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손에 들고 있는 책 중의 하나는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이다. 지난주에 동네 서점에 갔다가 아이가 자기 책을 고르는 동안 나대로 고른 책이다. 어떤 내용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서점에서 잠깐 넘겨보니 편하게 읽히는 책이었다. '일곱 철학자'를 다루고있는 2부에서 특히 '구텐베르크의 자기성찰' 대목이 눈길을 끌어서 결국 손에 넣었다. 관련기사를 찾으니 교보문고에선 '휴가철 CEO가 읽을 책'의 하나로 선정해놓기도 했다. CEO가 아니더라도 잠시 마음의 휴가를 얻고 싶은 이라면 읽어볼 만하다(나는 이 서재를 언제 떠나보나?).  

  

한국경제(11. 04. 01) 주의력결핍장애ㆍ노모포비아…스마트폰이 만든 디지털 질병들

우리 모두 궁금하다. 스마트폰은 삶을 정말 스마트하게 만드는가.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이용한 네트워크는 확장될수록 좋다는'디지털 맥시멀리즘'은 참인가. 칼럼니스트이자 미디어 비평가인 저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디지털 네트워크 덕에 다들 세상과 가까워졌는진 몰라도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법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언론 · 정치 · 공공센터에서 실시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이 책에서 그는 디지털 네트워크에 대한 의존이 사람을 지나치게 외부 지향적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사람은 남과 연결되려는 욕망과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려는 욕망을 함께 지니되 중요한 건 둘의 균형을 찾는 것인데 디지털 세상은 연결된 삶만 좇도록 부추긴다는 얘기다.

왜 아니랴.눈 뜨자마자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해 밤새 누가 내게 연락했는지,남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한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를 확립하려 애쓰던 과거와 달리 디지털기기 속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려 든다. 내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인지,누가 내 말에 주목하는지로 가치를 측정하려 애쓰는 셈이다.

틈만 나면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을 확인하고 웹서핑을 하는 것은 물론 페이스북 담벼락을 살피고 트위터에 댓글도 단다. 이러니 어디서건 한 가지 일에 단 3분도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다는 마당이다. 흐트러진 집중력을 회복하자면 빼앗긴 시간의 10~20배가 필요하다고 돼 있다. 1분만 딴짓을 해도 제자리를 찾는 데 15분은 걸린다는 말이다.

디지털 세상에 대한 맹신과 의존은 사람을 초조와 불안에 시달리게 만든다. 책에 따르면 심한 경우 주의력결핍장애(ADT) 증세도 야기한다.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잠시 숨이 멎으면서 심하면 스트레스성 질환을 유발하는 '이메일 무호흡증'과 휴대폰 없이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노모포비아(nomophobia)'란 질환도 등장했다.

디지털 중독 증상은 조직의 생산성도 감소시킨다. 비즈니스 리서치 회사인 바섹(Basex)은 직장인 대다수가 그런 방해요인 때문에 근무시간의 25% 이상을 허비하고,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 또한 연간 9000억달러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 인텔 등 인터넷 관련 업체는 2008년 학자 · 컨설턴트 등과 함께'정보과잉 연구그룹'을 구성했다. 정보 과잉에 따른 업무 차질과 생산성 저하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다. 인터넷 중독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도 나왔다. '휴대폰 던지기 게임'과 외딴섬에서 전자기기 없이 지내는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저자가 플라톤 · 세네카 · 셰익스피어 · 구텐베르크 · 소로 · 맥루한 등 오늘날 못지 않은 변혁기에 탄생한 위대한 인물 7명의 삶을 통해 내놓은 해결책은 극히 단순하다. '가끔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라'는 것이다. "멈추고 호흡하고 생각하라.마음의 온도를 낮춰라.그래야 세상의 속도를 늦추고 때 없이 엄습하는 불안도 줄일 수 있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11. 07. 07.  

P.S. '연결'을 끊어보라고 제안하는 책이지만, 나는 책을 읽다가 오히려 새로운 연결을 발견했다. 존 맨의 <구텐베르크 혁명>(예지, 2003)은 <속도에서 깊이로>가 아니었다면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에 책을 들게 하라' 장에서 주로 참조되는 책이다. 같이 언급되는 책은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 그리고 최근에 나온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도 소개된다. 제목은 원제에 따라 <책을 위한 변론>이라고 표기됐다. 이 또한 요즘 읽고 있는 책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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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1-07-08 03:26   좋아요 0 | URL
심야에 일어나 마땅이 할 것은 로쟈의 저공비행을하는 것인데요. 안경을 벗고 대하면 집중력이 높아집니다. 로자님이 선택한 책제목은 항상신선합니다. 속도에서 깊이로!

로쟈 2011-07-08 18:2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너무 일찍 일어나시네요.^^
 

작년이던가 원로사학자 노명식 교수의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까치)를 뒤늦게 알라딘 중고상품으로 구했다. 1980년에 나온 책의 1993년 재판본이었다. 물론 절판된 책이었기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좀더 기다렸다면 버젓한 책으로 구할 수 있을 뻔했다. 이번에 재출간됐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민까지, 1789-1871>(책과함께, 2011). 저자의 또다른 대표작 <자유주의의 역사>(책과함께, 2011)와 함께. 이 또한 민음사판으로 갖고 있는 책인데, 박스보관도서라 새로 구해볼 마음도 있다. 혹시나 싶어 소개기사를 찾다가 노명식 교수의 자비 전집 출간 사실도 알게 돼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11. 06. 29) 12권 전집 자비로 찍어 나눠준 老학자

“한국사를 전공하는 친구인데 내 수업을 듣는 거야. 무척 기특해서 90점 이상 줬던 기억이 나네.”(노명식 전 한림대 교수)

“저까지 기억하시고 전집을 보내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 수업은 다른 과의 학생들도 꼭 들어야 하는 명강의였지요. 특히 프랑스혁명사는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겐 필수과목이었어요.”(이재범 경기대 사학과 교수)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운동의 한 레스토랑에서는 조촐하지만 특별한 모임이 열렸다. 한국 서양사학계 1세대 학자로 꼽히는 노명식 교수(88)는 지난 50여 년간 쓴 글을 모아 12권 분량의 양장본 ‘노명식 전집’을 출간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10여 명의 현직 교수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전집에는 저서와 논문, 강의록은 물론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글까지 수록됐다.

“비록 잡문이어도 내가 쓴 글을 온전히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1950년대 지역 신문에 기고했던 글부터 최근에 쓴 글까지 모조리 찾아서 정리했어. 그 작업이 만만치 않더라고. 7년 넘게 준비했는데 그동안 내가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았지.”

노 교수는 전집을 내는 데 들어간 비용 1억2000여만 원을 모두 자신이 부담했다. 스크랩한 자료를 문서 파일로 옮기는 데만 3000만 원 넘게 들어갔다. 1950∼1980년대 기고한 글은 워낙 한자가 많아 고학력자가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의 경우 제자나 지인들이 돈을 모아 전집을 내 헌정한다. 전집을 출간한 ‘책과 함께’ 출판사 류종필 대표는 “선생님께서 후학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제자들도 모르게 전집 작업을 진행하셨다. 비매품으로 지인과 제자, 학교 도서관, 사학 연구자들에게 기증했다”고 밝혔다. 류 대표도 노 교수의 제자다.

이날 모인 제자들은 대부분 1970, 80년대 노 교수가 성균관대 재직했을 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다. 20년 전부터 매년 설날과 스승의 날에 노 교수를 찾아뵈었다고 했다. 올해 스승의 날 모임은 노 교수의 전집 출간에 맞춰 일정을 늦추어 이날 가졌다. 뜻밖에 노 교수의 전집을 택배로 받고 오랜만에 모임에 참석한 제자도 있었다.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선생님은 할 말은 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며 “1972년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미국이 재채기하면 한국은 감기에 걸린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이 잡혀가시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노 교수는 1976년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경희대 교수직에서 해직됐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이를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키워드를 제시해 학생들이 배울 내용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한 후 강의하셨는데 당시로선 선진적인 방식이었다. 나도 수업 전 온라인 게시판에 키워드를 제시해 학생이 그 내용을 채워오게 한다”며 웃음을 지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전집에 대해 ‘동시대의 사료’로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하에서 당시 상황을 글로 남긴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현대사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며 “그렇기에 이 전집은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지은 기자) 

11. 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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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7-06 05:06   좋아요 0 | URL
노명식 선생의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가 다시 나왔군요. 아마도 80년대 당시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프랑스 역사에 관한 몇 안되는 책중 하나였읍니다. 꽤 잘쓴 책으로 기억하는데 요즘 이를 능가할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 이었던 신용석이 앙드로 모로아의 프랑스사를 내었던 것이 80년인가 81년으로 기억되고요. 정말 80년대에는 우리말로 된 프랑스에 관한 역사책은 찾아보기 어려웠지요.

노명식선생이 파리컴뮨 이후부터 드골 시대까지에 관해 쓴 책이 탐구당에서 문고본으로 나와 있었는데 책제목은 가물가물. (어딘가 발표한 논문을 책으로 낸것 같은데 아주 딱딱한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07-06 16:53   좋아요 0 | URL
탐구문고에서 나온 것이 <프랑스 제3공화정 연구>입니다. 요즘은 안 나오죠.파리코뮨 진압하고 바로 이어지는 시기부터 시작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06 16:55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잊을 만하면 읽습니다.혁명과 왕정복고가 연속되는 이 시기는 정치학이나 사회학 공부에도 좋더군요.얼마 전 나폴레옹 전기를 읽으면서 맥을 잡으려고 또 읽었죠.한국사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어요.

미국사람 2011-07-06 23:36   좋아요 0 | URL
이 책이 훌륭한 점은 번역이 아니고 직접 쓴 글이기 때문에 글이 살아있다는 점 일겁니다. 읽으면서 쓴 사람의 감정이 느껴졌거든요. (하긴 읽은 지가 30년정도 되었네요.)

번역투 문장은 아무래도 어색하거든요. 저는 김화영선생한테 불어를 배운 사람인데 카뮤 번역으로 유명한 김화영선생의 글마저도 직접 쓴 글이 번역소설보다 훨씬 뛰어나요.

주경철이 옮긴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읽다가 한국말이 너무 어색해서 영역본을 읽는게 나을거라는 생각에 그만두었거든요. 주경철이 나쁜 학자는 아닌데도 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07 17:01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사 분야의 민석홍,노명식 이런 분들의 글이 좋지요.저는 헌책방에서 아주 싸게 구했습니다만... 그 뒷세대로 유럽사 분야에선 임지현 씨 글이 읽기 쉽고 재밌게 잘 쓰고요.

미국사람 2011-07-07 23:44   좋아요 0 | URL
임지현이 누군가요? 혹시 민족주의는 반역 이다라는 책을 쓴 사람인가요? 제가 한국 사정에 조금 어두워서...

노이에자이트 2011-07-09 07:49   좋아요 0 | URL
예.그 책 맞습니다.

turk182s 2011-07-07 02:10   좋아요 0 | URL
헐 ..파리코뮌과..추억이 새록 새록 하네요새내기때 선배가추천한책
 

이번주 관심도서 가운데 '사회적 독서' 거리로 분류해도 좋음직한 책은 김상구의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와 강명관의 <성호, 세상을 논하다>(자음과모음, 2011)이다. 주중에 이미 한번씩 언급했던 책들인데, 주말에 올라온 리뷰 가운데 한편씩 골라 스크랩해놓는다. 개인적으론 강명관 교수의 <성호사설> 읽기 덕분에 조선 유학자들 읽기를 성호 이익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대로는 '발견'인 셈이다... 

서울신문(11. 07. 02) 상상초월 한국 종교계의 어두운 실상

서방세계는 한국을 ‘종교 천국’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많은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나라. 부러움이 담긴 이 말은 언뜻 듣기엔 더할 나위 없는 찬사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칭송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비아냥의 수사이기도 하다. 종교단체와 종교인이 자유롭게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나라. 그 비아냥은 물론 종교 본연의 범주를 벗어난 채 세속적 가치에 매몰된 불법, 탈법의 비정상적인 세태를 겨냥한 것이다.

서방세계에서 기독교의 퇴조는 심각한 지경에 와 있다. 800년 역사의 성당을 허물어 아파트를 짓고, 700년 이상 된 교회를 유치원으로 만들기도 한다. 네덜란드와 독일에선 600년 이상을 지켜온 유서 깊은 성당이 개인 화실이며 상가 건물로 바뀐 사례가 수백 건이 넘는다고 한다.

‘교회의 몰락’으로까지 관측되는 이런 상황은 한국에선 영 딴판이다. 세계 20대 교회로 꼽히는 교회의 절반이,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가 있는 곳이 바로 이땅이다. 미국 다음으로 해외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도 바로 한국이다. 서방세계가 ‘종교 천국’이라는 찬사 아닌 찬사를 쏟아내는 이유가 분명 있는 것이다.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김상구 지음, 해피스토리 펴냄)는 그 ‘종교 천국’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종교계의 어두운 실상을 낱낱이 까발린 책이다. 믿음을 팔아 부와 권력을 사는 한국 종교의 부끄러운 행위를 정밀하게 추적한 일종의 흑서인 셈이다. 책에서 파헤쳐진 실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부동산실명제를 교묘하게 비켜가는 명의신탁, 억대의 월봉을 받고도 소득세 한푼 안 내는 목회자, 신도들의 신앙심을 담보로 받은 대출 이자를 헌금으로 내는 교회, 인가받지 않은 신학대학원을 통한 학위 장사, 한 해 예산이 수십억∼수백억원 수준인 교회를 한 푼의 상속세도 내지 않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교회세습…. 요즘 개신교계를 뒤흔들고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해체를 비롯해 종교계 안팎에서 요동치는 자성과 쇄신의 목소리가 괜한 게 아님을 고스란히 들춰내는 고발의 연속이다.

책을 관통하는 온갖 비리와 일탈의 핵심은 단연 특혜와 불평등으로 모아진다. 종교단체와 종교인이기에 가능한 부의 축적과 권력의 획득, 그리고 종교계 내부의 성차별과 직제의 모순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그 많은 특혜의 홍수 속에 갈수록 심해져 가는 종교 주체들의 도덕 불감증이 가장 문제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래서 투명한 종교, 건전한 종교를 세우기 위해 종교법인법 제정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못 박는다.(김성호 편집위원)    

경향신문(11. 07. 02) 조선의 감추고 싶은 치부… 어쩜, 지금이랑 똑같네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히는 몰랐던 조선시대 실학자 성호 이익의 비망록을 곱씹은 책이다. 딱딱하게 여겨질 고전을 알기 쉽게 풀었다. 성호가 직접 얘기하는 듯하다. 과거와의 벽을 허물기 위해 생동감 있는 해석을 곁들인 저자의 공력이 돋보인다.

옛것이지만 메시지는 예스럽지 않다.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성호의 비판적인 시선을 오늘날에 끌어와 저자 나름의 독설과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추고픈 조선의 치부가 21세기 한국에도 오롯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호사설>을 전부 싣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특유의 사회상을 드러내면서도 성호의 사상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글을 골라 38개의 주제로 정리했다.

“손 가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큰 더미를 이루었다”는 성호의 말을 지은이는 겸손일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밥상머리부터 시작해 인간의 도리, 사회, 치국까지 주제는 광범위하다. 저자는 <성호사설>을 “조선시대 지식인의 학문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저작”이라고 매김한다.  

책 표지의 그림이 말해주듯 <성호사설>의 화두는 ‘백성’이다. 성호는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위정자들,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착복할 수 있도록 보장된 사회구조가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믿었다. <성호사설> 곳곳에서 성호는 관리들의 탐학(貪虐)을 비판한다. “재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인데도 백성을 쥐어짜는 무리가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살찌우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는 눈이 먼 거지를 회상하던 성호는 궁핍한 유민이 양산되는 이유를 “학정에 시달린 나머지 살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저자는 한발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학정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상이 이 시대의 유민을 낳”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줄곧 성호의 메시지를 오늘날 시류에 비춰 전달한다. 예로 고기반찬이 없어도 식사가 즐겁다는 성호의 말에 저자는 쌀을 제외하면 5%에 불과한 식량자급률을 꼬집고, 대형할인점과 ‘에스라인’ ‘몸짱’ 등을 언급하며 자본주의를 욕한다. “죽음의 잔치가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가 가동시키는 산업 때문이다.”

탐관오리의 배를 불려주는 ‘돈’에 대한 성호의 일갈에 특히 눈길이 간다. 단순하지만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성호의 화폐론이 그것이다. 저자의 풀이대로라면 성호는 화폐 없는 세상을 유토피아로 본다. 재산이 오직 실물형태로 존재한다면 부의 축적에는 제한이 따른다는 얘기다. “대개 곡식과 포는 가벼운 화폐와 사뭇 다르다. 백성을 쥐어짜는 자들도 많이 가질 수가 없다.” 성호는 화폐가 곧 착취의 수단이고 화폐의 존재가 백성을 궁핍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에 저자는 세계 금융위기를 불러일으켰던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을 지목하며 “부패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부패한 인간들을 척결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가망이 없다”고 단언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백성은 힘들다. 성호는 통치자가 백성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오류라고 꼬집는다. 책은 아울러 “나라에 아내를 내쫓는 법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혼문제 등 당시의 온갖 군상을 에누리 없이 증언한다. <성호사설>에 비쳐진 오늘의 현실, 책장을 넘길수록 갑갑하고 화가 치민다. 하지만 따끔따끔하다. 그리고 통쾌하다. 그때그때 아무 장을 펼쳐들어도 유익할 이 책은 인문시리즈 뉴아카이브 총서 세 번째다.(고영득 기자) 

11.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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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윈치의 <사회과학의 빈곤>(모티브북, 2011)을 서가에 꽂아둔 지는 꽤 됐는데, 아직 책을 펼쳐보진 못하고 있다. 지난주 교수신문에 편역자인 박동천 교수가 책의 의의를 짚어주는 기사를 실었기에 옮겨놓는다. 편역자 해제에도 적혀 있지만, 책은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이란 단행본과 <원시사회의 이해>라는 논문을 같이 묶은 것이다. <사회과학이라는 발상(The Idea of a Social Science)>은 1958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며 1990년에 2판이 나왔다고 한다(2판에 붙이는 머리말 정도가 더 붙었을 뿐이라고). 편역자도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의 철학>(서광사, 1985), <사회과학의 이념>(현대미학사, 1997)이란 제목으로 두 차례 번역된 바 있기에 이번이 세번째 번역서이다(나는 현대미학사판도 갖고 있다). '철학에서 이념으로, 그리고 이념에서 다시 발상으로'가 번역서명의 변천사이다. 피터 윈치의 사회학을 해설/옹호하는 책의 제목이 <사회과학 같은 건 없다>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교수신문(11. 06. 15) 사회연구, 과학적 탐구 방법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까

피터 윈치의 짧은 책, 『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에 담겨있는 성찰들은 심오한 만큼 대단히 넓은 방면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함의를 가진다. 윈치는 이어 발표한 논문 「원시사회의 이해」에서 다시 사회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과 관련해서 과학이라는 탐구 방법이 가지는 의미의 한계를 분명하게 구획했다. 이 두 작품을 모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고, 나는 거기에 『사회과학의 빈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두 편의 작품에서 윈치가 말하는 주요 논지 중에 하나는, 실재라는 것이 언어의 바깥에 언어와 무관하게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이 언어 안에서 이뤄진다는 논증이다.  “습도라는 개념을 가지지 않은 언어를 상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길이 전혀 없는 언어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242쪽).” 이 때문에 실재/비실재의 구분은 언어에 의존하는 관습적 구분이 아니라 언어 바깥에서 저절로 존재하는 구분인 것 같은 착각이 쉽게 발생한다.

사회 연구에서도 과학적 탐구 방법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무제한적 발상의 바탕에는 이처럼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의 논리적 지위를 분별해내지 못한 착각이 작용한다. 이는 과학이 무엇인지, 철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과학과 철학이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등을 분명하게 식별해내지 못한 혼동의 소산이다. 이러한 혼동과 착각을 윈치는 베버, 파레토, 밀, 에반스-프리차드 등등, 일급 지식인들의 강점을 최대한 인정한 위에서 착오가 일어나는 지점만을 추려내는 세밀한 언표에 실어 부각하고 비판한다.

사회연구와 자연과학의 차이를 윈치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 나라가 전쟁 중이라고 할 때, “ 전쟁이라는 개념은 나의 행태 안에 본질적으로 소속돼 있다. 하지만 중력이라는 개념은 낙하 중의 사과가 보이는 행태에 그와 같이 본질적으로 소속돼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 사과의 행태에 대한 물리학자의 설명에 소속된다(217쪽).”설령 사과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과의 행태에 관한 물리학자의 설명에서 사과의 생각은 적실성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자연과학이 목표로 삼는 설명에서 정당하게 사용돼야할 개념들은 연구 대상과 단지 외부적인 관계만을 가진다. 이와는 달리,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싸우는지가 본질적인 요소로서 고려에 포함돼야 한다. 군인과 정치인과 후방 민간인들의 행태에 관한 통계적 일반화로써 이해가 완결된다고 생각한다면, “중국어의 단어 각각이 나타나 쓰이는 지점에 관한 통계적 확률을 간파(201쪽)”하는 것으로써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완결됐다고 치부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연구 도중에 제기되는 매우 중요한 이론적 문제 가운데 많은 수가 과학에 속하기보다는 철학에 속한 문제이고, 따라서 경험적 탐사에 의해서보다 개념적 분석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종류(73쪽)”임을 윈치가 지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회 연구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행동 및 제도와 관습을 이해하는 데 있다. 물론 도중에 과학적 탐구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실상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사회 연구에서 과학적 탐구 방법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낳는다. 왜냐하면 사회 연구와 관련되는 수많은 주제들 가운데 과학적 방법이 유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 분별은 전형적으로 과학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철학에 속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회과학의 빈곤』에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윈치의 입장만이 아니라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그의 입장도 함께 들어 있다. “인간의 정신이 실재와 어떤 종류라도 접촉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이고, 나아가 만약 가질 수 있다면 그 점으로 인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런지가 또한 문제인 것(62쪽)”이라고 한 버넷의 지적을 윈치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철학은 모든 것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냥 놓아둔다(185쪽)”라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표 또한 그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의 정신, 즉 개념은 실재와 접촉하기도 하지만 접촉하지 못하기도 한다. 각 개인이 가진 생각이 실재와 접촉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나아가 접촉한다면 어떻게 접촉하며 못한다면 어떻게 못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또한 달라진다. 이때 철학의 역할은 어떤 정신이 어떤 실재와 어떻게 접촉하는지 또는 어떻게 접촉하지 못하는지를 분별하고, 또 그러한 접촉 여부와 양태에 따라 당사자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데서 그친다. 실재와 접촉하지 못하는 개념은 폐기하라든지, 어떤 식으로 접촉하는 편이 다른 식으로 접촉하는 편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등의 권고는 철학에 속하는 사항이 아니다. 어떤 방식의 삶이 더 좋은지에 관한 판단이나 선택은 각 개인이 실제 생활에서 내리고 스스로 인생을 통해서 결과에 책임질 사항으로 철학자도 물론 생활인으로서 그러한 결정에 일상적으로 봉착하게 되지만, 철학의 일환으로서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실증주의 사회과학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타자화의 문제라든지, 지식이 권력과 유착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고발, 그리고 문화적 상대성과 같은 논제들은 오늘날 한국의 지성계에서도 새로운 화두는 아니다. 그러나 「원시사회의 이해」에서 윈치가 비판의 과녁으로 삼은 에반스-프리차드 역시 문화적 상대성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인정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던 사람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막스 베버 역시 단순한 실증주의의 신도가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연구에서 행위자들의 주관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를 선구적으로 강조했던 인물임에도 과학에 관한 착각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해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에서 윈치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윈치의 세심한 비판은 동시에 그들의 자취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현임을 모든 독자가 알아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바른 길을 가려고 의지했고 또한 실제로 바른 길을 향해 여러 발걸음을 떼었다는 업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잘못 뗀 걸음을 비판할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지적 주장의 가치를 곧 비판할 만한 가치에서 구하는 자세 역시 윈치가 철학을 이해한 방식에서 본질적인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인간의 삶에서 과학의 유용성이 어디까지 인정돼야 하는가, 그리고 철학의 정당한 역할은 무엇인가에 관해 윈치가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지식 공동체에서 동료에 대한 비판과 경의가 어떤 식으로 표명되는 것이 지적 탐구의 본령과 어울리는지에 관해 행간과 문체를 통해 대변되는 그의 입장까지도 한국 지식인 사회의 현재에 대해 풍성한 함축을 지닌다고 나는 믿는다.(박동천_전북대 정치외교과)   

11.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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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지도에 별로 관심을 가진 바 없어서 지도의 역사에도 둔감한 편이다(고등학교 때 선택과목으로 지리 대신 세계사를 고른 탓인지도 모른다. 지리와 역사가 상호배제적이라니!). 그래서 올해가 대동여지도 150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도 몰랐다. 게리 레드야드의 <한국 고지도의 역사>(소나무, 2011)의 출간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저자의 학덕과 열정이 느껴지는 책이다. 해외 한국학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한국 고지도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도 내세울 만한 학술적 업적이 있는 것인지?). 박범신의 소설 <고산자>(문학동네, 2009)에까지 관심이 생겼다...

  

서울신문(11. 06. 25) “콜럼버스 ‘강리도’ 가졌다면 동쪽으로 항해 떠났을 것”

올해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세상의 빛을 본 지 1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4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특별전시회와 학술대회를 시작했고 전국 곳곳에서 잇따라 전시, 강연행사를 가진 뒤 오는 10월 20~21일 서울대에서 종합학술대회를 연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기념학술사업준비위원회’가 마련한 150주년 기념행사의 결정판이다. 성대하면서도 꼼꼼히 김정호를 기념하고, 그의 손길이 깃든 성과의 현재적 의미를 따져 보는 자리다.

‘조선 후기까지 조정에 제대로 된 지도가 한 장도 없어 김정호는 10년 동안 조선팔도를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8번 오르내리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조정은 나라의 기밀을 적들에게 알려줬다며 김정호에게 억울한 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하고 지도와 판목은 압수해 불살랐다.’

이제껏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을 만든 김정호에 대한 보통의 인식이었다. 시대와 불화한 삶 속에 관련 문헌의 부족, 게다가 비극적 최후까지 더해졌다니 ‘전설’ 또는 ‘영웅’이 될 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춘 셈이다. 하지만 이는 1934년 일제 총독부가 만든 ‘조선어독본’에 실린 내용이 해방 이후 교과서에까지 이어지며 빚어진 오해와 편견이다.

일제는 김정호 이전에는 제대로 된 지도 한 장조차 없는 것으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며 왜곡하는 식민사관을 주입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학계 일각에서 ‘김정호 바로세우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이뤄져 온 인식의 벽은 여전히 두껍다.

최근 번역 출간된 ‘한국 고지도의 역사’(장상훈 옮김, 소나무 펴냄)가 반가운 이유다. 한국역사학의 권위자인 게리 레드야드(79)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석좌명예교수가 쓴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한국 지도학의 발달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 세계 지도학계에 알린 노작(勞作)이다. 레드야드 교수는 책을 통해 자신을 ‘김정호의 열렬한 팬’이라고 소개하며 ‘김정호 이전의 성과’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지난 22~23일 두 차례에 걸쳐 레드야드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국사 전문가인 그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지만 “고령으로 귀가 어두워 전화 인터뷰는 불가능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한국사와 한국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이글이글했다. 



→한국사 전문인데 지도학에 관심을 두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저는 사실 평생에 걸쳐 한국사를 연구해왔고 한국의 지도학은 역사의 한 부분으로 공부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1990년 위스콘신대 지리학부로부터 한국의 지도학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습니다. 바로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해당되는 원고였죠. 애초 60쪽 정도로 예상했으나 정리하다 보니 300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 편집위 또한 한국 고지도의 중요성을 흔쾌히 인정했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세 권을 펴낸, 전 세계와 고금을 아우르는 세계 지도학의 종합연구서 시리즈입니다.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제2권의 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수록돼 있습니다. 모두 8권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적어도 20년 더 걸려야 마칠 수 있는 현재진행형 작업이죠. 애초 위스콘신대에서 편집기획을 시작한 영국 출신 지리학자인 J B 할리 교수와 데이비드 우드워드 교수는 이미 돌아가셨고 새로운 편집기획위원을 선정해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공위성, 디지털 과학기술의 발달도 반영할 생각입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서관이 이 책을 비치해 두고 있습니다.

→김정호 팬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지도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부터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대동여지도가 중요한 연결 고리였군요. 그런데 왜 대동여지도의 팬이 되신 겁니까.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세계의 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대동여지도와 같이 구체적인 성취에 대한 것은 잘 모르죠. 제가 ‘세계 지도학 통사’ 원고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그는 이것을 ‘동아시아 최초의 진정한 세계지도’라고 일컬었다-에도 관심이 남다릅니다. 아시아편 표지 사진으로 ‘강리도’를 실은 이유이지요. 아마 콜럼버스가 1492년 이 지도를 갖고 있었다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항해를 떠났을 겁니다. 세계사도 많이 바뀌었을 테고요. 



→한국의 옛 지도를 연구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지.

-글을 쓰는 데만 2년 반이 걸렸습니다. 한국의 많은 저작은 물론 일본, 중국, 유럽 학자들의 이론도 충분히 검토하고 종합했어요. 그 과정에서 김정호나 대동여지도 외에도 한국 지도학에 많은 성취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너무 대동여지도에만 관심을 쏟으며 다른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앞서서 노력한 이들, 예컨대 양성지(梁誠之·1415~1482), 정척(鄭陟), 정상기(鄭尙驥·1678~1752) 등에 대해 좀 더 주목했으면 합니다.

“지금도 날마다 한국 뉴스를 챙겨 본다.”는 레드야드 교수는 “김정호와 같은 천재를 둔 한국인 여러분에게 축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정겹게 말했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행사에 대해서도 축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국내판은 흑백 도판을 쓴 원서와 달리 컬러 도판으로 바꿨다. 번역을 맡은 장상훈 박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에서 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다.(박록삼기자) 

11. 06. 25.  

P.S. '06. 25'란 날짜를 적고 보니 한국전쟁에 관한 책도 언급해둔다. 러시아와 중국, 미국, 3개국의 학자가 쓴 <흔들리는 동맹: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일조각, 2011)이 번역돼 나왔기 때문이다. 원제는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1993)이다.   

다소 오래된 책이긴 한데, 부제대로 소련과 중국, 스탈린과 마오의 '미덥잖은' 파트너관계를 조명한 책이다. 자세한 리뷰는 '6.25전쟁 관련저서'를 특집으로 다룬 <해외 한국학평론2>(일조각, 2001)에 수록된 이완범 교수의 서평을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김학준의 <한국전쟁>(박영사, 2010)에서 책에 대한 소개를 읽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중국쪽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 관련서도 몇 권 나와 있다. 하지만 스탈린과의 관계는 <흔들리는 동맹>이 가장 자세히 다룬 듯싶다. 책의 집필 자체를 러시아의 외교관이자 중국문제 전문가 세르게이 곤차로프가 주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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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1-06-25 17:12   좋아요 0 | URL
빗소리 들으며 로자님의 글을 읽으니 좋네요. 이제 산에서도 들에서도 잠시 로자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로쟈 2011-06-26 12:23   좋아요 0 | URL
스마트폰을 쓰시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