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시어도어(테오도르)딘의 <인간의 내밀한 역사>(강, 2005)에 대한 기사를 읽고 책을 챙겨놓기로 했다. 서양사학자 이영석 교수가 자신에게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책의 의의를 재발견하게 돼 반갑다(알라딘의 상품 이미지 넣기는 언제쯤 정상화되는 것일까?).

  

교수신문(11. 05. 02) '시어도어 젤딘' 혹은 감성과 삶의 역사

내가 옥스퍼드의 역사가 시어도어 젤딘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1995년 무렵인가 런던의 한 서점에 들렀다가 베스트셀러 서가에 진열된 책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샀다. 이 책의 모티브는 만남과 대화다. 젤딘은 저명한 방송인에서부터 어린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랑스 여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더 넓은 인간 경험의 세계로 나아간다.

사실 이 책은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다. 25개 장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책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다. 한동안 나는 이 책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그의 재치 있는 농담이 한 줄기 섬광처럼 가슴에 파고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책 4장 ‘일부 사람들이 고독에 대해 면역성을 얻게 된 경위’를 보자. 그는 콜레트라는 세무서 직원과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장학금을 받아 상급학교에 진학해 나중에 공무원이 되었다. 비록 성공한 여성이지만, 직장에서 승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남성의 독점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얻으려고 한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이다. 이 시점에서 젤딘은 인간의 삶에서 외로움이 갖는 의미에 관해 역사의 바다를 항해한다.

고독은 오래 전부터 낯익은 것이다. 힌두교 신화는 창조주가 외로움 때문에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옛날부터 사람들은 고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려고 노력했다. 은자의 삶을 동경하고 자기성찰에 매진하기도 했다. 유머와 웃음으로 고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거나 내면적인 신앙을 갖는 것 모두가 고독 면역법의 전통이 되었다.

이와 달리 현대인은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여기에서 젤딘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외로움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일반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외로움은 모험이다.” 혼자 있을 권리나 예외로 남을 권리 또한 다른 사람과 만나 교제할 권리 못지않게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고독은 고통일 뿐이라는 일반론을 떨칠 수 있다.

나는 젤딘의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이전 책들도 읽었다. 원래 젤딘은 19세기 프랑스 정치사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의 연구가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프랑스인의 일상생활에 녹아 있는 감성과 정감을 다룬 다섯 권짜리 책 <프랑스 1848-1945>를 펴낸 이후의 일이다. 여기에서 그는 프랑스인 특유의 감성과 정감을 탐사한다. 각권은 ‘야망과 사랑’, ‘번민과 위선’, ‘지성과 자존심’, ‘정치와 분노,’ ‘맛과 부패’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들 부제만 보더라도 그의 작업이 기존 역사학의 통념을 과감히 벗어나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젤딘은 일반적인 역사서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다. 그가 역사서술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 여기에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성찰하는 데 있다.

박식한 역사가 젤딘은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는 동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그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감성에 대해서도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준다.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세계는 중국인의 '恥', 한국인의 '恨', 일본인의 '忍'으로 대변된다. 이는 각기 부끄러움, 후회와 쓰라림, 더 나은 시대를 대망하는 기다림을 나타낸다. 젤딘에 따르면, 동아시아인의 감성은 유럽인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포용력이 있으며 부드럽다.

결국 젤딘이 추구한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을 얻는 작업이다. 그는 이성과 지식보다 감성과 정감의 영향을 받는 삶의 영역을 더 중시한다. 그의 저술에서 역사지식은 인간의 감성이나 삶에 관한 갖가지 질문의 해답을 추구하는 여정의 방향타이자 나침반이다. 그는 전문적인 역사지식을 추구한다기보다, 그 지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젤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오랫동안 계급이나 산업화 같은 거시적인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이들 주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다. 젤딘의 책은 지적 방황을 거듭하던 내게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알려준 나침반이었다. 나는 역사 연구의 지향점이 삶의 성찰에 있으며, 그것은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 나는 의식적으로 삶의 섬세한 측면을 확대해 보려고 노력한다. 알게 모르게 젤딘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11.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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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demian 2011-05-07 19:57   좋아요 0 | URL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로쟈님 서재에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이 책 재미있습니다^^

로쟈 2011-05-07 22:17   좋아요 0 | URL
저도 원서와 같이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인디고의 유쾌한 문화혁명

4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또하나의 책읽기 책은 허아람의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궁리, 2011)다. 저자의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인디고 서원'은 혹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다. 부산에 있는 청소년 인문학서점이자 한국 청소년 인문학 활동의 메카이다. 그 인디고서원의 대표가 바로 '아람샘'이다. 책날개에 실린 소개에는 '매 순간 생의 혁명을 꿈꾸는 투사, 이 땅의 인문혁명을 도모하는 전사'라고 돼 있다(또 한 가지는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에게는 소중한 연인'이다). 그 '인문학 혁명가'가 함께 읽어보자고 제안하고 또 글귀들을 읽어주는 책소개 모음집이다. '인디고 아이들'과 함께 그간에 많은 책을 펴냈지만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는 그의 첫 단독저서다.   

국제신문(11. 04. 30) "꿈꾸어라 청년아" 인문학 혁명가의 책 추천

저기 무대 위에 앉아서 노래하는 작은 여성이 '혁명가'라는 사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지난 28일 오후 부산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허아람의 꿈꾸는 책방낭독회'였다. 부산의 청소년 인문학 서점 인디고서원(www.indigoground.net)의 허아람 대표가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를 펴낸 것을 기념해 조촐하게 마련한 낭독 콘서트였다. 



여기서, '혁명'이란 말은 정치용어가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이뤄낸 열정과 성실을 비유하는 말로 쓰고자 한다. 또는, 가치혁명과 같은 인문용어로 이해하셔도 좋을 것이다. 허 대표의 손에서 인디고서원이 태어났다. 인디고서원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청소년 인문학 활동의 거점이자 최전선이 됐다. 청소년인문학잡지 '인디고잉'과 영문판 국제 인문학잡지 '인디고'가 창간돼 지금도 나오고 있다. 허 대표는 '인디고 아이들'과 함께 5대양 6대륙을 샅샅이 다니며 세계 석학들과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 땀흘리는 젊은 활동가를 만나 부산에서 국제행사인 '인디고유스북페어'를 두 번 열었다. 인디고유스북페어에 온 석학과 활동가들은 깜짝 놀랐다. 



인디고서원이 자랑하는 청소년 독서토론 프로그램인 '정세청세'는 부산의 작은 인문서점 행사에서 전국 12개 도시에서 열리는 대표 인문프로그램으로 자랐다. 이중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라 할 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 판단이다.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허 대표가 빼먹지 않은 일이 있다. 책읽기다.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 읽다'는 허 대표가 2008년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부산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매주 금요일 진행한 '허아람의 꿈꾸는 책방'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책이다. 허 대표를 초청해 '별밤'을 진행했던 진행자 지성훈 씨도 이날 낭독콘서트에 초청됐다. "인디고유스북페어 준비 때문에 외국에 갔다가 공항에서 짐을 잔뜩 짊어진 채 방송국에 오시질 않나, '그렇게 바쁜 중에서도 내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다'는 걸 눈치채게 하려고 그랬는지 방송실에 그간 읽은 책을 펼쳐놓질 않나…"(웃음) 이 책은 그렇게 나왔다.

책에 대한 책, 책의 책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재미있고 잘 읽힌다. 방송에서 입말로 해설하고 육성으로 낭송한 형식을 책에 옮겼기 때문이다. '청춘들에게 안겨주고 싶은 시집' '내 삶의 중요한 가치' '스무 살의 겨울을 어떤 생각들로 준비할까' '아름다운 바보들' 등 글이 저마다 주제를 갖고 있어 유용하고 울림이 좋다. 허 대표는 이 책에서 283권을 소개한다. 방송에 함께 나왔던 낭송음악의 목록도 실었다.

르 클레지오의 '어린 여행자 몽도'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 또는 어떤 문학작품을 접하게 할 때 몽도와 이 할아버지의 글자 배우기 장면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감수성으로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합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허 대표의 발걸음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짐작케 한다. 아름답고 진솔한 '책의 책'이다.(조봉권기자) 

11. 04. 30.  

P.S. 아람샘의 책 추천은 마튜 르 루의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마고북스, 2006)에서 시작해서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로 마무리된다. "저에게 만약 지상의 도서관이 불탔을 때 남겨야 되는 세 권의 책을 묻는다면, 대답할 한 권의 책"이라고 꼽은 책으로 '제목 또한 이 책의 글귀에서 따왔다.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도 마지막 방송 시간에 언급돼 있어 '인상적'이다. 마지막 방송의 마지막 멘트는 이렇다.  

저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마음속에 와닿았던 한 줄의 문장으로 오늘 하루 내 삶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생의 의지가 생긴다면, 책은 그것으로 충분한 자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책을 한 권이라도 가까이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4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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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중국>(길, 2006)에 이어서 중국 지식 엘리트들의 생각과 논쟁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 마크 레너드의 <중국은 무엇을 생각하는가>(돌베개, 2011). 아래 리뷰기사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중국 지식인 리포트'로도 읽어볼 만하겠다.

  

한겨레(11. 04. 28) 자유주의파-신좌파 나뉘어 중국 지식인 ‘중국 모델’ 논쟁

‘중국위협론’같이 세계 질서에 변화를 줄 새로운 체제로서 중국모델에 대한 논의는 주로 미국의 관료나 지식인들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의 지식인들은 이런 중국모델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주요2국가 체제가 주목받으며, 칼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 하던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도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출간된 <중국은 무엇을 생각하는가-중국 최고지도부를 움직이는 지식엘리트들>(돌베개)은 중국모델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생각을 엮은 일종의 보고서와 같은 책이다. 중국 지식계의 사상적 조류는,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는 자유주의파와 시장 개혁을 지지하되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신자유주의적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의 신좌파로 나눠볼 수 있다. 영국의 국제관계 전문가이자 유럽외교관계협의회 집행이사인 마크 레너드는 왕후이, 아오양, 장웨이잉(위 사진), 위커핑(아래) 등 다양한 중국 지식인들과의 깊은 대화를 바탕으로 자유주의파와 신좌파의 논쟁 속에서 정립되고 있는 중국모델이 무엇인지 정리했다.

지은이는 ‘황하 자본주의’, ‘협의형 독재정치’, ‘종합 국력’을 각각 경제, 정치, 국제관계 영역에서 중국모델을 말해주는 핵심어로 꼽는다. 황하 자본주의란 1990년대 개혁·개방 위주의 경제정책이 후진타오 주석이 말하는 ‘조화로운 사회’를 중시하는 경제정책으로 바뀌어가는 흐름과 관련이 있다. 곧 시장 경제를 추구하되 국가의 적극적 구실로 평등과 지역균형, 환경과 노동 문제 등 시장 경제의 폐해를 바로잡는다는 노선이다. 



이런 경제 노선은 정치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장에 대한 개입 등 국가의 적극적 구실을 뒷받침할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중국이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닌 협의형 독재정치 속에서 정당성을 찾고 있다고 보았다. 성공회대 토론회에서 왕후이가 ‘이론논쟁·노선투쟁 등이 기층 민중의 보편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조정 구실을 해왔다’고 말하는 맥락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보통 선거가 아닌 다양한 장치들을 개발해 공산당 일당통치 속에 민의가 반영될 수 있도록 주력한다는 풀이다.

종합 국력은 중국의 국제관계 전략이 반영된 개념이다. 지은이는 특히 중국이 소프트 파워와 다자주의에 주력하고 있는 데 주목한다. 국제 질서 속에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내세우는 하드 파워와 달리, 소프트 파워는 문화·사상적 수단이나 국제기구에서의 합의 등에 근거한다. 또 중국은 주권국가의 고유 권한을 중시하며, 다자주의적 방식으로 국제관계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런 중국모델이 지향하는 바를 ‘성벽으로 나뉘는 세계’라고 표현한다. 미국식 세계화가 추구하는 ‘평평한 세계’와 대립하며, 주권국가 스스로의 독립자주적 통치를 중시하는 개념이다. 이런 중국모델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에 퍼져나가고 있는 현상에 주목한 지은이는 “냉전체제 뒤로 유럽과 미국은 중국모델이라는 새로운 대안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최원형 기자) 

11.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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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이론서'라 할 만한 책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비 바바가 엮은 <국민과 서사>(후마니타스, 2011)이다. 원서를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기에 출간이 반갑지만 아직 서점에 배포되진 않았고 언론쪽으로만 '릴리스'를 한 모양이다. 한겨레에 기사가 올라왔기에 미리 옮겨놓는다.  

  

한겨레(11. 04. 23) “국민국가는 끊임없이 뒤섞이는 개념” 

영어 단어 ‘네이션’(nation)은 19세기 말 뒤로 서구가 중심이 되어 펼쳐낸 근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의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도 전해진 이 말은 그동안 국민, 민족, 국가, 국민국가 등 다양한 옮김말로 소개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우리말로 딱 부러지게 옮길 방법이 없다’고 곤란해했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래저래 옮겨보는 국민, 민족, 국민국가 등의 옮김말들은 결국 영어 단어인 ‘네이션’이라 할 수 있는가? 그저 번역이 불가능한 채로 주변부에 남겨진 말에 불과한가? 



호미 바바 하버드대 교수(1949~·사진)의 이론에 기대어 본다면, 한반도에서 네이션이 번역되는 과정과 결과 모두가 네이션의 개념에 포함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나’와 ‘타자’를 나누어, 나의 외부에 있는 타자를 배제해왔던 서구의 식민지배 권력의 본질을 비판한 바 있다. 바바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민국가(네이션의 옮김말) 담론이 내부 또는 외부라는 단일한 영역에 머물지 않고, 중간지대인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섞이는 것이라고 봤다. 바바가 1990년에 엮어서 펴낸 <국민과 서사>는 국민국가 담론을 엮어내는 내러티브(서사)를 파헤치면서, 국민국가의 이런 양가적 성격을 드러내 보이는 책이다. 국내에서는 두번째로 소개되는 바바의 저작이다. 식민주의, 문화비평 연구자들의 다양한 논문들을 엮었으며, 바바는 머리말과 함께 나가는 말에 해당하는 논문 ‘디세미-네이션’을 썼다.

인도 출신인 바바는 같은 인도 출신인 가야트리 스피바크, 팔레스타인 출신인 사이드와 더불어 흔히 ‘탈식민주의 3대 이론가’로 꼽힌다. 영문학자이며 문화연구가인 바바는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자크 라캉 등 탈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사유를 빌려와 자신의 식민주의 연구에 적용해왔다. 혼종성, 모방, 계역성, 양가성 등 난해한 개념어들을 즐겨 쓰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학자로 꼽힌다. 



국민국가 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이 책을 가능하게 한 선행연구라 할 수 있다. 앤더슨은 “국민국가가 새롭고 역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에도, 그들의 정치적 표현은 언제나 태고의 과거로부터 나타나 무한의 미래로 활주한다”며 국민국가의 양가적 성격을 짚었다. 이에 대해 바바는 근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라는 진보적인 공동체 개념이, 어째서 일관된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내러티브를 동원해 국민의 정체성을 강조해야 하는지에 물음을 던진다.

본격적인 연구 논문들로 들어가기 전에, 서구 국민국가 담론의 기초가 됐다고 평가받는 프랑스의 저술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국민이란 무엇인가>를 실은 것은 이 때문이다. 르낭은 국민이 언어, 종교, 왕조, 인종, 지리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기원했다는 이론들을 하나하나 깨부순 뒤, “국가는 매일의 국민투표”라며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국민국가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 의지를 이루기 위해 역사에 대한 망각이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바바는 이 지점이 “국가 내러티브가 만들어지는 지점”이라며 “국민국가 담론이 주장하는 문화 정체성의 형성 과정이 동시에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균열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문화 정체성을 이루기 위해 단일한 기원이나 역사적 권위 등을 내세우는 교육적인 국가 내러티브가 동원되는데, 이는 국민국가 수립에 관련된 폭력을 망각하도록 요구하는 분열적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바바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초역사적·본질주의적 개념으로서 훈육적으로 강요되는 내러티브인 ‘국민(국가)’라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국민국가가 자기완결적으로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내부와 외부가 경계선 위에서 끊임없이 뒤섞이는 지점에 주목한다. 책을 옮긴 류승구 박사는 “바바는 서구 근대 담론이 상정하는 문화 정체성이 실제로는 내부의 근원적 타자성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분열, 그리고 불안을 억압함으로써 얻어지는 내러티브 효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정리한다. 훈육적 국가 내러티브를 비판한 바바는 다른 한쪽 영역, 곧 배제되고 억압되고 묻혀버린 소수자들의 개별적이고 지역적인 목소리를 불러낸다. 식민주의로부터의 탈출은 그들의 목소리가 전하는 내러티브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최원형 기자) 

11.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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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의 이론가로 잘 알려진 조정환의 새책이 출간됐다. '인지자본주의'라는 생소한, 그러면서 새로운 개념으로 현단계 자본주의를 분석한 책이다. 어제 전철에서 읽은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1. 04. 19) "지금은 ‘인지자본주의’시대” 

구글과 네이버가 돈을 버는 방식은 독특하다. 노동자를 더 고용해 그들이 창출하는 ‘잉여가치’에서 자본을 축적한다는 마르크스적 해석이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과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하지 않은 사람들,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에서 부를 창출한다. 필요와 욕망을 위해 서로 메일을 주고받고, 지식IN에 글을 올릴수록 그들은 돈을 벌지만 우리에겐 특별한 보상이 없다.

최근 <인지자본주의>(갈무리)를 출간한, 우리나라 대표적 자율주의 이론가 조정환씨(55)는 이러한 새로운 자본 축적 방식에 주목했다. 18세기까지 이탈리아와 지중해 등을 중심으로 교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것이 상업자본주의라면,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공장과 기계를 통해 노동자가 창출한 잉여가치로 자본을 축적한 것이 산업자본주의다. 이 시대 자본 축적은 엔클로저 운동과 같이 소작인을 강제추방하고 그 땅에 양을 키우거나, 돈 벌려고 상경한 농민들을 공장에서 밤 늦게까지 부리는 ‘폭력성’이 수반됐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본의 축적 방식에 변화가 시작됐다. ‘폭력’이 아니라 ‘동의’를 얼굴로 하고 노동자의 육체력보다 인간의 지식·감정·소통·정보를 자본 축적의 동력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2일 서울 서교동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만난 조씨는 “지난 30여년간 자본 축적 방식의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것이 학술 혹은 사회운동의 주요한 관심사였다”며 “지식·감정·소통·정보, 즉 인간의 인지능력을 동력으로 돌아간다고 분석했기 때문에 이를 인지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드’가 몰락하고 ‘구글’이 뜨는 상황, 공장에 붙여진 ‘정숙’이라는 표어는 없어지고 자유로움을 강조하면서 그 성과는 어디론가 가로채지는 상황, 이것이 조씨가 말하는 제3기 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다. 

 

조씨는 지난 10여년간 연구성과를 토대로 기존의 마르크스 이론뿐만 아니라 인지과학의 성과까지 가져와 현대사회의 변화를 분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왜 현 사회를 ‘인지자본주의’로 매김할 수 있으며, 변혁의 시발점은 어디부터인지를 전망한다. 그에 따르면 지금 사회는 공간 개념부터 변하고 있다. 공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 전체가 생산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기존의 육체적 노동을 넘어 인간의 감정·지식·정서까지 자본 축적에 동원당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 자체도 오늘날에는 하나의 ‘공장’이다.

더욱이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인지자본주의적 분석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게 조씨의 주장이다. 인간이 내놓은 인지력의 성과와 소통 과정을 독점하는 것이 하나의 권력이며 사회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촛불집회를 촉발시킨 광우병 사건은 광우병의 위험성 자체에 대한 지적 논란이 핵심 중 하나였다. 4대강 문제, 천안함 사건도 과학적 이슈가 중점으로 떠올랐다. 최근 원자력 발전과 방사성물질에 대한 우려 또한 인지적 문제가 농축된 것이다. 그러나 지식·정보는 독점되고 사람들의 감정을 소통하는 통로들은 모두 자본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씨는 최근 벌어진 아랍혁명에서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다. 그는 “무함마드 부아지지라는 한 청년의 분신이 튀니지 혁명을 불러왔고, 와엘 고님이라는 한 청년의 문제제기가 이집트 혁명의 시발점이 됐다”며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라는 오래된 전문 혁명가 집단이 세밀하게 조직한 것이라면 요즘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 혁명은 없다”고 말했다. 고교생·청년실업자 등 전문가도 아니고 당원도 혁명가도 아닌 사람들의 감정적·정서적 호소가 이름 모를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인지자본주의’에서 변혁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바탕으로 하면 변혁의 동력은 과거 시대와 완전히 달라진다. 상업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해적이었고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저항하는 것이 ‘만국 노동자의 단결’을 통한 파업이었다면,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저항은 ‘네트워크’이다. 수없이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대도시 안에 널리 분산돼 있는 사람들, 조씨가 ‘다중’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의 직접 소통과 ‘공통되기’를 통해 인지의 축적과 소통구조를 혁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SNS와 같은 도구를 자본의 축적 방식으로 이용당하지 말고 다중의 것으로 전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랍혁명같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이름모를 한 네티즌의 문제제기로 여러 사람이 공감하며 타오른 촛불집회가 그 한 사례다. 조씨는 “촛불집회 때 한 여학생이 한참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고 있는 노조 사람들에게 ‘일어나라’며 호통을 치던 장면이 생생하다”며 “이 변화된 풍경, 이 어린 친구를 어떻게 봐야 하나, 이런 것에 하나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씨는 <인지자본주의>에서의 분석을 바탕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꿔나가야 할지를 제시하는 <혁명의 세계사>(가제) 출간을 준비 중이다.(황경상기자) 

11.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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