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의 개봉 소식을 오늘에야 접했다. 그러고서 주문한 책이 세 권. 30년 전 시간으로 소환하는 책들이다. <1987>이 제작되고 개봉되는 세상에 살게 돼 기쁘다. 그런데 너무 들뜬 탓인지 지갑을 분실했다(그 이전 분실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이다). 이용하던 신용카드들도 분실신고를 한 탓에 새로 발급받을 때까지 거래차단. 알라딘 구매도 중지.

집에 돌아와선 수습차원에서 지갑을 바꾸었다. 서랍에 오랫동안 자고 있던 지갑으로. 현금 분실액도 좀 되지만 핸드폰을 분실한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위안을 삼는다. 신분증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재발급받을 수 있기에. 다른 귀중품이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명함을 떠올렸다. 다시 받을 수도 없건만!

새해맞이용 액땜으로 치고 주중에 <1987>을 보며 기분전환을 해야겠다. 1987년의 사람들에 대해선 주제서평도 구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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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지난 6월에 진행했던 '영화 속의 문학' 강의를 이달에는 장소를 한우리 광명지부로 옮겨서 진행한다(8월 10일부터 3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10분-12시 10분).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수강문의는 02-897-1235/010-8926-5607)


1강 8월 10일_ 제인 오스틴의 <레이디 수잔> vs 위트 스틸먼의 <레이디 수잔>(2016)



2강 8월 17일_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상> vs 스테판 브리제의 <여자의 일생>(2016)



3강 8월 24일_ 엔도 슈샤쿠의 <침묵> vs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2016)



4강 8월 31일_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vs 드뇌 뵐뇌브의 <컨택트>(2016)



17.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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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필름포럼에서 진행하는 '영화 속의 문학' 여름강좌가 7월 18일부터 8월 8일까지 화요일 저녁(19:30-21:30)에 열린다. 이번에는 동시대 미국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와 필립 로스의 작품을 두 편씩 골랐다. 이들의 작품은 다수 영화화되었는데, 최근작 <아메리칸 패스토럴>이 계기가 되었다. 영화의 원작이 궁금한 분이나 원작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함께하셔도 좋겠다. 



강의에서 다룰 원작은 아래와 같다. 


1강 7월 18일_ 코맥 매카시, <로드>



2강 7월 25일_ 코맥 매카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3강 8월 1일_ 필립 로스, <울분>



4강 8월 8일_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17.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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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6월 9월부터 30일까지 4주간 매주 금요일 저녁에 '필름포럼 아카데미' 강좌로 '로쟈와 함께 읽는 영화 속의 문학'을 진행한다(신청은 http://cafe.naver.com/sicff/1327). 네 편의 영화를 원작과 함께 읽어보는 강의로 꾸렸다. 영화는 최근 개봉작들 가운데서 골랐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강 6월 9일_ 제인 오스틴의 <레이디 수잔> vs 위트 스틸먼의 <레이디 수잔>(2016)



2강 6월 16일_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상> vs 스테판 브리제의 <여자의 일생>(2016)



3강 6월 23일_ 엔도 슈샤쿠의 <침묵> vs 마친 스콜세지의 <사일런스>(2016)



4강 6월 30일_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vs 드뇌 뵐뇌브의 <컨택트>(2016)



17. 0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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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작가'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영화' 설문에 참여하곤 했는데, 올해는 영화평까지 쓰게 되었다(재작년에도 리뷰 제안을 받았지만 응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지난해에 본 '올해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았기 때문이다. 마감을 연기해가며 겨우 써보낸 리뷰를 옮겨놓는다. 책은 지난 주에 나온 듯싶다. <201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작가, 2017)다.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의 <, 다니엘 블레이크>올해의 영화중 한 편으로 꼽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지만 막상 그에 대한 리뷰를 제안 받고서는 욕심과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망설였다. 좋은 인상을 받은 영화에 대해 소감을 적는 건 마다할 일이 아니지만 칸국제영화제에서 블루칼라의 시인켄 로치에게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안긴 이 영화에 대해 내가 뭔가를 잘 말할 수 있는 건지, 게다가 마감 안에 리뷰를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영화평론이 주업이 아니고 영화중독자도 아니어서 나의 영화관람 횟수는 평균적 관객 수준에 머문다. 켄 로치의 영화들에 한정하더라도 근년에 본 영화는 <앤젤스 셰어>(2012)가 유일하다. 그 사이에도 이 거장은 극영화로 <지미스 홀>(2014), 다큐로는 <1945년의 시대정신>(2013)을 찍었다. 이런 직전 작들과의 연관 속에서, 더 나아가서는 50년 전에 찍은 BBC 드라마 <캐시 컴 홈>과의 주제적 연관성 속에서 <, 다니엘 블레이크>를 평한 리뷰도 읽다 보니 내가 이 리뷰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영화에 대해서는 각자가 평론가라는 오늘의 시대정신을 배경 삼아서 <, 다니엘 블레이크>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지에 대해 몇 마디 적고자 한다.


개인적인 연상일 수도 있지만 <,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이었다. 똑같이 칸에서 환대를 받은 감독들의 최신작이고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상이 특별하지는 않다. 내가 <내일을 위한 시간>2014년 초에, 그리고 <, 다니엘 블레이크>2016년 말에 같은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점이 두 영화를 같이 묶어보는 데 다소간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각각 주인공 노동자가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점 외에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데 특별한 기교를 구사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내게는 두 영화가 같은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같은 감독의 영화라고 속여도 넘어갈 듯싶었다.


영화평론가 정한석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한 단상에서 이 영화가 매우 투명하다고 지적하면서 “<내일을 위한 시간>은 켄 로치의 영화가 아니다라고 적었다. 칭찬의 말은 아니다. 비밀과 불투명함을 장기로 보여주던 다르덴 형제가 이 영화에서는 켄 로치를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이기에 그렇다. 송경원도 <내일을 위한 시간>이 다르덴 형제의 어떤 영화보다 명료하게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고 지적하며 일부에서는 이런 방식 때문에 인물과 카메라 사이에 존재했던 치열한 긴장감이 다소 옅어졌다고도 평가한다고 덧붙인다. 그렇게 긴장감을 떨어뜨리면서 다르덴 형제는 결과적으로 켄 로치식 영화를 찍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가 결코 같은 범주의 영화감독으로 분류되지는 않겠지만 예외적으로 <내일을 위한 시간><, 다니엘 블레이크>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부조리를 관찰한다. 동시에 오늘날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망가진 시스템을 고발한다.”(송경원)<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한 총평을 약간 수정하면 그대로 <,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기술이 된다. ‘작은 시골마을도시, ‘자본주의의 망가진 시스템영국의 복지 시스템으로.


영국 뉴캐슬에서 사는 59살의 목공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 질환으로 주치의에게서 노동 불가 판정을 받는다. 정직한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치매인 아내를 먼저 보낸 그에게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처방은 치명적이다. 당장 생계가 문제가 된 그가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게 정부의 복지 시스템이지만 이 시스템의 관료적 비인간성은 오히려 다니엘을 점차 파국으로 이끈다. 영화는 어두운 화면 속에서 다니엘이 의료수당 담당자와 긴 통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지만 담당자는 기계음과 같은 목소리로 형식적인 질문들만 고집스레 나열한다. 다니엘이 어이없어하면서 농담 섞인 항의를 하자 담당자는 지원 심사에서 탈락을 선고한다. 심사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하려고 하지만 이 또한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장시간 통화 대기 끝에 다니엘이 알게 된 것은 지극히 부조리한 심사결과 통보와 항소 절차다. 모든 수속이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다니엘은 마우스가 뭔지도 모르는 연필 세대. 실업수당이라도 받기 위해서 구직센터를 찾지만 관료주의의 철벽은 어디에서나 그를 가로 막아선다



다니엘은 도시로 갓 이사를 온 케이티가 버스를 잘못 타 지각을 하는 바람에 구직센터 직원으로부터 매몰찬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서 항의하다가 같이 내쫓긴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젊은 미혼모 케이티와 다니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는데, 다니엘은 전기마저 끊긴 케이티의 집에 동행하여 집 수선을 도와주고 전기료도 보태준다. 힘겨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케이티는 청소 일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삶을 꾸려가며 통신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꿈도 갖고 있는 여자다. 두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켄 로치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희망을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냉혹하고 부조리하기에 그렇다. <, 다니엘 블레이크>는 가감 없이 이 현실을 직시한다.


아이들만 챙겨주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오래 굶주린 케이티는 식료품 구호센터에서 허기를 이기지 못해 파스타 재료 통조림을 뜯어서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다가 결국 흐느끼고 만다. 그녀의 경제적 현실은 결코 인간다운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딸아이의 밑창이 떨어진 신발 때문에 학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자 케이티는 결국 성매매에까지 나서게 된다. 사정을 짐작한 다니엘이 케이티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가지만 케이티를 부끄럽게 만들 뿐 해결책이 찾아지지는 않는다. 켄 로치가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은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부유한 나라이다. 하지만 이 부유한 나라의 시민이면서도 다니엘과 케이트가 경험하는 것은 자존감을 가질 수 없는 밑바닥이다. 정직과 성실이라는 미덕으로도, 복지제도라는 허울로도 구제할 수 없는 현실에서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다니엘과 케이티가 겪고 있는 상황을 묵묵히 보여주기만 한 카메라와는 달리 다니엘은 한 차례 반란을 기도한다. 지원의 대가로 그에게 수치심만을 강요한 구직센터 건물 벽면에 그는 스프레이로 큼지막하게 이렇게 적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무얼 한 것이냐는 질문에 다니엘은 나의 첫 예술작품이라고 답한다. 분류하자면 그래피티 아트에 해당하겠다. 목수 다니엘이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탄생하는 장면이라고 할까. 카메라와 함께 무거운 마음으로 그의 일상을 뒤따라온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핵심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자기 선언으로서, ‘자기 긍정으로서 . 다니엘 블레이크. 다니엘은 한갓 의료수당이나 실업수당 등의 지원 대상이 아니라 고유명사이고 인격체다.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모습에 길 가던 이들은 박수를 보내고 한 실업자는 영웅이라고 치켜세운다. 심지어 경찰차에 실려 가는 다니엘을 향해 다니엘 블레이크 경!’이라고까지 호명한다.



하지만 다니엘의 멋진 반란은 일회적인 시도에 머물고 만다. 기물파손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된 다니엘은 재범에 대한 경고와 함께 훈방 조치되고 집에 칩거한다. 마침내 다니엘은 케이티와 함께 항고재판에 출석하게 되는데, 긴장한 그는 준비한 진술서를 낭독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장례식장에서 케이트가 대독한 진술서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듯,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영화평론가 정지연의 지적대로 켄 로치의 이 저항적 멜로드라마딱히 언어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이다. 너무 투명해서 해석할 거리도 따로 있지 않다. 그래서 평작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처럼, 짧은 리뷰를 마무리하면서도 다행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고맙다는 느낌도. 다니엘 블레이크, 당신이 있어 주어서. 은퇴를 번복하고 켄 로치, 당신이 영화 <, 다니엘 블레이크>를 만들어주어서. 그건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무시되고 인간적 존중에 대한 요구가 사치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7.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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