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에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한겨레 '고전 오디세이'가 어제는 '기독교 성인 열전'을 다루었다. 물론 오늘이 성탄절이란 걸 염두에 둔 글로 '예수를 둘러싼 서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엿보게 한다.

 

 

한겨레(11. 12. 24) 예수 둘러싼 거대한 서사, 부처설화까지 빌려 짜깁기

 

도마(Thomas)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그를 보았다고 했지만, 그 무슨 헛구역질 같은 괴담이란 말인가. 도마는 직접 봐야 믿겠다고 했다. 아, 그래? 예수는 그에게 나타났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하여 믿지 않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 되어라.” 도마는 대답했다. “나의 주, 나의 신이시여!”(<요한복음>) 그 후 도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정경(正經)으로 공인된 성서 안에선 그의 행적을 찾을 수가 없다.

성서는 담지 않은 도마의 인도행
반면 3세기께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마행전>에는 도마가 인도로 갔다고 한다. 목수였던 도마는 인도에 가서 군다포로스 왕의 궁전을 짓는 일을 맡았는데,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건축비용을 모두 다 썼다. 왕이 궁전을 다 지었느냐고 묻자, 도마는 대답했다. ‘다 지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삶을 떠난 후에만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폐하의 궁전을 하늘나라에 지었으니까요.’(이 문서는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다. 도마가 예수의 쌍둥이 형제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한편 1945년에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에는 <도마복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사뭇 다르다. 인간 세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 안에 빛으로 깃든 신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그 깨달음만이 옛사람에서 벗어나 새사람으로 거듭나 죽음을 이겨내고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는 메시지다. 왠지 반야(般若)를 통한 참나 찾기, 성불(成佛)과 해탈의 메시지와 엇비슷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도 역시 정경 속에 포함되지 못한 채 잊혀 있었다.

11세기의 기독교 성인열전 <바를람과 요아사프>도 도마가 인도로 갔다고 한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 인도를 택했다. 인도에 도착한 도마는 각종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풍속을 척결하고 인도를 기독교 복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아베나르 왕은 기독교를 탄압하고 우상숭배의 종교 전통을 다시 세웠다. 아베나르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요아사프다. 아베나르는 왕자가 기독교에 물들까봐 왕궁 안에만 머물게 하고 부족함 없이 살도록 했다. 하지만 요아사프 왕자는 풍요로움 속에서도 영혼의 허기를 느꼈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담장 너머가 궁금했다. 그런 왕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아들아, 나는 네가 마음에 역겨움을 일으키며 기쁨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기를 원한다. 난 언제나 네가 안락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단다.” 왕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바마마, 이곳에서는 제가 기쁘게 살 수 없습니다. 짓눌려 살아가는 제겐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쓰디씁니다. 성문 밖에 있는 것들이 보고 싶습니다. 제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바깥으로 나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왕은 안타까웠지만 왕자의 외유를 허락했다. 마침내 요아사프는 성문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마치 인도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성문을 나선 첫날, 요아사프는 팔다리가 잘린 나병환자와 장님을 보았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만 보고 자란 왕자의 눈에 일그러진 그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수행원은 말했다. “저것은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입니다. 몸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망가지고 몹쓸 액이 고이면 저런 고통을 겪게 되지요.” 며칠 후 그는 다시 성문을 나섰고, 남루한 노인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수행원은 말했다. “이 사람은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낸 사람입니다. 그의 사지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기에 비참한 고통에 이른 것입니다.” 왕자는 물었다. “그러면 그의 끝은 무엇인가?” 수행원은 다시 대답했다. “죽음입니다. 팔십에서 백세가 되면 사람들은 저런 노령에 이르게 되며, 이어 죽게 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죽음이란 사람들이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 죽음은 사람들을 찾아옵니다. 그 누구도 그 매정한 방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다가 이내 병들고 늙어 마침내 죽어야만 하는 것. 낙엽처럼 하릴없이 흩날리는 존재. 요아사프 왕자는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삶의 진실에 홀연히 마주섰다. “나도 언젠가는 죽음이 휘어잡겠지? 내가 죽으면 산산이 흩어져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않겠지? 아니라면 또 다른 삶과 또 다른 세계가 있는가?” 요아사프 왕자는 구원을 향한 깊고 독한 허기를 느꼈다. 마치 샤카 족의 왕자로 태어나 곱게 자라다가 사문유관(四門遊觀), 즉 네 개의 성문 바깥으로 나가 생로병사라는 인생의 참모습을 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미칠 것만 같은 구원의 갈증을 풀기 위해 출가하여 마침내 성자(muni), 즉 깨닫는 자 붓다(Buddha)가 된 샤카무니처럼. 이제 인도의 왕자 요아사프도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결단의 순간에 마주섰다. 그러나 그는 집을 나가는 대신, 집으로 찾아온 기독교 수도사 바를람을 만났다. 그에게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듣고 뜨거워진 요아사프는 왕자의 지위와 황제의 논리를 버리고 바깥으로 나가 구도자로서 나머지 삶을 살았다. 이렇게 인도의 ‘부처설화’는 기독교적인 교리를 입고 기독교 성인열전 <바를람과 요아사프>로 거듭났다. 인도에서 서쪽으로 간 부처가 기독교의 성인 요아사프가 된 것이다. 이름만 봐도 그 흔적이 보인다. 산스크리트어인 붓다(Buddha)는 다른 말로 보디삿뜨바(Bodhisattva, 보살)인데, 이것이 그리스어에 와서 요아사프로 바뀐 것이다.

한편 이 성인열전의 27장에 삽입된 기독교 변증론은 문헌학적으로 흥미롭다. 그것은 애초 서기 2세기께에 아테네에서 활동하던 아리스티데스의 글이었다. 스토아 철학자였던 그는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다가 결국 기독교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자 그 앞에 섰다. “고명하시며 관대하신 카이사르 티투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황제 폐하께 아테네의 철학자 마르키아누스 아리스티데스가 올립니다. 우리는 복음의 거룩한 기록에서 신의 아들이 현존하심과 그 영광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늘로부터 순결한 처녀를 통해 인간의 씨앗으로 더럽혀짐 없이 육체를 취하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임을 변론하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 두루 퍼져 있는 온갖 다신론적인 신화가 잡스런 거짓말이라고 외쳤다. 최초의 ‘기독교 변론’으로 평가되는 이 글이 부처설화를 기독교 성인열전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짜깁기처럼 끼어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이것뿐이랴? 역사상 수많은 이야기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만들어졌고 전해지며 확대 재생산된다, 끊임없이.

도마복음, 해탈과 유사한 메시지
지금 여기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온 세계가 들떠 있다. 오늘 밤,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 왜 사람들은 예수의 탄생에 열광할까? 예수의 탄생이란 예수를 둘러싼 거대한 서사의 탄생이다. 엄청난 영향력으로 역사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 온 서사의 출발이다. 어떤 이는 이 서사를 진실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살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 어떤 이는 친구나 연인, 가족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위한 이벤트 아이템으로 활용한다. 어떤 이는 이 서사를 설파하며 막대한 돈과 권력을 쥐고 대중을 교란하며, 어떤 이는 자신의 추악한 삶을 덮는 포장지로 삼아 두르고, 서사 바깥의 사람들을 악마로 정죄하며 잔혹하게 죽이는 섬뜩한 칼로 부린다. 예수를 둘러싼 거대한 서사의 탄생이 ‘서사적 존재’(homo narrans)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를 묻지 않고는 이 밤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다.(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11. 12. 25.

 

 

P.S. 불교와 기독교의 가교로서 <도마복음>에 대해서는 오강남 교수의 <종교, 심층을 보다>(현암사, 2011), <또 다른 예수>(예담, 2009)를 참고할 수 있다. 라즈니쉬의 강의록과 김용옥의 한글역주본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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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에 관한 서평을 올린 김에 며칠 전에 읽은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 최근까지 대구지검 수석검사로 재직하다가 사표를 낸 백혜련 변호사가 인터뷰의 주인공이다. 검찰 내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국일보(11. 12. 05) [서화숙의 만남] "정치 검찰 부끄럽다" 사직서 낸 백혜련 前 검사

 

부장검사를 불과 2년 앞둔 수석검사가 사표를 냈다.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 부끄럽다'고 했다. 백혜련(44•사법연수원 29기) 전 대구지검 수석검사. 그가 지난 달 21일 사직서를 내면서 검찰 사내통신망 이프로스에 올린 글은 28일 언론에 소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비록 사퇴를 하면서 써낸 글이기는 하지만 상명하복의 분위기가 철저한 검찰 내부에서 자성의 소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사표가 수리된 다음날인 2일에야 수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한 백혜련 전 검사는 화장기가 없는 맑은 얼굴이었다. 경기 의왕시 32평 아파트에서 시민운동가인 남편 박완기(47•경실련 경기도협의회 사무처장)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둔 그는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4학년인 자녀에게 사교육은 시켜본 적이 없고 헌옷도 얻어 입히는, 언행일치의 지식인이었다.

_이제 백혜련 변호사인가요?

"1일자로 사표가 처리되었는데 변호사협회에는 월요일(5일) 등록할 예정이라 지금은 자연인, 대한민국 국민 백혜련입니다.(웃음)"

_왜 사표를 냈습니까?

"1년간 미국 연수 갔다가 2009년에 서울지검으로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더군요. 정권의 눈치보기랄까, 줄서기 문화, 이런 게 다시 부활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조금 있다가 피디수첩 수사가 시작됐습니다. 검찰역사상 피디수첩은 가장 오욕적인 수사라고 생각해요. 기소가 됐고 무죄가 나서가 아니라 원수사팀이 기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수사팀을 교체해서 했잖아요. 수사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수사는 방향 자체가 이미 결정됐다고 보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재심사건을 맡으면서 힘들었습니다. 재심사건이란 과거에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사건이나 경찰의 가혹행위로 인한 자백사건, 불법체포가 인정되는 사건 같은 것으로 다시 재판을 청구하는 것입니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재심사건에 대해 대검에서 '탄력적으로 대응하라'는 지침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무죄인 사건은 무죄구형도 하라고 했고 실제로 무죄구형을 내린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재심사건에 대해서 법원은 다 무죄를 주고 있어요. 판결을 할 때 돌아가신 분들도 많거든요. 그러면 재판장들이 사죄의 말까지 해요. 그런데 그게 무죄가 났다고 항소 상고까지 하라니까 양심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검찰이 일관되게 처음부터 그랬으면 실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정부가 바뀌었다고 완전히 달라지니까. 가장 최근에는 한미FTA에 대한 SNS를 단속하려는 것을 보면서 검찰이 시대상황에 너무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_검찰은 정말 왜 그런 겁니까?

"기본적으로 검찰이 보수적인 집단이긴 합니다. 원래 법조인들 자체가 보수적인 집단이에요. 그러나 이렇게까지 된 데는 정권과 밀착한 분들이 윗분이 되고 그 윗분들의 사고가 전체 검찰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본적으로 검찰은 상명하복의 조직이라서 검찰총장의 사고가 많이 작용하지요. 취임사가 종북좌익세력 척결이었잖아요. 지휘부가 바뀌면 검찰의 흐름 자체가 바뀝니다. 일선 검사들은 수사하다보면 사건에 매몰이 되거든요. 그래서 전체의 청사진을 그리지 못하고 지도부의 방향이나 지침이 있으면 그 방향으로 매몰되는 경향이 있어요."

_그럴수록 검찰에 남아있으면서 개혁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말을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한숨) 검찰이 자체적으로 이런 것을 개혁할 동력이 있다 생각했으면 남아있었겠지요. 스스로 변화할 동력 자체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니까 남아있기 힘들더군요. 남편이 시민운동가이니까 두드러지게 보는 분들도 있지만 실상 지난 10년간 검사로서 검찰 본연의 업무에 누구보다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벌어지는 변화는 저 같은 사람이 봐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_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건가요?

"이걸 바꿔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나오질 않습니다. 평검사들도 힘이 빠져 있달까.

_안에서 이의제기를 전혀 안합니까?

"사적인 모임에서는 많이 하는데 집단화한 상태로 표출하거나 상부에 전달하기는 굉장히 힘든 상태인 것 같아요. 법원보다도 상명하복적인 조직이고 관료주의적인 분위기가 심하다보니까. 게다가 부장검사가 되면 1년마다 자리를 옮기니까 자리를 걸지 않고서는 직언을 하기 힘들지요."

_개인적으로는 바꿔야 한다는 제안을 해봤습니까?

"재심사건에 대해서 대검의 공안담당 연구관들한테 '이미 시대적으로 사회적 판단이나 합의가 내려진 사건인데 굳이 상고를 해야 하냐'고 메신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대법원도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한다'는 답변이었지만 궁색한 변명이지요."

_시민들 반응이 뜨겁지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제 글이 이렇게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거든요. 그냥 검사로서 마무리하면서 할말은 하고 간다는 느낌으로 썼고 검찰 내에 문제제기가 되기만 바랐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고 일선에서는 저처럼 생각하는 검사들도 많거든요. 되려 바깥 분들의 반응을 보면서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이렇게 크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검사였던 사람으로서 죄송스럽더라구요. 재개발 비리에 연루되었다가 저한테 조사를 받은 분은 '과거에 검사님의 훈계를 듣고 이제는 재개발 현장에서 주민을 돕는 일을 한다'는 응원메일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_변호사로부터 벤츠와 샤넬백을 받고 동료검사에게 청탁을 한 이소연 전 검사 사건이 터지면서 더 대조적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검찰 숫자가 늘어나면서 자질이 떨어지는 검사도 늘어나는 측면이 있고 검찰에서 검사들의 비리를 덮어주려는 경향이 있지만 검찰 전체가 그렇게 부패한 조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국철 SLS회장이 돈 줬다는 사람들은 검사장급인데 일부의 자질 문제라고 할 수 있나요?

"그건 수사가 진행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말을 일방적으로 믿고 이야기할 상황이 아닙니다. 검찰이라는 조직 자체가 워낙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않고 있긴 하지만 검찰 조직 자체가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_엄청난 검찰 신뢰론자네요.

"과거에는 검찰 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관과 기업 사이에 부패고리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최근에는 몇몇 특수한 검사를 빼고는 과거와 단절됐다고 봅니다. 수사권 조정에서도 검찰이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으니까 경찰에도 수사권을 나눠주자는 것으로 가지만 검찰보다는 경찰이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고 상명하복이 강한 구조거든요. 만약 정권이 개입한다면 검찰이 수사권을 가졌을 때보다 경찰이 수사권을 가졌을 때 더 큰 폐해가 있을 수 있어요."

_문제는 정치검찰이다?

"그에 비하면 부패는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검에서는 그런 위기를 못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트위터나 인터넷에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범죄시 하려고 하겠지요."

 

  

_정치검찰화를 막는 방법이 있을까요?

"문재인씨 책을 보니까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정권의 의지다' 고 했던데 공감합니다. 참여정부와 이명박정부로 손바뀜을 경험해보니까 그걸 확실히 느끼겠어요. 참여정부 시절에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지켜지고 있는지 저도 확실히 몰랐어요. 이건 너무 당연한 거,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고 보니까 참여정부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정말 많이 지켜줬다는 걸 느끼게 되더라고요."

_지금 와서는 구체적인 수사지시가 많은가요?

"구체적인 지침이나 지시가 아니라도 상층부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수단은 많아요. 계속 반려랄지, 보완수사 이런 걸 통해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검찰의 기본을 흔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_왜 검사가 되었습니까?

"대학시절(고려대 사회학과)을 나름대로 치열하게 보냈는데 그때 생각했던 사회정의를 검사로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을 92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결혼을 했는데 그때 사회주의권 붕괴로 고민하던 운동권 출신들이 가는 진로가 대개 세 가지였어요. 대학원 언론계 고시였는데 연줄 없이도 통하는 것은 고시 밖에 없다고 해서 결혼과 동시에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_판사가 될 수 있었다면 판사가 되었겠어요?

"아니요. 시보 생활을 해보니까 판사는 정적이고 검사는 동적이라 제 성격에 맞더군요. 그리고 당시 지도검사님이 굉장히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시고 훌륭하셨어요. 그 분이요? 실은 지금 이경재 대구지검장님이 당시 지도검사였습니다. 지금도 존경합니다."

_세무공무원의 비리를 적발한 것이 유명하더군요.

"서울중앙지검에 있을 때 세무공무원이 5,000만원 뇌물 받은 것을 인지구속(투서나 고발이 아니라 검사가 사건 자체를 미리 파악해서 수사한 사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형사부에서 뇌물사건 같은 것은 인지구속이 힘들어요. 원래는 사장의 세금포탈을 미끼로 운전사가 사장을 협박한 공갈사건인데 수사하다보니 공무원 비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파헤치게 되었지요."

_삼성물산 재개발 비리사건은 열심히 했지만 검사로서는 무죄가 난 사건으로 유명하던데요.

"이 사건도 철거업자가 재개발 아파트 조합장한테 돈을 줬다는 투서 한 장에서 단서를 잡아서 올라가다가 대기업으로까지 확대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컴퓨터 전자수사가 막 시작될 단계였는데 일단 삼성물산에서 증거물인 컴퓨터를 가져온 것까지는 잘했는데, 거기서 분명 증거자료도 나왔는데 그 자료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두 번에 걸쳐서 하면서 증거자료로서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됐습니다. 당시 송두율 사건에서 안기부로부터 검찰이 자료를 받으면서 2차 자료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게 하는 판례가 생겼는데 이에 대한 지침을 명확히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삼성물산에서 수사협조를 하지 않아 전산실을 찾느라 온 층을 다 돌아다니고 전산실 직원조차 모두 조퇴를 해서 정말 어렵사리 서버를 찾았습니다. 다행히 다른 곳에서 가져온 컴퓨터에서 자료가 나와서 승소를 확신했는데 안타깝게 되었지요. 그래도 그 사건을 계기로 재개발 비리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생각합니다."

_앞서 시민 메일도 그렇고 재개발 비리를 많이 수사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집이 갖는 의미가 큽니다. 그런데 재개발 비리를 통해서 조합장과 정비업자한테 빠져가는 돈이 모두 집값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이걸 덮어두면 정상적으로 일해서는 집을 가지기 어렵거든요."

_앞으로는 어떻게 활동하실 건가요?

"사직서 내고 변호사 하면서 제가 기여할 수 있는 사회활동을 하겠다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국민적인 성원과 관심을 보면서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검찰개혁을 위해서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좀더 고민해봐야 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

_정치쪽으로 간다, 이미 민주당 공천 받고 움직인 거라는 말도 있던데요.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정치에 몸을 담는다면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배신하고 왜곡하는 일이겠지요." (서화숙 선임기자)

 

11.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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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에서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코너를 옮겨놓는다. '서평은 정치다'란 화두로 서평에 대한 생각과 서평가로서의 소회를 적고 있는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도 언급되고 있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에 대한 '꽤나 긴 서평'으로 보고 있어서 이채롭다. 나는 소박하게 '읽기'를 의도했지만, 서평적인 면도 들어 있는 모양이다. "서평은 정치다"란 문구는 칼럼에 나오지만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에서 인용한 것이다.   

   

세계일보(11. 12. 05)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3> 서평은 정치다

매주에 두세 개씩의 서평(reviews) 쓰는 일을 여러 해째 이어오고 있다. 이런저런 연줄로 일간지와 주간지, 월간지와 계간지 등에 서평을 기고하고, 두 군데 공중파 방송에 정기적으로 나가서 책 이야기를 하고, 서평집도 네 권이나 내놓은 바 있다. 내 지적 인식 욕망과 관심의 맥락에 따라 책을 읽고 그중에서 매체에 맞는 책을 골라 서평을 쓴다. 서평 쓰기는 메마른 작업이다. 공력은 많이 들지만 청고한 인격을 만드는 데도, 지식의 성채를 짓는 데도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건 사랑 없는 섹스는 아닐지언정 출산이 배제된 섹스와 닮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평은 정치다”라는 한 문장을, 월터 카우프만의 책을 읽다가 발견했다. 서평 쓰기에 투입되는 내 욕망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과 회의를 품어온 터라 이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친밀한 관계의 맥락을 만드는 게 정치의 한 기능이라면, “서평은 정치다”라는 말은 맞다. 읽어보니, 그 정치라는 게 지극히 “사소한 정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평가의 권위, 영향력, 글의 재미와 파급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서평은 현대 지식인들의 문화생활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쯤으로 취급당한다. 기껏해야 서평은 주식 사이사이에 먹는 간식이고, 본격적인 음악이기보다는 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서평은 어떤 책이 그 책값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주고, 그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평가의 일이란 게 번역가나 편집자가 하는 일과 겹쳐지는데, 그것은 “저자와 독서 사이에서 움직이는 중개인”이란 점에서 그렇다. 매체에 실리는 서평은 뉴스거리가 될 만한 책, 어떤 학파와 연관이 되어 있는 책이 우선적으로 선택되고, 그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적·문화적 가치나 함량보다는 매체나 서평가와의 개인적 인맥이 선택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어떤 책이 서평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는 저자나 독자보다도 편집자와 서평가의 결정이 우선한다는 뜻이다.

주로 기자, 교수, 학자, 비평가, 젊은 작가들이 서평을 쓴다. 서평은 “저널리즘의 한 형태”이므로 서평 쓰기는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순발력 있는 글쓰기를 잘 하는 기자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교수나 학자들 역시 자기 분야에 대해 높은 수준의 지식과 경륜을 쌓은 사람들이니까 해당 분야의 책에 대한 서평가로서 적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젊은 서평가”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씌어진 적이 없는 위대한 책의 지고함에 기대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다. 그들은 서평을 제 존재를 번쩍이면서, 제가 얼마나 똑똑하고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지를 알리는 기회로 삼는다. 문학 계간지에 서평을 쓰는 대다수의 “젊은 서평가”들의 글은 대체로 최신 이론들을 문장의 난삽함으로 버무려 내놓음으로써 매우 현학적이다. 대개의 서평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문화적 신뢰성에 비해 그 내용이 부실하다. 그럼에도 그 부실함이 들춰지지 않거나 추문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사람이 서평만 읽고 정작 그 책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카우프먼은 그런 현실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서평에서 알게 된 책의 대부분을 읽을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서평을 읽기 전에 먼저 책을 읽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 서평들이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로 가득 차 있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호의적인 서평이나 적대적인 서평뿐만 아니라 학술잡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

간혹 서평 대상이 되었던 책의 저자가 서평가의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에 분노하면서 반론을 내놓는 경우가 있다. 가장 극적인 것은 불문학자 곽광수가 자신의 책에 대한 서평이 나온 지 십년이 지난 뒤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이라는 번역서를 내놓으며 그 책의 한 각주 형식을 빌려 김현과 박이문의 서평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펼친 경우다. 그 각주의 분량이 수십 쪽에 이를 만큼 작정하고 쓴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많은 서평들이 진지한 학문적 정밀성을 갖고 탄생하지는 않는다.

“서평을 많이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적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들 대부분이 취하는 공통 전략은 자신의 견해를 진척시킬 수 있는 기회로 서평을 이용하면서, 그 책의 주제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쓰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자신도 그다지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책 한두 권에 대한 약간의 언급을 끼워 넣는 것이다.”(카우프만, 앞의 책)

제 정신을 가진 학자라면 제 책에 대한 서평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서평가들이 제 서평에 진정성, 즉 자기 패를 다 거는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제 “오도(悟道)의 경지(境地)”를 눈꼽만큼이라도 드러내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이런 사정을 안다면, 곽광수 교수가 제 책의 서평에 대해 저토록 진지하고 정밀한 반론을 펼쳤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칭찬의 관용구를 남발하는 서평가보다는 까칠한 태도로 저자를 신랄하게 꼬집고 괴롭히는 서평가의 글을 읽을 때, 훨씬 더 즐겁다. 그런 맥락에서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은 서평의 가장 훌륭한 범례로 꼽을 만한 서평집이다. 저자를 압도하는 박람강기와 유연한 사유체계, 날카로운 통찰력, 신랄함, 번득이는 유머, 그리고 그것을 좋은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서평가의 서평집이라는 뜻이다.

지제크와 라캉에 대해 쓸 때, 탈식민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쓸 때, 테리 이글턴은 모호하지 않고 대책 없이 명료하다. 그가 데이비드 하비의 책에 관한 서평을 쓰면서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 시간은 풍요로운 개념이었고 공간은 황폐한 개념이었다. (중략) 오늘날 공간은 시간을 그저 따라잡는 것을 넘어 오히려 앞장서서 끌어당기고 있다. 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너무 독특해서 이론화할 수 없는, 장소라는 형태를 띤 공간이, 개념의 트럼프 패에서 조커가 되어 추상을 거부하고 모든 거대 담론을 붕괴시킨다고 본다. 이제는 시간이 지루하게 균질적인 것, 매번 똑같은 지겨운 것이 되고, 속이 찬 자궁이라는 공간성에 대조되는, 남근적인 탄도가 된다. 그리고 공간이 시간에 그동안의 복수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 자연은 인간 역사에 자연의 권리를 행사해 왔는데, 비관적 생태학자들은 그것을 이제 세상이라는 육신에서 종양이 자라는 이미지로 본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라고 쓸 때도 그 명료함은 통찰력이라는 아우라를 두르고 빛을 뿌린다.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쓴 책에 관해 서평을 쓸 때 “데이비드 베컴이 과연 이 책을 직접 썼을지 궁금하다고? 차라리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직접 지었을지를 궁금해하시라.”(테리 이글턴, 앞의책)고 넉살을 떤다. 그는 독자에게 재미와 지식, 쾌락과 통찰력을 함께 쥐어준다. 우리나라에서 테리 이글턴 같은 서평가를 만날 가능성은 한밤중에 38번 국도를 운전하며 가다가 귀신을 만날 가능성만큼이나 낮다.

우리 서평가들은 점잖거나 무던하다. 그들에게 책과 저자의 허접함과 뻔뻔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요청하더라도 그들이 진실을 말해줄 가능성은 없다. 서평가의 내면에는 통찰가와 소크라테스적 인물과 사나운 본성을 가진 개가 공존한다. 하는 바를 보면 그들은 때로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때로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으르렁대고 물어뜯는 강퍅한 본성의 존재들이다. 



나는 서평집들을 즐겨 읽는다. 예전에는 김현, 김훈, 고종석이 쓴 서평들을 읽으며 지적 충만감과 기쁨을 느꼈던 적이 여러 번이다. 내 서평도 그렇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욕망일 뿐 실현이 불가능한 꿈이다. 최근에도 건축가 서현의 ‘또 한 권의 벽돌’, 정신분석의 김종주의 ‘이청준과 라깡’,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이현우의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헌책방 운영자인 윤성근의 ‘심야책방’ 등등을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이현우가 내놓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지제크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관한 꽤나 긴 서평이다. 드물게 한 권의 책으로 엮인 이현우의 서평을 읽으며 그 거울에 비친 내 적나라한 욕망을 보았다! 내 존재 안에 있는 이 낯선 것, 나 자신보다 더 나 자신인 것! 쇼펜하우어가 자기 안의 낯선 괴물이라고 한 의지, 프로이트가 욕망으로 바꿔 이해한 그것, 이글턴이 지제크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풀어서 쓰고, 이현우가 다시 지제크의 책에 대해 말하며 인용한 그것!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테리 이글턴, 앞의 책)

이현우가 인용하지 않은 그 다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테리 이글턴, 앞의책)

그것이 쇼펜하우어-프로이트-이글턴-지제크-이현우-장석주 사이를 잇는다. 욕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평과 서평 사이에서 강제적 매개의 힘으로 움직인다. 

11.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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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68운동의 정치적 철학적 영향'이란 주제로 프랑스 인문학자 초청 토론회가 11월 7일 오후 2시 중앙대에서 열린다(구체적인 것은 아래 행사 포스터 참조). 기조연설은 '욕망의 정치, 정치의 욕망'이란 제목으로 낭테르 대학의 프랑수아 퀴세 교수가 맡았다(국내에 곧 그의 저서 <루이비통이 된 푸코: 위기의 미국대학, 프랑스 이론을 발명하다>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에선 백승욱, 심광현 교수가 강연에 나선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11. 11. 05. 

P.S. 행사 소식은 도서출판 난장 블로그에 들렀다 가져온 것인데, 근간예정인 <루이비통이 된 푸코>의 가표지가 올라와 있다. 원제는 <프랑스 이론>. 같은 제목의 영어책도 있었던 싶은데 확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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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의 주인공 마이클 샌델 교수가 세계지식포럼 착석차 방한하여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와 대담을 가졌다. 신작 <시장과 정의>(원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도 조만간 출간되는 듯싶은데, 11월까진 책이 나오면 좋겠다(12월에 그의 정의론에 대한 강의가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공저를 제외하면) 박원순 변호사의 책을 별로 읽은 게 없는데, 겸사겸사 몇권 골르며 대담 기사를 옮겨놓는다. 기사는 아직 교정이 덜 끝난 듯싶다...

    

매일경제(11. 10. 14) 박원순 - 마이클 샌델 교수 대담 전문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12일 저녁 서울시장선거에 나서는 박원순 무소속 후보와 함께 대담을 가졌다. 박원순 후보는 대담 전에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영어원본과 한글 번역본을 준비해 딸과 본인을 위해 싸인을 부탁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권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딸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샌델 교수는 딸이 자랑스럽겠다고 덕담을 했다. 박원순 후보는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 한국말로 질문을 하고 답을 영어로 받았다. 샌델 교수는 한국의 행정가와 무소속 후보까지 다양한 이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박=샌델 교수님께서 학문과 강의에 주제로 삼고 있는 정의는 제가 삶 속에서, 실천 속에서 늘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인권변호사로서 1980년대 독재정권에서도, 1990년대 이후 시민운동가로서 여러 활동을 할 때도 제 삶의 화두는 정의였습니다. 교수님과 저는 일했던 방식과 영역은 다르지만 같은 고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책이 한국에서 100만권 이상 팔렸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땠습니까? 다른 나라에서는 어땠나요? 한국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도 수십 권 책을 냈습니다만 1만 권 이상 팔기는 어려웠습니다. 



샌델=이렇게 많은 책이 팔렸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책을 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미국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이런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될 지 몰랐습니다. 철학책으로 이런 반응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이 책이 반영하는 것이 정의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는 더 나은, 더 깊은 공적인 논의(public discussion)를 향한 갈망(hunger)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반응은 책 만으로는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책이 미국과 한국 두 사회에서 정의 문제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면서도 성찰적으로 논의하길 원하는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

박=저도 지금 우리 사회에 샌델 교수님 책이 많이 팔린 것은 그만큼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부동산 투기와 위장전입, 재벌의 편법 승계, 논문 표절, 빈부 격차 등 오히려 정의가 현실 속에서는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한, 그래서 더욱 정의를 갈망하는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바람직한 것은 이런 정의에 대한 갈증은 무엇이 구체적으로 정의인가 하는 것들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행동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은 좋은 시민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책을 보면 좋은 시민(good citizen)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좋은 시민은 어떤 것입니까? 저도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하면서 좋은 시민은 방관하지 않고 늘 참여하는, 구체적으로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시민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샌델= 저도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적극적 참여가 요구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좋은 시민에는 2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시민들이 책임감을 갖고 공적인 일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문을 읽고, 뉴스를 따라가고, 주변 세상에 대한 정보로 무장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공공선을 향한 관심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 작가 알렉시스 토크빌은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지역 공동체(local community)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시민이 되는 법과 자치 개념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인들에게 습관처럼 된 것입니다. 그는 이를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라고 일컬었습니다. 그것은 공공선을 위해 배려하는 것을 배운다는 의미였습니다. 개인의 삶과 가족들에 뿐만 아니라 더 큰 공동체에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토크빌이 마음의 습관, 시민의 덕(civic virtue) 배양을 강조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시민의 자질에서 나오는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시민의 덕을 기르고 공공선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것은 일생 동안 배양되어야(cultivating) 하는 특질입니다. 우리는 애초에 시민의 자질을 갖추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배웁니다(learning by doing). 그래서 참여가 중요한 것입니다. 좋은 사회는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의 미덕을 배우고 공공선을 배려할 줄 아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나요? 



박=이 말씀에 굉장한 안도감이 듭니다. 시민들의 참여, 훌륭한 시민이 결코 하늘에서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양될 수 있다고 하는 점이죠. 특히 우리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 하에서 개인의 역할이니 참여, 책임이라는 것이 전무했습니다. 제가 해온 시민운동은 황무지에서 경작하는 일이었죠. 미국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시민들 속에서 배양됐다는 점에서 안도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리더, 활동가로서 굉장히 힘든 점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의식과 관념을 깨고 시민들에게 역량을 강화해야(empowerment) 하니까. 그런 것이 미국의 경우와 한국은 조금 다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군사 독재, 전근대적 제도와 의식 하에서 힘들었는데. 미국의 시민 정신과 한국의 시민정신을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샌델= 저는 한국 사회와 공적 생활에 대해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말씀 드립니다. 이번이 3번째 방문입니다. 2005년에 처음 와서 철학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발간됐을 때 왔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고 지금 한국과 정치를 배우는 단계입니다. 방문객으로서 이런 인상을 받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은 단기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성취하고 이제 경제성장이나 국내총생산(GDP)를 넘어서는 가치들에 대해 공적으로 토론하고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공정사회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각 정당들은 공정함에 대해, 어떻게 정책에 반영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공정함이 뭔지, 정의가 뭔지,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어떻게 정책에 반영돼야 할 지에 관해 진정한 토론이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다른 국가들도 한국 사례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느낌으로 한국인들은 시장이 경제 성장을 위해 가치 있는 수단이지만 시장 그 자체는 정의를 소득과 부를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토론해야 할 정치적 질문들입니다. 한국은 그런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불평등 문제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불평등은 경제성장의 부산물로서 나타났고, 사회가 이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도전과제를 던져줍니다. 방문객으로서 제가 한국에서 보고 있는 것들이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질 공적인 논의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의미와 공정함의 의미,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식들이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라고 봅니다.

박= 샌델 교수님은 한국사회에서도 시장에서의 정의, 공정성 문제가 시장 자체가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서 다뤄져야 하고 동시에 불평등 문제도 토론을 통해 좀 더 진전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은 이런 것들이 보다 공식적 영역, 특히 정치권에서 다뤄져서 시장에서의 정의를 좀더 강화하고 불평등을 시정하는 정책들이 실시돼야 하는데 사실 유감스럽게도 정치권 영역, 관료사회에서 이런 것이 시민들이 바라는 만큼 안 되는 것이 현실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과거의 후진적 요소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을 통해서 하는 일들이 한계에 봉착하고 그래서 제가 (시민운동의) 경계를 넘어가서 시장이 되겠다고 출마를 하게 됐는데, 시민사회의 활동이 시민들의 새로운 요구에 따라 정치권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 자신의 얘기지만 어떻게 보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샌델= 시민사회 혹은 시민운동과 정치 사이에 아주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 둘은 서로 겹치는 영역입니다. 당신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죠. 어떤 이들은 평생을 시민사회에 헌신합니다. 시민사회와 운동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중요하죠. 그러나 정치권에서 정해지는 일은 엄청난 영향을 시민사회에 미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건전한 민주주의는 강한 시민사회가 있고, 그 사회는 에너지와 적극주의를 정치권에 제공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시민사회는 활약하는 사람들은 시민 활동을 추구하고 정치권에 있는 이들은 정부의 일을 맡죠. 그러나 때때로 당신의 경우처럼 양쪽간 연결될 수도 있죠. 제 생각엔 당신이 갖고 있는 시민사회의 경험이 당신이 지금 선거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성공적이라면 당신은 이미 기존에 했던 일들이 서울시장직을 수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박= 사실 미국의 랄프 네이더는 이분도 환경운동을 하다가 녹색당 대표로 미국 대선에 나갔는데 그분은 대통령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 이념을 미국시민들에게 알리는 기회로 활용했는데 제 욕심은 사실 그보다 조금 더 넘어서는 겁니다. 상징적인 의미 보다 현실적으로 시장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거든요. 또 사실 많은 시민들이 현재 여당 대표만큼의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 정당정치나 대의민주주의가 너무 실망스럽게 시민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봅니다. 사실은 저도 기본적으로 정당정치가 정상이 되고 정당인이 정당끼리 경쟁을 통해서 선거가 이뤄지면 좋은데 우리 사회가 그런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제가 균열음을 내면서 하나의 경고와 더불어서 하나의 대안적 흐름을 타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당선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큰 지지를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미국도 정당정치에 대한 불만이 있게 마련이고 시민사회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합니다.

샌델= 사실입니다.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미국 정치 제도에서는 아주 어렵습니다. 특히 대선에는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기 힘듭니다. 정당정치가 고안된 형태 때문에 대선에서 지금까지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소속 후보는 공화당 출신 (26대) 대통령인 테드 루즈벨트였습니다. 그는 퇴임후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나왔었죠. (당선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치 구조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의 정치상황은 다르다고 봅니다. 한국의 정치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큰 관심을 두고 지켜보겠습니다. 질문에 답하자면 미국에도 양당 정치의 대안에 대해 논의가 있었습니다. 많은 민주주의 사회에는 정치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있었습니다. 주요 정당들은 자주 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합니다. 기존 정당에 대한 좌절이 전세계 시민들, 유권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창의적인 대안을 모색하게 만드는 현 상황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각 사회들은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 정당 정치에서 신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거나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고 대안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박= 한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좌절 속에서 예건대 뉴욕이나 런던의 대규모 시위는 대중의 좌절을 반영한다 봅니다. 한국에도 대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정치적 영역에서도 조직화된 힘으로 나타나면 정당들에 큰 영향을 주고 새로운 대안적 정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는 1000만명이 거주하고 2000만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서울의 시장이 된다면, 참 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충돌도 있고 수많은 사건사고가 있을 텐데요. 저는 샌델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정말 정의롭고 공정한 도시, 지방정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 이 거대 도시를 제가 시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공정함과 정의를 증진시킬 수 있을지 조언을 주신다면요.

샌델= 제가 조언을 드릴 만한 자격이 될 지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저는 방문자 입장이고 한국과 서울의 문제들을 막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정책에 관해 구체적으로 조언할 만큼 제가 충분한 지식을 갖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대 도시가 번영하려면 경제성장과 환경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취약층과 중산층을 모두 포함하는 시민이 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평등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이런 것들이 주요 대도시들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불평등을 줄이는 데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겠죠. 경제성장과 경제력을 지키는 것과 함께 건강, 교육, 복지, 환경문제는 모든 도시에 중요합니다. 어떤 정책이 서울에 적절할 지는 방문객인 저는 충분한 지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서울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볼 겁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효과적인 시민들 참여를 독려하고 유지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요구됩니다. 흥미로운 과제로 지켜볼 것은 당신이 당선된다면 당신이 시민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효율적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지 여부가 건강과 교육, 복지, 경제성장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대단히 흥미로운 과제일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주요 도시들은 시민들을 움직이는 방법을 서로 서로에게 배울 수 있다고 봅니다.

박=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도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샌델= 그럼'런던시티즌스(London Citizens)'이란 시민운동 단체를 아시나요? 그들은 경제적인 약자들을 포함해서 시민들의 능력(civic capacity)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박=네, 저는 런던의 시민단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협업하고 있습니다.

샌델= 그 단체 공동체 조직가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커뮤니티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공공선을 위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일합니다.

박= 한국에서 이른바 보편적 복지에 관한 논쟁들이 심화되고 있는데 그 동안은 성장우선 정책을 정치인들이 택했습니다. 우선 파이를 키우고 배분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민들 요구가 점점 커지면서 지금은 성장 못지 않게 배분을 당장 해야 한다는 요구가 정치권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분적 정의가 따라가지 않으면 성장의 한계로 작용할 것입니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도 배분적 정의의 실현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금은 이것이 한국에서 큰 분수령적인 논쟁입니다. 아시아노믹스 강의와 관련해 경제성장과 별개로 채워야 할 정의가 있다면. 또 도시 경쟁력 측면에서 특히 서울이 가졌으면 좋을 만한 매력 요소는 어떤 것일까요?

샌델= 마지막 질문에서 서울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경제 성장과 공정성(형평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좋은 사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두가지가 서로 상충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저는 반드시 그들이 상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첫번째 질문으로 이어지는데요. 경제성장이 특정 단계에 도달했을 때 대도시나 국가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의 능력과 기술이 충분히 발휘되야 합니다. 몇몇은 뒤쳐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경제적 배경 때문입니다. 그들의 능력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이 공정함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시 전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 단계에서 혜택을 덜 받은 사람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을 사회 안에서 끌어안는 것이 그들만의 공정성 문제일 뿐 아니라 공공선을 위해, 미래 도시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를 낙오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능력을 개발하도록 하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더 강한 사회를 만들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성장과 공공선, 공정성은 함께 갈 수 있고 모든 시민들의 능력이 이에 함께 기여할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벌어질 일들에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습니다.

박= 교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주 감동적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들의 삶과 사회 속에서 잠재력을 발휘하고 능력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은 훌륭한 생각입니다. 교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겠습니다.

샌델= 이런 대담을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박= 제가 서울시장이 되면 제 실험과 구상(design)이 발전되는 것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1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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