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송년회 자리에 가면서 읽은 건 '씨네21' 신년호(07. 01. 02)의 전영객잔 코너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랑페르> 읽기인데, 폴란드의 거장 키에슬로프스키(키에슬롭스키)의 유작 프로젝트를 보스니아의 젊은 감독 다니스 나토비치가 완성한 <랑페르>(=지옥)에 대한 불만과 비판, 그리고 먼저 떠난 거장에 대한 애도를 두루 포함하고 있는 아주 '핫'한 글이었다. '지옥은 천국에 다가갈수록 가까워진다'가 그 타이틀인데, 너무 긴 분량에다 아직 온라인에서 서비스되지 않는 글이라 대신에 이달 중순 같은 지면에 실린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작년과 비교하더라도 아주 '조용한' 세밑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지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 지옥 같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가 자주 '천국'이라고 착각하는 지옥에서부터...   

씨네21(06. 12. 13) 키에슬로프스키보다 호사스러운 지옥 <랑페르>

1996년 3월13일의 비극. 이날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심장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으로 키에슬로프스키가 친우 크지슈토프 피시비츠와 계획하고 있던 ‘천국-지옥-연옥’ 3부작은 완전히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가의 유산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난 2002년에 <천국>(Heaven)을 연출한 <롤라 런>의 톰 티크베어에 이어 두 번째로 거장의 봉인된 원고를 풀어젖힌 것은 <노맨스 랜드>의 의기양양한 보스니아 감독 다니스 타노비치다.

‘랑페르’(L’Enfer: 지옥)로 떨어진 주인공들은 세명의 자매다. 그들은 유년기에 겪은 무시무시한 사건 이후 교류도 없이 각자의 상처를 속으로 곰기며 살아간다. 잘나가는 사진작가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맏딸 소피(에마뉘엘 베아르)는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고 있으며, 남편의 뒤를 몰래 밟아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배신감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대학생인 막내 안느(마리 질랭)는 친구의 아빠이자 교수인 프레데릭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프레데릭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느를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에 이성을 잃어버린 안느는 금지된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둘째 셀린느의 삶은 가장 적막하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요양원에 있는 엄마(캐롤 부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그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상처를 되짚어내는 이는 세바스티앙(기욤 카네)이라는 미스터리한 젊은이로, 그는 셀린느에게 접근해 자신이야말로 지옥의 근원이었다고 폭로한다.

유년기의 기억은 여전히 자매들을 맴돈다. <랑페르>의 지옥은 영원히 반복되는 인류의 형벌이다. 주인공들은 그 속에서 과거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무시무시한 다람쥐 쳇바퀴에서 떨어져 살아가는 타인에게까지 똑같은 지옥을 안겨준다. 간통과 간음과 불신과 속임수는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다. <랑페르>는 세 자매의 지옥을 좀더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종종 그리스 신화의 여인 메데아를 인용한다. 동생까지 희생하며 남편인 이아손을 따랐던 메데아는 남편의 배신으로 분노한 나머지 복수를 위해 자식들을 죽였다.

<랑페르>의 어머니 역시 아비의 목숨을 끊었으나 그 고통을 이어가는 것은 자식인 세명의 자매들이다. 타노비치(그리고 두명의 크지슈토프)는 현세의 메데아들을 통해 인간의 오해와 복수심과 불신이 빚어낸 인간 마음속의 지옥을 들여다보며 관객에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메데아의 자식들이며, 그 비극의 핏줄은 인간이 실존하는 한 영원히 대를 이어 전해질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제언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는 이의 심장에 서리를 내린다. 형식적으로 <랑페르>는 조각조각 다른 색깔로 만들어진 퀼트와도 같다. 각각의 캐릭터를 넓은 보폭으로 뛰어넘으며 진행되던 이야기는 서서히 자매들의 관계를 가까이 가까이 이어붙이고, 발화점이 높은 인간들의 드라마와 관객의 숨을 죽이는 미스터리 구조는 농밀하게 짜여져 결말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물론 영화의 형식은 두명의 크지슈토프가 창조해낸 시나리오 속에 이미 완결되어 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유산을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면 거장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유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스 타노비치는 <랑페르>가 자신의 창조물이기보다는 키에슬로프스키를 향한 오마주임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다. 그는 주인공들에게 각각 레드, 블루, 그린의 색채를 입히고, (세 가지 색 3부작에 공히 등장하는) 병을 분리수거하는 할머니를 등장시킴으로써 대가를 향한 존경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타노비치가 자신만의 지장을 찍으려는 야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젊고 감각적인 붓터치다. <랑페르>의 스타일은 키에슬로프스키가 만들었음직한 지옥보다 훨씬 호사스럽다. 촬영감독 로랑 다리양(<타인의 취향> <아스테릭스2 :미션 클레오파트라>)은 현실보다 화려한 빛과 색채를 이용해 바로크 음악처럼 휘몰아치는 스토리를 시각화하는 재주를 보인다. 가끔은 시각적 과시가 지나친 나머지 노골적인 미장센으로 주제를 과시하는 프랑스 멜로영화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는데, 이를 내밀한 은유의 언어로 바꾸어주는 것은 네 주연배우의 공이다. 언제나처럼 지옥에 빠져 바스락거리는 영혼을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비추어내는 에마뉘엘 베아르는 상처입은 메데아의 모습 그대로이며, 마리 질랭, 카랭 비야, 특수분장에 힘입어 단호하고 냉정한 공기를 발산하는 캐롤 부케의 연기는 각각의 호연을 따라가기 힘에 부칠 지경이다. 세대를 뛰어넘는 프랑스 여배우들의 화음을 듣고자 하는 관객에게는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 이후 가장 기가 막힌 관현악이다.

<랑페르>는 언젠가 만들어질 <연옥>(Purgatory)을 위한 징검다리로도, 69년생 젊은 작가의 야심만만한 행보로도, 프랑스 여배우들의 내공을 발산하는 무대로서도, 충분한 값을 치를 만한 예술품이다. 물론 키에슬로프스키 팬들은 젊은 유럽 작가들의 ‘신곡 3부작’을 향한 오마주 난도질에 마뜩잖아 할 테지만, <랑페르>는 (티크베어의 <천국>이 그랬듯이) 키에슬로프스키의 무게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태초에 지고 태어난 영화다. “분명히 큐브릭 팬들은 싫어할 거야. 어쩌겠어.” 큐브릭의 오랜 지기였던 프로듀서 잔 할란이 스필버그에게 던진 충고는 타노비치에게도 유효할 것이다.(김도훈 기자) 

06. 12. 31.

 

 

 

 

P.S. 그러니까 이 '호사스러운' 지옥은 키에슬로프스키의 관객들에게라면 (정성일의 경우처럼) '충분한' 지옥일 수 있겠다("나는 <랑페르>라는 영화보다 원래의 시놉시스, 원래의 토픽, 내가 미처 볼 수 없었던 메모들, 만들지 않은 키에슬로프스키의 판본이 훨씬 흥미롭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대한 지지는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와 겹친다(거기에 약간의 틈새를 이루는 건 임권택에 대한 그의 열광적인 지지이다). 키에슬로프스키에 대해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는데, 아직도 갈길은 멀다. 올해 그에 관한 책들만 해도 서너 권을 더 구한 이유이다. 내년엔 보다 근사한 말들을 덧붙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욕심을 내자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 '씌어지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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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31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로프스키가 보여서 정신없이 클릭했어요! 랑페르 봐야겠네요.. 정성일도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혹시 키에슬롭스키 십계 보셨어요? 예전에 조금 봤고 또 보고픈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로쟈 2006-12-3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계>는 오래전에 봤습니다. 저도 소장하고 있진 않은데, 방법이야 구입하시거나 어디서(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다운받으시는 거겠지요...

수유 2007-01-01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랑페르를 못봣네요.. 이래저래 연말연시는 분주하기만 할뿐 실속은 없습니다. 이제 방학이고 하니 여유롭게 영화관 순례를 해야겠는데 날 기다려주질 않을 영화들일까봐 다소 걱정.

로쟈 2007-01-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이시다니 부럽습니다.^^ 더불어, 새해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분주하지만 실속도 챙기는 한해가 되시길!..

수유 2007-01-0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로쟈님도 만족스런 새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건필!!

도톰 2007-01-0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영상 재생툴중의 하나인 곰플레이어의 무료영화 코너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시리즈를 한 편씩 보여주더군요. 지금까지 3개가 걸렸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시리즈를 다 보여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료영화는 유료 영화로 바뀝니다.
http://searchgom.ipop.co.kr/cgi-bin/search_gom_movie.cgi?sub=1&whr=6100&key=%BD%CA%B0%E8

로쟈 2007-01-0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다 걸렸으면 좋겠네요...
 

퇴근길 전철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신작 <디파티드>에 대한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리뷰를 읽었다. 알다시피 홍콩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들에 대한 반론을 겸하고 있었다('비열함'을 내세운 영화에서 '비장함'을 찾지 말라는 것). 나로선 두 영화 모두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내주쯤에는 시간을 낼 수도 있을 듯하다. 더불어 생각난 것이 얼마전 2006 한국영화를 결산한 기사였다. 역시나 '조폭영화'가 올해도 대세였다는 것인데, 겸하여 읽어보면서 한해를 결산하기로 한다. 조폭영화의 원조인 홍콩/헐리우드 영화 두 편의 코드를 빌려서 말하자면, '무간도' 혹은 '디파티드'의 세상이 한국사회의 체감 현주소일까? 비장하거나 혹은 비열하거나...

 

 

 

 

경향신문(06. 12. 01) 2006 한국영화 ‘조폭’ 올해도 스크린 ‘접수’

2006년 한국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11월30일 ‘그해 여름’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아주 특별한 손님’이 개봉함으로써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편수가 101편에 이르렀다. 경향신문 영화팀이 이들 101편의 키워드를 분석, 집계한 결과 올해 한국영화는 ‘조폭’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키워드로 나타났다. ‘코믹’ ‘경찰’ ‘가족’ ‘살인’ 코드가 순서대로 그 뒤를 이어 ‘조폭·코미디’로 대표되는 충무로의 편식성이 통계로 확인됐다.(표 참조) 키워드 분석 결과가 우리 사회의 비루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사회 모순 비추는 조폭 코드=올해 한국영화 중 ‘조폭’이 등장한 작품은 ‘야수’ ‘짝패’ ‘투사부일체’ 등 23편. 조직폭력배는 등장하지 않지만 ‘학원폭력’ ‘싸움’ 등의 키워드를 내재한 ‘방과후 옥상’ ‘플라이 대디’ 등을 포함시키면 28편으로 늘어난다. 전체의 30%에 가까운 영화들에서 폭력배와 싸움이 등장한 것이다. 본격 누아르영화인 ‘사생결단’ 같은 작품뿐 아니라 실향민의 아픔을 소재로 한국사회의 폐쇄성을 묘사한 ‘비단구두’에도 조폭이 나왔다.

2위를 차지한 키워드는 19편에 걸쳐 나타난 ‘코믹’. 역시 ‘조폭코미디’ ‘학원코미디’로 구분되는 영화들이 다수였다(‘학교’ 키워드 14편으로 7위). 18편에 등장한 ‘경찰’과 15개 영화에 나온 ‘살인’ 키워드 역시 ‘조폭’과 맞물려 우위를 점했다. 이들 중에는 ‘비열한 거리’ ‘폭력써클’ 등 장르를 스스로 비틀면서 폭력을 반성하고 사회 불안을 성찰하려는 노력을 통해 한국누아르의 장르적 성장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도 여러편 포진해있다.

반면 2001년 ‘친구’와 ‘두사부일체’의 흥행 이후 그 소재만을 빌려 재생산하려는 상업적 시도도 계속됐다. ‘투사부일체’와 ‘가문의 부활’ 등 조폭코미디는 평단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세상을 들여다보는 수단으로 기능하든, 관객을 유인하기 위한 상업전략이든 한국영화들이 여전히 ‘조폭’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 없고 빈부차 심한 사회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채업자’와 ‘부동산개발’이 상징하는 것=이같은 현상은 올해 한국영화들의 내부로 들어가보면 더욱 선명하게 확인된다. 101편 중 ‘사채업자’가 주요인물로 등장한 영화가 10편(‘잔혹한 출근’ ‘예의없는 것들’ 등)이고 ‘부동산 개발’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영화가 6편(‘짝패’ ‘비열한 거리’ ‘해바라기’ 등)에 달한 것이 그 방증이다. 과거 영화속 조폭들이 영역 다툼, 업소관리 과정에서 암투를 벌이며 일반 시민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지하세계를 묘사하는 데 동원됐다면 최근 들어서는 채무에 시달리고 집값에 눈물 짓는 서민들의 삶을 헤집는 인물들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철거촌 주민들과 용역깡패의 충돌이 영화에 종종 등장했지만 최근 영화 속 부동산 문제는 막대한 개발이익을 둘러싼 잔혹한 이권다툼에 초점이 있다. 불황일수록 대출업이 호황을 누리고 평생 일해 벌어봐야 부동산투자 한번 제대로 하는 것에 못미친다는 현실의 상실감, 그리고 현 정부의 최대 골칫거리인 문제들이 시나리오에 반영되고 영화에 대한 관객의 공감대로 이어질 것으로 충무로는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을 반영하는 키워드들=이전에 보기 드물었던 ‘인터넷(커뮤니티)’(5편) ‘뮤지컬’(4편) ‘동성애’(4편) 코드가 늘어난 것도 흥미로운 현상으로 나타났다. 인터넷 자살 커뮤니티가 극의 발단이 되는 ‘무도리’,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아랑’, 인터넷 야설·야동을 사극에 편입시킨 ‘음란서생’ 등이 화제를 모았다.

동성애가 부담스럽지 않은 소재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를 직접적으로 다룬 ‘후회하지 않아’가 현재 흥행에 성공하고 있고 ‘천하장사 마돈나’ 등 퀴어 코드 영화도 호평받았다. 뮤지컬을 중심으로 한 쇼비즈니스가 한국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소재 삼은 영화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도 새로운 흐름이다.

박정희 정권기 중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집중한 시대배경의 영화가 ‘아이스케키’ ‘잘살아보세’ ‘길’ ‘그해 여름’ 등 4편으로, 80년대 등 다른 과거를 배경삼은 영화보다 많았던 점은 해석의 여지가 많지만 현재 정치적 상황과 무관치 않아보인다. 이밖에 ‘달콤, 살벌한 연인’ ‘내 청춘에게 고함’ 등 5편에 걸쳐 등장한 키워드 ‘어설픈 지식인’과 ‘괴물’ ‘모두들, 괜찮아요?’ 등에서 나타난 ‘백수’ 키워드도 같은 맥락에서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화일보(06. 12. 05) 오동진의 동시상영관 - 디파티드

마틴 스코세이지가 생애 처음으로 리메이크한 영화 ‘디파티드’를 두고 평단 일부에서는 원작이 되는 홍콩의 ‘무간도’ 시리즈와 비교하며 ‘주인공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연기가 양차오웨이의 눈빛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등의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좀 잘못된 비교라는 생각이 든다. 두 영화를 굳이 주연배우의 연기를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는 것도 수준이 좀 뭣하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작품은 아예 비교대상이 되는 영화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리메이크이기는 하지만 ‘디파티드’는 ‘무간도’ 시리즈와 다른 선상에 서있는 작품이다.

‘무간도’ 시리즈는 홍콩 누아르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작품인 만큼 한마디로 비정함과 비장함으로 가득차 있는 영화다. 갱단인 삼합회와 홍콩 경찰조직에서 각각 10년 넘게 언더커버로 살아가고 있는 두 남자 진영인(양차오웨이)과 유건명(유더화)을 중심으로 역시 이들의 존재를 각각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갱단 두목 한침(쩡즈웨이)과 경찰국장 황 국장(황추성)의 기묘한 심리전의 파노라마가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진영인, 유건명 두 남자 모두 오랜 세월을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극도의 혼란에 빠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과 통한의 사정을 감정적으로 교류하며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동일시의 관계로 빠져든다. 삼합회 두목과 경착국장은 이들의 정신적 아버지로서 모두의 비극을 조종하고 동참한다. 네 사람은 마치 각각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피할 수 없는 두 가문의 대결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비정도시’의 이미지를 스타일리시하게 펼쳐 놓았던 ‘무간도’ 시리즈에 비해 마틴 스코세이지의 ‘디파티드’는 비정함이나 비장함 같은 분위기는 거의 삭제해 버렸다. 대신 스코세이지는 자신이 지금껏 만들어 왔던 갱스터 영화들 -‘비열한 거리’나 ‘좋은 친구들’‘카지노’-의 특유함 그대로, 인물 모두에게 ‘비열함’을 가득 부여한다. ‘디파티드’의 모든 캐릭터들은 서로를 속고 속이며, 각자의 생존만을 유일한 목표로 살아가는, 비열한 거리의 비열한 인물들로 그려질 뿐이다. 삼합회에서 언더커버 생활을 하는 디캐프리오 역시 공황에 가까울 만큼 정신적 공포에 시달리는 캐릭터가 강조되는 쪽으로 묘사되고 있다. 경찰조직에 들어 간 갱단원 맷 데이먼의 비열함은 ‘무간도’의 유더화와 가장 확실한 차별성을 보인다.

디캐프리오를 사지로 내몬 경찰국장 마틴 쉰이나 맷 데이먼을 조종하는 조직의 두목 잭 니컬슨에게서 홍콩영화에서의 파더 피규어(아버지상)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절대 무리다. 한 사람은 상사로서의 카리스마를 잃고 우유부단하게 굴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수십년간 자식처럼 키운 인물을 스스럼없이 FBI에 넘기려고 할 정도다. ‘디파티드’에선 아버지와 아들 간, 혹은 적이지만 가장 가까운 남자 두 사람 간의 기묘한 우정 따위란, 그래서 더욱 비장하고 비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비열하고 남루한, 3류인생의 끝자락들만이 펼쳐질 뿐이다.



비장한 매력이 철철 넘치던 ‘무간도’에 비해 새로 만들어진 ‘디파티드’는 그 매력이 다소 반감됐을지언정 보다 현실의 삶에 가까워진 느낌을 준다. 실제로 우리들 삶의 방식은 비장함보다는 비겁함 쪽에 더 가까운 법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역시 그 점을 가장 많이 의식한 것처럼 보인다.

‘디파티드’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우리들 삶의 치졸함이 느껴진다. 새삼 이 세상이 비열한 거리로 가득 차 있음이 느껴진다. 그 더럽고 스산한 풍경이 오히려 옆에 앉은 사람에게 몸을 더 가깝게 붙이도록 만든다. 진정한 리메이크는 이런 것이다. ‘디파티드’를 ‘무간도’와 같으면서도 다른 영화라고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06.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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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2-0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동진 기자가 잘못 안 듯해요. <케이프 피어>는 62년 로버츠 미첨과 그레고리 팩이 나왔던 동명 흑백 영화의 리메이크판이라고 하네요.

로쟈 2006-12-06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억이 나네요. '생애 처음으로 리메이크한 홍콩영화'라고 해야겠네요.^^
 

엊그제 프랑스의 영화배우 필립 느와레(1930-2006)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에겐 <시네마천국>의 알프레도 아저씨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고 친숙한 배우. <일 포스티노>에서의 파블로 네루다 역도 그만의 배역이었다. 부고를 전하는 기사들중에 '알프레도 아저씨께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고 추모의 마음을 대신한다. 나이 들수록 장례식에 갈일이 많아진다더니 요즘은 부쩍 부고기사들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뉴스엔(06. 11. 24) '시네마천국’ 알프레도 아저씨께 부치는 편지

영화 '시네마천국'의 영사기사 알프레도 역의 명배우 필립 느와레가 24일 향년 78세를 일기로 세상과 이별했다. 외신들은 그의 타계를 추모 속에 타전했다(*위키피디아에는 23일이라고 나온다).



1930년 프랑스 노드빌레에서 태어나 1955년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그는 그로부터 정확히 33년 뒤 세계 영화사에 명작으로 남은 영화 '시네마 천국'을 탄생시켰다. 영화 속에서 소년 토토와 세대를 초월하는 우정을 나눈 그의 연기는 전 세계인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줬다. 이제 천국에서 잠들 '영원한 알프레도'에게 '영원한 소년 토토'가 가상의 추모 편지를 보냈다.

알프레도 아저씨!

벌써 30년이 지났어요.

아저씨가 영사기에 걸던 필름의 한 자락을 만지작러리던 시절, 잘려나간 필름을 보고 싶어 그렇게도 아저씨를 귀찮게 했던 시절.

제게 '고향에 절대 돌아와서는 안된다'고 하며 등을 떠밀어내시던 아저씨의 따스한 손길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온전히 남아 있는데, 결국 아저씨는 떠나셨습니다.

매일 같이 편집된 장면을 보여 달라고 졸랐던 제가 어느새 영화를 밥벌이로 삼은 영화감독이 됐다는 걸 믿으시겠어요?

아저씨!

30년 만에 찾은 고향인데 우리의 추억이 담긴 시네마천국은 그 흔적 조차 남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라진 극장의 추억은 아저씨와 제 가슴 속 저 밑바닥에 따스한 우정이 되어 지금, 제 눈 앞에 서 있어요.

영화가 추억의 자락을 그토록 길게 남길 수 있다는 걸 아저씨는 제게 가르쳐 주셨지요.

한 편의 영화에 인생사가 모두 담겨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영화보다 빠르네요.

아저씨가 저를 떠나보내실 때 해주신 말씀이 아직까지 생생한 거 아세요?

'사랑이 별거냐'고. '작은 땅 안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멀리 떠나 좋은 영화감독이 되라'던 그 말씀. 솔직히 그 때는 조금 아니, 많이 섭섭했어요.

아저씨로 인해 저는 추억을 알고 사랑을 배웠습니다.

아저씨가 제게 우정이 뭔지, 영화가 뭔지 또 인생이 뭔지 알게 해주셨듯 저도 영화를 통해 관객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려고요.

제게 가장 처음으로 영화라는 근사한 놀이감을 던져주신 아저씨를 기리며….

아저씨의 영원한 친구 토토 실바토레가. (고홍주 기자)

06. 11. 26.

 

 

 

 

P.S. 필립 느와레가 영화에 데뷔한 건 1955/1956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26살의 청년 느와레도 물론 있었던 것이다. 1976년과 1990년, 두 차례 세자르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니까 프랑스에서도 배우로서 입지를 굳힌 건 중년에 와서이다. 물론 그가 전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 <시네마천국>(1988/1989)과 <일포스티노>(1994) 덕분이었다. 이 두 영화를 빼고 내가 기억하는 느와레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파트리스 르콩트의 코미디 영화 <탱고>(1993). "바람기 심한 폴은 자신의 바람기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다는 상상으로 미칠 지경이 된다. 결국 판사인 삼촌 렐레강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렐레강은 몇 년 전 아내와 정부를 살해하고도 교묘하게 풀려난 뱅상을 협박, 폴의 아내 마리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함께 마리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아내를 죽이러가는 와중에도 폴은 자신의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를 기웃거린다."란 줄거리에서 렐레강 역할이 느와레의 몫이었다.

그리고 내가 극장에서 제일 처음 본 느와레의 영화 <마이 뉴 파트너>(1984). 프랑스판 <투캅스>인데, 안성기 역을 느와레가 맡았다고 보면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파리의 으슥한 밤거리. 귀가길에서 시민 주머니를 털어 도망가던 두 명의 도둑이 있다. 경찰의 추적에 몰린 이들은 순간적으로 꾀를 내어 한 명만 잡히기로 한다. 그러자 두 명 중 한 명이 자기 동료를 붙잡는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경찰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경찰인 르네는 천연덕스럽게 같이 강도를 하던 동료를 체포한다." 여기서 르네 역을 맡은 이가 느와레이다(영상기사 알프레도의 전직이 경찰이었던 것). 



"만년 말단 형사인 르네는 자신의 구역에 있는 상인들에게 비리를 미끼로 돈을 뜯어내는 '타락한' 경찰이다. 르네는 한마디로 직권 남용죄에 걸려도 여러번 걸린 형사. 지저분한 파리 교외에서 몸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용돈을 울궈낸다. 노름꾼에게 돈을 걸면 억지로라도 따게 되어 있고 안경 노점상에서 안경을 사면 오히려 더 얹어서 거슬러 준다. 레스토랑은 물론 꽁자. 그러던 어느날 경마에 단단히 미친 그는 현행범이 눈앞에 있는데도 잡기는 커녕 경찰 사이렌을 올리며 마감 직전에 경마장에 가서 마권을 사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감방에 보낸 동료 대신 경찰학교를 졸업한 젊은 형사 프랑소와가 파트너로 배치된다." 대략 <투캅스>의 '원조'가 되는 영화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공통점은 두 영화 모두에서 티에리 레르미트(1952- )가 느와레의 단짝으로 나오는 것. 레르미트는 프랑스 영화에 등장하는 빈도수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배우인데, 아마도 프랑스의 현역 남자배우 베스트5에 들어갈 만한 배우이다. 그의 영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로맨틱 커플>(1992). 원제는 '엉뚱한 사람'을 가리키는 <얼룩말>인데, 알렉상드르 자르댕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소설은 <아내처럼 멋진 드라마는 없다>(까치글방, 1994)로 번역돼 있다. 자르댕의 소설들은 역시나 소피 마르소 주연으로 영화화된 <팡팡>(문학사상사, 1990) 외에 몇 권 더 소개돼 있다. 나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들과 함께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 둘을 같은 카테고리의 작가로 분류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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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E 2006-11-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네마 천국의 OST 저는 요즘 매일 틀어놓고 있습니다. 질리지 않아요.

비연 2006-11-2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슬프네요....

nada 2006-11-26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우의 캐릭터로만 바이오그래피를 써 보는 것도 재밌겠는데요. 영상 기사의 전직이 경찰.^^

stella.K 2006-11-2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시네마 천국>은 참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가 있어서 더욱 빛나지 않았을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06-11-2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우라기보다는 아예 영화속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던 양반인데요 어느덧 나이들이 그리 되었네요...
 

밀린 일들 때문에 학교에 나오는 길에 이번주 '필름2.0'을 읽었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부음에 부쳐진('로버트 알트먼의 부음에 붙여'가 제목이다. '붙여'가 맞나?) 김영진 편집위원의 칼럼과 "브라운관에서보다 스크린에서 훨씬 매력적인" 배우 김지수씨의 인터뷰 등이 흥미로웠다(김위원의 칼럼은 내친 김에 옮겨놓으려고 했지만 온라인에는 아직 떠 있지 않다. 덧붙여, 김지수씨는 뒤늦게 데뷔한 스크린에서 경이로운 눈망울을 보여준다). 

개봉영화 리스트 가운데 특별히 눈길은 끈 영화는 로베르토 안도 감독의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 배우 다니엘 오테이유와 그레타 스카키(스카치?)의 이름이 일단은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데, '안나 무글라리스'라는 새로운 이름이 보태진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데미지>와 <비터문>을 뒤섞어놓은 거 같다. 좀 색다른 겨울의 시작을 이 영화와 함께할 수도 있을 듯하다. 흥미가 생긴 김에 관련기사와 이미지들을 찾아놓는다.  

세계일보(06. 11. 24)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 유혹과 반전의 하모니

30일 개봉을 앞둔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2004)은 오랜만에 만나는 프랑스의 서스펜스 영화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부적절한 관계. 소재는 마치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와 비슷하지만 영화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은 자극적인 불륜을 소재로 하고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영화의 특징.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 다니엘(다니엘 오떼이유)은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 카프리섬으로 가던 중 배 안에서 금발 미녀 밀라(안나 무글라리스)를 만난다. 다니엘은 그녀의 유혹에 이끌려 뜨거운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그런데 아들과 혼인서약을 하고 돌아서는 신부는 다름 아닌 밀라. 밀라는 이후 당혹스러워하는 다니엘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연극연출가 출신 로베르토 안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배우 다니엘 오떼이유와 샤넬 향수 모델로 유명한 안나 무글라리스가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출연, 위험한 사랑을 그려냈다. 딜레마에 빠진 다니엘 오떼이유의 깊은 내면 연기와 치명적인 팜므파탈로 변신한 안나 무글라리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 할리우드에서 주로 활동하며 ‘대통령의 연인들’ ‘레드 바이올린’ 등에서 열연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여배우 그레타 스카키의 출연도 반갑다. 그녀는 며느리와 남편과의 부적절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절망하는 다니엘의 부인 역을 맡았다.(홍동희 기자)

06. 11. 25.

 

 

 

 

P.S. 원제는 '욕망의 대가(代價)'쯤 될 거 같고, 일단은 세 배우의 연기 앙상불이 감상의 포인트이겠다. 다니엘 오테이유(1950- )는 물론 <마농의 샘>(1987)으로 국내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배우인데(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구애했던 여배우 엠마누엘 베아르와 동거하게 되며 둘 사이엔 딸이 하나 있다) , 이후에 여러 편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인상깊은 영화는 역시 엠마누엘 베아르와 같이 공연한 <겨울의 심장>(1993)이다. '겨울 이미지'가 가장 어울리는 배우인가?  

그리고 이 영화에서 '팜므 파탈' 역을 맡은 안나 무글라리스(1978- )는 인상이 낯익어서 찾아보니 영화 <노보>(2002)에 나왔던 배우이다. 등잔 밑에도 정말 많은 배우들이 숨어있다. 1998년 데뷔 이후에 현재 16편 이상의 영화를 찍었으니까 현재 상한가를 치고 있는 배우이다.

마지막으로 그레타 스카키(1960- ). '그레타 스카치'가 맞는 표기인 듯한데, 입에 더 자연스러운 건 '그레타 스카키'이다.

 

 

 

 

이미 많은 영화에 출연한 이탈리아 출신의 '중견' 여배우이지만, 내가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건 그녀가 '팜므 파탈'로 출연했던 <가면의 정사>(1991)나 <바다 냄새 나는 여인>(1992)이다. 갓 서른 무렵에 찍은 영화들이니까 여배우로서도 가장 미스테리하면서도 농염한 자태를 뽐낼 때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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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bahnstrasse 2006-11-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어에서 ch음이 i와 e 다음에 올 때는 '키'와 '케'가 된다네요.

로쟈 2006-11-27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렇다면 '스카키'로 읽어도 되겠네요. 영화잡지들에서 '스카치'로 읽길래 제가 뒤떨어진 건가란 생각이 들었지요...
 

미국 '반골' 영화의 대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세상을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최근에 읽은 영화잡지에서 그의 신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극장에 걸려있다는 소식까지 접했는데, 비록 적지 않은 나이이긴 하나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다. 더불어, 몇 가지 상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부고기사와 함께 그의 영화와 관련된 개인적인 '인연' 몇 가지를 적어둔다.  

한겨레(06. 11. 23) 미 독립영화계 거장 알트만 감독 별세

20일(현지시각) 미국 독립영화계의 거장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81살을 일기로 50년간의 영화 인생을 마감했다. 알트만 감독의 영화제작사인 ‘샌드캐슬 5 프로덕션스’는 알트만이 이날 로스앤젤레스의 세드라스 시나이 메디컬센터에서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한평생 비주류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작품상·감독상을 포함해 다섯 차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6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다.

1925년 2월20일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21살 때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잠시 배우로 활동하다 50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16mm영화를 제작해, 55년까지 60여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55년 만든 첫 극영화 ‘탈선자들’이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눈에 띄어 히치콕의 TV시리즈인 ‘앨프리드 히치콕 제공’의 몇몇 에피소드를 감독했다.



그는 1970년 한국 주둔 미 육군 야전병원을 무대로 삼은 블랙코미디 영화 ‘매쉬 (M.A.S.H)’로 작품성과 흥행성 두 마리를 잡는 데 성공한다(*이 블랙코미디가 알트만의 초기 대표작이라고 한다. 이전에 자료화면을 보니까 한국전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베트남 복장을 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탓에 우리에겐 다른 의미로 코믹한 영화이겠다).

그 뒤 ‘매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 ‘내슈빌'(1975) 등 헐리우드의 기존 문법과 다른 영화들로 명성을 얻으며 마틴 스콜세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등과 함께 70년대의 헐리우드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예술영화 전성시대가 끝나자, 알트만은 80년대 대부분을 16mm 영화를 찍거나 파리에 거주하면서 케이블 TV용 영화를 만들면서 보내다 92년 헐리우드를 풍자한 ‘플레이어’로 돌아왔다.(박현정 기자)

경향신문(06. 11. 23) 美 인디영화 거장 로버트 알트만 별세

미국 인디영화계의 대부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20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알트만의 영화제작사인 샌드캐슬5 프로덕션스는 21일 알트만이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알트만이 10년전 심장이식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와 관련된 질병으로 추정된다.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난 알트만은 1970년대 미국 영화계의 총아였다. 이 시기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등이 한꺼번에 등장해 이전 세대에서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쏟아낸 때였다. 알트만은 한국전쟁을 풍자적으로 다룬 ‘매쉬’(70), 뒤틀린 뮤지컬 영화 ‘내슈빌’(75) 등으로 기존 할리우드와는 완전히 다른 문법의 영화를 선보였다.


 

 

 


그러나 타협을 모르는 알트만에게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의 블록버스터가 득세했던 80년대는 시련의 시기였다. 이후 알트만은 할리우드의 상업적인 제작환경을 풍자한 ‘플레이어’(92)로 화려한 재기를 알렸고(*내가 극장에서 제일 처음 본 알트만의 영화도 팀 로빈스 주연의 <플레이어>였다), ‘숏 컷’(93) ‘고스포드 파크’(2001) 등의 걸작을 공개하며 여전한 창조력을 과시했다.

알트만은 수많은 배우들이 나와 중첩된 내러티브를 이끌며 자연스러운 즉흥연기를 보여주는 이른바 ‘알트만 스타일’의 영화를 창조했다. 감독 이름이 하나의 스타일로 불리는 건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공인된 거장에게나 가능한 일이다(*그러한 알트만 스타일의 최고 걸작이 <숏컷>이다).



알트만은 영원한 반골이었다. 그는 “펄럭이는 미국 국기를 보면 농담 같다고 느낀다” “텔레비전이 예술매체라 믿는 건 미친 짓이다. 그건 광고 매체다”라고 말했다. 은퇴 계획에 대해 “은퇴라구? 죽음 말인가?”라고 말하던 알트만은 사망 당시에도 내년 2월 촬영할 신작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이제 그 신작의 시사회는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 열릴 듯하다).(백승찬 기자)

06. 11. 22-23.

P.S. 내가 본 알트만의 영화들은 주로 <플레이어> 이후 국내에 소개된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숏컷>(1993)과 <패션쇼>(1994)이다(<패션쇼>의 원제는 <프레타포르테>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영화가 같은 시기에 개봉됐었다는 사실인데, 나는 두 영화를 같은 날 연이어 본 기억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종로쪽에서 상영했었고 나는 그날 알트만의 걸작과 졸작을 동시에 보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게 나만의 판단은 아니어서 일반적으로 <숏컷>이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반면에(이미지는 <숏컷>의 제니퍼 제이슨 리) <패션쇼>는 최악의 작품으로 거명된다(게다가 <패션쇼>는 마지막 장면(누드 패션쇼)에서 화면 가리개까지 둥둥 떠다녔는지라 불쾌한 감상을 안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러시아에서야 이 영화의 노컷판을 구했다). 

모두 33편의 장편 극영화 필모그라피 가운데(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전체 필모그라피는 39편에 이른다), <플레이어>(1992) 이후에 알트만이 찍은 영화는 모두 10편이고 그 중에서 나는 5편을 보았다. 아직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듯한 <컴퍼니>는 러시아에서 본 영화이다. 어쨌거나 이젠 그의 영화들 모두가 '회고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의 필모그라피를 거꾸로 되짚어가며 <제임스 딘 스토리>(1957)에까지 이르는 '로버트 알트만 스토리'의 여정을 감행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이겠다 싶다(소개되지 않은 영화가 너무 많지만 여하튼 내년은 장편으로만 치자면 데뷔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가끔씩 드는 생각이지만, 인생은 한 사람을 추억/기념하는 일만으로도 너무 짧다!..

1. 프래리 홈 컴패니언 (A Prairie Home Companion, 2006)

2. 더 컴퍼니 (The Company, 2003)

3. 고스포드 파크 (Gosford Park, 2001)

4. 닥터 T (Dr. T And The Women, 2000)

5. 쿠키의 행운 (Cookie's Fortune, 1999)

6. 진저브레드 맨 (The Gingerbread Man, 1998)

7. 캔사스 시티 (Kansas City, 1996)

8. 패션쇼 (Prêt-à-Porter, 1994)

9. 숏컷 (Short Cuts, 1993)

10. 플레이어 (The Player, 1992)

.

.

.

33. 제임스 딘 스토리 (The James Dean Story, 1957)

P.S.2. 잘 알려진 것이지만 알트만의 <숏컷>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들을 묶어서 영화화한 것이다. 참고가 될 만한 자료(씨네21, 05. 03. 22)를 옮겨놓는다.

단편집 <너무나 많은 물이 집가까이에>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 <이웃사람> <목욕> 등 9편 레이먼드 카버 지음
영화 <숏컷> 로버트 알트먼 감독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에선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친구와 잠깐 드라이브를 하고, 언제나처럼 낚시 여행을 떠나고, 이웃에 사는 부부와 저녁을 먹을 뿐이다. 그런데도 파국은 천연덕스럽게 찾아온다. 작은 실수, 미세한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이닥쳐 사막처럼 막막해진 인생을 뒤로하고 떠나버린다. 로버트 알트먼은 때로는 몇 시간에 불과한 드라마를 담고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을 비행기 안에서 읽고 ‘레이먼드 카버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플레이어>의 성공 덕분에 알크먼은 아홉개의 단편을 골라내어 가늘지만 탄탄한 실로 꿰매었다.

 

 

 

 

<숏컷>에서 비교적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는 <너무나 많은 물이 집가까이에>에 바탕을 둔 것이다. 클레어는 남편 스튜어트와 세 친구가 산속 계곡으로 낚시 여행을 갔다가 알몸으로 물속에 버려진 젊은 여자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듣는다. 그들은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돌아가려면 너무 멀고 여행 첫날이라는 핑계를 들어 시체를 곁에 둔 채 낚시를 한다. 그 물로 그릇을 씻고 커피를 끓인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무너져내린 클레어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감상적인 에피소드는 <목욕>. 스코티는 여덟 살이 되는 생일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털고 일어난 스코티는 그날 오후 혼수상태에 빠지고 깨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 사이 주문받은 생일케이크를 완성한 제빵사는 집요하게 스코티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케이크를 찾아가라고 독촉한다. 알트먼은 아홉 단위로 이루어진 인물들을 서로의 에피소드에 스쳐가게 만들거나 서로 관계를 맺어주었다. 카버의 소설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긴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좀더 감정이 많고 좀더 설명이 많다. 카버처럼 망연하게 내버려두진 않는다. 그럼에도 황무지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건 알트먼이 카버와는 다른 방식으로 카버의 정수에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P.S.3. 알트만에 관한 책으론 올해 나온 <알트만이 말하는 알트만(Altman on Altman)>(Faber & Faber, 2006)과 <로버트 알트만 인터뷰(Robert Altman: Interviews)>(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2000) 등이 있다. 두껍지 않은 책들이기에 소개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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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3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트만 감독은 처음 뵙는 분입니다.
로쟈님 덕분에 견문을 넓힙니다. 고맙습니다. 로쟈님.


로쟈 2006-11-23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 알트만은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놓칠 수 없는 감독 중의 한 사람입니다...

어부 2006-11-23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네요.. 전 <내쉬빌>을 그의 스타일의 최고로 꼽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스트우드보다는 오래 버텨주길 바랬는데..-_ㅜ

로쟈 2006-11-2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알트만은 사실 몇 편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걸작과 졸작이 같이 들어 있다는 것 정도로 위안을 삼는 편이죠...

로쟈 2006-11-2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TV시리즈로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모두 알트만이 찍은 줄 알았습니다). 앞으로 종종 코멘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서재가 좀 '조용한' 편이어서 말이 없는 제가 꽤나 떠드는 사람으로 오해를 사고 있거든요.^^ 좀 진정이 되시면 알트만에 관한 '뒷얘기'도 나누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