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구입한 게 두 주쯤 된 듯싶은데 리뷰기사가 좀 뒤늦게 떴다. 김우창 교수의 칼럼집 <성찰>(한길사, 2011) 얘기다. 수년간 경향신문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것인데, 예전에 나왔던 <시대의 흐름에 서서>(생각의나무, 2005)도 합본돼 있다. 개인적으론 <정치와 삶의 세계>(삼인, 2000)까지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그의 칼럼에서 '성찰' 혹은 성찰적 태도의 최대치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는 '성찰'과는 다른 자리에 설 수도 있다...

경향신문(11. 10. 29) 인문학적 사유로 조망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

전문 칼럼니스트가 대접받는 시대다. 신문에 정치칼럼, 경제칼럼, 환경칼럼, 문화칼럼이 등장한 지는 오래다. 총선 때가 되면 정치 칼럼니스트가 정세를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하며, 자유무역협정(FTA)이 현안으로 불거질 때에는 경제전문가가 언론에 단골로 등장한다. 



‘칼럼니스트’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74·사진)는 이러한 흐름에 역행한다. 그는 전문 칼럼니스트가 아니다. 언론인도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사회 현실을 깊고 넓게 읽어내며 미래를 전망하는 칼럼니스트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2003년 겨울부터 2009년 겨울까지 경향신문에 칼럼을 연재했으며 1년여의 휴식을 가진 뒤 지난 4월부터 다시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김우창은 전문가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통합형 지식인이다.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그는 사계(斯界)의 석학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관심은 아카데미와 전공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일간지 칼럼을 통해 학문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문학적 사유로 한국 사회와 세계 문명을 조망한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대중집회 ‘월가를 점령하라’를 지켜본 뒤 쓴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경향신문 10월17일자)를 보자. 그는 반월가 시위를 오늘날 세계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는 ‘가장 증후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며 자본주의 위기의 향방을 조심스레 진단하고 있다. 이 글에는 1920년대 초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그려내며 파시즘의 도래를 예언한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가 인용되고 현 자본주의를 ‘익명의 체제’로 규정하며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고 말한 미국 언론인의 분석과 전망을 소개하고 있다. 칼럼 주제는 금융자본의 위기이지만 그 속에는 정치, 경제, 문학, 철학이 들어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사유와 성찰을 바탕으로 그는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서 반월가 시위를 바라보는 다중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세부 공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우창의 신간 <성찰: 시대의 흐름에 서서>(한길사)는 그가 2003년부터 9년간 경향신문에 써온 칼럼 156편을 모은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칼럼이란 단명할 수밖에 없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칼럼은 다르다. 신문에 쓰여졌지만 그의 글은 사건과 이슈에 즉물적으로 대응하는 촌평(寸評)이 아니다. 그는 기자 이상으로 사실(fact)을 존중한다. 그의 글에는 발생한 사실이 정확히 제시되고 그것을 보도하고 분석한 세계 유수의 언론매체가 인용된다. 그는 매일 아침 인터넷으로 뉴욕타임스, 르몽드, 슈피겔과 같은 세계적인 신문·잡지를 스크린한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다루는 사건은 전지구적인 문맥을 획득한다.

김우창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정심이다. 그의 글은 쿨하다. 테러리즘, 환경파괴, 분배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를 길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성적 성찰의 힘이고, ‘사고와 행동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포용적 사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김우창은 ‘군자불기’의 지식인이다. 그의 글은 하나의 그릇에 매이지 않고(不器),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다(不羈). 그는 원고지 18장의 길지 않은 칼럼에서 ‘학문의 소요유’를 즐긴다. 김우창이 꿈꾸는 세계는 “세계 속에서 진정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삶에 충실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의 주택문화와 부동산정책을 다룬 ‘집짓기와 동네짓기’(313쪽)라는 글이 그 사례다. 그는 여기에서 철학자 하이데거의 ‘유기적 공간’과 ‘국민을 편안하게 한다’(安百姓)는 동아시아 정치의 요체를 설파한 뒤 ‘급조된 거대계획’이 아닌 ‘오래된 작은’ 동네를 예찬한다.

김우창 칼럼의 주제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세계화, 금융위기, 날치기 정치문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학문 자율성, 환경생태 문제 등 세계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포괄한다. 북핵, 4대강 사업, 촛불집회, 금융위기, 다문화가정도 있다.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시사받을 게 적지 않을 것이다.(조운찬 선임기자) 

11. 10. 30. 

P.S. 기사에서 언급된 칼럼 '위기의 자본주의'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10. 18) [김우창칼럼]위기의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 시위와 저항의 사건들이 연속되고 있다. 이것은 작은 일들의 연쇄이지만 오늘의 세계 체제의 근본에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가장 증후적인 사건은 미국 뉴욕의 복판에서 일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대중 집회이다. 이것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워싱턴을 비롯하여 미국의 여러 도시에 같은 성격의 항의 시위를 촉발하고 있다. 또 런던에서는 증권시장을 점령하라는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고 하는데, 세계의 다른 도시에도 시위가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앞, 8월 초에는 런던과 영국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시위와 난동이 있었다. 이러한 일들보다 더 큰 사건은 튀니지, 이집트에서 정권이 무너진 일이었고, 아랍에서의 시위와 갈등과 권력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서방진영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주축의 하나인 유럽에서 국가 부채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해결에 가까이 갈 듯하면서도 해결되지 않고, 또 해결의 방안 자체가 경제 위축과 실업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 참으로 유럽 경제가 종전의 번영을 회복할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1920년대 초에 아일랜드의 시인 W B 예이츠는 ‘제이의 강림(降臨)’이라는 시에서 당시의 아일랜드의 정치적 혼란을 정체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는 괴수(怪獸)의 이미지로 상징한 일이 있다. (그는 후에 이 괴수를 파시즘의 대두에 관계되는 것으로 말하였다.) 모든 것이 중심을 잃고 혼란과 피의 물결이 밀려드는데, 성난 새들이 퍼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사막에서 사자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괴수가 어슬렁어슬렁 베들레헴을 향하여 간다--예이츠는 그의 예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 사막의 괴수는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호신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귀신인지는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이와 비슷하게 새로운 역사적 전기의 도래에 대한 조짐인 듯하면서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투명하다.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태들은 자본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세계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은 것이다.

객관적이든 아니든 미래에 대한 일정한 전망이 없이는 현재를 하나로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던 공산주의는 그 위광을 잃어버린 이후 미래를 예감케 하는 힘으로 생각되지 아니한다. 지금의 여러 증후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진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상을 대체할 미래가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최근 BBC와의 인터뷰에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인도 출신의 영국귀족원 의원 메그나드 데사이 경은, 지금의 위기의 주 원인--서방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가 아시아로, 즉,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 교수이면서 정치 운동가인 코넬 웨스트는 지금 일고 있는 ‘아랍의 봄’에 대조하여 지금 월가 점령 운동과 같은 사건은 ‘미국의 가을’을 준비하는 일이라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그의 다른 설명을 들어보면, 자본주의가 지금의 형태로 지속할 수는 없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가을이 오면 어떤 형태의 변화가 오는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말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이야 어찌되었든, 풀릴 듯하다가도 풀리지 않고 되풀이되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향방은 심히 점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문가에게도 그러하고 일반 사람의 느낌으로도 그러하다. 다만 일반인들이 절감하는 것은 실업과 빈곤과 소득 감소와 불안한 삶의 현실이다. 월가 점령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불안의 현실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이지만, 시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 하나는 그들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금융업의 탐욕에 대하여 여러 글을 발표한 미국의 독립 언론인 매트 태이비는 최근의 글에서 이들이 내놓아야 할 몇 개의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월가 점령 운동에 깊은 공감을 표하면서도 그 요구가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운동이 시들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러한 항목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논설은 우선 미국에서 물가 상승으로 배고픈 사람이 수천만 명에 이르게 되고, 수백만 명이 집값을 내지 못하여 집을 잃었는데도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원인들을 한 군데로 몰아서 생각하기가 어렵고 그에 대한 책임자를 잡아내어 밝힐 수도 없다. 책임을 져야할 체제가 복잡하고 분산되어 있어서 원인과 책임의 소재를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체제 뒤에 숨어 있고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딱 이것이 문제라고 꼬집어내 말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비유로는 이 익명의 체제는 50개의 머리를 가진 뱀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치계, 경제계, 금융계에서의 내부자 거래, 등 뒤에서 이루어지는 정경유착의 담합, 규제 제도의 내파(內破) 등이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하여 태이비는 시위 군중이 요구하여야 할 사항 다섯 가지를 내놓는다. 첫째, 보험과 투자 금융과 상업 금융을 하나로 뭉치는 통합 금융 체제를 깨트려야 한다. 둘째는 주식 거래, 파생 금융상품 거래에 각각 0.1%와 0.01%의 세금을 부과하고 급속도의 전자 거래에 제한을 가하여야 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금만으로도 파산 직전의 금융 기관 구제에 사용한 국고 지출금과 국가부채를 쉽게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건전한 기업 투자가 늘어 날 것이고, 고용 증대가 가능해질 것이다. 셋째, 공적 자금을 받은 회사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로비하는 것을 불법화하고 일반적으로 그들이 대통령 선거와 같은 일에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 헤지펀드에 세금 혜택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은행 임원들에게 그때그때의 업적에 맞추어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은행은 망해도 본인은 흥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에 구태여 보상을 한다면, 이삼 년 후에나 회수할 수 있는 스톡옵션을 준다. (사실은 더 적극적으로 보수 상한제가 필요할 것이다.)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데에 고쳐져야 할 항목으로 이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러한 목록이 그럴싸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것이 입법 조치만으로도 시정될 수 있는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대체 전망이 불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많은 세부적 수정 노력은 사태를 조금 더 나은 것이 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거대 권력에 의한 유토피아의 실현이 실패로 끝난 것을 많이 보게 된 것이 20세기 여러 사회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보다 살 만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세부 공학의 방법밖에 없다는 주장은 맞는 말로 들린다.

태이비의 시정 항목들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사회 위기에 대한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미국 또는 유럽 또는 아랍 여러 나라의 문제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의 표면적인 지수로 보아 체제가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와 같은 차원의 전면적 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성격이 다른 종류의 부정 사건이라고 할, 부산저축은행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유럽에 일어난 바와 같은 금융 위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는 우리의 일상적 관습이 되어 있고 또 실업자나 빈곤 또는 복지의 문제 또 그 의외의 여러 원인이 합쳐져서 불안과 불행의 느낌이 세계적으로 높은 사회가 한국이다. 이것은 사회 체제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관련된 여러 원인들의 발견과 시정책을 강구함으로써 조금은 나아질 수 있는 현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유토피아와 종말론적 타도(打倒) 사이에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 관심의 형태이다. (적어도 정치 논쟁의 측면에서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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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프만과 인문학의 미래

미국의 저명한 니체 번역자이자 연구자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가 다시 번역돼 나왔다. 과거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라고 한번 출간된 적이 있지만 미진한 번역으로 구설에 올랐던 책이다. 에드먼드 윌슨이나 한나 아렌트 같은 '저널리스트'에 대한 비판으로도 유명한데, 실상 초점은 '인문학의 무덤'이 된 1970년대 미국 대학을 향하고 있다(그리고 이 점이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보게 한다). 재번역되길 기대했던(그리고 직접 독려하기도 했던) 1인으로서 출간소식이 반갑다.

  

경향신문(11. 10. 29) 탐색하라, 질문하라, 그리고 비판하라

괴테는 ‘통찰가’ 유형에, 한나 아렌트는 ‘저널리스트’ 유형에 속한다. 이 책의 저자인 월터 카우프만(1921~1980)의 구분에 따르자면 그렇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인문학자인 그는 “철학과 문학, 종교와 역사, 음악과 미술”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이어서 네 가지 유형으로 인문학자들의 태도를 구별한다. 통찰가와 사변가, 저널리스트와 소크라테스 유형이 그것이다.

예컨대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베토벤, 미켈란젤로, 플라톤”은 ‘통찰가’다. 저자 카우프만에 따르자면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자기 시대의 일반적 상식과 단절된 채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의 비전을 알리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이들이다. 반면에 ‘사변가’는 “자신의 엄격함과 전문성에 자부심이 있으며, 자기 분야의 공론이나 공통의 노하우를 지나치게 신뢰”한다. “동시대의 통찰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분야의 통찰가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적대시하는” 특징을 드러낸다. 카우프만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거의 모든 인문학이 대학에 소속된 이후,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이 바로 그런 축에 속한다고 꼬집는다. 

‘저널리스트’ 유형도 비판의 도마에 올린다. 카우프만은 이 유형에 대해 “첫눈에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원고를 제공하지만, 몇 년 지나면 그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다”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부류”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미국의 문학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을 “2차 저작물에나 의존할 뿐 아니라 책의 곳곳에 숱한 오류를 남기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유대인 출신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체주의의 가장 중요한 근거인 종교재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 나오는 야간의회에 관한 내용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공격한다.

카우프만이 인문학자의 유형을 이렇듯 넷으로 구분하는 까닭은 ‘무너지는 인문학’에 대한 안타까움 탓이다. 그는 통찰가와 소크라테스가 사라지고, 사변가와 저널리스트 유형이 판치는 현실에 대해 애통한 심사를 감추지 않는다. “(인문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점점 사변가가 되어갔으며,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는 절멸했다”고 강조한다. 특히 카우프만이 응시하는 과녁은 인문학의 무덤이 된 ‘대학’이다. 그는 “오늘날의 대학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토론과 비판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적 유형”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시기는 1970년대였다. 하지만 인문학의 붕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21세기적 상황은 한층 열악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문화’를 앞세운 대학들이 통찰가와 소크라테스를 몰아냈다는 그의 지적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적확하다.

이 책은 카우프만이 스스로 밝힌 대로, 모든 인문학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예컨대 교수와 서평가, 편집자와 저널리스트, 번역가 같은 이들을 염두에 뒀다. 그래서 책을 읽는 방법과 서평을 쓰는 태도, 번역가와 편집자를 향한 비판과 고언 등을 에세이적 문체로 풀어놓는다. 카우프만은 책의 말미에서 “위대한 고전을 보존하고 양육하며, 그것을 통해 인류의 대안과 비전을 탐색하는 것”으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를 정리한다. 이어서 ‘탐색과 질문, 비판’을 인문학의 ‘정도’(正道)로 제시하면서, 교수와 언론인, 편집자 등의 지식인들에게 “너 자신을 한 번 돌아보라”고 권유한다.

카우프만은 독일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프린스턴 대학에서 33년간 철학을 가르치면서 5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니체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0. 29. 

 

P.S. 니체 번역서 외 카우프만의 주저는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인데 니체 '열풍'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번역될 기미가 없다. 개인적으론 <실존주의,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 같은 선집도 카우프만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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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문학자의 마음가짐과 인문학의 미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1-07 20:04 
    이번주부터 격주로 주간경향에 북리뷰를 싣는다. 첫번째 책으로 고른 것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 이미 소개기사를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서평에서는나대로 중요하다 싶은 대목을 간추렸다.주간경향(11. 11. 15)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인문학의 미래가 인류의 미래다!”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에서 던지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예언이나 확신이 아니라 희
 
 
태공 2011-10-29 14:21   좋아요 0 | URL
관련 기사가 생각나서 링크합니다.... ㅠㅠ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logId=4699773&userId=kyoungbin


로쟈 2011-10-29 17:58   좋아요 0 | URL
몇달 전인가 이슈가 됐던 내용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10-30 17:13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서는 한길사에서 <헤겔>이 번역되어 헤겔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인데 요즘 그 책 구하기가 영 힘들군요.영어권은 독일 철학에 약해서 카우프만이 몇 안 되는 헤겔 전문가잖아요.

로쟈 2011-10-30 17:16   좋아요 0 | URL
영어권이 독일철학에 약하다는 건 좀 옛날얘기 아닐까요?^^ 카우프만이 활동하던 시기였다면 모를까. 찰스 테일러 같은 이도 걸출한 헤겔 전문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30 20:56   좋아요 0 | URL
찰스 테일러 것(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은 구해놨는데 카우프만 것이 없어서 아쉬워요.그외 영미권 철학자 중 헤겔철학에 정통한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세요(핀카드 것은 너무 비싸서 도서관에서 빌려볼까 합니다).그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헤겔 관련서적을 꽤 많이 사모았는데 영미권 것은 찰스 테일러 것밖에 없습니다.<이성과 혁명>은 영어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마르쿠제를 영미권 학자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요.

로쟈 2011-10-30 21:09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는 지젝이죠.^^ 저는 대학의 '전문가'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푸른바다 2011-11-06 21:49   좋아요 0 | URL
찰스 테일러의 <헤겔 철학과 현대의 위기>는 일종의 축약본이고 방대한 Hegel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테리 핀카드가 정신 현상학 새로운 영역본을 인터넷에 공개했습니다. 쉽게 다운 받아서 볼 수 있습니다.^^ 영미권이 독일 철학에 약하단 건 정말 옛날 이야기고 제가 알기론 독일보다 독일 철학 연구가 더 발달해 있는 걸로 압니다.^^ 미국이 아직 학문의 세계에선 앞서가고 있습니다.^^

푸른바다 2011-11-06 22:06   좋아요 0 | URL
카우프만의 <니체>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었군요... 저도 원서는 갖고 있습니다만. 카우프만은 <정신의 발견>이란 책으로 제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프로이트, 아들러, 융을 비교한. 그는 프로이트 지지자였죠...

로쟈 2011-11-07 07:55   좋아요 0 | URL
<정신의 발견>은 말씀하시니 생각나네요. <니체>가 번역되지 않은 건, 국내 니체 수용이 찻잔속의 태풍이 아니었나란 생각을 하게 돼요. 프랑스판 '새로운 니체'만 수용된 감이 있습니다...
 

종교분야의 책은 따로 분류하고 있진 않지만 '이주의 종교서'에 해당하는 책은 박노자의 <붓다를 죽인 부처>(인물과사상사, 2011)였다. 당장은 손에 들 여유가 없어서 제쳐놓았었는데, 막간을 이용해(목에다 파스를 붙이고 잠시 쉬고 있다) 기사라도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11. 10. 22) 대입 수험 기도·대형 불사 건립… 한국의 불교 지나치게 세속화"

"한국에서 불교는 자본주의의 병리 현상을 내면화한 개신교와 정체성이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와 유착하고 기복의 상징처럼 돼 버린 건 불교 정신의 변질일 뿐이지요."

한국 사회의 국수주의, 자본주의 문제 등을 비판해온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가 이번에는 세속에 찌든 한국 불교에 죽비를 내리쳤다. 계간 인물과사상에 연재한 글을 묶은 <붓다를 죽인 부처>(인물과사상사 발행)에서다. 그가 불교를 화두로 삼았다는 게 언뜻 생뚱맞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 교수는 자신을 "남을 살리는 불교적 삶을 동경하는 불자"라고 자주 말해왔다. <우승열패의 신화>(2005)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2007) 같은 저서에서는 불교적인 생각을 사회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했다. 



이번 책에서 그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는 고다마 싯다르타의 다른 명칭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음역되는 과정에서 한자 '불(佛)'이 됐고 다시 한국에서 '부처'라고 불렸다"며 "부처란 말은 한국화한 불교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붓다, 즉 원리불교를 죽이고 부처(한국화 된 불교)가 된 종교가 국가와 자본에 종속되거나 최소한 편안한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박 교수는 고향인 러시아 레닌그라드에서 고등학생 시절 <법구경>을 읽으며 불교와 처음 만났다. 그가 불교에 '꽂힌' 이유는 연대와 상생이라는 불교의 철학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련 붕괴과정을 차례로 지켜보며 인간의 폭력성을 고민하던 당시, 상생과 비폭력을 설파했던 불교 경전은 '큰 충격이면서 감동'(44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정작 불교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 만난 불교는 자신이 경전으로 알던 불교와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불교에는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꼭 신이 있어야 종교가 되는 게 아니니까. 종교는 개인을 압도할 수 있는 인식의 패러다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하죠. 불교가 세속화하면서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책에서 '대입수험 기도' 같은 기복신앙, 대형 불사 추진 등 한국 불교계의 문제점을 두루 지적하며 불교가 한국에서 국가주의와 결탁해온 과정을 추적했다. 이를 테면 호국불교라는 말은 살인하는 부처 같은 모순적인 단어이지만 '세속오계'를 강조하는 국가(신라)의 지속적인 교육과 불교계의 묵인으로 거부감 없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한국의 기독교에는 문제가 없나"는 질문에 그는 "한국 개신교는 자본주의의 이념이 되어버린 느낌"이라며 "대형 교회의 설교를 들어보면 가난을 신앙 부족으로 설명하거나 부자가 되는 걸 신이 바라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바로 한국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을 내면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불교의 형편도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그는 "불교 역시 자본주의와 대립각을 세우는데 실패했고 크게 볼 때 두 종교가 다르지 않지만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힘이 없는 게 현실"이라며 "초기 불교 교리로 돌아가 '붓다'의 가르침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불교를 신앙으로서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회와 우주를 사색하는 밑거름으로 삼았으면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처음 이메일 인터뷰를 청했지만 그는 전화로 이야기 하자고 했다. "최근 10주간 육아휴직을 해서 9살, 10개월 된 두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그 편이 시간이 덜 걸린다는 이유였다. 자신의 한국학 수업은 다른 강사가 대신한다. 한국의 대학교수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만 박 교수는 "노르웨이는 복지가 잘 돼 있어 일반인이 자본주의 모순을 덜 느끼는 게 사실"이라며 "반자본주의 시위도 여기서는 별로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가 "꼭 하고 싶은 말"이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저에게 종교는 목적이 아니고 수단입니다. 남과 연대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이지요."(이윤주기자) 

11. 10. 23.  

P.S. 짐작할 수 있지만 불교서적은 차고 넘친다(기독교서적만큼은 아닐지라도). 그중 '교양 불교'로 분류할 만한 책 몇권을 골라놓는다. 읽은 책이 아니라 언젠가 읽어보려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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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1-10-23 19:32   좋아요 0 | URL
지금은 품절이지만, 불연 선생님의 불교개론강의도 좋은 책이지요.

로쟈 2011-10-23 20:0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관련서가 너무 많아서, 저로선 종교학자들의 책을 고르게 됩니다...

2011-10-23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3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10-24 19:57   좋아요 0 | URL
여튼 우리나라에만 들어오면 모든 종교는 기복의 대상이 되는 것 같아욤..ㅎㅎ

로쟈 2011-10-26 08:26   좋아요 0 | URL
저는 한국적 허무주의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과학분야의 이번주 관심도서는 리처드 랭엄의 <요리본능>(사이언스북스, 2011)이다. 원서는 'Catching Fire'이고 그 부제는 '어떻게 요리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는가'이다. '본능'이란 말 때문에 자연스레 떠올린 책은 <전쟁본능>(살림, 2010)인데, 전쟁이 인간의 일곱번째 본능이라고 주장하는 책도 이번주에 나왔다. 중국의 저술가 자오신산의 <전쟁호르몬>(시그마북스, 2011). 전작인 <천재적인 광기와 미친 천재성>(시그마북스, 2010)도 사두긴 했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이 생소한 저자에 대해선 판단을 보류해놓은 상태다. 긴가민가하지만 <전쟁본능>도 구해놓은 터라 <전쟁호르몬>도 주문은 넣었다. 물론 먼저 읽을 책은 <요리본능>이다.    

서울신문(11. 10. 22) 요리를 시작한 인류, 진화에 속도를 붙이다

야구 좋아하는 할머니와 함께 서울 잠실야구장에 갔다고 치자. 대략 6만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경기장이다. 당신 오른편엔 할머니를, 그 옆부터는 증조할머니 등 모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순서대로 유령들을 앉힌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당신 왼편에서 누군가 툭툭 치며 알은체를 할 게다. 할머니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그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다. 그 원시 인류가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당신에게 오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건 무엇일까. 



그 답을 ‘요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인류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랭엄이 지은 ‘요리 본능’(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골자다. 랭엄은 책을 통해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불의 사용과 익힌 음식의 등장”이라고 주장한다. ‘불에 익혀 먹는 행위’, 즉 요리가 인간의 해부학적 변화를 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리적·심리적·사회적 변화로 이어져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혁신적으로 진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저자가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한 침팬지의 먹이 행동과 생태, 인류의 생활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지의 원시 부족들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 그리고 선행 인류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을 기반으로 더욱 공고한 설득력을 갖는다.  

불에 익힌 음식은 맛도 좋지만 소화율도 높다. 그 덕에 인간의 몸이 소화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게 됐다. 이뿐 아니다. 가열 조리는 세균이나 각종 병원균을 제거해 보다 안전하게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게 했다. 날것을 씹을 때보다 품도 덜 든다. 이때 여분의 시간과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인간은 이를 품이 많이 드는 사냥 등에 투자했다. 게다가 날것에 비해 익힌 음식에서 추가 에너지가 생기고, 소화 기관이 줄어들며 절약하게 된 에너지와 합쳐져 지구상 그 어떤 동물보다 큰 용량의 뇌를 갖게 됐다.  

랭엄은 불에 먹거리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류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역설한다. 유인원 같은 모습을 벗어 던지고 더 이상 어두운 밤과 추운 겨울, 대형 육식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되레 이들과 맞서 싸우며 아프리카 대륙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불가에 모여 앉아 사냥한 먹이를 나눠 먹으며 집단을 이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성 등을 발달시켰고, 사냥을 하는 자와 요리를 하는 자라는 성별 분업과 결혼이라는 남녀 간의 제도적 결합도 탄생시켰다. 이처럼 익힌 음식으로부터 얻은 풍부한 열량은 지구상 그 어느 종보다 큰 두뇌를 가질 수 있게 한 데 더해 고도로 발달한 언어와 문명사회를 이룩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요리다.(손원천기자) 

11. 10. 22. 

 

P.S. 요리 얘기가 나온 김에 거들자면, 이탈리아 요리계의 '스타 셰프'로 통하는 박찬일의 신작도 이번주에 나왔다. <어쨌든, 잇태리>(난다, 2011). 내가 추천사를 썼던 엘레나 코스튜코비치의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랜덤하우스코리아, 2010)의 감수를 본 이가 박찬일 셰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엊그제도 들렀던 홍대 앞 레스토랑 '라꼼마'의 주방장이므로 인연이 아예 없진 않다. 음, 주말엔 어쨌든,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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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2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22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데르센과 동화작가의 진실

주말 북리뷰를 대충 훑어보다가 발견한 책은 '주석달린'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주석달린 안데르센 동화집>(현대문학, 2011)이다. 안데르센 동화에 대해 예전에 쓴 글을 좀더 증보할 일이 있어서 안 그래도 책을 구하려고 했는데, 마침 최적의 판본이 나온 듯싶어 반갑다. 냉큼 주문을 넣고 소개칼럼은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1. 10. 22) 안데르센 동화에 첨부한 ‘불편한 진실’

안데르센 이야기를 빼놓고 어린 날의 ‘도덕’이란 걸 이야기하긴 힘들다. 아이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읽으며 언젠가 찾아올 비상을 기다릴 줄 알게 되고 ‘성냥팔이 소녀’를 읽으며 동정심을 알게 되었다. ‘인어 공주’를 읽으면서 자신의 전부를 거는 슬프고 맹목적인 사랑이란 게 있다는 걸 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안데르센 동화집을 다시 읽으니 새로운 게 눈에 들어온다. <주석 달린 안데르센 동화집>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은 ‘황제 폐하의 새 옷’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황제가 사기꾼들에게 속는 장면부터 새롭다. 사기꾼들은 자신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예쁜 옷감을 짤 수 있는데 그 옷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자신의 직위에 맞지 않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황제는 자신의 새 옷으로 왕국에서 누가 제 직위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건 내 어린 시절 기억과는 다르다.

나는 어려서 사기꾼들이 신비로운 옷감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며 사람들을 속여 넘긴 것으로 들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란 게 들통날까 두려워 속아 넘어가는 걸로 알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착한 사람이고 싶어서 내키진 않아도 속아주는 그런 전전긍긍은 어딘지 인간적으로 공감이 가는 구석이 있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냐 아니냐, 자신이 어떤 존재냐를 결정하는 것은 머릿속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은 책에서 황제를 포함해 그 옷을 본 모든 대신들은 옷감이 보이질 않자 ‘아니 어떻게 내가 내 지위에 맞지 않을 수 있어? 이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말아야지’란 생각으로 위선을 떨게 된다. 사람들이 용기와 정직함을 잃게 되는 동기가 도덕이 아니라 지위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는 사실은 현대의 정치판에 비추어 볼 때 크게 다가온다.

그런데 어른들이 작은 것 하나에도 자기 이해관계와 평판이 걸려 조마조마해할 때 한 어린아이가 “하지만 폐하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잖아요!”라고 말한다. 아무런 계산도 없는 순수한 마음은 늘 어른들을 당황하게 한다. ‘아무 목적이 없음.’ 이것이 결과적으로 어린아이를 용기 있게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 어른들도 그렇게 행동하면, 그러니까 직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황제의 새 집, 아니 새 옷에 대해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갖게 됐을 것이다.

‘황제 폐하의 새 옷’에는 신나는 순간이 한 번 더 있다. 어린아이가 진실을 말한 다음에 어른들이 수군수군 그 말을 옆에서 옆으로 전하다가 마침내 다 같이 “그래, 폐하는 아무것도 입지 않으셨어”라고 외칠 때다. 여기서 “폐하가 벌거벗었다고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란 냉소주의자 어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중요한 변화들은 바로 진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선함, 현명함, 그 외의 다른 많은 덕성들이 발휘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무서운 이야기 하나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무서운 이야기는 “폐하가 벌거벗은 걸 눈앞에 보고서도 어떤 아이도 폐하는 벌거벗었대요! 라고 외치지 않았다”로 끝난다.(졍혜윤_CBS 피디) 

1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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