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에 읽은 시사IN의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직함이 좀 길다)이 '마르크스라는 유혹'에 대한 불편함을 적고 있다. 사회적 담론이 대개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의미론적 마르크스가 아니라 화용론적 마르크스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수사가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것(나는 '마르크스의 연인들'에 대한 고종석의 비판에 공감한다). 마르크스를 지식인의 아편으로 본다는 점에서(레이몽 아롱의 말이던가) 고종석의 자유주의를 다시금 확인하게도 해주는 칼럼이다(이념적 포지션으로 보자면, 그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중도 보수이다).      

  

시사IN(09. 09. 15) 마르크스라는 유혹

‘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이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마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 

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

물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 마르크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
실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고종석_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09. 09. 17. 

P.S.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국가의 야만적인 폭력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용산 참사와 민간인 사찰과 공적 폭력의 남용은 그 '역사적 사회주의'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박정희식 계획경제가 스탈린식 계획경제와 먼 거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한 호명이 필요한 것은 거꾸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겐 '진정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냥 '마르크스'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에 대항하는 마르크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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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17 20:45   좋아요 0 | URL
식물이나 동물이나 독은 필요합니다.
상대를 치유하는 약으로도 가능하니까요.

로쟈 2009-09-19 09:06   좋아요 0 | URL
상처를 입힌 화살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지요...

philocinema 2009-09-17 22:5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실천도 못하면서 늘 머릿속에서나 말로만 평등, 분배, 정의등을 반복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로쟈 2009-09-19 09:08   좋아요 0 | URL
지젝이 반복적으로 주장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진보 담론이 오히려 진보의 장애물로 기능한다는. 자유에 대한 담론이 오히려 자유의 신장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요...
 
인터넷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이번주 대학신문에서 '제도권 밖 인문학' 동향에 관해 짚어주고 있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내가 실었던 글도 참조하고 있어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대학신문(09. 09. 12) 제도권 밖 인문학,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재정권 시절. 청년들은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을 들고 자발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시작이었다. 지식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완화된 지금, 이들 단체는 더욱 성장하고 있다. 제도권 인문학이 문학·사학·철학 등 인문학과의 위상이 축소되고 인문학 교육이 감소하는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자 제도권 밖 인문학이 ‘인문학 위기 담론’의 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제도권 인문학의 위기에는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백종현 교수(철학과)는 저서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을 통해 “우후죽순으로 대학이 생겨났고 인문학 전공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됐다”며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져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됐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제도권 인문학이 소수 학자끼리만 소통되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창작과 비평』의 전 주간 최원식 교수(인하대 한국어문학과)는 “대학의 폐쇄성이 인문학 위기 형성에 일조했다”며 “제도권 밖의 인문학 단체들이 인문학 대중화의 토양을 마련하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문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가치가 대중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 허브로 성장한 ‘인디 인문학’들의 향연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들은 꾸준히 성장해 지식 허브의 한 축으로 기능 하고 있다. 분과 학문에 갇히지 않는다는 강점으로 각종 학문을 망라하며 연구하는 이들은 그 성과를 단행본으로 내놓기도 한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대표격인 ‘연구 공간 수유+너머’(수유+너머)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등의 저서를 발간했다. ‘수유+너머’는 공부와 생활을 함께 하는 단체의 성격을 특별히 ‘지식 코뮌’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자체적 실험결과를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호모 쿵푸스』 등의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수유+너머’를 비롯해 일반인 대상의 강연 ‘콜로키움’과 재소자 대상의 강연 ‘찾아가는 인문학 강좌’를 주최하는 ‘지행네트워크’, 인문학 연구 공동체 ‘다중네트워크 센터’, 문학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대안 문화공간인 ‘문지문화원 사이’를 주목해볼 만하다. 1980년대 ‘불온서적의 성지’에서 세미나와 토론회를 유치하며 학술문화공간으로 변신한 전남대 앞 서점 ‘청년 글방’과 ‘좋은 책방’ 그리고 서울대 근처 녹두거리의 ‘그날이 오면’ 또한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과 일반인의 자발적 참여로 유지되는 이들 단체는 올가을에도 풍성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픈 독자는 ‘수유+너머’에서 오는 18일(금)부터 매주 금요일 개최하는 ‘대학생 케포이필리아’를 통해 마르크스와 루쉰의 삶을 배울 수 있다. ‘문지문화원 사이’는 황지우 시인이 21일부터 시민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학과 비극의 향연’을 주제로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등의 명작읽기 강의를 진행한다. 

◇‘성역’ 없는 온라인 인문학 공동체
언론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오프라인 단체들보다는 인지도가 약하지만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 또한 인문학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이들은 단순히 오프라인 단체들이 활동 영역을 인터넷상으로 옮긴 것과는 다르다. 대표적 단체로는 올해 창립 10년을 맞은 인터넷 비평카페 ‘비평고원’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의 역자 조영일 문학평론가가 카페장으로 활동하는 이 단체는 이미 인문학도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중적 단체로 성장했다.

‘비평고원’에는 성역이 없다. 철학·문학·영화 등 이들이 비평하지 않는 성역은 없으며 체면과 나이로 보호막을 갖던 선배들이 ‘기 센’ 후배들의 혹독한 비평을 피할 수 있는 성역은 더욱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오프라인 지식 코뮌과 비교해 갖는 강점이다. 조영일씨는 “비평고원의 모토는 자유로운 비평뿐”이라며 “오프라인 인문한 단체들은 상주 회원끼리의 유대로 신입 회원들이 배제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그는 “비평고원은 그러한 점을 고려해 오프라인에서의 모임을 지양한다”고 밝혔다. 또 ‘비평고원’은 참여자들이 자주 바뀌어 진입 장벽이 낮다는 점에서 일반인과의 소통이 용이하다. 실제 ‘비평고원’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의 절반 이상이 직장인, 자영업자, 주부 등 인문학 비전공자다. ‘비평고원’은 올가을 그간의 성과를 집대성한 동인지 『비평고원 프로젝트』를 발간할 계획이다. 이 동인지는 ‘가라타니 고진’과 ‘근대 문학의 종언’을 주제로 무크지 형식으로 출간된다 하니 이를 통해 제도권 밖 온라인 인문학의 수준을 느껴봄도 좋을 듯하다.

◇인터넷 공간은 학술활동의 변방이 아니다…중요한 것은 ‘의지’
온라인 인문학 단체는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지식공동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 지식 담론을 형성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알려진 이현우씨는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글을 통해 ‘비평고원’을 비롯한 온라인 인문학 단체의 가능성을 인정한 바 있다. 인터넷 공간의 인문학 단체는 개방성과 공유성, 현장성과 순발력을 통해 기존의 학술단체들이 창출하지 못했던 ‘중간지대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화를 넘어선 새로운 학술담론의 창출에도 긍정적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의지’다. 인터넷 공간의 활용과 지식의 공유는 사용자의 의지에 달렸다.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대중들의 인문학 수요는 높아지는 실정”이라는 ‘수유+너머’의 대표격인 최진호씨의 말처럼 제도권 밖 인문학은 이미 새로운 지식 원천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이들 단체는 해외에도 알려졌다. 최원식 교수는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들은 대중적인 인문학 가치 함양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대중과의 친화력에 덧붙여 제도권 인문학과도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은열기자)  

09. 09. 16.   

P.S. 기사에서 "백종현 교수(철학과)는 저서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을 통해"라고 언급한 것은 기자가 잘못 옮겨적은 것이다.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은 저서명이 아니라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에 실린 논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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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9-16 23:08   좋아요 0 | URL
온라인에서만 치열하게 논쟁하고 실제로 만나선 안된다...아무리 진보적인 사람들도 우리나라 인간관계는 위계질서 따지는 짓을 안 할 수는 없나 봐요.같은 유교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도 학교 선후배 위계는 없던데 왜 우리나라는 이럴까요...

로쟈 2009-09-17 19:31   좋아요 0 | URL
대부분은 진보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죠...

펠릭스 2009-09-17 21:43   좋아요 0 | URL
인터넷이 없었던 70,80년대는 제도권 밖에서 전.비전공자 함께 인포말구룹화하여 왕성했지요. 그때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못들어 봤지요. 현재는 가상공간 덕분에 다양한 계층이 참여할 수 있으니 양적으로는 팽창할 수 있습니다. 지식 담론을 형성할만 역량이 우려되기 합니다만 지식은 얇아도 예전보다 공감력이 일반화되기 때문에 '중간지대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어 오히려 더 고무적입니다.

로쟈 2009-09-19 09:08   좋아요 0 | URL
네, 아직은 가능성이지만요...
 

저명한 탈식민주의 이론가 호미 바바 교수가 내한하여 강연을 가졌다 한다. 동정을 소개하는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또 한주일이 시작되는군...  

한국일보(09. 09. 07) 호미 바바 미하버드대 인문학연구소장 방한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누가 소외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세계화는 경제적인 프로젝트인 동시에, 윤리적·도덕적 차원의 프로젝트로도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호미 바바(60) 미국 하버드대 인문학연구소장이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3일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바바 교수는 자크 라캉, 에드워드 사이드 등과 함께 탈구조주의 문화이론을 대표하는 학자로 시카고, 런던대 등을 거쳐 2001년부터 하버드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뉴스위크에 의해 '차세대 미국인 100인'에 뽑힐 정도로 정교한 학문체계뿐 아니라 왕성한 사회적 발언도 평가받는다.

그는 4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APCEIU)과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연구단이 각각 주최한 세미나에 잇달아 참석, 지구촌이 당면한 현실을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사유의 결과를 선보였다. 세계화와 극단적 폭력, 다문화적 혼융 등 현대 사회의 혼란을 헤쳐갈 방편으로 바바 교수는 "거대 담론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성찰과 변혁을 추구하는 인문학적 사고"를 제시했다.

바바 교수는 난해한 탈구조주의 이론보다는 세계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논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그는 세계화를 "로마로부터 21세기까지, 역사의 과정 속에 되풀이되는 흐름의 하나"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윤리'라는 부분에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 "얼마나 많이 수출하고 수입하느냐, 얼마나 많은 NGO의 네트워크를 갖느냐보다 각국에서 온 외국인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척도가 "세계화의 수준과 윤리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바바 교수는 세계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지속가능성, 그리고 평등과 함께 추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세계화의 역기능에 시달리는 신생 개도국들은 탈식민지 과정과 냉전 상황을 거치며, 발전이 덜 된 상태에서 세계화의 도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20세기 초의 식민의 유산을 간직"한 상태에서 "IT 혁명을 찬양하고 글로벌 마켓의 유연화를 찬양하는 흐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바바 교수는 그러나 "지구가 평평하고 공평하다는 생각의 반대편에는 유례없는 차별과 고통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세계화와 함께 현대 사회의 특징을 상징하는 '다문화'에 대해서는 "평등한 입장에서의 포용적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월한 문화는 없다는 전제 하에, 문명충돌 같은 아이디어를 버려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중반 조국인 인도에서 보낸 유년기와 청년기의 경험으로 설명을 보탰다. 그가 태어나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시간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의 혼란과 파키스탄의 분리 과정에서 빚은 갈등의 시기와 겹친다.

바바 교수는 "그 시절은 긍정적 감정과 적대감을 동시에 일으키던 시기였다. 탈식민지운동의 반대편에서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문화를 흡수했다. 한편으로는 굉장한 소속감을 느끼면서, 또 한편에선 나 자신의 존재 근원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러니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역사의 문은 열려 있지도 닫혀 있지도 않고,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며 "무엇을 들여보내고, 내보낼지를 결정하며, 민주주주의 취약한 점을 보완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합리주의의 관념으로 구성된 현대 정치에 내러티브, 혹은 감성의 언어를 가미할 것도 제안했다. "세계화, 문화 정체성 등과 관련해 너무 단순화·도식화한 개념들은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형식의 올가미와 차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바 교수는 "모든 유전자, 모든 문화는 고유한 이야기와 역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모두가 주체가 될 수도 객체가 될 수도 있다는, '세계적 회의'(global doubt)로부터 출발하는 인문학의 필요"를 강조하며 강연을 끝맺었다.(유상호기자) 

09. 09. 07.  

 

P.S. 강연인 만큼 대체로 '좋은 말씀'으로만 채워져 있어서 건질 게 별로 없지만, 마지막 문단의 내용은 흥미를 끈다. "합리주의의 관념으로 구성된 현대 정치에 내러티브, 혹은 감성의 언어를 가미할 것도 제안했다"는 대목. 사실 '제안' 수준을 넘어서는 뭔가를 기대하게 하지만, 더이상은 확인하기 어렵다. 국내엔 <문화의 위치>(소명, 2002)만 출간돼 있으나 그의 또다른 주저는 <민족과 서사(Nation and Narration)>이고,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도 거기에 닿아 있다(이 책은 번역된다는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기사에서 "자크 라캉, 에드워드 사이드 등과 함께 탈구조주의 문화이론을 대표하는 학자"로 소개됐는데, 자크 라캉의 이름이 포함된 건 의외이다. 바바는 '탈구조주의 문화이론가'라기보다는 보통 가야트리 스피박까지 포함하여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탈식민주의 '3총사'로 불린다. 사이드의 서거로 이제 두 사람이 남은 셈이지만. 탈식민주의 이론에 대한 좋은 입문서로는 보통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와 로버트 영의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가 꼽힌다. 호미 바바만을 단독으로 다룬 소개서들도 영어권서에는 서서히 나오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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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9-07 14:15   좋아요 0 | URL
^^ 호미 바바 사진을 신문에서 얼핏 보더니 예찬이 왈...
"아빠 저 할아버지가 수염을 뽑아요. 어...왜 자기 수염을 뽑아요?"
..
원근법을 무시하고 보면 수염 뽑는 것 같아요 .

새학기가 시작되서 더 바쁘시겠습니다. 지난 주에 인디고서원에 가서 로쟈님 책이 얼마나 팔리나 봤더니 4쇄판이 나와 있더군요..잘된건가요? ^^

2009-09-07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09-08 18:40   좋아요 0 | URL
소크라테스 같습니다.
탈식민주의 이론은 문화DNA에 대한 평등성을 주장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경제력을 업은 과학이 '우수DNA' 획득을 위한
'형질변환'로드를 무한질주하는 시대입니다.

로쟈 2009-09-08 23:51   좋아요 0 | URL
평등은 당위적인 가치죠...
 

교수신문에서 2학기에 출간될 학술도서 목록을 미리 짚어주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미 몇 권은 출간된 상태인데, 눈길을 끄는 타이틀이 여럿 된다. 참고해둘 만하다.  



교수신문(09. 09. 01) 2학기 학술도서 출간,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인생은 아름다웠고, 역사는 발전한다.” 한 시대의 아포리즘이다. 이 아포리즘이 학술서들에 반영되려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야위고 하는 시간들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 기획서들 꾸준히 발간
열화당의 모색은 흔들림 없다. ‘우현 고유섭 전집’(전10권) 2차분 네 권을 출간한다. 제3,4권『조선탑파의 연구(상·하)』,제5권『고려청자』,제6권『조선건축미술사 초고』등이다. 특히 『조선건축미술사 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 通史라고 할 수 있다. 한길사의 한길그레이트북스는 최술의 『수사고신록·수사고신여록』(이재하), 레이몽 부동의 『사회변동과 사회학』(민문홍) 등이 출간을 서두르고 있다. 19년 전 출간 당시에는 ‘자유의적’ 냄새 때문에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던 부동이 오늘 어떻게 수용될지 궁금하다.   

 

몰입은 계속된다, 고전을 찾아라
철학 전문 출판사인 서광사의 한 우물 파기가 멈출 줄 모른다. 플라톤의 『플라톤의 법률』(박종현 역주)이 눈에 띈다. 헬라스어 원전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으로, 플라톤 원숙기에 접어든 사상을 보여줄 것이다. 아카넷 역시 딜타이의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의 건립』을 내놓을 예정. 한길사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심경호 역주)와 타키투스의 『역사』(김경현·차전환 옮김)를 준비한다. 연암의 문체가 당대 조선을 뒤흔들었음을 생각할 때,연암의 빛나는 사유를 어떻게 ‘완전주석’ 해냈을 지 관심이 쏠린다. 도서출판 길에서 내놓을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김덕영 옮김)은 200자 원고지 3천매 분량, 전공자에 의한 결정판본 번역으로 기대된다.

국내 필진들의 내공 들여다 볼 기회
국내 저자들의 이론적 내공을 확인해 볼 수 있는 학술서 목록도 두툼하다. 하반기에 만날 수 있는 책들은 문자, 사상, 문화, 역사 등에서 스펙트럼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삼인출판사가 내놓을 『한자는 중국을 이렇게 지배하였다』(가제, 김근), 사회평론사의 『안견과 몽유도원도』(안휘준), 『상인과 미술』(양정무), 학고재의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안휘준 외), 『크로스컬쳐』(박준형), 생각의나무에서 준비중인 『크로스 오버 하이데거』(이승종), 『시장과 문화』(여건종), 아카넷에서 출고 대기중인 『중국의 다구르어와 어웡키어의 문법, 어휘 연구』(성백인 외), 서광사의 『기호 유학 연구』(황의동) 등의 리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크로스 오버 하이데거』는 제목 그대로 다양한 관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재해석하는 시도인데, 어떤 접점을 읽어낼 지 기대된다. 지식산업사의 『백제의 사회사상사』(노중국)도 제법 무거운 저작이다. 이 책은 올해 1월 익산 미륵사지에서 「사리봉일기」가 발견되기까지 모든 자료를 동원해 백제의 사회와 사상을 총체적으로 그려낸다.   



왕년의 저명 학자들 돌아오고, 현실 더 깊게 읽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깊게 파고들면서 삶의 방식을 개조하려는 노력에 공력을 쏟은 왕년의 스타 저자들의 책도 잇따라 번역된다. 앙드레 고르, 라클라우, 상탈 무페,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름이 눈에 띈다. 중국과 동아시아의 부상을 눈여겨 본 조반니 아리기의 이름도 있다. 위험사회로 잘 알려진 울리히 벡이나, 『상상의 공동체』로 이름 날린 베네딕트 앤더슨의 신간도 과거의 책만큼이나 관심을 끌지 궁금하다.  



생각의나무에서 내놓을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박수현 옮김), 후마니타스에 야심차게 준비한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승원 옮김),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는 유럽 인민인가』(진태원 옮김), 라클라우의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임승준 옮김), 소나무에서 출간할 『우리 종교』(하비 콕스 외, 박태식 외 옮김), 도서출판 길이 내놓을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책갈피를 통해 소개될 크리스 하먼의 『부르주아 경제학의 위기』(이정구 옮김), 책과함께의 리스트에 오른 『중국사상문화사전』(미조구찌 유조 외, 김석근 외 옮김), 이후출판사가 소개할 수전 스트레서의 『쓰레기와 필요』(가제, 김승진 옮김) 등이 주목된다. 

좀 더 현실의 문제에 착근한 책들도 예상된다. 진보, 반전 평화운동, 환경, 이슬람, 공화주의, 한국 자본주의 등의 코드가 보인다. 도서출판 길의 예정 신간인 로레르토 웅거의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병천 옮김)는 신자유주의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진보진영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삼인출판사가 내놓을 신시아 콕번의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전쟁, 여성 운동 그리고 페미니즘 분석』(가제, 김엘리 옮김)은 반전 평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활동가들의 인터뷰와 분석을 담는다.  

이후출판사의 『갯벌, 사람과 만나다』(김준)는 ‘갯살림’과 해양문화, 습지문화를 폭넓고 풍부하게 조명한 책이다. 책갈피에서 나올 마리얌 포야의 『이란의 이데올로기와 저항: 여성, 노동, 이슬람주의』(정종수·차승일 옮김)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이슬람, 특히 이란 현대사의 속살을 보여줄 것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마련한 『공화국을 위하여』(조승래)도 최근의 공화주의 논의를 증폭시킬 것으로 보인다. 한길사가 출간할 『한국자본주의의 선택』(백종국)은 해방 후 한국사회가 걸어왔던 자본주의 전체 모습을 조감하면서 한국 자본주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체제는 무엇인지 논의한다.(정리 최익현 기자) 

09. 09. 03.  

P.S. 참고로, 지젝의 책 가운데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가 이미 출간됐고, <레닌 재장전> 등도 하반기에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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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04 12:36   좋아요 0 | URL
2학기 개강과 동시에 입각하셨습니다.
세간에선 "테니스코트에서 야구가 잘 되겠냐"며 묻습니다.
고등학생이 물었습니다.
'총장님, 공부와 독서중에 어떤 것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 개인적으론 '독서'가 먼저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총장님, 다시 공부하시면 어떤 공부를 하시고 싶으신지요?
- 역시 경제학이며, 다음은 철학, 다음은 정치학 입니다.

로쟈 2009-09-05 09:19   좋아요 0 | URL
독서와 공부가 다른 건가 보네요...
 

이번 학기 강의 시간표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 것은 월요일 강의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일요일의 뒤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바삐 출근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었을 것이다(그런 학기도 있었다).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어제까지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 오늘은 시름이 한가득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과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에는 여유가 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 월요일 오전시간에 바쁜 일을 제쳐놓고 한겨레21의 칼럼을 먼저 옮겨놓는다.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보기 위해서인데, 애당초 내게 '쾌활함'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축 처진 기분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한 방책이다(나는 '명랑쾌활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안 갖고 있는 그들의 '명쾌함'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작에 스크랩해놓으려고 했던 것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장의기간과 겹쳐서 '쾌활함'을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 칼럼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거쳐 스피노자의 <윤리학>까지를 횡단하며 '쾌활함의 윤리'를 길어낸다. 근래에 읽은 가장 유익한 칼럼이다.  

 

한겨레21(09. 08. 14) 발리, 고원, 쾌활함 1 

마당에서 엄마가 아이를 부른다. 엄마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아이는 엄마 품에 달려와 안긴다. 아이는 엄마의 가슴을 만지면서 자신의 성기를 잡아당긴다. 그런데 아이가 작은 쾌감을 느끼면서 엄마의 목에 팔을 두르려고 할 때, 엄마는 받아주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이가 엄마의 다른 쪽 가슴을 마저 쥐려고 하면, 엄마는 아이의 뒷머리를 리드미컬하게 쓰다듬는다. 만족하지 못한 아이가 짜증을 내면 엄마는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본다. 만일 아이가 엄마를 때리면, 엄마는 화내는 모습 없이 공격을 가볍게 걷어낸다. 이런 상호 작용이 몇 번 반복되면, 아이는 마침내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면서 스스로 놀게 된다. 

절정의 추구를 회피하다  
이는 1940년경 인도네시아의 섬 발리에서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라는 인류학자가 관찰한 것이다. 베이트슨은 발리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발리의 생활양식이 서양 문명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성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에서도, 절정(climax)에 점층적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문화 형태다. 반면 위의 예에서, 아이는 절정에 이르기를 원하지만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제지당한다. 그래도 아이는 마침내 다른 놀이에서 더 큰 즐거움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엄마의 행동이 ‘신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강조돼야 하겠다.) 베이트슨의 보고에 따르면, 발리에서는 이 일화처럼 생활 곳곳에서 절정의 추구를 회피하고 예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트슨은 이 대조를 꼭대기가 있는 산과 높고도 평평한 고원(高原)의 비유를 들어 분명히 했다. “아이가 발리의 삶에 보다 충만하게 적응함에 따라, 연속적인 강렬함의 고원이 꼭짓점(절정)을 대체한다.” 그러니까 발리의 문화양식은 마음과 신체가 고원 상태를 형성하도록 습관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이 짧게 왔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쾌감’이 아니라 길고 강렬하게 유지되는 ‘쾌활함’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은 외부의 쾌락적 자극을 장시간 유지시킨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습관을 통해 마음과 신체의 경향 자체를 변화시키고 그에 맞게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주저 <천 개의 고원>의 제목을 여기에서 가져왔다. 이 저서는 뾰족한 절정에 집착하게 하는 것들, 어느 하나의 존재에 고착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고발한다. 국가권력, 종교, 화폐, 정신분석학의 기표, 자아의 내면으로 회귀하는 것까지도. 기쁨의 고원 상태는 ‘많은’ 변용과 정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제도들과 맺는 ‘외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감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베이트슨은 자신의 책 제목을 <마음의 생태학을 향하여>라고 붙였다. 이 제목은 흥미롭다. 생태학은 원래 생물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학문인데, 인간의 마음에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의 생태학’을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생태학의 모토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면, 마음의 생태학의 원리는 ‘지속 가능한 기쁨’이다. 

마음의 생태학의 원리 ‘지속 가능한 기쁨’
어떻게 높고 강렬한 고원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일반적인 원리를 말할 수는 없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방법들을 통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막연하다고? 참고할 만한 텍스트는 많다. 우선 문학작품은 변용과 정서의 실험실이다. 문학은 새로운 삶의 요소들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면의 기록 또한 중요하다. 반 고흐의 편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세잔의 대담은 구체적인 실험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 블로그는 동시대의 경험을 손쉽게 공유할 수 있게 한다. 블로거들은 당신의 실험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한겨레21(09. 08. 21) 발리, 고원, 쾌활함 2  

지난호에 언급한 발리의 일화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한 대목과 겹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비슷하게 쓰이는 두 단어, ‘도덕’과 ‘윤리학’을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의 간단명료한 정식을 빌리자면, “도덕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관련되고, 윤리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도덕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선험적으로 지정해주는 반면, 윤리학과 관련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도덕을 형성하지만, 사회적 규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은 윤리학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종교적 명령이 없는 실천 철학이다. 윤리학은 선과 악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량의 증감, 존재의 확장을 예민하게 느끼길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대될 때 기쁨을 느끼고, 축소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행동의 기준을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이전시키기를 제안한다.

스피노자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정도 교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좀더 나아가보자. 아무래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기준은 분명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기쁨의 추구는 쉽게 쾌락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닐까? 간단한 예로 마약 중독에 대해 생각해보자. 마약이 주는 쾌감을 연장하기 위해 점점 더 중독될 때, 그것이 하여간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이 종교나 법으로 금지됐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차적 구분을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다시 하위 단위로 구분한다. 기쁨은 쾌활함(cheerfulness)과 쾌감(pleasure)으로, 슬픔은 아픔(pain)과 우울함(melancholy)으로 나누어진다. 이 구분의 기준은 신체가 변용되는 범위다. 즉, 쾌감과 아픔은 신체의 일부분만 변용될 때이고, 쾌활함과 우울함은 신체의 전체가 변용될 때이다. 마약은 신체의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쾌감일 뿐 충만한 기쁨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쾌감과 아픔에 이중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쾌감은 기쁨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소적인 쾌감을 주는 사물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픔은 슬픔에 속하기는 하지만 좋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집착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때 그렇다. 그러니까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 안에서 봤을 때, 아픔은 쾌활함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리학의 목표는 기쁨의 형성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전체적이고 지속적인 기쁨, 즉 쾌활함의 형성이다.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서
발리의 일화에서 아이의 불만족은 교육적 효과가 있는 아픔에 상응한다. 아이는 부모의 신중한 상호작용 안에서 쾌활함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베이트슨의 관찰이 정확하다면, 이러한 문화 형식이 몇몇 사람의 특별한 지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 안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발리의 음악 또한 점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배제하고, 같은 모티브가 변주되고 반복된다. 발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젠가 한국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였던가. 시작도 끝도 없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최근 10여 년간 절정의 쾌감을 추구하며 급속하게 변형돼왔다는 점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렬하고도 평평하게 지속되는 쾌활함을 유지하는 법은 ‘잃어버린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09. 08. 31. 

P.S. 이 칼럼의 기여는 '쾌감'과 '쾌활함'의 의미를 명확하게 분절해놓은 것이다. 혹은 '쾌활함'이란 말의 용례를 새롭게 정의하고 제시한 것이다. 앞으로 '쾌활함'이란 말을 사용할 때마다 나는 전거로서 이 용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얻은 유익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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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01 08:54   좋아요 0 | URL
그리스 수도원의 본심이 마음의 고원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면
님의 고원(블로거)도 쾌활함의 연대입니다. 지난 10년이 역사의
'쾌감'이었다고 하다면 일본의 오늘은 '쾌감',아니면 '쾌활함'
일까요?

로쟈 2009-09-01 20:53   좋아요 0 | URL
'쾌활함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죠.^^

종이 2009-09-02 10:02   좋아요 0 | URL
제대로 안 읽고 지나쳤던 좋은 글을 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로쟈 2009-09-03 22:36   좋아요 0 | URL
네, 챙겨두고픈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