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돌린(1949- )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1. Романтики и символисты

420쪽

Впервые в западном японоведении вниманию читателей предлагается полная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хватывающая более чем столетний период с конца XIX по конец XX века. Увлекательные биографические описания сочетаются с поэтологическим анализом разнообразных жанров и форм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с летальной классификацией важнейших школ и направлений - от шедевров танка, хайку и киндайси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 до смелых экспериментов современного неоавангарда гэндайси.
Итоговая работа известного литературоведа, культуролога, писателя, переводчика классической и современн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Александра Долина представляет собой уникальное крупномасштабное, глубоко фундированное историко-литературное исследование.

В первом томе на обширном материале статей, манифестов, эссе и многочисленных поэтических сборников раскрываются особенности уникальной литературной традиции синтайси и киндайси, синтезировавшей лучшие достижения эстетики Востока и Запада в шедеврах стиха "новой формы". Поэзия романтизма и символизма периода Мэйдзи- Тайсе (конец XIX - первая четверть XX веков), положившая начало блестящей эпохе японского Серебряного века, предопределила пути развития нового стиха и дала миру таких талантливейших поэтов, как Симадзаки Тосон, Китахара Хакусю, Мики Рофу, Хоригути Даигаку.

Издание рассчитано на ученых-филологов и историков, студентов и аспирантов, а также па широкие круги читателей, интересующихся японской поэзией.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2. Революция поэтики

324쪽

Во втором томе рассматриваются важнейшие этапы эволюции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первых десятилетий XX века: развитие школы натурализма, народно-демократической школы, зарождение пролетарской поэзии и поэзии революционного анархизма, становление авангардистских течений и школ. Большое внимание уделяется анализу теоретических работ лидеров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пределивших сущность "духовной революции" и восточно-западный синтез культур. Тщательно выписаны литературные портреты крупнейших поэтов-гуманистов и модернистов XX века Миядзава Кэндзи, Такамура Котаро, Хагивара Сакутаро, Муроо Сайсэй, Нисиваки Дзюндзабуро.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3. Грани модернизма

292쪽

В третьем томе рассматривается процесс развития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от космополитических эстетских течений предвоенного периода до гуманистического ренессанса послевоенных лет и далее, вплоть до конца XX в. Наряду с творчеством таких прославленных мастеров, как Канэко Мицухару, Кусано Симпэй, Миеси Тацудзи, Таникава Сюнтаро, автор анализирует широкий спектр школ и направлений современного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 от сурового реализма "поэзии Хиросимы" до эпатажных экспериментов постмодернистов.

 

История новой японской поэзии. В 4 томах. Том 4. Танка и хайку

428쪽

В четвертом томе на материале, литературного наследия многих десятков мастеров танка и хайку воссоздаются основные этапы развития японского стиха традиционалистского направления с конца XIX века до наших дней. Описанию современных школ и течений в обеих частях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дшествуют очерки истории поэзии классических жанров в Средние века, вводящие читателя в мир традиционной эстетики и поэтики. Литературные портреты Есано Акико и Сайто Мокити, Вакаяма Бокусуй и Маэда Югурэ, Кимата Осаму и Тавара Мати, Масаока Сики и Такахама Кеси, Одзаки Хосай и Танэда Сантока, Мидзухара Сюоси и Исида Хаке создают колоритную картину мира танка и хайку Нового времени, до недавних пор почти не знакомого западному читателю, но привлекающего миллионы японских любителей поэз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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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10 10:01   좋아요 0 | URL
Описанию современных школ и течений в обеих частях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едшествуют очерки истории поэзии классических жанров в Средние века, вводящие читателя в мир традиционной эстетики и поэтики

이 부분이 참 감동적이네요. ㅋ

로쟈 2007-04-10 23:51   좋아요 0 | URL
러시아어를 아시는군요!^^ 오존에서 온 신간안내 메일에 들어 있어서 알게 된 책인데, 일단 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경삼아 올려놓은 것이고 정리는 시간이 날 때 할 예정입니다...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계 작가 블라디미르 나코보프의 저명한 인시류(나비/나방류) 전문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롤리타>를 제외하면 변변한 번역 작품이나 무게 있는 연구서를 접할 수 없는 게 국내의 현실인데, 이 인시류 학자 나보코프의 전모를 다룬 중량감 있는 저서가 번역/출간됐다.

구내서점에 갔다가 냉큼 사들고 온 책의 타이틀이 바로 <나보코프 블루스>(해나무, 2007)이고, '한 천재 문학가의 과학 오디세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인시류 학자인 커트 존슨과 <뉴욕타임즈> 편집자인 스티브 코츠. 그리고 제목의 '블루'는 "남아메리카의 가장 외진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나비 무리를 아우르는 명칭"으로서 나보코프는 ‘블루’ 전문가였다고 한다. 언젠가 나보코프 관련서들을 검색하다가 보아둔 책이었는데, 이렇듯 빨리 국내에 소개될 줄은 몰랐다(원저는 1999년에 나왔다).

인시류학자로서 나보코프의 전문성은 1945년 하버드대 비교동물학 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위촉되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되는데, 그는 블루의 분류체계에 관한 여러 새로운 논문을 발표한 바도 있으니 나비 수집과 연구가 취미 수준은 넘어선 것이었다. 

책은 "만약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나비 연구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고백한 나보코프의 나비에 대한 특별한 열정을 다루고 있는데,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생전에 쓴 추천사에 따르면, "두 저자 존슨콰 코츠의 생물학적 전문성과 나보코프의 업적에 대한 철저한 이해 덕분에 우리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문학자이자 과학자가 지니는 두 가지 표상을 통합하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뒷표지에 나란히 달려 있는 또다른 추천사에 따르면 "한 전설적인 작가의 과학적 발견과 그것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과정,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의 재발견과 확장을 다루고 있는 <나보코프 블루스>는 한마디로 놀라운 책이다. 과학적 발견의 아이러니와 우연, 빠르게 확장되어가는 생물다양성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어 누구에게라도 매력 있게 다가갈 것이다."

이 추천사의 필자가 저명한 나보코프 연구자이자 가장 권위있는 평전의 저자 브라이언 보이드이다. 그가 쓴 전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시절'과 '미국 시절' 두 권으로 돼 있는데, 이미 독어와 러시아어 등으도 완역되었다(아래 이미지는 러시아어본 <미국 시절>과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

나보코프에 대한 전기가 소개된다면,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과 함께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책이다...

07. 03. 19.

P.S. 참고로, 나보코프의 나비 연구에 관한 책은 <나보코프 블루스>가 처음이 아니다. <나보코프의 인시류: 유형과 종류>(서울기획, 2001)란 책이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Joann Karges이고 지난 1985년에 출간된 아주 얇은 책으로 <나보코프 블루스>의 참고문헌에도 포함돼 있다. 국역본은 오래전에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복사해둔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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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7-03-19 17:41   좋아요 0 | URL
Ada or Ador: Family Chronicle인가 하는 책에서....(배다른 오누이의 사랑...성...을 다룬 파격적 소설..)..나비나 곤충 관찰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등장했던걸로 기억해요...주인공인 Ada가 소녀시절 곤충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던...기억이...
나보코프...참으로 독특한 천재지요....

로쟈 2007-03-19 19:58   좋아요 0 | URL
나보코프 애독자시네요.^^ 다른 작품에서도 나비 모티브가 자주 나오는데, 나보코프는 국내에 소개된 작품 수가 너무 적어서 아쉽습니다...

수유 2007-03-19 20:39   좋아요 0 | URL
저도 냉큼 사왔습니다..그리고 링크하실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젊은 나보코프와 늙은 나보코프는 많이 다르군요..그의 인생여정과 관련이 있겠지요..
 

어제 산 한국일보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오늘 아침에야 읽었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기사를 아이템 삼아서 페이퍼를 올린다고 해놓고 시간을 못 내다가 겨우 몇 자 적는다(아마도 마무리까지는 며칠 걸릴 것이다). 몰랐던 사실이지만 남미문학의 두 거장 마르케스와 바르가스 요사가 30년간 서로 앙숙관계였다고 한다. 최근에 이 두 사람이 화해에 이를 것 같다는 것인데, 그런 관계의 빌미가 되었던 30년전 사건(사진)과 그 사연이 기사의 내용이다. 이 '멍든 눈의 끔찍한 사연'은 책으로 출간됐다고 하는데, 국내에도 소개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일단은 '세계의 책'에 올려놓는다.     

 

한국일보(07. 03. 14) 마르케스와 요사 '30년 동안의 불화' 이제 끝?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80ㆍ왼쪽 사진)와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이름이 오르내리는 <세상종말전쟁>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2ㆍ오른쪽)의 공통점은?

‘남미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현대문학의 거장들’이 ‘알려진’ 답안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정답이 또 있다. ‘30년간 말도 안 한 원수관계’다. 마르케스의 80회 생일을 맞아 절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이 등을 돌리게 된 원인을 짐작케 하는 사진들이 최근 공개됐다.



13일 영국 더 타임스에 따르면 멕시코 신문 라 호르나다는 마르케스의 친구 로드리고 마요가 1976년 찍은 두 장의 흑백사진을 최근 공개했는데, 바로 왼쪽 눈 아래 시퍼런 멍이 들고 콧잔등에 상처가 난 젊은 마르케스의 모습이다. 현대문학의 가장 유명한 견원지간의 기원을 밝혀줄 이 사진들의 배후에는 여자문제가 얽혀 있다. 사건은 영화 시사회를 보기 위해 수많은 남미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모였던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롬비아 출신 마르케스와 페루 출신 바르가스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살면서 부부끼리도 돈독한 우정을 다졌다. 영화 상영 후 마르케스는 오랜만에 만난 요사가 반가워 반갑게 그를 껴안았지만, 요사는 “바르셀로나에서 내 아내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어떻게 감히 나한테 와서 인사를 할 수 있지?”라며 수차례 마르케스의 얼굴을 휘갈겼다.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마르케스는 코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틀 후 마요는 마르케스의 시퍼런 눈을 사진으로 찍었다.



절친한 친구사이가 주먹질 하는 관계로 전락한 사연은 이렇다. 두 부부가 바르셀로나에 살 당시 요사는 스웨덴 미녀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났던 ‘전과’가 있었는데, 그때 요사의 부인에게 위안이 돼 줬던 마르케스 부부가 그녀에게 요사와 이혼하라는 충고를 해줬다는 것이다. 후에 요사는 부인과 화해했고, 그녀가 요사에게 전말을 얘기하면서 그것이 느닷없는 폭력사태의 원인이 됐다는 게 추론이다. 요사의 분노 뒤에는 이혼 권유 이상의 중요한 배신 행위가 있었으리라는 해석도 있다.

30년간 비밀스럽게 간직됐던 사진들이 6일로 80회를 맞은 마르케스의 생일을 기념해 <멍든 눈의 끔찍한 사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면서 마르케스와 요사의 ‘30년간의 고독’에도 해빙무드가 감돈다. 요사가 마르케스의 고전 <백년동안의 고독>의 초판 발행 40주년을 기념해 서문을 써주기로 한 것.

그날의 앙금 이후 마르케스는 쿠바 지도자 페델 카스트로와 긴밀한 우정을 키워가면서 좌파 작가의 길을 걸었고, 요사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숭배자가 돼 우파 후보로 페루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30년간 다른 길을 걸으며 반목한 두 문학 거장이 주는 교훈. “남의 부부싸움에는 절대로 참견하지 말라.”(박선영 기자)

P.S. 예시된 문학적 앙숙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나보코프와 에드먼드 윌슨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만 해도 400쪽짜리 책 'Dear Bunny, Dear Volodya: The Nabokov-Wilson Letters, 1940-1971'(증보판 2001)이 나와 있을 정도로 돈독한 우정을 자랑했던 이들인데, '푸슈킨에 대한 번역 차이'로 결별했다는 건 의외이다(<예브게니 오네긴> 번역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시간이 나면 자료조사를 해봐야겠다).

윌슨의 책은 <악셀의 성>이나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원제는 <핀란드역까지>)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그의 책이 <핀란드역으로>(이매진, 2007)란 타이틀로 새로 번역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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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세상을 떠난 여파도 있고 해서 보드리야르의 책들을 좀 뒤적거렸다. 그가 쓴 푸코론의 제목을 비틀어서 '보드리야르 잊어버리기'란 제목의 페이퍼도 써볼까 하면서. 한데 뒤적거리다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잊을 만큼 남아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알라딘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은 <시뮬라시옹>이고 <소비의 사회>가 그 뒤를 잇는다. 내가 조금 훑어본 책들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건축과 철학>과 <암호>이고 아침엔 <시뮬라시옹>의 몇 페이지를 읽어봤다. 재작년 국내에서 개최된 보드리야르의 사진전 제목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는데, 과연 보드리야르는 우리 곁에 '존재했던'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간에 우리가 보고 읽었던 건 '보드리야르'라는 가상, 시뮬라크르가 아니었던 것인지. 관련기사들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해본다. 기사는 재작년 전시회와 최근의 부음에 관한 것이다.  

한겨레(05. 06. 30)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 사진전

사진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디지털 기법의 보급으로 현대 사진은 찍는 각도는 물론 콘텐츠까지 조작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진이 매체에 나오면 그 이미지를 진짜로 지레 단정해 버리기 일쑤다. 복제된 현실이 일상을 지배한다는 시물라크르 이론으로 세계적 철학자의 반열에 오른 프랑스의 장 보드리야르가 20여년간 사진을 찍은 건 이런 역설적 현실을 비틀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그는 “사진은 왜곡을 밥 먹듯 하는 매체다, 따라서 사진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보드리야르 사진전은 가상현실의 문제점을 줄기차게 지적해온 이 철학자와 관객이 사진을 두고 벌이는 지적 게임장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컴퓨터 디지털 프린팅으로 인화한 사진들은 지나치는 주변의 일상 풍경을 슬쩍 찍은 것들인데, 통상적인 사진찍기의 어법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순수한 이미지 채집가를 자처하며 찍은 이들 사진은 미국, 유럽, 남미 등 대도시의 폐허같은 뒷골목, 삭아가는 건물, 구조물의 단면을 찍은 것들이 상당수다. 뉴욕 뒷골목 붉은 빛 벽돌건물의 격자 구조, 포르투갈 바닷가 포구의 바닥돌, 바닷물에 잠기는 방파제의 일부분, 물잔에 거꾸로 투사되어 한 풍경으로 담긴 파리 바스티유 광장 등의 작품들은 노출시점, 촬영각도에 구애받지 않고 찍은 것들이다. 상파울로에서는 합성수지 차단벽의 울퉁불퉁한 곡면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컴컴한 뒷골목을 찍었고, 성당 의자바닥에 은은하게 비치는 황금빛 햇살을 잡아내기도 한다. 어떤 의미도 두지 않고 자신을 유혹하는 순수한 이미지 자체를 찍은 것들이라고 미술관쪽은 설명한다.

하지만 익숙한 듯 낯선 사진들이 작가의 희망처럼 단순히 보고 즐기는 차원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전시의 묘미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흔히 보는 시선과 다른 독특한 지점에서 스냅사진 찍듯 대상물을 찍는다. 물속에 가라앉은 차에서 수면 위로 삐죽 튀어나온 차 문틀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은 불가사의한 일상의 한순간을 보여준다.

그의 이미지 장난은 3층 들머리에 있는 ‘조각 같은 사람’이란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진흙을 온통 덮어쓰고 몸에 청색 진액을 칠한 알몸 여자의 모습은 연출사진 같지만 알고 보면 길거리를 가다 개그맨의 퍼포먼스를 그냥 찍은 데 불과하다. 그는 사진의 고정관념 즉 정확한 기록 재현이라는 의미를 의식하는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는 작업들을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앵글을 보는 그의 시선 속에 끼여든 욕망은 과연 실체가 없는 것일까. 전시장 해설사들은 생각 없이 보라고 강변하지만 전시장 벽에 붙은, 이미지의 순수성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선문답같은 어록을 보면서 관객은 더욱 의미를 따지게 된다. 사진은 아무것도 아니니 아무 생각 없이 보라는 작가와 그의 철학적 행보 때문에 더욱 의미에 고심하는 관객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간극이야말로 이 전시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노형석 기자) 

'공석중인' 보드리야르의 사진을 몇 작품 감상했다면(보다 자세한 소개는 오마이뉴스의 기사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58556를 참조) 이제 얼마간은 좀 본격적으로 그에 관한 수다를 늘어놓아야겠다. 일단 내가 참조한 건 프레시안의 최연구 기획위원이 쓴 기사 "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이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70308092524&s_menu=문화). 두 문단을 건너뛰고 읽어본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현대 프랑스 철학을 풍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지난 3월 6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자크 라캉(81년 사망), 질 들뢰즈(95년 사망), 자크 데리다(2004년 사망)에 이어 현대 프랑스 철학의 또 하나의 큰 별이 진 것이다. 프랑스 최고권위의 일간지 르 몽드와 지식인들이 즐겨보는 리베라시옹은 3월 7일자 1면 톱기사로 보드리야르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프랑스 사회에서 보드리야르의 비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섹스, 언어, 기호, 상품, 전쟁 등 그 어떤 것도 이 사회학자의 역설적인 분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 리베라시옹은 보드리야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1929년 7월 20일 랭스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독일어를 공부했고 브레히트나 맑스의 번역자이기도 했던 보드리야르는 1966년 파리 10대학 낭테르의 강단에 서면서 사회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러 학위들을 고려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65년 사회학만이 유일하게 개방적인 학문이었다."사회학을 선택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의 박사논문이자 첫 번째 저작인 <사물의 체계(1968)>와 1970년에 출간한 <소비의 사회>는 그를 일약 대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현대인의 일상을 소비라는 측면에서 해부한 보드리야르는 현대인들이 물건의 본연의 기능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세와 권위, 즉 기호를 소비한다고 주장해 큰 반향을 얻었다.

 

 

 

 

기억에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보드리야르의 책이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1992)이다. <사물의 체계>(백의, 1999)는 그보다 좀 나중에 소개됐는데, 이 두 권의 초기저작이 '사회학자'로서 보드리야르의 기여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자신의 저작들에 입문하기 위한 '키워드'로서의 암호들을 제시해주고 있는 근작 <암호>(동문선, 2006)에서도 가장 먼저 나오는 '암호'(패스워드)는 바로 '사물(The Object)'이다.

유감스럽게도 "보드리야르에 관한 책 10여 권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는 보드리야르 연구가"는 '대상'이라고 옮겼지만(그렇게 옮기려고 했다면 보드리야르의 데뷔작도 역자는 <사물의 체계>가 아닌 <대상의 체계>라고 옮겼어야 했다). 이미지는 <사물의 체계> 영역본의 표지(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이기도 한데, 최근엔 Verso에서 다른 표지로 재출간됐다). 그리고 옆은 <암호>의 영역본.

가령, 국역본 <암호>에서 '대상'이란 항목은 이렇게 기술된다: "나의 관점에서 대상은 전형적인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나는 이러한 관점을 택했다. 왜냐하면 나는 주체의 문제와 결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상의 문제는 대상의 해결책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나의 사고방식으로 남아 있다."(13쪽)

'사물'을 '대상'으로 옮긴 것도 불만스럽지만(물론 'object'는 그렇게 옮겨질 수도 있다. 다만 문맥상 '사물'이 보다 적합한 번역이라는 것이다) '대상의 문제는 대상의 해결책을 의미'한다는 건 또 무슨 뜻일까? 역시나 보드리야르식의 난해한 문장일까? 영역본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이 영역본은 국역본이 나왔을 때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던 것이다). "For me, object will have been the 'password' par excellence. I chose that angle from the beginning, because I wanted to break with the problematic of the subject. The question of the  object represented the alternative to that problematic, and it has remained the horizon of my thinking."

보드리야르를 이해하는 '첩경'과도 같은 대목인데, 다시 옮기면 "나에게 사물은 암호 중의 암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러한 관점을 취했는데, 왜냐하면 주체라는 문제틀과 단절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문제는 그 문제틀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대표했으며, 지금까지도 나의 사유의 지평으로 남아있다." 물론 여기서 '그 문제틀'이란 '주체라는 문제틀'을 가리키며, '주체'로부터의 탈피를 기획했던 보드리야르에게 '사물들'의 세계와 그 체계는 처음부터 핵심적인 관심사였다는 것.

보드리야르가 이어서 말하는 것은 자신의 그러한 관심/선택을 낳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다. "말하자면 1960년대에 생산의 우위에서 소비의 우위로의 이행은 대상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자체 속에서 만들어진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이 서로에게 말했던 것, 즉 대상들이 만들어냈던 기호체계와 통사론이다. 그리고 특히 대상들이 현실세계를 참조하게 했다는 사실보다는 소비와 이익의 명백한 힘이 현실 세계를 믿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13-4쪽)

말하자면 1960년대를 기점으로 생산 패러다임에서 소비 패러다임으로 이행해가면서 '사물'이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 더불어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자본의 정치경제학' 대신에 '기호의 정치경제학'이 문제되기 시작한다. 영역본에 근거해서 다시 옮기면: "1960년대, 생산 우위로부터 소비 우위로의 이행은 사물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하지만 정말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공장제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 즉 기호들의 체계와 그것들이 발전시킨 통사론이었다. 특히나 사물들이 실제의 현실을 지시하는 것보다 확연한 것이 소비의 전능성과 우리를 현혹시키는 이익이라는 사실에 끌렸다." 이제 이 '사물들'은 사용가치의 세계에서 기호적 가치의 세계로 넘어갈 것이었다.   

 

 

 

 

"이 기호학적 형식화의 이면에는 확실히 사르트르의 <구토>와 강박관념의 대상, 즉 해로운 실체인 많이 언급된 근원에 대한 무의지적 기억이 존재했다..."고 보드리야르는 고백하는데, 번역문은 아주 실망스럽다. 영역문 "Behind this semiological formalism there was no doubt a memory of Sartre's Nausea and that famous root which is an obsessive object, a poisonous substance..."으로 보아 '많이 언급된 근원'이라고 옮겨진 'that famous root'는 '그 유명한 마로니에나무 뿌리'이기 때문이다. "실존적 회의에 빠져 절망하던 어느 날 저녁, 로캉캥은 심한 구토감을 느끼고 공원으로 달려가 벤치에 앉는다. 벤치 옆에 서 있는 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사색에 잠기고 마침내 구토의 정체를 알게 된다."라고 할 때의 그 뿌리(보드리야르식 허무주의의 기원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불문학 전공자인 역자는 과연 <구토>를 읽어본 것일까?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는 이 얇은 책을 한 달간 읽게 된다. 한 대목만 더 인용한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대상들로 구성된 이 동물상과 식물상의 탐구이다. 이러한 탐구를 위하여나는 널리 퍼져 있었던 모든 학문들, 즉 바르트의 예를 따라 정신분석, 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특히 언어학적 분석을 이용했다."(15쪽)

보드리야르를 따라 읽기 위해서는 '당대의 모든 학문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걸 암시해주는 대목인데, 나는 번역문을 읽다가 구역질이 날 뻔했다. '대상들로 구성된 이 동물상과 식물상의 탐구'가 '사물들의 동물상과 식물상에 대한 탐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건 차치하고, '바르트의 예를 따라 정신분석'이란 건 대체 무엇인지? 영역은 이렇다: "I used all the disciplines current at the time: psychoanalysis, the Marxist analysis of production and, especially, following the example of Barthes, linguistic analysis."

 

 

 

 

보드리야르가 당시에 유행하던 학문으로 거명하고 있는 건 정신분석, 정치경제학적 분석(생산의 분석), 그리고 언어학적 분석이다. 물론 기호학자이자 문학이론가인 롤랑 바르트와 관계된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라 언어학적/기호학적 분석이다. 가령, 바르트의 입문서 <기호학 요강>이나 학위논문인 <모드의 체계>, 혹은 문화현상에 대한 실제적인 분석인 <현대의 신화> 등이 보드리야르에게 영향을 주었다. 어찌하여 '바르트의 예를 따라' 애매한 독자들까지 삼천포로 빠져야 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고작 해야 번역본의 세 페이지(영역본의 두 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역자가 보드리야르의 '암호들'을 우리에게 제대로 일러주고 있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보드리야르식 시뮬라시옹의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보드리야르'가 아닌 것인지... 다시 프레시안의 기사로 돌아간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1981)에서는 독창적인 분석을 통해 포스트모던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실재가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뮐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이 '시뮐라크르(Simulacre)'인데,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모사와 복제에 의한 가상실재, 즉 시뮐라크르의 미혹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복제의 시대라는 그의 독특한 분석과 이론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흐름을 이끌었고 미디어와 예술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일상생활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81)의 제자로 초기에는 맑시즘을 신봉했으나 1973년 <생산의 거울>이라는 책을 통해 맑시즘과 결별하고 구조주의와 기호학에 관심을 쏟았으며 그 뒤 줄곧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회이론을 전개해 왔다.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 <푸코 잊기>(1977), <침묵하는 다수의 그늘 아래서>(1978), <유혹에 대하여>(1979),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1981), <차가운 기억들 1,2,3>(1987~95), <아메리카>(1986), <악의 투명성>(1990), <완전범죄>(1994), <이타성의 형태들>(1994) 등 50편에 이르는 저작을 남겼고 그의 책의 한국에서도 20여 권이 번역되었다.

 

 

 

 

소위 주저라고 할 만한 보드리야르의 저작 중에서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책은 <상징적 교환과 죽음>으로 보인다. (푸코의 생전에 나왔지만 푸코로부터 아무런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푸코 잊기>는 <푸코를 잊어버리기>(<세계의문학>, 1989년 가을호)로 번역/소개된 바 있고, <유혹에 대하여>, <아메리카> 등은 번역돼 있다(하지만 읽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보드리야르는 러시아어로도 여러 권이 번역돼 있는데, <푸코 잊기>, <사물의 체계>,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상징적 교환과 죽음>, <악의 투명성>, <아메리카> 등을 나는 갖고 있다(인터넷에 온라인으로도 떠 있다). 아래는 작년에 출간된 러시아어판 <암호>(2006). 

Пароли. От фрагмента к фрагменту
  
그의 포스트모니즘은 1991년 걸프전 당시에도 지성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걸프전이 한창일 때 그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사일이 정확히 투하돼 목표물이 파괴되는 장면은 실제 아주 무섭고 비참한 것이지만 안방에서 TV를 보는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속 가상현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토모던 현실 속에서는 일상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모사된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구호는 보드리야르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는 똑같은 논리에서 "9.11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이미 <시뮬라시옹>에서는 "베트남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그런 진단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CNN이 아니라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이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 초판에서 이 영화를 다룬 글(영역으로는 두 쪽짜리의 짧은 글이다)은 어찌된 일인지 'Apocalypse now(세계의 종말 지금)'이란 표제를 갖고 있고 본문에서는 <아포칼립스 나우>라고 옮겨졌다.

아무래도 역자가 <지옥의 묵시록>은 본 적이 없을 뿐더러 국내에 개봉되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하다(개정판에서는 번역이 수정됐는지 모르겠다). 그런 심증은 영화에서의 '특수효과(special effects)'를 내내 '특이효과'라고 옮기는 데에서 더 굳어진다. 게다가 "코폴라는 헬리콥터 조종사들에게 경기병대의 모자를 씌워, 바그너의 힘찬 음악에 맞춰 베트남 촌을 뭉개버리도록 할 수 있다."(초판 114쪽)는 문장은 상식 이하이다.

불어본이라고 해서 단수를 복수('조종사들')로 적어놓았을 리는 없는데, 영역본을 옮기자면 "Coppola can certainly deck out his helicopter captain in a ridiculous hat of the light cavalry, and make him crush the Vietnam village to the sound of Wagner's music."(60쪽)이고, 작전중 철모 대신에 경기병 모자를 고집하는 이는 '조종사들'이 아니라 헬기 부대장인 로버트 듀발이다(그는 아침에 맡는 네이팜탄의 향기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지옥의 묵시록>의 초반부를 압도하는 이 헬기 폭격 장면을 이 글을 번역하면서 역자가 참조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strafing Charlie's Point

보드리야르가 <지옥의 묵시록>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 영화 자체가 전쟁의 완성이고 종결이어서 전쟁이 곧 영화이고 영화가 곧 전쟁이 되었다는 것. 이 둘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아포칼립스 나우>는 전세계적 승리이다. 산업적, 군사적 기계들의 힘과 동등하고 우월한, 펜타곤과 정부들의 힘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힘 때문에."(115쪽)

여기서 '산업적, 군사적 기계들'이 'industrial and military complexes', 곧 '군산복합체'를 가리킨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문제인 것은 'cinematographic power'란 주어가 생략된 것. 실제 불어본이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영역본에 따르면 이 문장은 이렇게 다시 번역될 수 있다: "<지옥의 묵시록>은 전세계적 승리다. 영화의 힘은 군산복합체의 힘과 대등하거나 그보다 우월하며, 또 펜타곤과 정부의 힘에 맞먹거나 그보다 우월하다."

다시 프레시안의 기사: 2005년 한국을 방한했던 보드리야르는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복제실험은 자연현실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시뮐라시옹의 극단적 사례"라고 주장했고, "문화와 예술, 행동양식에서 기호를 통한 현실의 재현을 가리켰던 근대의 시뮐라시옹과 달리 현대의 시뮐라시옹은 급격한 변화와 전이, 도약을 통해 더 이상 재현이 아니라 가상현실로 넘어간다"고 설명하며 '극단적 현실 청산에 대한 두려운 전망'을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자취는 현대사회학과 철학에 큰 족적이 아닐 수 없다. "소비는 일종의 신화이자 현대사회 스스로에 대한 표현이며 (…) 충만한 자기예언적인 담론이고 (…) 총체적인 해석체계이자 사회가 스스로를 극도로 향유하는 거울이며, 예견을 통해서 사회가 스스로 성찰하는 유토피아이다."

소비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통찰력을 담은 <소비의 사회>는 그의 학문적 입지를 단숨에 다져놓았다. 이 책의 서문에서 리딩대학교 토크빌연구소 메이어 교수는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는 뒤르카임(*뒤르켐)의 <사회분업론>, 베블렌의 <유한계급론>,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과 같은 책의 대열에 자리 잡고 있다"고 격찬했다. 모더니티에 대한 분석, 현대사회의 작동기제와 이면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우리시대 지성의 폭을 크게 넓혀놓았고, 무한한 통찰력의 새 지평을 열었다.
  
'참여하지 않는 지식인', '유토피아적 망상가'라는 그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장 보드리야르의 인문학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통찰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인류의 지적 자산을 풍성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하나둘씩 떠나간 빈 공간에 그가 우려한 바와 같이 지식인의 무기력과 나태함이 자리잡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 때문에 그가 떠난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러니 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다만 마음놓고 읽을 만한 책이 없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07. 03. 10.

 

 

 

 

 

 

 

 

 

 

 

P.S. '사진작가'이기도 한 보드리야르의 사진론을 옮겨놓는다. <불가능한 교환>에 포함돼 있는 것인데, 나는 이 책의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다. 국역본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아서 일단은 '배치'만 해놓는다.  

Photography, Or The Writing Of Light

Jean Baudrillard
Translated by Francois Debrix

The miracle of photography, of its so-called objective image, is that it reveals a radically non-objective world. It is a paradox that the lack of objectivity of the world is disclosed by the photographic lens (objectif).2 Analysis and reproduction (ressemblance) are of no help in solving this problem. The technique of photography takes us beyond the replica into the domain of the trompe l’oeil. Through its unrealistic play of visual techniques, its slicing of reality, its immobility, its silence, and its phenomenological reduction of movements, photography affirms itself as both the purest and the most artificial exposition of the image.

At the same time, photography transforms the very notion of technique. Technique becomes an opportunity for a double play: it amplifies the concept of illusion and the visual forms. A complicity between the technical device and the world is established. The power of objects and of “objective” techniques converge. The photographic act consists of entering this space of intimate complicity, not to master it, but to play along with it and to demonstrate that nothing has been decided yet (rendre evidente l’idee que les jeux ne sont pas faits). “What cannot be said must be kept silent.” But what cannot be said can also be kept silent through a display of images.

The idea is to resist noise, speech, rumors by mobilizing photography’s silence; to resist movements, flows, and speed by using its immobility; to resist the explosion of communication and information by brandishing its secrecy; and to resist the moral imperative of meaning by deploying its absence of signification. What above all must be challenged is the automatic overflow of images, their endless succession, which obliterates not only the mark of photography (le trait), the poignant detail of the object (its punctum), but also the very moment of the photo, immediately passed, irreversible, hence always nostalgic. The instantaneity of photography is not to be confused with the simultaneity of real time. The flow of pictures produced and erased in real time is indifferent to the third dimension of the photographic moment. Visual flows only know change. The image is no longer given the time to become an image. To be an image, there has to be a moment of becoming which can only happen when the rowdy proceedings of the world are suspended and dismissed for good. The idea, then, is to replace the triumphant epiphany of meaning with a silent apophany of objects and their appearances.

Against meaning and its aesthetic, the subversive function of the image is to discover literality in the object (the photographic image, itself an expression of literality, becomes the magical operator of reality’s disappearance). In a sense, the photographic image materially translates the absence of reality which “is so obvious and so easily accepted because we already have the feeling that nothing is real” (Borges). Such a phenomenology of reality’s absence is usually impossible to achieve. Classically, the subject outshines the object. The subject is an excessively blinding source of light. Thus, the literal function of the image has to be ignored to the benefit of ideology, aesthetics, politics, and of the need to make connections with other images. Most images speak, tell stories; their noise cannot be turned down. They obliterate the silent signification of their objects. We must get rid of everything that interferes with and covers up the manifestation of silent evidence. Photography helps us filter the impact of the subject. It facilitates the deployment of the objects’s own magic (black or otherwise).

Photography also enables a technical perfection of the gaze (through the lens) which can protect the object from aesthetic transfiguration. The photographic gaze has a sort of nonchalance which nonintrusively captures the apparition of objects. It does not seek to probe or analyze reality. Instead, the photographic gaze is “literally” applied on the surface of things to illustrate their apparition as fragments. It is a very brief revelation, immediately followed by the disappearance of the objects.

But no matter which photographic technique is used, there is always one thing, and one thing only, that remains: the light. Photo-graphy: The writing of light. The light of photography remains proper to the image. Photographic light is not “realistic” or “natural.” It is not artificial either. Rather, this light is the very imagination of the image, its own thought. It does not emanate from one single source, but from two different, dual ones: the object and the gaze. “The image stands at the junction of a light which comes from the object and another which comes from the gaze” (Plato).

This is exactly the kind of light we find in Edward Hopper’s work. His light is raw, white, ocean-like, reminiscent of sea shores. Yet, at the same time, it is unreal, emptied out, without atmosphere, as if it came from another shore (venue d’un autre littoral). It is an irradiating light which preserves the power of black and white contrasts, even when colors are used. The characters, their faces, the landscapes are projected into a light that is not theirs. They are violently illuminated from outside, like strange objects, and by a light which announces the imminence of an unexpected event. They are isolated in an aura which is both extremely fluid and distinctly cruel. It is an absolute light, literally photographic, which demands that one does not look at it but, instead, that one closes one’s eyes on the internal night it contains. There is in Hopper’s work a luminous intuition similar to that found in Vermeer’s painting. But the secret of Vermeer’s light is its intimacy whereas, in Hopper, the light reveals a ruthless exteriority, a brilliant materiality of objects and of their immediate fulfillment, a revelation through emptiness.

This raw phenomenology of the photographic image is a bit like negative theology. It is “apophatic,” as we used to call the practice of proving God’s existence by focusing on what he wasn’t rather than on what he was. The same thing happens with our knowledge of the world and its objects. The idea is to reveal such a knowledge in its emptiness, by default (en creux) rather than in an open confrontation (in any case impossible). In photography, it is the writing of light which serves as the medium for this elision of meaning and this quasi-experimental revelation (in theoretical works, it is language which functions as the thought’s symbolic filter).

In addition to such an apophatic approach to things (through their emptiness), photography is also a drama, a dramatic move to action (passage a l’acte), which is a way of seizing the world by “acting it out.”3 Photography exorcizes the world through the instantaneous fiction of its representation (not by its representation directly; representation is always a play with reality). The photographic image is not a representation; it is a fiction. Through photography, it is perhaps the world itself that starts to act (qui passe a l’acte) and imposes its fiction. Photography brings the world into action (acts out the world, is the world’s act) and the world steps into the photographic act (acts out photography, is photography’s act).4 This creates a material complicity between us and the world since the world is never anything more than a continuous move to action (a continuous acting out).

In photography, we see nothing. Only the lens “sees” things. But the lens is hidden. It is not the Other 5 which catches the photographer’s eye, but rather what’s left of the Other when the photographer is absent (quand lui n’est pas la). We are never in the real presence of the object. Between reality and its image, there is an impossible exchange. At best, one finds a figurative correlation between reality and the image. “Pure” reality — if there can be such a thing — is a question without an answer. Photography also questions “pure reality.” It asks questions to the Other. But it does not expect an answer. Thus, in his short-story “The Adventure of a Photographer,”6 Italo Calvino writes: “To catch Bice in the street when she didn’t not know he was watching her, to keep her in the range of hidden lenses, to photograph her not only without letting himself be seen but without seeing her, to surprise her as if she was in the absence of his gaze, of any gaze…It was an invisible Bice that he wanted to possess, a Bice absolutely alone, a Bice whose presence presupposed the absence of him and everyone else.”7

Later, Calvino’s photographer only takes pictures of the studio walls by which she once stood. But Bice has completely disappeared. And the photographer too has disappeared. We always speak in terms of the disappearance of the object in photography. It once was; it no longer is. There is indeed a symbolic murder that is part of the photographic act. But it is not simply the murder of the object. On the other side of the lens, the subject too is made to disappear. Each snapshot simultaneously ends the real presence of the object and the presence of the subject. In this act of reciprocal disappearance, we also find a transfusion between object and subject. It is not always a successful transfusion. To succeed, one condition must be met. The Other — the object — must survive this disappearance to create a “poetic situation of transfer” or a “transfer of poetic situation.” In such a fatal reciprocity, one perhaps finds the beginning of a solution to the problem of society’s so-called “lack of communicability.” We may find an answer to the fact that people and things tend to no longer mean anything to each other. This is an anxious situation that we generally try to conjure away by forcing more signification.

But there are only a few images that can escape this desire of forced signification. There are only a few images that are not forced to provide meaning, or have to go through the filter of a specific idea, whatever that idea might be (but, in particular, the ideas of information and testimony are salient). A moral anthropology has already intervened. The idea of man has already interfered. This is why contemporary photography (and not only photo-journalism) is used to take pictures of “real victims,” “real dead people,” and “real destitutes” who are thus abandoned to documentary evidence and imaginary compassion.8 Most contemporary photos only reflect the “objective” misery of the human condition. One can no longer find a primitive tribe without the necessary presence of some anthropologist. Similarly, one can no longer find a homeless individual surrounded by garbage without the necessary presence of some photographer who will have to “immortalize” this scene on film. In fact, misery and violence affect us far less when they are readily signified and openly made visible. This is the principle of imaginary experience (la loi de l’imaginaire). The image must touch us directly, impose on us its peculiar illusion, speak to us with its original language in order for us to be affected by its content. To operate a transfer of affect into reality, there has to be a definite (resolu) counter-transfer of the image.

We deplore the disappearance of the real under the weight of too many images. But let’s not forget that the image disappears too because of reality. In fact, the real is far less often sacrificed than the image. The image is robbed of its originality and given away to shameful acts of complicity. Instead of lamenting the relinquishing of the real to superficial images, one would do well to challenge the surrender of the image to the real. The power of the image can only be restored by liberating the image from reality. By giving back to the image its specificity (its “stupidity” according to Rosset),9 the real itself can rediscover its true image.

So-called “realist” photography does not capture the “what is.” Instead, it is preoccupied with what should not be, like the reality of suffering for example. It prefers to take pictures not of what is but of what should not be from a moral or humanitarian perspective. Meanwhile, it still makes good aesthetic, commercial and clearly immoral use of everyday misery. These photos are not the witness of reality. They are the witness of the total denial of the image from now on designed to represent what refuses to be seen. The image is turned into the accomplice of those who choose to rape the real (viol du reel). The desperate search for the image often gives rise to an unfortunate result. Instead of freeing the real from its reality principle, it locks up the real inside this principle. What we are left with is a constant infusion of “realist” images to which only “retro-images” respond. Every time we are being photographed, we spontaneously take a mental position on the photographer’s lens just as his lens takes a position on us. Even the most savage of tribesmen has learned how to spontaneously strike a pose. Everybody knows how to strike a pose within a vast field of imaginary reconciliation.

But the photographic event resides in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object and the lens (l’objectif), and in the violence that this confrontation provokes. The photographic act is a duel. It is a dare launched at the object and a dare of the object in return. Everything that ignores this confrontation is left to find refuge in the creation of new photographic techniques or in photography’s aesthetics. These are easier solutions.

One may dream of a heroic age of photography when it still was a black box (a camera obscura) and not the transparent and interactive space that it has become. Remember those 1940s farmers from Arkansas whom Mike Disfarmer shot. They were all humble, conscientiously and ceremonially standing in front of the camera. The camera did not try to understand them or even catch them by surprise. There was no desire to capture what’s “natural” about them or “what they look like as photographed.”10 They are what they are. They do not smile. They do not complain. The image does not complain. They are, so to speak, caught in their simplest attire (dans leur plus simple appareil), for a fleeting moment, that of photography. They are absent from their lives and their miseries. They are elevated from their miseries to the tragic, impersonal figuration of their destiny. The image is revealed for what it is: it exalts what it sees as pure evidence, without interference, consensus, and adornment. It reveals what is neither moral nor “objective,” but instead remains unintelligible about us. It exposes what is not up to reality but is, rather, reality’s evil share (malin genie) (whether it is a fortunate one or not). It displays what is inhuman in us and does not signify.

In any case, the object is never anything more than an imaginary line. The world is an object that is both imminent and ungraspable. How far is the world? How does one obtain a clearer focus point? Is photography a mirror which briefly captures this imaginary line of the world? Or is it man who, blinded by the enlarged reflection of his own consciousness, falsifies visual perspectives and blurs the accuracy of the world? Is it like the rearview mirrors of American cars which distort visual perspectives but give you a nice warning
- -”objects in this mirror may be closer than they appear”? 11 But, in fact, aren’t these objects farther than they appear? Does the photographic image bring us closer to a so-called “real world” which is in fact infinitely distant? Or does this image keep the world at a distance by creating an artificial depth perception which protects us from the imminent presence of the objects and from their virtual danger?

What is at stake (at play, en jeu) is the place of reality, the question of its degree. It is perhaps not a surprise that photography developed as a technological medium in the industrial age, when reality started to disappear. It is even perhaps the disappearance of reality that triggered this technical form. Reality found a way to mutate into an image. This puts into question our simplistic explanations about the birth of technology and the advent of the modern world. It is perhaps not technologies and media which have caused our now famous disappearance of reality. On the contrary, it is probable that all our technologies (fatal offsprings that they are) arise from the gradual extinction of reality.

Notes

1. A Translation of Jean Baudrillard, “La Photographie ou l’Ecriture de la Lumiere: Litteralite de l’Image,” in L’Echange Impossible (The Impossible Exchange). Paris: Galilee, 1999: pp. 175-184.
2. There is here a play on the French word “objectif.” “Objectif” means objective (adj.) and visual lens (subs.) at the same time.
3. This term is in English in the original French version.
4. An unsatisfactory translation of “la photo ‘passe a l’acte du monde’ et le monde ‘passe a l’acte photograph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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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3-10 21:57   좋아요 0 | URL
예전에 어떤 분의 강의에서 <시뮬라시옹>에 대한 얘기를 듣고 책만 사두었는데 아직도 읽지 못했어요.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이 한 둘이 아니지만.. 철학 관련 책은 어려워서 읽다가도 마치질을 못하네요..;;; 암튼 퍼가서 찬찬히 읽어보렵니다. ^^

로쟈 2007-03-10 23:01   좋아요 0 | URL
그 어려움이 부정확한 번역으로 더 가중된다는 게 유감입니다. 다 돈주고 사서 읽는 책들인데도...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제의 일이다. 기억엔 작년엔가도 방한했던지라 건강이 양호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듯하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고 비교적 적지 않은 책들이 번역/소개된지라 왠지 '가까운' 저자 한 사람을 잃은 듯한 기분도 든다(얼마전에 <예술의 음모>에 관해 페이퍼를 적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책들을 열댓 권은 갖고 있는 듯하다).

급하게 검색을 해보니 그의 최신간은 (영역본이긴 하나) <연기된 유토피아(Utopia Deferred)>(2006)이다. 앙리 르페브르가 이끌던 그룹/잡지 '유토피아(Utopie)'에 1967년부터 1978년까지 10여년간 게재한 글들과 인터뷰를 모아 펴낸 책이라 한다. 당연한 말이긴 하나 이 '시뮬라시옹'의 철학자도 자신의 죽음은 연기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내달쯤에는 그의 책도 한 권 정도 읽어봐야겠다. 경향신문의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국내에서 '보드리야르 전문가'로 통하는 배영달 교수이다(꽤 많은 번역서들을 냈지만 추천할 만한 책은 떠오르지 않는다).

경향신문(07. 03. 08) '기호화사회 파헤친 급진 이론가’ 佛 장 보드리야르 별세

프랑스의 저명 철학자이자 사회 이론가인 장 보드리야르가 6일 파리의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시뮬시옹’ 이론으로 유명한 고인은 1929년 서부도시 랭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뒤 파리 10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며 5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그는 지난 1991년의 걸프전쟁에 대해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며 9·11 테러에 대해서는 세계화가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타계한 프랑스 지성계의 거목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 사상의 모든 경향과 유파를 벗어나 독자적인 자리를 확보한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사회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죽음과 변형을 중시하는 극단적인 사회학자였으며, 실재가 기호와 이미지에 의해 대체되는 시뮬라시옹 과정 속에서 사라져버린 세계의 잃어버린 의미를 찾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의 신화를 명쾌하게 분석한 롤랑 바르트처럼 그는 현대사회의 모든 현상을 파헤치는 현대성의 분석가였으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격화시키고 급진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미래주의적 비전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러한 현상들을 파악하는 급진적인 작가였다. 이렇듯 보드리야르는 사상사적 위치를 설정하기 어려운 탁월한 사상가였다.

사회학과 철학의 테두리 밖에 머물면서 어느 한 곳에 구속되기를 거부한 보드리야르는 초기 저작 이후 끊임없는 도전과 도발을 시도한 급진적인 이론가였다. 그는 ‘급진적 사유’를 통해 전통적인 사회문화이론을 배격하는 독특한 글쓰기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글이 철학·문화·사회 이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타일로 인해 다채로우면서도 아이로니컬하고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프랑스 안에서는 부르디외·들뢰즈·라캉·데리다와 견줄 수 없는 보드리야르이지만, 그의 첫번째 저작인 ‘사물의 체계’ 이후 그는 줄곧 프랑스 밖에서 더 잘 알려진 프랑스 지성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주요 저작인 ‘소비의 사회’ ‘기호의 정치 경제학 비판’ ‘생산의 거울’ ‘시뮬라시옹’이 잇달아 소개되면서 국내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와 문화예술 분야에 많은 반향과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별’로 불리는 보드리야르 사상은 크게 세 가지 핵심적인 개념들로 구성된다. 이 세 가지 개념들은 소비·기호체계·하이퍼리얼리티(시뮬라크르)인데, 이 개념들에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 단지 텍스트에 따라 이 개념들 중에서 한 개념이 번갈아가며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보드리야르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이 핵심적인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보드리야르 사상 전체를 면밀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세계 유수의 다양한 학술지와 웹진 등에 꾸준히 기고하는 등 글쓰기와 강연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뮬라시옹’이 존재하는 현대사회를 새롭게 조명한 ‘시뮬라시옹’을 분석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사상가 보드리야르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시뮬라시옹 이론’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은 그의 저작 ‘사물의 체계’ ‘소비의 사회’ ‘상징적 교환과 죽음’ ‘악의 투명성’ ‘완전범죄’ ‘토탈 스크린’ 등에서도 그 흔적과 아우라가 발견된다.

현대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그의 이 시뮬라시옹 이론은 ‘현대=시뮬라시옹 시대’로 이해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녔다(*물론 이 영향력에는 영화 <매트릭스>의 기여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현대 이론에서 시뮬라시옹에 관한 담론들은 흔히 우리가 새로운 현대사회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파토스와 반향을 얻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시뮬라시옹 이론은 성숙한 현대이론의 핵심요소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실재가 이미지와 기호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 유명한 명제는 시뮬라시옹 시대에 사물의 내재적 실체성이 증발해 버린다는 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자신도 이제 시뮬라시옹 시대의 이미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배영달|경성대 프랑스지역학과 교수)

07. 03. 07.

P.S. 보드리야르에 '관한' 책으로 두 권을 꼽아두고 싶다. 그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꼽은 그 두 권 중의 하나는 폴 헤가티의 <장 보드리야르: 살아있는 이론>(2004)으로 'Live Theory' 시리즈의 한권이고, 다른 하나는 보드리야르 전문가 중 한 사람인 마이크 게인이 편집한 인터뷰집 <보드리야르 라이브>(1993)이다. 완독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후자는 입문서로서 적합하지 않나 싶다. 그나저나 사람은 가도 이론은 살아남는 것인지, 아니면 그 또한 시뮬라시옹에 불과한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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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而 2007-03-07 23:52   좋아요 0 | URL
오늘 프랑스의 인터넷 르 몽드지를 통해서 그의 죽음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 명의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가 우리의 곁을 떠나는 것 같아 아쉽네요.

기인 2007-03-08 07:44   좋아요 0 | URL
견고한 모든 것은 안개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맑스 & 엥겔스
포스트 모던은 정말 '포스트' 모던 한것인지, 역시 의문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