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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의 번역 트렌드(인문학)에 이어지는 글이다. 역시나 12월 02일자 교수신문에 게재된 이은혜 기자의 기사를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태도록 하겠다.  

 

 

 

 

-자연과학은 각 분과뿐 아니라 과학철학도 포함하는 매우 방대한 영역이지만, 몇몇 이론들로 편중돼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 우선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이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다. 올해에만 <조상 이야기>(이한음 옮김, 까치글방), <에덴의 강>(이용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악마의 사도>(이한음 옮김, 바다) 등 세 권이 출간됐다. <이기적 유전자> 이후 계속되는 ‘도킨스 붐’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계열로 <인간본성에 대하여>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과 <빈 서판>의 저자 스티븐 핀커가 있다. 윌슨 역시 올해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최재천 외 옮김, 바다)와 <통섭>(최재천 외 옮김, 사이언스북스)이 번역됐는데, 이들 모두는 ‘인간의 사고나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분야 역시 전공자들이 부지런히 발벗고 나선 탓에 널리 읽히고 있었다.

도킨스나 윌슨의 책들은 나 자신도 즐겨 읽으니 그들의 책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게 전혀 유감일 리는 없다. 하지만, 도킨스나 윌슨이 '유전자 결정론자'로 지목되는 것은 유감이다(왓슨이라면 모를까). 기자의 관심분야의 인문학(특히 종교학) 쪽이어서 다소 편향된 의견을 제시한 게 아닌가 싶다(그러니 우리는 좀더 계몽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에덴의 강>은 이전에 출간된 것이 재출간된 것이니까 올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번역자는 이한음, 최재천 등이다. 특히 최재천 교수는 도정일 교수와 <대화>(휴머니스트)도 책으로 펴냈으니 그 부지런함이 더욱 돋보인다(이 책은 연말에 내가 꼽꼬자 하는 '올해의 책'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지난 주말에 <대화>를 좀 읽으며 떠올린 책은 존 브로크맨이 기획한 <제3의 문화>(대영사, 1996)이다. 23명의 저명한 과학자 글쟁이들이 참여하여 C. P. 스노우의 <두 문화>(민음사, 1996; 사이언스북스, 2001)에 (게으론 인문학자들과는 달리) 자연과학자 23명이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있는 모양새를 과시하고 있는 책이다(내용은 아주 훌륭하지만 만듦새는 미적 감각을 결여하고 있는 좀 부실한 책이다. 재출간되었으면 싶다. 편자의 말대로 임의적이긴 하나 23명의 책들과 함께).  "<두 문화>는 1959년에 5월 7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전통적인 연례 리드 강연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사이언스북스판은 "당시 강연 제목은 <두 문화와 과학 혁명>이었다. 이 강연의 내용을 1부로 싣고, 2부는 4년 뒤인 1963년의 시점에서 앞의 강연과 관련하여 그때까지 제출된 논평과 반응, 비판들을 지은이가 직접 정리하고 해명하고 추가한 글을 실었다. 또 마지막 3부에는 90년대의 시점에서 스노우의 강연을 바라본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가 실려 있다."

 

 

 

 

<두 문화>를 나는 오래전에 박영문고판으로 읽었었는데, 줄기세포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시점과 맞물려 한번쯤 다시 들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적 사기>(민음사, 2000)니 '과학의 사기'니 하는 논란의 틈새에서 문제를 원론적으로 재고해보는 일인 듯싶어서이다. <악마의 사도>에서의 도킨스처럼 인문학의 '지적 사기'에 대한 비판에 통쾌해 하는 만큼, 한편으론 <기술, 의학, 윤리>(솔출판사)에서 한스 요나스가 의학/기술의 윤리에 대해 윤리적 반성을 요청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한 이해이고 교양인 듯싶다. 해서, 우리의 뇌는 '원론적으로' 다시 단련될 필요가 있다. 다윈을 읽지 않는 문학도를 나는 신뢰하지 않으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지 않는 과학도를 나는 (비록 좋아할 수는 있지만) 존경하지 않는다. 전공이 있지 않느냐고? '밥벌이의 지겨움'은 '교양'과 구별되어야 한다('교양'이란 밥먹을 때 서로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는 깜냥을 뜻한다. 먹는 건 도그나 카우도 한다).   

 

 

 


 

-하지만 최근 유독 같은 계열의 이론만 과도하게 소개되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이상원 포항공대 교수는 “진화생물학자들과 반대의 입장인 로우즈나 굴드, 르원틴 같은 이들을 함께 접해야만 균형적 입장을 취할 수 있다”라고 조언한다. 로우즈의 저서는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가,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 등이, 르원틴은  등이 번역돼 나왔다.(*로우즈, 굴드, 르원틴의 책들도 '우려'를 씻어줄 만큼은 출간됐다. 도킨스의 맞수인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만 하더라도 10여 권이 번역/출간돼 있다. 그러니 균형을 잡는 데 별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과학철학 쪽에선 교과서나 다름없는데 올해에야 출간된 것이 이언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이상원 옮김, 한울)다. 언어철학쪽 저서가 소개된 바는 있지만, 그의 과학철학서가 이제야 빛보게 된 데엔 여러 이유가 있다. 번역을 감당할 이가 적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과학철학 분야가 철학에서 다뤄야 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인문학과 자연학과의 거리감 때문에 전문번역가나 또는 한정된 과학철학자들이 소화해야만 한다”는 지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탓에 해킹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도 향후 과제로 남아 있다.(*해킹의 책에 대해서는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나도 소개한 바가 있다. 그의 다른 책들도 물론 언제든 환영이다.) 

 

 

 

 

-해킹 뿐 아니라, 과학철학 쪽에 파이어아벤트나 라카토스 등의 번역도 학문적 중요성에 비해 번역성과는 썩 좋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라카토스의 경우 지난 2002년 <수학적 발견의 논리>와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이 출간된 반면, 파이어아벤트는 1987년 <방법에의 도전>(Against Method)이 번역된 후 절판됐고 그 이래 역서가 단 한권도 나오고 있지 않는 현실이다. 

라카토스의 주저들은 번역된 듯한데, 더 번역되어야 하는 책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헝가리 출신의 과학철학자에 대해서는 지난 8월에 이상욱 교수가 한겨레 지면에 소개한 바 있으니 참조하면 되겠다. 흔히 '포퍼와 쿤 사이'로 입장이 규정되는 라카토스(라카토슈)가 '현대과학철학 논쟁'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이들의 포지션은 '파이어아벤트--쿤--라카토스--포퍼'로 정리하면 된다). 이상욱 교수에 따르면, "라카토슈는 파이어아벤트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포퍼주의자로 출발했지만 역시 파이어아벤트와 마찬가지로 점차 포퍼의 견해가 지닌 여러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지적으로 훨씬 자유분방했던 파이어아벤트는 포퍼와 쿤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길 원했지만, 라카토슈는 쿤을 따라 과학의 역사적인 실제 전개과정에 충실하면서도 포퍼를 따라 여전히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견해를 제시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포퍼식의 개인주의적 자유를 강조하면서 쿤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상대주의 과학관을 밀고나간 파이어아벤트와 죽을 때까지 좋은 맞수이자 친구로 지냈다."

"라카토슈는 파이어아벤트가 런던정경대학에 잠시 머물며 강의할 때 강의실 바로 앞에 위치한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와 파이어아벤트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져대곤 했고, 두 숙적의 눈부신 토론을 지켜보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할 수 있었던 당시 학생들은 너무나 즐거워했다고 한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어느 날 라카토슈가 자신은 과학적 방법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쓰고 파이어아벤트는 왜 쓸모없는지를 써서 함께 묶어 책을 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과학방법론을 위하여 그리고 반대하며(For and Against Scientific Method)>라는 책을 함께 내기로 했다. 그러나 라카토슈가 1974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파이어아벤트는 결국 자신의 부분만 홀로 출판하게 되고 이 책이 파이어아벤트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반 과학방법론>이다."

<방법에의 도전>(한겨레, 1987)은 그 <반과학방법론>의 우리말 번역본이다. 방법론적 '무정부주의자'로도 불리지만, 파이어아벤트(1924-1994)에게 보다 적합한 호칭은 누군가의 말대로 '다다이스트'이다. 말년에 쓴 자서전의 제목이 <킬링 타임>인 것도 그답다. 그의 책들이 좀더 소개되었으면 한다. 비록 학부때 사둔 <방법에의 도전>은 아직도 완독하지 않았지만 <킬링 타임>만큼은 단번에 읽어볼 용의가 있다(우리의 시간을 죽이는 데 혹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가장 유명한 과학철학자로 꼽히는 토머스 쿤 역시 이름값에 비례하는 저술들은 소개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올해 쿤에 대한 연구서 <토머스 쿤>(웨슬리 샤록 외 지음, 김해진 옮김, 사이언스북스)이 소개됐지만, 저서는 <과학혁명의 구조> 외엔 없다. 최소한 ‘The Essential Tension’, ‘The Road since Structure’ 정도는 번역돼야 한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이 외에도 과학 쪽에선 우주에 관한 물리학 저서들이나 아인슈타인과 관련한 책들, 생명윤리에 관한 책들이 활발히 출간됐다.(*그러고 보니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책들이 대부분 과학철학쪽이다. 이건 유사-자연과학 아닌가?! 더불어, '학계의 의견'은 어느 학계의 의견인지? 번역을 담당해야 할 당사자들 같은데...) 이어지는 건 사회과학 분야이다.

-사회과학 쪽 번역상황은 시의성과 관련해 팔리는 책 중심으로 과도하게 시장이 형성된다거나, 이데올로기적 지형 내에서 이뤄지는 번역들, 나아가 몇몇 출판사들이 저항담론 위주로 출판을 집중하고 있는 까닭에 그리 풍부하지 않은 출판상황에서 번역구도는 단순하게 그려지는 편이다. 특히 공급이 수요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 수요가 공급을 결정짓는 상황이라, “학문의 저변을 확대시키기 위한 필독서 수준의 번역보다는 일부 인기 사상가들의 번역이 과도하게 치중돼 번역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의 지적이다.

 

 

 

 

-그중 최근에 가장 많이 빛을 봤던 게 촘스키의 저서들이다. 올해엔 <지식인의 책무>(강주헌 옮김, 황소걸음 )와 <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송은경 옮김, 북폴리오) 등 두 권이 출간됐지만, 지난해 촘스키에 대한 번역서가 7권 나왔던 걸 보면 ‘촘스키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한 신문칼럼에서 “촘스키는 병적인 반미주의자로 미국의 진보진영도 멀리하고 있는 인물”이라며 한국 출판계의 기이함(?)을 지적한 바 있다.(*'두 권'이 나왔다는 건 이달초까지의 얘기이고, 12월에도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3권이 한꺼번에 나왔기 때문에, '촘스키의 시대'는 여전하다고 해야겠다. 비록 '미국의 진보진영'도 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전 네티즌들이 뽑은 '세계의 지성'에도 1위에 오른 걸 보면, 그의 '영향력'은 인정해줘야겠다. '촘스키의 시대'와 맞물려 있는 것이 국내에서는 '강준만의 시대'이다. 그는 올해도 6권 이상의 책을 펴냈다.

 

 

 

 

-물론 이 역시 동일선상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나온 발언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국내 출판계에서 저항담론의 출판이 우세한 건 사실이다. 그중 몇몇을 살펴보면, 네그리의 <혁명의 만회>(영광 옮김, 갈무리), 하워드 진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윤길순 옮김, 당대), 마이클 만의 <분별없는 제국>(이규성 옮김, 심산)이 출간됐다. 또 <새로운 제국의 도전>(레오 파닛치 지음, 진보저널읽기모임 옮김, 한울)이나 아룬다티 로이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정병선 옮김, 시울) 등도 마찬가지 위치에 놓여질 것이다. 

이 중 하워드 진의 책은 모노드라마이다. 드라마를 써도 그의 책은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것!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반미 지식인으로 꼽히는 하워드 진 관한 글로 올해 내가 흥미롭게 읽은 건 그의 이 아니라 대담이다. 지난 11월 문화일보 지면에 실린 것인데, 대담자는 'Global Talk'란을 연재하고 있는 이미숙 워싱턴 특파원이다(이 연재 때문에 나는 다른 특파원들이 얼마나 게으른가를 알 수 있었다. 동료들에게 원망을 듣지는 않을는지).

 

 

 

 

국내에 자서전 <다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포함해 여러 권의 책들이 번역/소개돼 있는 이 걸출한 좌파 지식인의 대담에서 흥미로운 대목 몇 가지. 먼저 83세인 그의 건강 비결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나는 기본적으로 기분좋게 살아왔다. 많이 웃고, 인생을 즐겼다.”고 답한다. 조금 더 설명을 들어보자.

 ―당신이 그간 써온 글과 책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무거운 것들 인데, 인생을 즐겁게 살았다니 믿기지 않는다.

“내가 인생을 진지하게 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은 원 래 진지한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즐겨야한다. 친구와 세계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많이 웃고, 젊은이들의 생각을 접하고 함께 생 활하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인생의 즐거움이다.”

―건강유지를 위해 특별히 선호하는 음식이나 운동이 있는가.

“토마토와 바나나 등 과일을 많이 먹고, 굴, 새우, 조개, 그리고 파스타를 아주 좋아한다. 테니스를 오랫동안 해왔는데, 요즘엔 산책으로 바꿨다.” 그는 음식얘기를 하다가 빼먹은 게 있다는 듯이 ‘참’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부인 로즐린과 60년 이상 함께 살아왔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은근히 부인자랑을 했다. 그는 22세가 되던 지난 19 44년 결혼했는데, 당시 로즐린은 21세였다. 두 사람은 남매를 낳 아 키우며 61년째 함께 살고있다.(*그러니까 오래 '운동'을 하려면 굴, 새우 등을 많이 먹고 배우자와 해로해야 한다는 것.)

―한국의 사회운동가들이나 지식인들은 지나치게 무겁게 삶을 접근하는데.

“물론 정의를 위한 싸움은 진지하게 해야하지만, 그런 와중에서 도 늘 인생을 즐겨야한다. 만약 삶의 즐거움을 도외시한채 사회 운동만 하려든다면 그런 인생은 너무 무미건조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경우 젊은이들을 새롭게 사회운동에 끌어들일 수 없다.”

 ―진지함과 즐거움을 어느정도로 조화시켜야하나?

“누구나 100% 진지하게 살수는 없다. 굳이 수량화하라면, 9대 1 정도로 진지함과 즐거움을 배합해야하지 않을까.”

조금 건너뛰어서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그에게 기자는 한국에서의 반미정서에 관해 질문했다.

―미국의 진보주의 역사가로서, 한국의 반미정서를 어떻게 보는 가.

“한국 젊은세대의 반미감정에 대해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그런 데 알아둬야할 것은 미국정부에 대한 비판과 미국사람들 일반에 대한 비판을 혼동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고있다. 반미정서를 가진 한국 젊은이들은 이런 건강한 미국인들과 연대해 함께 싸웠으면 좋겠 다.”

―한국에서는 당신의 책들이 반미주의 교과서로 읽히는데.

“한국 젊은이들에게 내 책이 반미주의 도구로 쓰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내 생각을 잘못 읽는 것이다. 나는 미국을 좀 더 살기좋은 나라로 바꾸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지 미국자체를 부 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반미주의와 친북적 사고의 친화력이 아주 강하다.

“한국의 반미정서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을 우호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북한은 사회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는 부패한 이념의 관료독재 국가일 뿐이다. 국민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사회주의국가인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충고는?

“세계 역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립해야 한 다. 이게 내가 평생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온 이유이고, 미 국의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해 책을 써온 이유다. 한국의 젊은이 들에게 정말 말하고 싶다. 반미시위를 하는 대신 북한 인권개선을 위해 싸우라고.”(*'북한의 인권개선'이란...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인 하워드 진도 한국식 기준에 따르면 '수구우파' 정도 되겠다. '북한인권' 문제만을 잣대로 한다면 말이다. 한국의 좌파는 세계 최강의 좌파인가?) 다시 번역 트렌드로 넘어간다.

 

 

 

 

-물론 보수주의 쪽 견해도 반짝 기운을 입었다. 잘 팔리는 사상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강한 국가의 조건>(안진환 옮김, 황금가지)뿐만 아니라 <더 라이트 네이션>(존 미클레스웨이트 외 지음, 박진 옮김, 물푸레) 등과 같이 네오콘의 붐은 지난해에 이어 좀 남아 있다.(*네오콘 관련 역서로 <미국의 힘>을 추가해놓는다.)

 

 

 


-그래도 이론쪽에서도 역시 틈을 두지 않고 출간되는 건 사회주의나 노동계급에 관한 번역이다. 올해 이들 관련 번역서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존 몰리뉴 지음, 최일붕 옮김, 책갈피), <소련의 역사와 계급이론>(스티븐 레스닉 외 지음, 신조영 옮김, 이후), <노동의 힘>(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 외 옮김, 그린비) 이 출간됐다.(*모처럼 소장하고 있는 책 두 권이 나와서 반갑다. <소련의 역사와 계급이론>에 대해선 나도 소개한 적이 있다.)

-보수건 진보건 사회과학계열은 시장논리와 이론적 입장이 상당한 작용을 하는 곳이다. 이에 대해 한 정치학과 교수는 “제3세계적 취향을 만족시켜준다는 차원에서 계속해서 저항담론 쪽만 번역이 되고 있는데, 일반 학생들은 이런 비주류적 사상들을 주류로 오해할 수 있다”라며 비판한다. 이기홍 강원대 교수도 “촘스키를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그가 계속 번역되는 이유는 우리시장에서 팔리기 때문이다”라면서, “한국의 시장은 기묘하게 짜여져 있다.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사회과학의 기반을 다지는 게 아닌 아주 기형적인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한다. 이충훈 뉴스쿨대 박사과정생의 의견도 귀담아들을만하다. 이 씨는 “사회과학에서 번역은 이슈 중심이어야 하지만, 이것은 시류 편승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면서 “예전에 국가의 검열을 받았던 것처럼 지금은 시장의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라고 꼬집는다.

-이씨는 ‘이슈중심의 번역’이란 “시장 상황에의 종속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문제에 대한 공적 여론에 구성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면서 이를테면 시장의 시선 때문에 번역되지 않는 예로서 젱하스의 ‘The Clash within Civilizations’나 식민지시대 과거청산에 실패했을 때 사회가 어떤 파국을 맞을 수 있는가를 르완다 학살을 통해 탁절하게 분석한 맘다니의 ‘When Victims become Killers’ 역시 그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에서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고 덧붙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근 방법론 쪽에서 로이 바스카의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 <비판적 자연주의와 사회과학>(이기홍 옮김, 한울) 등이 나왔고, 정치사상 쪽에서 조지 세이빈 등 옛날의 정치사상 개론서와는 좀 달리 씌어진 <정치사상의 이해 I>(폴 슈마커 외 지음, 양길현 옮김, 오름) 등이 나왔다.

<초월적 실재론과 과학>의 저자는 (역시나 저명한 실재론자인) '로이 바스카'가 아니라 '마가렛 아처'이다(기자의 착오인 듯). 정치사상 관련서로는 스티븐 엔릭 브론너의 <현대 정치와 사상>(원제는 Ideas in action)도 올해 나온 책이다. 정치사상과 정치철학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이상이 올 2005년의 번역 트렌드였다고 한다. 비교적 덜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을 일별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역시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은 없군!).

05. 12. 12.

 

 

 

 

P.S. 날짜를 적어놓고 보니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26년째 되는 날이군.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세월 같지도 않은 한 세월을 살아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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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2-12 14:03   좋아요 0 | URL
로쟈님, 이 글 제 서재에 퍼가도 될는지요/

로쟈 2005-12-12 18:29   좋아요 0 | URL
완결된 후에는 언제든지 무방합니다.^^

가을산 2005-12-12 23:28   좋아요 0 | URL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nemuko 2005-12-13 10:33   좋아요 0 | URL
저도 좀 퍼가겠습니다..

이네파벨 2005-12-13 13:29   좋아요 0 | URL
퍼갔습니다. 감사...감사...

겨우살이 2005-12-16 15:23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morris 2006-01-02 06:59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참 정리 잘 하시네요. 부럽네요(?) 새해 복많이~~

로쟈 2006-01-02 11:53   좋아요 0 | URL
morris님도 복많이 받으시길. 다른 분이 정리한 걸 저는 퍼왔을 뿐입니다(그냥 퍼오기 뭐해서 몇 자 덧붙이며)...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에 들어서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는 '학문분야별 번역트렌드 점검'이라는 기획특집기사를 냈다. 인문학과 자연/사회과학으로 나누어 두 차례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시의적절한 내용이어서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태본다. 먼저 옮기는 '인문학' 트렌드는 이은혜 기자의 12월 02일자 기사이다.   

 

 

 

 

-서양철학 쪽의 올 한해 번역물들을 훑어보면, 그간 해당전공자들이 전집, 선집번역을 비롯 한 사상가의 사상을 모두 번역해내겠다는 의지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이 많았다. ‘니체 전집’의 완간(2, 6, 9, 12, 19권은 올해 출간)이 대표적인 예이고, 하이데거의 번역(<이정표>, <사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베르그손 저서도 두권(<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번역됐고 헤겔(<정신현상학 1~2>, <청년헤겔의 신학론집>) 역시 시장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것과는 별도로 꾸준히 번역되는 중이며, 칸트(<윤리형이상학 정초> 외)도 마찬가지로 전공자들이 나서서 완성된 그림을 위해 내달리는 중이다.

이 원전 번역서들의 특징은 기사에서의 지적대로 '해당전공자'들의 노작이라는 점이다.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베르그손(베르그송) 등 사유의 거장들의 주저들이 계속 한국어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추세는 말할 것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의 경우, 노학자가 세 차례나 개정 번역서를 내는 동안에 젊은 전공자들이 한번도 손을 거들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면서 의아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 세대의 정신현상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그러하다(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최근 붐을 이루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저술 번역이다. 올해 드디어 그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조형준 옮김, 새물결) 1차분 2권이 번역되어 나온 것. 벤야민은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연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현대사회와 예술> 등 몇 권의 역서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중역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얼마 후 이러한 번역작업도 뚝 끊겼다. 이후 벤야민의 저서보다는 2차 연구서들이 소개되기에 바빴다. 즉 국내에선 미국을 통해 들어온 벤야민을 맛봐야 했으며, 모더니티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신비스럽고 난해한 이론가로 취급됐었다. 그러던 차에 올해 벤야민이 “나의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이다”라고 말한 13년간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나온 것. 더불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그린비)와 2차 연구서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도 출간됐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번역의 質이다.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자는 벤야민 전공자가 아니며, 영어전공자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영어중역의 혐의가 제기되며 향후 번역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 견해다. 어쨌든 논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가운데, 벤야민의 다른 주 저서들의 번역에 전공자들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현재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윤미애 중앙대 강사,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뜻을 모아 주어캄프판 10권을 출간계획하고 있는데, 늦어도 내년 1월 내에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 등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아포리즘에 관한 벤야민의 주저로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고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앞으로 1년에 3권씩 벤야민 번역서가 출간될 계획이다. 

벤야민에 대해서라면 한 해 동안 남못지 않게 주절거린 터여서 군말을 덧붙이기가 쑥쓰럽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경우 아직 나머지 절반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올해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번역이다. 중역본 논란은 전공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텐데(원전역이라고 해서 무조건 '질'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내년에 출간예정이라는 벤야민 전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번역의 문제점을 제기한 '전공자'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번역이 그만한 수준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영어를 직접 옮길 게 아니라 독역본을 중역했어야 했을까?).  


 

 

  

-고대철학 부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번역 역시 국내 학계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초에 플라톤전집을 번역하려고 모였던 정암학당 멤버들이 우선 단편선집부터 선보인 것. 워낙 번역이 쉽지 않은 분야임에도 김재홍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등 3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번역을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6년 학술진흥재단 번역과제로 김남두 서울대 교수가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 <법률(Nomoi)편>을,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맡게 됐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김주일 성균관대 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지카(Physica)>도 중요 저작인데 아직 번역서가 없으며, <정치학>의 재번역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라고 말한다. 롱 앤 새들리(Long & Sedley)의 것도 “교양적 수준’에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라는 의견들이 제기된다. 이들 역시 헬레니즘 철학을 위한 증언과 단편 모음들인데, 유럽에는 포켓판으로 널리 공급되고 있다는 것. 그 외 장 볼락(Jean Bollack)의 엠페도클레스 단편 모음 및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개괄서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 1~3)> 역시 “번역됐으면” 하는 저서로 꼽히기도 한다. 어쨌든 현재 플라톤 전집조차 완간되지 못한 서양고대철학계의 부끄러운 현실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플라톤의 <국가>만 십 수종 번역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기종목에만 번역이 편중된 탓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대호 교수의 <형이상학> 번역은 작년에 나온 발췌역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연초에 나온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이다. 어쨌거나 서양 고대철학 분야에서도 전공자들이 분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니 고무적이다. 현재 나와 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정치학>을 업그레드한 번역서의 등장은 나 또한 고대하고 있고. 더불어 문학 전공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또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만화책이 최근에 출간됐다. 루퍼트 우드핀의 <아리스토텔레스>(김영사). 이 역시 전공자의 번역이므로 믿을 만하겠다.  

 

 

 

 

-들뢰즈 서거 10주년을 맞아 올해 들뢰즈 관련 번역도 화려했다. 저서로는 <중첩>(허희정 옮김, 동문선), <비물질노동과 다중>(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이 번역됐고, <들뢰즈와 맑스주의>(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들뢰즈와 정치>(폴 패튼 지음, 백민정 옮김, 태학사), <들뢰즈 커넥션>(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현실문화연구), <싹트는 생명-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이정우 옮김, 산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그린비) 등 2차 연구서도 번역돼 들뢰즈 연구가 풍부해진 한해였다. 원래 ‘10주년’이란 타이틀이 그러하듯 때맞춰 준비해뒀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지만, 사실 국내 철학계는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 과도한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우려를 염두에 둔다면 과도한(?) 붐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간된 책들의 종수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디알로그>(동문선, 2005)가 리스트에서 누락됐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트렌드 중의 트렌드'이다. 내 기억에, 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마르크스주의 이후, 혹은 또다른 마르크스주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알튀세르-푸코-들뢰즈는 차례로 한국의 지식분자들 사이에 '냄비'가 되었다(니들이 들뢰즈를 알어?). 그 긍정적인 효과는 이들의 책들이 단기간에 대거 소개된 것이며 그 부정적인 결과는 상대적인 편식에 따른, 사회적 관심의 불공정한 분배이다('과유불급'은 동양의 오랜 격언이다).

<들뢰즈 커넥션>을 읽은 걸 계기로 해서 (아직 미뤄둔 페어퍼들이 많지만) 나도 들뢰즈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참견을 해왔다. 그리고 <중첩>을 빼고는 올해 나온 책들은 모두가 몇 장이라도 책장을 넘겨본 책들이다. <비물질노동과 다중>은 편역서로서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저작'은 아니다. <들뢰즈 맑스주의>와 <들뢰즈와 정치>는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며, <들뢰즈의 시간기계>는 물론 올해 2권이 마저 출간된 <시네마>와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싹트는 생명>은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책. 해서, 들뢰즈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해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쩌다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들 역시 번역의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올해에는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가 출간됐는데, 이로써 아렌트 저서가 8권이 번역출간 됐다. 곧이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치(학)의 약속> 등도 번역될 예정이라 하는데, 아렌트 주저가 거의 완간을 눈앞에 둘만큼 번역이 활발한 수 있었던 건 1995년 즈음 아렌트 재조명이 해외에서 이뤄지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들이 곧 아렌트 번역에 부지런히 뛰어들었던 것. 물론 서유경 경희대 교수 등은 “일본은 아렌트 학회도 있고 저술도 1970년대 이미 다 번역됐다”라면서 국내 상황이 매우 뒤쳐졌음을 질타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2차 연구서번역에는 전공자들도 손길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등 주요 연구서 한둘은 나왔지만, 그 외 중요한 연구가인 벤하비브, 번슈타인, 카노반 등의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돼 아렌트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시간을 좀더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작년에 <혁명론>과 <정신의 삶>(1권)이 출간된 데 이어서 아렌트 번역은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개인적으로 반갑다(나는 아렌트의 책들을 준-전공자 수준으로 갖고 있다). 아렌트에 대해서도 많이 주절거린 바 있으므로 새삼 소개하는 건 번잡스럽다. 그녀의 주저들이 곧 마저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다. 주요 연구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된 번슈타인은 '리처드 번스타인'을 말하며, <현대정치사회이론>(나남, 1988),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의 저작이 번역돼 있다(<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번역도 아주 훌륭한 책이다).

 

 

 

 

-철학 쪽에선 재탕삼탕 번역돼 출판시장을 불균형하게 만드는 단골메뉴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쇼펜하우어의 저서들도 그에 속할 테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록>은 올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역서(숲 刊)가 나옴으로써 “오랜만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왔다”는 평을 얻고 있다.(*천병희 교수는 올해만 해도 여러 권의 역서를 출간했다. 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한편, 알려진 명성에 비해 정작 저서들은 별로 소개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아쉬움을 사는 사상가들도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예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는 “비트겐슈타인 논문이나 해설서는 많은데 정작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또 프랑스 철학자 중 “자크 랑시에르나 필립 라부-라바르트의 책들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는 건 이상하다”라는 의견도 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댓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물론 많은 수는 아니지만('노트'들을 제외하면 그가 많은 책들을 썼나?), 소위 '주저'라는 책들은 소개돼 있는 형편이다. 연구서들은 더 많이 나와 있지만. 무엇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자크 랑시에르나 라쿠-라바르트('라부-라바르트'는 오타이다)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와 더불어 '데리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이끌고 있는 철학자들이며,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대개가 짧기 때문에 번역/소개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하다.

 

 

 

 

-신화학에선 드디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임봉길 옮김, 한길사) 1권이 번역돼 나왔다. 총 4권인데 내년에 2권이 출간될 예정. 그간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 <야생의 사고> 등이 널리 읽혀왔지만, 사실 이들은 그의 사유과정 중에 나온 저서들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집약된 가장 중요한 책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이다. <신화학>은 아직 일본에서도 번역되지 못했으며, <친족의 기본구조> 역시 너무 어려운 작업이라 국내에선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올해 레비-스트로스의 사유들이 담긴 <보다-듣자-읽다>(고봉만 외 옮김, 이매진)도 번역돼 나왔는데, 어쨌든 이러한 주변적 저서들을 맛보며 주요 저서 번역은 좀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모두 출간된다면 이 또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가 그의 주저이긴 하지만, 김형효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에 잘 정리돼 있으며, 일반 교양서로 읽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 제대로 레비스트로스를 읽자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부터 읽어야 한다. 이 또한 상당한 견적을 자랑하는 일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대담 자서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로 대강 카바하는 수밖에.  

  

-종교학에서는 엘리아데의 역작 <세계종교사상사 1~3>(이용주 외 옮김, 이학사)가 빛을 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종교학계의 거장 엘리아데의 사상은 국내에 거의 다 소개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사상의 ‘다양성’을 맛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간 국내에선 엘리아데가 우뚝 솟아있었고, 그 주위로 윌리엄 페이든과 니니안 스마트 정도의 저서만이 번역 소개됐을 따름이다. 그러던 차, 올해 처음으로 반갑게 접한 얼굴이 브루스 링컨이다. 그의 <거룩한 테러>(김윤성 옮김, 돌베개)가 출간됐는데, 엘리아데의 제자이면서 그와는 다른 이론적 입지를 구축한 저명한 종교학자임에도 그간 국내에선 번역된 바가 없었던 것. 김윤성 한신대 교수는 “종교학과 학부생들이나 대학원생들에겐 기본 커리큘럼에 속하며, 인문학적 관심사에서도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동안 번역상황이 너무 척박했다”라고 덧붙인다. 사실 그의 이론적 입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저로는 ‘Discourse and the Construction of Society’와 ‘Authority’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향후 종교학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출간은 물론 '사건'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개인적으로 유익했던 건 브루스 링컨에 대한 정보. 그가 엘리아데의 제자였다는 것. 확인해보니 링컨은 시카고대학 종교학과에서 학위를 받고 현재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종교학에 있어서 '시카고 마피아'의 대부였다. 링컨의 책들도 더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엘리아데와 마찬가지로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염세주의자 에밀 시오랑의 책들이 올해엔 소개되지 않은 게 유감이다(작년엔 <독설의 팡세>가 나왔었다. 원제는 <고난의 삼단논법> 혹은 <고뇌의 삼단논법>). 올해는 들뢰즈 사망 10주년이기도 하지만, 시오랑(1911-1995) 사망 10주년이기도 하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시오랑에 대해서 몇 마디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0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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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5-12-11 12:40   좋아요 0 | URL
와우! 나를 위한 페이지이군요. 플라톤의 법률은 조만간 나오겠군요. 한나 아렌트는 여기저기서 봤지만, 여기서 다 볼 수 있겠군요. 이제는 책만 읽으면 되겠어요.
잘 보았습니다. 내공이 상당하시군요^^

로쟈 2005-12-12 20:25   좋아요 0 | URL
아렌트를 "여기서 다 볼 수 있"으시겠다니요? 아렌트 콘텐츠라도 있는 건가요?..

승주나무 2005-12-19 15:09   좋아요 0 | URL
아렌트의 번역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여기 가지런히 모아놓은 것을 보고 한 말이었습니다. 대답이 늦었군요^^
 

얼마전에 출간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번역과 관련한 논란을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첫번째 글은 한국일보 8월 19일자 '책과세상'란에 서평으로 게재됐던 노명우씨(미디어문화연구소장ㆍ독일 베를린대 박사)의 글이고, 두번째 글은 그에 대한 반박으로  지난 8월 27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역자 조형준씨의 글이다. 번역과 관련한 '전문가' 논쟁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듯해서 시사적이다. 이 번역본에 대한 나의 소견은 책이 도서관에 들어온 이후에나 검토후에 제시해볼 계획이다.

***

발터 벤야민(1892~1940)의 삶은 불행했다. 살아 있는 동안 학문적으로 인정 받지 못했던 그는 나치의 위험을 피해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피신하던 중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현재 그 누구보다 행복한 ‘이후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연구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벤야민의 글은 여전히 ‘현재성’으로 가득 차 있다.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으며,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고, 마지막 삶을 그가 “19세기의 세계 수도”라 불렀던 파리에서 보냈다. 벤야민은 열정적으로 도시에 관해 글을 썼다. 그는 베를린에게 ‘일방통행로’와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라는 책을 헌정했고, 모스크바 여행을 통해 ‘모스크바 일기’를 남겼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벤야민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도시는 파리다. 그는 파리에 대한 관상학적 연구를 통해 자신이 평생 몰두했던 모든 주제를 완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벤야민의 이러한 계획이 이른바 ‘파사쥬(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대신 그는 파리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메모를 남겼다. 벤야민이 파사쥬 프로젝트에 관한 유고를 남겼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난 후, 사람들은 벤야민의 유고 출간을 고대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벤야민을 해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파리 연구 원고더미 속에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고가 1982년 벤야민 전집 제5권 ‘파사젠베르크’(한국어 번역 제목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출판되어 세상에 선보였을 때, 이 파리연구 모음집을 보고 사람들은 당황했다. 책이 기대와는 달리 체계를 갖춘 완성된 연구서가 아니라,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주제어에 따라 분류한 자료 모음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해석 없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벙어리’에 가깝다. 벤야민은 파리 연구를 위한 재료만을 남겼다. 독자들은 그 재료를 갖고 벤야민이 완성하지 못했던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미완성 저작은 독자들의 창조적인 해석에 따라 보물도 될 수 있고, 그저 두꺼운 자료 모음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한국의 독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 번역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번역 사건’은 마냥 즐거운 소식만은 아니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점 때문이다. 번역판은 먼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정확성 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국어 번역자는 일러두기에서 독일어판과 더불어 프랑스어판, 영어판, 일본판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어판을 참조한 영향 때문인지, 번역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식 한자가 등장한다. 독일어판 묶음 A만을 대조했을 뿐인데, 오역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묶음 12, 4에서는 벤야민의 중요한 방법론인 관상학(Physiognomie)이란 단어가 아예 빠져있다.

한국어 번역판은 텍스트 편집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저작은 벤야민이 직접 쓴 논평과 연구를 위해 모아둔 직접 쓰지 않은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번역판은 상이한 성격을 지닌 이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 벤야민의 유고집이 일반 독자를 위한 파리 연구서라기 보다 전문 연구자를 위한 자료 모음이기에 세심한 편집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어 번역판에는 ‘용어 해제’라는 납득하기 힘든 제목으로 벤야민이 사용한 중요한 개념의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대조표를 실어 놓았다. 이는 과잉 친절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용어해제’를 통해 벤야민의 고유한 언어에 대한 한국어 표준 번역을 제시하고 싶었다면, 번역자는 번역어를 선정할 때 한국에서 벤야민을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해야 했다.(끝)

*** 

이 글을 쓸까말까 많이 망설였다. 어떤 논쟁을 위한 글도, 그렇다고 어떤 발전적인 제안을 위한 글도 아닌 해명성의 글을 쓴다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졌다. 더 중요하게는 나의 졸역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아야 하며 ‘20세기 최대의 서사시’라는 평대로 강호의 온갖 고수들의 날카로운 혜안을 기다려 계속 수정하고 가다듬어나가야 하리라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 도박, 백화점, 철도, 매춘까지 온갖 분야를 다루는 이 책을 한 명의 역자가 감당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역부족일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저자가 13년 동안이나 매달리는 바람에 개념과 용어상의 통일성, 서지상의 정확성 등은 또 얼마나 문제적이란 말인가. 역자가 아무런 주석도 없는 독일어판 원서와 함께 프랑스어판과 영어판, 잘 읽지도 못하는 일어판을 참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서평자는 먼저 번역판의 텍스트 편집이 문제라며 “상이한 성격을 가진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고 지적한다. 과연 그러할까? 독일어본에서는 발터 벤야민이 쓴 글과 자료로 발췌해둔 인용문을 글자 크기로 구분한 반면, 불어본과 영어본에서는 서체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후자의 방법을 따라 ‘활자 크기는 동일하되 서체와 농도’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벤야민 본인의 글은 문장을 들여 쓰기로 시작하는 동시에 가로 길이를 길게 한 반면, 인용 부호로 시작되는 인용문들은 가로 길이를 짧게 처리했다. 따라서 적어도 다섯 가지 방식으로 양자를 구분해놓았는데, 다른 외국어판보다 훨씬 더 진일보한 방식을 택한 셈이다.

두 번째로 서평자는 ‘Physiognomie’를 ‘골상학(骨相學)’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며 이를 단적인 오역의 예로 들었다. 이것을 보면서 한 영문학 전공자가 영남대 법대의 박홍규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동양학’이라 번역하지 않았다며 비판한 기억이 떠올랐다. 문제의 대목은 이렇다. “아케이드의 ‘모습’은 보들레르의 ‘너그러운 노름꾼’의 시작 문장에 나와 있다.” 이어지는 보들레르의 글은 거꾸로 이 대목에서 ‘Physiognomie’를 ‘모습’이 아니라 ‘골상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오역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지 않는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 책에 나오는 똑같은 ‘부르주아’라는 용어도 만약 중세적 맥락이라면 ‘성 안 사람’이, 그리고 다른 맥락에서라면 ‘시민’이나 ‘부르주아’가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또 ‘과잉 친절’로 지적한 독일어-프랑스어 용어 해제는 실제로는 역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프랑스어판에서 원용한 것이다. 또 역자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것을 감히 ‘한국어의 표준 번역’으로 제시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다만 산책자, 만보객, 산보자 등 아직도 ‘한국어의 표준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해 ‘나는 이렇게 번역하니 별다른 오해가 없길 바란다’는 자진 신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평자의 지적대로 전문가들의 선행 연구를 참조해야겠지만 오히려 전문가들의 의견 자체가 갈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제도권 밖에 있는 역자로서는 제도권 안의 따뜻한 시선은 언감생심이지만 이런 식의 거친 ‘전문가’의 조언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끝)

*참고로, 조형준씨의 글 가운데 'Physiognomie'는 '골상학'이 아니라 '관상학'이다. 노명우씨가 문제삼은 역어가 그렇다. 노명우씨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현대성"(2004)이란 논문에서는 '인상학'이라고 옮겼다가 자신이 번역한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에서는 '관상학'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관상학'이란 역어가 적절하다고 본다(이전에 지적한 대로 질로크의 책은 좀 무성의한 번역서인데, 이에 대한 지적은 바쁜 일들이 마무리되면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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