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다큐영화 <맑스 재장전>에 대해선 작년초에 들어본 듯한데, 지난가을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게다가 감독이 알랭 바디우 전공자 제이슨 바커란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늦었지만 오랜만에 영화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1. 09. 26) "마르크스 유행이 허세일 수도 있지만 정치를 생각하게 한다면 문제 안돼"

 

다큐멘터리 '맑스 재장전'(2010)의 감독 제이슨 바커(39)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번역가, 저술가로 활동하며 영화도 찍는데 본업은 이론가다. 영국에서 태어나 정치철학을 공부했고,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알랭 바디우를 사사해 카디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쓴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2002)은 영미권에 바디우 철학을 최초로 소개한 입문서로, 2009년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맑스 재장전'이 제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2~28일)에 초청돼 24일 한국을 찾은 제이슨 바커를 만났다. 인터뷰에는 바커의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 국내판 해제를 쓴 철학자 서용순씨가 함께 했다. 서씨 역시 바디우를 사사해 파리 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다큐의 전제처럼 유럽 등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유가 뭔가.

바커 "나는 경제위기 이후 유럽과 영미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각광받고 있다고 보는데, 유럽에서 유행하는 반 세계화(Anti-globalization) 운동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유가 뭐냐고?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웃음)"

-한국에서도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한다고 보는가.

서용순 "그렇다. 2006,2007년 16회에 걸쳐 마르크스 철학을 무료로 강의한 적이 있는데, 매번 70~80명의 사람들로 붐볐다. 유행의 이유를 찾자면 현실의 참혹함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정치,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데 대안은 많지 않고, 그나마 대안을 얻을 수 있는 학자가 마르크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큐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춰 마르크스의 계급, 노동, 착취 등의 개념을 다시 사유한다. 한국과 영국의 사례를 통해 달라진 마르크스의 개념을 설명한다면.

서용순 "대표적인 것이 착취의 개념이다. 우리나라도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본이 더 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진중공업 사태다."

바커 "다큐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이제 노동자들은 '착취 구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착취 구조에 머물게 해달라'고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착취는 노동시간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게 아니다. 예컨대 우리가 TV를 볼 때, 광고를 봄으로써 또 다른 착취 메커니즘에 들어가게 된다."

서용순 "'해방의 정치'란 개념도 그렇다. 마르크스는 미래에 국가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해를 대변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가 겪은 20세기 역사는 정확히 그 반대 지점이었다. 다큐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본 것은 마르크스 이론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학자 모두 국가를 비난한다는 점이다. 이제 의회민주정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정권을 장악한 정당은 항상 불리한 위치에 놓이고 매 선거마다 정권은 수시로 바뀐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자민당이 계속 집권했던 일본 역시 최근에 그런 경향을 보인다."

바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국가와 지금의 국가 개념은 다르다. 이제 국가는 국민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영국에서는 국가차원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최근의 '안철수 현상'도 정당정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나.

서용순 "크게 본다면 그렇다. 정당 같은 국가 장치에 의한 정치를 국민이 신뢰하지 믿지 못하는 거다. 안철수 현상은 정당정치로부터 벗어난 인물에게 정치적 기대를 거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일종의 패션이 된 시대, 그 유행에는 지적, 윤리적 허영심이 깔려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한국의 '강남좌파'나 유럽의 '캐비어 좌파'에 대한 냉소도 있는데.

바커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 유행도 미디어가 만든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정치문화적인 허세가 사람들을 정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큐에서 학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처럼, 현실의 문제점을 깨닫게 하는 빨간 알약과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파란 알약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서용순 "파란 약이든 빨간 약이든 약은 약이다. 현실이 병들고 아프다는 말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빨간 약을 고르겠다."

바커 "나 역시 빨간 약을 고를 것이다."

 


맑스 재장전

다큐멘터리 '맑스 재장전(Marx Reloaded)'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패러디하며 시작된다. 소파에 앉은 마르크스에게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내민다. 이때 트로츠키의 한마디. "빨간 알약을 먹으면 영구혁명이 얼마나 진척됐는지 보여주리다." 이후 최근 각광받는 현대 인문, 사회과학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제이슨 바커 감독은 이 다큐를 통해 2007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이 다시 유럽을 배회한다"고 말한다.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닌나 파워, 알베르토 토스카노 등을 차례로 만나며 감독은 묻는다.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경제, 환경, 정치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다큐는 좌우파 학자들의 입장을 번갈아 소개하며 마르크스 이론이 왜 다시 회자되는지를 짚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 이론들이 어떻게 변형, 발전됐는지를 소개한다. 2009년 독일 TV ZDF와 메데아 필름의 지원으로 만들어져 ZDF를 통해 방송됐고, DMZ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이윤주기자)

 

12.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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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화 소식이다. 아마도 김기덕의 <아리랑> 이후인 것 같다. 홍상수의 열두번째 영화 <북촌방향>이 오늘 개봉했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지지하는 입장에서(인상의 편차는 있었지만) <북촌방향>이 또다른 기대작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어려운 제작여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을 찾고 매우 부지런하게 영화를 찍는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이자벨 위페르 주연작도 얼른 개봉되면 좋겠다. 조금 일찍 올라왔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08. 26) “방식 다르면 생각도 달라…‘즉흥 촬영’ 밀고 나갔다”

한국의 영화감독 중 의뭉스럽기로 따지면 홍상수(51)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술에 취한 채 쉽게 찍힌 듯한 어느 장면이 사실 50번의 테이크 끝에 얻어낸 것임을,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지만 사실 그들이 받는 출연료는 거의 없음을, 굵고 뭉툭한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속에 사실 인생에 대한 반짝이는 성찰이 숨어있음을, 아는 사람만 안다. 



9월8일 개봉하는 「북촌방향」은 그의 열두번째 장편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해 1~2년에 한 편씩 작품을 내놓던 그는 최근엔 1년에 2편을 내놓을 정도로 다산하고 있다. 그는 이미 프랑스 최고의 여우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 차기작 「다른 나라에서」의 촬영까지 마친 상태다. 어떤 배우들, 어떤 관객들을 ‘신흥종교에 감화된 신도’처럼 거느린 그를 24일 서울 압구정에서 만났다.

-당신의 작품은 ‘최근작이 최고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홍상수 감독은 “인생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몇 개 없는데 그중 하나가 영화”라며 “싸구려로 안 하면 보답이 올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운”이라고 말했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미친놈도 아니고. 어떤 작품을 끝내면 ‘기분’이 있는데, 이번엔 나쁘지 않았다. 장르영화처럼 ‘이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고 정해놓고 만들진 않는다. 다양한 반응이 있으면 그걸로 영화가 완성된다.”

-가수 백현진은 ‘술먹고 노는 장면은 홍상수가 제일 잘 찍는다’고 말했다.

“헛소리다. 술자리 장면이라고 특별히 생각하는 건 아니다. 골목길 장면, 밥먹는 장면과 마찬가지다. (밥먹을 때도 반주를 먹던데) 글쎄. 왜 그럴까.” 



-전작들과 다른 방식으로 촬영했다고 들었다. 

제작방식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방식이 다르면 생각해 나오는 게 달라진다. <옥희의 영화>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구상이 없이 촬영을 시작했다. 이틀 전 정해 배우를 불러 1부를 찍고, 다시 정해 2부를 찍는 식이었다. 이번엔 그 방식을 더 밀고 나갔다. 전체적인 구상이 없이 첫날 찍고 둘째날 찍으니 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북촌방향」에선 김보경이 1인2역을 한다. ‘두 여인’의 테마는 당신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내가 오만가지 인물 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 삶에서 나온 것들이 새 배열을 찾고 새 표현방식을 찾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비슷한 방식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에는 말로 집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덩어리들이 있다. 옛 여자와 닮은 여자를 찾는 것도 한 덩어리다. 그 덩어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고 공유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하는 영어 대사 영화다.

“파리에서 위페르를 본 적이 있다. 지나가는 말로 기회가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했는데, 이번에 위페르 사진전을 준비하기 위해 내한한다고 전화가 왔다. 낮에 점심 먹는데 데려갈 데도 없어서 「오! 수정」과 「북촌방향」에 나온 고갈비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거기서 엉겁결에 출연하자고 얘기가 됐다.”

-갑자기 다작 감독이 됐다. 몇 편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나.

“그런 멍청한 목표가 있을 리가. 지금은 영화 만드는 게 중요하고 좋다. 건강이 허락하는한 계속 만들고 싶다.”

-작품에 대한 영감이 마구 나오나.

“‘이 때쯤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예를 들어 가을에 바람 부는 제주도에서 뭔가 찍고 싶다는 생각이다. 거기 맞춰서 한 번 해보는 거다.”

-영화, 책, 연극이 아닌, 주로 그림을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침대 위에 화집이 몇 권 있다. 세잔, 마티스, 렘브란트, 피카소… 멍하니 그림을 보면서 내가 이 그림을 왜 좋아할까 생각하는 게 재미있다. 그렇게 두 세 장 보다가 잠든다.”

-요즘 영화는 잘 안보나.

“영화에도 원형이 된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을 접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하는 건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많이 했다. 이제 그 이상으로 레퍼런스가 될 사람이 나오진 않는 것 같다.”

-요즘 당신 영화에 ‘착해서 좋아’라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제일 좋은 건 착한 사람이다. 우리들이 아기들을 보고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아무리 머리가 헝클어져도 아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슬금슬금 용기가 난다.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지만 이런 착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힘이 난다.”

■영화 「북촌방향」은
지방에 살면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는 감독 성준(유준상)은 서울에 놀러와 북촌에 사는 친한 선배 영호(김상중)에게 연락한다. 영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성준은 북촌을 배회하다가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옛 여자친구 집에 찾아가고, 마침내 영호 무리와 ‘소설’이라는 카페에서 술자리를 갖는다. 이 술자리는 기묘하다. 여러 차례 보이는 술자리는 하루에 일어난 일 같기도, 여러 날 반복해서 일어난 일 같기도 하다. ‘소설’은 시간이 뒤섞이는 마술 같은 공간이다. 선형의 물리학 법칙에서 벗어나, 관객의 감각이 매혹적인 혼란에 빠지는 공간이다. 성준은 이곳에서 서툴게 피아노를 치고, 옛 애인을 닮은 카페 사장을 만나 동침하고, 마침내 탈출해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부는 성준이 이 지루하고 비루한 삶의 궤도에 영원히 포박됐다고 말하는 듯하다. 「오! 수정」에 이은 홍상수의 두 번째 흑백영화다.(백승찬 기자)


11.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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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9-0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석과 이은주가 연인으로 나왔던 '오! 수정'...그때 이은주가 스무살이었을 겁니다.

그리고...김보경 좋아하세요? '친구'에서 이쁘게 나왔고 드라마 '깍두기'에서 김승수 아내로 나온 게 기억나네요.늘씬하고 세련된 여인 역을 하던데 홍상수 영화에선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군요.

로쟈 2011-09-10 10:39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봤는데, 이 영화에서도 매력적으로 나옵니다.

무당광대 2011-09-1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영화에선 관념적인 대화들을 많이 나누는데, 웃기면서도 슬프고 그래요. 딱 체홉 단편소설 같아요.

로쟈 2011-09-11 11:08   좋아요 0 | URL
체홉의 인물들보단 더 지적이긴 하지만, 서로 자기말만 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는 점은 딱 닮았습니다.^^

msjpolitics 2011-09-14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홍상수 감독 영화를 갈수록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은 너무 어릴때봐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북촌방향은 기회가 되면 한번 봐야겠습니다. 요새 이리저리 "밤과 낮"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를 봤는데, 그 대사 하나하나가 웃기면서도 참 불편하게 만들더라구요. 유준상도 괜찮지만, 저는 김영호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안봐서 뭐라고 말하기는 좀 그러네요.

로쟈 2011-09-14 17:51   좋아요 0 | URL
<밤과 낮>을 아직 못 봤는데, 유준상의 연기는 좋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하하하>에서도 그렇고 '홍상수 연기'를 마스터하는 듯해요...

philocinema 2011-09-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 전작품중 유일하게 dvd 출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상암동에서 홍감독 '전작전'할 때 가서 보고 왔지요.
dvd로도 출시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로쟈 2011-09-22 13:2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샥샥 2011-09-2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vd 수집중인데, <밤과 낮>만 안 보여서 늘 애태우고 있네요..^^

로쟈 2011-09-22 13:23   좋아요 0 | URL
영화에 대해서라면 샥샥님이 할말이 많으실 듯해요.^^

영남자파 2011-09-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은주는 가고 오수정은 남았는데...
오수정은 여성과 남성의 시각이 다르다는 생각이..
얼마전에야 도서관에서 봤는데 껍디기에 "키스하고싶다" 라고 어떤 형제님의 염원이 있길래 진짠가 분석해가면서 봤더니...허 참!

로쟈 2011-09-27 08:27   좋아요 0 | URL
오수정을 최고작으로 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2011)이 이번 칸느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상을 수상했다. 오전에 기사가 뜬 걸 보고, 점심을 먹고서는 예고편으로 올라와 있는 동영상을 봤다. 영화제에서의 수상 자체야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여러 사정으로 '폐인' 상태에까지 갔었다는 그가 감독으로 재기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으면 싶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1. 05. 23) 김기덕 감독이 목 놓아 아리랑을 부른 이유는

그는 목놓아 아리랑을 불렀다. 2008년 이후 한국영화계에 담을 쌓고 은둔의 생활에 들어가 폐인이 됐다는 소리까지 들은 그는 그동안의 마음고생과 한을 토해내는 듯 자신의 부활을 알리는 아리랑을 불렀다.  

김기덕(51) 감독의 아리랑은 수상소감이었다. 칸 영화제 폐막 하루 전날인 21일 밤(현지시각) 프랑스 휴양도시 칸 드뷔시관에서 열린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시상식에서 독일 안드레아스 드레센 감독의 ‘스톱드 온 트랙’과 함께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공동 수상한 뒤 출품작 ‘아리랑’으로 수상의 기쁨을 토해냈다.

그의 수상 덕분에 한국 영화는 지난해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에 이어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2연패하는 개가를 올렸다. 아울러 김 감독 본인은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에 이어 칸 영화제까지 한국영화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을 섭렵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김 감독의 작품은 고국보다 외국에서 더 대접을 받는 기묘한 상황이 다시 한번 연출된 것이다. 김 감독은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빈집’으로 2004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주목할 만한 시선은 칸 영화제 경쟁부문과 함께 대표적인 공식부문으로, 주로 새로운 경향의 영화들을 소개하는 부문이다.

그는 데뷔작 ‘악어’(1996)부터 ‘비몽’(2008)까지 15편의 영화를 만들며 각종 국제영화제를 석권한 국내를 대표할 만한 감독이었지만 국내에서보다는 외국에서 더 유명한 감독이었다.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노골적이면서도 밀도 있게 그린다는 호평도 있지만 국내에선 여성을 남성의 시각에서 대상화한다는 악평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거의 매년 1편씩을 꾸준히 만들어온 왕성한 창작자였다.특히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과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연거푸 수상하며 감독으로서는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국제적 지명도가 높아지자 3대 영화제의 최고봉인 칸 영화제와도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활’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으며 2007년에는 ‘숨’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칸 영화제 수상은 시간문제인 듯 보였다. 하지만 악재가 찾아오면서 2008년 ‘비몽’(이나영 오다기리 조 주연) 이후 외부와 연락을 끊고 칩거 상태에 들어갔다. 영화 ‘비몽’을 찍으면서 주연 여배우 이나영이 숨질 뻔한 사고가 발생한 데다 그가 시나리오를 쓰고 자신의 조감독 출신인 장훈 감독이 연출한 ‘영화는 영화다’를 놓고는 배급사와 소송전을 벌였다.

지난해 연말에는 장훈 감독이 메이저 영화사와 계약하면서 그를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으며 급기야 김기덕이 폐인이 됐다는 뜬 소문까지 번지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논란이 일자 김기덕 감독은 “더 이상 장훈 감독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과 그가 하는 영화 일에 지장이 생기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한다”는 내용의 해명자료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칸 현지에서 공개된 김 감독의 새 영화는 ‘의형제’의 장훈 감독을 실명 거명하며 격하게 비판해 파문이 일었다. “깨끗이 떠난다고 말했다면 내가 안 보낼 사람이 아닌데 아무런 상의도 없이 떠났다. 자본주의의 유혹에 떠난 걸 안다. 인생이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배신이라고 하지만 그냥 떠난 거다. 슬펐다”  

김 감독은 몇몇 연기자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실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악역이 제일 쉽다고? 악역을 통해서 자위하는 거잖아. 니네들은 가슴 안에 있는 성질을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거잖아. 악역 잘한다는 거, 내면이 그만큼 악하다는 거야”라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김기덕 감독은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작품인데도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고 국가가 상을 주는 “삶의 아이러니”도 비꼬았다.

<아리랑>은 감독 자신의 15년간의 영화인생을 반추하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이다. 감독이 직접 출연해서 자신의 지난 영화적 괘적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번민하고 대답하는 형식이다. 본인의 영화인생을 되돌아보는 사적 영화이지만 한국 주류 영화계와 독립영화계의 충돌을 드러내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서울을 떠나 어느 시골의 오두막에서 김 감독은 스스로 묻고 답한다. “매일 술만 먹고 영화는 안 찍을 거냐. 그러니 배신당해서 폐인이란 소리를 듣는 거 아니냐”고 심하게 다그친다. 강한 어조의 질문자 김기덕과 달리, 대답하는 김기덕은 눈물을 글썽이며 심정적인 동요를 한껏 드러낸다. 그는 “일련의 사건 이후로 시나리오가 안 써지더라. 그래서 지금은 슬픈 시기다”라고 입을 연다. “<비몽>을 찍기 이전까지는 육상선수가 계속 트랙을 달리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야생적이고 순수하고 계산이 없는 영화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강박이 찾아왔다”며 공장 근로자, 폐차장 인부 등으로 일하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감독이 되기까지 자신의 소회를 드러냈다.  

‘아리랑’이란 말이 마치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의미로 들린다는 그는 영화 속에서 절규에 찬 민요 ‘아리랑’을 직접 불렀으며, 거친 욕설까지 입에 담으며 그간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대신했다. “스스로 자신을 고민하는 건 처음이라 설레고 무척 떨리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그는 영화의 말미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가졌던 원망과 분노를 직접 제작한 권총을 동원해 해소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일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판타지를 오가는 장르의 실험. 스태프 없이 혼자 캐논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시도한 점 등 <아리랑>은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시사 후에서 일부 영화기자들과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으나 일부 관객들은 중도퇴장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영화웹진 <에크랑 누아르>는 트위터를 통해 “김기덕의 신작은 굉장히 매혹적이고 급진적”이라고 평했으며, 프랑스의 문화월간지 <테크니카르>는 “칸영화제를 향한 구조 요청과 같은 영화”라고 전했다.

한편 칸 심사위원상은 안드레이 지야긴트세프 감독의 ‘엘레나’가, 감독상은 모하마드 라소울로프 감독의 ‘굿바이’가 차지했다.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는 개·폐막 작을 포함해 모두 21편이 초청됐으며 한국영화는 김 감독의 ‘아리랑’,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 나홍진 감독의 ‘황해’가 진출했다.(김도형 선임기자) 

11. 05. 22.  

P.S. 기사 말미에서 심사위원 수상자로 거명된 '안드레이 지야긴트셰프'는 <리턴>의 감독 '안드레이 즈뱌긴체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름이 제대로 표기된 기사가 드물다). <아리랑>과 함께 이번에 같은 부문에 출품됐던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2011)도 기대작이다. 두 영화를 한국에서도 곧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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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05-2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기덕 감독을 조용히 응원해 왔어요
세계에서 거장임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학력이 달리고 남달라 무시받는 느낌이 참 싫더라고요. 물론 싫어하는사람들 그 이유가 아니라고 말하지만요

로쟈 2011-05-24 00:01   좋아요 0 | URL
대중에겐 가장 과소평가된 감독 중 하나죠...

아웅 2011-05-2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작업 나쁜남자는 좋았는데 외국에서 김기덕 감독의 작품 활이 주목을 받은 개인적인 생각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업은 그의 다른 작품보자 현실과는 개연성이 적은 망망 대해에서의 노인과 젊은 남녀 mythical, fantasy like 상황의 전개는 서구인에게는 신기해보였을것 같습니다. 오희려 빈집이나 나쁜남자는 배경을 경험(직접이 아니더라도) 한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로쟈 2011-05-27 08:36   좋아요 0 | URL
<빈집> 이후의 <활>은 개인적으로도 퇴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갈 수 있는 자리에서 주춤거린 걸로 보여요...

영남자파 2011-09-2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입견이 있어서 최근에야 챙겨봤는데 김기덕 꺼, 다 작품이라고 느껴졌어요. 빈집은 참 잘 된 소품의 느낌.
끝장면 쯤, 이승연이 몸은 남편쪽으로 돌리지만 재희 들으라고 한마디 하는데..고것 참 반짝 빛나는 아이디어!!

로쟈 2011-09-27 08:28   좋아요 0 | URL
네, 빈집은 걸작 소품입니다...
 

원고를 쓰다가 잠시 한눈을 팔며 읽은 칼럼은 이번주 개봉하는 영화 <인사이드 잡>에 관한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금융민주화를 위해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다들 한번씩 영화관 나들이를 해보시는 게 좋겠다. 우석훈 소장의 강추다.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만들었지만 남의 얘기가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한겨레(11. 05. 12) ‘인사이드 잡’, 금융 민주화로 가는 혁명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 지난해 아카데미 다큐상을 받은 영화 <인사이드 잡>이 출품되었다. 왜 오바마가 집권하고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만든 투자은행과 보험사들 문제를 정리하지 못했는가, 그 얘기를 정말 쉽게 다루고 있다. 과연 할리우드다.

지난해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과 했던 어느 토론회에서 나는 많은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고점 대비 6분의 1까지 값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고, 파주나 동탄 같은 곳, 심지어는 서울 안에서도 슬럼 아파트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수십억원 하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6분의 1까지 떨어질 수 있나? 물론 이미 그런 아파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 얘기였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일단 투기 경제가 끝나면 아파트의 운명은 도심지로부터의 거리와 관리비, 딱 두 가지의 함수다. 서울의 95평 주상복합, 그런 건 전세도 나가지 않는다. 파리 13구의 주상복합은 거품 붕괴 후 중국인 등 외국인이 몰려 사는 슬럼촌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것도 어렵다. 공조 설비 등 전기를 과다하게 사용하게 설계되어 있어, 50평 이상이면 전기료 100만원 넘기는 건 가뿐하다. 여기에는 서민이나 외국인들도 못 들어가서 산다. 슬럼이 된 주상복합 건물의 경제적 가치는 제로이다.

미국은 화려한 단독주택을 중산층들도 소유하게 되었는데, 결국 집주인도 망하고, 투자은행도 망하고, 보험사까지 망해서, 그냥 방치된 개인 수영장에 모기들이 집단 서식하게 되었다. 100만원 넘는 관리비가 나오는 주상복합 상당수가 슬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 같은 파생상품이 없어서 그 정도는 아닐 거라는 얘기를 하는 공무원들이 있다. 보자. 우리는 선분양이라는, 완전 순사기 금융 제도를 가지고 있다. 짓지도 않은 걸 먼저 팔아버렸고, 실패할 토건사업에 금융이 끼어들었다. 폭발하면,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몇 배의 파괴력이 있을 것이다. 



영화 <인사이드 잡>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 사태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허울뿐인 정권 교체에 관한 것이다. 그때의 금융관료, 은행장 등 이사진, 겨우 몇억원 받고 자문을 해주었던 경제학과 교수들, 모두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대선 이후, 폭발 이후,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토건관료, 뱅커들, 모피아, 부동산업자 쪽에 섰던 학자 및 전문가, 실제 슬럼 현상이 벌어져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이걸 바꾸어야 한다.

다음 정권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엔 한나라당에서 반엠비 진영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큐가 보여준 것처럼, 이 아수라장을 만든 토건쟁이들은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고, 담당 장관의 사과도 없을 것이다. 강만수, 윤증현, 도저히 사과할 스타일의 인간들이 아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곧 개봉할 영화 <인사이드 잡>을 보자. 이 영화가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면, 우린 그 힘으로 ‘금융 민주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관치금융 뒤에 숨어 사실상 이 꼬라지를 만든 은행의 지배자들, 외환은행 팔아먹고 저축은행에서 장난친 사람들, 그들의 ‘뒷배’를 처리하는 것, 그게 금융 민주화다. 다음 대선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할 혁명적 변화, 이걸 위해서 극장에 가자. 금융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혁명은,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우리의 대선은 혁명이 되어야 하고, 그 출발은 바로 금융 민주화다. 금융 민주화, 이것 없이는 민주화도 지킬 수 없고, 복지는 시도도 못 한다. 모피아와 정권 뒷배들이 토건질과 금융질로 돈을 다 가져가 버리면, 우린 영원히 가난할 수밖에 없다.(우석훈 2.1연구소 소장) 

11. 05. 12.  

P.S. 통장 잔고도 얼마 안 되기에 금융에 대해선 무관심한 쪽이지만 금융위기가 '강건너 불구경'은 아니기에 관련서를 꼽아본다. 최근에 나온 이찬근 교수의 <금융경제학 사용설명서>(부키, 2011)는 말 그대로 금융경제학의 ABC를 설명해주는 책 같고, 세계금융위기에 대한 '간편한' 이해는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금융위기>(미지북스, 2011)를 참고할 수 있겠다. 김수행 교수의 '석학강연' <세계대공황>(돌베개, 2011)도 이번주 신간인데, 알라딘에선 아직 이미지가 뜨지 않아 지젝의 책으로 바꿔놓는다. 역시나 금융위기 국면을 다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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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1-05-1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주영화제 이후 서울로 오길 기다리는 영화가 <트루맛쇼> 였는데, <인사이드잡>도 꼭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모피아라 불리는 재경부의 권한만 있고 책임지지 않는 행태가 자주 지적되고 있는데 연계되는 문제로 보입니다.

로쟈 2011-05-14 10:06   좋아요 0 | URL
저축은행 사태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여론은 변덕스러워서 또 묻혀버리지 않을까 싶어요...
 

'올해의 발견' '가장 빛나는 데뷔작' 등의 평판을 듣고 보게 된 영화는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 <파수꾼>이다. 초저예산으로 이런 완성도의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대사, 연기, 촬영, 모든 것이 뛰어난, 손에 꼽을 만한 데뷔작(이런 영화는 왜 학생단체관람을 하지 않는 걸까?). 두번째 영화가 잔뜩 기대된다. 간단한 리뷰기사들을 스크랩해놓는다.  

   

씨네21(11. 03. 02) 10대 소녀 못지않게 예민한 10대 소년의 관계 <파수꾼>

아들이 자살했다. 자살의 이유를 모르는 아버지(조성하)가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아들의 이름은 기태(이제훈). 학교에서 짱으로 불리던 기태에게는 희준(박정민)과 동윤(서준영)이란 친구가 있었다. 희준은 기태가 죽기 몇주 전 전학을 갔고, 동윤은 기태가 죽은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희준과 동윤이 학교를 떠난 이유가 기태와 관련있다고 아버지는 생각한다. 하지만 희준과 동윤의 기억이 드러내는 것은 기태가 아닌, 그때 자신에게서 터져나온 뜻밖의 잔인함이다.

이러지 말자. 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이제 그만하자고. 뭘 그만해? 소년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핵심적인 정보가 없다. 설명하기도 민망한 사소한 오해가 갈등을 일으킨다. 먼저 화해를 청하는 쪽은 말에 진심을 담는 방법을 모르고, 이를 받아들여야 할 쪽은 상대의 진심을 알려는 태도보다 자존심과 분노를 먼저 앞세운다. 마치 연인들의 싸움과 흡사한 대화의 피로감이 영화가 전하는 비극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파수꾼>은 누군가가 먼저 태도를 달리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파수꾼>은 10대 소년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의 관계는 10대 소녀 못지않게 예민하다. 자신을 빼놓고 다른 친구들이 나누는 시선에 분노하고, 본의 아닌 말로 상처를 주고는 후회하며 “나한테는 너만 있으면 된다”는, 그 시절이 아니라면 엄두가 안 날 고백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파수꾼>과 비교할 수 있는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아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일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이들이 환기하는 것은 그 시절의 소년들에게 있었지만, 잊었거나 지워버렸던 사랑의 단면이다.(강병진)   

한겨레(11. 02. 28) 소년들의 폭력 속 그 무엇

어두운 공터에 슬금슬금 기어든 쥐들처럼 소년들이 모여 있다.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맞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한다. 인정투쟁이 끊이지 않는 작은 왕국. 이 익숙한 풍경이 없는 소년들의 성장담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것은 정작 무엇을 인정받기 위한 폭력일까. 수많은 영화들이 말해준 것처럼, 그저 그건 수컷세계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반복되는 것이거나 이유 없는 사춘기의 분노거나, 그도 아니라면 불우한 가정사에 대한 반항일 따름일까. 윤성현의 <파수꾼>을 보며 문득, 폭력에 다쳐가는 소년들에게 지금껏 단 한번도 진지하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파수꾼>은 관습화된 답을 밀쳐내며, 영화 전체를 그러한 질문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한때 기태(이제훈), 동윤(서준영), 희준(박정민)은 단짝 친구였다. 기태는 일명 학교 ‘짱’이지만, 동윤과 희준의 관계에서만큼은 그 어떤 권력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기태도 동윤과 희준의 집은 거리낌 없이 드나든다. 그러나 사건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아주 작은 일을 계기로 기태와 희준의 관계가 멀어진다. 단지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짐승의 위계가 들어선다. 삼각형의 한 변이 무너지자, 남은 두 변은 버티지 못한다. 희준은 전학을 가고, 동윤은 기태에게 등을 돌리고, 어느 날 기태는 죽어버린다. 소년의 죽음. 그것은 영화의 엔딩이 아니라, 실은 영화의 시작이다. 아들의 느닷없는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무력한 아버지가 아들의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만난다. 



영화는 기태의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마다 소년들의 과거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거듭되는 플래시백으로 영화의 구조가 쌓아 올려질수록, 우리는 확신이 아니라, 불확신에 휩싸이게 된다. 그 플래시백들이 살아남은 누군가의 기억인지, 그 기억이 상대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영화는 점점 기태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로부터 멀어지고, 이 복잡한 구조의 어디에도 반전이나, 비밀은 숨겨져 있지 않다. 우리가 보는 건 그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알기 어려운, 애처로운 어긋남들이다. 그러니 <파수꾼>의 형식은 그 자체로 소년들의 관계의 결처럼 보인다.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은 채 영화가 그렇게 끝날 무렵, 살아남은 소년이 현재의 문을 열고 과거로 들어가서 죽은 친구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 영화의 본심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절 소년들이 서로에게 애타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 그 마음, 집착과 폭력과 애걸로 돌변하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소년들의 잔혹함, 그것은 감정이 없어서도, 넘치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도 아니라, 알아봐주는 이가 없어 외롭게 내팽개쳐진 마음이 짐승이 되어 울먹이는 소리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소년들의 폭력을 무심한 오해 속에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남다은_영화평론가)  

11.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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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2011-03-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고 싶기도 하고, 보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영화평이 인상적입니다.

로쟈 2011-03-13 22:43   좋아요 0 | URL
영화 자체가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