉬의 책이 비교대상이자 좋은 참조점이 될지 않을까 해서다. 관심 있는 출판사가 있었으면 싶다...

 

12. 11. 27.

 

P.S. <임박한 파국>은 몇 군데를 읽어봤지만 잘 마무리된 책은 아니다. 오탈자들 때문인데, 22쪽에서 지젝이 말한 '우리나라(슬로바키아)'는 '우리나라(슬로베니아)'의 오기로 보이며, 23쪽 "하나의 국가로 전혀 존재하지 못합니다."와 164쪽 "또 다른 전도체로의 실험예술이었다."에서 '로써'는 모두 '로서'로 교정돼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흠에도 불구하고 '슬라보예 지젝 인 서울'은 충분히 흥미롭고 자극적이다. 2013년부터는 경희대 석좌교수로도 활동한다고 하니 지젝과의 만남은 앞으로도 더 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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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됐던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우물이있는집, 2012)이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길래 한마디 적으려다가 이번주 시사IN을 읽고 방향을 틀었다. '세계의 베스트셀러' 특집이 눈에 들어서다. 미국과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5개국의 지난해 베스트셀러를 해외편집위원들이 전해주는 기사다. 미국과 프랑스, 일본의 베스트셀러는 이미 국내에도 소개돼 있길리 페이퍼로 적어둔다.

 

 

먼저 미국의 베스트셀러는 마이클 루이스의 <부메랑>(비즈니스북스, 2012)이다. 미국 금융위기를 파헤친 <빅숏>(비즈니스맵, 2010)의 속편으로 유럽 금융위기를 다룬 책이라고. 아이슬랜드, 그리스, 아일랜드, 독일에 각각 1부씩 할애하고 마지막 5부에서는 이들 나라의 금융위기를 미국과 비교한다. 권웅 편집위원은 이렇게 적었다.

루이스는 200년 이후 시작된 금융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대형 투자사들에 의한 부실 대부금이 세계 도처의 정부와 중앙은행에 흘러들어간 이상 해당국들이 언젠가 무너질 가능성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메랑>은 금융위기에 처한 나라들에 대한 '현장 보고서' 차원을 넘어 독자에게 '결국 이런 상황에선 일이 터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확신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반면교사가 된다.

 

 

프랑스의 베스트셀러는 팽송 부부의 <부자들의 대통령>(프리뷰, 2012)이다. 최근에 번역본이 나온 책인데, "사르코지 집권 5년을 조명한 사회학 보고서"로서 프랑스에선 1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 저자들이 바로 낸 후속작이 <5년 임기, 50억>이란 책. 사르코지 집권 5년 동안 이루어진 부자 감세를 다룬 책이라는데, 감세로 인해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돈이 약 50억 유로(약 7조3500억원)에 이른단다. "부자 대통령과 동거하는 가난한 국민에게 경종을 울린 책"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참고로, 작년 1월초에 소개된 프랑스의 베스트셀러는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였다.

 

 

 

독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 책은 마르틴 베를레의 <나는 정신병동에서 일하고 있다>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경영 합리화'라는 미명 아래 노동자를 협박, 착취하고 해직시키는 경영주의 회사를 저자는 '정신병동'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모범생'이라는 독일 기업에서도 온갖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고. 독일의 저명한 '비즈니스 코치'라는 저자의 책은 국내에도 몇권 소개돼 있다.

 

 

 

중국의 지난해 베스트셀러는 장웨이웨이의 <중국의 물결: 문명형 국가의 흥기>다(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중국의 정치적 후진성에 대한 서방의 비난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는 책이라고. 제목에서부터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는데, 저자는 중국이 질적인 면에서 여타 국가와 다르며 문명형 국가인 중국의 흥기는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단다. 중화주의적 색채가 농후한데,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충족시켜준 덕분인지 지난해 베스트셀러 톱10에 올랐다 한다.

 

 

 

일본의 베스트셀러는 이와사키 나쓰미의 <만약 고교야구의 여자 매니저가 드러커의 매니지먼트를 읽는다면>이 꼽혔다. 국내엔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동아일보, 2011)이라고 소개된 책이다. "고교 2학년생인 여자 주인공이 야구부 매니저를 맡게 된 후 팀을 전국 고교대회가 열리는 고시엔에 출전시키기 위해 드러커의 <매니지먼트>를 읽고 팀을 하나씩 개혁해간다는 내용"이라고. 아주 '일본스러운' 만화이다. 덕분에 지난헤 일본에선 피터 드러커 붐이 일었다고.  

 

 

 

그러고 보니 러시아에서는 지난해 어떤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는지 궁금하다. 국내에선 그런 소식도 편하게 알려주는 지면이 없어서 아쉽다...

 

12.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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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에서 명성을 떨치는 한국 학자들의 얘기가 가끔씩 들려오는데, 인류학자 권헌익 교수가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이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언젠가 우석훈 소장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뛰어난 학자로 이미 손꼽은 바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시강강사 생활만 하다가 영국으로 건너가버렸다고. 한국 대학사회에 얼마나 대단한 교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지 말해주는 반증이다. 관련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아직 한권도 번역되지 않은 권 교수의 책들이 소개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그래서 아직 '세계의 책'이다).   

한겨레(11. 05. 18) “내 학문 화두는 전쟁이 파괴한 삶의 회복” 

영국 최고의 칼리지로 알려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한국인 인류학자인 권헌익(49·사진) 런던정경대(LSE) 교수가 임용됐다. 케임브리지의 31개 칼리지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한국인 교수가 임용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권 교수는 10월 새 학기부터 트리니티 칼리지의 선임 연구 정교수로 일한다. 선임 연구 정교수는 정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면서 연구나 강의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정교수 가운데서도 특별한 자리다. 영국에서 선임 연구 정교수는 보통 정년퇴임을 몇 년 앞둔 정교수들에게 주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권 교수는 17일 “모교에 돌아오게 돼 기쁘다”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요청한 대로 앞으로 좋은 책을 써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일어난 마을, 가족 등 공동체에 대한 학살행위를 연구한 저서 <학살 이후>, <베트남의 전쟁 유령들>로 인류학계의 권위있는 ‘기어츠상’(2007년)과 아시아학계의 ‘조지 카힌상’(2009년)을 받아 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6·25가 내전과 국제전의 두 가지 양상뿐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성격도 띠고 있다고 봤다. 따라서 이제는 조국해방전쟁이냐, 침략전쟁이냐 하는 이념 구도에 집착하지 말고 남쪽과 북쪽의 민간인들, 참전했던 미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이 전쟁은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냉전의 시작을 알린 열전이었던 이 전쟁이 한반도뿐 아니라 20세기 후반 세계 역사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도 그의 관심사다. 그는 “한국전쟁을 겪은 미국이 자본주의 진영을 강화할 목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차별) 정책까지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우석훈 2.1연구소장은 지난해 11월18일 <한겨레> 칼럼에서 “장하준 다음의 질문은 권헌익의 질문이 됐으면 좋겠다”고 썼다. 이 이야기에 대해 그는 “우 선생을 알지만 그런 좋은 이야기를 해준 줄 몰랐다”면서도 “공동체의 삶이 회복될 수 있는지 여부가 내 공부의 주제이자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또 다른 냉전>을 써낸 데 이어, 연말엔 <북한-냉전의 극장 국가>를 펴낼 예정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권 교수는 케임브리지대학 인류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영국 맨체스터대, 에든버러대 교수를 거쳐 2009년부터 런던정경대에서 교수로 일해왔다. 트리니티 칼리지는 1546년 영국의 양대 명문 칼리지인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와 함께 헨리 8세에 의해 설립됐다. 노벨상 수상자 32명을 비롯해. 아이작 뉴턴, 프랜시스 베이컨, 바이런,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자와할랄 네루 등을 배출했다.(김규원 기자)   

한겨레(10. 11. 18) 장하준 사건의 교훈

내가 한국의 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을 다 만나본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내가 만난 한국 학자 중에서 “정말 이렇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게 입 딱 벌어졌던 사람이 세 명 있다. 세상의 평가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중에 제일은 권헌익 교수였고, 그다음이 장하준 교수와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시는 서울대 경제학과의 이지순 교수였다.

물론 이지순 교수는 한국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렇듯이 아직은 그를 대표할 책이 없어서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지순 교수였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88만원 세대>를 시작으로 지금 진행중인 12권의 대장정 시리즈를 쓸 용기를 냈던 것이 이지순 교수식 발상의 전환 덕분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를 진짜 은사라고 생각하고, 내가 발간한 책들을 전부 보내드리는 분이기도 하다. 그가 나에게 질문했다. “만약에 박정희가 산업화할 때, 유신 방식 대신 요즘 식으로 말하는 생태적 경제를 전개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못살았을까?” 언젠가 나는 그의 질문에 답을 하고 싶은데, 아직은 그럴 수준과 형편이 못 된다. 

장하준이 수년 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과연 모든 경제적 제도를 다 없애고 시장 하나만을 단일 기구로 숭배한다면 ‘경제 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 질문은 독일 역사학파인 리스트의 오래된 ‘사다리 걷어차기’의 질문이기도 하고, 스웨덴식 복지경제의 틀을 만들어낸 군나르 뮈르달의 질문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주류 경제학계나 정치인들 혹은 재계의 경제인들은 “그딴 질문 필요 없다”고 지난 10년 동안 장하준을 영국 사람 취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함께 아주 혼동스러우면서도 너저분한 시대를 보낸 지금, 장하준이 던진 질문 혹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마이클 샌델이 던진 질문에 한국 국민들은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2000년 김용옥이 <노자와 21세기>라는 인문서적으로 세웠던 모든 기록을 마이클 샌델이 올해 전부 갈아치웠는데, 그 기록을 이제 장하준이 모두 갈아치울 형국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10년, 먹고사느라고 너무 바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 혹은 한국 경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질문을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소한 몇 가지 정책 논쟁을 ‘의제 설정’이니 어쩌구 하면서 기술적 논의만 조금 했지, 정의, 도덕, 제도, 시장과 같은 근본에 해당하는 질문들을 빼먹고 간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논의들이 대학과 계간지 같은 것을 통해서 일상화되고, 국민들도 ‘시민토론’ 등의 형태로 계속 토론을 하고, 이런 것들이 정치권을 통해서 대표되는 그런 상황으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안 했고, “돈이면 최고다”라는 경제근본주의의 시절을 보냈다. 학자라는 게, 원래 남는 시간이 많아서 남들 다 아는 것 같은 근본적인 얘기를 다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은 좋은 학자이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본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권헌익 같은 좋은 학자가 한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런던의 정경대학(LSE) 교수로 가버린 일이다. 만약 그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많은 대학원생들이나 박사과정생에게 정말 좋은 스승이 되었을 것 같다. 그가 한 얘기는 더 간단하다. “고전으로 돌아가자.” 그 얘기를 한국은 못 알아들었고, 영국은 알아들었다.

장하준 다음의 질문은 권헌익의 질문이 되면 좋겠다. 정치권이 알아먹든 못 알아먹든, 장하준과 함께 한국 국민들은 이미 선진국 국민이 된 것, 그게 장하준 사건의 교훈 아닌가? 이런 국민과 독자들이 너무 자랑스럽다.(우석훈 2.1연구소 소장) 

11. 05. 18.  

P.S.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까 생각나는 학자는 어네스트 겔너(1925-1995)이다. 최근에 그의 전기를 구입한 때문인데, 이력을 다시 살펴보니 런던 정경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선 사회인류학 교수를 역임했다. 말년엔 체코의 민족주의연구소 소장을 지낸 걸출한 학자다.   

겔너의 책으론 <민족과 민족주의>(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2009)가 번역돼 있다. 민족주의론의 고전에 속한다고. 존 홀의 전기 <어네스트 겔너>(2010)는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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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1-05-19 09:48   좋아요 0 | URL
우석훈 소장의 글을 보며 권헌익 교수가 누군가 했는데, 저 분이셨군요?

한국에선 제 대접을 못 받다가 타국에선 인정받는 모습을 보니 씁쓸하군요...

로쟈 2011-05-19 20:48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학자로선 더 큰 명성을 얻은지도 모르죠...

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48   좋아요 0 | URL
90년대 초에 앤더슨<상상의 공동체>와 겔너 <민족과 민족주의>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번역된 게 기억납니다.민족주의론의 초창기 거장인 한스 콘도 체코 출신인데 그 지역이 워낙 강대국의 각축장이라서 민족주의 연구가들이 관심을 두는 대상이죠.

로쟈 2011-05-21 15:50   좋아요 0 | URL
네, 겔너의 책도 한번 나왔더군요. 한스 콘의 책도 예전에 몇 권 나왔었는데 지금은 자취가 없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53   좋아요 0 | URL
권헌익 씨가 한국전쟁 이후 냉전정책의 확장에 관심이 많으니 한국전쟁과 독일 재무장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것 같군요.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독일이 전후에 과거사 반성을 진정으로 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은 일본과 함께 냉전정책의 혜택을 제일 많이 입은 사람들이 독일 우익들이죠.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라며 나치청산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거기에 미국과 서방진영들이 지지하고...아파르헤이트를 가장 강력히 지지한 나라 중 하나가 옛 서독입니다.

로쟈 2011-05-21 15:51   좋아요 0 | URL
전쟁 연구서들은 제법 되지만, '전쟁 이후'에 관한 책이 새삼 드물다는 생각이 전 들었습니다...

雨香 2011-05-20 08:53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군요. 세계적인 학자가 시간강사가 되는.
로쟈님 블로그에서 석학 한분 또 알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로쟈 2011-05-21 15:51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인정받기가 더 어려운 듯해요.^^;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무바라크 일가가 권력을 남용해 축적한 부를 폭로하는 기사가 나와 흥미를 끈다. 700억 달러면 이건희 삼성회장의 10배 규모다. 부패한 권력의 최후를 곧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사에서 언급된 <최후의 파라오: 오바마 시대의 무바라크와 불확실한 이집트 미래>도 관심도서로 올려놓는다. '세계의 책'이다.   

경향신문(11. 02. 07) 가디언, "무바라크 일가 재산 700억 달러 달할수도"

반정부 시위대의 거센 사임 요구에 직면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일가의 재산이 700억 달러(한화 78조1900억원 상당)에 이를 수 있다고 영국 가디언이 4일 보도했다. 가디언은 중동 전문가들의 분석을 인용해 무바라크 일가가 영국과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 예금, 런던·뉴욕·로스앤젤레스의 부동산, 홍해 해안의 고가 지역 등에 투자해 거대한 부를 쌓았다며 이같이 전했다.

무바라크는 30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군 고위 관리로 일하면서 수억 파운드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투자 협상에 관여했고 이 과정에서 얻은 수입 중 상당 부분을 외국으로 보내거나 은행 비밀 계좌에 입금했으며 고급 주택, 호텔에 투자했다고 가디언은 설명했다. 아랍계 신문 알 카바르도 무바라크 대통령이 뉴욕 맨해튼과 베벌리 힐스 로데오거리의 부동산도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아들 가말과 알라 역시 억만장자로 알려졌다. 런던 벨그라비아에 있는 가말의 호화 저택은 서구의 전형적인 ‘기념비적 자산’에 대한 무바라크 일가의 탐욕을 보여주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 정치학과의 아마네이 자말 교수는 "400억~700억 달러에 달하는 무바라크 일가의 재산은 다른 걸프국가 지도자들의 재산에 필적한다"고 말했다. 자말 교수는 ABC 뉴스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군과 정부에서 일하면서 얻은 사업 기회를 통해 개인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면서 "중동의 다른 독재자들 사례처럼 이 과정에서 많은 부패가 있었다"고 밝혔다. 알 카바르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을 스위스의 UBS 은행과 스코틀랜드 은행, 로이드뱅킹그룹 등을 통해 외국에서 보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무마라크 일가의 부가 정확하게 어디서 창출되고 최종 목적지가 어느 곳인지에 대해서는 일부만 알려졌다. 더럼 대학의 중동정치학과 크리스토퍼 데이비드슨 교수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부인과 두 아들도 무바라크 대통령이 군대 등 기업부패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부터 외국 투자자들과의 협력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데이비드슨 교수는 대부분의 걸프 국가들은 새 기업을 설립할 때 외국 투자자들에게 자국 내 파트너에게 51%의 지분을 주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이집트는 이 수치가 20%에 가깝지만, 여전히 정치인이나 군부의 가까운 협력자들에게 거대한 이윤을 지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후의 파라오:오바마 시대의 무바라크와 불확실한 이집트 미래’의 저자 알라딘 엘라아사르는 무바라크 일가가 이집트에도 주택을 소유하고 있고 이중 일부는 전직 대통령과 군주들로부터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무라바크 대통령 일가는 샤름-엘 셰이크 휴양지 근처에 갖고 있는 호텔들과 땅을 통해서도 부를 쌓아왔다. 

11. 02. 06.  

P.S. 영미쪽에선 '무바라크 이후'로 전략적 관심을 옮겨갈 모양이다. 무바라크 시대를 정리하고 그 이후를 엿보는 책들도 근간으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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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2-07 21:09   좋아요 0 | URL
흠 부패한 권력은 결국 부패한 부를 낳는군요.이집트의 경우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데 무바라크 대통령 일가의 재산이 700억불이상일수도 있다니 국민들이 분노할만 하군요.

로쟈 2011-02-08 22:13   좋아요 0 | URL
미국의 행보가 관심거리인데, 중국과 러시아는 무바라크 편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