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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일찌감치 나온 <창작과 비평>(2006 여름호)을 구내서점에서 사들었다. 읽을 만한 글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데, 물론 내게 결정타는 슬라보예 지젝의 '반인권론'이 번역/소개되어 있다는 것.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비판'이란 글도 목차에서 바로 눈에 띄었는데, 프레시안(06. 05. 17)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떠있길래 옮겨온다. 필자는 강양구 기자이며, 타이틀은 "<재인식>은 진보파 사관에 대한 전면적 보수 반격"이다.

 

 

 

 

지난 2월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놓고 양 진영의 논란과 설전이 얼마간 오고간 바 있는데, 본격적인 건 이제부터라는 예감을 갖게끔 한다(<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이를 계기로 지난 3월에 재출간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일독해 볼 만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인식>)을 비판하고 나서 보수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에 대해 진보학계의 본격적인 반론이 제기돼 주목된다.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을 지낸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는 최근 발행된 이 잡지 2006년 여름호(132호)에 '다시 찾아온 토론의 시대'라는 글을 기고해 <재인식>의 편집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최 교수는 "보수언론의 격고(擊鼓) 소리가 요란하기도 하거니와 언론에 노출된 편자들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지 않은가 해 내심 혹 빈 수레가 아닐까 하는 저픔(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완독하고 난 첫 느낌은 꽤 충실한 선집이라는 안도감이었다"고 책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논문들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편자들의 주장을 상기하자 의심이 떠오른다"며 "논문을 가려 뽑은 편자들의 실제적 안목이 훌륭한 데 비해 그것을 총괄하는 편자들의 시각은 매우 단석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편자들과 필자들 사이에 균열을 염두에 두면 이 책의 편자들은 과도한 대표성을 행사한 것은 아니냐"고 반문했다.
  
-최 교수는 "<재인식>의 편자들은 개혁정권들의 연속 속에서 훼손된 한국근현대사의 '적통', 즉 식민지 시대와 이승만 시대와 박정희 시대의 일관성을 총체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며 "민족해방운동과 반독재민주화운동과 분단극복의 통일운동을 축으로 삼는 진보파의 사관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반격"이라고 지적했다. 

 

 

 

 

-최원식 교수는 특히 <재인식> '머리말'에 대해 "박지향의 글은 논리의 분열로 논술이 가지런하지 못해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며 "치밀한 분석이 돋보이는 논문을 책에 게재한 그가 어떻게 이 머리말에서는 이리 변신할 수 있느냐"고 꼬집은 뒤 본격적으로 편자들의 '단선적인 시각'을 비판했다. 최 교수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그의 의식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정치적"이라며 "그가 이 책의 기획이 우리 현대사를 부정하는 참여정부 집권층의 역사의식을 교정하기 위한 역사학자의 책임감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그의 동지들은 현 집권층에 '못된' 역사의식을 주입한 배후주범으로 <인식>을 고발하기에 이르는데 왕년 공안검찰의 논고를 어쩌면 그리 닮았느냐"며 "'머리말'에는 사학의 바탕 중의 바탕인 실증적 접근이 부재한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엄중한 시기에 나온 1권과 상대적 해빙기에 출현한 나머지 권들 사이를 분간해야 마땅하고 무엇보다 누구의 어떤 글이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작업방식으로서 마땅하다"며 "<인식>이 정말 문제라면 총서 6권을 풍문에 의거하여 단매에 뭉뚱그릴 것이 아니라 정밀히 검토해서 '문제의 역사'를 새로이 구성하는 엄격한 선행 작업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최원식 교수는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학)에게는 좀 더 매서운 비판을 던졌다. 최 교수는 "나는 평소 그의 주장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실증적 작업에 기초한 그의 견해들에 대해서 관련 학계가 성실히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곤 했다"며 "그런데 이번 글은 달랐다"고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최 교수는 "이영훈이 강만길의 '해방전후사 인식의 방향'에서 단 두 대목을 따 이 글을 '민족지상주의'로 단정하고 최장집 등의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을 친북혁명론으로 간단히 요약하는 것에 이르면 당혹스럽기조차 하다"며 "특히 최장집 등의 글을 '젊은 시절 한때 그 혁명에 영혼이 팔려본 사람이면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는 식의 독심술까지 동원해 매도하는 것은 학술적 엄밀성을 누구보다 주창하는 이영훈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최 교수는 또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한국에서 좌파 민족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이 결코 쇠퇴하지 않'게 된 연유를 탄식 속에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민간 공안을 뺨친다"며 "그는 급기야 <인식> 전체를 사회주의혁명론이라는 결론으로 비약하고 있는데 1980년대에 이런 경향이 대두한 것이 중반경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1979년부터 89년까지 출간된 이 총서 전체를 이렇게 과감히 단순화하다니 (이런 식이야말로) 그가 통탄해 마지않은 '역사와 정치가 구분되지 않'은 글쓰기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최근 발행된 <녹색평론> 5~6월호(제88호)에 <재인식>에 대한 비판을 기고한 이승렬 영남대 교수(영문학)는 <재인식>의 근저에 깔려 있는 '근대주의'를 톺아볼 것을 제안했다. 이 교수는 "개발과 근대화만 이루어진다면 식민지든, 독재든,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든지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길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며 "민족주의 역사관에 대한 대안으로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문명사로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재인식>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재인식>의 편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탈민족주의적 인식론의 근저에는 한국의 현대사가 근대 문명의 이식이라는 문명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며 "이렇게 근대 문명 우월주의라고 불러볼 만한 인식은 근대 문명이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오기 이전에 존재해 오던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은 (근대 문명을 실현할) 국가의 틀 속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국가주의의 인식으로 연결되는 양상을 아울러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승렬 교수 역시 '근대주의'를 강하게 보여주는 예로 이영훈 교수를 들어 비판했다. 이 교수는 "<재인식> 프로젝트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영훈의 글에서 일제 식민통치가 좀 더 길었다면 해방 이후 한국 역사가 더 쉽게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등장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식민지의 역사는 억압과 침탈의 역사가 아니다"며 "식민지는 보편적인 문명사와 야만적인 우리의 전통 역사가 융합할 수 있는 계기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영훈에게 식민지는 강자의 문화, 즉 보편의 문화를 이식시키는 것이자 또 야만적인 약자의 문화가 더 보편적인 강자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며 "이것은 이영훈이 근대 이전의 소농사회를 가리켜 마녀, 이교도, 저주의 세계라고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본성이 마음껏 꽃피는, '경제인간'들이 만드는 근대의 도시 공간을 문명의 이상향으로 보는 이영훈의 입장에서는 소농사회는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경제인간들이 만든 근대사회에서 황폐화된 도시의 빈민촌이나 농촌을 바라보면 근대의 풍요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이영훈은 (독일의 철학자) 루돌프 바로의 말을 인용해 '기존의 사회주의는 낡은 생산양식 위에 건립된 전제정치'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바로 바로야말로 자유와 이기심을 한껏 고양시켜 이룩한 시장경제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정의롭지 못한 야만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결론적으로 "<재인식>은 '강한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국익 우선주의와 사회 전반적으로 '개인'의 가치가 확산되는, 즉 자유로운 개인과 강한 국가를 동시에 염원하는 대중들의 모순적인 욕망에 호소하고 있다"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대성의 폭력과 탐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사적 비전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강조했다. 즉 '재인식'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06. 0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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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5-19 00:49   좋아요 0 | URL
정리가 안되지만 몇글자 적겠습니다. 이영훈의 비판이 어이없어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찝찝한것이 드러난것만으로 토론이 되는것인지 비판속에 사적인 관계 혹은 이해같은것이 전제된것은 아닌지 그런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신용하교수의 독도에 대한 글이 며칠전 신문에서 보았는데 지난주인가 출처가 기억이 안나는데 안병직교수 대담글에서 신용하가 지금 독도를 가지고 국제재판소 가면 일본측 역사적 자료가 잘되어 불리하다 뭐 이런 식의 애기를 덧붙이면서 한것을 읽다보니 독도에 대해 열정적으로 애기하는 신용하교수의 칼럼을 보다보니 뭔가 사기당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을 읽다가 보니 인혁당에 대해 인권위가 내린결정에 대해 고마워할까 하는 의문을 던지는 구절도 있고. 또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주사파인 애기도 나오던데.
지식인들에 대한 찝찝함이랄까. 뭔가 네바다이 당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로쟈 2006-05-19 08:27   좋아요 0 | URL
저도 정리가 안되네요. 다만, 역사와 정치가 구분되지 않는 글쓰기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 정도입니다...

비로그인 2006-05-19 11:53   좋아요 0 | URL
독도문제가 우리가 불리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일본은 일본학을 하는 외국학자들이 많은데, 우리는 한국학 학자가 드물고, 다수의 외국인 한국학자들이 중국, 일본하다가 한국으로 방향을 돌린거라 파워가 약합니다.
물론 우리가 자료가 적다는 것도 불리하기도 하지요.

사마천 2006-05-19 23:43   좋아요 0 | URL
한국사람은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죠. 그러다보니 협상에 가면 많이들 지고 옵니다. 차분한 고이즈미가 펼친 정책이 일본내와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에 비해 말많고 한일 없는 노무현은 다른 나라 지도자들 사이에서 왕따입니다. 정당에 있는 분 하는 말씀이 정부의 꽤 고위직에 있던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6-05-20 00:23   좋아요 0 | URL
우리가 불리한 데다가 왕따라... 음, 엎친 데 덮친 격이군요...
 

 

 

 

 

지난주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나남, 2006)의 제2권을 먼저 구입했다. 이전에 나온 국역본 <소통행위이론>(의암, 1995)도 갖고 있기에 제1권의 구입은 일단 미루어둔 것. 영역본도 갖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버텨보자는 생각이었고, 제2권을 먼저 읽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판단에서였다. 저자의 명성과는 다르게 막상 주저들이 번역/출간되면 본격적인 서평이 잘 나오지 않는 듯했는데(물론 내가 눈이 밝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며칠전 교수신문(06. 05. 03)에 홍윤기 교수의 서평이 게재되었길래 이 자리에 옮겨온다(홍교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의 철학>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다수의 관련논문을 갖고 있다). '워밍업' 차원에서 도움이 될 듯하기에. 서평의 제목은 '20세기 최후의 파우스튼적 지성의 지향점을 보며'이다.  

-이 몇 년간 공사석을 막론하고 장춘익 교수를 보기가 어렵다는 얘기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 새로운 뉴스가 아니었다(*장춘익 교수가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역자이다). 생각해 보면 논문심사나 논평 같이 학계의 궂은 일을 본인이 마다한 적이 별로 없는데도 장 교수가 주는 그런 인상은 올초까지 내 마음 속에 깊이 어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장 교수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특한 내 나름의 마음 씀씀이는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장 교수의 은신과는 전혀 별도로 나는 나의 대학원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읽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하버마스의 논변윤리(Diskursethik)에 관한 1980년대의 문고판 책, 즉 <도덕의식과 의사소통적 행위>가 조야하나마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비록 1백여 쪽에 달하지만 보편화용론에 관한 1976년의 초기 논고를 영어본으로 읽게 하는 데까진 성공했어도 2권으로 된 독일어 원본 쪽수만 1천1백27쪽에 달하는 이 장광설을 무슨 수로, 하다못해 영어본으로라도 읽도록 해야 하지 않는냐 하는 부담은 명색이 선생으로서 넘어야 할 교육상의 난제로 근 7년간 마음을 짓눌러 온 부담이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체계와 생활세계의 식민지론’에 관한 부분만 예전에 일부 번역됐었고, 그 제1권은 전문이 완역되긴 했었다. 하지만 이 부분 번역자분들의 선구적 노고에도 불구하고 우선 한국어로 읽기가 어려워 이 책에 대한 거부감이 영원히 남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마음이 저리는 판이었다. 결국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여전히 교수로서 나의 교육역량을 계속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물론 직접 번역해 볼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것을 독일어로 읽었던 유학시절의 악몽이 조건반사적으로 상기되면서 책갈피를 넘기는 손가락이 또 오그라드는 경련을 느끼곤 했다.

-그런 와중에 장 교수가 이 책을 완역했다는 소식을 좀 늦게 알게 됐다. 첫 번째 생각? 당연히 안도의 한숨이다. 내가 번역하지 않아도 되고, 또 장 교수 번역이라면 우리 친구들에게 한국어 저작처럼 읽게 할 수 있으리라. 그럼 두 번째 생각? 장 교수에 대한 고마움? 천만에! 간사한 것이 인간심리라고 두 번째로는 동학으로서 엄청난 질투심이 들었다는 걸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하, 내가 왜 장 교수처럼 매일 마늘을 먹고 쑥대를 짚어보는 세월을 보내지 않았던고?! 이 번역상의 쾌거를 장 교수가 차지하다니.

-그리고 책을 실제 받아보았을 때, 그리고 그 번역 상태가 거의 ‘우리말’로 쓴 논술처럼 읽혀지면서, 하버마스 또는 여타 유명한 구미 철학자들의 번역본이 한국어로 읽히지 않았을 때 느꼈던 그 전공자로서의 알량한 안도감― 남의 결과물을 앞에 놓고 나도 이 정도는 하지 뭐 하는 바로 그런 옹졸함―을 이번에는 느낄 수 없었을 때, 같은 분야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느꼈을 그 상실감을 아마 교수 독자분은 공감해 주리라 믿는다.

-그 존립 방식에 있어서 19세기 이래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철학이 본질적으로 강단철학이 됐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철학을 체계적으로 ‘교육’받게 됐음을 뜻하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문제를 숙고하는 생각함의 절실한 고통’이 철학함의 중요한 과정으로 들어설 여지가 없어졌음을 뜻하기도 하다. 사실 칸트의 3대 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 및 <대논리학>, <철학강요>, 그리고 맑스의 <자본>은 그것을 ‘읽는 것’이 그들 저자가 생각한 ‘삶을 사는 것’이 되고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생각함이 삶이 되는 전 과정을 그대로 체현해 준다.

-독일 지성에는 분명히 앵글로-색슨 계통의 분석적 치밀함이나 라틴 계통의 발랄한 자기체험과는 구별되는, 파우스트적 성숙에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고문화가 약동한다는 특성이 있다. 이 파우스트적 자기성숙에의 집착은 프랑스적 계몽주의를 ‘내면화’시키는 데 엄청난 저력을 발휘하는데, 철학이 대거 강단철학이 되면서 그 장점은 도리어 거추장스러운 사변적 번문욕례가 돼버렸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내면적 계몽으로 추동되는 은밀한 정신과정이 거의 필요없게 되어가는 듯한 20세기 후반기에 합리성이라는 주제를 두고 맑스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선배에 이르는 그 좌절과 방황의 사고 행보를 지치지도 않게 1천 쪽이나 서술해 놓았다. 사실 ‘의사소통행위이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장 교수를 질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하버마스를 질투하던 그의 어떤 동료분 말처럼, A4 용지 딱 20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학원식 논술 대비 방식에 따르면 A4 한 장 안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을 딱 4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인간이 표출하는 의견과 행위는 합리적인 성질을 가질 수 있으며(이 때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성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현대 언어 철학은 이것을 의사소통과정에서 오가는 언어사용의 형식적 조건들 안에서 부인할 수 없이 보편타당한 것으로 확증할 수 있다는 것. (이 때 언어사용의 형식적 조건들이란 ‘말해지는 언어적 표현’의 이해가능성, ‘말해진 명제’의 진리성, ‘말하는 이’의 진실성, 그리고 ‘듣는 이에 대한 책임 있는 응답’을 가리킨다.)

2. 바로 이런 합리성 조건이 ‘개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안에 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이런 식의 합리성을 전면적으로 실현하지 못한 채 사회를 합리화하는 과정이 인간 삶을 物化시키는 과정으로 변질되어 왔다는 것.

3. 이 때 인간의 삶을 물건처럼 만든 가장 주된 원인은 합리성, 사실은 기능적 합리성의 명목 아래 인간의 삶을 기능체계로 분절시켜 그 안에다 부속시킨 사회체계의 메커니즘에 있으며 이에 따라 시민의 생활세계는 체계의 내부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

4. 그리고 ―이쯤 되면 하버마스가 당연히 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 쓴 필자의 용어를 슬쩍 끼워넣자면― 이런 ‘체계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생활세계의 해방 잠재력은 바로 이 생활세계의 의사소통과정에서 그냥 굴러다니는 타당성의 요구를 끊임없는 論辨(Diskurs), 즉 장 교수의 ―내가 보기에― 아주 부적절한 번역에 따르면 討議를 통해 체계에 제기해 그 지배력을 항상 잠식시켜 나가는 것뿐인데, 현대 들어 그런 과업은 아직 완결 내지 완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이 책은 분명히 사회학의 문제 영역에서 사회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정해 놓은 철학적 사고의 구도를 숙지하지 못할 경우 단지 사회학적으로는 충분히 납득되지 못하는 명제들이 빈출한다. 우선 이 책은 루카치가 그 지평을 열었던 서구 맑시즘의 전통에서 정교하게 가다듬어졌던 ‘물화’ 개념을 쓰면서도 20세기 맑스주의적 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에서 빈번하게 거론하던 3가지 주제어, 즉 소외, 착취,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전혀 투입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이미 현대 사회체계의 정당성 기반을 묻는 하버마스의 준거점이 더 이상 정신분석학이나 정치경제학비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그는 영미사회학의 비조쯤 되는 탈코트 파슨스의 ‘체계’ 개념에서 기능 차원에 몰입해 사실상 간과 내지 배제시켰던 규범 차원을 체계의 한 요인으로 복구시켰다. 다시 말해 어떤 체계적 기능도 정당성 차원의 이의제기를 우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나의 이 기고만장한 요약만 보고 <의사소통행위이론>, 그것도 이 국역본을 직접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기반사회를 향해 질주하는 21세기에 철학적으로 낙오한다는 것을 뜻한다. 초월자에 기대어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고집할 수 없다는 ‘신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이 확인한 20세기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 책은 인간이 여전히 파우스트적 자기성숙을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과 씨름하면서 번역투의 짜증스러움을 벗어나는 것이 보장되는 대신 ‘담화행위’(Sprechakt) 같은 보다 친숙한 낱말이 있음에도 ‘화행’ 같은 요상한 번역어를 투입한 역자의 자잘한 부적절성을 독자가 여러군데서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본다면 번역자에 대한 필자의 질투심이 독자에게도 통했다는 알량한 옹졸함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하버마스는 언어학의 용어들을 많이 가져오는데, '화행' '화행론'은 일차적으로 국내 언어학계에서 관례적으로 쓰는 용어이다. 그것이 '자잘한 부적절성'을 증거하는지는 모르겠다. '즐거움'?).

 

 

 

 

06.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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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없는 날이지만 저녁 모임 때문에 느지막이 나갈 채비를 하면서 먼저 세탁기 돌리고 커피 한잔을 마신다(문득 러시아에서 마시던 커피가 얼마나 맛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믹스커피인 건 똑같지만, 그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웠고 비쌌다. 새삼스런 결론은 아지만, '맛'을 결정하는 건 성분만이 아니다. 그건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일까?)

막간에 몇 군데 둘러보다가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온다(세상은, 둘러보면 다 보고 배울 만한 것 천지이다. 읽어야 할 책들이 천지인 것처럼). '프레시안'(06. 05. 01)에 실린 강양구 기자의 기사인데,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질적'으로 나빠졌나?"란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안 그래도 엊저녁 신문을 보다가 백낙청 교수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 책의 내용을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사이기도 하다. 어차피 '책'에 대한 내용인 만큼 알라딘 식구들이 나눠 읽어봐도 좋겠다.

 

 

 

 

-국내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또 다른 대표 격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를 정면 비판해 주목된다. 백낙청 명예교수는 그간 수차례에 걸쳐 "분단체제를 외면한 양극화 논의는 공허하다"며 국내 진보적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번엔 아예 최장집 교수를 그 대표자로 지목해 비판에 나선 것.
    
-백낙청 교수는 1998년에 내놓은 <흔들리는 분단체제>(창비 펴냄) 이후 8년 만에 펴낸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펴냄)에서 보론 형식의 글을 통해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논의를 정면 비판했다. 이 책에 실린 16편의 글 중 기왕에 발표되지 않고 이 책을 위해 최근 새로 집필된 글이 이 보론뿐이다.
  
-백낙청 교수는 "참여정부가 시도하거나 실행하는 온갖 변화가 분단체제의 극복에 얼마나 실질적인 기여를 하느냐는 기준과 상관없이 '개혁'의 이름으로 무작정 옹호하는 자세도 문제지만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을 현 정부나 그 이전의 개혁정부에만 묻는 것은 부당하다"며 "분단 현실의 존재를 망각하거나 외면한 비판은 곧바로 체제를 굳혀주는 효과마저 지닐 수 있다"는 말로 논의를 시작했다.

-이어 백 교수는 최장집 교수를 직접 실명 거론하면서 본격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판, 후마니타스, 2005)를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진술로 시작하고 있다"며 "역설적이게도 이런 진단은 '민주화 세력의 집권으로 망가진 대한민국'이라는 보수 세력의 결론과 맞닿는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물론 신자유주의라는 핵심문제에 대해 최장집과 그들은 정반대 입장"이라며 "하지만 분단체제의 존재라는 또 다른 핵심문제를 외면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분단체제에 물어야 할 책임마저 온통 집권세력 내지는 개혁세력에 돌리면서 결론상의 일치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신자유주의 공세로 한국사회가 여러 면에서 질적으로 나빠진 현상을 감안하고도 과연 민주주의가 퇴행했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며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꾸준히 진전해 온 과정에 대해 한 마디로 '절차상의 민주주의'의 달성에 불과하며 '질적'으로는 나빠져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이 한국 민주주의 후진성의 예로 거듭 강조하는 '노동배제' 문제조차도, 정부가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놓고 들어와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노동계가 거부하는 형태로 '배제'가 실현되는 현상 자체가 독재시대의 노동탄압에 비해 격세지감이 있으며, 전교조의 합법화나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 등도 모두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낙청 교수는 최장집 교수가 "정당과 정당체제를 바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위기'론의 단선적이고 과장된 인식도 지적돼야 한다"며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과도한 집착이 사회운동의 중요성뿐 아니라 그 현황마저 '오진'하도록 만든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은 정당과 정당체제가 아닌 다른 운동이나 활동에 호소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비약을 감행하기 일쑤"라며 "어느 사회에서든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이 정당정치와 다양한 사회운동이 서로 주고받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해당 사회가 분단체제의 일부를 구성하는 분단국일 경우 때로는 국가기구를 통해, 때로는 통치제도 바깥의 운동을 통해 다양하게 진행되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은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논리는, 결국 백패스만을 일삼게 되는 공격수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도 했는데,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사회운동을 강화하자는 논자 중에 사회운동만 하고 정당이나 선거 참여는 일절 배제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느냐"며 "오히려 최장집의 '정치=정당정치' 설이야말로 모든 백패스를 금지하고 측면돌파와 크로스마저 배제하면서 전진패스만을 주문하는 감독을 떠올리게 한다"고 꼬집었다.

-백낙청 교수는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분단체제 극복의 목소리를 높였다. 백 교수는 "최장집이 언급했고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PD(민중민주)와 NL(민족해방)의 결합도 분단시대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서는 제대로 될 수 없다"며 "분단체제 극복이야말로 현 시기 최대의 변혁과제인 동시에 남한사회의 구체적 개혁 작업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백 교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장치가 곧 분단체제이고 남북 각기 상대적인 독자성을 갖는 사회이긴 하지만 분단체제의 매개 작용을 통해 세계체제의 규정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자신의 분단체제론을 강조한 뒤, "이런 인식을 전제할 때 PD와 NL은 한국사회의 구체적 개혁 과제에 초점을 둔 시민운동 및 개혁정당(들)과도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백 교수는 NL, PD, BD(부르주아민주주의)의 3자 결합을 제시했다. 자주통일론(NL), 세계적 시각을 지닌 계급운동(PD)이 분단체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을 통해 시민운동 및 개혁정당(BD)과 결합할 때 한국사회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백 교수는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온전한 대응도 이런 과정에서, 그리고 이 과정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신자유주의 극복 역시 분단체제 극복과 떼려야 뗄 수 없음을 강조했다. 백 교수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에 따른 민주화의 후퇴나 신자유주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잠식은 엄연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분단을 도외시한 해법은 찾을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백 교수는 "'1단계 통일'이나마 이룩함으로써 남북의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를 불퇴전의 영역에 들여놓기까지는 한반도 정세의 악화에 따른 민주화의 역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신자유주의에 조금이라도 맞서기 위해서도 앞에서 얘기한 '3자 결합'에 따른 사회적 동력과 전략적 투자를 시도할 계기와 공간을 남북통합의 과정에서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더 나아가 "이런 시도야말로 현존 자본주의 세계체제보다 생명지속적인 인류문명을 지향하는 장기적 과업에서도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백낙청 교수의 최장집 교수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2005년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서 "한반도에서는 '통일'을 말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선평화론(先平和論)'을 주장했다.
  
-최 교수는 당시 "한반도에서 평화를 만들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북한뿐 아니라 남한사회도 더 많이 민주화돼야 한다"며 "한반도에 통일이 온다고 가정할 때 남한이 통일을 평화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국내 정치적 역량과 기반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며 이 같은 선평화론을 주창했다. 즉 지금과 같은 남한사회 민주주의의 답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설사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민중이 함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이런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미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제131호)에서 유재건('6·15시대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발전구상'), 서동만 교수('역사적 실험으로서의 6·15시대') 등이 비판을 시도했고 이번에 백 교수가 직접 나선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백 교수는 "분단체제의 존재에 둔감한 비판자들의 일반적 성향을 최장집이 예시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후반 NL과 PD의 대립을 연상케 하는 백낙청 교수의 비판은 앞으로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두 석학의 상호토론을 통해 발전적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최장집 교수가 선평화론을 내세우게 된 문제의식도 이미 수차례 백 교수 본인은 물론 <창작과비평> 지면을 통해 언급돼 온 내용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이미 1998년에 출간한 <흔들리는 분단체제>에서부터 일관되게 '분단체제 극복'과 '분단 극복'의 차이점을 강조해 왔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비교적 자율성을 갖는 남·북한의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전제되지 않은 통일은 '분단체제 극복'이 아니라 단순한 '분단 극복'에 불과하며 이로써는 남·북한 민중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또 유재건 교수 역시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제116호)에 실린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에서 "통일시대로 진입하면서 한반도 전체가 경제력과 교육 등의 격차나 사회·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불평등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위계제가 한층 공고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통일에 대해서 우려를 포명한 바 있다. 사실상 최장집 교수가 선평화론을 내세우게 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양 측의 대립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집권 중반을 넘어선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함께 남북관계의 교착과 신자유주의 전면화로 상징되는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백낙청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진실 규명 작업을 민주화의 진전을 위한 중요한 업적으로 열거하고 있으나 최장집 교수는 "참여정부가 사회경제적 문제는 뒷전에 두고 '과거사 진실 규명'과 같은 이념 대립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삶의 현실적 문제와 거리가 먼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지역 개발주의적 사안들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있다"고 비판했었다.
  
-최장집 교수는 조만간 지난 2년간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글들을 모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후마니타스 근간)을 펴낼 예정이다. 최 교수가 백 교수의 지적에 어떻게 반응할지 주목된다.

06.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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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3 1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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