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쌓인 책들을 좀 덜어내다가 가라타니 고진의 <문자와 국가>(도서출판b, 2011)에 손이 갔다. 여느 때 같으면 바로 읽었을 책이지만 다른 일들에 밀려 아직 펼쳐보지 못하고 있다. 출간 소식은 포스팅해놓았지만 본격적인 서평을 본 기억이 없어서 기사를 검색해봤다. 주간한국의 '이 장르 이 저자' 코너에서 가라타니 고진 편을 다룬 게 눈에 띄는 정도다.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문자론' 정도는 오늘내일 안으로 읽어둘 참이다.  

주간한국(11. 04. 06) <근대문학의 종언> 쓴 일본대표 지성

근대문학의 종언. 최근 10년간 국내문학계 담론의 축을 한마디로 요약한 이 말은 기실 문학평론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제목이다. 그의 말에 동조하며 협소한 문학의 지평을 비판하든, 그의 말을 부정하며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긍정하든, 국내 문학계의 다양한 목소리는 그의 선언 안에서 맴돈다. 



가라타니 고진. 1941년 태어나 문예비평에 근현대 철학사상을 접목시키며 사상가로 발전한 일본의 대표적 지성이다. 1969년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평론으로 문학비평을 시작한 그는 철학·경제학·역사학·언어학과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통섭적 지식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체제를 관통하는 사유를 선보인다. 예컨대 대표작〈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미셸 푸코의 고고학 방법을 원용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파헤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고 난 뒤 국민문학이 성립됐을 거라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근대문학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핵심 요소로 작용했음을 입증한다. 문학을 통해 국민이란 개념이 생긴 과정을 보여준 셈이다.

그의 책을 관통하는 생각은 '자본주의=민족(Nation)=국가(State)'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다. 이성의 시대, 근대는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 양식(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당시만 하더라도 '자본주의'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이란 제도 아래 생긴 사회상이고, 이 제도들이 얼마나 견고하게 맞물리며 이 시대를 구성하는가, 이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소외되는가를 말하는 것이 그의 책의 요지라는 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그는 비평적 태도에 변화를 보였다. 일례로 지난 주 국내 발간된 그의 강연집 <문자와 국가>(도서출판b 펴냄)는 1992년 걸프전 전후 가라타니 고진의 강연을 기록한 책인데,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 같은 세대의 사람은 소설이나 시가 철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종교보다도 강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말하자면 문학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문학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작가의 재능이 부족하다거나 작가가 정열을 잃었다거나 현실과 격투를 회피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이 문학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문학이 그때까지 부여되었던 과잉된 의미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에 사망선고를 내린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난 2004년 국내 번역된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뜨겁게 읽히는 사상서, 문학비평집이 됐다. 그리고 한국문학 비관론과 '종언론'에 대한 반론이 이어졌다. 국내 반응에 대해 그는 지난해 본지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그 책에서 끝날 수 없는 정치(문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학이 끝났다고 읽었다. 내가 계속 말하는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문학' 안에는 문학이 없다는 말이었다. 끝나지 않는 정치로서의 문학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문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문학이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은 국내에서 1만여 부가 팔렸다. 5000권을 넘으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국내 인문, 사회과학 출판시장에서 이 같은 사상서가 1만 부 판매를 달성했다는 건 경이적인 사실이다. 

 

그의 신작 <세계사의 구조>가 올해 여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다.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에 대해 저술한 노작(勞作)으로 일본에서 지난해 중순 출간돼 1만 5000부가 판매됐다. 이 책 역시 국내 지성계에 문제작이 될까? 기다려 볼 일이다.(이윤주기자) 

11. 04. 16.  

P.S. <문자와 국가>는 원래 <전전(戰前)의 사고>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출간된 책이다. 1992년 걸프전쟁 전후의 강연을 묶은 강연집으로 <트랜스크리틱>의 전사(前史)를 이룬다. 어느새 20년 전이 돼버렸는데, 그맘때 나온 책으론 새뮤얼 헌팅턴의 <제3의 물결>(인간사랑, 2011)도 있다. 1991년에 나온 책이고 부제는 '20세기 후반의 민주화'. <문명의 충돌>(1996)이 나오는 건 5년 뒤의 일이다. '동시대' 미국과 일본의 정치학자와 비평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엿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국가와 민주주의가 공통의 관심사이다)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바다 2011-04-17 08:50   좋아요 0 | URL
제 책상에도 <문자와 국가>가 놓여있습니다.^^ 고진 이론의 많은 부분을 공감하지만 '근대 문학의 종언'테제는 그리 공감이 가지 않더군요. 왠지 뭔가 핵심 주변을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근대 문학'에 대한 가치 평가가 달랐던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진은 '근대 문학'이 근대 사회에서 뭔가 계몽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는 걸 전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종언 테제'에 제가 공감하지 못했던 건 한국 문학이 근대 한국의 역사에서 그런 특수한 위치를 갖고 있다는 걸 제가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진이 일본에서 체험한 것을 한국에 있는 저는 체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일본의 나쯔메 소세키, 중국의 루쉰과 같은 문학가가 우리에게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광수가 남긴 상처라고나 할까요?^^ 결국 종언을 논할 '특수한 근대 문학'은 원래 한국에는 없었다. 따라서 종언을 논할 필요 없이 여기 한국에선 '시작'을 논해야 한다는게 제 요즘 생각입니다.

로쟈 2011-04-17 21:54   좋아요 0 | URL
문학이 '과도한' 사회적 소임을 맡았던 건 부인하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민족문학' '민중문학'이란 용어 자체가 한국적 특수성을 말해주니까요.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푸른바다 2011-04-19 20:28   좋아요 0 | URL
그 과도한 소임이 일부의 문학가와 평론가의 의식에는 분명 있었지지만 대중의 의식 속에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소위 민중문학은 의무감에서 소수자가 읽는 소설이었지 시대를 특징지을 만큼 중요한 문학은 아니었던 것 같구요. 결국 대중에게 소설은 재미로 읽는 것이지 거기서 교훈을 얻는다고 생각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종언을 논할만한 중요한 흐름을 소설이 차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가 말할 수는 없고 보다 보편적인 심금을 울리는 문학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갖고 있습니다.^^

푸른바다 2011-04-17 11:06   좋아요 0 | URL
<제 3의 물결>은 앨빈 토플러의 책인 것으로만 알았는데 헌팅턴도 같은 제목의 책을 썼었군요. ㅎㅎ

로쟈 2011-04-17 21:55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을 보고 저도 의아했는데, 원제가 딱 The Third Wave 입니다...

msjpolitics 2011-04-20 18:20   좋아요 0 | URL
헌팅턴의 제 3의 물결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민주화 이행이 한나라씩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치 물결(파도)처럼 동시적(동시적이라는 것이 한꺼번에라고 보기보다는 흐름정도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요)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인데요....이책에서 헌팅턴은 전 지구적 민주화가 크게 3파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죠..제 1파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제 2파는 2차대전 직후, 그리고 남유럽, 라틴, 그리고 한국, 대만의 민주화 이행은 제 3파인 1970년대부터 1990년의 기간에 해당하고요...중간중간 반동도 존재했었구요...개인적으로 보기에는 엄밀성은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는데, 1-2파는 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제 3파에 헌팅턴도 주목하면서, 왜 민주화로의 이행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는가, 공통적 특징은 무엇인가 등등에 관해서 질문을 가지고 퍼즐을 풀고자 했죠...제가 보기에는 헌팅턴은...정치학에서의 최후의 grand theory를 추구했던 학자였던 것 같아요..민주화 이행을 어떻게 미국의 학자가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보여주는 책입니다...정치학 특히 비교정치학 연구에 있어서는 거의 교과서에 해당하는 책이죠..아..물론 교과서라고 해서 다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msjpolitics 2011-04-20 18:24   좋아요 0 | URL
p.s. 저도 이 포스트를 통해서 이번에 제3의 물결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민주주의 이행을 공부하는데 필독서 중의 한권인데, 이제서야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네요. 암튼 감사합니다.

로쟈 2011-04-20 23:27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김영사, 2011)와 함께 어제 주문한 책은 제프리 잉햄의 <돈의 본성>(삼천리, 2011)이다. 돈에 무관심하더라도 괴테의 <파우스트>나 고골의 <죽은 혼>을 읽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령 <죽은 혼>에서 치치코프의 행동지침이 되는 아버지의 유훈은 "무엇보다 아끼고 한 푼 두 푼 모아야 해.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건 돈이야."이기 때문이다. 이마무라 히토시의 <화폐인문학>(자음과모음, 2010) 등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경향신문(11. 04. 16) 돈은 ‘경제’가 아닌 ‘정치’다 

화폐에 대한 정통 경제이론의 모든 설명은 상품-교환이론이다. “화폐는 화폐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좀 더 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존 스튜어트 밀)나 “화폐는 교역의 바퀴가 아니라 바퀴를 좀 더 부드럽고 쉽게 굴러가게 해주는 윤활유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는 언급이 여기에 해당한다. 화폐는 ‘중립적인 베일’로서 베일 너머의 실체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조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돈의 본성’은 교환을 매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게 저자 제프리 잉햄의 견해다. 잉햄이 경제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화폐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더불어 신용/채권-채무라는 사회적 관계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해석하면 화폐는 ‘중립적인’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 나아가 정치적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화폐가 사회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구성된 약속이란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화폐는 계산화폐여야 한다. 발행자의 계산화폐로 가치부여가 끝나고, 즉 ‘화폐성’이 확립되고 이것이 다시 특정한 형태(금속, 종이, 전자신호 등)로 체현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화폐는 외환시장 같은 곳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물물교환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특정한 대표 물건이 화폐(상품화폐)로 추대됐으며, 이후 화폐는 사회자처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막후에서 돕고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대립한다. 다시 말하면 화폐보다 화폐성이 우선하는 것이다. 물물교환이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으로 바뀌면서 경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특히 생각해 볼 거리는 시장의 정치화가 아닌가. 물건끼리 바꿀 때에 비해 달리 화폐가 개입하면서 특정한 이해관계가 더 반영된다. 모든 참여자들에게 공평한 시장은 없다는 측면에서 이미 시장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화폐의 정치적인 또는 사회적인 성격은 시장과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다.

환어음과 주화의 다툼에서 화폐의 이런 정치성이 극명히 드러난다. 상인끼리 사용하는 환어음은 가치측정 수단이기 때문에 계산화폐이다. 환어음은 군주나 영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주화(외형상 상품화폐)와 대치했다. 상인과 왕족·귀족은 국정화폐라는 타협을 만들어낸다. 화폐권력을 분점키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금본위제가 종언을 고한 이후 논리적으로도 더 이상 상품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품화폐가 퇴장한 지 오래인데도, 돈이 ‘중립적인 베일’이란 신화는 유지되고 있다. <돈의 본성>은 중립성이란 도그마를 난타한다. 중립적이지 않다면 화폐는 결국 누군가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화폐는 스스로의 이익에 복무하는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밝혀진 돈의 무한 자기복제와 통제불능의 탈인격화는, 과장하면 인간이 배제된 돈의 정치세력화를 떠올리게 된다. 베일을 벗은 화폐가 누군가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화폐가 더 이상 윤할유에 머물지 않고 바퀴의 자리까지 차지했다면, 이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일까.(안치용 | 지속가능사회를위한경제연구소 소장) 

11. 04. 16.  

P.S. '옮긴이의 말'에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상품, 화폐, 자본이라는 세 가지 중심 범주에 대한 대안적인 이해방식을 담고 있는 책들을 3부작으로 번역중이라고 밝혔는데,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이 그 첫번째 책이었다면 <돈의 본성>은 두번째 책이다. 자본에 대한 대안적 이론을 담은 책으로는 닛잔과 비클러의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2012년 중에 번역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권력자본론>(삼인, 2004)의 업그레이드 판이 아닌가 싶다. 좋은 가이드 덕분에 정치경제학 분야의 문제작들을 편하게 소개받을 수 있어서 부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카이스트 사태에 대한 소감을 적은 게 돼버렸는데, '대학 주식회사화' 혹은 '대학의 몰락'에 관한 책들을 안 그래도 모아읽으려던 참이었다. 참고로, 지난주 시사IN의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같은 주제의 책들을 묶어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1. 04. 12) [문화와 세상]학생을 자살로 내모는 ‘명문대病’

“미국의 명문대는 자살률이 더 높다.” 서남표 카이스트(KAIST) 총장이 최근 학생과의 개별면담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네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수가 연이어 자살함으로써 사회적 충격을 던지고 있는 ‘카이스트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2006년 부임 이후 세계적인 명문대학을 목표로 개혁을 주도하면서 무한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서 총장에게 학생들의 자살은 경쟁 시스템의 불가피한 부산물이자 ‘나약한 정신력’의 결과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의 발언에서 자살률조차도 아직 명문대 수준이 못 된다는 인식을 읽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우리 옛말이 있긴 하지만 이 말의 서남표판은 ‘명문대가 된다면 자살이 대수랴’가 될 듯싶어서다. 하지만 그 명문대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명문대일까. 

소위 ‘서남표식 개혁’의 성과는 ‘눈부시다’. 보수언론이 자주 내세우는 지표에 따르면 서남표식 개혁이 추진된 덕분에 ‘더 타임스’ 세계대학평가에서 카이스트의 순위는 쑥쑥 올라갔다. 2006년 198위, 2007년 132위, 2008년 95위, 그리고 2009년에는 69위가 됐으니 50위권 진입도 코앞에 두고 있다. 서울대가 47위라고 하니 카이스트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순위다. 게다가 공학·IT분야로 한정하면 서울대(27위)를 제치고 21위다. 대체 무엇이 평가 기준인지 궁금한데, 매년 세계 200대 대학을 선정해 순위를 매긴다는 이 영국의 일간지는 동료평가(40%), 교수 1인당 논문 인용지수(20%), 교수 대 학생 비율(20%), 국제기업의 대학평가(10%), 외국인 교수 비율(5%), 외국인 학생 비율(5%)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료평가’를 어떻게 산출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기준에 ‘사회 속의 대학’이 갖는 의의는 포함돼 있지 않는 듯하다. 대학 구성원들의 자긍심 또한 평가항목에는 빠져 있는 듯싶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졸업자 취업률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국가별 행복지수 같은 것도 예가 되지만 평가항목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순위가 가능한 것이 모든 유(類)의 평가가 갖는 함정이다. 그런 결과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흔히 대학들 간의 무한경쟁시대라고 하고, 대학 경영자들은 입만 열면 ‘대학 경쟁력’을 외친다. 미국 시카고신학교의 서보명 교수가 쓴 <대학의 몰락>이란 책을 보면 미국 대학에서조차도 경쟁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대학별 랭킹을 발표하면서 각 대학을 순위경쟁으로 내몰기 시작한 것이 고작 30년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학이 서구 중세의 산물인 걸 감안하면 대학평가의 역사란 퍽 일천하다. 하지만 이 일천한 역사가 대학의 이념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학의 자유’라는 이념이 ‘대학 간 경쟁’으로 변모했으니 이만한 지각변동을 대학의 역사에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서 교수에 따르면 ‘대학 순위 정하기’를 통한 순위 경쟁의 도입은 레이건 시대 보수주의 혁명의 혁혁한 성과이다. 1960년대 좌파운동의 본산지였던 대학을 자본주의 경쟁체제로 밀어넣음으로써 대학을 기업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교육은 상품이 되고 학생은 소비자가 되었으며 대학은 품질관리와 품질보증의 대상이 됐다. 그리하여 자본과 소비만이 대학을 말해주는 시대가 됐다. 대학의 자유와 비판정신이 이제는 한갓 퇴색한 전통에 불과하다면, 대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대학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 명문대 수준의 자살률을 갖기 전에 다시금 고민해볼 문제다

11. 04. 1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지 2011-04-12 02:05   좋아요 0 | URL
숙연해지는 글입니다... 과연 미국식 자본주의의 바깥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mirror 2011-04-12 04:14   좋아요 0 | URL
서남표의 방식은 미국 방식이 아닙니다. 어떤 미국 대학이 서남표식으로 하나요? 서남표의 정책은 신자유주의란 것도 아니죠.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이나 영국에서 징벌적 등록금제도 본적 있습니까? 부정적인 모든 것을 미국제로 몰려는 몰상식한 짓들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대학처럼 인문학 교육에 힘쓰는 대학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미국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테고리에 가두려고 합니까?
대학과 학자들의 경쟁은 필연입니다. 사회의 각 영역에서 경쟁이 사라져도 학자들 사이에 탁월함의 구별은 필연입니다. 위대한 업적과 그렇지 않은 업적은 구별되고, 위대한 업적이 대학에서 교육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이 구별 과정이 경쟁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다만, 서남표는 영어강의와 징벌적 등록금제라는 황당무계한 한국식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잘못이죠.

mirror 2011-04-12 04:24   좋아요 0 | URL
그리고 미국의 대학 순위가 기업에 대학을 종속시키려는 의도라고 단정짓는 그 근거가 의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한 철학 교수가 각 대학들의 철학과 교수들에게 일일히 편지를 보내 매년 각 분야별로 순위를 업데이트하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선택을 도우려는 것이죠. 이렇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를 물어서 각 분야의 뛰어난 대학들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인가요? 이 철학과들의 순위와 기업이 무슨 관련이란 말인가요?
그리고 대학 순위 매기는 것은 독일에서도 열심히 합니다. 그 동안 순위 안 매기고 돈을 그냥 나누어 먹어서 발전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매년 슈피겔 같은 곳에서 순위도 매기고, 한국의 BK 사업과 같은 사업도 해서 예산도 분배합니다.
서남표의 해괴망측한 정책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없는 지독히도 한국적입니다. 이것을 신자유주의 또는 미국탓으로 돌리는 것은 저급한 한국 지식인들의 몹쓸 습관을 답습하는 것 같습니다.

pjy 2011-04-12 12:28   좋아요 0 | URL
EBS에서 방영했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한토막이 생각납니다.
대리모가 출산후 아이의 양도를 거부했는데 딜은 딜이라고 주장하는 거..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데도 부작용은 당연한거고 그게 인생이고 세상이라고 말하는 ㅠ.ㅠ
이런, 되는대로 살거였으면 공부는 뭐하러 하냐고요~ 머리아프게~~
 

이번주에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 가라타니 고진의 <문자와 국가>(도서출판b, 2011)와 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돌베개, 2011)를 '머스트리드'로 고르고 나면, 나머지는 '옵션'이다. 리뷰기사를 읽으며 고른 책은 김영두의 <퇴계 VS 율곡, 누가 진정한 정치가인가>(역사의아침, 2011), 히로세 다카시의 <원전을 멈춰라>(이음, 2011), 그리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부키, 2011). '긍정적 사고' 혹은 '긍정의 힘'이라는 수사가 '미국식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에런라이크의 폭로는 통찰에 값한다.

  

경향신문(11. 04. 02) 미국發 ‘긍정 이데올로기’의 불편한 속내

“미국인은 긍정적인 사람들이다”라는 첫 문장이 시니컬하다. 미국 사회에서 일종의 ‘도그마’처럼 기능하고 있는 ‘긍정적 사고’의 허위적 속내를 파헤친 책이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인들은 매사에 긍정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별로 행복하지 않다. 사실 그 긍정성이 “실제 상태나 기분이 아니라, 세상의 일부를 설명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인 탓이다. 

 

미국사회에서 긍정적 사고가 강력한 신념체계로 자리잡은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였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미국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자리했고, “자본주의의 필수 요소로서 자기 가치를 설득해나갔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후 ‘긍정적 사고’는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하면서 스스로 하나의 산업으로 번영했다. 긍정적 사고를 장려하는 책과 DVD가 끝없이 쏟아지면서 베스트셀러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며, 수만명의 ‘라이프 코치’와 ‘경영 코치’, 심리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당연히 확대재생산이 이뤄졌다. 그것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래리 킹 라이브>나 <오프라 윈프리 쇼> 같은 토크쇼를 통해” 여전히 전파되고 있으며, “2006년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던 <시크릿> 같은 책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긍정적 사고가 후기 자본주의와 동행하면서 번창했다고 설명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보여줬던 절제와 금욕의 태도에 반대해 미국의 신사상 운동이 태동했고, 여기에 신복음주의 교회와 기업이 결탁해 긍정적 사고의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자본주의와의 커넥션을 통해 성장한 ‘긍정주의’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세계 금융 위기를 자초했음에도 반성과 성찰은커녕 오히려 위기를 통해 더 몸집을 키우려는 조짐을 보인다고 우려한다. 그리하여 저자가 결론적으로 강조하는 메시지는 “긍정적 사고라는 대중적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좋은 일자리와 의료서비스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더 탄탄하고 파티와 축제, 길거리에서 춤을 출 기회가 더 많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긍정 이데올로기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그 양산자들까지 샅샅이 파헤치는 열정적인 책이다. 아울러 한국사회를 전염시킨 긍정 이데올로기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를 확인하게 해준다.(문학수 선임기자) 

11. 04. 02.


댓글(4) 먼댓글(1)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1-04-03 07:00 
    [책] 긍정적 사고라는 대중적 환상 — “미국사회에서 긍정적 사고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미국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자리했고, 자본주의의 필수 요소로서 자기 가치를 설득해나갔다.” (via 로쟈)
 
 
자꾸때리다 2011-04-02 13:30   좋아요 0 | URL
한국 기독교계에서 긍정의 힘 같은 쓰레기가 날개 달린 듯 팔렸다는 사실은 이미 한국 기독교가 전통적인 복음주의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표지였죠.

로쟈 2011-04-03 08:46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가 얼마나 '미국적'인가 한번 더 확인하게 됩니다...

faai 2011-04-03 10:22   좋아요 0 | URL
이미 소개하신 책이지만 [멜랑콜리 즐기기] 초반부에서 이런 미국식 행복 지상주의를 호되게 비판하죠. 후반부는 동의하기 어려운 에세이였습니다만. 나아가 [만들어진 우울증] 같은 책도 (느슨한) 연장선에 있고요.

로쟈 2011-04-03 10:37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맥락으로 묶을 수도 있겠네요. 좋은 지적이십니다...
 

책에 관한 한 지난 두 주는 '조용한' 주였다. 책이야 떨어지지 않고 계속 나오지만 가끔씩 '폭발'하는 주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는 책들이 나오는데, 언론리뷰를 기준으로 삼자면 역사학 책 두 권이 그렇게 보인다.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실과 흔적>(천지인, 2011)과 설혜심 교수의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길, 2011). 두 역사학자의 역사론으로 나름 일독의 의미가 있을 듯싶어 자투리 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대전일보(11. 03. 19) 인간의 역사는 진실인가 거짓인가

미시사(微視史)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탈리아의 역사가 카를로 긴즈부르그가 쓴 역사학 방법론에 관한 책이다. 2500년의 세월 속에서 진실한 것, 거짓된 것, 허구적인 것들을 지적하고 추적하며 진실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지 문제를 함께 제기한다.

대표작인 ‘치즈와 구더기’에서 16세기 이탈리아의 한 방앗간 주인을 통해 농민 문화를 들여다봤던 저자는 이 책에서 2천500년의 역사 속에서 진실한 것, 거짓된 것, 허구적인 것들을 추적하면서 진실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묻는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에나르게이아)와 역사 서술,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 소설가 스탕달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허구와 진실 사이에 있는 거짓된 진실로 보이는 역사적 소재들을 해부한다. 이처럼 상당히 이질적인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는 모든 장들의 내용은 이야기의 실마리로서 우리를 현실의 미로로 인도해주는 실과 흔적들 간의 관계라고 설명한다.(김수영 기자)   

한겨레(11. 03. 26) 역사학의 새로운 맛은?

1970년대 유신 말기 감옥에 갇힌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교재의 하나가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발전 연구>였다. 1946년에 나온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실증적으로 검토한 쉽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어쩌랴 감옥에서 넉넉한 건 시간뿐이었으니. 역사학자 이영석을 역사학으로 이끈 것도 돕이었다. 친구들이 감옥으로, 노동현장으로 갈 때 서양사를 공부한 그는 유럽의 사회사와 경제사 연구를 통해 시대의 빚을 갚으려 했다. 학벌주의가 판을 치는 학계에서 명문대 출신도, 유학파도 아니고, 사학과조차 없는 지방대 교수인 그가 서양사학회장에 선출되게 만든 힘은 근면과 성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 같은 쓰나미를 버틴 학문적 뒷심이었다.

이영석은 역사학자 설혜심 연세대 교수가 <역사,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로이 포터, 키스 토머스와 함께 ‘내가 사랑하는 역사가들’로 소개한 이다. 온천장, 관상학, 지도 등 독특한 주제로 역사학의 새로운 맛을 선보인 지은이가 이번엔 ‘종합 선물세트’ 같은 역사책을 내놓았다. 여기엔 역사학에 왜 상상력이 필요한가를 주장한 논문부터, 한국 서양사 연구의 계보, 마녀사냥과 신대륙 발견에 대한 연구 등 역사연구 다양한 시각, 트위터와 미시 역사가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는 데 착안한 일상과 관련된 역사 등 다양한 글들이 모였다. 한 주제에 천착한 이제까지의 책과 다른, 숙달된 조교의 시범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애초 지은이가 염두에 둔 제목은 ‘역사 실험’ 또는 ‘역사 연습’이었다.(조홍섭 기자)  

11. 03. 27.  

P.S. 근대 영국사가 주전공인 이영석 교수의 번역으로는 윌리엄 조지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한길사, 2007)이 있다. 역사학 공부의 여정을 담은 '사회사의 유혹' 두 권도 역사학도에겐 유익한 길잡이가 되겠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1-03-27 15:44   좋아요 0 | URL
유신말기에 감옥에서 <자본주의 발전연구>를 읽었다는 건...글쎄요.광민사에서 번역본이 나온 때가 1980년입니다.뭔가 기자가 잘못알고 있는 것 같아요.

로쟈 2011-03-27 18:00   좋아요 0 | URL
원서로 읽었다는 얘기 아닐까요? 감옥에서의 넉넉한 시간 얘기로 봐서요...

노이에자이트 2011-03-27 21:00   좋아요 0 | URL
글쎄요...그걸 어떻게 원서로...내용도 어렵거니와 두께가 엄청나지 않습니까.자본주의 이행논쟁을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하게 되는 게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인데, 유신말기는 학생운동가들이 탐독할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로쟈 님 또래들이 읽지 않았을까요?

로쟈 2011-03-27 21:02   좋아요 0 | URL
정확한 건 책을 보면 알겠지만, 400쪽 원서라면 1년안에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루에 한 페이지씩 읽으면 될 테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11-03-27 21:17   좋아요 0 | URL
제가 학생운동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긴 합니다만 학생운동기에서 유신 말기는 사회과학을 그리 깊이 공부한 때가 아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그렇다고 80년대 학생운동이 특별히 70년대보다 더 나을 것은 없지만 80년대의 운동론 서적들을 보면 70년대의 운동론의 과학적 토대가 빈약했다 운운 하더군요.그랬기 때문에 독서성향이 달라서 70년대 학생운동가와 80년대 학생운동가는 서로 이질감을 많이 느꼈다고 하더라구요.로쟈 님의 대학시절엔 대학생들이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나 내재적 발전론에 관해서 많이 공부하던가요?

로쟈 2011-03-27 21:20   좋아요 0 | URL
제가 경제학에 관심이 없어서 읽지 않았을 뿐, 사회과학 탐독 세대들은 다 보았을 듯싶은데요. 이행논쟁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3-27 21:43   좋아요 0 | URL
그런 독서성향이 70년대 말기까지는 없었을 것입니다.또 어떤 책이 번역되느냐도 중요한데, 모리스 돕의 책이 나온 지 5년이 지나고서야 스위지<자본주의 발전이론>이 번역됩니다.그전에는 스위지의 그 책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에 그 일부가 소개된 데 불과하죠.여하튼 80년대 초반 중반이 되어서야 경제사 책이 좋은 게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긴돌 2011-05-14 23:35   좋아요 0 | URL
우연히 이 싸이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돕의 <자본주의 발전연구> 영문판 복사본은 1974년경부터 구입할 수 있었지요. 그 무렵 이 책을 구입해 대학 3학년 여름에 자취방에서 줄곧
이 책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암파서점에서 나온 오스카 히사오, 다카하시 고하치로 등이 집필한 <서양경제사강좌>(일본판)은 대학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었고요. 물론 돕의 번역판은 1980년 무렵에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행논쟁은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1970년대에 영문서적 복사본이나 일본의 관련 서적을 구할 수 있었어요. 또 1950년대 말에 서울대 민석홍선생이 잘 요약해 소개하기도 했지요. 우리 번역판은 1980년경에 나왔을 겁니다. <한겨레신문> 기사에 유신 말기 감옥에서 돕의 책을 읽었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것 같고, 다만 일본번역본이나 영문판 복사본은 구할 수 있었겠죠.

로쟈 2011-05-15 13:51   좋아요 0 | URL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