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에 나온 영화이론서 세 권을 소개한다. 소개라기보다는 올여름의 독서목록에 올려놓은 책들에 대한 나대로의 워밍업이다. 두 권은 읽기 시작했고 한권은 재정적인 여유가 좀 생기는 대로 읽어볼 참이다. 세 권 모두 80년대 중반 이후 영화이론의 비교적 최근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 않나 싶다. '딱딱한' 이론서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돌고래들의 서핑을 감상해본다(이들은 전생에 나보다 훨씬 많은 공덕을 쌓았음에 틀림없다!)...    

 

현대영화이론에 대한 입문격의 소개(http://blog.aladin.co.kr/mramor/429967)는 오래전에 페이퍼로 올려둔 바 있다. 그런 영화이론의 끄트머리 '포스트-이론'을 대표하는 흐름을 '인지주의'라고 하는데, 데이비드 보드웰은 그 대표격인 영화학자이다(홍상수와의 대담은 http://blog.aladin.co.kr/mramor/1102718 참조). 그가 노엘 캐롤과 함께 편집한 책 <포스트-이론>(1996)은 영화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이 주축을 이루었던 '이론'의 종언과 인지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하는 책이다(그래서 영화연구 자체를 재구축하고자 한다). 해서 이 인지주의자들은 '포스트-이론가'라고도 불린다.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키에슬롭스키'란 부제를 달고 있는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영어판 2001)는 키에슬롭스키론이면서 동시에 이 포스트-이론가들에 대한 논박을 시도하고 있는 책이다. 그 서론에서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포스트-이론>의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을 통일하고 있는 원리는, 여기에 실린 모든 연구들이 영화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분석학적 틀에 의존하지 않는 영화연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론' 자체가 거의 소개돼 있지 않은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 크리스티앙 메츠의 책이 한권도 소개돼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까). 

 

 

 

 

 

 

 

포스트-이론에서 기호학/정신분석학의 배제는 영화학에서 크리스티앙 메츠, 혹은 더 확장해서 프랑스산 영화이론에 대한 배제를 함축한다. 절반 정도만 국역돼 나온 <영화의 내레이션>(시각과언어, 2007; 영어본 1985)에서도 이미 이러한 '포스트-이론'적 시각은 확인된다. <진짜 눈물의 공포>을 우리말로도 옮긴 역자는 이렇게 정리해준다.

"영화의 내레이션 과정에 대한 보드웰의 작업은 7,80년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대이론의 난점을 공략하고, 그에 대한 비판적 시선 위에서 영화이론을 새롭게 기획하고 재구성하려는 지적 노력의 소산이다."(417쪽)

반면에 "거대이론은, 영화로 한정시켜 말하자면, 영화와 사회, 인간 주체의 관계를 더욱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수준에서 사고했던 이론적 움직임으로서, 구조주의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를 모체로 하면서, 영화의 이미작용에 내재하는 의미와 질서, 그리고 그것에 연계되어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이론화한 바 있다."

하지만 "관객의 경험이 낳은 개별적인 의미를 희생시킨 채 관객 주체를 집합적 단수로 보고 규정적으로 파악한다든디, 주체의 존재를 단지 구조의 효과 정도로만 이해한다든지, 개별 텍스트들이 지닌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고 영화의 의미작용 과정을 통일되게 설명해내려는 지나친 전일화(totalization)에의 열망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거대이론이 안고 있던 피할 수 없는 난제들이었다."(418쪽)

"이에 대해 보드웰은 1950년대부터 영미를 중심으로 발달한 인지주의와 신형식주의를 자신의 이론의 모태로 삼으면서, 거대이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이론화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문제의식이 얽혀 있다고 하겠는데, 그 첫번째는 실제 관람자가가 아닌 이상적 관객을 다루고 있는 정신분석적 영화이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다.(...) 두번째는, 영화의 의미화 과정에 주목했던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영화 텍스트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구조주의 영화이론이 너무 결정론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다양한 텍스트들을 동질화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비판의 출판점이다."(418-9쪽)  

흥미로운 것은 보드웰이 영미의 인지주의와 함께 192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들을 자신의 이론적 모태로 삼는다는 점인데(그래서 그는 '신형식주의자'로도 불린다), 내러티브를 다루면서 자신이 왜 러시아 이론가들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책의 주제를 생각한다면 1920년대의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즉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와, 유리 티냐노프, 보리스 아이헨바움 같은 이들의 작업에 의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예외로 치더라도 위의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 이론가들이다."(12쪽)

곁가지로 지적하자면, '아이헨바움(Boris Eichenbaum)'은 '에이헨바움'이라고 읽어야 한다. 형식주의자들의 용어인 'syuzhet'도 '수제'가 아니라 '슈제트(슈젯)'라고 읽어야 한다(불어식으로 '수제' 혹은 '슈제'라고 읽는 건 '상상력'의 소산이다). 서사학 관련서들에서 자주 범하는 실수들이다. 러시아어 고유명사 표기의 오류들은 대부분들의 번억서들에서 '관행화' 돼버렸는데, 이 번역서도 예외는 아니다(가령 영화제목에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종말>과 <전함 포촘킨>이란 표기가 나란히 등장하는 건 넌센스이다. 아무런 표기의 원칙도 없다는 뜻이기에). 정도가 심한 건 아니지만 가령 199쪽에서 러시아 비평가 '세르게이 발루카티(Sergei Balukhatyi)'는 '세르게이 발루하트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런 음역표기가 난해한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역자나 출판사들이 무신경한 탓이다.

이 형식주의자들의 영화론을 담은 가장 중요한 선집은 <포에티카 키노>, 곧 <영화시학>(1927)이다(이미지는 독역본이다. 대역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말로는 <영화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1995)라고 부분 번역돼 있는 책(<러시아 형식주의 영화이론>이라고 영역돼 있다).

보드웰이 인용하고 있는 에이헨바움의 지적: "견고한 입장의 전통적인 사고를 위반하는 원리를 형식주의자들이 옹호한다는 생각은 문학연구만이 아니라 예술 일반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명했다'. 형식주의자들은 자신의 원리들을 매우 엄격하게 고집하면서, 문학이론의 특수한 문제들과 미학의 일반적인 문제들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놓았다. 그들의 사고와 원리는 상당한 구체성을 띠며 일반적인 미학이론을 지향한다."(12쪽)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는 ''형식적 방법'의 이론'이란 에이헨바움의 글로부터의 인용인데(국역본은 <러시아 형식주의>(이화여대출판부)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이대출판부본은 불어본에서 중역한 것이다). 첫문장은 오역이다. 보드웰의 책에서 원문을 옮기면 "The Formalist advocated principles which violated solidly entrenched traditional notions, notions which had appeared to be 'axiomatic' not only in the study of literature but in the study of art generally." 

여기서 '자명하게' 보인 것은 '형식주의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전통적인 사고'이다. 다시 옮기면,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연구뿐만 아니라 예술연구 일반에서 자명한 것처럼 보였던, 견고한 전통적인 관념들을 위반하는 윈리들을 옹호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문예학과 미학 사이의 거리를 좁혀놓았다는 것. 이러한 형식주의의 작업을 보드웰은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의 프로젝트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내레이션 연구에 한정돼 있긴 하지만 왜 그런가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확인해볼 수 있겠다.  

이어서 두번째 책은 '영화이해의 인지과학적 전환을 위하여'란 부제를 달고 있는 <영화인지기호학>(커뮤니케이션, 2007; 영어본 2000)이다. 저자인 워런 벅랜드는 이미 <영화연구>(현대미학사, 2002)란 책으로 소개된 바 있는, 영화인지기호학 분야의 선두주자이다. 잠시 소개를 옮겨보면, "영화인지기호학'이란 한마디로 영화를 인지학 혹은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기호학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영화인지기호학의 연구 현황을 살피고, 미국의 인지적 영화이론의 취약점을 조명함으로써, 영화연구에서 후기이론(Post-Theory)의 등장을 예고한다."

'영화연구에서 후기이론의 등장을 예고한다'는 마지막 멘트는 얼핏 이해되지 않는데, 이미 살펴본 대로 '포스트-이론'은 벅랜드보다 앞서서 보드웰 등이 주창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드웰이 소위 대문자 이론을 비판하면서 192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로 되돌아가는 '포스트-이론'적 자세를 취했다면, 벅랜드의 기본 입장은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절충, 혹은 종합이다(더 멋있게 말하자면 '변증법적 지양'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그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오늘날 '언어분석전통'과 '주체철학' 사이의 갈등은 언어학과 인지과학의 갈등으로 이해된다. 이 갈등은 1980년대 이래 영화이론에서 인지영화이론가들(예를 들면 보드웰)과 언어학과 기호학에 토대를 둔 현대영화 이론가들(예를 들면 메츠)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그가 보기에 보다 생산적인 것은 그러한 '대립'이 아니라 종합이다. "이 책은 '인지영화이론'과 '현대영화이론' 간에 전면적인 대립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인지과학의 통찰과 언어학, 그리고 기호학을 통합하는 현대영화이론의 영역을 자세히 다룬다." 이 통합적인 현대영화이론의 이름이 '영화인지기호학'이다(말 그대로 '기호학'과 '인지과학'을 통합한 것이다). 이 정도면 구도는 대충 나온 셈인데, 앞서 다룬 보드웰의 <영화의 내레이션>을 다룬 대목을 호기심 삼아 읽어본다.

"보드웰이 메츠의 '거대 통합체'와 같은 초기의 기호학 작업을 <픽션적 영화에서의 서술>에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지주의자들은 형대영화이론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보드웰은 같은 책 2장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서 이것을 강조한다."(5쪽)

<픽션적 영화에서의 서술>이 바로 <영화의 내레이션>의 원제이다. 한데 이 대목의 번역은 좀 부정확하다. 원문은 "The cognitivists find very little of value or interest in modern film theory, although in Narration in the Fiction Film Bordwell acknowledges the value of some early semiotic work, such as Christian Metz's grande syntagmatique. Yet Bordwell undermines this acknowledgement in Chater 2 of the same book when he asks the following questions."(4-5쪽)  

번역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강조하다'라고 옮겨진 'undermine'은 '침식하다'란 뜻이다(그러니까 자기말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다시 옮기면, "인지주의자들은 현대영화이론에서 아무런 가치도, 흥미도 발견하지 못했다. 비록 <영화의 내레이션>에서 보드웰은 메츠의 '거대통합체' 같은 기호학적 초기 작업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보드웰도 바로 같은 책의 2장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자신의 인정을 무효화한다." 

보충하자면, 보드웰의 인정은 이런 것이다: "내러티브의 구조적 양상에 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더 풍성한 편이었다. 특히 그러한 연구는 프랑스 구조주의의 시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크리스티앙 메츠의 거대통합체는 이 부분에서 가장 뚜럿한 성취라 하겠다."(<영화의 내레이션>, 14쪽) 그리고 이러한 '인정'을 다시 집어삼키는 질문들이란 "왜 언어학 개념들의 사용이 영화의 나레이션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이다.

역시나 벅랙드의 번역본도 이런저런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가령 'paradigmatic'을 '화용론적'(서문 4쪽)이라고 옮기거나 'poetics' 같은 말을 '시학'이 아닌 '시론'(6쪽)이라고 옮기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다. 고유명사 표기에 있어서도 '에이젠슈테인'을 '아이젠슈타인'으로 옮기거나(<영화의 내레이션>에서는 '에이젠쉬테인'이라고 옮겼다) 폴란드의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Malinowski)'를 '멜리노브스키'로, 독일의 영화이론가 크라카우어(Kracauer)를 '크라카우'로, '알튀세르(Althusser)'는 '알튜세'로 '주네트(Genette)'는 '제네트'로 옮기는 것 등등은 역자의 무관심을 넘어 식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영화잡지 <스크린(Screen)>은 왜 <씬>이라고 옮기는 것일까?). 값싼 책도 아니건만... 

끝으로 아직 손에 들지 않은 그레고리 커리의 <이미지와 마음>(한울, 2007; 영어본 1995). 부제는 '영화, 철학, 그리고 인지과학'이고 저자는 영화이론가가 아니라 철학자이다(과학철학쪽의 경력을 쌓고서 예술철학쪽으로 관심을 확장하고 있는 듯하다). 벅랜드의 책보다 먼저 출간되었기에 순서상 먼저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 이후 이루어진 ‘인지주의 혁명’은 모든 매체에서의 예술작품에 대한 창조, 해석, 감상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이런 새로운 탐구 영역을 영화예술에 적용하여 어떤 식으로 문제 해결이 기술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텍스트"라고 하니까.

영화적 재현과 내러티브의 문제를 다루면서, "소설과 영화의 해석에 대해 명료하고 정확하게 그 윤곽과 주요 논점을 제기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문학과 영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게 덧붙은 소개말이다. 나로선 빠져나가기가 어렵다...

07.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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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사라고 할 만한 걸 한참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영화잡지 필름2.0까지 뒤져서야 찾아낸 기사가 그나마 성에 차기에 옮겨놓는다. 거장들의 영화 세 편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인데(라스 폰 트리에와 두 데이비드의 영화이다), 나로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고 싶다(린치에 관한 책이 국내에 한권도 소개돼 있지 않다는 것도 그의 영화들만큼이나 미스테리하다). 로라 던의 모습도 오랜만에 보겠군...

필름2.0(07. 07. 04) 거장들의 영화가 온다

소문으로만 듣던 거장들의 쟁쟁한 영화들이 7월 중 잇달아 개봉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와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 라스 폰 트리에의 <만덜레이>가 그 작품들. <폭력의 역사>와 <만덜레이>는 2005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며, <인랜드 엠파이어>는 2006년 베니스영화제에 공개돼 'Future Film Festival Digital Award'를 수상했다. 세 영화 모두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거장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폭력의 역사>(7월 19일 개봉)는 <플라이> <비디오드롬> <엑시스텐즈> 등을 통해 생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기괴한 공포의 세계를 묘사해왔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색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영화다. 평범한 가장 톰(비고 모텐슨)이 어느 날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죽이고 손님을 구한 뒤 영웅대접을 받지만 거대 갱단 두목 포가티(에드 해리스)의 위협을 받으면서 점차 폭력자로 변해간다는 내용이다. 평범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분노와 폭력성을 이끌어낸 탁월한 솜씨로 2005년 해외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만덜레이>(7월 19일 개봉)는 2003년 개봉한 니콜 키드먼 주연의 <도그빌>, 그리고 우도 키에가 캐스팅된 2009년 개봉 예정작 <워싱턴>과 더불어 라스 폰 트리에의 '미국-기회의 땅'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여주인공 그레이스(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도그빌을 떠나 노예제도가 있는 미국 남부 마을 '만덜레이'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레이스는 주인들에게 억압당하는 흑인들을 보고 그들이 노예가 아님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예상치 못한 혼란과 마주한다는 내용이다.

'CinDi 2007' 개막작인 <인랜드 엠파이어>(7월 26일 개봉)는 데이비드 린치가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장편 신작이다. 새 영화를 앞둔 배우 니키(로라 던)가 감독 킹슬리(제레미 아이언스)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불길한 소식을 듣는데, 이후 영화 촬영이 진행될수록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불륜, 살인, 도망, 추적, 복수 등 갖가지 꺼림칙한 사건들을 다루지만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파편과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복잡한 이미지들로 '역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답다'는 평을 들었다.(이수빈 기자) 

07. 07. 04.

P.S. 개인적으론 데이비드 린치에 관한 연구서를 하나 갖고 있는데, 좀 오래전에 나온 것이고 이번에 다시 검색해보니 새로운 책들이, 탐나는 책들이 여럿 나와 있다. 일순위로 꼽고 싶은 책은 <린치가 말하는 린치>(개정판 2005). 그밖에 다른 책 몇 권은 도서관에 주문을 해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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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7-07-05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의 역사>가 드디어 개봉하는군요! 데이비드 린치의 신작까지!! 신나는 소식, 감사합니다.

로쟈 2007-07-0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이 대목이라고들 하니까요.^^

라주미힌 2007-07-05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의 역사... 참 재미있게 봤어요. (어둠의 경로로..)
만덜레이는 자막이 없어서 못보고 ㅡ..ㅡ;
저는 어둠의 자식인가봐요 :-)
 

'천재 아니면 사기꾼'이란 평을 듣는 덴마크의 문제적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이 열린다고 한다. 말은 '특별전'이지만 고작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니 괜히 나까지 머쓱하긴 하다. 더구나 신작 <오 마이 보스>를 제외하면 이미 DVD 타이틀로까지 다 나와 있는 영화들이어서 '발견'의 새로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듯싶고. 개인적으론 그의 영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 나온 영화들을 다 챙겨보진 못했다(<킹덤>이나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모두 부분적으로만 보았다). 이번에 나온 신작 <오 마이 보스>는 예기치 않게도 코미디라고 하니까 그 중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도 싶다.

Антон Долин. Ларс фон Триер. Контрольные работы. Анализ, интервью. Ларс фон Триер. Догвилль. Сценарий

개인적인 기억을 하나 더 보태자면, (모스크바 통신에도 적은 바 있지만) 나는 러시아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갖는 거장으로서의 위상에 좀 놀란 적이 있다(몇 년전 상황이긴 하나, 라스 폰 트리에,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김기덕이 러시아에서 꼽은 '우리시대의 거장'들이었다). 그걸 웅변해주었던 건 지난 2004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키노텍스트'란 영화총서의 첫 권이 라스 폰 트리에에게 바쳐졌다는 점. 작품론과 함께 감독과의 인터뷰, 그리고 <도그빌>의 시나리오 등으로 구성된 책이었다(망설이다가 구입을 미루었던가?). 우리의 '키노텍스트'들도 보다 폼나게 나옴직하지 않을까?.. 

모아놓은 기사들은 <오 마이 보스>에 대한 리뷰와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에 대한 소개이다.

경향신문(07. 06. 29) [영화 가로지르기]‘오 마이 보스’

‘오 마이 보스’(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가짜 사장으로 부임한 무명배우의 이야기다.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해고를 책임지고 추진할 악역이 필요했던 진짜 사장은 가짜 사장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한다.

‘오 마이 보스’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고유한 인장이 찍혀 있다. 도그마 영화에 대한 감독의 신념이 대사에까지 등장하고, 형식미에 있어서도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개성적 편집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자신의 모습까지 드러내는 감독은 점프 컷(두 장면 사이를 부자연스럽게 단절시키는 편집기법)을 이용하여 관객의 정서적 이입을 적절히 견제한다. 편집의 위력을 생생한 형태로 보여주는 점프 컷에는 영화라는 매체의 독자적 정체성이 간직되어 있다.



‘오 마이 보스’는 전문성의 신화를 재치있게 조롱한다. 첨단 IT기업의 경영자로 행세하는 무명배우 크리스토퍼의 모습은 허상에 의해 미화된 기업가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 마이 보스’는 단순한 가짜사장 소동이 아니라 능력에 비해 명성과 위신이 턱없이 부풀려져 있는 기업가 모두에 대한 풍자로까지 읽힌다. 가짜 사장을 둘러싼 소동에는 지위와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내장되어 있다. 영화는 능력이나 전문성에 대한 일반적 믿음이 일종의 신화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크리스토퍼(젠스 알비누스)는 전통적 의미의 능력 때문에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 라운(피터 갠츨러)의 평판관리 혹은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고용되지 않는가.

한편 ‘오 마이 보스’의 직원들은 자본의 모든 대리인들에게 본능적으로 공손하다. 그들은 회사의 냉혹한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실제 소유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체불명의 ‘사장님의 사장님’까지 등장하지만, 직원들은 그 익명의 권위마저도 충실히 추종한다. 자본가에게 부여된 지엄한 권위 앞에서, 그들은 권위의 허상을 직시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한 채 권위가 수반하는 화려한 후광에 현혹되고 만다. 그들이 사장의 비정한 행태에 대해 묵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면 사장의 정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을까. 감독은 자신의 앞날을 자본가에게 위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오 마이 보스’의 대사처럼, 배우에게 관객은 법이고 무대는 법정이다. 그러나 배우가 단지 현실로부터 격리되어 무대에 유폐된 존재라면, 그가 과연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관객과의 소통이 운명인 배우가 밀폐된 자의식의 세계에 갇힌 은둔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예술지상주의는 자칫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의 역할모델로 숭배하는 ‘감비니’는 실존 배우가 아니라 라스 폰 트리에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트럭의 이름이다. 가상의 인물 감비니를 원용하여 자신만의 연기론을 변호하는 크리스토퍼는, 현실에서 유리된 채 예술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어버린 예술가들을 상징한다.

배우의 진정한 임무란 과연 무엇일까. 가짜 사장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배역과 대사에만 관심이 있다. 그가 직원을 해고하는 악역을 맡지 않으려는 것도 배우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지 해고의 부당성에 대한 확고한 자각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직원들의 해고를 초래할 매각계약서에 마침내 서명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숭배하는 배우 감비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충동적으로 계약서에 서명한다. 해고된 직원들의 운명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예술에 몰두하는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모습은, 자폐적 순수예술이 결국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다.

볼테르는 진실보다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충고한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연극의 목적은 자연을 거울에 고스란히 비추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어쩌면 예술가의 숙명은 평화로운 거짓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지 않은 진실을 증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 마이 보스’에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권위에 맹종하는 직원들, 가공된 이미지로 자신을 체계적으로 미화하는 자본가, 그리고 자신만의 관념적 예술세계로 도피한 예술가까지. 사람을 진실의 거울에 비추는 것이 예술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우리들의 초상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몫일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고 ‘순수예술가’라는 호사스러운 칭호만을 탐한다면, 결국 크리스토퍼처럼 힘 있는 자들의 충직한 공모자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황승현 영화평론가)

경향신문(07. 06. 28) 하이퍼텍 나다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

대학로 하이퍼텍나다 극장에서 ‘도그만 선언’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특별전이 28일부터 7월 4일까지열린다. 6월14일 개봉한 그의 최신작 ‘오! 마이 보스!’의 개봉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상영이벤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독창적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첫 장편 데뷔작으로 비쥬얼리스트로서의 그의 감성과 단 한번의 NG 없이 2주 동안 모든 촬영을 마무리 지으며 연출력을 선보인 장편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 가 눈에 띈다. 또 2000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여주인공 비요크에게 칸느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선사했던 2000년작 ‘어둠 속의 댄서’(2000)와 1995년 ‘도그마 선언' 이후 다시 장르영화로 돌아와 관객과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위해 만든 코미디 영화 ‘오! 마이 보스!’(2006)까지 총 3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상영작 소개-

<범죄의 요소>(1984)

은퇴해 카이로에서 생활하고 있던 피셔 형사는 경찰학교의 스승이었던 오스본과 동기 크레이머의 요청으로 유럽으로 돌아온다. 피셔가 13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은 3년 전에 종결된 것으로 알았던 연쇄살인사건이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의 요소'라는 책을 쓰기도 한 오스본은 복권을 파는 아가씨들만을 골라 토막살인을 저지르는 일명 복권 살인사건의 수사를 포기한 채 현실 감각을 잃은 듯이 행동하기 시작하고,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 해리 그레이는 차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둠 속의 댄서>(2000)
공장에서 일하는 셀마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자신을 닮아 역시 눈이 멀어가는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체코에서 이민 온 그녀는 아들이 13살이 되기 전 눈을 고쳐주겠다는 소망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고된 노동에 몸을 맡긴다. 그녀의 유일한 삶의 기쁨은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춤과 노래의 상상 속에 빠지는 것. 이 행복한 상상은 늘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셀마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평온하던 그녀의 일상은 사치스런 아내 때문에 힘겨워하는 집주인인 경찰관 빌과 가까워지면서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이한다.



<오! 마이 보스!>(2006)

지난 10년간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이 회사의 보스라는 정체를 숨기고 평직원처럼 지낸 라운!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을 했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그래서 그는 엉터리 배우를 섭외해 회사 매각을 위한 가짜 보스를 만들어낸다. 보스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10년 근속의 직원들은 그가 진짜 보스인줄로만 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 보스, 직원들의 눈엔 무언가 수상해 임무를 다그치는 라운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직원들, 이 사이에서 어설픈 가짜 보스는 과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07. 06. 29.

P.S. 영어권에서도 지난 2005년에 라스 폰 트리에 인터뷰집이 출간됐다(그보다 먼저 2003년에도 비슷한 포맷의 인터뷰집이 출간된 바 있다). 영화학도들에겐 필독서가 됨 직하지만 번역된다면 일반독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되지 않을까?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잭 스티븐슨의 연구서 <라스 폰 트리에>(2005)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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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말에다가 밀린 일들이 겹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이럴 때는 머리나 손가락보다 엉덩이가 공부한다는 말이 딱 맞지만 그간에 그쪽으론 살이 붙지 않았나 보다. 진득하게 붙어있질 못하는 걸 보면. 잠시 간식 타임에 뉴스기사들을 읽어보다가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치오(1939-)의 영화 <굿모닝, 나잇>(2003)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다('벨로키오'라고도 표기돼 있다).

국내에 개봉 예정인 것인지(아니면 개봉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감독도 생소하다) '붉은 여단'이란 말을 오랜만에 접하게 됐다(영화속 사건은 1978년에 일어난 것인데, 따져보면 그때 감독이 지금의 내 나이이다). 한때는 TV에서도 자주 접하던 말이었는데, 어느새 30년이 지난 얘기라고?!.. 

참고로 세계 3대 테러조직으로 불렸던 "붉은여단은 이탈리아의 극좌파 비밀 테러 조직으로 1970년대초 납치·살인·사보타주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의 목적은 이탈리아란 국가를 서서히 소멸시키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이 주도하는 마르크스적 대혁명으로의 길을 예비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붉은 여단의 창설자는 레나토 쿠르치오로서, 그는 1967년 트렌토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좌파사상단체를 만들어 카를 마르크스, 마오쩌둥, 체 게바라와 같은 인물들의 사상을 연구했다. 1970년 11월 붉은 여단은 밀라노에 있는 공장과 상점에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971년의 납치테러를 시작으로 1974년 토리노의 반(反)테러대 총지휘관 및 대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으며, 1978년 이탈리아의 전(前) 총리 알도 모로를 납치하여 살해했다. 붉은 여단의 총책임자인 쿠르치오는 1974년 체포되었다가 1975년 탈출, 1976년 재생포되었다. 1981년 12월에는 NATO소속 미군인 제임스 도지어 준장이 붉은 여단에 납치되어 42일 동안 감금되는 사태도 벌어졌으나, 후에 그는 파도바의 붉은 여단 은신처를 급습한 이탈리아 경찰에 의해 무사히 구출되었다.

붉은 여단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1970년대에는 정회원이 400~500명에 이르렀고, 그밖에 1,000여 명의 회원이 이들을 정기적으로 도와주었으며, 수천 명의 후원자들이 자금과 정보전달의 수단 및 은신처를 제공했다. 조심스럽고 체계적인 경찰의 검거작전에 의해 1970년대 중반부터 붉은 여단의 지도자들과 평회원들이 체포·감금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그 조직이 대단히 약화되었다."

오마이뉴스의 기사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195500 도 참조할 만하다. 

프레시안(07. 06. 24) 영화는 종종 핏빛 역사의 교훈을 들려준다

베니스영화제에 마르코 벨로치오가 새영화를 내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언제 때 마르코 벨로치오래? 베르톨루치와 동시대 사람이잖아. 그 사람, 아직 거기서는 작품을 만드는 모양이네. 근데 무슨 영화라구? 알도 모로? '붉은 여단' 얘기? 웬 '붉은 여단' 얘기래? 30년이나 지난 얘기잖아.
  
70년대 중후반이니 아마도 중학교를 다닐 때쯤이었을 것이다. 정치의식이 전혀 없었던 나이임에도 알도 모로 수상이 참혹하게 살해돼 발견됐다는 뉴스가 꽤나 시선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알도 모로와 '붉은 여단'이라는 이름이 각인돼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일까. '붉은 여단' 얘기라는 벨로치오 감독의 새영화 <굿모닝, 나잇>은 DVD를 받아들고도 그것을 보기까지 사나흘이 걸렸다. 마치 불쾌했던 기억은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영화는 복잡한 구조로 돼있지 않다. 겨우 4명에 불과한 '붉은 여단' 조직원이 알도 모로 전 수상을 유괴,납치해 제멋대로 프롤레타리아 재판을 한 후 50여일간을 억류해 놓고 있다가 결국 살해한다는,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다. 드라마적 구성이라곤 이 얘기 전체를 납치극에 참여한 20살짜리 여성 키아의 시점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렇지 않았으면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웠을 만큼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당시 사건에 대해 극도로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벨로치오 감독의 태도가 느껴진다. 벨로치오는 이탈리아에서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좌파 감독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종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상업영화 감독으로, 다분히 우향우의 자세로 변신을 한 것과 비교되곤 한다. 베르톨루치처럼 우파로 변절하기 보다는 벨로치오처럼 좌파임을 반성하는 것. 어느 쪽이 더 맞고 또 옳은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영화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어 신세대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를 납치한데는, 그가 유럽 정치인으로서는 거의 최초로 좌우 코아비타숑, 그러니까 좌우 합작정부를 구성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기독민주당 당수로 합리적 우파의 대표주자였던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손을 잡고 갈라진 국론을 봉합하려 애썼다. 그래서 일부 우파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또 일부 좌파로부터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우파기회주의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붉은 여단'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여론의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당시 '붉은 여단' 사건은 역설적으로 좌파 맹동주의와 극단적 공산주의자를 솎아내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운동의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구구절절 이런 얘기는 다 필요없고, 벨로치오는 왜 지금에 와서 케케묵은 당시의 사건을 들춰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세상 곳곳에서 지금 갖가지 테러가 자행되고 있고, 그럴 때마다 정치적 이유와 이념적 명분이 앞세워진다. 테러를 자행하는 자들이나 거기에 복수하는 자들이나 모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을 뿐이다. 벨로치오가 얘기하려고 한 것은 바로 그점이 아닐까.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굿모닝, 나잇>같은 영화가 더 나은 정치인과 지도자를 선택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영화는 종종 과거로의 여행을 안내하며 여행길은 늘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는 법이다.(오동진 편집장) 

07. 06. 25.

P.S. 알고보니 작년 가을 끝자락에 한겨레에도 영화의 리뷰가 실렸었다. 짐작에 영화는 작년 그맘때 개봉됐었나 보다. 한겨레와 씨네21의 기사까지 옮겨놓는다(벨로치오의 영화세계 전반을 정리해주고 있는 씨네21의 기사가 유익하다).

한겨레(06. 11. 29) 흔들리는 레지스탕스의 서글픈 초상

1977년 말 로마의 한 아파트, 어느 신혼부부가 부동산 중개업자의 안내를 받고 있다. 새를 키울 만한 정원이 있고, 적당히 널찍한 침실과 부엌이 있으며, 거실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드는 곳. 얼핏 평온한 삶의 안식처처럼 보이나 실은 극좌파 무장세력 ‘붉은 여단’의 아지트가 될 공간이다. 신혼부부로 위장한 남녀는 급진적 혁명노선을 함께 걷는 동지이며, 이들 외에도 두 남자가 더 숨어들어 위험한 미션을 수행한다. 새해가 밝아오고 온 거리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일 때조차 이들에겐 사치스러운 감정을 나눌 여유가 없다. ‘노동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거사(巨事)를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본격적인 아지트 역할을 시작한 것은 1978년 3월16일, 붉은 여단 멤버들이 전 총리이자 기독민주당 당수 알도 모로(로베르토 헬리츠카)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면서부터다. 이날은 알도 모로가 공산당과 우파 여당 5당을 연합한, 연립내각이 승인되는 날이다. 알도 모로. 시민들에게는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여당 당수지만, 붉은 여단에는 보수정치세력을 대변하는 반동주의자이자 수정주의자일 뿐이다. 단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름으로 처형한다”는 명목하에 모로를 아파트에 감금하고, 정부와 교황을 상대로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협상에 실패하고 국민의 비난만 거세지자, 그토록 견고했던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굿모닝, 나잇>은 이탈리아의 거장이자 대표적인 좌파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의 2003년작으로, 그해 베니스영화제가 ‘미래의 영화상’과 각본상으로 화답했던 작품이다. 함께 이탈리아 영화계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비해 벨로키오는 고집스럽게 계급과 정치를 영화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굿모닝, 나잇> 역시 감독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정신분석이라는 화두를 관통한다. 거친 화면의 뉴스릴과 픽션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1978년 이탈리아 전 총리 알도 모로가 납치됐다가 55일 만에 암살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탈리아인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역사적 트라우마지만 감히 입 밖에 내기 어려웠던 민감한 기록들을, 벨로키오는 대담하게 끄집어낸다.

그러나 벨로키오의 관심은 역사의 한 자락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평범한 일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붉은 여단의 흔들리는 표정에 더 주목한다. 그중 유일한 여성 단원 키아라(마야 산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인물이다. 자유의 대안은 과연 죽음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념이 현 이탈리아사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혹은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벨로키오는 섣부른 도덕적 판단 대신 이런 질문들을 통해 조용하지만 파장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제목 ‘굿모닝, 나잇’은 19세기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Good Morning… Midnight>에서 가져온 것. 극중 키아라의 동료 엔조(파올로 브리구글리아)가 테러리스트들을 소재로 쓴 시나리오 제목이기도 하다. 엔조는 건조하게 살아가는 키아라를 자극하는 인물로, 일상생활이 전혀 없는 붉은 여단 멤버들을 비난한다. 바깥세상의 사람들 역시 수군댄다. “붉은 여단은 혁명활동을 하지 않을 때 포르노영화를 볼 것”이라고. 이들의 지적은 과장된 말이 아니다. 붉은 여단은 모로를 가두고 감시하는 동시에, 자신들 역시 모로와 함께 감금된 자들이다. 아파트가 그들의 유일한 세상이고,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뉴스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이다.

키아라는 “상상력이 현실을 구하진 못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녀가 그토록 굳게 믿었던 이데올로기 역시 현실을 구하지 못했다. 미묘하게도 그녀는 감시 구멍을 통해 모로의 늙고 지친 모습을 목격한다.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모로는, 키아라에게 적이기 이전에 인간의 존엄을 일깨워주는 존재로 변모한다. 동시에 ‘혁명’이라는 명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자신의 동지들과 ‘그의 동지들’에게 버림받은 모로 사이에서, 키아라는 점점 정신분열에 가까운 판타지에 시달린다. 이를테면 파시스트들에 대항하다 죽은 키아라의 아버지가 등장한다거나, 모로가 감금에서 풀려나 유유히 걸어나가는 장면들이다. 이제 키아라가 꿈꾸는 것은 혁명적 투쟁 이전에, 인간성이 회복된 세상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가 꿈꾸는 판타지가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음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총성이나 끔찍한 구타장면 하나 없이 흔들리는 현실을 잡아낸 벨로키오의 연출솜씨는 놀랍다. 이웃집 여자나 지역 사제의 예기치 않은 방문, 좀도둑들의 침입 등은 언뜻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침묵 속에 감도는 긴장감, 서늘한 시선 속에 감지되는 뜨거운 열기는 어떤 장르적 장치만으로 연출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벨로키오는 대사나 동선을 절제하는 대신 이미지와 음악(핑크 플로이드의 터질 듯한 사운드와 슈베르트 협주곡의 대비!)의 절묘한 조합 또는 배우들의 떨리는 눈동자만으로 짙은 후유증을 남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가 극도에 달한 포스트 9·11 시대, 그 후유증은 좀처럼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굿모닝, 나잇>은 철저하게 감성에 호소하는, 기묘한 정치스릴러다.(글 신민경)

씨네21(06. 12. 14)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세계와 <굿모닝, 나잇>

자유를 염원하는 사형수들의 노래

이탈리아 영화계는 60년대 들어 두명의 ‘천재감독’을 동시에 배출하는 호사를 누린다. 불과 23살의 나이로 <혁명전야>(1964)를 만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바로 1년 뒤 26살의 나이로 데뷔작 <주머니 속의 주먹>을 발표한 마르코 벨로키오가 그 장본인들이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유럽의 들끓었던 사회변혁 열기를 대변하는 좌파 경향의 젊은이들이었다.

두 젊은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60년대 정치영화의 수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들이 데뷔할 때, 선배 격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마르코 페레리 등이 이데올로기적 주제가 강한 사회비판영화들을 발표하며 이탈리아 영화계의 좌파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두 젊은이는 그런 전통을 계속 이어갈 인재들로 인식됐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2차대전이 끝난 뒤, 방송은 우파가, 그리고 영화는 좌파가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 전례를 남겼고, 이는 지금도 이 나라의 문화전통으로 남아 있다.

정치적 리얼리즘을 고집한 작가

베르톨루치가 <순응주의자>(1970), <거미의 계략>(1970) 등을 발표하며 보수우파의 억압과 허위를 비판했다면, 벨로키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1971), <괴물을 1면에 실어라>(1972) 등을 발표하며, 그런 우파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과정에 더욱 주목했다. 다시 말해,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통용되는 가치관들이 도대체 어떻게 생성되고 재생산되는지 세밀하게 관찰하는 식이다.

아마 알튀세르가 살아 있다면, 자신이 주장했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성격을 추적하는 영화로 벨로키오의 작품들에 큰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우리의 가치관을 재생산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불리는 가족, 학교, 교회 등인데 벨로키오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런 제도 속의 인간관계를 질문해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배타적인 관계 속에 갇혀 있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차단된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존재의 모순에 빠지는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런 공간의 상징은 가족이다. 그의 정치영화가 특별히 ‘가족 정치드라마’라고 불리는 까닭도, 바로 그의 영화에 가족관계가 표나는 상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68년 이후 베르톨루치는 정치적 테마에서 한발 벗어나, 에로티시즘과 정치를 뒤섞는 센세이셔널한 작품들로 자신의 작품 방향을 바꾸었다. 반면에 벨로키오는 여전히 정치적 색깔이 강렬한 작품들에 집착했다. 68년 이후 유럽에서는 이미 ‘잔치는 끝났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는데, 계속해서 정치적 리얼리즘에 주목한 벨로키오는 교조적인 인물로 비치기 쉬웠다. 벨로키오는 이런 전투적인 좌편향 성향 때문에 외국에서는 더욱더 무명으로 남았다. 1987년 베르톨루치가 좌파적 시각에서 보자면 변절에 가까운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인 스타 감독으로 부상할 때, 벨로키오는 이념에 집착하는 한물간 고집쟁이처럼 비치기도 했다. 바야흐로 두 경쟁자의 승부는 한쪽으로 아주 유리하게 진행됐던 것이다.

유럽 영화계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던 벨로키오가 다시 재발견된 데는, 프랑스 영화인들의 관심이 큰 구실을 했다. 1997년 칸영화제는 <홈부르크의 왕자>를 경쟁부문에 초대, 이탈리아 본국에서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던 노감독의 건재를 다시 전세계에 알렸다. 딱딱한 정치영화일 것으로 짐작한 영화인들은 벨로키오가 보여준 꿈과 몽유병에 관한 경쾌한 역사 코미디물을 보고 노장의 능란한 솜씨와 품위에 다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칸영화제쪽은 이 작품에 이어 연속해서 두 작품을 다시 경쟁부문에 초대한다. 90년대 이탈리아 영화계의 대표주자는 틀림없이 난니 모레티인데, 이때의 분위기로 보자면 이탈리아의 진정한 ‘작가’ 감독은 단연 마르코 벨로키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작품은 <유모>(1999)와 <종교시간>(2002)이다.

<굿모닝, 나잇>이 진정성을 확보한 이유

특히 <종교시간>은 죽은 어머니가 바티칸에 의해 성녀로 추대되는 과정을 놓고, 그 가족들이 보여주는 갈등과 가치관의 모순을 마치 명상하는 종교화처럼 묘사해 벨로키오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에 접근한 작품으로 종종 해석됐다. 다시 돌아온 노장의 발걸음은 더욱 당당해졌고, 또 그를 기다리는 이탈리아 관객의 마음도 자긍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런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작품으로 발표된 게 바로 <굿모닝, 나잇>(2003)이다. 제작단계부터 다루는 내용 때문에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이탈리아인들이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고 싶어하는 70년대 테러리즘의 대표적인 사건인 알도 모로 전 총리의 납치와 살인에 관한 이야기다.



아마 벨로키오가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이 영화의 진정성을 믿지 못할 것이다. 당시 모로 전 총리를 죽인 인물들은, 별 모양으로 상징되는 극좌파 테러리스트 ‘붉은 여단’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사건의 가해자가 어쨌든 좌파인데, 좌파의 대표적인 감독인 벨로키오가 그 사건을 다룬다고 하니 자기 성찰의 엄숙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된 것이다.

모로는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최초로 좌우합작의 연정을 이끌어낸 탁월한 협상가였다. 우파인 기독교민주당 리더인 그는 당시 엔리코 베르링게르가 이끄는 제2의 정당 이탈리아공산당에 권력의 일부를 양도하여 좌우가 함께 정부를 책임지는, 대단한 정치실험을 단행했다. 그래서 그는 노련한 정치가로 추앙받기도 했고, 동시에 우파로부터는 빨갱이와 놀아난 배신자로, 좌파로부터는 무산계급을 현혹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가 총리에서 물러나 기독교민주당의 리더로서만 활동하고 있을 때, 그는 납치됐고, 또 2개월 뒤 살해됐던 사건이 바로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이탈리아 영화계는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리얼리스트 감독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감독 본인이 그 시절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아남은 장본인이 아닌가. 그래서 벨로키오의 리얼리즘은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고, 요즘은 이런 감독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2001년의 뉴욕 사건 이후 세계의 관심은 테러리즘에 쏠려 있었는데, 모로 사건을 다루는 테러리즘 영화가 발표되어 이탈리아 좌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없지는 않았다. 좌파들은 붉은 여단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시종일관 부정하지만, 시민들은 반드시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모로의 납치와 살해에 이르는 약 두달간에 한정돼 있다. 붉은 여단의 네 멤버 중 여성인 키아라(마야 산사)와 에르네스토(감독의 아들인 피에르 조르지오 벨로키오)는 부부로 가장하여 아파트를 하나 빌린다. 다른 두 멤버는 리더인 마리아노(루이지 로 카시오)와 행동대원 프리모(조반니 칼카뇨)이다. 1978년 3월16일 이들은 로마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5명의 경찰과 경호원을 살해하며 알도 모로 전 총리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름으로 부르주아의 상징인 전 총리를 납치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재판에 따라 모로에겐 사형이 언도됐다. 이들은 자신들이 빌린 아파트에 밀실을 만들어 모로를 감금한다. 단, 감옥에 갇혀 있는 붉은 여단의 동료들을 석방한다면, 전 총리의 목숨도 협상 가능하다는 여지는 남겨둔다. 전세계의 자유국가가 경악했던 납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들의 신념에 갇힌 죄수들

자그마한 노인으로 나온 알도 모로(로베르토 헤를리츠카)가 화면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이탈리아의 관객은 경악했다. 모습도 그렇지만, 분위기가 죽은 모로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바싹 마르고, 지적이며 예민하고 불안한 눈빛 등 과거의 그를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한 배우였다.

납치범들은 여전히 그를 ‘총리’(이탈리아어 대사로는 ‘프레지덴테’인데 영어의 President에 해당하는 말로, 이탈리아에선 총리를 그렇게 부른다. 말 그대로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므로)로 부르고 예우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하나씩 공개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게, 이들 납치범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시민 대중에 의해 찬양받을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문, TV를 보니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거사’에 기뻐하지 않으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는 단체 하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이탈리아공산당 당수 베를링게르가 나와, 이들의 행동을 테러리즘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멍청한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대목에선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극단주의 좌파들은 베르링게르를 우파와 타협한 변절자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좌파들은 그를 자신들의 친구이자 영웅으로 대접했다. 다시 말해, 좌파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베르링게르에게 비판받는다면 이들은 고립된 소영웅주의자로 몰리기 십상인 것이다. 벨로키오의 인물들이 늘 그렇듯 붉은 여단 멤버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맹신하며, 불행하게도 타인의 다른 생각에는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테러리스트 리더인 마리아노는 “우리는 신념에 따라 항상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도 말한다. 모로는 “당신들 코뮤니스트들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그랬지(신념에 따라 죽었지)”라고 답하며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한다.



신념에 의해 혹은 대의에 의해 자신들의 목표를 행동에 옮겼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 한구석에선 모순의 갈등이 밀려오는 것으로 영화는 전환점을 맞는다. 그 모순의 상처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은 유일한 여성대원인 키아라다. 레지스탕스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도 극우 파시스트들에게 죽음의 공포에 늘 위협받으며 살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읽어주던 책이 하나 있었는데, 파시스트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빨치산 대원들이 아내와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들이다.

붉은 여단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알도 모로도 아내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를 편지를 쓰고 있고, 키아라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빨치산 활동을 하다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남긴 편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키아라는 모르긴 몰라도 그 슬픈 편지들을 읽으며 수없이 눈물을 흘렸을 테고, 우파 파시스트들의 잔인함과 완고함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결과적으로는 과거의 파시스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느낄 때면 키아라는 환상을 보곤 한다. 흑백의 환상은 레닌 시절과 스탈린 시절의 민중의 모습, 그리고 바다 위에서 사형집행을 당하는 빨치산 대원들의 비참한 모습들로 이어진다.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 연주에 맞춰 보여지는 잔인한 다큐멘터리풍 화면들은 붉은 여단의 행위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저들 파시스트들은 더욱더 악질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키아라는 자신의 행위에 자긍심을 느끼기는커녕 더욱더 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천부의 자유에 대한 염원

어쨌든 영화는 테러리스트의 입장에서 서술됐다. 이들은 명백히 한 정치가를 납치하고 살해했는데, 그들의 행위를 파시스트들의 원죄와 연결하여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파들이 불편해하는 점이 바로 여기다. 감독이 좌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폭력분자들에게 동정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감독은 붉은 여단의 신념을 완고한 어리석음이라고 (자기)비판을 하며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그럼에도 <굿모닝, 나잇>은 좌파의 시각에서 서술한 최고의 정치드라마로 남을 것 같다. 감독은 쉬쉬하며 감추고 있던 부끄러운 부분을 과감히 드러내어 자신들의 과거도 한때는 맹신주의로 치달을 때가 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키아라의 눈물은 자기반성에서 나온 연민의 결과물로 보인다. 그녀의 환상 속에서, 죽은 알도 모로가 유령처럼 밀실에서 빠져나와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에 맞춰 발걸음도 가볍게 거리를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 모두의 ‘천부의 자유’에 대한 염원으로 해석해도 괜찮을 것 같다.(한창호 영화평론가)

P.S.2.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붉은 여단 T셔츠를 판매하는 사이트도 눈에 띈다(여성용과 아동용까지 있다). 혁명뿐만 아니라 테러도 판매된다는 건 더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새로운 지향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반성이 아닐까 싶다...

P.S.3. 붉은 여단과 관련하여 떠올릴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안토니오 네그리이다. 작년에 출간된 그의 자전적 대담 <귀환>(이학사, 2006)은 "붉은 여단이 저지른 이탈리아 전 수상 알도 모로의 납치ㆍ살해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1979년 체포수감된 이후, 1983년 프랑스로 망명해 1997년 이탈리아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경력을 웅변"하는 책이기에 그러하다. 실제 대담에서 네그리는 자신이 붉은 여단에 깊이 공감했지만 암살활동에는 반대했다고 말한다. 붉은 여단 내부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다는 얘기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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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자님과의 댓글
    from to be immortal 2007-06-27 01:28 
    알도 모로, 몇 년 전, 이 사건의 내막을 정리해 본 일이 있는지라 좀 재있는 논쟁을 헤보고 싶었으나 잘 안된다. 가설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nbs...
 
 
퍼그 2007-06-25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추천하신 <<사랑의 지혜>>에도 붉은 여단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로쟈 2007-06-25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8년 이후의 좌파를 다룬 책들에서도 심심찮게 언급은 됩니다. <사랑의 지혜>는 이미 8-9년전에 읽은 책이 돼 버렸네요...

쿠자누스 2007-06-2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도 모로> 납치극이 벌어질 때 로마 시내의 전화 통화는 두절되었습니다. 모로가 납치된 곳을 알리는 수많은 제보가 있었으나 무시되었고요. 붉은 여단의 핵심에는 나토 비밀 부대 요원들이 침투해 있었음을 붉은 여단 생존자가 폭로했고 그 비밀 부대의 존재는 1990년 안드레오티 총리가 이탈리아 국회에서 증언한 바 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독일에도 있습니다.독일이 통일되던 무렵, 도이체방크 총재 <헤어하우젠>이 피살되고 독일 극좌테러단 '적군파'가 '3세계 민중의 착취차'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암살했다는 편지를 남겼는데 그는 암살되기 직전 독일과 소련이 손잡은
'동구 경제 부흥', '제3세계 채무 면제'를 주장하여 IMF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었지요.

이 두 사람의 프로젝트가 실현되었다면, 냉전 이후 유럽 한복판 발칸에서의 전쟁도
10년 전 러시아, 아시아, 남미를 흽쓸은'외환 위기'도,
<유럽연합>이 카지노 자본의 독재기구로 굳어지는 오늘의 사태도 없었을 겁니다.

유럽의 극좌 테러단이란 앵글로 색슨 헤게모니, 카지노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 정치, 경제 요인들을 제거하고 좌파 사회 세력을 분쇄하는 비밀공작을 위장하는 데 이용된 별동부대 (유령 조직)입니다. 21세기 '반테러 전쟁'의 구실이 된 '알 카에다'는 그 후발 조직이라 보면 될 것입니다.


로쟈 2007-06-26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리도 몰랐던 내용이군요...

쿠자누스 2007-06-2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리가 몰랐을까요?

납치극의 미스테리를 추적한 저널리스트는 1979년 암살되었고
국가헌병 장군 Chiesa는 모로가 잡혀 있던 곳을 파악, 내무장관에게 보고했으나
'작전 불가'라는 명령을 받은 후 1982년 암살되었고
모로는 <붉은 여단>에게 잡혀 있을 때 나토의 비밀 작전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

Investigative journalist Mino Pecorelli thought that Aldo Moro's kidnapping had been organised by a "lucid superpower" and was inspired by the "logic of Yalta".

He painted the figure of General Carlo Alberto Dalla Chiesa
as "general Amen", [...] that

it was him that, during Aldo Moro's kidnap, had informed Interior Minister Francesco Cossiga of the localization of the cave where Moro was detained.

But he would have been ordered not to act on his information,
because of the opposition of a "lodge of the Christ in Paradise."

Pecorelli then wrote that Dalla Chiesa was in danger and would be assassinated (Dalla Chiesa was murdered four years later).

After Aldo Moro's assassination, Mino Pecorelli published some confidential documents, mainly Moro's letters to his family.
In a cryptic article published in May 1978, wrote The Guardian
in May 2003,

Pecorelli drew a connection between Gladio, NATO's stay-behind anti-communist organisation (which existence was publicly acknowledged
by Prime Minister Giulio Andreotti in October 1990) and Moro's death.

During his interrogation, Aldo Moro had referred to "NATO's anti-guerrilla activities."

Mino Pecorelli, who was on Licio Gelli's list of P2 members
discovered in 1980, was assassinated on March 20, 1979.

The ammunitions used for Pecorelli's assassination, a very rare type, where the same as discovered in the Banda della Magliana 's weapons
stock hidden in the Health Minister's basement.


-> http://www.guardian.co.uk/print/0,,4665179-105806,00.html

로쟈 2007-06-26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대로라면, Fasanella 등이 모로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유럽의 극좌 테러단이란 앵글로 색슨 헤게모니, 카지노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 정치, 경제 요인들을 제거하고 좌파 세력을 분쇄하는 비밀공작을 위장하는 데 이용된 별동부대입니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인가요? 네그리는 또 거기에 한몫하구요? 모두가 다 아는 '음모'도 여전히 '음모'인가요?..

쿠자누스 2007-06-2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BC가 1992년에 방송한 기록 영화를 보셨나요? ->
http://www.youtube.com/watch?v=l2MOpkriXb4&mode=related&search=

여기서 보시다시피 단순한 의혹이 아니라 '극좌파 테러'의 '공식 버전'을 100 % 뒤집는 증언과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지요. 네그리가 거기에 한몫을 했느냐 하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질문이 되겠지요. BBC가 아는 걸 네그리가 모른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이라든가 1987년 KAL기 실종 사건이라든가 2001년 9.11 테러라든가 2003년 앵글로 색슨의 이라크 침공이라든가 2005년 7.7 런던 테러라든가 2007년 4.16 버지니아 공과 대학 사건이라든가 모두가 다 아는 음모는 음모가 아닌가요 ?

로쟈 2007-06-26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겠습니다. 전부 4.16사건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쿠자누스 2007-06-2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납치현장의 정황이 4.16과 비슷합니다.

버지니아에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지만 정신병자 하나가 강의실 다섯 군데를 돌아다니며 순식간에 30명을 죽이고 28명을 부상시키고 자살했다는게 공식 버전입니다. -> http://cafe.naver.com/416911/284

로마에선 <붉은 여단>에 유별난 저격수가 없었고 심지어 누구는 방아쇠 당기는 것도 벌벌 떨었다는데 자동차 안의 모로는 부상도 당하지 않고 나머지 다섯 명만 즉사했지요. 그 정도 정밀 사격은 불가능하다고 <붉은 여단> 두목이 증언했구요.

현장에서 수거된 탄피 93 개 중에 절반쯤은 나토 군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 Fünf Leute im Auto wurden getroffen. Moro selber blieb unverletzt: Der BR-Chef Moretti gab Jahre später im Wortlaut zu Protokoll, dass es „mit der militärischen Präzision der BR nie weit her gewesen ist“, bei dem Aktionsablauf seien „keine hervorragenden Schützen“ gewesen. Bei einem habe die Maschinenpistole gar Ladehemmungen gehabt. Trotzdem wurden, auch das wird erst Jahre später bekannt, am Tatort 93 Patronenhülsen gefunden. Knapp die Hälfte war mit militärischem Speziallack überzogen, der nur bei den Gladio-/NATO-Truppen verwendet wurde. Munition mit diesem Lacküberzug konnte man für einen längeren Zeitraum vergraben. (http://de.wikipedia.org/wiki/Rote_Brigaden)



로쟈 2007-06-26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여단 사건과 조승희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으시는 건 음모론이라기보다는 음모신학으로 여겨집니다. 만약에 그런 진실이 따로 있고, 그걸 확신하신다면 이런 댓글을 다시는 건 넌센스입니다. 다른 행동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쿠자누스 2007-06-2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여단에 대한 저의 진술은 그럴 듯 하나 버지니아 사건과 등치하는 건 황당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두 사건의 본질, 핵심은 다르지 않다는 저의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와 단서는 제가 소개한 카페에서 보실 수 있읍니다. -> http://cafe.naver.com/416911/467

진실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요?
님에게 진실과 허구(넌센스)를 분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님의 블로그에 이런저런 정보나 저의 주장(가설)을 올려 님과 논쟁(소통)을 하는 것도 제게는 재밌고 의미있는 행동입니다.

로쟈 2007-06-27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여러 정치적 사건들이 음모/공작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차후에 밝혀지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의혹이 음모설을 정당화하는 건 아니며, 버지니아 사건의 경우에도 '가설을 입증한는 증거와 단서'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이네요. 사실 기독교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의 시나리오도 믿는 자의 진실이죠. 저는 맨정신으로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신앙과 일상생활의 양립에 대해서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음모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쿠자누스 2007-06-2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양'을 보면서 속이 후련했던 게, 모두가 은혜를 받아 '믿습니다'를 외치며 아우성을 치는 순간, "거짓말이야"(김 추자)가 울려 퍼질 때 였지요. '기획 테러'가 터지면 언제나 뒤따르는 '공식버전'이 활개칠 때 마다 이 노래를 퍼뜨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왜곡하는 권력과 미디어가 퍼뜨리는 '공식버전' 치고 사실로 입증된 게 없는데도 이 터무니 없는 '공식버전'을 음모라고 부르면 '음모론자'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Aldo Moro를 입력해서 해외 사이트를 검색하다 보니 별별 괴담이 다 나옵니다. 이렇게 모르고 살았나 하는 한숨밖에 나오질 않네요.버지니아 사건도 <알도 모로> 사건 처럼 국회 차원의 조사가 들어가고 내부 증언이 쏟아져 나오면 진상이 드러날텐데 아직까지는 로마에서처럼, 초기 진압 작전을 사보타지했다는 증언 하나 밖에 없네요. ( http://cafe.naver.com/416911/2 )

쿠자누스 2007-11-2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 감독이 만든 영화,
1986년 전 영화(원제: Il Caso Moro/감독: 주세페 페라라)에 비하면 완전 초딩 버전이네여.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모르는 시청자들에겐 스릴러 영화처럼 느껴질 만한 영화다...주세페 페라라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당시 이탈리아 정치인들이나 비밀경찰, CIA까지 모두 모로가 죽기를 바랐다고 주장했다"
http://www.ebs.co.kr/Info/CyberPR/Board/HighLight_list.asp?paramdate=2007-11-25#h8156

 

컬처뉴스에서 영화 리뷰 하나를 옮겨온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검은 집>에 대한 언급 때문인데, 실상 리뷰 대상인 신태라 감독의 <검은 집>은 하이스미스의 작품과는 무관하다고 한다(감독의 이름은 생소하다). 나 역시 이 리뷰와는 무관하게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이미지로 띄워놓는다. 영화의 원작이라는 기시 유스케의 소설 <검은 집>(창해, 2007)과 함께. 사실 그녀의 <검은 집>(표제작이 포함된 작품집이 국내에선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민음사, 2005)로 번역돼 나왔다)에 대해서는 지젝이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에서 다루고 있기도 하다(타인의 환상을 침범하지 말라, 는 게 교훈이다). 공포영화를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리뷰는 그닥 공포스럽지 않다...

컬처뉴스(07. 06. 14) 아무 감정 없는 잔혹한 살인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라는 미국작가가 쓴 소설 중에 <검은 집 Black House>이라는 게 있다. 한 외딴 마을의 뒷산에 이른바 검은 집이라 불리는 흉가(凶家)가 하나있는데, 마을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선술집에 모일라치면 어김없이 화제로 등장하곤 했다. 귀신을 봤다는 등 여러 설(說)들이 많았다. 어느 날 그 흉가에 대해 듣게 된 한 나그네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곳을 샅샅이 뒤져보고는 그저 텅 빈 집일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음날로 마을사람들한테 그 사실을 고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괜히 호들갑을 떤다는 투로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일단의 마을 사람들이 격분하여 나그네를 때려죽이고 말았다. 마을사람들한테 그 흉가는 바로 환상공간이었고, 그 불쌍한 나그네는 환상공간을 침범하는 우를 저질렀던 셈이다. 신태라 감독의 <검은 집>은 사실 이 소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시 유스케가 쓴 동명의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화두로 꺼낸 까닭은 무엇인가?

 

 

 

 

 

 

 

 

신태라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검은 집>은 한국영화로서 드물게 보는 잘 만든 스릴러 영화다. 이전에도 스릴러 영화는 심심치 않게 만들어졌지만, 무늬만 스릴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검은 집>은 이 장르에서 거둔 하나의 작은 성취라고 할만하다. 이 영화는 보험사기라는 현대사회에 만연해있는 병폐현상과 싸이코패스라는 원인모를 병리현상을 절묘하게 결합한 매우 지적인 스릴러 영화라는 것이다. 시종일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보험사기와 싸이코패스는 이 영화를 푸는 두 개의 핵심 코드가 된다.

다 알다시피 보험(保險)이란 적금(積金)과는 다르다. 일정기간 적립했다가 만기가 되면 원금은 물론이고 이자까지 쳐서 받는 적금과는 달리 보험은 만기가 되더라도 원금 회수를 기대할 수가 없다. 사망, 화재, 질병 등 뜻하지 않은 사고에 대비하여, 미리 일정한 보험료를 내게 하고,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일정한 보험금을 주어 그 손해를 보상하는 제도가 보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고가 나면 불행 중 다행(한몫 챙기니까)이지만, 사고가 안 나면, 보험금은 한 푼도 없다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다행 중 불행이랄까?

바로 그 틈바구니 속에 보험사기라는 유혹이 끼어들게 됨은 물론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뜻한 바 있는 사고’를 통해 위장(僞裝)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험회사에서는 보험사정 업무를 통해서 뜻하지 않은 사고냐 ‘뜻한 바 있는 사고’냐를 가리는데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정의파 싸나이 전준오(황정민)에게 어느 날 보험사기의 전조(前兆)를 알리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오게 되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검은 집’으로 초대를 받게 된다. 전화문의의 내용인즉, 자살을 해도 보험금을 탈 수 있냐는 것이다. 대답은 물론 ‘탈 수 있다’이고, 바야흐로 억대 보험금을 노린 범인의 대담한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 범인이 단순 사기꾼이 아니라 싸이코패스였다는데 스릴러물로서의 영화의 묘미가 있다. 그렇다면 싸이코패스(psychopath)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화는 친절하게도 이에 대해 간단명료한 정의를 내려준다. 극중 한 젊은 심리학도가 준오에게 찾아와서 자신이 작성한 석사논문을 통해 싸이코패스와 싸이코의 결정적 차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준다. 매우 시사적인 내용이므로 전문을 인용해보자.

심리학도(한승규) : 싸이코패스는 선천적으로 감정의 기능을 갖지 못하고 태어났어요.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데다 죄책감마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거죠. 개다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설령 자기 자식에게 조차 잔혹한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요.

전준오 : 아니 그럼 싸이코랑은 다른가요?

한승규 : 싸이코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냥 아이를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것뿐예요. 하지만 싸이코패스는 다릅니다. 아이를 죽이면 보험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죽이는 거죠.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서 사람을 그냥 물건 보듯 하는 겁니다.

전준오 : 병입니까?

한승규 : 전 병으로 봅니다. 치료할 방법은 없어요. 사회에서 격리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참고로 극중 이 남자는 그 싸이코패스로부터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죽게 마련이라는 스릴러물의 공식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님을 새삼 일깨워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인성을 가진 싸이코패스가 보험사기에 뛰어들었고, 순박한 보험사 직원 전준오가 그 상대역으로 간택을 당한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주인공 전준오가 과연 어떻게 그 악의 손길을 물리칠지가 영화 감상의 관건이 됨은 물론이다.

전준오 역을 맡은 황정민은 기대한 대로 무척이나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다. 황정민은 일치감치 캐릭터 배우(character actor : 조연급)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았고, <너는 내 운명>이라는 가장 최근작을 통해서 당당하게 스타로서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말하자면 캐릭터 스타(주연급)로의 승격인 셈이다. <검은 집>에서 그는 캐릭터 창출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연기변신을 보여준다.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 이병헌을 위협하는 극악한 캐릭터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던 황정민은 바로 얼마 후 <너는 내 운명>에서는 순박하기 이르데 없는 우직한 노총각으로 180도 변신을 한다. 그랬던 그가 다시 열정적이면서도 인간적이고, 소심한듯하면서도 대범하게 행동에 나서는 보험사 직원 역으로 다시 관객 앞에 섰다. 관객이 응답할 차례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검은 집>의 핵심 줄거리를 하나도 발설하지 않고 리뷰를 마무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검은 집’의 환상공간을 불가피하게 침범(侵犯)하는 일이 될 터이니 말이다. 환상공간을 대면코자 한다면, 직접 ‘검은 집’을 방문하시길 바란다.(김시무/ 영화평론가)

07.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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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6-1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는 바뀌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로쟈님의 페이퍼가 여전히 너무나 재미있다는 것! 로쟈님의 시도 참 좋았어요.

로쟈 2007-06-15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온 글을 재미있다고 하시니까 머쓱하네요.^^;

Joule 2007-06-15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모르시나봐요. 재미있는 글 퍼오는 것도 능력이라는 거. 전 신문도 안 보고 테레비도 없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뉴스를 알라딘 서재를 통해 알게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