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작가 백가흠의 창비주간논평을 옮겨오면서 <현대문학>(12월호)의 특집 '문학과 돈'에 대해 잠깐 언급했었는데, 그 필자의 한 명으로 참여했던 최재봉 기자가 그와 관련한 편집국 칼럼을 썼다. '문학상의 빛과 그림자'가 그것인데 내일자 조간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해서 이 페이퍼는 '미리보는 조간'이 되겠다. 

 

 

 

 

참고로 <현대문학>의 기고문 제목은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고 '넘쳐나는 문학상과 상금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이 부제이다. '조심스럽게 쓰는 글'이란 단서를 서두에 달고 있는데. 내용 자체는 파격적인 게 전혀 아니다. 결론만큼 상식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만 구체적인 데이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글이다. 필자는 '시궁이후공'이란 말을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솔출판사, 1996)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뜻이다."

"물론 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궁함이 총족됨만 같이 못하다는 뜻의 '궁불여달(窮不如達'), 또는 충족된 연후에야 공교로움이 나온다는 '달이후공(達而後工)'과 같은 이론이 그러하다." 가령 우리시대 대표작가의 한 사람인 작가 김영하의 경우가 그러하다. <문학동네>(겨울호)의 대담 '내면 없는 인간의 내면을 향하여'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지난 십 년을 돌아보니 글쓰는 즐거움, 소설을 만들고 세계를 만드는 쾌감보다는 마치 월급쟁이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바쁘게 한 십 년 살았으니 앞으로 십 년은 좀 다르게, 더 작가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지난 세월 부지런히 살아온 덕분에 작가로서 마음먹은 글을 제대로 써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강조는 나의 것) '달이후공'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연전에 소설가 김영하는 한꺼번에 세 개의 문학상을 받으면서 총 상금이 1억원을 넘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창작에 있어서 '궁이후공'이 맞는지 '달이후공'이 맞는지는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다만 200여 개를 훌쩍 넘어선다는 한국의 문학상들이 '달불여궁(達不如窮)'의 사태를 초래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있겠다.  

한겨레(06. 12. 01) 문학상의 빛과 그림자

“동전도/ 돈이지만/ 또한 돈일 수 없지만/ 원효교 난간 위로/ 해는 떨어지고,/ 강건너/ 비행장에/ 불을 켠 채 착륙하는 밤비행기./ 나의/ 하루의/ 공허한/ 귀환을,/ 동전도/ 돈이지만/ 또한 돈일 수 없지만/ 발길에 채어/ 어둠 속으로/ 땡그르르 굴러가는/ 1966년 12월 1일/ 내 생애의 동전 한닢.”(박목월 <일일> 전문)

12월1일. 마지막 달의 첫날이다. 40년 전 목월이 노래한 대로 ‘생애의 동전 한닢’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날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여느 날과는 다른 각별한 감회를 자아낸다. 마지막과 처음이 어우러져 긴장과 이완을 아울러 선사하는 까닭이다.

문단 역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출판사와 잡지 별로 송년회가 줄을 잇고 각종 문학상 시상식도 이즈음에 집중되어 있다. 나라 밖에서는 저 유명한 노벨문학상 시상식이 12월10일에 열린다. 문학 지망생들에게 이 무렵은 신춘문예에 응모하고자 골방에서 원고지나 컴퓨터 자판과 씨름해야 하는 철이다. 그들은 문학상 시상식 소식을 접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그 화려한 자리의 주인공이 되리라는 은밀한 기대를 키우고 있을 것이다.

문학상 시상식 자리는 풍성하고 따뜻하다. 수상자는 행운에 감사하며 겸손한 어조로 문학적 포부를 밝힌다. 문단 동료와 선후배로 이루어진 손님들은 축하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사진기의 플래시가 펑펑 터지고 그에 질세라 수상자와 축하객들의 웃음소리도 반 옥타브쯤 올라간다. 공식 행사가 끝나면 일행은 예약해 둔 술집으로 우루루 몰려간다. ‘진짜’ 축하를 하려는 것이다. 아예 술청 전체를 세내서는 먹고 마시며 떠들고 노래 부른다. 때로 술이 과해서 울거나 싸우는 이도 없지 않지만, 문인 특유의 인정과 낭만으로 작은 소동쯤은 넉넉히 감싸안는다.

문화의 다른 부문과 비교해 보아도 문학상은 종류도 많고 상금도 풍성하다. 지역 단위에서 시상하는 작은 규모의 상들까지 포함하면 현재 이 나라에는 몇백 개의 문학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평균으로 따지자면 적어도 하루에 하나 꼴은 되지 않을까. 문학상이 많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많은 문학상이 해마다 수상자와 수상작을 내고 있다면, 한국문학은 나날이 풍요로워지고 있지 않겠는가.(금전적으로가 아니라 문학적 성과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문학담당 기자로서 현장에서 느끼는 실감은 그런 추측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문화면 머릿기사로 다룰 만한 시나 소설이 나와 주어야 하는데, 그만한 작품이 눈에 뜨이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기 일쑤인 것이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이육사 <절정>) ‘그 많던 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은 어디로 간 것일까.’(박완서).

문학 전문지 <현대문학> 12월호의 특집 ‘문학과 돈’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의 일단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나 자신 그 특집의 필자로 참여한 처지라 다소 민망하기는 하지만, 특집의 또다른 필자 역시 “돈은 문학 생산 현장에서 대체로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들어 ‘금전망자(金錢亡者)와 벼슬지상’(천상병)의 문단 풍토를 꾸짖고 있었다. 문학상의 영광과 상금이라는 금전적 보상이 반드시 작품 창작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즈음 하루가 바쁘게 이어지는 문학상 시상식에 입회하면서 때로 마음 한켠이 불편했던 까닭이 분명해진 느낌이다. 문단의 한 해 소출을 결산하고 이듬해의 풍작을 염원하는 문학상 시상식이 마음에서 우러난 축하와 격려의 자리로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최재봉/문학전문기자)

06. 11. 30.

 

 

 

 

P.S. 이 기사와 일맥상통하는바 특집호 기고문에서의 결론은 이렇다: "200년대 벽두의 문인들이 70년대의 문인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형편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문학이 70년대보다 그만큼 더 나아졌노라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분명한 퇴보와 위기로 현재의 문학적 상황을 평가하기도 한다. 문학의 위기니 종말이니 하는 수상쩍은 말들이 횡행하게 된 데에 문학상은 간접적으로나마 책임이 없는 것일까, 묻고 싶다."

한데 최기자의 기고문을 읽으면서 보다 흥미로웠던 대목은 문학동네의 얘기와 견주기 위해서 필자가 들고 있는 언론동네의 사례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언론동네에서 선배들에게 들은 애기 중에 이런 게 있다: 예전 70년대까지의 기자들은 그들 자신이 가난한 처지였다; 월급도 적었거니와 그 월급조차 술값이니 교통비로 다 날아가버려 정작 집에 가지고 들어가는 돈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권언유착이 형성되면서 기자들에 대한 처우가 급격히 나아지기 시작한 게 80년대 이후였다; 그와 함께 신문과 방송에서 가난한 이들의 살림에 대한 기사가 실종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드는 생각은 문학의 위기나 종말 이전에 한국사회에서는 언론의 위기와 종말이 먼저 도래했었다는 것이다(언론상도 그렇게 많은가? 혹은 상이 따로 필요없을 만큼 기자들이 유복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이 위기는 아무도 모르게, 아무런 통증도 없이 지나가버린 것인가? 왜 우리주변에 '유령기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처럼 보이는지 이젠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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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문학상이 몇백개라고요? 설마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그 많던 문학상 수상자들은 어디로 갔을까?'네요.

로쟈 2006-12-0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상 한번 못 받아본 작가'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 같습니다...

다크아이즈 2006-12-0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문학가'가 되어야 할 문학자 같아요. 로쟈님 서재에 적응 안 됐을 때 님의 펌글들을 님의 주체적 문학 행위로 이해했다는..^^* 님 책 내시면 애독자 예약 접수. 혹, 평론집이나 번역서 준비하지 않나요?

로쟈 2006-12-0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린 책들이 많이 있긴 합니다. 욕심은 많아도 걸음은 느린지라... 어쨌든 내년부터는 성과가 있기를 저도 기대합니다. 그리고, '예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창비주간논평 한 꼭지를 옮겨온다. 문인들의 '연봉' 얘기를 다룬 보기 드문 논평인데, 필자는 소설가 백가흠씨이다. 이 글이 눈길은 끈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엊저녁에 <현대문학>(12월호)에 실린 특집 '문학과 돈'의 글들을 읽었던 것. 연말정산의 시즌이 곧 돌아오기도 하지만 세밑이 되면 한해동안의 궁상스런 살림살이에 대해서 되돌아보게도 되는데, 궁상으로 치면 여느 직업 부럽지 않은 시인/소설가들의 경우엔 감회가 더할지 모르겠다(비정규직 대학강사들의 처지가 그럭저럭 동병상련이 될 만하다). 손으로 꼽을 만한 극히 일부 소설가를 제외하면 전업시인/작가로서 중산층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부업이 불가피한 이유이고 상금이 걸린 문학상들에 목매달기도 하는 이유이다. 당장에 대안을 떠올리기 어려우므로 대략 그런 속사정만을 챙겨두고자 한다.

 

창비주간논평(06. 11. 28) 내 연봉은 포도나무 한그루

가을이 이렇게 가버리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개나리가 마음을 들볶은 게 꼭 일주일 전만 같은데, 목련은 피었는지 모르게 빗방울에 후드득 떨어진 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낙엽 다 지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쓸쓸하게 매달려 있는 감 때문에 저는 어찌할 바 몰라 방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선배 시인 한분을 꼬여내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늦은 단풍이나 볼까 하고 말입니다. 비온 뒤라 날씨도 좋고 공기도 맑아서 아침부터 마음을 가만히 둘 길 없었는데요. 막상 산에 오르니 기대했던 거와는 달리 낙엽도 거의 진 뒤라 풍경은 시시하기만 했습니다. 대신 멋진 집들을 구경했습니다. 빨간 벽돌, 십 미터도 넘어 보이는 담으로 둘러싸인 예쁜 집들을 말입니다. 사실 예쁜지 어떤지는 잘 몰라요, 집이 보여야 집 구경을 하지요. 실은 멋지고 높은 담 구경을 했다고 해야 맞겠네요.

 

서둘러 내려와선 두부와 막걸리를 먹었어요. 고추전도 먹었구요. 산에 갔다 왔는데도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산이 제 것 같지 않아서였던 것도 같아요. 취해서 속으로 중얼거렸지요. 여기다 집을 사야겠는데, 그래야 저 산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쓰다 만 소설들이 저를 애처롭게 쳐다보는데요. 술 취한 눈으로 저는 소설에게 말했지요. 니가 잘 씌어져야 거기에 집을 짓지. 소설아, 소설아 집 좀 지어줘라. 분명 거기까진 기억이 났었는데, 깨어보니 한낮이었습니다. 집을 짓고 북한산을 갖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지요.


누구나 연말이 되면 새해에 바라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서둘러 정하곤 하는데요. 몇년 전 망년회가 생각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친구도 없는 떨거지 친구들과의 망년회 자리였는데요. 케이크에 소원을 빌고, 촛불을 끄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진지해서 저도 그에 버금가는 무엇인가를 정해야만 했었는데요. 새해에 바라는 소원, 생각하자마자 금방 떠올랐어요. 제 차례가 되자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새해에는 연봉이 육백만 넘었으면 좋겠다구요. 전혀 웃기지 않는 얘기였음에도 사람들이 웃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웃었지요. 말하고 나니 조금 웃기는 것도 같았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 댁에 신년인사하러 갔는데 술이 두잔 세잔 돌자 누군가 또 묻는 거예요. 새해에 바라는 소원이 뭐냐구요. 저는 똑같이 연봉이 육백만원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그 시절 진짜 소원이었으니까요. 한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웃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소설가 이기호가 가흠아, 연봉 육백이면 한달에 오십만원 벌어야 하는데 그거 힘들다, 했어요. 정말 힘든 표정을 지었어요, 이기호 형이요. 그래서 제가 그니까 소원이지 형, 했습니다. 실은 속으로 그때 부러웠거든요. 연봉 육백만원을 이미 이룩했던 기호 형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때문에 온나라가 떠들썩하지요. 정치권, 매스컴 할 거 없이 무슨 호재라도 만난 것처럼 떠드는 것이 정말 큰일이 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한데요. 집값이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저는 웬 호들갑들인가 싶더라구요. 평균임금을 받는 사람이 서울에 아파트를 장만하려면 44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때도 저는 그러건 말건 했었는데요, 평균임금을 벌게 되니 이젠 집을 갖고 싶은 거예요. 몇년 전만 해도 연봉 육백만원을 간절히 원했던 제가 말입니다. 왠지 집이 있으면 장가도 잘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구요. 그런 생각이 드니 느닷없이 가로수들이 부러워지는 거예요. 니들은 무슨 복이 있어 이렇게 비싼 도로가에 한평씩 집을 지었냐 싶은 거예요. 가로수들이 부러워지니까 신경질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어느날은 집앞에 늘어선 가로수들마다 한대씩 발길질을 한 적도 있어요.


하나 또 예전에 정말 몰랐던 일 하나가 있는데요. 바로 마당이에요. 시골에서 자란 저는 당연히 마당이 있어야 집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서울에서는 마당을 갖는 일이 큰 호사임을 깨닫게 된 거예요. 원래 간사하잖아요, 사람마음. 제가 세들어 사는 집에 감나무, 자두나무가 서 있는 꽤 넓은 마당이 있는데, 언젠가부터 제가 감나무, 자두나무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제 욕심이 얼마나 물질적으로 비대해졌나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땅을 딛고 서 있는 모든 것과 경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경쟁심이 집값을 올리는 것이더라구요. 제가 집값 상승의 주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감나무보다 잘살아보려고 정말이지 애썼거든요.

 


예전에 시인 박형준 형과 치악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요. 제가 등단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이었는데요. 작가가 되고 일년을 살았는데,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등단한 지 십년쯤 지난 형에게 치악산을 오르며 물었어요. 정말 궁금하더라구요. 어떻게 먹고 사는지 말이에요. 형 연봉은 얼마나 돼요? 박형준 시인이 껄껄 웃더니 내 연봉은 포도나무 한그루쯤 될까 몰라 했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에게 연봉은 마음속에 포도나무 한그루 정도 있으면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아직도 저는 가로수가 부러우니 제가 시인이 되지 못한 이유가 분명 있기는 있는 것이겠지요?

 

06. 11. 28.

 

 

P.S. '연봉 육백만원' 달성에 보탬이 돼보려고 해도 백가흠의 책으로 나와있는 건 달랑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란 소설집 한권이 전부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이 제목의 흠을 꼬집기도 했는데, 사실 '귀뚜라미가 온다' 같은 건 시집의 제목으로나 어울리는 것 아닌가?('귀뚜라미'로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차라리 데뷔작의 제목을 따서 <광어>라고 했다면 훨씬 더 묵직해보였을 것이다('광어'는 빼어난 단편이다). 어쨌거나 연말 분위기이기도 하니까 우리의 불우한 작가들을 돕는 의미에서라도 소설집 한두 권씩은 사두시길 바란다. 뭐, 샛노란 게 빛깔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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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1-2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나무 한 그루정도면 현실은 궁상맞은 삶이군요.
하지만 그의 영혼도 가난할거라는 상상은 하지 않으렵니다.
여우는 포도를 무지 좋아하지만 여우의 연봉은 염소 한 마리나 될까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저 노란 표지를 보관함에 풍덩 빠뜨리고 갑니다.
별총총, 로쟈님도 총총, 여우도 총총, 우리 모두 반짝 총총

로쟈 2006-11-2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왕이면 감나무, 자두나무도 되고 싶은 거지요. (영혼이 부유한) 작가들이라도 딸린 식구들은 어쩔 수 없으니...

기인 2006-11-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현'공식'연봉은 200만원 정도 되고, 장래 희망은 시인/소설가 이며, 아마 비정규 대학강사를 하게 될 저, 퍼 갑니다. ^^;

비로그인 2006-11-2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나서는 다음달 책 살때 백가흠 소설가의 책을 꼭 구입해야 될 것 같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krinein 2006-11-28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미있게 읽고, 네이버 블로그로 퍼갔습니다.

biosculp 2006-11-2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나무 한구루라는 제목에 감나무가 떠오르더군요.
감 주산지 중의 하나인 상주에 오래된 감나무 같은경우 나무 하나에서 4000개 이상의 감이 열리더군요. 트럭으로 하나.
감나무 하나면 연봉600은 족히 넘어갈것 같군요.
하여간 요즘 집값과 연결해보면 씁쓸해지고요.

다크아이즈 2006-11-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 연봉은 마이너스 통장입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거지요?

로쟈 2006-11-29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르신 분들도 계신데, 다들 내년에는 '부자되세요!'란 말씀은 못드리겠고, 포도나무라도 한 600그루 정도 키우시킬 기원합니다...

라주미힌 2006-12-0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금이 피어나는 나무 한그루만 가졌어도.. 쩝.
 

김장을 하는 날이다. 예년 같으면 그냥 얻어다 먹었지만 어머니가 60포기나 되는 김장을 담그시기로 해서 며느리들을 모두 소집했고, 제일 '한가한' 나에겐 잔심부름과 애들 보는 역이 맡겨졌지만 무료한 탓에 페이퍼나 올리고 있다.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의 젊은 작가 특집은 김애란을 다루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북데일리의 기사를 옮겨놓는다(고아라 기자의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띄는군). 그러고 보면 김애란씨에 대해서는 나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 듯하다. 

 

 

 

 

 

 

 

 

 

 

 북데일리(06. 11. 24) 김애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출판계와 저널리즘에 이르는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작가론 ‘소녀는 스피노자를 읽는다’)에서 던진 질문이다.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가 깔려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가 제시하는 ‘우리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그녀가 ‘명랑’하기 때문이다. 명랑하다는 건 상처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김애란의 인물들은 IMF 현실, 서울 문화의 은근한 배타성, 가족의 결핍 등과 마주친다. 그들은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 혹은 상처에 맞서 싸울 만큼 강하지 못하다. 조력해줄 키다리 아저씨도 없다. 국가도, 이념도, 가족도 무력하다. 하지만 고독한 개인의 안간힘으로 상처를 이겨낸다. 그 마주침의 기록이 핍진하고 그 안간힘이 애틋하다.

둘째. 김애란의 중성(中性)성. 그녀의 인물들은 자신의 성별에 의지하지 않는다. 마주침과 견뎌냄의 과정에 어떤 성별 논리도 개입하지 않는다.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특별히 겪게 되는 마주침은 없다. 그들의 슬픔, 그 슬픔의 처리과정도 중성적이다. 이 중성성이 그녀의 명랑성을 만든다.

신형철의 열렬한 ‘김애란 애찬론’은, 그녀의 작품들을 공간, 소통, 가족, 욕망의 측면에서 조망한 평론 내내 이어진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김애란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 이가, 비단 신형철 한 명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울대 백낙청 명예교수는 계간 ‘창비’ 봄호에서 “최근 문학현장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을 준 신인작가”로 박민규와 김애란을 함께 언급한 바 있다. 솔출판사 임우기 대표는 계간 ‘유역’ 창간호에서 그녀의 소설을 “영성적 문학의 소중한 싹”이라고 표현했다.

작년 8월 김애란이 창작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순원문학상 예심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몇몇 심사위원이 “규정을 바꾸라”며 반기를 들고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작년 11월 그녀는 ‘달려라, 아비’로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애란의 첫 창작집 <달려라, 아비>(창비. 2005)는 출간 한 달 만에 판매부수 1만부를 넘기며, 한동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일반 독자들 역시 그녀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 그렇다면 정말, 신형철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김애란을 사랑하는 걸까. 물론 아니다. 그녀의 소설에 대해 실망의 목소리를 감추지 않는 독자도 있다(*우리 동네 분들이다!).

“하도 칭찬일색이기에 주문해서 읽은 책이건만 너무 실망. 자기 독백에 곁들여진 화려한 말솜씨뿐 아무것도 없다. 스토리도, 줄거리도 없다. 유머도 재치도 없다.” (알라딘 ‘기억의 집’)

“김애란의 소설들은 트렌디 드라마를 닮아 있다. 밝고, 새롭고, 경쾌하지만, 현실성이 없다. 울고 짜고 배신과 복수가 판을 치는 멜로드라마에 식상한 사람에게 트렌디 드라마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두어 편 보고 나면 금세 질리고 만다.” (알라딘 ‘urblue’)

김애란은 이제 막 스타트를 끊은 작가다. 그녀를 사랑하고, 하지 않고를 결정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다는 말이다. 선택은 그녀의 장편이 나온 후로 미뤄둬도 그리 늦은 일은 아니지 싶다. 개인적인 바람을 한 가지 덧붙이자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 날까지 ‘달려라, 김애란’.

06. 11. 24.

P.S. 개인적으론 김애란의 일부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소설들도 없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건 단순하게도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그 점에서 그녀는 얼마간 신뢰를 준다. 그녀의 본격적인 소설(장편소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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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2006-11-2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틈틈이 로쟈님이 올리신 글들을 읽고 있어요. 그런데 어디까지가 기사문이고 어디까지가 로쟈님 글인지 모르겠어요. 저만 그런가요? 색깔이나 구획선으로 구별해주시면 로쟈님 생각을 빨리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ㅅ^

로쟈 2006-11-2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불편하시겠네요.^^ 인용문에 코멘트를 집어넣을 때는 언제난 *표시를 합니다. 그밖에 인용되는 기사에 제가 끼여드는 경우는 없구요, 강조표시만 해둡니다. 인용문이 길 경우에 다소 혼동의 소지가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색깔은 부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취향상 많이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기인 2006-11-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퍼갑니다. 신형철 선배가 정말 주목받고 있는 평론가인가 보네요. ㅎ :)

로쟈 2006-11-2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히 발군의 기량을 뽑내고 있습니다. 첫평론집이 나오면 보다 명확해지겠죠...

sommer 2006-11-2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사랑하는' 소녀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리고 그녀의 자전소설을 읽다가 문득 불능이 아닌 '부재'를 '상상'으로 대체하는 데서 그녀가 명랑으로 인도되는 건 아닐까 긁적이게 되더군요...

로쟈 2006-11-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잡지를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긁적거리시는 김에 끄적거리시면 '김애란론'이 되지요.^^
 

계간 <문학판>이 5주년 기념호를 냈다(어느덧 '중견' 잡지의 대열에 들어서는 듯하다). 2006년 겨울호가 그것이다(계간지 겨울호들이 계절을 더욱 재촉하는 듯하다). 자체 소개에 따르면, "전위적이며 독창적인 작업을 실험하는 작가들의 활동을 지지해온 계간 <문학 판>의 창간 5주년을 맞이했다. 2001년 겨울, 편집인 이인성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선다는 기본 취지 아래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결합'시키며, '평단에서 소외된 신인작가의 전위적 작업을 부각'시키겠다는 포부로 창간 의의를 밝힌 바 있다."

"이번 호 특집은 새로운 문학 세대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자리로 꾸몄다. 김진수, 손정수 두 평론가가 각각 시와 소설 분야의 새로운 세대의 문학에 대해 논했다. 시인 김민정, 진은영, 황병승, 김태형,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 등 각 장르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열 명의 작가들이 각자의 글쓰기의 근거에 대해 발언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한 최재봉 기자의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1. 24) 문단 막내들에게 듣는 ‘문학이란?’

“말하자면 어떤 그리움이나 상실감이 없는 채로, 부정해야 할 대상도 없고 증언하고 싶은 시절도 없이, 고백해야 할 내면이나 문학적 책임의식도 없는 20세기 막바지 세대가 21세기에 문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가 편혜영(34)씨가 <문학/판> 겨울호에 쓴 ‘교본의 시간’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문학 창작의 동기로 꼽히는 요소들을 두루 나열하면서 그 어느 것 하나도 제 몫이 아닌 채로 문학을 해야 하는 세대로서의 자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문학/판>이 창간 5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집 ‘21세기 문학세대’에 포함되었다.

이 기획에는 시인 진은영 김태형 김민정 황병승씨와 소설가 구경미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씨, 그리고 평론가 허윤진 신형철씨 등 10명이 참여했다. ‘우리는 문학으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편집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이 특집에 참여한 이들은 1980년생인 김애란 허윤진씨를 제하고는 모두 1970년대생이다. 문단의 막내들이라 할 만하다.

대부분이 도시 태생인 이들에게는 “오히려 알 수 없는 전원과 자연의 풍경을 보면 두려움이 느껴”지며 “회색 콘크리트가 기왓장이나 대청마루처럼, 전봇대가 마을 앞의 수령 깊은 나무처럼 느껴진다.”(편혜영) ‘전통 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이 젊은 시인들은 종종 ‘미래파’라는 저널리스틱한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기도 하는데, 그 대표자 격인 황병승씨가 “나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흥미롭다. 미래파는 그 이름을 창안한 이의 의도와는 달리 자주 비판과 공격에 노출된다. 자폐적 상상력과 폭력적인 이미지, 대중문화적 기호의 범람이 주로 빌미를 제공한다. 황병승씨 글의 마지막은 그를 의식한 것 같다: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배척된 채로/배척된 채로”

비장한 결의와 뻔뻔한(?) 각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은영씨의 말을 들어보자. “우린 다소 지겹다. 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우린 너무 쉽다. 결코 난해하지 않다. 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우리는 복화술사가 아니라 특정문화를 소비하는 부류의 또렷한 입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무성한 소문과 달리 아직 우리는 새로운 문학으로 탄생하기 이전이다.”

아마도 21세기에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주창한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일 것이다. 자기 안에 갇혀 사회 전체의 긴급한 현안에 대응하지 못하는 지금의 문학은 본래적 의미의 문학에서 멀어졌으므로 지금 문학은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주장이다. 이제 막 문학을 시작하는 이들을 향해 누군가는 문학이 진작 끝났노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신형철씨의 화려한 글 ‘몰락의 에티카­: 21세기 문학 사용법’은 가라타니의 선언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난쟁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 가장 ‘협소한’ 영역 안에서 가장 ‘깊게’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문학이라 하면 어떨까.(…)넓은 총체성이 아니라 깊은 총체성 말이다.”

“다른 총체성이 있고 다른 윤리가 있다”고 신형철씨는 주장한다. 그 새로운 총체성의 이름은 ‘파편으로서의 총체성’이라고. “21세기라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면서 여전히 아름다움과 상상력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는 김중혁씨의 글은 평론가의 주장과 다르면서도 같다.(최재봉 기자)

06. 11. 24.

P.S. 굳이 분류하자면 '20세기 문학독자'로서 내가 동감하는 견해는 시인 진은영씨의 것이다. 일곱 가지 항목으로 규정하면, '21세기 문학'은 (1)다소 지겹다. (2)지나치게 전복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빤하고 (3)몇 가지 문학적 수사에만 능숙하다. (4)너무 쉽다. (5)결코 난해하지 않다. (6)몇몇 인디밴드 음악이나 일본만화, 퀴어문화 등등 특정한 문화적 코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에, (7)사실은 누군가를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

"거인으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건 '21세기 문학세대'의 활기찬(하지만 수세적인) 상상력이다. '본래'라는 어사가 굳이 동원될 필요가 있을까? 지겹고 빤하고 쉽고 그래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 그 '바닥'에서 뭔가 기대해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몰락의 에티카'는 몰락의 승인을 전제로 작동하는 윤리학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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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어. 저 중 진은영 시인이 '우리'라고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닐텐데. (물론 긍정적 의미로). 진은영 시인 또한,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양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읽히는 데요. 구해서 읽어봐야겠네요. 퍼갑니다. :)

로쟈 2006-11-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기사상으론 '우리', 혹은 '우리세대 문학'에 대한 고백으로 읽히는데요...
 

최근 젊은 작가들의 '근황'에 대해서 점검하고 있는 글을 옮겨온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 김중혁 등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상상력과 질펀한 입담을 '작두 탄 구라의 향연'으로 정리하고 있는 글인데, '작두 탄 구라'란 표현보다 내게 직접적인 것은 '총알 탄 구라'이다(그래서 제목은 '총알 탄 소설가들'로 단다). 필자는 '에세이스트' 정여울씨이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의 저자인데, 문화평론가 혹은 문학평론가가 어울림직한 직함이지만 그걸 통칭해서 저널에서는 '에세이스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여하튼 젊은 작가들의 '입담'에 애정을 주어봄 직하다. 그게 한국문학의 장래에 대한 '투자'이기에. 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겨레21(06. 11. 17) 펴들기만 하면 내 웃을 줄 알았지~

이기호·박민규·박형서가 보여주는 한국소설 유머의 심상찮은 변화…질펀한 입담의 약장수, 고독의 복화술,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을 즐겨라

요즘 <개그야>의 ‘사모님’을 보며 한국 코미디의 경이로운 진화를 실감한다. ‘사모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무대장치의 과감한 생략이다. 의자 하나 달랑 놓고 모든 무대장치를 제거하니, 그 텅 빈 암흑의 공간은 시청자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운전해’, ‘어서’라는 짧은 대사는 그때마다 다른 뉘앙스로 변주되며,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사모님의 권태와 고독, 그녀의 못 말리는 백치미를 구현한다. ‘아마데우스’라는 코너는 더욱 놀랍다.


△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에 유머의 경제성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이런 한국 소설 유머에 드디어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왼쪽부터)는 그 대표적 소설가이다.(사진/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장욱,문학과지성사 제공)

이 코너를 보면 인간의 표정 안에 숨겨진 소우주, 그 코믹성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언어도 무대장치도 그 무엇도 없이 오직 삼총사의 표정만으로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 세 사람은 가히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로 우주를 연주해내는 기막힌 내공을 보여준다. 이렇듯 무대 위의 개그는 표정만으로도 시청자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스탠딩 코미디가 굳이 ‘의미’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은 이런 표현의 경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소설의 유머도 드디어 심상치 않은 지각변동을 시작한 것 같다.

애들은 가라? 꼰대들은 저리 가!

이기호식 유머의 키워드는 친밀성이다. 그의 유머는 흔히 구어체적 현장성에서 발원한다. 그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꾼과 청자의 온기’로 극복하곤 한다. 그의 문체는 강한 구어성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머릿속에서나마 묵독의 폐쇄성을 지우며, 동네 남녀노소를 잔뜩 모아놓고 질펀한 입담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과장된 몸짓과 신명난 목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이기호식 유머의 에너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의도와 목적과 진심을 매번 배반하는 시트콤적 상황의 무한 연쇄들. 이기호의 인물들은 우연의 퍼레이드에 온몸을 맡긴 채 기꺼이 ‘하느님의 코미디 채널’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호는 작품에서 ‘독자의 상상력’을 유난히 강조한다. 옛날옛적 입담 좋은 약장수들은 온갖 구라를 읊조리며 ‘애들은 저리 가!’라고 외쳤지만,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약장수 이기호는 ‘꼰대들은 저리 가!’ 혹은 ‘애들만 이리 와!’라고 외치는 듯하다.

여기서 꼰대와 애들을 가르는 기준은 ‘상상력’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바쁜 일상에 저당 잡힌 어른들은 주눅들기 쉽다. 그러나 그 상상력의 울타리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에 이기호식 유머의 ‘친밀성’이 자리한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좀처럼 걷지 않던 후미진 샛길을 문득 걸어보고, 평소에는 서먹한 사람에게 실없는 농담을 훌쩍 건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의 코마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박민규 소설의 독자는 가끔 자신의 ‘조로’를 의심하게 된다.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대책 없는 유아적 순수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매번 ‘너무 닳고 닳은 어른들’이 되어버린다. 읽을 때는 키득키득 웃지만 읽고 나면 문득 자신의 길들여진 일상이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이 박민규식 유머의 빛깔이다. <핑퐁>의 왕따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엔 못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못이라면, 일생에 한 번만 맞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의 유머는 동화적 무구함과 아릿한 슬픔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이 유아적 순수에는 왕따 아닌 모든 인간들을 향한 서늘한 저주가 묻어 있다. 핼리혜성이 지구에 와서 충돌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그곳에 드나들며 왕따 소년은 교실에서만 ‘다수결로 묵인되는 왕따’가 자행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결정은 승자의 몫이란다.” 이 중차대한 인류의 운명을 왕따 소년들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박민규식 유머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유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인류가 내팽개친, 인류가 ‘깜빡’한 존재들의 필연적 복수혈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민규의 유머는 정서와 문체 사이, 욕망과 표현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에서 탄생한다. 그의 작품 표면에 드러난 유머가 빙산의 1%라면, 독자는 보이지 않는 99%의 빙산, 그 거대한 스케일의 고독과 슬픔의 복화술을 읽어낸다. 그의 유머는 일단 독자를 웃겨놓은 다음 그 웃음을 애도하게 만드는 성찰적 유머다. 상큼한 유머 뒤에 드리운 짙은 비애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없이 이지적인 블랙유머

아마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낯선 유머는 박형서식 유머일 것이다. <자정의 픽션>에 실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박형서식 유머의 코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엄격한 먹물적 수사학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면서도 능란하게 이용하는 이중적 태도가 유쾌상쾌통쾌하다. 화자는 선행연구에 대한 분노를 무시무시한 공격적 수사학으로 과격하게 표현하는가 하면(“그는 가금류의 뇌를 가진 비평가이며 문장은 흑사병 수준이라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리카르도 호킨스의 <못된 유전자>라는 식으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 이 작가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

수많은 탁상공론에 맞서는 더 많은 탁상공론을 조롱하는 이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통과될 수 없는 ‘논문’이지만 더없이 이지적인 블랙 유머로 가득한 흥미만점의 ‘소설’이다. “필자와 같이 잘난 연구자”가 “요새 좀 바쁘긴 하지만” 써낸 이 장대한 스케일의 논문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범람한다. ‘닭알’을 ‘불알’과 동격에 놓은 다음,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수십 번 등장하는 달걀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남근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듯 천연덕스레 자신의 ‘독창적’ 학설을 읊어대는 능청이 배꼽을 잡는다(*'논문'으로서 이 작품의 결함을 한 가지 지적하자면, 각주에서 제시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에 '춢판사'가 모두 빠져 있다. 즉, 논문의 기본적인 작성요령을 지키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논문의 내용은 독창적이며 훌륭하다. 가금류의 뇌를 가진 기득권 학자들이 아니라면 그 독창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잡설·요설·독설들이 논문의 테마를 요리하는 데 너무나 ‘논리적으로’ 복무한 나머지, 독자들은 깜빡, 혹은 기꺼이, 이 ‘논문’에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가고프다. 이 논문의 핵심 가설은 옥희가 6살이 아니라 가임기의 “처녀애”이며 아저씨와 옥희의 성교로 인해 질투에 눈먼 어머니가 아저씨를 내쫓는다는 것. 결국 외할머니-어머니-옥희는 “음란삼각편대”이며 옥희의 집은 “한 남성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매음굴”이란다. 박형서는 우리가 가장 도전하기 어려운 습속과 제도와 상식들을 한낱 유희의 장난감으로 만듦으로써, 사소함과 중요함이 서로 전복된 ‘픽션 언리미티드’의 세계를 창조한다.

모든 진정성의 강박이 사라진 세계, 진실은 몽둥이와 발길질과 전기고문으로 조작되는 세계, 존재나 고통이나 사랑 따위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는 세계. 여기서 박형서적 그로테스크 유머가 탄생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악동적 기괴함이 가득한 문체에 강력한 거부감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그 ‘싸가지와 재수가 동시에 외출한’, 잘난 척하는 말투를 모방하고 싶어진다. 그의 주인공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지적인 악마성과 <사탄의 인형> 주인공 처키의 악동적·요괴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캐릭터들이다.

박형서 유머의 핵심은 갈 데까지 간다는 것, 한없이 막 나간다는 것이다. 끝간 데 없는 기괴한 허구의 파노라마가 박형서식 유머를 수놓는다. 그의 소설은 인과성의 제어로부터 완전히 탈주한,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이다. 게다가 그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유머를 구사한다. 자신의 두뇌 속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독자들에게 거의 MRI 촬영의 해상도로 보여주는 뻔뻔함이 그의 매력이다.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최근의 단편소설 중에는 김중혁의 <유리방패>가 새로운 유머의 경지를 보여준다. 김중혁은 읽는 이를 공격적 웃음의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의 천진함 앞에 독자를 뼛속 깊이 무장해제시킨다. 그의 유머는 공격성도 방어성도 없으며, 이 질긴 생의 링 밖으로 잠시 뛰쳐나와 마음의 모든 매듭을 잠시나마 풀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소주 한잔 나누고 싶어지는, ‘비움’의 유머다.

그러나 위의 작가들의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자체이지 유머코드는 아니다. 이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하는 것뿐이다. 상상력이 뜻하지 않게 유머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유머 자체가 상상력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마음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말초적 유머는 가독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유머의 첫맛과 뒷맛이 일치하는 유머는 독자의 상상력을 간질이지 못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박완서의 걸쭉하고도 새침한 구식 유머가 좋다.)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문학적 유머의 원천기술은 의미를 삭제한 쾌락이 아니라, 의미 자체와 질펀하게 놀아나는, 예술과 지성과 상상력의 비빔밥이다.(정여울 에세이스트) 

06. 11. 19.

P.S.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원제는 <벌거벗은 총(Naked Gun)>이다. 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벌거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천진함' 같은 것을 읽는다(그것이 가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들려주는 발랄한 이야기들은 때로 <개그야>나 <개그콘서트>의 뺨을 치며 우리의 배꼽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쏜 '총알들'이 현실의 과녁을 제대로 맞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해서, 이 천진한 악동들의 반항과 일탈이 미더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반복하자면,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아니, 경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의 '총알 탄 소설가들'은 구두끈을 더 바짝 조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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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11-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그야의 '사모님'은 정말 기발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마지막 글이 참 많이 와 닿는군요.^^

로쟈 2006-11-2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데, 하도 입소문이 돌아서 '사모님'은 두어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동네도 살기 힘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