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산을 처음 학계에 알린 최익한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말에 주목하게 된 책이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서해문집, 2011)이다. 월북 지식인이기에 국내에서는 거의 잊혀진 그를 재발견한 송찬섭 교수에 따르면 최익한은 “한문과 사회과학의 소양을 겸비한 근대의 최고 지식인”이었다. 거기에 <실학파와 정다산>은 현존 실학 연구의 최고 저작이라 한다. 다산뿐만 아니라 우리 학문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필독해볼 만하다.  

 

경향신문(11. 10. 15) “다산을 세상에 알린 근대 지식인 ‘학계에서 소외된’ 최익한 재평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저작 500여권이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였다. 1936년 신조선사는 당시 한반도에 불어닥친 국학열(熱)을 업고 여유당전서 출간에 들어간다. 앞서 고종 광무연간에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가 간행되긴 했지만 <경세유표> <마과회통> <논어고금주> 등 다산 저작 전부가 한데 묶인 것은 처음이다. 여유당전서 편찬은 식민지시대 출판계의 최대 사건이었다. 다산의 수고(手稿) 500여권을 한데 모은 여유당전서 편찬에는 당대 최고 국학자 정인보와 민세 안재홍이 교정위원으로 참여했다.

그 즈음 최익한(1897~?)은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여유당전서에 대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글은 65회까지 이어졌고 최익한은 “여유당전서를 완독한 최초의 학자”(다산연구가 정해렴)가 되었다. 

최익한의 다산 연구는 1948년 월북 이후 본격화됐다. 북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국학 연구에 몰두한 최익한은 1955년 여유당전서 독서를 바탕으로 <실학파와 정다산>이라는 저작을 출간했다. 다산과 실학에 대한 최초의 본격 연구서였다.

다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산을 처음 학계에 알린 최익한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최익한을 소개하면서 독립운동가 최익환과 헷갈려 적었다. 백남운, 이청원, 인정식 등 월북 학자 계보에서도 최익한은 빠져 있다.

송찬섭 한국방송통신대 교수(55·한국사·사진)는 “최익한의 중요 저작이 북에서 발간된 데다 대학에 몸담지 않아 제자가 없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송 교수가 최익한 전집을 내겠다고 결심한 배경에는 ‘학계에서 소외된’ 최익한을 재평가하겠다는 뜻이 크게 작용했다.

송 교수가 최익한을 ‘발굴’한 것은 20여년 전이었다. 그는 경남 산청의 한 유학자 서재에서 <실학파와 정다산>을 발견한 뒤 1989년 이를 국내 한 출판사에 건넸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당국의 북한 서적 검열에 걸려 회수당했다. 그러나 최익한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갔다. 송 교수는 역사학회지에 최익한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며 그를 알리기에 나섰다.

최익한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한학자이자 문화사학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고향 경북 울진에서 한학을 공부한 그는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6년간 복역했다. 여유당전서를 소개할 무렵에는 정약용 연구에 몰두하며 국학 연구에 적극 참여했다. 그가 해방 전후에 남긴 저작은 <실학파와 정다산> <조선사회정책사> <조선봉건말기의 선진학자들> <강감찬장군> 등이 있다.

송 교수는 최익한을 “한문과 사회과학의 소양을 겸비한 근대의 최고 지식인”이라고 평가했다. 최익한 전집의 제1권으로 나온 <실학파와 정다산>의 경우 조선 후기의 정치사와 경제사를 바탕으로 실학파의 사상과 학설을 체계적으로 풀어냈다. 한국 실학의 명칭, 개념은 이 책에서 유래했으며 정약용을 “실학 집대성자”라고 지칭한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송 교수는 “<실학파와 정다산>은 조선의 사회·정치·경제는 물론 서학·대외관계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며 현존 실학 연구의 최고 저작으로 꼽았다. 또 <조선사회정책사>는 조선의 구휼·진휼정책을 근대의 ‘복지’ 개념을 적용시켜 분석한 “국내 최초의 사회복지학 저서”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최익한의 단행본 저서뿐 아니라 ‘여유당전서를 독함’ 등 신문 기고문, 논문 등도 모아 7~8권의 전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러나 최익한 연구는 “한 사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학제 간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조운찬 선임기자) 

1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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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식민주의의 만행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 출간됐다. 레이첼 홈스의 <사르키 바트만>(문학동네, 2011). 19세기초 유럽 백인에게 잡혀와 런던의 쇼무대에 서고, 나중에는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연구대상이 된 아프리카 여성 사르키 바트만의 얘기다. 학교 현장에서도 많이 읽혔으면 싶다...  

  

경향신문(11. 10. 15) ‘아프리카 여인’을 발가벗긴 근대유럽의 오만과 편견

‘호텐토트의 비너스’가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쇼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10년이었다. 140㎝ 정도의 작은 키, 숯처럼 반들반들한 검은 피부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먼 곳을 바라보는 불가사의한 표정과 보조개가 깊이 팬 하트형 얼굴은 사람들의 이목을 단박에 집중시켰다. 관객들의 시선은 얇은 실크 너머로 비치는 크고 탱탱한 젖꼭지에 쏠렸다. 더욱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그녀의 하반신이었다. 런던의 관객들은 거대한 소음순과 준봉처럼 솟아오른 엉덩이에 완전히 흥분했다.

저자 레이철 홈스는 남아공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여성 저널리스트다. 그는 “19세기 유럽 인종주의의 희생양”이었던 남아프리카 여인 사르키 바트만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해내면서 근대 유럽인들의 오만과 편견을 발가벗긴다.

평범한 호텐토트족 여성이었던 바트만은 10대 후반에 강가에서 약혼식 축제를 벌이다가 백인에게 납치당한다. 피카딜리 무대에 선 그녀는 아프리카 현악기 람키를 연주하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야 했다. 짐승 같은 눈빛을 번뜩이는 남자들 앞에서 성큼성큼 뛰어다니다가 몸을 부르르 떠는 원주민 춤을 춰야 했다. 쇼는 일주일에 엿새, 하루에 4시간씩 펼쳐졌다. 입장료는 2실링이었다. 백인 공연기획자들은 그녀를 팔아 돈을 챙겼고, 영국 언론들은 “특이한 몸매의 비너스”를 경쟁적으로 대서특필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유럽인들은 그녀의 몸매를 “불량한 진화의 증표”로 여겼다. 그들은 그렇게 “동물이 멈추고 인간이 시작되는 지점의 증표”를 뜨거운 호기심으로 훔쳐봤다.

저자는 당시의 언론이 붙여준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수식어에 영국인들의 집단적이고 변태적인 관음증이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자면 “비너스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성욕과 동일한 의미로 오랫동안 사용”됐으며, “호텐토트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것, 성적으로 변태적이며 과도한 것”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호텐토트와 비너스를 합친 조어는 “대단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퇴폐와 욕망, 금기와 허락, 야수적 육욕과 초월적 여신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쇼의 인기는 식었다. 흥행업자는 1814년 그녀를 배에 태워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는 여흥과 오락의 본거지였던 팔레루아얄 무대에 섰다. “낮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쇼를 하고, 날이 저물면 레스토랑이나 선술집, 북적대는 카페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결국 절망에 빠져 코냑에 중독됐고 병을 얻었다. 흥행업자는 병든 그녀를 파리의 자연사박물관에 팔아넘겼다. 이제 그녀는 “특이한 몸매”를 “과학적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교수들 앞에서 특별 공개”해야 했다. 그녀는 옷을 벗지 않겠다고 저항했으나 허사였다.

그녀를 발가벗긴 당사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고생물학자 조르주 퀴비에였다. 1815년 혹독한 겨울, 스물다섯살의 그녀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퀴비에는 톱으로 두개골을 잘라 뇌를 적출했다. 음순과 클리토리스, 질을 잘라내 유리병에 담았다. 나머지 몸뚱이에는 밀납을 발라 미라로 만들었다.

런던은 그녀를 변태적 성욕으로 유린했고, 자유·평등·박애의 도시로 자부했던 파리는 과학이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도살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그녀는 식민주의가 낳은 소외와 비인간화의 상징, 착취당하는 모든 흑인여성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현재적 상징, 인종주의가 남긴 심리적·문화적·정서적 상처의 상징”이라고 강조한다.

만신창이가 된 사르키의 육신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192년이 흐른 뒤였다. 넬슨 만델라는 프랑스 정부에 사르키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용서할 수 있지만 잊지는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아공 현지에서 그 귀환의 현장을 입술을 깨물며 지켜봤던 이 책의 번역자 이석호(아프리카문화연구소 소장)는 “사르키는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내 앞에, 내 곁에 무한복제로 되살아나는 도플갱어”라고 울부짖는다. “찢어진 내 자아의 다른 얼굴이고, 남자라는 이름의 제국이 거느리고 있는 최후의 식민지이며, 초라한 제국이 그 적멸을 늦추기 위해 휘두르는 채찍과 뭇매를 묵묵히 견디는 육체”라고 절규한다. 사르키 바트만의 생애를 10년 넘게 탐구해온 그의 번역은 생생하고 유려하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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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시내 2011-10-19 04:22   좋아요 0 | URL
샤르키 바트만, MBC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서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죠. 인권과 평등을 외치는 서구 지식인들의 추악한 진면목을 마주하며 충격을 받았었지요. 씁쓸하고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지금도 그같은 유린이 잔재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네요.

보스코프스키 2011-10-19 21:45   좋아요 0 | URL
EBS의 지식채널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사한 사건으로는 조지프 매릭 - 영화 <<<디 엘리펀트 맨>>>으로도 유명한 - 도 있긴 하죠...
 

국제원조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됐다. 윌리엄 이스털리의 <세계의 절반 구하기>(미지북스, 2011). 기사에 나오는 대로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 21세기북스, 2006)과 같이 읽어볼 만하겠다..   

연힙뉴스(11. 10. 16) 책상머리 원조 보단 발로 뛰는 원조 하라

"백인의 짐을 져라 / (중략) /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같은 / 당신들의 새 백성을 위해 /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가라"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의 시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은 극렬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그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다. 그는 "반은 악마"나 다름없는 야만적인 식민지인들을 돕는 것이 백인의 의무라고 말하는 이 시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헌정해 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를 찬양하기도 했다.

윌리엄 R. 이스털리 미국 뉴욕대 교수는 키플링의 시 제목을 그대로 빌린 책 '세계의 절반 구하기'(미지북스 펴냄. 원제 'The white man's burden')에서 오늘날 서구의 국제원조 방식이 20세기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유명한 저서 '빈곤의 종말'에서 세계의 빈민들이 부실한 보건과 교육, 인프라 등이 서로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빈곤의 덫'에 걸려있다고 진단하며 이 빈곤의 덫을 제거하는 것이 보기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전세계 부자 국가들이 외국 원조를 대폭 끌어올리자는 것이 그가 제시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이스털리는 이 책에서 빈곤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삭스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빈곤의 덫'이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신화이며, 이른바 '빅 푸시(Big push)'로 불리는 대규모 원조가 가난한 나라들을 성장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빅 푸시의 예상과는 반대로, 통계상 원조를 많이 받는 국가들은 원조를 적게 받는 국가들보다 도약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90쪽) 

무엇이 문제일까. 서구가 지난 50년간 대외 원조로 2조 3천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여전히 수백만 명의 빈곤국가 아이들이 12센트에 불과한 말라리아 예방약과 4달러짜리 모기장을 제공받지 못해 목숨을 잃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구 국제원조가 '계획가'들의 거대한 '계획'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대외 원조에서 계획가들은 선한 의도를 표방하지만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중략) 계획가들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17쪽) 더욱이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나 시장경제가 아무리 좋다한들 그것을 전혀 다른 사회에 하향식으로 부과하려는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계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말을 새삼 되새기며 굶주리고 있는 세계의 절반을 모른 척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스털리는 '계획가' 대신 '탐색가'적인 시각으로 국제 원조에 나서야한다고 제안한다. 계획가들과 달리 탐색가들은 밑바닥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발견하고 수혜자들의 만족도까지 파악한다. 요컨대 계획가들의 원조는 책상머리에서 나온 '하향식'이고, 탐색가들의 원조는 발로 뛰는 '상향식'이다. 그러니까 이스털리의 견해대로라면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 구제는 나랏님'은' 못한다"는 식이다.

이 책에는 이런 탐색가의 원조가 성과를 거둔 여러 사례들이 제시된다. 탐색가들의 원조에 힘입어 비서구 지역의 빈곤 국가들이 스스로를 도운 사례들이다. 그는 "비서구 지역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동안, 계획가들의 지구적 사회 공학은 빈민 구제에 실패해왔고, 이는 계속 실패할 것"이라며 "계획가들은 지난 60년 역사로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은 탐색가들에게 기회를 줄 차례"라고 말했다.(고미혜기자) 

11. 10. 16.  

P.S. 인도주의 내지 인도적 개입문제를 다룬 책들도 몇 권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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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의 지식인을 말하다

'10월의 읽을 만한 책'의 카테고리로 '중국의 지식인'을 만들어놓고 <20세기 중국의 지식인을 말하다> 등을 올려놓았었는데, 마침 관련서평이 눈에 띄기에 한번 더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지식인 문제는 관심을 갖고 있는 아이템 가운데 하나이다. 그간에 서구 지성사에 가려져왔던 '중국의 지식인' 문제가 지식인 문제 일반을 다룰 때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한국의 지식인' 문제와 견주어볼 수도 있겠고...  

교수신문(11. 10. 04) 그들은 왜 사회의 중심을 세우는 데 실패했나    

이 책의 집필진은 중국의 지식계의 대표적인 지식인들로 구성되어있다. 黃平, 余英時, 杜維明, 徐復觀, 錢穆, 費孝通, 錢理群, 陳平原, 李歐梵, 桑兵, 章淸 등 역사, 철학, 사상, 문학, 문화, 정치, 사회학 등의 다양한 전공자들로 구성돼 있다. 포괄하고 있는 시기는 춘추전국시기에서 1905년 과거제도 폐지 전까지 제왕의 조력자이자 민간사회의 엘리트로 살았던 사대부 중심의 시기. 서양과의 충돌과 서구학문의 유입으로 신지식과 신지식인 집단이 형성된 시기, 사회주의 건설이후 지식인 사상개조로 인한 핍박과 상실의 시기, 개혁개방이후 새로운 지식인의 등장과 활발한 지식담론이 성행된 시기 등이다. 수록된 내용은 주로 지식인의 개념, 범주 및 유형, 고대 지식인의 구조와 역할, 지식인의 역사적 성격과 운명, 지식인의 주변화 현상, 지식인 집단의 몰락 및 도시 공간 속의 지식인 등 20세기 지식인에 대한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내용들을 총망라했으며, 나아가 지식인 사회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네트워크, 매체, 사단, 학회 등의 다양한 방법과 주제를 다루고 있다. 

쉬지린 교수가 편선한 『20세기 중국의 지식인을 말하다』는 중국의 대표 지식인들이 바라본 20세기 중국 지식인의 역사를 소개한 책이다. 무려 중국 고대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중국의 지식인 역사를 핵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의 20세기는 그야말로 대변혁의 시기였다. 20세기 중국의 지식인들이 겪은 변화는 그야말로 사상적인 면에서의 가치전환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적인 면에서의 신분, 지위, 역할의 대변환이었다. 이 책은 후자에 초점을 맞춰 지식사회사 측면에서 이러한 대전환기 사회정치와 문화사상의 상호작용 속에서의 지식인의 역사를 연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쉬지린 교수는 20세기 중국 지식인을 어떻게 엮어나갔는가. 중국의 근대 사상계에서 서구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미친 점은 바로 지식구조일 것이다. 관료와 지식인이라는 이중적 역할에서부터 중심과 주변을 넘나드는 경계인으로서의 중국 지식인은 어떠한 근대 중국의 지적 구조를 형성해나갔는가. 또한 20세기 중국의 지식지형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은 국가,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는가. 이것이 이 책의 초점이다. 쉬지린 교수는 이를 ‘단절된 사회 속의 지식인’이라고 규정한다.

쉬지린 교수는 현대 지식인이 처한 사회는 지식인의 중심인 사민사회가 아니라 ‘중심이 없는 단절된 사회’라고 한다. 국가와 사회의 단절인 것이다. 과거의 사대부는 원래 국가와 사회를 일체화하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했으나 1905년 과거제도의 폐지에 따라 사대부 계급은 와해되고 국가와 사회 사이에도 더 이상 제도적인 소통을 수립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단절은 각 계층 간의 단절이다. 각 계층사이에는 공공의 가치관과 제도적 토대가 결여돼 사회에는 더 이상 중심이 없게 됐고 상호 제도화 된 유기적 관계도 결핍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절된 사회의 난국 속에서 지식인은 국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그는 전통사회에서의 사대부계층과 국가, 사회의 유기적 관계는 오늘날도 모두 붕괴했다고 말한다. 과거제도의 폐지는 현대 지식인으로 하여금 국가와의 내재적인 체제관계를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강렬한 소외감을 낳았으며, 또한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민간사회에서 벗어나 도시로 흘러들어가 국가로부터 소외됐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유리된 표류하는 지식인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북경, 상해 등의 대도시로 간 지식인들은 현대사회에서 자신들만의 지식공간 즉, 학술 집단과 문화매체를 마련했다. 학술 집단은 지식생산영역의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문화매체는 지식유통영역의 신문, 잡지, 출판업으로 구성됐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이 지식공간들은 고대 중국에서는 없었으며, 제도화된 네트워크 규모로 출현했던 적도 없었다. 이는 현대 지식인들이 의지하는 유일한 사회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핵심이 되는 상업사회와 권력이 핵심이 되는 국가체계가 존재함에 따라 자신들의 작은 사회인 학술 집단과 문화매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국가, 사회와의 유기적 연계를 상실했다. 현대 지식인은 더 이상 사회의 중심이 아니며, 도리어 ‘단절된 사회’에서 더욱 더 주변화된 존재다.

이는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사회는 새롭게 국가로부터 해방됐으며 지식인 또한 주변에서 중심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商工社會의 궐기로 인해 지식인은 또 다시 주변화됐으며, 이번에는 국가에 의해 전복당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게 전복당한 것이었다. 시장사회로 인해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그들의 갈망은 멀어져 간 것이다.

2010년 국제학술회의 차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를 방문한 쉬지린 교수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와 유사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통사대부에서 현대지식인으로 나아가면서 끌어 안아야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현대사회의 公民意識이다. 공민의식은 사민사회에서는 탄생할 수 없으며 단절된 사회에서도 쌓아나가기 어렵다.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건전한 공민문화와 민주정치이며, 이러한 것들은 바로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제도화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내용 측면에서 이후 보완됐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테면,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의 전환에 따른 지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점에서 지식인 문제가 본격적이고 활발하게 논의돼 하나의 지식담론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중국 지식계, 사상계의 분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형성됐던 계몽 진영이 90년대에 이르러 사상 면에서 거대한 분화를 보인다. 1990년대 인문정신이 계몽진영을 인문파와 시장파로 분리시켰고, 90년대 상반기 자유주의와 신좌파 논쟁은 개혁진영을 자유파와 산좌파라는 두 극단으로 분열시켰다. 이에 따라 1990년대는 지식담론에 대한 논의는 활발했지만, 중국사상계 내부에는 통일된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고 대립과 분열이 출현했다. 이는 결국 지식의 사상분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분화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지식구조와 유형의 분화이자, 지식(인)의 분열, 사상가치의 분열이기도 하다(쉬지린『중국지식네트워크』). 이러한 1990년대 이후 지식계의 대분화를 통한 중국 지식담론의 계보와 지형을 분석한 논의가 보충될 필요가 있다.(박영순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11.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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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학술서'라 할 만한 책은 정연태 교수의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푸른역사, 2011). 소개기사조차도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변증법적 지양'이란 제목을 달았다!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정리하는 데 요긴할 듯싶다.   

  

한국일보(11. 10. 08)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변증법적 지양

일제의 식민 지배가 한반도 근대화에 기여했는가는 국내 역사학, 경제사학계의 해묵은 논쟁거리다. 한국현대사학회가 최근 교육부의 역사 교육 과정 개정 작업에 '일제에 의한 근대적 제도의 이식 과정과 우리 민족의 수용'을 포함시키자고 요구한 데서 새삼 드러나듯 이 논쟁은 한국 사회의 이념 대립과도 오버랩된다.

한국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지만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로 피어나지 못했다는 식민지 수탈론이나, 식민 지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이식으로 근대화에 진척이 있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일면을 부각해서 보려 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가톨릭대 정연태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둘러싼 최근 10년간 자신의 논문을 엮은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서 이 같은 논쟁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고자 한다. 그는 '근대사 굴절에 대한 책임을 손쉽게 외세 탓으로 돌리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의 주체적 한계를 직시하고 반성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발전 잠재력과 역동성도 동시에 포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거기에 더해 근대 자체를 비판하는 '탈근대론'도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의 쌍생아처럼 취급하여 백안시하거나 민족성ㆍ식민성을 근대성의 묶음 속에 집어넣어 뼈도 없이 녹여 버리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비판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이 같은 학문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서양인의 한국근대사 인식이다. 서양인의 왜곡된 동양관 같은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조선과 조선인에 호의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이들은 당시 조선 실정에 대해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발전 잠재력은 풍부하지만 양반ㆍ관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력으로 고갈됐고, 민중은 근로ㆍ저축 의욕 감퇴로 나태와 빈곤의 늪에 빠졌으며, 국가 경제는 후진적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생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당장은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도 대동소이하다.

이 같이 중층복합적인 시대 상황을 조선 후기의 포구 도시인 충남 강경에 대한 미시 연구 등을 통해 재확인하면서 그는 '장기(長期) 근대사론'이라는 새로운 역사상을 제안한다. 한반도의 근대가 해방과 함께 압축적으로 끝났다고 볼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까지 미완의 것으로 보자는 문제 제기다. 이론(異論)이 적지 않겠지만 열린 민족주의 등 건강한 민족주의의 실천적 완성이라는 숙제까지 포함한 이 개념이 실익 있는 근대사 논쟁에 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김범수기자) 

11. 10. 08.   

P.S. 기억에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 새로운 물꼬를 터준 이는 '회색지대'론을 주장한 윤해동 교수였는데, 이후에 논쟁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됐는지 알지 못한다. 정연태 교수의 책이 가이드가 돼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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