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다 보니 낯익은 유명인사들의 부음도 자주 접하게 된다. 현지시간으로는 엊그제(26일)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배우 폴 뉴먼의 경우도 내겐 '낯익은' 유명인사다. 부음기사에서 그가 1925년생이었다는 걸 알고는 잠시 놀랐다. '멋진 악당' 혹은 '멋진 중년'을 상징하는 배우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기억에는 많이 잡아줘도 60대에서 멈춘 배우이건만). 그의 명복을 빌면서 부음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 1969년 만들어진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출연한 폴 뉴먼(왼쪽)과 로버트 레드포드

한겨레(08. 09. 29) 행동하는 ‘멋진 악당’ 천상의 무대로

깊고 푸른 눈을 가진 인자한 얼굴의 노 신사는 담담하게 말한다. “이봐 마이클. 눈을 크게 뜨고 보게!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인생이고, 끌고 온 인생이야.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거지.”(<로드 투 퍼디션> 중에서)

26일(현지시각) 숨진 할리우드의 노 신사 폴 뉴먼은 50여 년의 연기 인생 속에서 늘 세계와 불화하는 ‘악당’이자 ‘반 영웅’이었다. 1963년 <허드>에서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해 병든 소를 파는 이중적인 인간 ‘허드’를 연기했고, 67년 <폭력탈옥>에서는 삐딱하고 쿨한 자기 파괴적인 죄수 ‘루크’를 맡았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주연을 맡은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는 유쾌한 은행털이 강도 ‘부치 캐시디’로 열연을 펼쳤다.

2002년, <로드 투 퍼디션>에서 77살의 노 배우는 젊은 톰 행크스를 앞에 놓고 1930년대 시카고 암흑가의 냉혈한 보스 ‘존 루니’를 섬뜩하게 재현해 낸다. <뉴욕타임즈>는 27일 인터넷판에서 그를 “어떤 배우도 그만큼 불완전한 인간을 많이 연기하진 못했다”고 평했다.

뉴먼은 스크린 바깥에서도 인상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열정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으며, 인권을 적극 옹호했다. 그래서 리처드 닉슨의 ‘블랙리스트’(enemies list)에 오르기도 했는데, 뉴먼을 이를 두고 자주 “내가 이룬 가장 자랑스런 성취”라고 자부심을 보였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 스콧이 78년 알콜과 약물 과용으로 숨지자 ‘스콧 뉴먼 재단’을 설립하고 약물 반대 영화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다. 또 1982년 만든 ‘뉴먼즈 오운’이라는 식품회사가 크게 성공하자, 여기서 번 수익금 2억달러를 자선사업을 위해 사용했다. 암과 같은 큰 질병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여름 캠프도 만들었으며, 항암 치료 탓에 머리털이 빠진 아이들을 위해 카우보이 모자를 직접 골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뉴먼은 또 미국 자동차 경주대회를 여러 번 석권한 훌륭한 카레이서기도 했다.

뉴먼은 열정적인 배우였고, 행동하는 양심이었으며, 무엇보다 매우 유쾌한 사람이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부부는 성명을 내어 “미국의 아이콘이자 박애주의자, 어린이들을 위한 챔피언이었다”고 그를 기렸다.(길윤형기자)

 

경향신문(08. 09. 29) [여적]폴 뉴먼

영화사상 최고의 ‘라스트 신’을 꼽으라면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내일을 향해 쏴라’(원제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를 우선 떠올리게 된다. 1969년 개봉된 이 영화는 1890년대 전설적 갱의 실화를 토대로 한 것이다. 현금수송 열차와 은행을 터는 강도 행각을 벌이면서도 인간적 냄새를 풍기는 두 젊은이는 탄광촌 은신처에서 군대에 포위되자 ‘이번엔 호주로 가자’고 다짐하며 권총을 치켜들고 뛰쳐나온다. 순간 화면이 정지되고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탄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비극적 결말의 갱 영화이지만 인간미와 유머 감각이 돋보인다.

폴 뉴먼이 암 투병 끝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스팅’ ‘상처뿐인 영광’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허슬러’ ‘컬러 오브 머니’ 등 숱한 화제작으로 이름을 떨친 그의 강렬하고도 우수에 찬 푸른 눈은 반항적 젊은이, 차가운 승부사, 정의로운 중년, 관조적인 노년 등 다양한 캐릭터를 낳으며 세계인들의 심금을 흔들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의 뉴먼은 더욱 멋진 매력의 소유자다. 무엇보다 그는 ‘초현실적 기업 모델’을 창시한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1982년 설립한 ‘뉴먼즈 오운’이 그것이다. 인공조미료나 방부제가 없는 친환경 드레싱을 제조·판매하는 이 회사는 초기 자본금 1만2000달러에 첫해 수익만 92만달러를 올리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다음해 수익금 100%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뉴먼은 단 한 푼의 월급도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최근까지 미국과 해외에 기부한 금액은 2억2000만달러(약 2200억원). 이밖에도 난치병 아이들을 위한 산골짜기 캠프를 미국 31개주와 해외 28개국에 건설하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돕기 위한 레스토랑 경영에 나서는 등 나눔과 베풂의 삶에 정열을 바쳤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처럼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감세는 범죄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 “나는 무척 운이 좋았다.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들보다 불운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갖는 기업이 늘고 있다지만, 뉴먼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투철한 원칙과 신념을 가진 기업인들이 얼마나 될까.(송충식 논설실장)

08. 09. 28.

P.S. '폴 뉴먼'하면 <내일을 향해 쏴라>나 <스팅> 같은 영화를 단박에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개인적으론 장년의 그가 신예 톰 크루즈와 주연했던 영화 <컬러 오브 머니>(1986)의 인상도 강하다. 극장에서 폴 뉴먼을 본 최초의 영화였던 듯하다. 폴 뉴먼이란 배우의 존재감을 대형 스크린에서 맛보게 해준 영화(http://www.youtube.com/watch?v=U9rGDYjVr0c). 감독은 마틴 스코시즈였다. 그러고 보니 그맘때는 나도 당구를 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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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9-2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삶을 살단 간 배우군요. '우리처럼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감세는 범죄와 다를 바 없다'라는 구절이 콕! 박히네요.

로쟈 2008-09-28 22:44   좋아요 0 | URL
네, 있는 사람들이 탐욕만 버린다면 좀 멋지게 사는 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요...

조선인 2008-09-29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이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ㅠ.ㅠ

로쟈 2008-09-29 22:33   좋아요 0 | URL
젊었을 때는 톰 크루즈보다 더 멋있더군요...

비연 2008-09-2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돌아가셨군요. 명복을 빕니다. 로쟈님의 브리핑으로 그의 생애를 한번 더 돌아보게 되네요. 이제, 그 옛날 제 마음에 추억으로 남겨진 명장면 속의 배우들이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로쟈 2008-09-29 22:32   좋아요 0 | URL
한 세대가 가는 거 같습니다...

sophia49 2008-10-16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제 블로그에 담아갑니다.
올려주신 폴 뉴먼의 이야기...넘 좋아요.

로쟈 2008-10-16 21:18   좋아요 0 | URL
네, 이건 제가 책사랑에 안 옮겨놓았던가요?..
 

무더위 때문에 밤낮이 바뀌었다. 그래서 좀 어둑해져야지 무얼 해볼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영화도 심야영화가 제격이다. 이번주에 개봉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가 딱 심야관람용인데, 이미 '걸작'이라는 입소문이 파다하다. 팀 버튼의 <배트맨>을 능가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실 팀 버튼과는 코드가 잘 맞지 않아서 재미있게 봤을 테지만 별로 인상에 남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다크 나이트>는 흥미를 끈다. 매일같이 한심한 뉴스들만 쏟아지는 것도 이 '비극적인 영웅'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긴다. 지난주 심야에 본 <놈놈놈>이 다 해갈시켜주지 못한 갈증을 <다크 나이트>는 해소시켜줄지 모른다(<놈놈놈>은 뮤직비디오로 훌륭하다).  

한겨레(08. 08. 04) '다크 나이트’ 악의 화신 vs 고뇌하는 영웅

6일 국내에서 개봉하는 <다크 나이트>가 북미에서 개봉 10일 만에 3억달러가 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미 개봉 전부터 ‘걸작’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던 <다크 나이트>는 슈퍼히어로에 열광하는 미국만이 아니라 기자시사회를 연 국내에서도 호평 일색이다. 과연 팀 버튼의 <배트맨>을 능가하는 걸작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팀 버튼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팀 버튼의 <배트맨>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새로운 걸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크 나이트>는 야심만만하게도, 낮 장면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첫 장면의 주인공은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다. 팀 버튼이 <배트맨2>에서 펭귄맨을 중심에 세운 적이 있긴 하지만, <다크 나이트>의 전략은 그것과 다르다. 슈퍼히어로의 신화를 뒤틀린 엽기 동화로 대체하는 전략을 썼던 <배트맨2>와 달리, <다크 나이트>는 코믹북의 이미지에 머물렀던 슈퍼히어로를 완벽하게 현실로 이끌어낸다. <다크 나이트>를 보고 있으면 조커이건, 배트맨이건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럴 듯하다, 라는 느낌을 넘어서 거의 완벽한 리얼리티를 구현한다. 현실의 어디에선가 그들을 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배트맨’이란 캐릭터는 슈퍼히어로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배트맨이 처음 등장했던 1930년대 말은 미국의 갱단이 사회 곳곳으로 한창 세력을 넓혀가던 시점이었다. 일상에서 갱단의 폭력을 목도했던 시민들에게는 정말로 배트맨과 같은 ‘자경단’이 필요했다. 또한 배트맨은 외계에서 오거나 기이한 사고로 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슈퍼히어로를 택한 존재다. 악당에게 부모를 잃고, 복수의 일념으로 자신을 단련하여 ‘초인’이 된 사나이. 공포의 존재인 ‘박쥐’를 자신의 상징으로 사용한, 선과 악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고뇌하는 슈퍼히어로. ‘보이 스카우트’의 정의를 구현하는 슈퍼맨과는 대조적으로, 배트맨은 악의 근원을 쫓아가며 때로 악에 물들기도 하는 ‘탐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초월적인 영웅이 아니라, 우리도 능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은 슈퍼히어로가 바로 배트맨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현실적이면서도 만화적인 캐릭터 배트맨을 필름 누아르와 갱스터의 공간으로 과감하게 밀어 넣는다. 초현실주의적인 판타지로 <배트맨>을 재구성했던 팀 버튼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배트맨이라는 존재를 재해석한 것이다. 다만 <배트맨>과 <다크 나이트>의 원점에는 1986년에 발표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크 나이트 리턴스>에서 배트맨은 권력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시민들을 위한 자경단이 된다. 배트맨은 진짜 정의를 지키기 위한 ‘범죄자’, 즉 진정한 다크 나이트가 되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 리턴스>와 <왓치맨> 등 미국 만화가 성인들의 오락이자 예술인 그래픽 노블로 성장하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영화로 녹아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악을 멸하고자 폭력이라는 위법을 택한 배트맨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은, 지금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상황이다. 슈퍼히어로는 단지 가상의 존재가 아니다. 현대의 슈퍼히어로는 21세기 대중의 이상이며, 그들이 갈구하는 새로운 영웅 신화다. <다크 나이트>야말로 가장 완벽한 비극적인 영웅이고.(김봉석/영화평론가)

08. 08. 04.

P.S. 영화평론가 김봉석씨가 시사인에 쓴 기사도 참조할 만하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0). <다크 나이트>란 걸작의 배경에 '그래픽 노블'의 힘이 놓여 있다는 걸 지적하고 있다.

시사인(08. 07. 29) '배트맨’의 힘은 ‘그래픽 노블’의 힘

지난 7월18일 북미에서 개봉한 <다크 나이트>는 사흘 동안 무려 1억8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신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한다. 단지 흥행기록만이 아니다. 각종 매체의 비평에서도 찬사 일색이고, 세계 최대 영화 정보 사이트인 IMDB에서도 역대 1위였던 <대부>를 누르고 최고 평점을 기록했다. <배트맨>의 팀 버턴을 시작으로 <엑스맨>의 브라이언 싱어와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가 슈퍼히어로 영화, 코믹스 영화의 수준을 한 계단 높여놓기는 했지만 <다크 나이트>의 엄청난 성공은 어리둥절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코믹스 영화라는 장르가 갱스터, 필름 누아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슈퍼히어로, 그 중에서도 배트맨은 팀 버턴과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명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왜 사람들은 ‘배트맨’에 열광하는 것일까? 1930년대에 시작된 <배트맨>은 가장 현실적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슈퍼맨이나 엑스맨 등은 초월적 능력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악당에게 부모를 잃었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악을 없애는 슈퍼히어로가 되었다. 수많은 무술을 익히고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 배트맨은, 국가권력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악을 스스로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자경단’이다. 경찰이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애지는 않는다. 권력이 정해놓은 법질서의 바깥에서 암약하거나 슬쩍 빠져나가 버리는 악이 너무나도 많다. 경찰이나 검찰이 부패한 경우도 있고, 법의 한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우리는 배트맨을 원하게 된다. 나에게 힘만 있다면, 당장 거리에 나서 악당을 처단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 제목에서 ‘배트맨’을 뺀 까닭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의를 위한 것인지, 그런 행동으로 과연 완전한 정의가 도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박쥐 가면을 뒤집어쓰고 거리에 나선 순간부터, 배트맨은 고뇌할 수밖에 없다. 왜 경찰이나 검찰에게 맡기지 않고, 배트맨은 스스로 정의의 수호자가 된 것일까? 만약 그가 정당하다면, 왜 그는 가면을 쓰는 것일까? 어쩌면 배트맨은 단지 사적인 복수를 위해, 아니 부모를 죽인 악당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하기 위해 악당을 물리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아닐까?

<다크 나이트>의 배경인 고담 시에서도 유사한 의문이 제기된다. 배트맨이 악당을 잡기는 하지만, 똑같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점은 어떻게 볼 것인가? 단지 정의를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위법을 용납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이다. <배트맨>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과 로빈> <배트맨 비긴즈>로 대중에게 이미 익숙해진 ‘배트맨’을 버리고 왜 <다크 나이트>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1986년에 발간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어둠의 전사가 된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며, 철학과 정치 논쟁을 일으킨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근 국내에도 출간된 앨런 무어의 <왓치맨>과 함께, 코믹스라고 불리던 미국 만화를 성인의 ‘그래픽 노블’로 끌어올린 걸작이다.

‘다크 나이트’는 어둠의 기사, 밤의 기사라는 뜻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를 ‘화이트 나이트’라고 부른다. 하비 덴트는 고담 시의 악당 절반을 감옥에 집어넣고, 조커를 잡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건다. 배트맨은, 자기가 아니라 하비 덴트가 시민의 영웅, 고담 시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비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배트맨은 무엇이든 한다. 하지만 ‘화이트 나이트’는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혼돈과 악의 화신인 조커에 의해, 그의 내면에 있던 광기가 분출하며 새로운 악당 ‘투 페이스’가 되어버린다.



투 페이스는 어쩌면, 배트맨과 조커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커는 완벽한 광기와 혼돈의 상징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돈에도 욕심이 없고, 권력에도 욕심이 없다. 단지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여버리는 데만 열중한다. 그런 조커가 배트맨에게 말한다.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너와 노는 것이 가장 신나기 때문에. 네가 있어야만 내가 완성된다고. 그 말의 의미는, 조커의 극단에 배트맨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조커와 달리, 배트맨은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자경단’이지만, 배트맨은 결코 선을 넘지 못한다. 누구도 죽이지 않고, 무엇도 파괴할 수 없다. 배트맨은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다만 법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하면 제대로 악을 처단할 수 없기에, 스스로 세간의 비난을 받으며 묵묵하게 정의를 수호하는 ‘다크 나이트’를 자임하는 것이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뭔지 보여주다
<배트맨 비긴즈>에 이어 <다크 나이트>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액션이나 스펙터클은 물론 최고다. 그리고 슈퍼히어로라는 비현실적인 존재가 사실은 대중의 이상이며 현대의 신화에 비견될 존재임을 탁월하게 증명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단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재능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물론 최근 출간된 제프 로브와 짐 리의 <배트맨:허쉬>와 조지 프랫의 <배트맨:악마의 십자가>를 보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수십 년 세월 동안 엄청난 세공과 실험적인 변주를 거치며 다듬어져온 과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배트맨:허쉬>는 배트맨의 모든 조연과 악당 캐릭터는 물론 슈퍼맨까지 등장해 심오한 캐릭터로 다듬어진 배트맨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런 ‘그래픽 노블’의 성과가 있었기에, 팀 버턴의 <배트맨>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존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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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8-0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는 영화 중에 하나랍니다.
배트맨도 배트맨이지만 배우들이 굉장히 좋기 때문에요.
한 명은 이제 더 이상 볼 순 없지만요.

로쟈 2008-08-05 09:10   좋아요 0 | URL
네, 히스 레저죠. 팬들이 많더군요...

2008-08-05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05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05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본격적인 여름방학을 맞아 볼 만한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문제적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이번주 개봉작 <미스트리스>(2007)도 그 볼 만한 영화에 포함시키고 싶다(미성년자 관람불가이므로 '방학'과는 무관하군!). 원제는 '늙은 정부'. 개괄적인 소개는 이렇다.

세계일보(08. 07. 25) 치명적인 사랑의 쾌감…팜프파탈, 21세기 페미니스트로 격상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은 말은 의외로 더 빨리 달린다고 한다. 고통이 쾌감으로 변해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리 달릴수록 화살은 더 깊게 박히고 결국 말은 죽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유혹. 비단 말뿐인가.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사랑은 지금 당신 곁에도 존재한다.

‘미스트리스’는 이처럼 치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스테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처럼 근대 이전 유럽을 배경으로 여성 중심의 사랑을 그렸다. ‘로망스’ ‘팻걸’ 등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성적 코드로 풀어내던 여성 감독 카트린 브레야가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Une vieille ma?resse

1835년 파리,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적 혼돈을 반영하듯 상류사회에서도 온갖 스캔들이 난무한다. 사교계를 주름잡던 꽃미남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귀족 가문의 규수 에르망갸드(록산 메스키다)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출신 무희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와 깊은 사이다. 둘은 10년 동안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왔다. 마리니는 이 관계를 끝내기 위해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올린 마리니와 에르망갸드는 파리를 떠나 조용한 해변으로 이사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날 벨리니가 이들 앞에 나타난다.

‘미스트리스’는 벨리니와 마리니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붙어있는 존재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애정없는 욕정만을 취하지만 운명처럼 질박한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전쟁터에 나간 말 엉덩이에 박힌 화살처럼 서로의 삶에 파고든다. 사랑의 치명적인 쾌감을 거부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측은하다.



정부(情婦)라는 의미의 제목에서 보듯 벨리니는 결혼 제도를 위협하는 인물, 남성의 삶을 파멸로 모는 위험한 존재다. 이런 여성을 두려워한 남성들은 이들에게 팜므파탈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따라서 남성적 시각에서 벨리니는 요부이자 마녀다. 하지만 영화는 벨리니를 옹호한다. 그녀는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봉건사회의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구현하는 현대적 인물이다. 결국 영화는 고전의 팜므파탈을 현대적 페미니스트로 격상시킨 여성주의 영화다.

‘미스트리스’는 전형적인 유럽 스타일 영화다. 서사는 절제되고 묘사는 튀지 않는다. 정적인 화면과 느린 드라마도 이야기를 곱씹게 만든다. 액션영화 ‘트리플X’로 얼굴이 알려진 아시아 아르젠토는 도발적인 시선과 청순한 눈빛을 동시에 선보이며 벨리니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그는 이탈리아 웨스턴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로도 유명하다.(이성대기자)

영화는 지난주에 국내 첫시사회가 있었던 듯한데, 씨네21에서 가져온 첫 반응은 이렇다.

이 영화

1835년 왕정복고기 파리. 잘난 신사와 귀부인들이 남몰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읽고 있을 무렵이다. 바람둥이 귀족 리노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10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애인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를 인생에서 잘라내고, 어리고 부유하고 정숙한 귀족 처녀 에르망갸드(록산느 메스키다)와 결혼하려 한다. 그러나 벨리니는 중얼거린다. “날 떠날 순 없을걸.” <미스트리스>의 제2장은 아주 긴 플래시백이다. 손녀사위를 둘러싼 추문을 익히 들은 플레르 후작부인이 마리니를 불러 사랑의 역사를 낱낱이 말해달라고 청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스페인 투우사와 이탈리아 공주의 사생아라는 소문의 여인 벨리니에게 도도한 마리니는 초면에 경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파티에서 악마로 분장한 벨리니에게 사로잡힌 마리니는 무모한 구애를 시작하고 급기야 벨리니의 남편과 결투해 중상을 입는다. 여자는 가련한 남편을 차버리고 귀족사회는 들끓는다. 그러나 이것은 노래의 1절일 따름이다. 둘은 한때 먼 나라로 떠났고 행복하였다.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잃었다. 울부짖고 귀를 틀어막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들의 일상에서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남은 나날을 그들은 본능적인 애무로 연명해왔다. 결국 마리니는 에르망갸드와 결혼식을 올리고 파리를 떠나 완벽해 보이는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날 산책을 나간 바닷가 길 위에서 마리니는 벨리니와 맞닥뜨린다.(김혜리기자)

Une vieille ma?resse

100자평

오호! 통재라. 왜 제목을 <미스트리스>라고 하여, 영화의 핵심적 미학을 깎아 먹는단 말인가? <미스트리스>는 19세기 탐미적인 당디(Dandy)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바르베 도르비이’의 소설 <Une Vielle Maitresse>를 원작으로 삼아, 과격하고 야하기로 소문난 여성감독 카트린느 브레야가 영화화한 19세기 시대극으로 2007년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DB등에 <늙은 정부> 혹은 <오래된 여인>등의 이름으로 중복 등재되어 있으며, 국내 개봉 제목은 <미스트리스>이다.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제목은 단연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늙은 정부>이다.) 영화는 19세기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충동적이고 격렬한 사랑과 결국 파멸을 향해 가는 순수정념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들에 의해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정면으로 발언한다. <미스트리스>는 자주 접하기 힘든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영화이다. 장면 하나하나의 미장센이나 감정을 끌고가는 유려하고도 절제된 편집은 모두 감탄스럽다. (특히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이나, 거울과 창문을 이용한 미장센을 눈여겨 보라!) 또한 캐스팅이 완벽하다. 벨리니 역할을 한 '아시아 아르젠토'의 연기는 인물과 배우를 도저히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만들며, 마리니 역할의 ‘후아드 에이트아투’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선을 지닌 얼굴과 몸만으로도 영화의 주제를 150% 전달한다. 또 <팻걸>등의 전작에서 함께 했던 ‘록산느 메스키다’ 역시 냉정하고 고혹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미술도 훌륭하여 소품 하나에도 당시 귀족사회의 정서(혹은 원작자의 복고주의적 태도)가 담겨있는 듯 하다. 로맨틱코미디류의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 좋아하는 관객에겐 비추, <색, 계>가 좋았거나 혹은 불만족스러웠던 관객이라면 간만에 나온 ‘진하고 징하고 찡한 사랑영화’를 놓치지 마시라.(황진미/ 영화평론가)

08. 07. 28.

P.S. 환경을 바꾸다 보니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들쭉날쭉하게 되었다(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페이퍼라니!). <지젝이 만난 레닌>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믿는지 모른다'는 장을 읽다가 둘러본 몇몇 사이트에서 읽은 소개기사들이(그 중 하나는 지난 금요일에 지면에서 읽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카트린 브레야의 전작들은 예전에 다룬 바 있다('카트린느 브레이야'라고 주로 적었다). '100자평'에도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만 마네에 대한 오마주는 그녀의 영화에서 반복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네와 티치아노'(http://blog.aladin.co.kr/mramor/912039)를 참조할 수 있으며,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로망스 대 포르노'(http://blog.aladin.co.kr/mramor/800293)에서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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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7-2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에서 전단을 읽었더랬죠. 가봐야죠,^^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저도 동네에 들어오기를 기다려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8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35년이면 7월 혁명으로 샤를르 10세가 쫓겨나고 온건한 루이 필립이 등극하면서 7월 왕정이라고 하는데...그 전인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가 재위한 때를 왕정복고기라고 합니다.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시가전하는 장면이 1830년 7월 혁명입니다.평론가가 착각했네요.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ㅎㅎ 기자가 착각했거나 소개자료의 오류로 보입니다...
 

당장은 '놈놈놈'도 볼 형편이 안되지만 여건만 된다면 챙겨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은 두 대중가수에 관한 것이다. 존 레넌과 밥 딜런. 더 잊어먹기 전에 일단 기사라도 챙겨놓는다. 시사인에서 읽은 리뷰기사들이다(한겨레의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962.html 참조).    

시사인(08. 07. 22) 누구나 아는, 아무도 몰랐던 존 레넌

누군가를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 ‘누군가’는 절친한 지인일 수도, 유명한 공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그는 어떤 사람인가’, 대답이라도 내놓을라치면 그만 말문이 막히고 더러는 숨까지 턱, 막혀버리기 일쑤다. 잘.안.다. 고작 세 음절로 확언하기에는 인간이라는 회로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흔해빠진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일평생 제 존재의 이유 하나 제대로 간파해내기도 버거운 인간이다. 그러니 하물며 남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가 필요할 터이다. 가령 존 레넌 같은 인간에 대해 아는 척할 때는 말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우리가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해온 어느 팝 스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영화가 담아낸 존 레넌은 누구나 잘 아는 존 레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존 레넌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언젠가 어렴풋이 듣긴 했는데 그 누구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의 인생 후반전을 다룬다. 특히 비틀스 이후 존 레넌,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존 레넌의 삶에 집중한다. 당대 최고 팝스타 존 레넌이 왜 별안간 혁명을 노래하게 되었는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라며 시비걸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제작진은 “존 레넌 일생의 진심이 담긴 사회활동이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게 안타까워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던 이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평화를 알리려 했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려고 감독 두 명이 달라붙어 찾아낸 당시 자료 중에는, 들끓는 베트남 전쟁 반대여론에 맞서 누구처럼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애쓴 닉슨 대통령의 ‘특별 담화’도 있다.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연예인은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는 그의 모습은 뇌 용량 2MB짜리 대통령을 우리만 가진 게 아니었구나, 안도(?)하게 만드는 뜻밖의 효과도 있다. 그때 존 레넌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회 불안을 선동하는 ‘배후 세력’으로, 워싱턴에 모인 순수한 촛불 시민(세상에! 그들도 촛불을 들었더라)을 반미·반정부 투쟁으로 이끈 ‘전문 시위꾼’으로 남아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이 97분짜리 다큐멘터리에 소상히 담겨 있다.



존 레넌과 닉슨 정부의 ‘역사적 대결’
<존 레논 컨피덴셜>의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즉 ‘미국 대 존 레넌’이다. 미국에 맞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노래와 행동으로 저항한 아티스트와 그를 두려워하고 미행하며 도청하는 걸로 성이 안 차 결국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 닉슨 정부. 이 역사적인 대결의 거대한 실체를 가볍게 종주해내는 이 늠름한 다큐멘터리는, 존 레넌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 남보다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를 확보했다. 존 레넌의 연인 오노 요코의 회상에서 미국의 대표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의 증언, 존 레넌을 미행한 당시 FBI 요원의 자백까지. 물경 수십명에 달하는 관련자 육성 인터뷰와 흥미진진한 미공개 동영상 자료가 뒷받침된 덕에, 단순한 인물 다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그가 살다 간 한 시대를 통째로 증언하는 생생한 목격담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영화가 있다. ‘감탄’하는 영화, ‘감동’받는 영화,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은 존 레넌의 멋진 인생에 ‘감탄’하고 그의 용감한 노래에 ‘감동’받다가 결국 이 소중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감독에게 ‘감사’까지 하게 만드는 영화다. 충격과 감격을 동시에 선사하는 근사한 다큐멘터리다. 물론, 존 레넌이 워낙 근사한 삶을 살다 간 덕분이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시사인(08. 06. 03) 밥 딜런 그 인간, 참 복잡한 인물이네

he는 her가 되고 her는 here가 되었다가 다시 there로 변한다. <아임 낫 데어>의 제목 ‘I’m not there’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라는 단어에 도달하는 첫 시작은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짐작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인생을 그려내기 위해 ‘그녀’의 연기에 기대는 영화이면서,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인 동시에 그때 ‘그곳’의 혼돈을 증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에 도달하는 시작처럼, 캐릭터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간의 핵심에 이르는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텅 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의 인생을 재구성한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배우 6명이 캐릭터 7개를 연기한다. 각각 다른 인물로 설정된 그들이 사실 모두 같은 인물 밥 딜런의 어느 한 시기를 대변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논란을 일으킨 밥 딜런을 ‘주드’라는 이름으로 연기하는 식이다. 크리스천 베일은 그때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기 전, 시대의 대변자로 사랑받던 전성기의 밥 딜런을 ‘잭’이라는 인물로 연기하다가 훗날 종교에 귀의해 가스펠 음악을 부르던 밥 딜런을 ‘존’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한다. 여기에 벤 위쇼·리처드 기어·히스 레저 같은 유명 배우가 합세해 저마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밥 딜런의 인생, 밥 딜런의 사상, 밥 딜런의 방황과 밥 딜런의 욕망을 감당한다.



<벨벳 골드마인>(1997년)이라는 음악 영화로 여러 사람을 흥분시킨 감독 토드 헤인스는 왜 이리도 복잡한 방식으로 밥 딜런을 그려냈을까. 매우 싱거운 대답이 되겠지만, 밥 딜런이 그만큼 복잡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밥 딜런이 직접 쓴 자서전을 포함해 4년 동안 그에 관한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지루한 독서 끝에 얻은 결론.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 작가들이 모두 실패했으며 픽션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는 거다.



‘시대의 이면’까지 들추어낸 역작

결국 직접 밥 딜런 한번도 만나보지 않고 만든 밥 딜런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밥 딜런 영화로 칭송받는 역설. <아임 낫 데어>는 ‘사실’에 충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건 아니라는, 이 바닥의 얄궂은 아이러니를 새삼 일깨운다. 때로 진실은 이렇게 완벽한 허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전기 영화는 인간의 이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좋은’ 전기 영화는 그 인간이 살다간 시대의 이면까지 함께 들추어낸다. 11년 전 글램 록에 열광하던 1970년대를 느끼게(‘생각하게’가 아니라!) 만든 <벨벳 골드마인>이 그랬듯 토드 헤인스 감독은 이번에도 ‘더 좋은’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아임 낫 데어>를 보고 있으면 말로만 듣던 1960년대의 혼돈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글로만 읽던 ‘반문화’의 위력을 느끼게 된다. 늘 새로운 아티스트를 갈망하면서 정작 그 아티스트가 새로워지는 것에는 야박한 대중과, 가차없이 세상을 공격하면서 정작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는 건 참지 못하는 아티스트 사이. 그때도 지금처럼 쉽게 좁혀지지 않는 틈이 존재함을 깨닫게 만든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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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2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임 낫 데어>는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 보는 내내 어떤 '과도함'이 느껴져서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렸습니다. Todd Haynes의 전작들을 떠올려보면 이는 사실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요.^^ 사실에 충실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여러 면모들의 나열과 알레고리화 작업 그 자체가 어떤 '진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님 역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존 레논에 대한 영화가 기대되네요.

로쟈 2008-07-26 00:35   좋아요 0 | URL
이런 쪽 영화들은 꼭 챙겨보시겠군요.^^

클리오 2008-07-2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레논의 영화는 아주 많이 보고 싶은데, 다큐멘터리라 어떻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지 모르겠네요.. 더운 여름 잘 지내시죠? ^^

로쟈 2008-07-26 00:36   좋아요 0 | URL
오늘도 비가 와서 더운 건 모르겠습니다. 별로 잘 지내지는 못하구요.^^;

2008-07-2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2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학술저널 담비에서 영화이론서 번역문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482). 동국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되었던 것인데,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에 대해서 꼬집고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한 참고자료로 챙겨놓는다.

동국대 대학원신문(148호) '무지’보다 ‘무시’에서 비롯된 오역

국내에서 영화가 학문적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영화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1990년대에 들어 겨우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영화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현재는 체계적인 발전단계를 거치지 못한 무수한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는 양상이다.
또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이론보다 정신분석학, 기호학, 서사학 등 타 학문의 방법론을 그대로 이식하며 형성된 이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국내 영화이론 연구는 여전히 어수선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영화용어’에 대한 오역'
외국 영화이론서의 허술한 번역도 국내 영화이론 연구의 부실화에 한몫을 했다. 영어권 이론서를 제외한 여타 외국어 영화이론서들의 경우, 번역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해당 외국어에 대한 독해 능력과 영화이론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역자가 매우 드문 현실에서 비전문가들의 마구잡이 번역이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이론서의 번역은 타 분야의 이론서 번역에 비해 후진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은 다양한 차원에서 발견되지만,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영화용어’들에 대한 오역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원서의 번역과정에서 행해지는 주요 영화용어들의 오역은 저자의 이론들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종종 원서 전체의 독서를 불가능하게 한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프랑스 영화이론서들의 경우, 상당수의 영화용어들이 본래의 뜻과 다른 엉뚱한 단어로 번역돼 정상적인 독서가 불가능할 때가 많다. 가령, 파스칼 보니체의 저서를 번역한 『영화와 회화. 탈배치』에서는 ‘쇼트’를 뜻하는 불어 단어 ‘plan’이 ‘영상’으로 번역돼 번역서 곳곳에서 숱한 오류로 이어진다. 그리고 책의 제목이자 핵심 용어인 ‘decadrage’는 이미 국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인 ‘탈프레이밍’이나 ‘탈프레임화’ 대신 ‘탈영상배치’라는 모호한 용어로 번역돼 저자의 논지를 완전히 흐트러뜨린다. 또 다른 예로, 자크 오몽의 『이마주』에서도 ‘illusion’이라는 단어가 ‘착시’가 아닌 ‘환영’으로 번역돼 ‘헤링의 착시’와 ‘뮐러-라이어의 착시’ 같은 초보적인 시각이론 용어들이 ‘헤링의 환영’과 ‘뮐러리어의 환영’이라는 엉뚱한 용어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오역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일단 위의 예들만으로도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현황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이중, ‘탈프레이밍’과 ‘착시’에 관한 오역은 그나마 역자의 불성실함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쇼트’라는 용어에 대한 오역은 그 정도가 민망할 정도로 지나치다. 쇼트는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영화용어로서, 소설과 비교할 경우 ‘주어’나 ‘문장’ 등에 해당하고 음악의 경우 ‘음표’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역자는 역서 내내 쇼트의 의미를 모른 채 어려운 영화이론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도대체 주어나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문학이론서를 번역하는 이가 있겠는가? 또 음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음악이론서를 번역하는 이가 있겠는가?

번역의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번역은 한 사람의 학식(Scholarship)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학문의 한 분야와 관련될 경우, 이론서 번역은 그 분야의 학문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잣대가 될 수 있다. 국내 영화학의 경우, 영화이론에 대한 학습이 전무하고 영화사에 대한 지식과 영화감상의 경험도 턱없이 부족한 비전문가들이 외국어 독해능력 하나만을 믿고 쉽게 영화이론서 번역에 뛰어들고 있어, 학문적 성숙도를 끌어올리는 일이 여전히 먼 미래의 일처럼 요원해 보인다.

영화이론 번역의 이 같은 문제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선, 번역의 질적 수준과 충실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내 출판현실이 그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작업에 대한 대우가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현실에서, 가뜩이나 어렵고 인기도 없는 이론서 번역은 기피 대상일 수밖에 없다. 다음, 국내 영화학계의 안일한 태도와 정확한 영화용어집의 부재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아직도 국내에는 모두가 공신할만한 영화용어사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수의 영화학자들이 각자 편할 대로 영화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화에 대한 국내 인문학자들과 출판계 종사자들의 인식 자체에 있다. 사실,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들은 영화에 대한 ‘무지’보다는 ‘무시’에서 비롯된다. 여전히 국내 학계나 출판계에는 일정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외국어에 능한 연구자라면 외국의 전문적인 영화이론서도 손쉽게 번역해낼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국내 영화 연구자들이 제대로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 정도로, 외국의 유명 영화이론서들은 국내에 알려지기 무섭게 인문학 전공 번역자들에 의해 접수된다. 요컨대,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과 영화학에 대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멸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영화이론 번역의 정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김호영/ 한양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08. 06. 04.

Pascal Bonitzer

P.S.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파스칼 보니체의 책은 오역으로 악명이 높지만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130쪽도 안되는 책이 18,000원이다. 견적이 안 나오는, 숭고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비가시영역: 리얼리즘에 관하여>(정주, 2001)는 또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 일찍 절판되었고(대학 도서관들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런데, 필자가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했다면 그나마 잘된 번역서, 잘 읽히는 번역서의 경우에도 혹 문제는 없는 것인지 살펴보았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최악의 번역서를 사례로 삼아서 '일반화'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대다수 번역서들이 '쇼트'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영화이론서들을 읽다가 골탕을 먹은 적이 여러 번 되기에 '번역의 질적 수준과 충실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불비한 여건에 대한 필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국내 영화학계의 안일한 태도와 정확한 영화용어집의 부재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아직도 국내에는 모두가 공신할만한 영화용어사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수의 영화학자들이 각자 편할 대로 영화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은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지적이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한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과 영화학에 대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멸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영화이론 번역의 정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영화학이 인문학의 바깥인지, 더 좁혀서 '영화이론'이 '이론'의 바깥인지 의문이 들 뿐더러 현대 영화이론이 흡수하고 있는 다양한 이론적 담론들의 경우 과연 '쇼트'가 무엇인지, '탈프레이밍'이 무엇인지 아는 영화학도만이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이론과 접속하고 있는 기호학(언어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의 다양한 담론들을 소화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영화학도에게만 주어지는 것일까? "국내 영화 연구자들이 제대로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 정도로, 외국의 유명 영화이론서들은 국내에 알려지기 무섭게 인문학 전공 번역자들에 의해 접수된다"는 판단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최근의 이론가들은 제쳐놓더라도 영화이론의 고전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도 번역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영화이론의 기본서라 할 만한 크리스티앙 메츠의 책들도 국내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때문에 영화학 전공자들이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다는 것은 아무래도 엄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워 보인다. '영화이론서 번역, 이렇게 한다'라고 본때를 보여줄 만한 책들을 냄으로써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에 한방 먹이는 것이 '무지'를 극복하고 '무시'를 불식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일 듯싶다... 

P.S. 메츠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상상적 기표>(문학과지성사, 2009)가 드디어 출간됐다. 모처럼 도전해볼만한 영화이론서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0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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