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시절 검찰개혁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목소리만 높았고 개혁은 유야무야가 됐다. 최근 총리실에서 내놓은 검경 수사권 조정안대로라면, 검찰권력은 오히려 더 강화될 수도 있다(임기말에 검찰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김인회 상임운영위원이 권력검찰의 본질을 비판하고 그 개혁방안을 모색하는 책을 냈다.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오월의봄, 2011). '현황 파악'을 위한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을 듯싶다. 최재천 변호사의 <위험한 권력>(유리창, 2011)도 '사유화된 검찰권력'에 일침을 가하는 책이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은 검찰"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 지배의 '합법적 수단'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싶다...  

 

한겨레(11. 11. 26) 문재인의 외침 “민주주의 위해 검찰 개혁하라”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은 검찰이다.” 청와대 민정수석 등 참여정부의 핵심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검찰이 우리나라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압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 이사장과 참여정부 시절 사법개혁위원회에서 일했던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함께 쓴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판을 많이 받는 집단인 검찰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서다. 두 지은이는 다음 정부의 핵심 과제는 검찰개혁이라고 못박는다. 먼저 일본 식민지시대 고위 법관과 검사를 지냈던 사람들이 해방 뒤에도 그대로 자리를 유지했고 일제시대의 불합리한 사법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해방 뒤에는 권력 실세의 정적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면서 안보라는 미명으로 국민의 인권을 앞장서서 탄압해온 점을 상기시킨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은 이런 검찰에 출세와 정계진출이라는 과실을 제공하고 조직에도 압도적인 권한을 몰아주었다.

이런 역사적, 구조적 과오 자체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검찰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히 하고 동시에 민주적으로 통제해 검찰의 독점 권력을 분산시키고 견제하는, 당연하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는 해법이 유일한 방책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의 신설 △검경 수사권의 조정 △법무부의 탈검찰화 △검찰의 과거사 정리 등을 개혁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지은이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참여정부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검찰개혁을 실시했지만 성과보다 실패가 많았다고 평가한다.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절반은 참여정부가 어떻게 검찰개혁을 진행했으며 어떤 부분에서 실패했는지를 강금실·천정배 전 법무장관, 문희상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참여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 이사장은 “당시 검찰의 저항은 상상 이상이었고 엘리트 의식으로 뭉친 특권집단으로 검찰은 개혁의지가 박약했다”고 회고한다. 또 참여정부가 검찰개혁이라는 목표는 있었지만 종합적인 계획이 부족했으며 정당과 행정부가 이런 과제를 서로 공유하지 못한 점을 실패 원인으로 꼽는다.

결국 개혁을 둘러싼 검찰의 저항은 참여정부가 끝나고 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어졌고, 검찰의 꼼수는 한명숙 전 총리 수사로 이어졌다고 지은이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라도 더이상 검찰 개혁을 미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권은중 기자) 

1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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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파국적 재앙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됐다. 데이비드 맥낼리의 <글로벌 슬럼프>(그린비, 2011).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와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세상에서 새로 나오고 있는 GPE(지구정치경제) 시리즈의 첫 두 권도 맥락을 같이하는 책들이다.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2011)와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이 그 두 권이다.

  

경향신문(11. 11. 19) 신자유주의 붕괴, 자본과 타협보다는 저항을

“우리의 가난은 그들의 풍요로움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통은 그들에겐 이득이다.”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신자유주의 30년의 팡파르가 끝난 지금, 99%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은 400년 전의 연극 대사와 극적으로 맞아 떨어진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맥낼리(58)에 따르자면, 2008~2009년의 위기를 촉발한 악성 은행 채무는 “주권국가의 채무로 형태가 바뀌어” 사람들의 목줄을 죄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채무의 증가를 막고자 “긴축시대를 선포”했다. “연금, 교육예산, 사회복지, 공공 부문의 임금과 일자리를 대폭 삭감”하면서 버티기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물론 그 압박은 99%의 몫이다. “세계적 은행들이 받은 구제금융 비용을 노동대중과 가난한 사람들이 대신 지불”하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쓰던 2010년에 벌어진 몇몇 사례를 거론한다. “라트비아는 교사의 3분의 1을 해고했고, 아일랜드는 공무원 연금을 22% 축소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90만 빈곤아동의 건강보험을 하루아침에 없애버렸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본주의 지켜내기”다. 자본주의 엘리트들의 부와 권력을 어떻게든 보호하려는 것이다. 물론 “정부 개입을 배제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삼았던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로부터 역사상 가장 많은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당혹감으로 위세가 약간 꺾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 지출의 대폭적 삭감”이라는 “가혹한 필연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논리를 바꿨다. “이데올로기의 정당화 방식”을 변경함으로써 “위풍당당하게 경기후퇴를 견뎌내려는 것”이다. 여기에도 물론 음흉한 속내가 숨었다. 저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의 지출을 줄이는 것은 부자들에게 매우 이롭다”면서 “지출삭감은 가난한 이들로부터 부자에게로 엄청난 부를 이전하는 장치”라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99%의 비참한 삶을 담보로 “통계상 회복”이 겉으로나마 이뤄진다. 그것은 당연히 “대대적 해고와 임금 삭감, 사회 서비스의 대폭 축소를 통해 노동대중이 대가를 치른 결과”다.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가 걸어온 길을 책의 두번째 장에서 잠시 일람한다. 그는 1948년부터 1973년까지를 “유럽·일본·북미 등 세계를 지배하는 경제주체들의 경기가 급상승하면서, 서구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산량을 3배로 키운 서구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에 이르러 “이윤율 하락과 과잉축적이라는, 친숙한 패턴에 따른 호황의 둔화”와 필연적으로 직면했다. 이어진 “위기의 10년”을 거치며 “자본주의를 지켜내려는” 새로운 돌파구로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라는 얘기다.

저자는 그것을 “자본에 의한 노동의 패배, 새로운 불평등의 도래”라고 규정한다. 각국 정부는 “노동 유연화”를 부추기면서 “고용주들이 노동자들과 노조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하고 격려”했다. 대량 해고와 공공부문 일자리 축소, 비정규직 확대 등으로 고용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구사하는 음흉한 전략이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국 대처 정부의 수석 경제자문이었던 앨런 버드는 “실업 상승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고용 불안정은 “규율과 처벌에 의한 통제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에 따라 1980년대 초 북미와 유럽 각국에서 일어났던 노동자 파업은 차례로 분쇄됐다. “칠레,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남미 국가들의 노조 조직률도 어처구니없이 하락”했다.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가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자본주의의 지리적 재편”은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요약된다. 약자의 입장에 선 국가의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삶으로 내몰렸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었던 칠레”의 국민소득에서 노동자 소득이 차지하는 몫이 “1970년대에는 47%였지만 1989년에는 19%로 급락했다”고 예시한다. “유사한 사태는 에콰도르, 페루, 아르헨티나, 멕시코에서도 발생”했다. 캐나다·미국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혜택을 봤다는 멕시코에서는 “NAFTA가 체결된 지 15년 만에 인구의 80%가 빈곤 상태에 빠졌고, 상위 0.3%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50%를 차지”했다.

세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간 주범이 금융 부문이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1973년 미국 경제에서 금융 수익은 전체 이윤의 16%였지만, 2007년에는 무려 41%를 차지했다”면서 “급증하는 부채의 부담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말한다. “백인과 유색인종 간 차별과 분리에 근거한 종전까지의 대출관행으로는 이윤 창출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은행들은 “보다 약탈적인 편입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빈곤층 유색인종들은 과거에 받지 못했던 금융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그 대가로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감수”해야 했다.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금융 수탈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는 와중에, 유색인종 노동자들은 더욱 강탈적인 착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성으로 “노동자 계급의 점진적인 소득 감소”를 꼽으면서 “인종차별을 받는 노동자 집단이 가장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잘라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역할은 막강했다. IMF 관리들이 구조조정 대상국의 재무장관에게 들이미는 전형적 조항들은 “혹독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공공 부문을 민영화할 것, 사회복지 서비스를 대폭 줄일 것, 수천명의 교사·간호사·사회복지사를 해고할 것, 생필품에 대한 정부 지원을 철폐할 것, 금융 부문을 해외시장에 개방할 것, 최저임금을 인하하고 연금을 축소하며 노동조합을 약화시킬 것” 등이 그것이다.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겪은 나라들은 “100여개 국”이다. 그 결과는 이미 확연하게 드러났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고용은 더 불안해졌다. 다국적 기업들은 공공 자산을 더 싼값에 구매할 수 있게 됐고, 해외 은행들이 금융을 통제하게 됐다. 지역과 세계 엘리트들은 그 나라 바깥으로 재산을 손쉽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됐으며, 경제성장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교육과 보건 의료 수준은 급격히 추락했고 유아사망률은 증가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작금의 파탄이 “단순한 주기적 불황이나 체제의 일시적 일탈이 아니다”라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글로벌 슬럼프”는 “만성화한 전 지구적 경기침체”를 뜻한다. 그것은 ‘더블딥’과도 다르다. “(서로 연관된) 다차원적인 위기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거품이 꺼졌다가 국가 부채 위기가 터지고, 사회복지가 후퇴하고 실업률이 솟구치는 등 여러 종류 위기들이 장기간에 걸쳐 터져 나오는 것”이다. 결국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가 중환자실에서 보여주는 위태로운 증세들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자가 앞으로의 변화와 관련해 주시하는 것은 “소위 서발턴(subaltern)이라 불리는 하위계급의 움직임”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여성, 이주민,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우리 앞에는 세가지 길이 있다. “(하위계급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위기에 처한 체제를 구하는 데 협조”한다면 “신-신자유주의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자본에 의해 잠식되지 않은 공유지와 틈새시장, 사유화할 수 있는 공공 부문 등 “착취의 소재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위 주체들이 파시즘적 자본주의에 포섭된다면 “앞으로도 50~100년간 착취 구조가 건재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다른 하나의 길은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유지하되, 국가가 공공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모델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국가는 부채더미에 오르고 사적 자본이 막강해진” 현재의 상황에서 “공공 부문은 계속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먼저인가 이윤이 먼저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 앞에서 “둘 다 추구하겠다는 절충은 모순”일 뿐이며 “이분법 속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저자가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길’은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6장 ‘거대한 저항의 물결’에서 드러난다. 그는 신자유주의적 착취에 반기를 든 전 세계의 대항운동에 주목한다.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주,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멕시코 오아하카 주에서 일어났던 대중봉기를 차례로 소개한다. 그리스의 급진좌파연맹(SYRIZA)과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NPA), 남미의 신좌파 운동, 점점 급진화 경향을 보이는 미국 각지의 노동운동도 상세히 거론한다. 그 모든 대항운동의 공통점은 “노동자 대중의 직접적 이해에 기반을 둔, 급진적이고 조직화된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통제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중과 노동자의 공동체가 통제하는 새로운 형식의 사회주의를 고민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강조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계승자다.

그는 바야흐로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대항운동들을 “급진적 참여 민주주의”로 명명하면서 “새로운 진보 좌파 운동은 과거의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좌파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좌파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과의 절충이나 타협을 거부하고 “민중과 노동자의 직접 참여를 통해 정치와 경제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상상하라는 것이 저자의 주문이다. 책의 말미에는 번역자들이 캐나다에 있는 저자의 집에서 나눈 대담을 수록했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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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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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상맡에 있는 책의 하나는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길, 2011)이다. 독문학, 특히 아도르노 사상을 전공한 저자의 학술적 에세이로 부제는 '1만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 같은 독문학자인 임홍배 교수는 추천사에서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은 한국 근대학문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작이자 대작이다.(...) 인류 문명사 1만 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지적 모험은 요컨대 소유와 지배의 전일적 체제가 '악마의 맷돌'처럼 작동하는 자본의 시대를 과연 어떻게 견디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평했다. 인문학자의 거시적 문명론이 놀랍기도 하면서 다소 생경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전체는 비진리'라고 말한 아도르노 연구자가 '전체를 위한 사유'를 제안한 것도 이채롭다. 전체를 읽어봐야 의문점을 풀 수 있을까?.. 일부 오타는 원문 그대로이다.

    

교수신문(11. 11. 14) 문명의 잔해 위에서‘전체를 위한 사유’를 가동하다  

은둔형 학자 김유동 경상대 교수(56세·독어독문학과)가 문제작을 들고 돌아왔다. 『충적세 문명-1만 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길, 2011.10)이 그가 새롭게 내놓은 책이다. 아도르노 전문가로 통하는 그의 新作제목이 독특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임홍배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이 책을 가리켜“문명사를 백과전서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근대 이래 섣부른 발전사관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라고 평가한다.

십수 년 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김유동 교수가『반야심경』,『 도덕경』에서부터『백년의 고독』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지적 자산을 섭렵해서 일궈낸 이 책의 핵심은 무엇일까. ‘소유와 지배’의 문명을 넘어‘조화와 균형’의 문명으로 나가기 위한 사유의 모험으로 압축할 수 있다. “‘소유와 지배’에 기초한 人爲의 문명은 그‘타자’인 자연 또는‘원시문화’와의 대비 속에서 그 의미와 무의미(덧없음)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기본 단초에서 논의를 전개해‘전체’에 대한 하나의‘그림’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다. A.N.화이트헤드의‘관념의 모험’과 같은 사유의 모험과 실험, 사유의 놀이가 이 책 전체를 이끌고 있다.  

충적세, 즉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 시기인 약 1만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사의 광활한 공간을 그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병약한 신체 조건이 한몫한다. 그는 사실 이 책을 들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책을 출간함으로써 “노출기피적인 은둔적인 생활이‘노출’될 때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도 컸다. 그는 痛風을 심하게 앓고 있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여서 어떤 대안과 비전을 모색하는 일보다 모더니티에 의해 추동된 서구 현대문명의 위기를 읽어내고, 이를 사유의 지평에서 곰삭혀보는 일이 수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충적세문명’이란 말의 이면에는, 그래서 無와 같은 深淵의 바람소리가 휭휭 지나간다. 그에게 사유의 모험, 사유의 놀이는 과잉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직시하고, 거듭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세계다.

그가 지식인의 책무를 변혁에서 찾기보다는‘사유의 재가동’에서 찾는 것도 일리 있는 접근이다. 그러나‘1만 년의 인간문화’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도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라만차의 騎士’처럼 무모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가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비교문화구조학’도 정교한 개념의 세례를 거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징후 읽기’라는 예술작품 읽기 방식의 주관적 접근도 모호함을 증폭시킬 수 있다. 김유동 교수를 書面으로 만났다.

△ 문명의 위기로 진행된 인류 역사 1만 년을 조망하기 위해‘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문학-예술 연구로부터 발상을 얻은,‘ 비평(에세이)’에 가깝지 않습니까?

"네,‘ 비평(에세이)’의 영역에 가깝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에세이로서의 문학비평을 문화비평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비교문화구조학’의 정밀한 개념화가 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정밀한 학문(exakt Wissenschaft)을 지향하는 것은 과학의 굊想일지 모르지만 불확실한 삶과 현실에 다가가려는 에세이의 방법은 규정과 판단보다는 뉘앙스가 많고 어설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만들었는지는‘방법’의 문제를 다룬 서론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변명이 되겠지만, 간단히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같은 ‘전체’를 지시하는 용어지만 너무나 남용되면서 닳아빠진 동전처럼 액면가가 마모돼 새로운 용어를 만들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문화구조라는 용어가 나왔다면, 문화구조에 대한 연구는 내재적 방법으로 구조의 틀을 드러내보려는 시도지만, 문화구조의 의미는 다른 문화구조와의 비교 속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에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 모더니티가 추동한 현대문명의 위기를 ‘징후적 읽기’로써 진단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어쩌면 이런 접근 자체가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은 아닌지, 그래서 마땅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렇게 비난 받지 않아도 되는, 관념의 과잉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도 아니고요.

“정교한 개념화를 거부하는, 아니면 못하는 이유는, 학문이라는 것이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행위지만 파악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함께, 파악한다는 것 자체를 음미해보면 포섭하고 장악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행위로 문명의 常겤로 설정한‘소유와 지배’를 되풀이하고 강화하는 것이라는‘반성’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냐는 지적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인정합니다. 현대문명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모든 학문의 전제로 깔려있는‘진보’와‘서구중심주의’를 반성하면서‘타락의 역사’를 말하는 동서양의 고전과 종교사상을 새로운 척도로 부활하게 만들었겠지요. 『충적세 문명』이 만든 것은 암울한 그림으로‘구원적 비평’에 기대어 지난 세월과 삶을 어루만지는 작업인데요, 그런 고통을 만든 요소들이 객관적으로 극복된 실질적 희망이 보이거나, ‘이론’이 다른 전망을 제시한다면 전혀 다른 별자리를 만들어 밝고 긍정적인 그림을 만들 수 있겠죠.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이 아니라는 지적에도 동의합니다. 사실 나는‘논리’라는 것은 별것 아니고, 경험하고 인식한다는 것 또는 보고 느낀 것을 음미하고 분별하는 행위는, 단순한 知覺작용에 머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전체’나‘삶’,‘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징후읽기’라고 생각해요.‘ 징후 읽기’를 부각시킨 것은 이런 맥락보다는,‘ 전체’,‘ 신’,‘ 진리’,‘법’등은 알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인식행위라는 것은‘부분’을‘전체’의 징후로 해석함으로써‘전체의 그림’을 잠정적으로 만들어 보는 놀이라는 맥락입니다.”

△ 선생님의‘전체에 대한 인식’욕망은 어딘가 헤겔적인 냄새가 납니다. 학자의 고유한 학문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아도르노 전공자로서 독일적 정신의 흔적이겠죠. 이번 책에서 아도르노에게 많은 부분 의존한 것은 그의 사상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는 판단인가요?

“근대 문화구조의 후발주자로 세 차례 대전의 중심이며 희생자인‘독일사의 비극’은 독일 지성들에게‘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독문학도이지만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논문을 쓴 제게 독일의 변증법적 이론은 당연히 배여있을 테지요. 독일정신을 공부하면서 아도르노, 하버마스, 심지어는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프레드릭 제임슨 등을 연구했지만, 2차 대전 중 미국이라는 망명지에서 파국의 구세계를 지켜보는 아도르노의 치열한 글쓰기나 그 뒤에 행한 세상에 대한 진단은, 파국에 이르렀던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험사회자 전 세계적 보편성을 얻은 상태에서는 지금 다시 설득력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의 현재성은 전후의 황금시대보다 오늘날에 더 절실한 현재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 앞으로의 연구, 저술 계획이 궁금합니다.

“미래는 모르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세상뿐 아니라 저 자신의 실존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속에서 어떤 침전물이 생기고 어떤 욕구가 일어날지 두고 봐야겠네요. 20년 전에 쓴『아도르노와 현대사상』에서는 19세기의 낙관주의적 문화 구조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실천이론’이 20세기 전반 ‘파국’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아도르노의 ‘패배주의적 이성’으로 바뀌었는가가 기본적인 단초였는데, 책 출간 후의 세상을 살면서는‘문화산업’부분(지금 세상에서는 이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인데)이 너무 빈약해, 이걸 보충할 책은 내야 할텐데라는 책무는 느낍니다만, 열려있는 미래는 한치 앞을 알 수 없지요.” 



김유동 교수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자유대와 프레드릭제임슨의 초청으로 미국 듀크대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아도르노 사상』(문예출판사, 1993), 『아도르노와 현대사상』(문학과지성사, 1997) 등을 저술했으며,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마르 크스주의』(한길사, 2000),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계몽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2001), 아도르노의 문제작『미니마 모랄리아』(길, 2005) 등을 번역했다. 이번 신작에서 전체를 사유하려는 독일 정신의 흔적, 특히 아도르노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지적 편력과도 관련 있다.(최익현 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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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 후반부를 읽다가 지난주에 나온 <촘스키,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책보세, 2011) 가 떠올라 소개기사를 찾아 옮겨놓는다. 책은 지난주에 <정복은 계속된다>(이후, 2007)와 같이 구입해놓은 터이다. 미국의 상하원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한미 FTA에 대한 '다른 시각'이 우리의 판단에도 도움이 되겠다.    

한겨레(11. 11. 12) 촘스키 “FTA는 미국의 경제지배 전략일 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 시점에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의 본질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해와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촘스키,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에서 자유무역협정이 사실상 미국의 기업을 위한 미국의 경제 지배 전략에 불과하며 자유무역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자유무역협정은 초국적 기업과 은행 그리고 이들의 뒤를 봐주는 국가가 작성해 체결한 투자자들의 권리 계약에 불과하다고까지 지적한다. 자유무역협정의 본질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국민적 합의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자유무역협정=수출 증대’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이 쓴 이 책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것 같다. 책은 촘스키가 2006년 칠레에서 한 강연을 묶고, 2010년 상황에 맞게 내용을 추가해 펴낸 것이다.

촘스키는 ‘미국의 정체’를 거듭 밝힌다. 미국이 제3세계에 원하는 것은 민주화가 아니라, 미국을 지배하는 민간 독재자(기업)들이 수탈하기 쉽도록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이 들고나온 것은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협정이란 것이다. 책에서 촘스키는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 등과 체결한 가장 대표적인 자유무역협정인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 NAFTA)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1994년 나프타가 체결된 뒤 결과를 보면 멕시코는 빈곤화가 더 심해졌고, 캐나다는 미국과 멀어져 중국과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나라들이 예상 못한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은 미국의 탐욕 탓이라고 촘스키는 단언한다. 미국을 사실상 기업이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기업들의 의도대로 미국의 대외정책이 흘러가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체제의 결과 미국은 민주주의의 기틀인 선거마저 기업들의 투자행위로 전락했다고 분노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10년 1월 이런 기업들이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대 선거를 치르게 하는 정치적 투자행위를 합법으로 인정했다. 그는 이 판결이 난 날을 “미국 민주주의가 암흑으로 빠진 날”이라고 칭한다.

책에서 촘스키는 누누이 미국의 대외정책의 양면성과 야만성을 까발린다. 미국이 중앙정보국(CIA)을 내세워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것도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두려움보다 미국 기업의 투자이익이 보장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분석하고,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칠레처럼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제3세계 국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국부를 민중에게 분배하고 소외계층을 위해 정책을 펴는 것이 결과적으로 미국 기업의 이익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집권한 뒤에도 이런 미국의 노선은 여전하다고 개탄한다. 오바마가 2009년 좌파정부를 뒤집은 온두라스의 군부 쿠데타를 승인한 것, 카리브해를 작전 반경으로 하는 미 제4함대를 50여년 만에 부활시킨 점 등이 그 근거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정책은 2008년 금융위기와 중국의 성장 등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촘스키는 미국의 정책변화를 요구하며 활발하게 움직여온 세계 지식인들의 비판이 그 원동력이 됐다며 이런 움직임의 확대를 기대한다.(권은중 기자) 

1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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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키 2011-11-14 17:24   좋아요 0 | URL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3권 세트가 책장에 보이네요. 이제는 뛰어다니는 딸이 아직 아내 뱃속에 있을 때 아내와 둘이 읽던 책입니다. 둘이 "애 이름을 촘스키라고 할까? 촘스키처럼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야"했던게 생각납니다.

로쟈 2011-11-15 07:48   좋아요 0 | URL
딸이어서 촘스키가 안된 건가요?^^

노승영 2011-11-15 11:39   좋아요 0 | URL
번역은 오래 전에 끝냈는데 계속 출간이 미뤄지더니
결국 한미 FTA가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절묘한 시점에 책이 나오더군요.
영어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한 글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절감한 책이기도 합니다. ^^
 

한나 아렌트에 관해 글도 쓰고 강의도 해야 하는 터라 손에 든 책은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웅진지식하우스, 2011)이다.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웅진지식하우스, 2005)에 이어서 이 책을 만든 편집자에게 선물받은 책인데, 에디터의 말에 이렇게 적혀 있다. "에디터의 장점 중 하나는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한나 아렌트라는 사상가와 많이 친해졌다. 왜 멋진 사람들 중에 '아렌티안'이 많은지 알 것 같다." 아렌트가 특별히 언급된 건 제목의 '인간의 조건'이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신문(11. 11. 12) 인간의 조건 지키며 사는 게 왜 이리도 힘든 것인가

국회의원이 쓴 책이라고 하면 대체로 자기자랑이겠거니 하고 치부하기 쉽다.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건축 분야의 전문가이자 지식인이며 민주당 국회의원인 저자의 사유와 자기 성찰이 담긴 책이다.

책에는 두 명의 본보기가 등장한다. 한 명은 책의 제목까지 빌려 쓴 해나 아렌트(1906~1975)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이정희(42) 민주노동당 대표다. 독일의 유대계 정치철학자인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등의 저서를 통해 평생 전체주의의 기원과 악의 평범성을 고발했다.

김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죽기 전에, 이정희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해 큰 화제가 됐다. 김 의원의 이 말은 이 대표가 대통령감이라는 것뿐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되기란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려던 것이었다고 한다. 변호사를 지내다 정치에 뛰어든 이 대표의 내공은 자신이 할 말을 직접 자신이 쓰는 ‘법조 훈련’을 통해 키워졌다고 김 의원은 분석한다. 그리고 ‘가슴에 불을 안은, 된 사람’이 제대로 된 법조 훈련을 받았을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덧붙였다.

국회에는 299개의 대통령 당선 시나리오가 있다는 농담이 있다. 국회의원 숫자가 299명이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혐오집단인 국회의원이 된 심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건축가로서 주목받았던 그가 정치를 시작한 동기는 ‘더 좋은 생각을 더 많은 사람이 공유하도록 하자.’는 좋은 정치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17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18대에 비례대표로 당선된 것도 우연이었다. 당선되었던 한 비례대표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김 의원 앞의 승계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

그는 국회에서 전공 분야를 살려 4대강 사업과 뉴타운을 비판하는 전사로 활약하고 있다. 책은 그러나 4대강 사업 비판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진 않는다. 대신 1994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21세기 리더 100인’에 꼽으면서 갑자기 주목받게 된 사연을 얘기한다. 한 번은 전화로, 또 한 번은 찾아온 기자와 인터뷰한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는 김 의원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기대받는 사람이 되었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고 좋은 채찍이었다고 말한다.(윤창수기자)  

11. 11. 12.    

P.S. 책에는 저자의 롤 모델로 아렌트뿐만 아니라 이정희 의원도 거명되고 있다. 딸아이가 정치가가 될 생각도 있다고 해서 여성 정치인의 책 몇권을 사다준 적이 있는데 <김진애가 쓰는 인간의 조건>도 나보다는 아이에게 더 영감을 줄 만한 책 같다. 내겐 저자가 속해 있는 국회 국토해양위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이고 무슨 문제를 안고 있는지 알게 해준 책이다. 김진애 의원은 국토위에 대해서 겉모습은 '공룡위원회', 속모습은 '이권위원회', 그리고 본색은 '거수기 위원회'라고 적었다. 18대 국회에서 '4대강 사업' 관련으로 국회 차원의 공청회 한번 없었다고 하니 저자의 말대로 믿기지 않는 일이다... 

한편, 올해는 아렌트 입문서가 한꺼번에 여럿 출간된 해이기도 한데, 홍원표 교수의 <아렌트>(한길사, 2011), 사이먼 스위프트의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앨피, 2011), 그리고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 등이 거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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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11-12 10:01   좋아요 0 | URL
음...괜찮은 기사인데, '해나 아렌트'가 걸리네요. 서울신문 서평 기자는 의외로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실수를 몇 번인가 본 것 같아요. 아렌트 입문서로는 두번째 사이먼 스위프트의 책이 가장 나은게 아닌가 합니다. 아렌트에 관한 글을 쓰신다기에 로쟈님의 새로운 신간소식인가 싶어 살짝 두드려보고 갑니다.^^

로쟈 2011-11-12 10:15   좋아요 0 | URL
'해나'는 외국어표기안에 따른 거에요. '발터 베냐민'처럼. 한겨레에서도 '해나 아렌트'라고 씁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는 방식이에요.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와는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듯해요...

빵가게재습격 2011-11-12 10:20   좋아요 0 | URL
오? 정말이네요. 전 단순한 실수인가 했는데, 정말로 이중으로 표기가 되어 있네요. 한겨레21에서도 그렇게 쓰여 있고.^^; 할 말을 잃는데요...^^;

PhEAV 2011-11-12 12:44   좋아요 0 | URL
보통 인명은 출생지를 고려하지 않나요? 해나라고 표기하면 출생지가 미국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데… 뭐 반드시 출생지를 고려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게다가 독일로 간주해도 베냐민처럼 '하나 아렌트'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함정일까요 -,.-;;

로쟈 2011-11-13 13:35   좋아요 0 | URL
보통 출생지가 아니라 국적을 고려하는데, 그것도 충분한 이유는 안되구요. '한나 아렌트'라고 고정된 이름을 '해나 아렌트'라고 표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저로선 백치적 발상으로 보입니다...

yamoo 2011-11-12 17:00   좋아요 0 | URL
김진애씨의 책이 급 땡기는데요~
이 참에 아렌트에 도전해 볼까욤~ 아렌트는 부러 멀리해 왔는뎅~^^;;

로쟈 2011-11-13 13:36   좋아요 0 | URL
네 편하게 읽히는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