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1940-2007)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컬처뉴스에서 한 리뷰를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까 지난 1월 28일(영어판에는 27일)에 파리에서 영면한 것으로 돼 있다. 지난달에 페이퍼로 다룬 적이 있는 장-뤽 낭시와 함께 '데리다 사단'으로 분류되던 철학자이지만 낭시의 경우도 그렇듯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철학자로 평가된다. 개인적으로 그의 저작을 이미 몇 권 갖고 있고 러시아어로 된 그의 대담 한 꼭지를 번역할 일도 있어서 자료들을 더 모으고 있던 참이었는데(그가 남긴 저작은 낭시보다는 많지 않다) 병환중이라는 얘기에 이어서 부음을 듣게 되어 안타깝다. 그의 명복을 빌면서 번역가이자 도서출판 그린비의 편집장인 이재원씨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낭시 등과 함께 쓴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에 대한 리뷰를 겸하면서 라쿠-라바르트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있는 글이다. 라쿠-라바르트의 주저들이 조만간 소개되기를 기대하면서 '세계의 책' 카테고리로 분류해놓는다.

  

컬처뉴스(07. 02. 23) 정치적 범주로서의 숭고

 내겐 조만간 읽을 계획이 없는데도 책을 사두는 버릇이 있다. 출판 자체가 '사건'이거나 '곧 절판'될 것이 예상되는 책을 이런 식으로 사는데, 『숭고에 대하여』도 그런 책이었다. 이렇듯 당장 읽을 계획이 없던 이 책을 들춰보게 된 건 지난 1월 28일 이 책의 공동 필자 중 하나인 필립 라쿠-라바르트(1940~2007)의 부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그에게 보내는 때늦은 조사(弔詞)이기도 하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2대학 철학과 교수"가 공식 직함이었던 라쿠-라바르트는 흔히 자크 데리다의 제자로 소개된다. 1980년 데리다의 제안으로 절친한 동갑내기 친구 장-뤽 낭시와 함께 정치철학연구소를 세웠고, 1983년 데리다가 창립발기인 중 하나였던 국제철학학교의 연구원이 됐으며, 1987년 데리다가 라쿠-라바르트의 박사논문 심사위원 중 하나였다는 등의 개인사적 사실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라쿠-라바르트가 데리다의 제자였다면 스승에게 충실했기에 불충한 제자였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데리다의 핵심 개념인 '차연'(diffrance)의 논리에 충실하게 스승의 말을 끊임없이 거스르고(differ) 유예시키면서(defer) 자신의 독창적 사유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2월 2일 낭시는 라쿠-라바르트의 영결식 추도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오늘, 무한한 차연이 끝났습니다." 얄궂긴 하지만, 지난 2004년 10월 9일 데리다가 사망했을 때 호들갑떨던 미국 언론(그리고 외신이라면 전적으로 미국언론에 기대는 한국 언론)이 라쿠-라바르트의 사망소식은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점("라쿠-라바르트는 데리다가 아니다")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안타까운 사실은 라쿠-라바르트의 독창적 사유를 음미하기에는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업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의 작업은 「지금 우리에게 낭만주의란 무엇인가?」(『세계의 문학』, 106호, 2002), 그리고 곧 살펴볼 「숭고한 진실」 단 두 개밖에 소개되지 않았다. 한편 그에 관한 글은 세 편이 있다. 「데리다 사단과 온고지신의 해체철학」(『세계 지식인 지도』, 산처럼, 2002), 「미메시스와 미메톨로지」(『뷔흐너와 현대문학』, 18권, 2002), 「모델을 소멸시키는 미메시스」(<교수신문>, 2006년 2월 23일자) 등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읽을거리가 별로 없으니 더 많은 관련 자료들이 쏟아지기 전에 라쿠-라바르트를 읽기 시작하기에는 지금이 적당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Du Sublime

「숭고한 진실」이 라쿠-라바르트의 독창적 사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숭고란 무엇인가?"라는 모티프를 통해 롱기누스, 버크, 칸트, 헤겔,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벤야민, 리오타르 등의 '숭고론'을 어지럽게 횡단해 가는 라쿠-라바르트의 여정을 좇다보면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된다. 흔히 예술(혹은 미학)의 범주로 여겨지는 숭고가 정치적 범주로 변모하는 발견을.

흔히 말하는 숭고란 우리가 겪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 요컨대 감히 거역하기 어렵거나 우리를 압도하는 어떤 힘을 가진 무엇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감정에 가깝다. 그랜드캐니언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의 압도적인 크기나 힘 앞에서 감동할 때 우리는 숭고를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의상 숭고는 '재현'(reprsentation)될 수 없다. 다만 그 자체로 '제시'(prsentation)될 뿐. 말 그대로 숭고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느닷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라쿠-라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숭고는 "스스로의 법칙을 자신이 쥐고 있다".

근대미학이 숭고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이유, 혹은 숭고가 근대미학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숭고는 예술의 진리 역시 개념적 인식의 진리, 즉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된 바의 일치로 생각하던 근대미학을 붕괴시킬지 모를 개념이었던 것이다. 라쿠-라바르트는 근대미학의 이런 궁지를 타개함으로써 현대미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 하이데거라고 본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기원」에서 예술의 진리란 재현된 바가 재현되는 대상의 외관과 일치됐을 때가 아니라, 재현되는 대상의 본질(존재자의 존재)이 예술작품 속에 정립(탈은폐)됐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술작품 속에서 탈은폐된 존재자의 존재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던 존재자를 낯설게 보게 된다. 라쿠-라바르트에 따르면 바로 그때의 "그와 같은 황홀함, 그와 같은 매혹"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숭고이다. 이렇듯 하이데거는 재현되는 대상과 재현된 바의 일치라는 근대미학의 전제를 해체함으로써, 숭고를 외부 대상(요컨대 '대자연')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술작품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그 무엇으로 변모시킨다. 따라서 숭고는 더 이상 미학을 위협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라쿠-라바르트는 하이데거가 존재자의 존재를 '민족으로서의 존재'(un tre-peuple)와 동일시할 때의 위험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의 주장대로 존재자의 존재를 정립하지 못하는 예술을 더 이상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예술은 "민족으로서의 존재 가능성을 구성하는 요소나 시조"가 될 때에야 비로소 예술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는 셈이다. 이와 동시에 하이데거가 말하는 숭고의 체험 역시 '민족으로서의 존재'의 도래(요컨대 고대 게르만 신화 속의 위대한 영웅 지그프리트의 도래)를 고대하는 열광, 탄식, 환호성으로 표변할 위험을 늘 안게 된다(라쿠-라바르트는 자신의 1988년 저서 『정치적인 것의 허구』를 통해 이 위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바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지 하이데거와 나치 이데올로기의 이런 공통점 때문에 숭고 개념이 정치적 범주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라쿠-라바르트는 「숭고한 진실」의 말미에서 하이데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숭고의 정치성을 포착해낸다. 라쿠-라바르트는 하이데거처럼 숭고를 예술작품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라쿠-라바르트는 숭고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를 비평서가 아니라 '철학적인 저작'으로 읽음으로써 숭고의 정치성을 포착해낸다.

라쿠-라바르트가 롱기누스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그의 미메시스론이다. 롱기누스의 미메시스론에 따르면 숭고는 '재현'될 수 없을지언정 '모방'(mimesis)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격정과 고양, 한마디로 숭고에 관한 한 자연은 자신의 법칙을 따르지만, "자연이 우연에 스스로를 방기하거나 아무런 체계 없이 작동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 롱기누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숭고 체험을 다른 종류의 체험으로 환원하는 방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의 작동체계(푸시스)를 포착하고 다룰 수 있는 테크네(미메시스)를 습득하는 것, 그래서 숭고의 과잉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때 라쿠-라바르트가 말하는 미메시스는 "통상적인 의미의 재생산이나 복제의 의미가 아니며, 베끼기 또는 흉내내기란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푸시스(*퓌시스?)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도록 출현시키고 드러내는 기술이다. 요컨대 하이데거가 존재자의 존재를 탈은폐하는 것에서 예술의 진리를 찾았다면, 라쿠-라바르트는 푸시스를 탈은폐하는 것에서 예술의 진리를 찾는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존재가 탈은폐될 때 느끼는 감정을 숭고라고 재해석한 하이데거와 달리, 라쿠-라바르트는 우리로 하여금 푸시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정관(靜觀)케 하기 위한 계기로 숭고를 재해석한다.

라쿠-라바르트가 발견한 숭고의 정치성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숭고는 그것이 없었다면 영영 감춰지고 묻힌 채로 남게 됐을 그 어떤 것을 현존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가령 기성의 모든 질서는 늘 완전무결하다고 여기는 현대의 신화를 침범해 교란시키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다. 비유컨대 이때의 숭고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아름다운 것은 발작적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리라"라고 말했을 때의 그 정치성,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깨뜨리는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의 그 정치성을 획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말 라쿠-라바르트의 논의를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이것은 과도한 해석이 아닐까? 어쨌거나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등졌고, 우리는 이제야 그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주저, 특히 『철학의 주체』(1979)와 『근대인의 모방』(1985)이 국내에 소개되면 우리는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Adieu, Monsieur Lacoue-Labarthe!(이재원 _ 그린비 편집장)

07. 02. 25.

P.S. 내가 갖고 있는 라쿠-라바르트의 책은 영어본 6권과 러시아어본 2권이다. 그 중 네 권이 낭시와의 공저이다. 그만하면 들뢰즈/가타리에 견줄 만한 듀오이다. 이 듀오에 대한 김상환 교수의 해제를 옮겨놓는다. 중앙일보에 연재된 '세계 지식인 지도'의 한 꼭지였으며 단행본 <세계지식인 지도>에 수록돼 있다.  

중앙일보(01. 05. 10)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해체철학  

서양 철학은 끝났다. 이렇게 외친 사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였고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이상 독일의 실존철학자) 였다. 오늘날은 자크 데리다(71.프랑스의 철학자) 가 이 종언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과격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의 작업은 '해체론' 혹은 '탈구축' 이라 불린다. 해체론은 서양 철학사 전체를 분해해서 탈(脫) 서양적 사유의 지반 위에 재구축하려는 기획이다.

장 뤼크 낭시(Jean-Luc Nancy) 와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 는 세계적 인맥을 구축한 데리다 군단(軍團) 의 용장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점차 독창적인 철학자로 인정받게 된 2세대의 대표적 해체론자다. 특히 정치철학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에서 해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을 여는 첫 구절은 도(道) 를 언어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해체론자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도 언어 초월적 사태를 개념적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이런 작업은 서양 철학사 전체에 대한 전복(顚覆) 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태도가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 전체의 기본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유에서 개념적 언어에 담기지 않는 것은 미신적이고 신비한 것,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 더 나아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한 것이 개념적 질서의 뿌리 아닐까□ 해체론자가 되풀이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가 강조하는 언어 초월적 사태는 무엇보다 정치성(政治性) 이다. 이 정치성은 이론적 차원이나 경험적 차원의 정치와 구분된다. 정치를 있게 하는 정치성, 살아 있는 정치성은 일단 '이것이다' 라고 규정하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대신 거기에는 박제화한 정치성이 남는다. 물론 그렇게 해야 정치적 담론이나 실천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담론과 규칙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신선한 기운을 포기한 통조림 깡통에 불과하다. 해체론자의 눈에는 서양 사상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정치 이론은 이런 통조림만 생산해왔다. 그리고 그런 제조 공정의 기초 시설을 제공하고 보호해 온 것이 필로소피아라는 이름의 철학, 이론적 사유의 종손(宗孫) 인 철학이다.

니체 이래 해체론자들은 이런 철학이 끝났다고 본다. 이는 철학이 자신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실현하는 가운데 완성되었다는 것을,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과 의미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철학적 사유는 오늘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로, 사회 제도로 실현되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다시 말한다. 철학은 정치를 통하여 세상과 일상을 점령했다. 정치적인 것은 생활 속에 일반화되었지만 의미를 결여한 정치, 공허한 정치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정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은 철학과 정치의 상호 공속성(共屬性) 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완성으로서의 끝에 도달한 정치를 전체주의라 부른다. 전체주의 사회는 초월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사회, 총체적으로 표준화되고 동질화된 사회, 따라서 폐쇄성이 강한 사회이다. 이런 의미의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유럽 사회도 역시 이미 일상의 차원에서 혹은 미시적 차원에서 전체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스트라스부르 철학자들의 진단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박제화하는 동시에 전체주의화하는 정치 안으로 초월적 정치성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다. 이들이 예술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은 이런 문맥을 배후로 한다. 사실 예술적 전통에는 이론적인 것과 경쟁하는 전혀 다른 정치의 가능성이 꿈틀댄다. 서양사상사의 전통이 플라톤에서 확립됐다면, 그의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정치에 있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철인(哲人) 왕' 의 이념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리스에서 교양세계의 주인이자 정치의 기본 규칙을 제공하던 주역은 시인들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은 시인들이 누리던 권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후 시적 사유 안에서 정치적 실천이 이루어지던 시대는 이론적 사유가 승승장구하자 그 속에서 망각되었다. 다만 초기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상되었을 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이 낭만주의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다. 물론 이 전통이 대변하는 예술적 정치학도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지닌다. 이것은 나치가 어떤 심미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였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반추해 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했고 또 실망한 것도 그가 시적 사유의 옹호자였다는 것에서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예술적 정치성을 옹호하되 우상제작으로 전락하는 조형적 의지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그에 반하는 초월적 사태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경향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재현(再現) 주의' 혹은 '표상(表象) 주의' 로 귀결된다. 재현주의는 개체의 지위를 절대화한 형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모상(模像) ' 으로 규정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형상을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은 조형적 의지의 속성이다.

따라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철학과 예술론은 다시 존재론적 탐색으로 이어진다. 조형적 의지를 포괄하되 그것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 사유, 탈표상적이고 탈재현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때만 그들이 의도한 새로운 정치가 납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김상환 서울대교수.철학)



<공동 약력>
▶1940년 모두 프랑스 출생.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철학과에서 교수로 함께 재직했으며 현재 미 UC버클리 초빙교수로 있음.
▶1980~84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설치된 정치철학연구소 공동 소장으로 활동.
▶라쿠라바르트는 세계적인 학술잡지 『포에티크』의 편집에 참여.

<관련저작.미번역서>

◇ 공동 저작
▶문학적 절대성(1978)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문학이론과 철학을 다룬 고전적 저서.
▶문자의 지위(73) :라캉에 대한 해체론적 해석.
▶나치의 신화(91) :나치의 출현을 게르만 민족의 정체성을 고안해 내려한 조형적 의지의 산물로 해석.

◇ 공동 편집
▶인간의 종언(81) :80년 데리다 사상을 주제로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집.
▶정치성 재고(81) :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들에 대한 1차 편집서.
▶정치성의 후퇴(83) :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된 논문들에 대한 2차 편집서.

◇ 낭시의 저서
▶에고 숨(79) :데카르트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무위의 공동체(83) :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공동체 개념을 비판하고 차이의 정치학을 제시하는 명저.
▶자유의 체험(88) :근대 철학에서 철학과 정치를 동시에 떠받쳐 왔던 자유의 개념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중후한 저서.

◇ 라쿠-라바르트의 저서
▶철학의 주체, 도상적 유형학1(79) :문학과 철학의 대립적 관계 안에서 서양사상사의 흐름을 재구성.
▶근대인의 모방, 도상적 유형학2(86) :근대적 미메시스(모방) 개념이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적 효과를 띄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비구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
▶정치성의 허구화(87) :하이데거의 나치참여 이유를 그의 심미적 정치학에서 찾고,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성찰.

<용어 해설>
▶해체론과 탈구축〓파괴와 구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해체론은 플라톤이래 확립된 서양사상사의 본질적 유래와 내재적 한계, 그리고 그 한계 안의 공간이 형성되는 역설적 논리를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탈(脫) 서양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정치성〓정치성(the political) 은 정치(the politics) 와 구분된다. 정치는 개념.이론.제도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반면 정치성은 정치가 있기 위하여 먼저 있어야 하는 사태이되 정치의 개념이나 제도 안에서 망각되는 초월적 사태이다.

▶조형적 의지〓우상적 형상을 만들어 내려는 의지다. 이질적 것들을 하나로 묶고 거기에서 동질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거나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 도형이나 형상을 고안해 내야한다. 서양사상사는 이런 우상제작의 역사였다.

▶초월성〓우상적 형상이 지배하는 표상을 뛰어넘는 사태다. 이는 곧 이론중심적인 서양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태이고, 정치성은 그런 초월적 사태에 속한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 초월성의 망각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재현주의와 표상주의〓어떤 인위적인 형상(원본) 을 정해놓고 이를 절대화하며 개체의 지위 또한 그 신화화 원본과 '복사품' 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사의 중심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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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5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7-02-25 20:11   좋아요 0 | URL
혹시 "숭고에 대하여" 영문판은 없나요? (불어 원서 옆에 없는걸로 봐선...^^)

로쟈 2007-02-25 20:19   좋아요 0 | URL
**님/ 책을 아직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주니다님/ 영역본이 아직 없더군요...

주니다 2007-02-25 20:34   좋아요 0 | URL
번역본을 서점에서 잠깐 들춰봤던 기억으로는 읽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아쉽네요. 숭고는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인데 말이죠....^^

2007-02-25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25 21:05   좋아요 0 | URL
**님/ 그랬었군요.^^ 예전에 낭시나 라쿠-라바르트로 검색을 했더니 안 뜨더라구요...
주니다님/ 영역본이 있습니다. 'Of the Sublime: Presence in Question'(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3)

2007-02-25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7-02-25 22:21   좋아요 0 | URL
Of the Sublime: Presence in Question이 영역본이었군요. 꽤 비싸네요. ㅎㅎ

로쟈 2007-02-25 22:32   좋아요 0 | URL
**님/ 시차와도 관계가 있을까요?^^
주니다님/ 책은 제가 주문해놓았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전쟁(기사에서는 '6.25전쟁'이라고 표현)을 보는 시각은 전쟁의 발발원인이 한반도 내부에 있었느냐, 외부에 있었느냐에 대한 관점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1)정통주의: 대리전(국제전), (2)수정주의: 내전 (3)절충주의: 복합전. 이 중 세번째 입장의 시각을 강화시켜주는 논문/책이 출간됐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 놓는다.

문화일보(07. 02. 20) "스탈린 동의 안했다면 6·25 없었다”

6·25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국제전인가. 한국전쟁을 둘러싼 논쟁 중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전쟁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 ‘6·25전쟁은 복합전’이라는 내용의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최근 발간된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명인문화)에서 수록문 ‘6·25전쟁은 복합전으로 시작되었다-내전설과 남침유도설에 대한 비판적 조망’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을 전개했다.

이 교수는 “스탈린이 1950년 1월30일 김일성의 남침에 대해 동의했으므로 전쟁이 일어났다”면서 “만약 동의하지 않았다면 국경충돌에 그쳤을 뿐 대량살상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내전적 상황은 전면전 발발에 있어 ‘종속 변수’에 불과했으며, 전쟁의 직접적 발발 원인은 소련·중국·북한 등 3국 국제공산주의자들의 공모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보다 직접적으로 “전쟁의 근본적 책임은 미·소에 있다”며 “6·25전쟁은 ‘국제전적 내전’이 아니라 ‘내전적 상황을 이용한 국제전’에서 출발했다”고 강조했다.

◆6·25전쟁을 둘러싼 논쟁 = 지난해 11월 노무현 대통령은 캄보디아 방문 도중 가진 교민과의 간담회에서 “우리가 옛날에는 식민 지배를 받고 내전도 치르고 시끄럽게 살아왔는데 대통령이 돼서 보니 여러 나라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다음날 국내 언론에서 문제가 됐다. 바로 ‘6·25전쟁은 내전’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문화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은 이 같은 노 대통령의 좌파적 역사관을 비판했다.



1980년대 미국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한 이른바 수정주의사관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6·25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이 속속 제기됐다. 한국전쟁은 내전적 성격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또한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함으로써 북한의 오판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른바 ‘남침유도설’이다.

수정주의사관이 등장하기 전엔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기습남침’이라는 게 6·25전쟁에 대한 정통 견해였다. 이는 곧 한국전을 미·소간 양대 진영이 맞붙은 국제전으로 파악하는 시각이었다. 한때 수정주의사관에 밀리던 이 같은 견해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은 1990년 중반 무렵 구 소련 문서가 대거 비밀해제되면서부터다. 한국전쟁 발발 전후 소련과 북한 정권 사이에 오고간 문서자료들은 수정주의사관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얼마전에 소개한 바 있지만, 러시아에서도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서가 여러 권 나와 있다. 번역/소개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6·25전쟁은 복합전’ = 이 교수는 수록문을 통해 “처음에는 내전으로 출발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국제적 성격이 우세한 분단이 그 근본적 배경이었고 스탈린의 승인이라는 외인이 (전쟁) 발발의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복합적인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초기에는 내전과 국제전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합전쟁이었고, 미국과 중국의 개입으로 국제전적인 성격이 강화됐으므로 국제전적 요소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는 것이 이 교수의 논지다. 따라서 종합적으로는 ‘국제적 성격이 우세한 복합전’이라고 이 교수는 결론내렸다.

그는 또 전쟁 발발 이전 분단 과정에 대해서도 “민족 내부의 좌우대립(내인)과 외적 규정력(외인)은 분단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며 “외인이 없었다면 무조건 통일됐을 것이며, 내인이 없었다면 통일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외인이 내인보다 훨씬 압도적이고 중요했다”고 말했다. 만약 내인이 없었고, 미·소가 우리를 강압적으로 분단시키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반도 분단의 성격에 대해서도 ‘국제적 성격이 우세한 복합형 분단’이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내전적 배경과 국제전적 요인은 6·25전쟁 발발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며 “따라서 이 전쟁은 복합전이었으며, 내전이라거나 국제전이라거나 일방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이 두 요인이 결합된 양상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김영번기자)

07. 02. 20.

 

 

  


 

P.S. 작년 여름에 출간된 정병준 교수의 노작 <한국전쟁>(돌베개, 2006)에서도 저자는 "전쟁은 특정 시점에서 특정 세력에 의해 돌출적으로 창조·결정된 산물이 아니라, 미소·남북·좌우의 대립과 길항 과정에서 형성된 결과물이었다. 즉 전쟁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햇던 미소라는 세계 패권국가의 대립, 남북한 간의 지역적 분립, 좌우익 간의 이념적 대결 등이 응축되어 폭발한 것이다. 그것은 해방 후 한국의 국내적·국제적 갈등 투쟁을 반영한 작은 우주의 빅뱅이었다."라고 적었다. 이완범 교수는 과연 기존에 나와있는 여러 연구서/연구자들의 입장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아 아쉽다...

영어권의 새로운 연구서로는 윌리엄 스튝의 <한국전쟁 재고>(프린스턴대학출판부, 2002)가 눈에 띈다(태극기는 왜 엉뚱하게 그려져 있나?). 제목에 'Rethinking'이 들어간 것은 저자가 이미 <한국전쟁>(1995)이란 노작을 쓴 바 있기 때문. 커밍스의 시각과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최근에 나온 국내 저자들의 <한국전쟁>에도 인용돼 있을 듯하다). 

참고로 스튝의 <한국전쟁>은 러시아판(2002)으로도 나와 있다. 생각난 김에 러시아책들을 인터넷서점에서 둘러봤는데 눈에 띄는 책 서너 권에 대해 몇 자 적어둔다. 먼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전투기 조종사의 경험을 토대로 이고르 세이도프 등이 쓴 <'세이버'의 재난: 한국전쟁의 에이스>(2006). 576쪽 분량이고 같이 나온 책 <미그 대 세이버>(2006)와 함께 한국전쟁 관련서로는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책이다(제목의 '에이스'는 적기를 많이 격추한 조종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미그'는 소련/러시아가 자랑하는 전투기 '미그기'를 가리키지만 '세이버'는 무엇인가?

Гроза "Сейбров". Лучший ас Корейской войны"Миги" против "Сейбров"

동아일보(06. 11. 08) 기사에 따르면, "1950년 가을. 6·25전쟁은 유엔 연합군의 참전에 이어 중공군의 도하(渡河)로 혼전일로였다. 연합군으로선 중국의 인해전술도 난감했지만 하늘도 골치였다. 중국이 소련제 제트전투기 미그(MIG)-15 카드를 내놓은 탓이다. 전쟁은 양보가 없다.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진다. 중국은 연합군의 화력을 병력으로 눌렀다. 연합군은 지상군의 부족을 B-29의 폭격으로 메웠다. 그러자 ‘폭격기 킬러’로 통하는 미그-15가 전장에 나섰다. 눈에는 눈. 미그기와 ‘쌕쌕이’ F-80의 정면승부만이 남았다." '세이버'란 그 미군의 '쌕쌕이' F-80(나중엔 F-86?)을 가리킨다.

한국전쟁은 세계 최초의 제트전투기간 교전이 이루어진 전쟁으로도 기록될 터인데, 결과는 어떠했을까? "11월 8일 신의주 인근 상공. 미 공군은 폭격기 B-29를 엄호하기 위해 F-80 4대를 띄운다. 이를 저지하려 미그-15 6대가 출격했다. 세계 최초로 벌어진 제트전투기 간의 교전이자 미국과 소련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의 충돌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투는 싱거웠다. 미그기는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격추(1대)까지 당하는 졸전 끝에 도망쳤다. 전투기의 성능보다는 신참으로 구성된 중국 조종사의 실력이 모자랐다."

"분노한 건 중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군사과학만큼은 미국보다 낫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중국 공군의 재정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소련군 조종사들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그기는 점차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상마저 어려워지자 미국은 승부수를 던진다. 시험 운용하던 신예 전투기 F-86 세이버를 긴급 투입했다. 당시 공중전이 ‘도그 파이팅(근접전)’ 위주였던 상황에서 최대 1.3km 밖에서 공격이 가능한 세이버는 한반도 제공권을 연합군의 품에 돌려준 명검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에 대한 (평균적인) 러시아인들의 관심은 주로 미군의 세이버기와 교전한 미그기와 그 소련군 조종사들에 가 있다는 걸 알겠다.

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Корейский конфликт 1950-1953 гг.Корейская война (1950-1953) и ООН

보다 '정통적인' 연구서는 토르쿠노프의 <수수께끼 같은 전쟁: 한국의 충돌 1950-1953>(2001)이 있다(왼쪽). 표지만 봐도 어떤 성격의 책일지 짐작된다. 오른쪽은 새로운 경향의 책인데, 바닌이 쓴 <한국전쟁과 유엔>(2006)이다. 한국전쟁 연구자들이 두루 참조할 만한 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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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가 본 한국전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22 09:25 
    이달에 구한 한국전쟁 관련서 가운데하나는 아나톨리 토르쿠노프의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에디터, 2003)이다. 저자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으로 재직중인 실력자.러시아 학술원(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하며, 작년 봄에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토르쿠노프의 '주저'가 바로<수수께끼 같은 전쟁: 한국전쟁, 1950-1953>(2000)이다(그밖에 한국 현대사에 대한 공저들도 갖고 있다
 
 
기인 2007-02-21 07:3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로쟈 2007-02-21 12:34   좋아요 0 | URL
쌕쌕이 기종에 오타가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엊그제인가 운만 떼놓은 일을 해치우기로 한다.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강해>(통나무, 2007) '참고문헌목록'을 읽고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놓는 일 말이다. 저자가 <요한복음강해>와 (아직 미출간된) <기독교 성서의 이해>, 두 권을 쓰기 위해 구체적으로 참고한 책들이자 그의 '서재에 꽂혀 있는 개인소장본"들의 목록이라고 하는데, 저자가 목차에서 '자세히 열람하시오'라고 당부해놓을 만큼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적어놓은 것이면서 몇몇 책들에 대해서는 요긴한 사항들을 밝혀놓은 문헌 해제이기도 하다.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많은 책들의 서지사항을 훑고 그 중 많은 책들을 구입하며(적어도 소득수준에 비하면 그렇다) 더러 읽어보지만 저자의 편력에는 미치지 못한다(물론 나도 20년후쯤이면 2만권 이상의 장서를 갖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게 일차적인 느낌인데, 한편으론 전공과 관심이 전혀 다른지라(나는 한번도 '신학'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모처럼 좋은 '책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으론 구경 차원이 아닌 보다 실제적인 관심을 촉발시킨 책들도 없지 않았는데, 그런 범주에 속하는 몇 권의 책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한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여러 권이어서 이 '책 이야기'는 '세계의 책' 범주에 집어넣는다.

저자가 첫번째 분류 항목인 '사전류'의 책 50권을 나열하면서 제일 처음에 적어놓은 책이자 "이 지구상에서 "현존하고 있는 최고의 성서사전"이라고 격찬하고 있는 책이 옥스포드 컴패니언 시리즈로 나온 <성서사전>(1993)이다. 이 컴패니언 시리즈의 책들은 나도 러시아문학 관련을 중심으로 여러 권 갖고 있지만 이 사전은 '그냥 그 정도'를 훌쩍 넘어서는 모양이다. 932쪽의 분량도 만만찮지만 도올에 따르면 "간략하면서 많은 정보가 압축되어 있고 또 매우 이론적으로 깊이가 있다. 정통신학적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다양한 최근의 학문성과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왜 이런 사전이 우리나라에서 번역 안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학문의 수준을 잘 나타내주는 명저 중의 명저이다."

이만한 사전이라면 이해가 안 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국내의 출판 현황을 고려하면 이해 못한 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기독교 교세와 신심을 생각하면 미스테리한 일이다(우리 교계와 신학 수준을 잘 나타내주는 지표가 아니기만을 바란다). 어쨌든 그런 격찬을 접하고 보니 한권 정도는 사두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해서 최저가 중고서적을 주문까지 했으나 배송지 제한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허세를 부릴 게 아니라 학교 도서관이나 이용하라는 뜻으로 새겼다).

다음 두번째 책도 역시 사전인데, 저자의 첨언이 아니더라도 사실 "학문을 하는데 좋은 사전을 활용하는 습관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들을 구비해놓는 데 적잖은 비용과 상당한 공간이 요구된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따름. 엘리아데의 <종교학백과사전>(1987)도 같은 경우이다. 무려 16권이 한 질이다. 역시 도올에 따르면 "신학도라면 꼭 봐야할 명저 중의 명저"로서 "이 백과사전은 세계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기독교관련 항목도 그 정보의 깊이로 말하면 사전 중의 왕중왕이다." 일당백이란 얘기겠다(물론 이 책은 나의 '실제적인 관심'과 무관하다. 편자의 이름이 친숙한지라 그냥 꼽아보았다).

세번째 책은 보다 직접적으로 '요한복음'과 관련한 '발군의 주석'이다. D. A. 카슨이 쓴 <요한복음주해>(1991)가 그것인데, 715쪽 분량이다. 도올의 설명은 이렇다: "영어원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책을 사서 한줄한줄 나의, 번역과 대조하여 읽어보면 매우 명료하게 요한복음 전체상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지적모험의 한 분수령을 창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책들은 아마존 등의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쉽게 구입 가능하다." 확인해보니 책값은 25불 가량이다. 하지만 나는 엊그제인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바로 옆에 두고 있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예수에 관하여'란 카테고리 속에 들어 있는 책인데, 저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예수와 말씀>(1958)이다. 도올 자신이 "인생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책"으로 꼽고 있기도 하다. 물론 원저는 독어본(1926)이며 도올이 목록에 올려놓은 것은 그 영역본이다(책의 내용에 대한 소개는 http://www.religion-online.org/showchapter.asp?title=426&C=276 참조). 도올의 평가: "우리나라에서는 불트만신학이 마치 한물 건너간 시대조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착각이다. 우선 우리나라 신학계는 불트만을 이해하지도 訪柰?수용하지도 않았고 토론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트만신학은 21세기 최고봉이며, 불트만을 안 거치고 21세기 신학을 운운할 수 없다."

 

 

 

 

검색해보면 불트만 관련서는 10여 권 이상 찾아볼 수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평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도올의 판단인 듯싶다.

끝으로 예수와 관련한 책을 한권 더 꼽자면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여태까지의 모든 성과를 종합한 사계의 최고봉"이라고 도올이 격찬하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의 <예수: 혁명적 전기>(1995). 224쪽에 불과하니까 모처럼(!) 단숨에 읽어볼 수 있을 만한 책이다. 도올의 서지에는 빠져 있지만, 보다 두꺼운 책인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1993)은 <역사적 예수>(한국기독교연구소, 2000)로 번역돼 있다.

07. 02. 18.

 

 

 

 

P.S.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희랍미술사의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저자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라 꼽고 있는 것은 존 보드먼의 <그리스 미술>(시공사, 2003)이다. 나이즐 스피비의 <그리스미술>(한길아트, 1998)이나 뒤센의 <트로이>(시공사, 2004)도 목록에 올라와 있다.  

 

 

 

 

 

창해ABC북으로 나온 <알렉산드리아>와 <레바논>도 "성서이해를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좋은 서적이다"라는 게 저자의 평이다.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은 책 몇 권 정도는 직접 참고해볼 수 있겠다. <요한복음강해>를 읽기 위하여?..

P.S.2. 본문에서 빠뜨렸는데, 크로산의 <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한국기독교연구소, 2001)도 번역돼 있다. 한번쯤 일독해 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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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19 00:10   좋아요 0 | URL
로쟈님 때문에 자꾸 보고 싶잖아요 ㅋ 그래도 굳이 '영어로 배우는' 타이틀을 넣은 것은 유료강의라는 특성때문에 넣은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인문학적 교양만으로 절대 한국인의 지갑을 열 수는 없지요.(아무리 도올이라도) 어학관련은 출판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큰 손이니.ㅎㅎ

마늘빵 2007-02-19 00:09   좋아요 0 | URL
설까지 수고가 많으세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인 2007-02-19 10:58   좋아요 0 | URL
이런 책들은 아마존 드응이 -> 등의
오타 지적하고 갑니다. 오우~ 로쟈님의 폭이란 정말 대단하십니다. :)

로쟈 2007-02-19 11:00   좋아요 0 | URL
테츠님/ 요즘 나오는 책 치고 그다지 비싼 책도 아닙니다.^^
아프님/ 연휴가 좀 짧지요?^^
기인님/ 수정했습니다.^^ '폭'이 아니라 '제스처'입니다...

길손 2007-02-20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오타 지적합니다. <역사적 예술>은 <역사적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서->한국기독교연구소. 참고로 크로산의 <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도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07. 02. 18.


로쟈 2007-02-20 18:26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막판에 오타들이 숨어(?) 있었네요.^^ 크로산의 책은 조만간 구해봐야겠습니다...

yoonta 2007-02-23 23:56   좋아요 0 | URL
오늘에서야 요한복음강해를 손에 쥐었는데..뒤에있는 참고문헌목록이 정말 볼만하더군요. 기독교관련책들은 거의 없는 편이어서 이 목록을 손에들고 이쪽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면 최소 몇백권은 돈만있으면 바로 지르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더군용..ㅋ

로쟈 2007-02-24 00:02   좋아요 0 | URL
저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 저는 고작 대여섯 권 정도 꼽아보았을 뿐인데...

yoonta 2007-02-24 00:09   좋아요 0 | URL
제가 좀 고대근동지역이나 초기기독교 역사랄지 영지주의등과 관련된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편이어서요. 특히 사전류에 소개된 < A Coptic Dictionary > H.G. Crum 요책 구해보고 싶어지네요. "경이로운 책이다...이집트의 곱틱어를 완벽하게 살려놓은 희대의 명저이다...이사전이 있었기에..나그함마디의 방대한 문헌이 해독될수있었고,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밝혀질수있었고" 라는 식이니..^^

anathema 2008-07-03 11:09   좋아요 0 | URL
김용옥이 칭찬한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은 신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학문적으로 가치 없는 책입니다(도올처럼 이 분야에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책으로 보이겠지만). 그 책은 사도적 기독교에 적대적인 비그리스도인이 쓴 안티 기독교 책에 불과합니다. 크로산이 속한 예수 세미나의 작업은 그들의 주장처럼 진리를 위한 고귀하고도 중립적인 추구가 전혀 아닙니다. 진리가 인도하는 대로 나아가는 중립적 학자들의 결과물이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예수 상을 미리 설정한 후 그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중립적이 아닙니다. 이미 '신학적 헌신'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루크 티모디 존슨(Luke Timothy Johnson)의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 역사적 예수에 대한 잘못된 탐구와 복음서 전승의 진리] (CLC, 2003)를 읽어보시길.

로쟈 2007-02-26 10:02   좋아요 0 | URL
어떤 책에 대한 입장이 동일할 수는 없겠죠. 한데, '학문적으로 가치 없는 책'들을 세 권이나 옮긴 '한국기독교연구소'는 어떤 곳인지 궁금하네요. CLC와는 종파가 다른 곳인가요?..

anathema 2007-02-26 13:07   좋아요 0 | URL
"어떤 책에 대한 입장이 동일할 수는 없겠죠"라고 쓰셨는데, 제 말은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분야에 무지하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 대한 입장은 오직 한가지만 옳은 것입니다. 이 책을 칭찬한다는 것은 크로산의 속임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만 이 책이 뛰어나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세미나는 '학자'라는 신뢰도 높은 브랜드를 달고, 학문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은 주장을 펼치는 안티 기독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연구소는 예수 세미나에 찬사를 바치는 비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제가 소개한 Luke Timothy Johnson의 책이 CLC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 뿐이지,제가 CLC에서 발행한 모든 책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쟈 2007-02-26 15:50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한국기독교연구소'나 '예수 세미나'에 대해서도 알게 됐네요('예수 세미나'가 고유명사라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분야에 관심이 없었던지라(기독교/안티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역사적 예수론'이 신학계나 교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신'학'을 표방한 주장이라면 논리적인 근거의 제시와 그에 대한 논박 등을 통해서 해결/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적어도 그것이 '신앙의 충돌'이 아니라면). 말씀대로라면 '황우석 사기극'에 버금가는 '크로산 사기극'이란 것인데 그런 경우에도 제 관심은 어느 것이 '지금으로서 알 수 있는 최선의 것'인가에 놓여 있습니다. '오직 한가지만 옳은 것'은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겠지요...

anathema 2007-02-27 09:07   좋아요 0 | URL
"논리적인 근거의 제시와 그에 대한 논박 등을 통해서 해결/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라고 쓰셨는데, 제가 소개한 Luke Timothy Johnson의 책이 예수세미나의 주장을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반박한 책입니다(제가 4월 초에 이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로쟈 2007-02-27 09:54   좋아요 0 | URL
강의의 요지를 나중에 정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반조 2007-03-18 00:57   좋아요 0 | URL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역사적 예수론은 다비트 슈트라우스David Strauss의 "예수의 생애"가 출발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1권이 그와 연관되어 있지요. 물론 니체의 논쟁은 역사적 예수론과는 무관한 것도 아실테고요.) 쉽게 말해서, 역사적 예수론은 성서에서 신화적 요소를 벗겨내고 또 제자들(특히 바울)이 덧칠한 가르침을 벗겨내는 작업을 통해서 실제의 예수상, 소위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니체의 "안티크리스트"가 이 역사적 예수론과 어느 정도 맥락이 닿아 있다고 봅니다.

예수교장로회(예장측)와 기독교장로회(기장측)의 대립을 이해하면 한국개신교 종파간 견해차가 쉽게 이해됩니다. 그들은 원래 하나였는데(장로교!) 김재준박사의 "성서에도 오류가 있다"는 주장과 함께 갈라지기 시작했죠. 성서오류설은 기장측의 입장으로 한신대로 이어졌고요, 성서무오류설은 예장측의 입장으로 장신대, 총신대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짐작하시겠지만, '한국기독교연구소'는 기장측 연구소이고 CLC는 예장측 논지의 출판사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예장측의 학문적 수준은 거론하기 창피한 수준이라고 봅니다. (한기총을 보시면 됩니다.) 이들은 성서의 축자적 영감설을 신봉하는 이들인만큼 "역사적 예수론"을 절대 받아들일 수도 없고 하등의 고민거리도 아니지요. 그래서 도올의 "우리나라 신학계는 불트만을 이해하지도 않았고 수용하지도 않았고 토론하지도 않았다"는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기장측에서는 한동안 좌파적 신학이론에만 매몰되었고 예장측에서는 학문적 논의가 불가능한 수준이니 불트만은 수용이 될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론을 거친 이후의 성과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역사적 예수론 이후 타격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내면화시켜준 공로가 있으니까요.

anathema 2007-03-18 09:53   좋아요 0 | URL
한국기독교연구소가 "기장측 연구소"라구요? 설립자인 홍정수와 현 소장인 김준우 모두 감신 소속입니다. 홍정수는 감신대 교수였지요. 김준우도 감신대 겸임교수였고. 뭘 근거로 기장측 연구소라고 한 건가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님과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군요.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해 님의 학문적 수준이 어느 정도이기에 예장측의 학문적 수준 전부를 깔보는지 말입니다(그리고 한기총은 예장의 학문적 신학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오버하지 마시길).

로쟈 2007-03-18 23:52   좋아요 0 | URL
返照님/ 예장/기장 얘기는 오래전 연대 신학과에 다니던 선배가 좀 해주더군요(그 선배는 지금 한의사를 하고 있지만.^^) 지적하신 대로, 국내 신'학' 연구가 불비하다면 이 참에 자극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anathema님/ 저에게 다신 댓글은 아니지만 '내부'의 다른 목소리인지라 흥미롭네요. '예장의 학문적 신학'을 대표할 만한 업적들에 대해서도 이번 기회에 널리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반조 2007-03-18 13:01   좋아요 0 | URL
anathema 님, 제가 잠시 착각했군요. 한국신학연구소하고 헷갈렸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님의 학문적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의견을 철회할 생각은 없고요. 그저 제 의견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로쟈 님께 가볍게 한 이야기로 넘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저같은 천학비재하고 논쟁하는 것은 저에게나 님에게가 도움이 될 게 없을 듯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에 관한 자료를 옮겨놓는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공동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낭시는 흔히 '데리다 사단'으로 분류되는 철학자인데, 데리다 스스로가 이 '제자'에게 상대한 두께의 저작을 헌정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국내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는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에 낭시의 공동체론이 들어가 있고,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는 낭시 등이 편집한 책이다(참고로, 그의 저서가 일본어로는 10권 이상이 번역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간지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세계 지식인 지도>(산처럼, 2002)에서 대략적인 소개를 읽어볼 수 있다.

 

 

 

 

난데없는 낭시 타령인가 싶지만, 러시아 학자와 낭시와의 대담 하나를 번역하게 될지 몰라서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영역본으로는 가장 최신간인 <다양한 예술: 뮤즈들2(Multiple Arts: The Muses II)>(스탠포드대학출판부, 2006)를 대출했다. <뮤즈들>에 이어서 자투리글들을 모은 낭시의 예술론집인데(불어 원서가 있는 건 아니고 영역본의 편자가 낭시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표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게레로의 작품이라고만 나온다)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 두 책을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이 페이퍼는 '세계의 책'으로 분류된다. 아직 주저들이 번역/소개되지 않은 철학자이지만(나는 네댓 권의 영역본과 연구서를 갖고 있다) 불시에 또 소개될지 누가 알겠는가.

달랑 이런 내용만 띄워놓기는 멋쩍으니까 참고자료도 하나 덧붙여둔다. 앞서 언급한 블랑쇼의 책을 번역한 박준상씨가 2003년 6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게재한 소개의 글이다.

장-뤽 낭시와 공유·소통에 대한 물음

박준상 (연세대 철학과 강사)

1. 공유 내의 존재 etre-en-commun
여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뤽 낭시Jean-Luc Nancy(1940- )에 대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의 특성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을 밝혀봄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낭시의 사유의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놓여 있으며, 그의 사상은 시종일관 정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많은 다른 정치사상가들의 경우에 그러하듯, 낭시는 물론 정치적 사건들(동구권의 해체, 걸프전), 정치적 변화들(세계화, 서양중심주의의 한계), 정체政體들·이데올로기들(민주주의, 공산주의, 나치주의)에 대해 구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분석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일 뿐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이어질 뿐이며, 모든 경제·문화·사회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설명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원리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낭시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또는 조건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치적인 것이란 이미 공동존재(함께 있음, etre-avec)에, 인간들 사이의 소통에 기입되어 있으며, 어떤 '우리'의 존재의 수행(실현, 표현)이다. '우리'의 존재, 다시 말해 '나'의 존재도 타자의 존재도 아닌, 모든 단일성, 동일성(정체성), 내재성 바깥의 존재, 고정된 개체의 속성에 따라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나'와 타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 내의 존재, 관계에만 정초될 수 있는 존재.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귀결되는 자기의식의 반대편에 놓이는 존재, 또한 어떤 주제theme에 고정되어 동일화된, '내'가 구성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 정치적인 것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수행이란 '우리'의 서로에게로 향함·나타남, 관계 내의 서로를 향한 실존들의 만남, 접촉touche이다. ('접촉'은 낭시의 용어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람은 그의 동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낭시에 바쳐진 저서, <접촉, 장-뤽 낭시> 참조,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ee, 2000.)



낭시는 보이지 않는 관계('나'와 타인은 보이지만 그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를 조명하며, 거기에 그의 사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나'와 타인―또는 타인들―의 관계를 정치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거나 과장이 아닌가? 분명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 그 자체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공유 내의 존재는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종류의 만남의 근거에 있는 나눔partage, 어떤 '무엇'을 나눔이 아닌,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나눔의 양태, 나눔의 전근원적 양태를 지정한다. 공유 내의 존재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소통과 공동체 구성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결정·행동에 있어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유 내의 존재는 '정치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정치의 근원이다.

아마 낭시는 공유 내의 존재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된 적이 없이 망각 가운데 묻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까지 나눔과 공동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 '무엇'을 나눔과 '무엇'에 기초한, '무엇'을 위한 공동체만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의 '무엇', 즉 재산의 공유共有였다.

나치는 열광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은 공동의 이념적 '무엇'(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 국적,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 말하자면 보이는, 쥘 수 있는―전유專有할 수 있는―동일성의 지배, 공유 내의 존재의 망각. 그 '무엇'에 따라 전개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목적일 수 없는, 실존의 나눔의 망각, 함께 있음 자체의 망각.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와 소유라는 관심에 사로잡혀 존재망각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낭시는 우리가 보이는 '무엇'에 대한 공유 바깥의 나눔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기입되는 공유 내의 존재를 망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결국 낭시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물음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우리는 재산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재산을 나눈다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유 내의 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2. 유한성의 경험
공유 내의 존재,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적 어떤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外存ex-position,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 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 유한有限한 자들의 만남. 낭시는 현대철학에서 많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된 '유한성finitude'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상가이다.

인간의, 인간들의, '우리'의 유한성, 여기서 유한성은 첫째로 완전한 내재성內在性의 불가능성이다. 완벽히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수 있는, 그 스스로에 정초된―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로 향함, 그에게 노출되어 있음, 그를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그것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sens에 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성 가운데에서의 존재란 먼저 외존 가운데에서, 관계 내에서의 존재, 폐쇄성과 내재성 바깥의 존재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유한성은 만남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접촉은 불규칙적, 단속적 시간에, 즉 시간성 내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을 통해 확인하고, 표상할 수 있는 '무엇'에 정초되어 있지 않고, '무엇' 바깥의 타인의 나타남에 응답하는 순간의 정념情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접촉, '무엇'에 의하지 않는, '무엇' 때문이 아닌 급진적인 만남, 그것에 정념만이, 극단의 단수성(singularite, 타인의 나타남의 단수성)을 긍정하면서, 답할 수 있다. 정념, 만져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무엇'에 따라 고정될 수 없는 관계 자체에 대한 감지.

그러나 만남의 유한성은 인간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 지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한성은 관계를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즉 타인을 '나'에게 필요한 그 '무엇'의 요구에 따라 어떤 동일성 내에로 동일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 따라 그것은, 만일 '무엇'이 관계를 지배할 때, 그러한 지배(예를 들어 재산의 지배, 정치적 이념의 지배, 인종과 국적의 동일성의 지배―지금 이 땅의 경우 학벌과 지역적 동일성의 지배)에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유·목적도 없는 만남, 또는 그 자체가 이유와 목적인 만남, 즉 실존들의 접촉과 그 순수성을 정당화한다.

세 번째로 낭시가 말하는 유한성은, 그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계상황(죽음, 병, 고독)에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낭시에게 유한성은 공유 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접근이 '나'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존재양태, '그 누구Man'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반해 낭시는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본래적 실존에로 돌아가게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외존(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을 통한 급진적인 공유 내의 존재를 부르게 한다고 본다.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은 '나'와 자신의 본래적 관계의 회복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절대타자 앞에서 '나'의 동일성이, 그것이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07. 01. 13.

P.S. 한 분이 귀뜀해주신 바에 따르면 국내에도 개봉된 바 있는 영화 <텐 미니츠 첼로>(2002)에 낭시가 직접 출연했다. 열 명의 감독이 찍은 단편영화 열 편으로 구성돼 있는 <텐 미니츠 첼로>의 다섯번째 영화가 바로 클레르 드니 감독의 <낭시를 향해서(Vers Nancy)>이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10분간의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철학자 장 뤽 낭시와 그의 학생 중 한 사람인 안나가 기차여행을 하며 서로 나누는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낭시는 ‘침입자’라는 단어로 이민자들이나 타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인종융합에 관한 미국적 개념인 ‘도가니’가 차이를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며 더불어 이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길게 이어진 대화가 끝난 후 그들의 자리에 한 흑인이 들어와 조용히 묻는다. “언제 도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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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13 17:38   좋아요 0 | URL
세계 지식인 지도 저런것도 있었나요. 당장에 보관함 넣습니다. 김상환 교수가 엮은거네요?

로쟈 2007-01-13 17:41   좋아요 0 | URL
중앙일보엔가 연재됐던 글들입니다...

토마스 2007-01-14 22:40   좋아요 0 | URL
장-뤽 낭시가 등장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옴니버스 영화 <텐 미니츠 첼로> 중 클레어 드니가 연출한 <낭시를 향해서>에 등장합니다. 기차 안에서 주인공은 장-뤽 낭시와 그의 철학적 개념인 환대, 타자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제목이 꽤 의미심장하지요. 낭시는 레비나스와 데리다 이후 환대, 타자에 관한 성찰을 친절하게 영화에서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감독들이 가끔 영화를 통해 사상을 전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요.

로쟈 2007-01-14 22:32   좋아요 0 | URL
요긴한 정보군요.^^ 눈에 띄면 구해봐야겠습니다...
 

방학중인 아이에게 과제도서를 읽히기 위해서 동네도서관에 갔다가 문학잡지들을 훑어보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짐작에 한국은 전세계에서 (전국단위) 문학잡지가 가장 많이 출간되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그 잡지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문인-필자들의 수에 있어서도 단연 세계 수위권이 아닐까 싶고. 역설적인 것은 그러한 양적인 팽창의 이면에서 문학/비평의 영향력을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행물 열람실에 스무 명 넘게 앉아들 있었지만 문학잡지를 기웃거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아이 때문에 오래 버티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고, 다만 겨울호 시잡지들에 지젝과 정신분석에 관련한 글들이 게재된 걸 보았다. 많이들 읽기는 하는가 보다.   

집에 돌아와 아이가 피아노학원에 간 틈에 나는 미루어두었던 책 주문을 넣었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거 같은데, 노튼(W. W. Norton)출판사에서 내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시리즈의 <라캉> 편이 이번 달에 출간됐다(작년에 나는 <데리다>를 구했었다). 저자는 슬라보예 지젝. 작년까지는 선주문을 넣을 수 있었을 뿐인데, 이젠 온전하게 주문을 넣을 수 있다. 아마존의 소개를 빌면 이렇다.

"The How to Read series provides a context and an explanation that will facilitate and enrich your understanding of texts vital to the canon. These books use excerpts from the major texts to explain essential topics, such as Jacques Lacan's core ideas about enjoyment, which re-created our concept of psychoanalysis."

그러니까 자크 라캉 입문서로서 더없이 유익하고 요긴해 보이는 책이다. 분량도 128쪽이니까 전혀 부담이 없다. 이 달안으로 책을 손에 쥘 수 있을까?  

참고로, 주문을 하진 않았지만 지젝이 편집하고 서문을 쓰는 버소출판사의 새 시리즈 '혁명(Revolution)'도 눈길을 끈다. 이달부터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마오쩌둥의 <모순론/실천론>과 로베스피에르의 <미덕과 테러>가 일착으로 나왔다. 마오쩌둥의 책은 우리의 경우 두레와 범우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는데 현재는 모두 품절됐다. 이 참에 이 새 시리즈를 번역해내는 건 어떨까?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함께 덩달아 주문한 책은 작년에 출간된 전기 <자크 데리다>이다. 컨티뉴엄(Continuum)출판사에 나왔고, 분량은 250쪽. 내가 알기엔 최초의 전기이며 평도 나쁘지 않다. 한데, 작년에 왜 주문하지 않았을까? 짐작에는 내가 검색해볼 당시에 아직 미간이었던 듯하다. 혹은 예정보다 출간이 늦어졌든가. 아마존의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At the time of his death in 2004, Jacques Derrida was arguably the most influential and the most controversial thinker in contemporary philosophy. Deconstruction, the movement that he founded, has received as much criticism as admiration and provoked one of the most contentious philosophical debates of the twentieth century. Jacques Derrida: A Biography offers for the first time a complete biographical overview of this important philosopher, drawing on Derrida's own accounts of his life as well as the narratives of friends and colleagues. Powell explores Derrida's early life in Algeria, his higher education in Paris and his development as a thinker. Jacques Derrida: A Biography provides an essential and engaging account of this major philosopher's remarkable life and work."(강조는 나의 것)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shkin

지젝과 데리다 관련서와 함께 전공 관련서들도 두어 권 주문했는데, 가장 반가웠던 책은 캠브리지대학의 컴패니언 시리즈로 나온 <푸슈킨>. 이 또한 이달에 첫선을 보인 책이다. 한 인터넷서점의 소개는 이렇다.

Alexander Pushkin stands in a unique position as the founding father of modern Russian literature. In this Companion, leading scholars discuss Pushkin’s work in its political, literary, social and intellectual contexts. In the first part of the book, individual chapters analyse his poetry, his theatrical works, his narrative poetry and historical writings. The second section explains and samples Pushkin’s impact on broader Russian culture by looking at his enduring legacy in music and film from his own day to the present. Special attention is given to the reinvention of Pushkin as a cultural icon during the Soviet period. No other volume available brings together such a range of material and such comprehensive coverage of all Pushkin’s major and minor writings. The contributions represent state-of-the-art scholarship that is innovative and accessible, and are complemented by a chronology and a guide to further reading.

편자는 앤드류 칸이라는 비교적 젊은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옥스포드대학의 조교수이다. 책은 그다지 두껍지 않지만, 아래의 목차를 보면 (적어도 러시아문학 전공자라면) 가벼운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List of illustrations Page.ix
  List of contributors viii
  Acknowledgements ix
  Note on the text x
  Chronology xi
  Map xv
 
  Introduction 1
  Andrew Kahn
 
  part I Texts and Contexts
1   Pushkin’s life 11
  DAVID BETHEA AND SERGEI DAVYDOV
 
2   Pushkin’s lyric identities 26
  ANDREW KAHN
 
3   Evgenii Onegin 41
  MARCUS LEVITT

 

 

4   Pushkin’s drama 57
  CARYL EMERSON
 
5   Pushkin’s long poems and the epic impulse 75
  MICHAEL WACHTEL

 

 

6   Prose fiction 90
  IRINA REYFMAN
 
7   Pushkin and politics 105
  OLEG PROSKURIN
 
8   Pushkin and history 118
  SIMON DIXON

 

 

9   Pushkin and the art of the letter 130
  MIKHAIL GRONAS
 
10   Pushkin and literary criticism 143
  WILLIAM MILLS TODD III
 

 

part II The Pushkinian tradition

 
11   Pushkin in music 159
  BORIS GASPAROV

 

 

12   Pushkin and Russia Abroad 174
 
  ROBERT P. HUGHES

 

 

13   Pushkin filmed: life stories, literary works and variations on the myth 188
  STEPHANIE SANDLER
 
14   Pushkin in Soviet and post-Soviet culture 202
  EVGENY DOBRENKO
 
  Appendix on verse-forms 221
  Guide to further reading 224
  Index 228

아무튼 조만간 몇 권의 책들이 장서 목록에 오르게 되겠다. 애서가들에게 새해를 맞는 '보람'은 다른 데 있지 않다...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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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05 11:15   좋아요 0 | URL
저로선 좋은 번역서를 기다려봐야겠네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이나 '라캉'이라면 곧 나올수도 있겠지만.. 좋은 번역서를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