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이번주 '필름2.0'에서 <송길한 시나리오 선집>(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출간 기념 특별상영회에 관한 화보기사를 읽었는데, 생각난 김에 지난달 중순에 게재된 김영진 편집위원의 칼럼을 옮겨놓도록 한다. '송길한'이란 이름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두루 본 관객이라면 기억에 남았을 법하다. 알라딘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흑조(黑潮)>가 당선된 이후 전업 작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약> <마루치 아라치> <둘도 없는 너> <낯선 곳에서 하룻밤> <짝코> <만다라> <우상의 눈물> <나비 품에서 울었다> <삐에로와 국화> <불의 딸> <안개마을> <비구니> <길소뜸> <티켓> <씨받이> <아메리카 아메리카> <불의 나라><명자 아키코 소냐> <동행>(MBC특집드라마 1, 2부) <아낌 없이 주련다>(종군위안부 노부코) <서울 만신> 등 90여 편의 작품을 집필했다. <짝코> <만다라> <불의 딱> <티켓>으로는 대종상 각본상을, <만다라> <길소뜸>으로 한국연극영화상(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길소뜸>으로 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시나리오상, <씨받이>로 작가협회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권과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서 시나리오 창작을 가르치고 있으며 전주국제영화제 고문과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시나리오 선집 <비구니>와 장편소설 <명자 아키코 소냐> 등의 저서가 있다.

무려 90여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니까 내가 본 영화들의 상당수가 거기에 포함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다. 거의 70-80년대 한국영화를 쥐락펴락하신 게 아닌가 싶다. 이만하면 '장인'이다. 송 작가처럼 자신의 인장을 영화에 새겨넣을 수 있는 후배 작가들이 앞으로 더 많이 눈에 띄었으면 좋겠다.  

송길한 작가 <짝코> 상영회

좌권택 우희라.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송길한 작가를 가운데 두고 <짝코>의 주인공들이 다시 한자리에서 만났다. 지난 19일 서울 서초동 한국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는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의 시나리오 선집 출간을 기념하는 <짝코> 특별상영회(주최 영상자료원, 커뮤니케이션북스)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짝코> 외에도 송길한 작가의 <티켓>을 촬영한 구중모 촬영감독, <짝코>에서 짝코를 쫓는 또 다른 주인공 최윤석, 송길한 작가의 <길소뜸> <만다라> 등을 촬영한 정일성 촬영감독, 배우 안성기, 지상학 작가, 김홍준 감독, 변영주 감독, 조선희 영상자료원장 등도 참석해 한 노작가의 소중한 선집에 박수를 보냈다. 임권택 감독은 “송길한 작가와 함께하면서 내 작품들이 중요한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주성철 기자)

 

 

 

 

 

 

 

 

 

필름2.0(07. 01. 18)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

송길한 시나리오 선집을 단숨에 읽었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시나리오 선집에는 <짝코> <길소뜸> <만다라> 등 주로 임권택 감독과 함께 작업한 그의 대표작들과 1980년대 중반 불교계의 반발로 제작 중지된 <비구니>, 그리고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용으로 쓴 <반란> 등의 미발표 신작이 실려 있다.

사춘기 시절에 본 뭔가 예술적 향기가 있는 한국영화라면 대개 송길한의 각본이었다는 추억을 환기하면서 역사, 구원, 욕망, 분단, 윤리 등 거창한 테마를 갖고 있는 그의 각본에 그토록 인간적인 숨결이 스며 있는가를 보며 새삼 놀랐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현대적 일상과는 거리가 멀며 그 세대의 역사적 상처를 깊이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을 역사책의 딱딱한 글귀 속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이웃으로 보여주는 게 그의 저력이었다. 깊은 맛이 있는 된장찌개를 먹는데 가끔 그 손맛의 주인이 겪은 신산스런 삶이 생각나서 울컥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한 여운을 그의 작품은 준다. 책상에서 머리로만 쓴 게 아니라 동시대 삶의 상처의 흔적을 몸으로 껴안고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그런 글이다.

송길한이 한창 활동한 1970년대와 80년대는 한국영화의 암흑기였다. 1970년대 그는 영화사의 주문에 따라 글을 쓰며 자기 재능을 탕진하고 있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당시 영화는 대중문화의 천덕꾸러기였다. 1980년대에 그는 다부지게 자기가 쓰고 싶은 소재에 매달렸는데 <짝코>와 <만다라>는 그의 작품세계의 일종의 분수령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대표작 <짝코>를 극장에서 본 대중은 극히 적었다. 우수 반공영화로 정부로부터 두 차례나 표창 받은 이 영화를 송길한과 임권택은 반공이 아니라 분단의 상처에 관한 것으로 찍었다. 그런데도 당시 그걸 알아주던 눈 밝은 시선은 많지 않았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시대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외형적으로 한국 영화산업이 꽤 성장했지만 송길한의 각본은 이제 영화화되지 않는다. 이런 재능은 길이 기억되고 또 오늘에 되살릴 의무가 후배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송길한은 왜 요즘 활동하지 않는 것일까. 그의 재능이 낡아서일까. 시대가 변했기 때문일까. 그가 굳이 스크린에 불러오려는 여순반란사건과 같은 <반란>의 소재를 요즘 대중은 원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그와 동시대의 감독들이 이제 현장에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임권택도 이제는 송길한과 함께 작업하지 않는다. 이런 게 시나리오 작가의 비애라면 비애다. 파트너십이 작가의 명줄을 좌우하는 것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늘 함께 작업하는 토니노 게라와 같은 작가의 존재가 충무로에선 허락되지 않는다. 송길한의 시나리오 선집을 읽으며 그게 안타까웠다.

송길한의 불행이라면 그에게 근기가 있었을 때 시대는 너무 옹졸하고 가혹했다는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시대는 곧 누구든 해야 할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았던 시대의 무능과도 통한다. 이 시나리오 선집을 읽으며 가장 통절했던 것은 역사상 가장 굵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았던 송길한의 세대가 아직 하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이 왕성했던 시기를 군사독재정권의 검열이 지속되던 수십 년 동안 보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인터뷰에서 송길한이 대수로울 것도 없이 회고하는 검열에 관한 한 에피소드는 너무 징그러워서 정떨어지는 그 시절의 강압을 드러낸다.

강원도 속초를 무대로 몸을 파는 다방 레지들의 삶을 그린 임권택 감독의 <티켓>(1986)이란 영화는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검열에서 고초를 겪었고 그 개별사례는 희극적이다. “<티켓>의 타이틀을 외래어라고 못 쓰게 한 겁니다. 그래서 가서 그랬어요. 그럼 ‘잉크’는 어떻게 해야 되냐고. 올림픽 티켓을 땄다, 무슨 티켓 하지 않느냐, 근데 왜 티켓이 외래어라고 안 되냐고 들이받은 거죠…. 그래서 제목을 ‘분홍티켓’이라고 바꿔 갔어요. 검열관들 반응을 보려고. 분홍티켓이라니까 그들도 어처구니없어 하며 아주 인심 쓰듯이, ‘그냥 쓰세요. 쓰는데 영화 맨 앞에다 자막이나 하나 넣으세요.’ 그래서 자막이 들어가게 된 거에요. 조셉 콘래드의 말, ‘인생은 한 장의 담배종이에 한 마디로 요약된다. 태어나고, 고뇌하고, 그리고 죽는다. 그러나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 말에서 담배종이를 티켓으로 바꿔 자막을 붙였죠. 그랬더니 그들도 만족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걸었는데 검열관들이 자막이 있는지 없는지 한 일주일 동안 극장에서 확인하고 갔어요. 그래서 말했죠. 내가 큰 실수를 했다. 확인해보니까 티켓이 아니라 담배종이더라. 자막을 계속 붙이면 그쪽이나 우리나 쪽팔릴 텐데 괜찮겠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자막 떼어내라고 하더라고요. 코미디죠. 완전 코미디. 러닝타임 112분에 달하는 원판은 반사회적 영화로 찍혀 12분이나 가위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죠. 게다가 대사 중에 티켓이란 말은 모조리 삭제당하고 화면도 여기저기 단축돼 그야말로 난도질이나 다름없었어요.”



시나리오 선집 말미에 실린 변재란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최고작으로 꼽힐 만한 <만다라>는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쓴 시나리오다. 영화의 배경이 겨울이라 눈이 녹기 전에 원고가 나와야 했다는 것이다. 충무로 작가들이 가는 허름한 여관에서 그는 만 4일 동안 1분도 자지 않고 각본을 썼다. 조감독이 여관과 영화사를 오가며 송길한이 원고를 쓰는 대로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4일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써낸 이 비상한 집중력의 산물이 <만다라>라는 것이다.

송길한의 작품은 <짝코>나 <길소뜸> 등 분단과 같은 거대한 역사적 상흔을 소재로 한 것이나 <만다라>와 <비구니>에서처럼 불가적 구원이라는 큰 관념과 대결하는 소재와 만났을 때도 사람 사는 속내를 보여주는 찰진 친밀감을 준다. 그렇게 쓴 작품 대다수가 종종 허름한 여관방에서 단기간에 써내려간 결과물이라는 건 그의 평소 삶이 얼마나 촘촘한 경험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이번 시나리오 선집에 실린 <반란>이라는 작품을 쓰기 위해 송길한은 햇수로 만 2년, 만 1년여 동안을 여수에서 살다시피 했다. “간접적으로 루머로 들었던 사람들도 생존자로 포함시키고 취재를 했어요. 근데 거기 여수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목매 죽은 석천사 뒤 소나무가 있어요. 내가 글 쓰는 방이 석천사 그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객실인데 거기서 혼자 앉아 밤새워 글을 썼거든요, 근데 늦가을부터 막 바람 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하니까 망자들이 살아 나타날 것 같더라고요, 섬뜩섬뜩했었지요.”

그가 동시대에 겪은 역사적 비극을 다시 스크린에 불러오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시 그 시절을 살아보려는 노력이 뒤따른다. 그건 만만치 않은 작업이어서 오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송길한의 회고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송길한에게 작업을 의뢰하면서 늘 ‘어이, 이번에 한번 또 죽어볼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에 한번 써볼 거야?’라는 말과 전혀 다른 그 필사적인 어감에서 이 세대에게 절실했던 체험의 육화라는 고전적인 글쓰기 형태를 떠올리게 된다.

송길한의 시나리오는 손목을 놀려 쓴 게 아니다. 관객을 의식하며 쓴 게 아니다. 그가 보는 인생과 사람에 대해 쓴 것이다. 그건 재능 이상의 문제다. 그가 체험한 동시대의 곡절을 그의 마음과 손을 빌려 옮기는 것이다. <만다라>를 찍을 때 그는 헌팅을 위해 호남 일대를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 돌아다니면서 식당 같은 곳에서 대통령이 된 전두환 장군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치를 떨곤 했다. 겨울공화국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만다라>의 첫 장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가 군인들의 검문을 받고 자기 신분을 증명할 길 없는 지산 스님이 타박을 받는 스산하고 살벌한 풍경은 그런 공기에서 나온 것이다.

1970년대 내내 영화사로부터 의뢰받은 싸구려 영화의 각본을 썼던 송길한은 시나리오 작가 그만 한다는 각오로 자기 작품을 쓴다는 의지를 세웠고 마침 경력의 분기점을 맞았던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그들의 첫 걸작인 <짝코>는 빨치산 망실공비와 그를 쫓는 지리산 토벌대 경찰의 평생에 걸친 추적극인데 그들은 자기 삶이 다 망가진 상태에서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쫓고 쫓긴다. 그들은 왜, 라는 질문을 죽기 직전에야 던진다. 잦은 플래시백으로 두 인물의 삶을 응축해 달려가는 이 영화의 각본은 기법적으로 우수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야기에 남한의 역사를 비유적으로 등치시키는 기적을 이뤄낸다.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아직 이만한 무게를 지닌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송길한의 시나리오 선집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이력이 현재진행형이 될 수는 없는가를 생각했다. <반란>과 같은 그의 신작은 다큐멘터리를 위해 쓰인 것이라고 하지만 너무 설명적이고 나열형이다. 여기에 픽션이 가미돼야 하는데 송길한은 충분히 가미될 수 있다고 책의 말미에 실린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건 한 대가급 시나리오 작가의 명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너무 할 말이 많았지만 말할 수 없었던, 아직 말할 게 많이 남아 있는 그 세대의 작업에 대해 우리가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라는 자책을 갖게 한다. 그가 계속 건필하고 한국영화계에서도 그의 작업을 끌어안는 그런 상황이 왔으면 좋겠다.(김영진 편집위원)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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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의 최신 화제작 <아포칼립토>(2006)를 봤다. 기독교의 기원이자 '유대문명 잔혹사'라 할 만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에 이어서 '마야문명 잔혹사'를 다룬 <아포칼립토>는 살육의 피로 흥건하다. 마야의 희생제의에서 살아있는 제물의 심장을 꺼내고 목을 치는 장면 등은 심약한 관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하다(바타이유라면 흥분했을 듯하지만). 특이한 건 고대 히브리어, 아람어 등이 사용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마찬가지로 <아포칼립토> 또한 대사는 마야어로 처리되고 있다는 점(비록 아카데미상 후보에 들지 못했지만 두 영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쪽으로 분류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멜 깁슨의 고집과 야심이 읽힌다(그는 각본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원인을 문명(과 종족) 내부에서 찾고 있다는 점. 멜 깁슨의 철학, 혹은 인류학인가?

영화 자체는 호오가 갈리고 있는데, 역사학자와 고고학자 들이 이 영화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불만스러워한다는 기사들도 눈에 띈다. 야생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화면이 그런 약점을 카바해줄 수 있을까. 알라디너라면 마야문명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어볼 생각을 하는 것으로 영화감상을 대신해도 무방하겠다. 아래는 이 영화의 스펙터클에 담겨있는 은근한 '백인우월주의'를 의심하는 리뷰기사이다(영화잡지들의 리뷰기사는 내주판들에 실릴 듯하다). 

경향신문(07. 01. 25) 멜 깁슨 감독의 ‘아포칼립토’… 백인우월주의 의심하다

미국의 생리학자이자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문명의 붕괴’(2004)에서 마야문명의 붕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문화적으로 발달한 창의적인 사회도 붕괴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마야에서 얻을 수 있다는 그는 문명이 붕괴되는 요인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하고 마야문명은 이 중 4가지를 충족시킨다고 지적했다. 삼림을 해친 데 따른 ‘환경파괴’, 장기간 지속된 가뭄이라는 ‘기후변화’, 부족간 분쟁이 이어진 ‘적대적 이웃’, 지배세력이 경쟁적으로 전쟁에 매달리고 기념물 건립에만 몰두한 데 따른 ‘사회 구성원의 반응’이 그것이다. ‘우호적인 교역상대의 지원이 줄거나 중단된 경우’만 제외하고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겐 낭만적인 관광지로만 인식돼온 수백년 전 마야문명에 대한 분석이지만, 4가지 모두 옛날이야기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자원의 부족-삼림(환경) 파괴-이로 인한 가뭄(기상이변)-이에 대한 일시적 해결책인 전쟁(분쟁) 빈발의 악순환으로 마야문명의 붕괴 과정을 들여다보는 저자의 걱정은 21세기 인류문명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로 논란의 칼끝에 섰던 배우출신 감독 멜 깁슨은 마야문명의 붕괴 직전을 배경으로 한 신작 ‘아포칼립토’로 다시 한번 첨예한 논쟁을 촉발시킨다. 인류 역사상 야생과 문명이 가장 강렬하게 충돌했던 곳 중 한군데로 관객을 이끈 영화는 지나칠 만큼 사실적으로 당대의 야만을 재현한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벽화와 문헌 등을 통해 재구성한 마야문명의 잔혹사는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저서 ‘살육의 문명’(2002)에 따르면(*<살육과 문명>이다) 당시 이 지역 지배세력들은 “포로들을 제단 위 돌에 눕히고 돌칼로 가슴을 갈라 고동치는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친 다음 시신을 계단 아래로 걷어찼다.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살자들은 포로들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얼굴 가죽을 벗겼다.” ‘아포칼립토’는 마야문명 지배세력의 이같은 제사 장면을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이어 사지에서 겨우 빠져나온 주인공이 목이 잘려나간 시체들의 밭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에 이르면, 아무리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하더라도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가 이래도 되는지 싶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이와 비슷한 ‘시체들의 밭’을 현대의 내전 소재 영화들에서 종종 본 적이 있다. 냉전시대 캄보디아 내전을 그린 ‘킬링 필드’(1984)부터 보스니아 내전이 배경인 오락영화 ‘에너미 라인스’(2001), 최근 르완다 내전을 다룬 ‘호텔 르완다’(2006) 등 인종(사상)을 청소하며 자행된 무차별 학살이 이런 참혹한 광경을 낳았고 또 영화에 재현됐다. 가장 야만적인 사태는 한 사회 내의 ‘적대적 이웃’에서 비롯되며, 이를 고발 혹은 상품화하려는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이전에 내부로부터 붕괴된다”는 미국 역사학자 윌 듀런트의 말로 운을 떼는 영화 ‘아포칼립토’는 그런 점에서 화면상 잔혹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듯 보인다(*듀란트의 <역사의 교훈>(범우사, 1989)은 품절됐다). 논쟁은 여기서부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스페인의 아스텍·마야 문명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서구·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미국 언론과 평자들 사이에서 뜨겁게 일고 있는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데이는 저서 ‘정복의 법칙’(2006)을 통해 피지배인들의 이질적인 문화를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지배를 합리화하는 서구 침략의 역사를 비판한다. 중남미를 지배한 스페인 역시 현지인들의 제사 문화를 들먹이며 ‘야만을 문명화한다’고 주장했지만 데이비드 데이는 서구인들의 야만성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백인들이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수순을 밟아가는지를 살폈다.



‘아포칼립토’는 극중 제사를 관장하는 지배세력이 선민사상(選民思想)을 내세우며 다른 부족민을 권력 유지의 희생양으로 삼는 실상을 고발한다. 이것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침략자·독재자의 정복 논리이기도 하다는 풍자인지, 아니면 마야문명만을 대상으로 ‘미개인들의 말세’를 그린 것인지에 대해 영화는 똑부러진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극 종반부 스페인 에르난 코르테스의 무적함대로 보이는 백인들이 부자연스러우리만치 멋진 자세로 상륙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멜 깁슨 감독에 대한 의심은 짙어진다.

아름답고 양심 어린 영화로 국내에서 과대평가된 롤랑 조페의 영화들-‘킬링 필드’(1984), ‘미션’(1986), ‘시티오브조이’(1992)-처럼, 야생과 문명의 충돌을 다룬 영화들을 보는 관객은 소수의 백인이 의로운 일을 이끌고 다수 현지 유색인종들은 계몽과 개화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인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꼼꼼히 뜯어보며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마야문명 속 선량한 부족의 한 청년이 호전적인 종족의 살육에 맞서 쫓고 쫓기며 가족을 지키는 이야기인 ‘아포칼립토’는 2월1일 개봉한다.(송형국 기자) 

07. 01. 27.

 

 

 

 

P.S. 찾아보니 국내 출간돼 있는 마야문명 관련서들이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개 품절된 책들이다. 가장 두꺼운 책은 존 핸더슨의 <마야문명>(기린원, 1999)이지만 이 또한 품절 상태다. 나로선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나 참조해봐야 할 듯하다.

P.S.2. 젊은 세대들에게 '잔혹사'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해줄 영화는 유하의 <말죽거리 잔혹사>(2004)이겠다. 잔혹사라고 해봐야 몇 대 때리고 맞는 정도이지만 젊은 치기에는 '잔혹사'라 불러봄 직하다(물론 영화의 배경은 70년대 말이니까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겐 <친구>와 마찬가지로 '사극'이라 할 만하다).

점잖은 세대인 내게 '잔혹사'를 각인시켜준 영화는 기억에 '이조 여인 잔혹사'란 부제를 달았던 이두용 감독의 <물레야 물레야>(1983)이다. "양가의 규수이나 집안이 가난한 길례는 세도가인 김진사댁의 망자와 혼례하여 청상과부 노릇을 하는데, 한생에게 겁간을 당하고 그것이 발각되나 시아버지의 관용으로 접포 표식을 달고 도망하게 된다. 길례는 채진사댁 머슴 윤보를 처음 만나 종이 된다. 하지만 이후 윤보는 자신의 가문이 복권된 것을 알고 길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고, 길례는 윤부자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나 아이가 없어 윤보는 첩을 들이는데 결국 윤보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길례에게 씨내림을 강요한다. 길례는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 은장도를 받은 길례는 목을 매고 자살을 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한국영화 최초로 칸느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던 이 영화는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였던 원미경의 청순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곧 그녀는 <변강쇠>(1986)에서 농염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여인들의 잔혹사'로 관통하기는 군부정권 치하였던 지난 80년대 한국영화의 책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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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7-01-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3번쯤 죽었다 깨도 못 볼 영화입니다. ^^;;
극장에서 예고편만 봐도 절래절래 고개가 돌아가더군요.

로쟈 2007-01-2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고편에 아마 다 들어가 있었을 듯한데요.^^

프레이야 2007-01-2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칼립토, 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1-27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형스크린으로 보신다면 심장은 집에 두고 가시길...

로쟈 2007-01-2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모호하지만 '면죄부'까지는 아닌 듯합니다.^^ 9.11 문제 등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이기 때문에요. 이라크나 빈 라덴은 그냥 미국 자체이 내적 분열을 외부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양날의 칼이란 생각이 듭니다...

sommer 2007-01-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의 구절을 빌려서 표현한 것처럼, 문명과 문명의 위상학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 속의 야만 사이의 관계로 더 나아가 문명의 붕괴 혹은 파국을 '지구제국'으로 확장시켜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역사 이후'의 관점에서 멜 깁슨의 영화는 역사 자체에 대한 우화로 읽히는 게 아닐까요?

sommer 2007-01-2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멜 깁슨이 분했던 '매드 맥스'까지 소급/퇴행해 갈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7-01-28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멜 깁슨이 상상 이상의 야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고요. 뭔가 메시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음 영화를 기대해봐야죠...

소경 2007-02-03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일보와 비슷한 기사가 수록 되었군요. 참모님 방 청소하나 그부분 슬쩍 보았기는 했는데 고고학을 계속 전공하려는 입장에서 그러한 '우월주의'가 왠지 그렇게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더군요. 허나 분명한건 요새 읽고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이 소개하는 벤야민의 견해가 오히려 '진리'처럼 느껴지더군요. 자세한 내용을 아직 이해 못하였지만 피지배 계급 입장으로의 역사의 복원이.
(잘 읽고 갑니다. 요새 몰래 제 작업장에서 몰래 간부 컴퓨텅에서 옮겨 잘 읽고 있습니다. 다만 사진은 여건상 보질 못하지.)

로쟈 2007-02-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군대 문서작성도 다 컴퓨터로 하겠지요? 오래전에 4벌식 타자치던 기억이 새롭군요...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책세상)을 잠시 읽다가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내가 왜 러시아어본을 구하지 않았을까란 궁금증 때문이었는데, 이 책의 러시아어판은 3년전이나 지금이나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그러다 눈에 띈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과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필립 카우프만의 <프라하의 봄>을 비교해본 것인데(기사란이 '동상이몽'이다), 자세한 비교는 아니지만 동의할 만하다. 해서 드는 생각은 <오래된 정원>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간을 내어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것.

강원일보(07. 01. 19) 오래된 정원 vs 프라하의 봄

혼자만 행복하면 미안했던 시대. 동지들이 하나둘 경찰에 붙들려 가는 것을 괴로워하던 현우(지진희)는 윤희(염정아)의 곁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프란츠(다이엘 데이 루이스)는 자유연애를 통해 역사의 무게를 견뎌낸다. `오래된 정원'과 `프라하의 봄'. 이 두편의 영화는 연인들의 엇갈린 사랑을 통해 슬픈 현대사를 보여준다.



1980년 5월, 현우는 광주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무슨일을 했는지를 윤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현우를 윤희는 말 없이 숨겨준다. 윤희는 첫눈에 봐도 당차고 씩씩한 여자. 현우는 그녀와 함께 보낸 6개월의 시간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곳에 숨어있을 수 만은 없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동지들의 소식에 괴로워하던 현우는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지금 보내면 아주 오랫동안 못 볼 것을 알면서도 윤희는 현우를 보내준다. 그로부터 17년 후, 감옥에서 나온 현우는 윤희가 암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윤희와 함께 지냈던 17년 전의 그 오래된 정원을 찾아간다.

임상수 감독의 현대사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오래된 정원'은 감독의 전작과 달리 진중한 어조로, 그러나 역시 감독 특유의 `쿨'한 태도로 80년대를 바라본다. `오래된 정원'은 현우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을 택하지만 화자가 현우는 아니다. 민주화에 투신한 그 `청년' 대신 그(그들)를 바라보며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간 여성의 시선을 통해 80년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난 이후 감옥 바깥의 세상은,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후배들은 어떻게 90년대를 맞이했는가. 이성복의 싯귀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래된 정원'은 개인의 신념에 관해 이야기한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신념을 지켜낸 사람들의 사랑과 고통을 위로하며,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갈 오늘을 긍정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프라하의 봄'은 196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오랜 공산주의 사회였던 체코에 불어닥친 자유의 물결 속에서, 토마스와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사비나(레나 올린)가 엮어내는 사랑과 배신, 집착의 서사를 매혹적인 영상으로 그려낸다. 필립 카우프만 감독은 격변의 시기에 인간을 둘러싼 외부의 부조리를 묘사함으로써, 그 안에서 방황하는 토마스의 고뇌를 부각시킨다. 그가 왜 한 여성과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의사직을 박탈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지를 말이다.(허남훈 기자) 

07. 01. 26.

P.S. 나대로의 '오래된 정원 vs 프라하의 봄'은 숙제로 남겨놓는다. 먼저, 영화 <오래된 정원>을 봐야 하고 <프라하의 봄>을 다시 봐야 하며, 소설 <오래된 정원>을 읽어야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어야 한다. 누가 대신 다 보고 읽고 써주면 더욱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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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차를 태워보내고 곧장 편의점에 가서 한겨레와 한국일보를 손에 들고 왔다. 최장집 교수와 작가 이문열의 인터뷰를 읽어보기 위해서였다(최장집 교수의 인터뷰에 대한 기사는 여기저기서 다루기에 있기에 페이퍼를 만들다가 그만두었다). 곁가지로 읽은 기사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건 한겨레에 실린 '세계의 창'. 중국의 언론인 저우창이가 '샤오바오' 부리는 중국과 장이머우를 꼬집고 있는 칼럼이다(덕분에 '샤오바오'란 중국어 단어를 익히게 되었다). 이번주 개봉예정작인 장이머우의 <황후화>에 대해선 부정적인 영화평들은 미리 접한 바 있고 또 최근에 인터넷에 떠도는 영화를 미리 보기도 했다(집중해서 보진 않았지만 집중해서 볼 만한 영화도 아니었다). 장이모의 '변신'이 그 자신의 탓만은 아니라는 필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이 칼럼과 영화 <황후화>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1. 22) 장이머우와 샤오바오

중국에선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어 우쭐대는 것을 ‘샤오바오’(燒包)라고 한다. 중국에는 아직 가난한 사람이 수억 명에 이르지만, 많은 이들이 벼락부자가 되어 샤오바오를 부린다.

20년 전, 부자들의 샤오바오는 ‘황금반지’였다. 손가락마다 금반지를 끼고 다니며 유세를 부렸다. 손가락이 여섯 개가 아닌 것을 한탄할 정도였다. 10년 전, 부자들의 샤오바오는 ‘황금연회’로 바뀌었다. 식탁 가득 호화로운 음식을 차리고 호사를 부렸다. 이 바람에 베이징에서 유명하다는 식당의 음식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런데도 부자들은 이런 식당에서 기꺼이 바가지를 썼다. 이때는 거리의 건달들도 샤오바오를 부렸다. 이들은 홍콩 조폭영화에 나오는 깡패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누비며 ‘황금영’(상하이 폭력조직 흑사회의 두목)을 되뇌었다.

요즘 부자들의 샤오바오는 ‘황금첩’이다. 뇌물로 돈을 번 탐관오리나 장사로 부자가 된 이들은 하나같이 첩을 거느린다. 한둘은 기본이고, 첩을 열이나 데리고 사는 이들도 있다. 이들 첩의 샤오바오는 ‘황금장신구’다. 몸에 주렁주렁 금붙이를 달고 다니며 위세를 떤다. 첩에게 남편을 빼앗긴 아내들은 ‘황금통장’이라는 샤오바오를 부린다. 이들은 남편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해 비상금을 저축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젠 정부도 샤오바오를 부린다. 정부의 샤오바오는 ‘황금성’이다. 백성들의 피땀으로 번 돈으로 관청을 자금성처럼 호화롭게 꾸민다. 자기 돈이 아니라고 건물을 장식하는 데 마음껏 호사를 부리는 것이다. 이러니 백성들도 샤오바오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백성들의 샤오바오는 ‘황금무덤’이다. 요즘 같은 호시절을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위해 무덤을 궁전처럼 호화롭게 지어주는 것이다.

과거엔 세상이 모두 샤오바오를 부려도 지식인들만은 예외였다. 이들은 청빈을 얘기하며 고고함을 지켰다. 샤오바오라는 말을 만들어 부자들의 속물근성을 풍자한 것도 이들이었다. 이들 뒤에 있는 여론도 상인이나 관리들의 샤오바오를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인들마저 샤오바오에 빠졌고, 여론도 샤오바오를 문제삼지 않는 지경이 됐다.

요즘 지식인들의 샤오바오를 대표하는 게 장이머우 감독의 블록버스터 영화 <황금갑>(당나라 말기 황궁의 암투를 그린 영화. 한국에선 <황후화>로 번역)이다. 그는 원래 중국 계몽영화의 기수였다. 그의 영화 <국두> <귀주이야기> <홍등>에는 백성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듬뿍 배어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는 중국 상업영화의 선두에 서 있다. 그의 최근 작품, 특히 <황금갑>에선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두 개의 단어 ‘사치’와 ‘탐욕’만이 있을 뿐이다.

요즘 중국 영화에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황금갑>과 동시에 개봉한 자장커 감독의 <삼협호인>은 중국 영화의 진정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과거 중국 계몽영화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삼협호인>은 관객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황금갑>이 3억위안을 벌어들여 중국 영화사의 신기록을 세우는 동안 <삼협호인>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이는 장이머우의 잘못이 아니다. 사치와 탐욕에 눈먼 중국 관객의 잘못이다. 장이머우가 샤오바오하게 된 것은 결국 중국 국민들이 샤오바오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잘살게 되면서 샤오바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땐 샤오바오가 사라질 수 있을까? 장이머우가 총감독을 맡은 올림픽 개막식이 샤오바오의 거대한 의식이 될까 걱정스럽다.(저우창이/중국 월간 <당대> 편집인)

마이데일리(07. 01. 22) 장예모의 '황후화'는 대국민 반란 경고메시지!

장이머우(장예모) 감독이 만든 대작 ‘황후화’가 오는 25일 국내개봉을 앞두고 있다. 중국서 지난 17일을 기점으로 3억위안(약 360억원)의 흥행을 돌파, ‘영웅’의 2억5천만 위안의 권위를 무너뜨린 ‘황후화’는 아직도 줄지어 영화관을 찾는 중국관객들 탓에 오는 설까지 1998년 ‘타이타닉’이 세운 3억5천만위안의 최고기록 갱신도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중국인들을 영화관에 불러모은 중국 블록버스터 중 최고의 대표작이 이제 국내관객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장이머우 감독의 연출력뿐 아니라 세계적인 배우 공리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이야기구성이 탄탄하고 관객의 진지한 고민과 참여를 요구하는 영화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황후화'는 “관객의 분노를 고려하지 않는 장이머우와 중국의 자본”(왕즈민 베이징영화대학 교수)이라는 혹평 뿐 아니라 중국의 모 인터넷 논단에서는 “영화를 보고 구역질이 나왔다”면서 “어서 장이머우를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올림픽 총감독 직에서 끌어내리라”는 비난도 동반하고 있다.

450억원의 자본이 영화 곳곳에 투입돼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을 자신있게 그려냈지만,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과 호화로운 영상으로 넘실대는 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중국관객들은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미학적 가치판단 기준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최저점으로 떨어뜨렸다”(인훙 칭화대 교수)는 ‘황후화’는 관객을 조롱하는 허무맹랑한 상업영화가 아니고 형식만을 강조한 중국식 블록버스터의 극단으로 치닫지도 않았지만 웬지 관객들과의 욕망의 접합에서 실패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강력한 전제부권질서가 자유가 없는 아랫세대들에게 초래한 참담한 비극을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은 군관출신으로 혁명을 통해 왕권을 쥔 저우룬파(주윤발)이며 그는 영화 속에서 무력과 권위의 상징이면서도 어지럽고 출로가 보이지 않는 황실의 모든 잘잘못의 근원지다.



장이머우는 이러한 저우룬파에게 억압을 당하는 황후(공리 분)와 세 아들들이 갖가지 이유 때문에 저우룬파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데 가담하도록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이 모든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게 됨으로써 현실생활 속의 중국인들의 욕망을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우선 태자(류예 분)라는 인물은 왕을 두려워하고 왕에게 복종하는 전형적인 유형으로 기존의 권력질서에 순응하지만 나라를 이끌어갈 후계자로 왕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반란에 끌려간다. 황후와는 불륜이고 여동생과 난륜을 저지르는 그는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둘째(저우제룬 분)는 왕의 신뢰를 받아 차기왕권을 계승받는 것이 시간문제이지만 황후의 편에 서서 쿠데타에 가담해 왕권을 쟁취하려 드는 판단실수를 저지른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자연스레 권력을 인계받을 수 있으나 황후의 꼬임에 넘어가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장이머우는 그를 죽음으로 끝맺게함으로써 감정에 치우친 반란을 통한 정권교체 욕망을 강하게 경고한다.

셋째는 가장 사욕과 과오가 없는 중국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듯 하면서 도덕적으로 가장 깨끗한 계승자로 급부상하지만 결국은 권력을 위해 왕도 형제도 모두 단숨에 부정해버릴 수 있는 자가 돼버린다. '너희들이 모두 잘못이 있는 이상 너희는 모두 죽어야한다'는 생각을 펼치는 셋째는 태자도 죽이고 왕도 죽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하나 장이머우가 이미 그를 중국이 가장 경계해야하는 젊은이의 유형으로 정해놓은 뒤의 일이다.

장이머우는 결국 이렇게 세 아들이 유일한 출로로 주장하는 반란을 참담한 실패로 귀결지음으로써 왕이 비록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누구도 왕만한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고 왕을 탓하며 권력을 탐하는 이들이 실은 왕보다 더 저열한 자들이라는 것을 관객들이 깨닫게 만든다. 중국인들의 욕망을 강하게 자극한 장이머우는 다시 관객의 차오르는 욕망을 분쇄시켜버린다.

피비린내나는 쿠데타는 반란을 일으킨 이들의 처절한 죽음만을 불러오고 황실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시체더미의 참상 뒤로 남겨진 것은 권력을 지켜냄으로써 미쳐가는 왕과 모든 것을 잃어버려 미쳐버린 황후 뿐이다. 하지만 장이머우는 세 아들의 쿠데타가 왜 실패해야 하는지를 관객들에게 따끔하게 일러주며 쿠데타를 경고하는 데 머무르지는 않는다.



반은 미쳐버린 황후의 마지막 비명과 절규를 통해 어찌할 수 없는 황실의 현실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장이머우는 관객들이 저우룬파가 그려낸 왕이란 인물을 혐오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관객들이 황실의 미래를 그려내는 데 참여해줄 것을 당부하는 한편, 변화를 요구하는 중국인들에게는 욕망만이 아닌 보다 냉철한 현실 판단을 주문한다.(이용욱 특파원)

07. 01. 22.

P.S. 매일경제의 기사를 보충하면 이렇다: "장이머우 감독은 이번 영화에 대해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비극작품 중 하나인 '뇌우'를 원작으로 삼았지만 이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내용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0~1990년대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등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중국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그러나 '영웅'(2003년)이나 '연인'(2004년) 등 최근 들어 방대한 스케일을 강조하는 액션에 탁월한 연출력을 자랑하며 또 다른 신화를 개척해 가고 있다.

장 감독은 "내 과거 영화들이 주로 예술성에 주목했다면 최근에는 철저하게 상업적인 영화에 주력하고 있다"며 "많은 중국 관객들이 할리우드 영화 쪽으로만 가고 있어 그 대항적 측면에서 선택한 장르"라고 강조했다. 예술영화 거장으로 잘 알려진 그가 상업성을 강조한 대목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관객이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며 "예술성과 상업성, 이 둘을 모두 잡는 게 지금 중국 영화인들이 가장 고심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첸카이거의 <무극>과 함께 장이머우의 <황후화>는 중국 5세대 영화가 이젠 정말로 '과거의 영화'가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혹은 5세대 영화의 예정된 '몰락'인가. CG와 황금갑으로 덧칠하여 호화롭기 그지 없는, 그러나 몰락 혹은 말로...

P.S.2. 중국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기획은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시리즈의 첫권으로 나온 <중국의 세기>(북폴리오, 2006)의 사진들을 출판사와의 협의하에 한겨레에서 게재하기로 한 것. "<중국의 세기>는 중국사가 거쳐 온 격동의 세기를 감동적인 사진으로 정리한 연대기다. 300여장의 사진 대부분은 중국 바깥에서 출판된 적이 없는 것들이다. 개인 소장품, 사진작가 등에게서 입수한 사진들로 중국의 감춰진 얼굴에 전에 없던 생생함을 부여한다. <한겨레>는 7차례에 나눠 사진들을 소개할 예정이다."라고 소개돼 있다. '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20세기'가 되겠다(http://www.hani.co.kr/arti/SERIES/110/185752.html). '러시아의 세기' 같은 책도 나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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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22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오늘 <수면의 과학>을 보다가 허우 샤오시엔의 Three Times의 예고를 보았습니다. 그저 저는 저 장이머우의 영화보다는 <쓰리 타임즈> 같은 영화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정말 뜬금없는 소릴 하고 갑니다.

로쟈 2007-01-2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지아장커의 영화도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도 사람들이 안 본다는 것이죠...

클리오 2007-01-22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책에 대해선데, 러시아, 아일랜드 등 5권이 나온다고 들었었는데, 언제 나올런지요... (아! 황후화는 영화를 본 것 같습니다. 어차피 영화 볼 처지는 못되었으니.. ^^)

로쟈 2007-01-22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나중에 '러시아 편'이나 소장하고 있어야겠습니다...

paviana 2007-01-2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후화는 보고는 싶어요.볼 수 는 있을지 모르겠지만..ㅎㅎ

로쟈 2007-01-2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평만 있는 건 아닙니다.^^ '역시 장예모!'란 평도 있으니까 참조하세요(특히 <영웅>과 <연인>을 재밌게 보셨다면)...

urblue 2007-01-2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웅> 이후로 장이모에게 무슨 컴플렉스가 있는게 아닐까, 그래서 화려한 화면을 만들어내는데 집착하는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점에서 '샤오바오'에 빠졌다는 지적이 딱 맞는 말로 들리는군요.

로쟈 2007-01-24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귀주이야기>와 <황후화>의 두 공리만큼이나 두 사람의 장이머우가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년에 '2006년의 영화책'으로 <트뢰포>(을유문화사, 2006)와 함께 꼽았던 책이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 2006)였다. 우연찮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연초에 읽어두었던 것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지난 2003년에 반쪽짜리 책이 나왔을 때 추천사를 쓰기도 했던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칼럼이다.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씌어진 '적임자'의 서평이다. 더불어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한국 영화비평에서의 '로저 에버트들'이다. '들뢰즈들'이나 '지젝들' 말고.

필름2.0(07. 01. 05)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에 대한 서평

얼마 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영화평론 심사를 맡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래의 평론가를 꿈꾸며 보내온 글들을 숙독했다. 장년층의 필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 특기할 만했으며 글에 인용되는 지식의 범주가 꽤 광범위해서 은근히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똑똑한 글들이 많은데 인상적인 글이 적다는 것도 신기했다. 대다수의 글들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주인 입장이 되어 평론 대상이 되는 영화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위압적이며 수직적으로 어떤 특정지식에 의지해 영화를 내려다보며 훑는 글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티가 나긴 하지만 글을 읽고 나면 거기 분석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성실한 대학원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좋은 평론은 언제나 작품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평론이, 평론이 아니라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1960년대의 구조주의 열풍 이후 한때 영화학계의 신념이 됐다. 검증될 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영화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삼류 저널리즘의 인상비평에서나 할 짓이라는 통념은 오늘날에도 완강하게 통용되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글들에서는 대개 열정과 공감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되는 대신 평자들이 표현자와 맞먹으려 들며 과시하려 드는 자기도취의 흔적을 보게 된다. 평자가 표현자의 위치에 오르려는 것은 자연스런 욕망이며 그게 결핍의 표현으로써 시지푸스의 운명처럼 거듭된 성실성으로 나타날 때 위대한 평론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평자가 이미 표현자의 자의식을 갖고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제멋대로 갖고 놀며 군림하려 들 때 그 평론은 추악해지기 쉽다. 영화보다 평론가의 자의식과 지식이 더 돋보이는 대다수의 평론은 그래서 불편하다. 이게 동시대의 대중뿐만 아니라 동업자들끼리도 평론을 잘 읽지 않는 이유다.



그런 심정으로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는데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권의 개정판과 <위대한 영화> 2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1권의 추천사를 쓴 사람의 입장에서 그 뉴스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미국의 스타 평론가의 글을 묶은 두툼한 분량의 책이 상당량 팔려나갔다는 것은 여하튼 이곳에 평론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실 <위대한 영화> 역서를 읽기 전에는 에버트의 평론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시카고 선타임스’에서 수십 년 동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텔레비전 비평쇼를 진행하는 이 할아버지 평론가는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평론을 쓰고 있지만 그가 텔레비전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내리거나에 따라 때로 영화의 흥행 성적이 갈라지는 그 위대한 영향력 말고 대체 취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싶었다.
이런 선입견은 인정에 끌려 추천사를 써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식 출판되기 전의 역서를 읽은 후 손쉽게 무너졌다. 영화평론가로서는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에버트의 경력이 괜한 허명은 아니었다는 자책이 생겼다.

기자로 시작해 평론가로 자리 잡은 에버트의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고 쉽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영화를 볼까 말까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토록 폭력적인 저널리즘 독서 환경에서 단련된 에버트의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신중하고 때로 신랄하며 종종 열정적이다. 그는 개봉영화들을 따라가는 집필활동 틈틈이 고금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고 그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영화제를 개최하며 관객들과 일주일 동안 특정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위대한 영화>는 그런 에버트의 과외활동의 산물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에버트가 점점 더 많이 영화를 알아가는 사랑의 방식이 독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예전 기자 시절에 썼던 영화평의 태도를 스스로 비판하기도 하고, 접하지 않아 일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도 명작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다.

에버트의 책 초고를 읽으며 근사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옮겨 적던 필자는 그게 10쪽을 넘어가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화의 이미지가 주는 매력을 활자로 따라잡는 불가능한 임무를 때로 해내는 에버트의 손이 행한 기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이를테면 그는 니콜라스 뢰그의 매혹적이지만 플롯이 헝클어진 영화 <쳐다보지 마라>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쓴다.

“유령이 출몰하는 도시 베니스가 〈쳐다보지 마라〉에서보다 더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도시는 광대한 공동묘지처럼 보이고 돌덩이들은 축축하고 연약하며 운하에는 쥐떼가 우글거린다. 앤소니 B. 리치몬드와,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은 뢰그가 담당한 촬영은 베니스에서 사람들을 제거해버린다.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대운하 인근에서처럼 베니스 거주자나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이 있지만, 존과 로라가 (처음에는 함께, 나중에는 별도로) 길을 잃는 한결같은 두 장면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거리와 다리와 운하와 막다른 골목과 잘못된 모퉁이는 그것들끼리 서로서로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버트는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플롯에서 자유롭고, 어떤 최종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 하나의 체험으로만 존재하는 영화’이며 관객인 우리는 ‘소풍을 따라 나섰다가 안전하게 돌아온 소녀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것은 결국 우리 시대에 점점 사라져가는 영화보기의 매혹과 미덕에 관한 장 뤽 고다르의 다음과 같은 잠언을 인용하는 것과 연결된다.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라는 고다르의 말을 언급하며 에버트는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를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전혀 몰랐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영화를 ‘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차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대신 빨리 목적지인 종착역에 도착하려 안달하는 어린애와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 파탈>과 같은 영화가 대중의 적대감을 사는 것에 대해서도 에버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작품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요즘 관객들의 조바심을 고발하는 고발장이라 할 수 있다. 요즘 관객들은 괴롭힘 당하기를 원하지, 유혹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에버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영화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영화의 플롯에 의해 규정되거나 제한된다는 암묵적인 가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생은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인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와 어른들을 위한 영화의 차이점이다.” 이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에버트가 정의하는 영화의 꼴인데, 이런 방식으로 에버트가 끌어내는 영화의 매력의 범주는 넓게 뻗어간다.

그는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들>을 찬양하면서 빠른 글 호흡으로 그 영화의 비범한 시각적 특질을 따라잡는다. “레오네는 롱 숏으로 화면을 시작해 권총, 얼굴, 눈동자, 그리고 비지땀과 파리들을 클로즈업으로 작업해 들어가면서 이 장면을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길게 끌고 나간다. 자신이 서스펜스를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진짜 서스펜스이기는 한 걸까? 전적으로 스타일의 시험이었고, 장면 자체에 주의를 끌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감독의 고의적인 조작이었을 것이다. 레오네가 장난을 치곤 했던 패러디의 자유를 여러분이 맛봤다면, 여러분은 그의 방법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이다.”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 이런 식의 표현은 멋지다. 에게, 겨우 그것 같고 그러냐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우리가 거대한 틀에 갇혀 영화를 보는 고정관념을 에버트는 쉽게 넘어선다. 그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 못지않게 상세하게 접근하는 배우들의 매력을 서술할 때도 마찬가지다. <스카페이스>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를 칭찬하면서 그는 파치노가 토니 몬타나라는 인물을 ‘오페라 같은 규모로 연기해낸다’고 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는 책상 위에 코카인을 쌓아놓고는 삶 그 자체를 흡입하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그 속에다 코를 처박는다. 파치노는 코에다 흰색 분말을 묻힌 채로 그 장면을 연기했다. 종종 패러디되는 디테일이지만, 이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외하고는 만사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남자를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었다. 파치노가 <스카페이스>에서 한도를 넘어선 연기를 했다면, 그것은 캐릭터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어선 세상, 그곳이 바로 토니 몬타나가 사는 곳이다.” 이런 문장은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로 영화를 따라잡는 경지의 출발점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영화대상과의 일체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의 평론은 보여준다.

07.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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