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얘기를 꺼낸 김에('아파트값 거품빼기와 진보' 참조) 이 문제와 관련한 영화평(이란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를 옮겨온다. 레디앙에 게재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이 그것인데, 올 상반기에 개봉되었던 영화들 가운데 <짝패>, <비열한 거리>, <아파트>를 다루고 있다(나는 세 영화 모두 아직 보지 못했다). 오래전에 스크랩해놓았던 것인데, 이젠 창가에 두어도 무방하겠다.

 

 

 

 

레디앙(06. 07. 18) 폭력 공포 영화 속에 감춰진 '부동산' 담론 

나는 올해 상반기에 본 영화 중 세 편의 영화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류승완의 <짝패>와 유하의 <비열한 거리>, 그리고 안병기의 <아파트>이다. 세 편 모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영화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못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편의 영화를 곧 잊었다. 당연하지! 

그런데 김소영이 <비열한 거리>에 관한 평을 쓰면서(씨네21, 제 560호, “호스티스에서 호스트로, <강적>과 <비열한 거리>가 몸에 의지하는 이유) <짝패>에 이어 이 영화를 ‘부동산 활극’이라고 불렀다. 그 순간 문득 두 편의 영화가 부동산에 집착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평을 읽으면서 그날 우연히도 <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환기. 먼저 <짝패>. 서울 형사 태수(정두홍)은 친구가 ‘칼에 맞아’ 죽었다는 말에 고향에 내려간다. 범인을 찾던 끝에 부동산 개발을 둘러싸고 옛 친구인 필호(이범수)가 벌임 음모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수는 후배 석환(류승완)과 함께 쳐들어가 결투를 벌인다. 결말은 당신의 예상대로 끝난다.



그 다음 <비열한 거리>. 똘마니 조폭 두목 병두(조인성)은 스폰서를 잡기 위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른다. 그에게는 철거 직전에 갈데없는 노모와 여동생이 있고, 자기만 바라보는 조폭 동생들이 있다. 병두는 스폰서‘께서’ 아파트 분양사업을 위해 검사 한 명이 문제라고 하자 그마저 해치운다. 그런데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옛 고등학교 동창 민호가 그를 찾아와 조폭 영화를 준비 중이라서 취재차 만나러 왔다고 말한다. 병두는 어느 날 민호에게 술김에 검사를 해치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민호는 그걸 영화로 찍고, 병두는 이제 민호를 없애지 않으면 문제가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엔딩은 나쁜 놈들만 살아남는다.

마지막으로 <아파트>. 디자이너인 세진(고소영)은 아파트에 혼자 산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9시 53분만 되면 아파트 전체의 불이 꺼지고 한 명이 죽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 다음 그 시간이 되면 아파트가 불이 꺼지고 한명씩 죽는다. 세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 비밀을 자기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는 (누구라도 이미 눈치 챈)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이 세 편의 영화 중 어느 영화도 아파트, 혹은 부동산 문제를 다루려고 만든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그저 소재이거나 무대이거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이건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일종의 핑계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 세 편의 영화는 내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자기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가장 설득력 있는 무대는, 배경은, 소재는, 핑계는, 그들이 서로 만나서 의논한 적도 없는데 거의 동시에 부동산이라는 견해에 ‘엉겁결에’ 동의했다. 여기서 방점은 ‘거의 동시에’라는 말에 있다.

지난 봄 오세훈도, 강금실도,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 서울의 약한 고리가 아파트라는 것을 알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년 내내 강남 아파트를 붙잡기 위해 악전고투하였지만 이제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우리가 아파트 주인인가, 아파트가 우리 주인인가
강남 아파트는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요지부동의 철통같은 자본주의의 요새, 부동산. 혹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우리 모두의 주인 담론으로서의 아파트. 그런데 아파트는 진정 우리들의 주인인가? 사실 아파트는 사이비 주인이다. 그 진정한 주인은 물론 자본이다.

그러나 내가 우석훈의 글을 읽고 깨달은 점은 아파트가 자본의 대상이 아니라 자본이라는 주인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우리 시대의) 집행자라는 사실이다. 그때 이 아파트는 사이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으스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이비 주인을 그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그림자는 자본의 중복이지만, 일단 현실의 순환 안에 들어오면 아파트와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관계로 전도되면서 아파트 전체의 자본의 구조 관계를 은폐하기 시작한다.

그때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단지 거기 초대받은 손님들에 불과해진다. 법칙은 간단하지만 잔인하다. 가난한 손님들은 쫓겨나고, 부자 손님들은 초대받는다. 그때 이 세 편의 영화는 초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우선 이 세 편의 공통점. 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신기하게 그들 중 누구도 아파트를 결국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파트를 둘러싼 현실 속의 싸움의 목표는 간단하다. 그걸 소유하는 것이다. 이걸 둘러싸고 전세금과 재산세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 한다
영화에서도 싸움이 반복된다. 친구까지 죽여가면서 필호는 고향의 개발 사업에 끼어들려고 한다.(<짝패>) 병두는 철거민이 되어 떠도는 가족에게 근사한 아파트 안겨주고 멋진 연애의 꿈을 꾸지만 결국 그가 찔렀던 수많은 희생자들처럼 그도 칼에 찔려 죽는다.(<비열한 거리>) 그 방에 가서 그 소녀를 구하려고 하지만 세진은 결국 그 아파트에서 그녀가 본 수 많은 희생자들처럼 뛰어내려 죽는다.(<아파트>)

영화 속의 누구도 그걸 끝내 소유하지 못한다. 이 세 편의 서로 다른 영화에서 아파트를 둘러싼 갈등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은 결국 ‘집이 없는 자(homeless)’로서의 자리에 갈 때에만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은 같은 자리에 도착할 때에야 끝난다. 그때 이 자리는 아파트가 집(house)일 수는 있지만 집(home)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다음 차이점. 그런데 이게 남자들이 주인공인 장르로 들어오면 (조폭들의) 액션 활극이 되고(<짝패>와 <비열한 거리>), 여자들이 주인공인 장르로 들어오면 공포영화가 된다. (<아파트>) 장르는 현실의 질서를 이야기의 컨벤션으로 바꿔치는 것이다.



“집을 소유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이걸 단순히 남자들의 폭력과 여자들의 비명이라는 식으로 단순화시키면 안 된다. 그건 영화가 현실을 마치 거울처럼 복제한다고 성급하게 착각하는 것이다. 반영은 그렇게 단순하게 옮겨오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문화가 지니고 있는 메타-예언이라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 세 편의 영화의 공통점을 말하면서 내가 놓친 것은 이 세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건 아니건) 집을 소유하려는 이들은 결국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자신이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고, 이미 죽은 여자는 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승인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왜 부동산은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운명의 순환에 넣었을 때만 이야기로서 성립되는 것일까? 생각해야 할 점. 그 순환이 한 번은 원인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고, 다른 한 번은 죽음이라는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향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된다.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영화 안에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파트를 중심에 놓은 다음 이야기를 거꾸로 세울 필요가 있다. 그때 아파트를 둘러싼 폭력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죽지 않으면 이 폭력이 끝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미 죽은 사람이 자기의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악순환은 끝나지 않는다. 들어가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 그러니까 그 둘은 사실상 하나의 순환이다.



아파트, 들어가려는 자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들의 싸움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폭력이고, 나가지 않으려는 것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이것이 반복이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 둘은 하나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 악순환이다. (내 생각에) 비밀은 여기에 있다.

아파트는 존재론적인 일관성을 상실했을 때에만 비로소 순환으로서 성립된다. 들어오려는 것과 나가는 것 사이의 불일치. 폭력과 공포. 폭력이 끝날 때 공포가 시작되고, 공포를 떨칠 때 폭력이 시작된다. 그때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환상을 끝내기만 하면, 욕망을 멈추기만 하면, 아파트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건 (이미 아파트에 안전하게 살고계신 교수님들의) 기만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부지불식간에 진실을 이야기한다. 환상을 멈출 때에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릴 때, 환상을 끝낼 수 있을 때, 욕망을 멈추려면, 더 이상 주거의 필요성이 사라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건 물론 내가 죽는 것이다. 그때 폐기되는 것은 아파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가공할만한 집값 앞에서 날아가 버리는 우리들의 바람
말하자면 산다는 문제. 내가 발을 뻗고 잠들 수 있는 작은 방. 내가 힘겹게 모은 책과 음반, DVD들을 쌓아놓을 수 있는 집. 그건 내가 소망하는 유일한 바람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사실상 저 가공할만한 집값 앞에서 그저 바람결에 간단하게 날아가 버릴 주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집을 가진 자들에게 증오심을 매일 키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작은 집에서 매년 전세 값에 전전긍긍하면서 그저 쫓겨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므로 나는 매년 두려움에 하여튼 버티고 있다. 폭력적인 전복에의 유혹과 공포에 차서 일 년에 한 번씩 내게 찾아오는 계약일. 그 사이의 줄타기. 우리 일부의 삶. 그런데 너무 많은 일부.

덧붙여진 약간의 잡담. 나는 얼마 전 강남의 유명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백화점 문화센터들이 그렇듯이 들으러 오는 수강생들은 그 동네 아줌마, 혹은 소녀들이다.(수강생 중에 단 한 명의 남자도 없었다) 휴식시간에 그냥 무심코 여기 주민들께서는 자녀들의 학군 문제 때문에 이 지역을 고집한다고 신문에 실려 있는데 정말 자녀문제인가요, 라고 묻자 앉아계신 아줌마들이 모두 웃었다. (정말 모두 웃었다. 진짜 웃기는 농담을 들었을 때처럼 격의 없이 웃었다)

다 유학 갔는데 학군이 뭐 중요하겠어요?
그러더니 한 아줌마가 대답했다. “이 동네 애들은 다 유학 갔는데 학군이 무슨 문제겠어요, 저희는 이 동네에 무슨 학교가 있는 지도 잘 몰라요. 그냥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 살잖아요.” 물론 이 대답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남는다. “아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 살잖아요.” 이 대답은 어느 동네에 대입해도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 함께 살면서 서로 잘 알고 있는 모두는 누구일까? 도대체 그들이 누구 길래 그 모두가 힘을 합치면 정말 대통령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일까? 말하자면 정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제의 승리.

06.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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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21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공감이 가서 섬뜩합니다.ㅡ.ㅜ

이리스 2006-09-2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다른 지역은 서로 잘 아나요? ㅎㅎ 여튼 끼리끼리 비슷한 데에 사는 건 맞습니다. 결혼 앞두고 청첩장 돌릴테니 댓글에 주소 달아줘요.. 라고 누가 글을 올렸는데 많은 댓글 주소가 간단히 정리되더군요. 압구정동, 청담동, 논현동, 양재동. 아, 분당도 한둘 있었던듯. 신기하게 일산도 없고 안국동, 가회동도 없더이다.

사마천 2006-09-2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수의 부동산 거품에 대한 책과 박태견의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문제점 관련 책도 꼭 읽어볼만합니다.

로쟈 2006-09-21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자연스러운 일상도 꼼꼼히 들여다보면 섬뜩하지요...
낡은구두님/ 유유상종인 건 당연하지만 역지사지에 기반한 상종이어야겠어요...
사마천님/ 유용한 정보 감사합니다. 책들은 바로 띄워놓았습니다...

클래식 2021-08-0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글이 재밌어서 혹시 제가 다른 글에서도 내용을 인용해도 될런지요?ㅎㅎ

로쟈 2021-08-07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스크랩해놓은 거에요. 제가쓴게 아니고.
 

오늘 아침 경향신문에서  곧 개봉된다는 영화 <호텔 르완다>와 관련한 칼럼을 읽었다. 100만명이 넘는 인종 대학살(제노사이드)가 벌어진 12년 전 '94년의 석달'을 재연한 영화라고 하는데, 그 봄의 벚꽃과 목련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지구 한쪽에서 벌어지던 그때의 참상에 대해선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불편하고, 잠시 허탈하고 착잡했다. 달리 더 보탤 말도 없다(그냥 '잘만든 영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속편하겠다). 관련기사를 옮겨놓으며 영화가 개봉되면 잠시 시간을 내봐야겠다...  

경향신문(06. 09. 05) 영화 '호텔 르완다'

-토마스 카밀린디. 그를 처음 만난 건 1년전 이맘 때다. 저널리즘 연수프로그램 참가차 머무른 미국 미시간대학에서였다. 토마스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왔다고 했다. 첫인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미소가 선량하고, 유창하진 않아도 품위있는 영어를 구사하는 점이 조금 눈에 띄었을 뿐이다.

-한달쯤 뒤였을까. ‘신산(辛酸)’이란 말로는 부족할 그의 삶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가난하지만 우애깊은 집안의 장남. 고등학교 시절 대통령 앞에서 연극 공연한 것을 계기로 국영 라디오방송 기자가 된다. TV가 드물고 문맹률이 높은 르완다에선 라디오가 가장 사랑받는 매체라고 한다. 끔찍한 내전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토마스는 안온한 삶을 살았으리라.

-그러나 1994년 4월6일 그의 생일날, “모든 것이 변했다”(토마스의 술회).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숨지면서, 잠복해 있던 후투·투치족 사이 갈등이 폭발한다. 후투족 전사들은 벌목용 칼과 구식 총을 들고 닥치는 대로 투치족 학살에 나선다.



-온건파 후투족이던 토마스는 투치족 출신 아내와 둘째딸을 데리고 벨기에 기업 소유의 ‘밀 콜린’ 호텔로 피신한다. 호텔은 평소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 하지만 그날은 위험지역을 피해 가느라 꼬박 이틀이 걸렸다. 토마스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끈인 팩스전화기를 들고 프랑스 라디오 RFI에 기사를 송고한다. 이 때문에 밀 콜린 호텔은 “바퀴벌레(후투족이 투치족을 멸시해 부르는 호칭)들의 온상”이란 비난에 휩싸인다. 후투족 자치군이 호텔로 몰려와 토마스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지만,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단호히 거절한다.



-루세사바기나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는 토마스뿐이 아니다. 당시 밀 콜린에는 많은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들이 총칼을 피해 모여들었다. 루세사바기나는 때로는 돈과 고급 샴페인으로, 때로는 탁월한 협상력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을 넘어서는 용기로 1,268명의 생명을 지켜낸다. 하지만 호텔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져간다. 유엔도 미국도 유럽도 수수방관하는 사이, 석달 만에 1백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토마스도 처가에 보낸 맏딸이 숨졌다는 비보를 듣는다. 대학살은 끝나지만 희망을 놓아버린 그는 고국을 등진다. 아내와 둘째딸을 벨기에로 보낸 토마스는 미국 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토마스가 겪은 ‘94년의 석달’을 담담히 재연한 영화 <호텔 르완다>가 7일 개봉한다. 당시 전세계가 외면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토마스가 꽃같은 아이들을 가슴에 묻었다. 필자도 기자로서 무력했다. 국제면에 실린 기사를 무심코 읽은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때 내가, 우리가 외면했기에 12년이 지난 지금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죄없는 어린이와 여자와 노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픈 마음으로, 사죄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가려 한다. ‘또다른 토마스’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호텔 르완다’를 권한다.(김민아 정치부 차장)

한겨레(06. 09. 05) 아프리카 르완다를 위임통치했던 벨기에는 소수 부족인 투치족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다수 부족인 후투족을 지배하게 했다. 르완다는 1962년 독립했지만, 이때부터 두 부족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크고 작은 인명 피해가 이어져 왔다. 그리고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됐다. 내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00일 동안 민간인을 포함해 100만여명이 숨졌으며, 르완다는 초토화됐다.



-<호텔 르완다>(감독 테리 조지)는 이 처절했던 100일 동안 1268명의 목숨을 지켜낸 한 호텔 지배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이 시작되면서 수도 키갈리의 최고급 호텔 밀 콜린스에는 올리버 대령(닉 놀테)을 비롯한 유엔군과 잭(호아킨 피닉스) 같은 외신기자, 외국인 여행객은 물론 투치족 피란민들이 모여든다. 이 호텔의 투치족 출신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도 투치족 출신 아내 타티아나(소피 오코네도)와 자식들, 이웃들을 호텔로 대피시킨다.



-영리하고 처세에 능한 폴은 불안정한 정국에서 안전망을 확보하려고 오래 전부터 온갖 서비스와 뇌물로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내전 초반, 그는 그렇게 쌓은 인맥을 동원해 가족들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가족들을 지키려다 목숨이 위태로운 이웃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돕게 되고, 같은 이유로 호텔에 몸을 숨긴 투치족을 살리는 데 인맥과 지혜를 쏟아붓는다.

-폴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지만, <호텔 르완다>는 그를 ‘영웅 떠받들 듯’ 과대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흑인들의 생과 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유엔과 서구사회의 모습을 너무 흥분하지 않으면서 너무 무겁지도 않게 ‘당시 사실 그대로’ 틈틈이 묘사한다. 이를 통해 자기 가족이 최우선이고 전부였던 가족주의자 폴이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유엔과 서구사회는 자신들의 역량 밖이라며 내전을 중단시키지 않는다. 또 호텔에 묵었던 백인들과 그들의 개까지만 안전하게 피신시킨 뒤 투치족 흑인들을 남겨둔 채 호텔에서 유엔군을 철수시켜 버린다. 이 과정에서 폴은 등떠밀리듯 호텔에 남은 피란민들의 목숨을 책임지게 되지만, 떠밀린 등을 되돌리지 않는 건 그의 따뜻한 인정과 연민 때문이다.



-과대포장은 없지만 <호텔 르완다>는 밋밋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르완다 내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있는 그대로 오감을 멎게 할 정도로 끔찍할 뿐더러, 에피소드들도 디테일하다. 또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도 영화에 윤기를 덧입히는데, 특히 돈 치들은 마치 다큐멘터리 속 실재인물 폴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폴의 심리변화와 긴장감을 뛰어나게 표현해냈다.(전정윤 기자)

 

 

 

 

06.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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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9-0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한겨레에서 이 영화기사 봤습니다.저두 이거 페이퍼로 올리고 싶었지만 낮에는 바쁘고...물론 밤에도 애기땜에 바쁘고...ㅜㅜ필름 2.0인가에서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정도 줘야 되는거 아니냐고 주인공의 연기를 높이 평가하더군요.이게 동숭아트센터에서 개봉하는것 같은데...다른데도 하는지 모르겠어요.많이 개봉하진 않을 거 같은데.동숭 아트센터는 대학다닐때 참 자주 갔던 영화관이었지만...그나저나 아기 태어난 후 천만명이 봤다는 <괴물>도 못보고 있는데 동네 상가에 영화관에 생겨도 보긴 힘들겠죠?

로쟈 2006-09-0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은 봤으니까 제가 조금 형편이 나은 듯합니다(한때는 일주일에 3-4편씩 개봉관에서 보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문화생활은 '여유'를 필요로 하는지라...
 

'에로영화의 거장(꼬장)' 혹은 '에로영화계의 왕가위'로 불리던 봉만대 감독의 (예기치 않은) 공포영화 <신데렐라>가 얼마전 개봉했다. 극장용 장편 데뷔작이었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 이은 두번째 영화인데, 에로영화 전문감독의 공포영화라는 점이 먼저 특이하고 (그의 전력에 견주어) '15세이상 관람가'라는 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사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이 기대에 못 미쳤던 건 비디오용 에로영화들에서 보여주던 '주변부적 정서'(그의 표현으론 '쓸쓸함' 혹은 '슬픔')를 빼먹은 채 '그림'으로만 승부하려고 했던 탓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나로선 그의 '공포영화'가 기대를 뛰어넘을 거 같지는 않다(그게 편견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비디오로 출시되면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언론의 리뷰들을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6. 08. 16) 봉만대감독 공포영화 데뷔작 ‘신데렐라’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서 감칠맛나는 영상을 만들고, 케이블채널 OCN에서 독특한 감성의 <동상이몽>을 보여준 봉만대 감독. 그가 자신의 ‘전공분야’인 18세 이상 관람가 영화에서 벗어나 공포영화를 내놓았다. 봉 감독이 “쓸쓸한 영화”라고 설명한 ‘신데렐라’(제작 미니필름·17일 개봉)는 맹목적이고 어긋난 모성애를 다룬 공포물. 미리 귀띔하자면, 포스터와 예고편 전면에 내세운 영화의 섬뜩한 컨셉트 ‘성형수술’은 사회적 메시지보다는 모성애를 드러내기 위한 강렬한 소재로 차용됐을 뿐이다.

 

 

 



-친구처럼 다정한 모녀인 성형외과 전문의 윤희(도지원)와 고등학생 딸 현수(신세경). 외모에 관심이 많은 현수의 친구들은 윤희를 찾아가 수술을 받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만, 곧 알 수 없는 환영에 시달리고 급기야 죽음으로 치닫는다. 이상한 일이 계속되자 현수는 윤희가 출입을 금지한 지하실로 찾아가고, 사진을 한 장 발견하면서 모녀 사이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는 특별한 반전없이 술술 전개된다. 최근 몇년간 한국 공포영화들이 보였던 ‘알고 보니 이런 거였어. 몰랐지?’식의 반전 강박증이 적어도 이 영화엔 없다. 덕분에 관객이 머리를 굴려야 하는 피곤함은 덜었다. 하지만 지나친 친절은 드라마의 재미를 누리려는 관객에겐 ‘독’이다. 매사를 또박또박 설명해주려는 영화는 시종 요철없이 밋밋한 느낌으로만 일관한다. 모처럼 스크린 나들이한 도지원의 연기와 신세경의 성숙미가 돋보이지만, 그것만으로 공포영화의 재미를 보전하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시청각의 지나친 자극을 부담스러워한다면 이 영화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초반 스크린에 피가 흥건하긴 하지만, 잔혹한 수준은 아니다. 소름돋는 쇳소리 음향효과, 괴상하게 몸을 꺾으며 일어서는 귀신의 모양새 등 공포영화의 유행코드에 연연해 하지 않은 대목에서 차별점을 찍는다.

-그러나 봉 감독에게 기대했던 세련된 연출장면을 찾지 못해 끝내 안타깝다. 현재와 과거를 절묘하게 들락거리는 장면에서나 그의 스타일리시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엄마 잃은 쓸쓸한 아이, 죄책감에서 아이를 살리려 희생하는 모성 등의 주요설정이 일본 공포 <검은 물 밑에서>와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한다.15세 이상 관람가.(최여경 기자)

한겨레(06. 08. 16) “난 에로의 꼬장…이번엔 슬픈 공포”

-“신음 소리만 낸다고 에로 영화가 아니듯 비명 소리만 지른다고 공포 영화는 아니다.” 성인 비디오 영화계를 주름잡다 극장용 성인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과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용 에이치디(HD) 영화 <동상이몽>을 선보인 뒤 농담 반 진담 반 ‘에로 영화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봉만대(36·사진) 감독이, 이번에는 공포 영화 <신데렐라>를 들고 관객들을 찾았다.

-<신데렐라>는 성형수술과 극단적인 모성애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끌어들였음에도 애써 자극적인 비주얼과 효과음을 피해간 흔적이 역력하다. 에로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뿅점’(결정적으로 야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던 그의 취향과 신념이 그대로 반영된 듯도 하다.

-봉 감독은 <신데렐라>를 ‘봉만대식 공포 영화’라고 정의했다. “나는 에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에로보다 멜로를 중시했는데, 공포 영화에서도 공포보다 멜로쪽에 무게를 뒀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공포 대신 슬픔을 느끼고 극장문을 나선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봉 감독이 ‘슬픔’을 유난히 강조하는 탓에, <신데렐라>의 주요 축을 이루는 것도 ‘성형이 불러온 참사’보다 ‘성형외과 의사인 엄마(도지원)가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깊은 슬픔’이다. 공포 영화를 만들어 놓고 공포보다 슬픔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생뚱맞기도 하지만, 이는 봉 감독 나름의 공포에 대한 정의가 반영된 결과다. 봉 감독은 “귀신이 무서운 건 머리카락이 길어서도, 피를 흘려서도 아니다. 슬픔을 간직하고 죽어서 한을 품은 게 무서운 거고, 그 한을 풀 때 공포스러운 거다. 슬픔을 뺀 공포는 ‘처키’이고, <신데렐라>는 처키 식 공포 영화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 시사회 뒤엔 ‘덜 공포스러움’을 아쉬워하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봉 감독은 “내가 그 정도 (비판에) 상처받을 사람이 아니다(웃음)”라며 단호했다. “사실 난 ‘에로 영화의 거장’보다 ‘에로 영화의 꼬장’이라는 별명으로 훨씬 더 유명했다. 공포 영화를 만들면서도 남들이 다 하는 뻔한 방식으로 무섭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잔혹한 비주얼을 되도록 피해 가고, 세지 않은 효과음으로도 공포감을 줬다는 점 등 새롭다고 평가해 줄 부분도 많지 않은가.”

-<신데렐라>는 17일 전국 200여개 스크린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에로 비디오에서 에로 영화로, 다시 공포 영화로 보폭을 넓혀온 봉 감독이기에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하지만 그는 “나는 비디오 찍을 때도 한 작품 끝낸 뒤 바로 다음 작품을 찍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생길 때 다시 영화를 찍을 예정이고, 에로가 될지 공포가 될지, 다른 어떤 장르가 될지 나도 모른다”며 끝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세계일보(06. 08. 17) 봉만대감독 "공포도 에로와 다를게 없죠"

-에로 영화로 연출에 입문했지만 개봉을 앞둔 것은 공포 영화다. 만나보니 사람은 영화 장르로 치자면 코미디다. 종잡을 수 없고 도대체 정리가 안 된다. 신작 <신데렐라>(오늘 개봉)로 돌아온 봉만대(36) 감독은 여러 이미지가 상충하고 조합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이질적인 요소가 한데 뭉쳐 묘한 화음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 궁금증이 커졌다.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능력, 그것이 감독 봉만대가 변방에서 주류를 향한 길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을까.

◆상충하는 이미지의 기묘한 조합
-이름과 실물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이 첫 번째다. 봉 감독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봉만대(奉萬大)라는 이름은 초등학교만 나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한자로 된 쉬운 이름이다. 그는 “이름만 들으면 스타일이 아주 촌스럽거나 늙수그레한 아저씨로 상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부연했다. 실제로 만나 본 그는 배우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 호남형이었다. “배우 한번 해보지 그랬느냐?”라는 질문에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그만뒀다”라고 농담한다. 전라도 출신인 그는 대사에서 ‘나의 생각은’을 자꾸 ‘나으 생각은’으로 발음해서 연기를 접었다는 사연이다.

-두 번째 인식의 전복은 그의 사생활이다. 느끼하거나 바람둥이일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는데 보기 좋게 깨졌다. 6년간 같이 살다 결혼한 부인과 크랭크인 직전에 태어난 딸을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 아닌가. 봉 감독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부인을 만난 후에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단다. 홀어머니와의 관계도 돈독하다. 게다가 종교까지 있단다. 상상 초월이다. 봉 감독은 고교 시절 연극학원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며 비용을 주지 않으려는 어머니와 30살에 감독 못하면 그만두기로 약속했다. 35세까지는 돈 잘 버는 상업감독이 되겠다고 손가락을 걸었다. 아마 봉 감독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데는 어머니라는 굳건한 중력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
-봉 감독은 자신을 ‘선인장’에 비유했다. 다른 식물과는 달리 물이 풍족한 안락한 상황에선 죽어버리는(*그래서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극장용 영화보다 저예산 비디오 영화들이 그에게 더 어울린다. 여기서 '영화 대 비디오'는 사회적 계급을 반영한다. 그는 주류영화를 찍을수록 자신의 세계에서 멀어질 것이다). 에로 영화를 15편 연출한 것을 시작으로, 극장용 장편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HD로 찍은 케이블 TV용 연작 영화 <동상이몽>, 이번엔 공포 영화 <신데렐라>로 변신했다. 광고계에서 촬영 부분에서 일한 경력도 있다. 혼자만의 의지로 물길을 거슬러가며 경력을 쌓아왔다는 얘기다.



-봉 감독은 배우 김서형이 자신의 출연작 <어느 날 갑자기> 시사회에 초대했지만 공포 영화가 싫어 보러 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공포 영화를 연출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 것은 순전히 시나리오의 서사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에로도 좋아서 했듯이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포도 에로와 다를 게 없다. 그는 “에로 영화도 보는 사람이 집중하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드냐”면서 “공포 영화도 설득력 있게 오싹하게 만드는 과정과 심리적 템포 조절에서 에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익숙한 공포 영화의 공식에서 하나만 바꿔 색다른 느낌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신데렐라’는 여학생들의 예뻐지고자 하는 욕구, 성형수술, 모녀 관계 속에서 “왜, 누군가 죽는가”에 관한 담백하지만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40세에는 세계로 나가는 작품을 연출하고 45세에는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봉만대 감독. 그가 변방에서 주류로, 주류 중에서도 중심으로 향하는 여정에 신작 <신데렐라>는 추진력을 배가해줄 것 같다.(신혜선 기자)

06.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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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지하철에서 읽은 오늘자 한겨레의 문화면은 영화 <괴물>과 <한반도>에 대한 김소영-정성일-허문영 3인방 평론가들의 대담을 싣고 있다. <한반도>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별로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지난주에 <괴물>은 보았고 나로서도 하고픈 이야기의 가닥을 잡아가는 중이다(물론 비디오로 영화를 한번 더 본 다음에 무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영화판의 봉준호가 어쩌면 문학판의 김영하는 아닐까라는 것이다(우연히도 오늘 구내서점에서 손에 든 <작가세계> 가을호의 특집은 '김영하'이다). 즉, 내가 비교하고픈 것은 강우석과 봉준호가 아니라 김영하와 봉준호이다.

 

 

 

 

둘은 모두 이데올로기/정치/역사 시대에 대한 포스트정치적 포지션을 공유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포지션이 그들의 유희정신을 지탱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대담에서 정성일이 일부 그런 지적을 하고 있다. 여건이 된다면 나는 이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이른바 '포스트정치 시대의 예술'의 행방에 대해서 두 사람은 각각 문학과 영화에서 가장 유력한 답안을 써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도 아래 대담은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기에 일독할 만하다. 단,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께는 권하지 않겠다.

한겨레(06. 08. 18) ‘한반도’ 이어 ‘괴물’ 흥행 대박…정치영화 논쟁 점화

-<괴물>과 <한반도>, 제작비 100억원대의 ‘정치영화’ 두편이 동시에 나온 건 한국 영화사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두 영화의 정치적 어법과, 두 영화를 둘러싼 담론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김소영 영상원 교수, 영화평론가 정성일,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허문영 셋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에서 셋은 <괴물>의 1천만명 관람을 놓고, 비극적 감정을 의도적·유희적으로 단절시켜온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어법이 이제 확실한 대중성을 확보했음을 입증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반면 <괴물>의 시선이 냉소적이냐 아니냐, 냉소적이라면 그걸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해 오래도록 논란이 계속됐다. 대담 전문은 18일 발행되는 <씨네21> 567호에 실린다. (‘괴물’의 결말부분을 미리 알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성일=<괴물>을 두고 만들어지는 담론엔 의아한 구석이 있다. <괴물>이라는 영화를, 영화로만 가두려는 담론이 있고, 2006년 한국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판본으로 읽으려는 담론이 있다. 또 대중이란 무엇일까라는 방식으로 좌표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도 있다. 민노당의 한 기획위원이 <괴물>에 관한 글을 썼는데 타이틀이 ‘괴물은 북한이다’였다. 이런 식으로 ‘괴물은 무엇이다’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있다고 생각한다. 괄호 안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제 <괴물>의 담론은 봉준호 감독을 떠나 사회 안에서 괴물을 누구에게 뒤집어 씌우는가의 문제로 전화한 듯하다.

김소영=보통 공포영화나 괴수영화에서는 타자성이라는 위치가 중요하다. 이 영화의 괴물에 타자성이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모호하게 처리됐다. 미군의 독극물이 탄생시킨 괴물이라고 명확하게 시작은 하는데 그 다음부터 더 이상의 발전이나 확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다양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다. 괴물은 북한이다, 미국이다, 사회적 약자다 하는 식으로.



허문영=<괴물>과 <한반도>가 탈식민지 사회에 작동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두 영화는 다르다. <한반도>에서 국새를 찾는 이유는, 제국주의 질서로부터 국민국가의 주권을 완전한 형태로 만든다는 국가적 기획과 맞물려 있다. 여기서 <한반도>를 기본적으로 우파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건, 국민국가를 완전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완전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정을 하는 거다. 반면 국민국가의 하위 단위 계급인 집단, 지역, 가족, 개인 등이 완전히 배제된다. 영화는 인물의 사적인 동기를 전혀 배제한 채 오로지 견해로만 이뤄진다. 이처럼 국민국가 단위 아래 모든 층위의 단위를 무시한 영화는 거의 처음 본다. 그만큼 국민국가라는 단위에 대한 신뢰나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괴물>로 옮겨오면 똑같이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시선이 있음에도, 이 질서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지 설명이나 서사적 장치가 매우 모호하다.

정=<한반도>가 우파 이데올로기를 담보하고 있는 국민영화인 건 명백하다. <괴물>이 정치적인 영화이기는 하지만 좌파영화인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차라리 <한반도>가 냉전영화라면 <괴물>은 포스트 정치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괴물>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한국영화에 처음 도착한 포스트 폴리티컬 영화가 아닐까(*나는 이러한 지적에 공감한다. 그리고 이 점은 보다 세밀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 다만 의아한 건 이 명징하게 드러난 정치적한 영화를 왜 사람들은 가족영화로 덮어씌우고 싶어하는가다. 만일 가족에 관한 영화라면 강두의 딸 현서를 살리면 안 됐냐고 질문하고 싶다. 현서를 죽였다고 해서 이 영화가 장르 영화의 관습을 거스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또 어떻게 모든 가족이 현서를 찾는 데만 매달릴 수 있나. 삼촌, 고모 모두 목숨 걸고 거기 매달릴 만한 모티브가 무엇인가. 국민주의만큼 납득할 수 없는 가족주의가 이 가족들을 사로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가지고 이 영화의 정치성을 덮어씌우고자 하는 걸 볼 때 포스트 정치영화의 불안한 미래가 느껴졌다.



허=이 영화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규정하는 방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영화 자체가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처음부터 현서가 죽는 설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는 오히려 가족영화로 남지 않기를 처음부터 계획했던 듯하다. 가족이 가족을 지키는 게 아니라 지키는 와중에 사회적 연대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꼬마 세주를 구하는 장면, 그리고 세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장면에 있다고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명백한 설정이기 때문에 가족에서 출발한 영화가 빈민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은 충분히 평가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정=재미있는 건 <한반도>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반면 <괴물>에 대해서는 어떤 동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가지 질문하자면 <한반도>와 <괴물> 모두 완벽할 정도로 로맨스가 증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두 영화 모두 로맨스의 작은 스파크조차도 완전히 지우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본단위에 대한 출발점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다.

허=두 영화에 로맨스가 부재한 이유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반도>가 공적인 견해로만 이어지기 때문에 로맨스라는 사적영역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0만명이라는 관객이 들었다는 건,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영화적 의제가 동시대인에게 시급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걸 방증한다. 반면 <괴물>에는 로맨스를 개입시킬 수 있는 이야기상의 여백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봉 감독은 단편에서 장편까지 한번도 로맨스를 그린 적이 없다. 로맨스를 그리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로맨스는커녕 이 영화에서 가족들 간의 감정적, 정서적 연대는 충실하지도 않다. 가족애를 드러내는 순간 영화는 그 정서의 지속을 중단시킨다. 그것이 완전하거나 숭고하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봉준호에게선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라는, 대작영화을 만들면서도 끝내 대중적 코드를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좋은 지적이다).

 

 

 



김=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그게 감독이 인지하는 대중적 코드로 등장하는 것같다. 슬픔을 지속시키지 못하게 하는 방해하면서 재미를 유발하는 장치들 말이다. 다른 요소들이 틈입해서 파토스(정념)의 지속이 끊어질 때 사람들이 웃는 등의 엇박자식 리듬감이 실제로 대중적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닌가. 이건 박찬욱 감독의 코드이기도 하다.

정=2006년 여름 <괴물>의 대중적 호소력이 바로 이거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의 영화에 전위적 측면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팝’(pop)하다고 생각하다. 구태여 정의하자면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아방 팝 정도? 봉준호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만화적인 리듬과 팝한 감각이 있다. 또 이게 봉준호와 박찬욱을 잇는 선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 감독은 “오늘날 한국 관객들은 해피엔딩보다 비극을 즐기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는데 방점은 비극의 호소력이 아니라 ‘비극을 즐긴다’는 거다. 비극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때 파토스가 없는 건 당연하다. 비극은 그저 구경거리가 되고, 미토스(이야기)가 밀쳐내는 정도에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축소인지 치환인지 대체인지는 토론해야 겠지만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뀔 때 대중적 감성이라는 건 급격한 퇴행이라고 생각한다.

허=여기서 두가지를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 한국 관객들이 비극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역대 흥행작의 대다수가 비극이다. 그 비극들은 <괴물>과 반대로 파토스의 과잉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식 비극은 팝한 거다. 봉준호와 박찬욱은 찍는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비웃음이 있다. 정치적 의제를 꺼내는 사람도 비웃고, 어떤 것도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하는 끊임없는 조소가 있다. 또 그게 불러일으키는 유희적 요소도 있다. 그래서 2000년대에 비극적 대중 영화들을 즐기는 방식과 <괴물>을 즐기는 방식은 전혀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파토스의 과잉이 호소하는 대중적 요소가 있고 그것이 주류였으며 그게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를 300만~500만명대에 멈추게 하는 저지선이었다. 이제는 파토스 과잉뿐 아니라 파토스의 유희적 단절로 호소하는 방식도 그만한 대중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괴물>이 증명하고 있다.

김=엇박자나 비극적 엔딩이 흥행에 장애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로 보면 전부 플러스로 작용한 게 이 영화를 전환점으로 만드는 것 같다. 비극을 유희로 받아들이는 건 김기영 감독의 특성이다. 호스티스인 딸은 울고 있는데 엄마는 몰래 돈 세고 있는 장면 등의 모멘트를 박찬욱이 거의 빌려갔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식 잃은 부모들 사이에 돈 얘기 나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보다는 인간적인 버전으로 봉 감독이 조롱과 비웃음을 유희할 수 있도록 영화에 넣는 것 같다. <괴물>이 대중영화의 새로운 분수령이라는 건 우리가 함께 도달한 결론인 것 같다. 대중적 감성의 재구성, 그게 전에는 300만~500만명이었다면 이제는 1천만명까지 가는 수준이 됐다.



정=<괴물>에 대해 허문영과 결정적으로 견해 다른 게 괴물과 싸우는 마지막 장면이다. 허문영은 연대를 얘기했는데, 나는 연대에 대한 봉준호의 비웃음으로 보인다. 통상적 연대라면 끝에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살아가야 하며, 에필로그는 없어야 한다. 강두가 밤에도 안자고 깨서 두리번거리는 에필로그는 1980년대라는 마법의 순간, 모두가 연대해서 싸웠던 그 마법을 깨버리는 순간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장면이 로케이션임에도 굳이 에필로그만 세트 촬영을 해서, 그곳을 시뮬라크라(복제물)화한다. 실제하는 세상으로부터 상상적인 시뮬라크라로 물러났을 때 무슨 의미인가. 그게 연대라면 마지막 질문은 이거다. 왜 현서랑 같이 살지 않았나. 현서는 이 모두를 묶는 매듭인데 그걸 끊어놓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와 세상을 시뮬라크라화했을 때, 그 연대가 무슨 의미인가. 정치적 이성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실망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허=운동권 출신인 남일은 도바리의 천재이지만 그가 던진 화염병은 목표를 명중하지 못한다. 여기엔 저항운동을 상징하는 게 있다. 적으로부터 도망은 잘 치지만 정작 적을 맞추지는 못하는 것. 그러나 부수적인 기능은 한다. 현서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세주를 구했다. 여기서 그나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감독은 묻는다. 바이러스나 괴물은 없지만 원인은 남아 있다. 그걸 유일하게 강두는 지켜본다. 그 옆에 밥먹는 아이가 있는데 혈연은 아니다. 이 설정에서 모든 것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럼 당신은 누구를 믿겠냐고 묻는 것이다.



김=그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낙관적인 해석이다. 이 영화에서 모성의 부재와 함께 또 하나 흥미로운 건 트라우마의 부재다. 세주는 괴물과 관련된 온갖 걸 다 보고 겪은 목격자이자 피해자인데 마지막에 보면 잘 먹고 잘 잔다. 모든 트라우마를 희석시키는 놀라운 결말이고 관객에게도 트라우마를 안 남긴다. 괴물이 살아날까, 독극물이 또 괴물을 만들어낼까 등등의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적으로 끝난다기보다는 트라우마를 없애면서 끝내는 결말이 아닌가. 내가 말한 허무함, 비관이란 건 영화가 이처럼 트라우마를 견지하지 않기 때문에, 세주에게서 그것을 없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허=이 영화의 정치적 각성의 수준을 과장해선 안 된다. 그건 새로운 게 아니라는 거다. 21세기에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유될 만한 비관, 전망없음, 불안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의 특별한 비관적, 냉소적 시선을 읽는 건 이 영화의 정치적 사고를 지나치게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봉 감독은 미군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드는 순간부터 비관과 냉소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이 이 정도라는 거다. 그것이 뭘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없지만 깨어있는 행위를 영화는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해결 못하는 무력한 이 세상에서 봉준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정리 임범 김은형 기자)

06. 08. 18.

 

 

 

 

P.S. 참고로, 김영하(1968- )와 봉준호(1969- )는 대학 동문이다. 대학시절에 교분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포스트정치'란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김영하의 회고담.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고 한다: "'우연히'였다. 학창 시절,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무협지에 빗댄 우스갯소리를 하이텔에 올렸고, 이것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이텔에 올린 글이 하이텔에 참여했떤 여러 사람들에게회자되고 이것을 본 출판업자가 장편으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발표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협학생운동>(1992)이었다. 이후 '월간중앙' '뉴스메이커' 등에 당신의 정치현실을 빗댄 <거대한 뿌리> 등의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글들을 쓰면서 이와는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자의식이 생겼다." 그 '다른 글'이 자신이 주문받아서 썼던 '정치소설' 이후의 소설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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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물에 대해서 평하는 내용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얻어가요. 놀라운 영화랄까..;;

로쟈 2006-08-1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론가들의 지적대로 여백이 많은 영화인지라 백인백색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죠...
 

마이클 만의 신작 <마이애미 바이스>를 보기 위해서 며칠전에 그 전작인 <콜래트럴>(2004)를 보았다. '당신이 없는 사이에' 개봉/출시된 영화였는지라 이번에 그런 영화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히트> 계열의 영화들을 나는 좋아하는 편인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대도시의 공기'이다. 올 한국영화 <사생결단>이 포착하고자 했던 부산의 밤공기 같은 거 말이다. 공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마이클 만은 일가견이 있다(남성 캐릭터는 거기에 비하면 부차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뒷북이긴 하지만, 톰 크루즈가 드물게도 악역으로 나오는 영화 <콜래트럴>의 영화평을 두 편 옮겨놓는다.

 

 

 

 

 씨네21(04. 10. 12) 삭막한 도시의 밤에 찾아온 악몽

-택시를 하루 전세 내 밤새 도심을 돌겠다는 평범하지 않은 손님이 있다. 소금과 후추를 적당히 섞어 뿌린 듯한 회색빛 머리칼, 딱 달라붙는 고급 회색 슈트를 입은 이 정체불명의 사내는 빈센트(톰 크루즈)다. 이런 손님이라면 택시운전사 맥스(제이미 폭스)가 제격일 것이다. 노스스프링에서 유니온까지는 7분, 베니스까지는 3분. LA 시내 구간구간의 소요시간을 빠삭하게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10시간 안에 도심 다섯 군데를 돌며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강행군이라면 이런 프로페셔널 운전사를 골라야 한다.

-택시가 LA 야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심도 깊은 카메라로 잡아낸 이국적인 대도시의 밤풍경을 보라. 부감으로 잡아낸 풍경 속엔 밤하늘에 흩뿌린 듯한 빌딩의 노란 불빛과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는 야자수가 어울려 고즈넉함을 자아낸다. 여기에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 재즈로 편곡한 바흐의 가 넘실댄다.

-'G선상의 아리아'가 끝나자마자, 택시 위로 쿵 하고 둔중한 소리가 나는 동시에 앞 유리창이 깨지고, 근심없어 보이던 도심의 풍경화에 핏방울이 튄다. “넓기만 하고 삭막해서 정을 붙일 수 없는 도시”라는 빈센트의 투덜거림이 어쩐지 불길했다. 1700만명의 다인종 인구가 북적대는 도시, LA 여러 빛깔의 피부와 여러 다양한 냄새가 들끓는 이 대도시의 야경은 기시감을 안긴다.

-마이클 만의 1995년작 <히트>는 지하철 장면에서 시작, LAX공항에서 끝났다. 그는 9년 만에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와 LAX공항에서 문을 열고 지하철에서 문을 닫는다. 대로를 막고 벌어지는 경찰과 갱의 도심전으로 후끈거리는 도심의 열기를 전했던 그는 이번엔 600명의 엑스트라들이 발디딜 틈 없이 춤을 추는 나이트클럽에서 총격전을 펼친다. <히트>에서 정유소, 사막 같은 주차장, 컨테이너 기지, 격납고 등 황량하고 거친 LA 공간을 그릴 때 마이클 만은 도시의 화가이자 시인이었다. 콘크리트를 그대로 드러나게 한 알 파치노의 경찰서 내부와 로버트 드 니로의 짙은 푸른색 통유리집은 인물과 도시의 관계에 대해 마이클 만이 얼마나 날카로운 감식안의 소유자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 아니던가.

-오후 6시에서 이튿날 새벽 4시까지, 기사와 승객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숨막히는 긴장이 마이클 만이 담아낸 전부지만, LA 아스팔트 위로 심장을 헐떡이며 금방이라도 발톱을 들고 달려들 듯한 야수의 숨소리가 들린다. “당신에게 그 사람이 도대체 뭘 잘못했소.” “오늘 처음 봤어.”

-<히트> <인사이더> <알리>에서 펼친 마이클 만의 세계는 완벽주의 남성이 낭만적으로 패배하는 세계다. 지더라도 무릎 꿇지 않으며, 일에 관한 한 실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들 사이의 긴장은 이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첫 살인사건 뒤 택시운전사는 살인의 이유를 따지고(이렇게 대담할 수가), 살인자는 60억 인구 중 하나가 죽었을 뿐이며 르완다 종족 학살과 나가사키 원폭 피해로 죽은 사람의 운명과 다를 게 무어냐며 태연하게 대꾸한다.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비추는 카메라는 이야기에 팽팽한 장력을 더해준다. 마이클 만의 영화가 보여주는 진경은 한발도 비켜설 생각이 없는 두 남성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화해의 암시를 잡아낼 때다.

-성큼 40줄에 들어서 돌연 연쇄살인마로 나타난 톰 크루즈의 강렬한 인상은 1999년 <매그놀리아>에서 서슴없이 “Respect the Cock”이라며 남자들에게 여자낚는 법을 가르치는 섹스강사 프랭크 매키를 연상시킨다. <매그놀리아>에서처럼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에 겨워 더 센 척하지만 <콜래트럴>엔 아예 과거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솜씨, 한 호흡도 흔들리지 않고 후회하는 법도 없이 마무리하는 자세는 살인청부업을 기예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여기에 살인을 합리화하는 달변의 철학, 살인 뒤의 여유를 느끼기 위해 찾는 재즈바가 우리를 경악시킨다.

-아마 맥스는 <히트> 이후 등장한 마이클 만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편한 인상을 주는 사내일 것이다. 고된 노동이 그를 힘들게 할 때마다 선바이저(햇볕을 가리는 차양)에 끼워넣은 몰디브 사진을 보거나 벤츠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엄마에겐 태연히 리무진 회사 사장이라고 속이는 이 사내에게 뭐 대단한 게 있을 수 있을까. 빈센트는 난처한 수수께끼로 목을 조여오는 악마다. 그가 맥스에게 던지는 제안은 살인을 돕거나 아니면 죽거나다. 맥스는 어떻게 곤경을 벗어날 수 있을까. 또 빈센트는 어떻게 맥스를 협박해 자신의 임무를 완성할 것인가. 관객은 빈센트의 손아귀에 잡혀 끌려다닌다.

-<콜래트럴>은 마이클 만의 대중적인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600명의 한국인 엑스트라를 하루 12시간 동안 붙들고 찍은 나이트클럽 총격전의 생동감, 긴장과 이완이 꼼꼼하게 계산된 드라마에서 숙련된 장인의 기량이 배어나온다. 선명하게 잡은 도심의 야경은 서늘하기 그지없다. <히트>와 <인사이더>가 유장하게 풀어낸 대형 벽화라면 <콜래트럴>은 꽉 짜인 소품이다. 모자란 듯한 품을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이 매끄럽게 메운다. 기운 자국 하나없는 장인의 솜씨임은 분명하지만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 묵직한 존재감은 없다.(이종도 기자)

씨네21(04. 10. 26) 무력한 남성들에게 권함

-빈센트라는 이름의 이 킬러는 좀 이상하다. 하룻밤에 다섯 건의 청부살인을 해치우는 프로이며, 더구나 누더기를 걸쳐도 귀티를 숨길 수 없는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킬러라면 누구보다 빛나는 액션영웅이라야 마땅한데,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그의 능숙한 솜씨를 거의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실수하거나 자신의 일을 불운한 택시 기사 맥스에게 떠맡긴다. 대신 말이 좀 많다. 영화 속의 킬러치고 그만한 다변가는 드물 것이다.

-<콜래트럴>은 좀 이상한 액션영화다. 숨가빠야 할 액션장면은 종종 생략되거나 지체되며, 대화는 오래 지속된다. 미모의 여검사와 택시 기사 맥스의 첫 대화는 스릴러의 도입부로는 지나치게 길다. 빈센트가 뜬금없이 맥스의 어머니의 문병을 가서 주고받는 말들도 청부살인과 무관하다. 무엇보다 빈센트는 택시 안에서 맥스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는 건 대화만은 아니다. <콜래트럴>은 야경의 스릴러다. LA의 밤을 밑그림으로 빚어낸 그 야경은 액션보다 오래 지속되며 눈부시게 푸르다. 카메라가 빌딩 숲 사이를 배회하거나 밤거리를 질주하거나 하늘로 날아오를 때, 스크린에 펼쳐지는 블루 톤의 파노라마는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과 몸을 섞으며 우울을 감염시킨다.

-<콜래트럴>의 주인공은 멋진 킬러가 아니라 푸른 어둠이다. 빈센트는 그 어둠에 속한 악몽이다. 어둠이 내릴 때 찾아와서 어둠과 함께 시신이 되어 사라져간다. 밤새 몇 사람이 죽었고 곧 해가 뜰 것이다. 빈센트는 맥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르완다에선 하루에 3만 명이 죽어. 내가 여기서 몇 사람을 죽인들 당신이 왜 새삼스럽게 호들갑이야.” 해가 뜨면 세상은 어제처럼 돌아가고, 빈센트의 방문은 악몽으로 기억되겠지만, 그 악몽이 쉽게 지워지진 않을 것이다.

-<콜래트럴>의 감독은 마이클 만이다. 그는 <히트>에서 그랬듯이 액션 스릴러의 얼개로 이야기를 짜놓고 그 주변에서 서성인다. 서성이며 풍경과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명예율을 잃어가는 수컷의 속울음 같은 무겁고 처연한 풍경과 정서다. 마이클 만은 장르의 세계에서 작업하면서도 플롯의 독재를 거부하는 드문 감독이다. 그의 장르영화는 그래서 대개 남성 캐릭터 드라마로 나아간다.

-마이클 만은 또한 지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다. 그는 수컷의 명예율을 원시적 공격성과 가부장적 권위로 오인하지 않는다. 그의 주인공들은 휴머니즘의 구호가 소음이 된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을 지키는 것마저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전작 <알리>의 무하마드 알리조차 그랬다.

-육신의 보존에 실패하건 가까스로 성공하건 그의 영화는 그 불안의 심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하마드 알리가 거둔 최종적 성공은 힘겨운 자기 방어일 뿐이었다. <콜래트럴>의 킬러가 백인 남성의 우상 톰 크루즈이며 결국 그를 막아서는 택시 기사가 흑인이라는 건 정치적 올바름의 얄팍한 기술이 아니다. 장쾌한 액션을 원한다면 이 영화를 보지 않기를 권한다. 그러나 무력한 수컷으로서의 삶이 모멸스럽다면 이 영화와 함께 하룻밤을 맞기를 권한다. 다음날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 남자의 시신을 싣고 어둠 속으로 어둠과 함께 사라져가는 열차는 아무래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콜래트럴>은 그런 영화다.(허문영)

06.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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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8-17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콜래트럴 정말 좋아해요. 이게 그 후속작이란 말이죠. 필히 봐야겠군요!!

로쟈 2006-08-1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편이란 뜻은 아니구요, 히트-콜래트럴 계보를 잇는 영화라고 합니다...

nada 2006-08-17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애미 바이스랑 괴물이랑 놓고 막판까지 고민하다가 괴물을 봤어요. 지금까진 만사마라 자부하고 살아왔지만.. 마이애미 바이스가 로맨스 위주라는 리뷰에 흔들렸죠. 근데 로쟈님 페이퍼 보니까 후회되어요..

로쟈 2006-08-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동네에 <마이애미 바이스>가 아직 안 들어와서(이번주부터 합니다) <괴물>을 봤는데요.^^ 마이클 만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또 아주 싫어하더군요. 꽃양배추님의 취향에 맞추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