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한편을 옮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6). 아프가니스탄 출신 작가 호세이니 원작의 <연을 쫓는 아이>. 개봉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리뷰를 읽으니 꼭 챙겨보아야 할 영화의 하나다. 짧은 리뷰라서 이럴 땐 더 유익하기도 하고(작가 호세이니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718531 참조).

시사인(08. 03. 01) 우정과 용기의 놀라운 치유력

영화 번역가 이미도의 산문집을 읽다가 탐나는 문장을 발견했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그 사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원작 소설 <시체>에 나오는 첫 문장이라는데, 영화 <연을 쫓는 아이>를 소개하는 이 글에 꼭 빌려 쓰고 싶은 문장이다. 이 영화는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을 용기 있게 털어놓은 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을 실천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옛 소련이 침공하기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 수도 카불에 사는 부잣집 아들 아미르와 하인 아들 하산. 아미르는 글을 모르는 하산의 머리가 되어주고 하산은 싸움 못하는 아미르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나란히 열두 살 되던 해 겨울, 카불 시내를 들썩이게 만든 대규모 연싸움 대회가 열리고, 아미르와 하산이 힘을 합쳐 우승을 차지한 기쁜 순간이 잔인한 운명의 시작이다. “네가 원하면 1000번이라도 연을 찾아올 수 있다”라며 떨어진 연을 찾아 골목길을 달려나간 하산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뒤늦게 친구를 찾아 나선 아미르는 하산이 불량배들에게 겁탈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겁에 질려 숨어 있는다. 그 후 친구 얼굴을 볼 때마다 치밀어오르는 죄책감이 불편했던 아미르는 엉뚱한 거짓말로 누명을 씌워 하산 가족을 내쫓아버린다. 참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미르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하산의 소식을 듣는다. 뒤늦게 반성한다. 속죄한다. 그리고… 참 많이 운다.



<연을 쫓는 아이>는 아프가니스탄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2003년에 펴낸 같은 제목의 소설이 원작이다. 38개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에서 800만 부가 팔린 이 베스트셀러의 매력은 우리가 늘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실천하지 못하는 두 가지 덕목, ‘우정’과 ‘용기’의 기운 센 치유력을 증명해 보인 데 있다.

‘실용’보다 ‘관용’이 먼저이기에…
<몬스터 볼>과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만든 감독 마크 포스터가 연출을 맡은 건 원작자에게 큰 행운이다. 오직 코끝 찡한 이야기의 힘에 감동해 28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스태프와 배우가 모여든 건 감독에게 큰 행운이다. 그렇다면 실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찾아낸 평범한 아이들이 주연을 맡은 건 관객에게 가장 큰 행운일 것이다. 그 맑은 눈동자가 없었더라면, 그 순박한 미소가 없었더라면, 보는 이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뒤흔들어놓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슬람권에서 금기시하는 강간 장면 촬영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는 보도를 접한 후에는 마치 내 아이들인 양 안부를 궁금해하게 됐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잘 지낸다니 안심이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사연이 그 사람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맞는 말이다. <연을 쫓는 아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가장 실천하기 힘든 행동을 정말 실천에 옮길 때, 그 사람 인생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우리 인생까지도 아주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는 걸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용’보다 ‘관용’이며 ‘경기 회복’보다 ‘용기 회복’이 먼저라고 귀띔해주는 이 기특한 영화를 보고 <뉴스위크>의 평론가 데이비드 앤슨이 이렇게 썼다. ‘이 영화에 감동받지 못하면 가슴이 딱딱한 사람이다.’ 정확한 표현이다.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의 찡하고 짠한 라스트 신을 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딱딱한 가슴이라면 그 양반, 참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3. 14.

P.S. 영화에 얽힌 뒷이야기, 혹은 '현실' 이야기는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2009&article_id=504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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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1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원작 책과 함께 주목하고 있었는데 개봉관은 그리 많이 잡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8-03-14 09:35   좋아요 0 | URL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도 그랬었지요...

순오기 2008-03-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대하고 기다리는 영화입니다.

로쟈 2008-03-14 09:35   좋아요 0 | URL
아이들과 함께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8-03-1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이나 부산도 아닌 광주에서 이런 영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행운입니다. 이런 순간마다 광주극장 운영자님께 절로 감사합니다.

로쟈 2008-03-14 09:34   좋아요 0 | URL
머지않아 '서울이나 부산도 아닌 광주'에서 '광주라서'로 토가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드팀전 2008-03-1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영화에 대해 <씨네 21>은 비판적 의견을 냅니다.물론 전쟁 전의 아프간을 볼 수 있고 우정을 이야기하지만....미국은 빠져있는 아프간...또는 알고 봤더니 그 둘이 그랬다더라..라는 아침 드라마 같은 통속적인 설정...마지막부분 갑자기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연출 등등....앞에까지만 좋았다라는 평가들도 있더군요.부분 동의!!

로쟈 2008-03-14 09:33   좋아요 0 | URL
원작 소설이나 영화나 미국인들의 '아프간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효과'와 더불어 '부작용(side effect)'도 있는 거구요...

섬나무 2008-03-1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작정하고 구입한 건 이번에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처음이었어요. 어떤 영화 평론가의-로쟈님이 올린 기사-맥카시 평가가 대단해서리...결론적으론 이 책은 '정말 원작'으로 읽어야 그 맛이 나는 걸까? 싶었습니다. 아마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나 봅니다. '롤리타'는 정말 원작이 아니어도 나를 완전히 매수했었으니까요.
나보코프의 언어유희와 그의 감각이 그대로 전해져서 책을 읽는 내내 황홀지경이었거든요.
하여간 책을 읽고 났더니 영화가 궁금하지 않아졌지요. 피 냄새를 충분히 맡았어요.

로쟈 2008-03-14 23:37   좋아요 0 | URL
해럴드 블룸 같은 비평가가 맥카시를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고 있습니다. 피냄새보다는 소녀의 향기가 사실 더 낫긴 하죠.^^;

다락방 2008-03-14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시사인에서 이 리뷰 읽었어요. 그전부터 보고싶었던 차에 리뷰읽고 나니 더 보고싶어지더라구요. 그런데 개봉관도 별로 없을뿐더러, 그 개봉관에서 조차 상영일이 길지 않더군요. 오늘이라도 달려가서 보아야 할까봐요. 영화 한편 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로쟈 2008-03-14 23:38   좋아요 0 | URL
리뷰는 여기저기 실려 있는데, 개봉관은 정말 드문 모양이군요...

L.SHIN 2008-03-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연을 날리는 꿈을 꾸었는데... 나는 무엇을 날리고 싶었던 걸까요.

로쟈 2008-03-14 23:39   좋아요 0 | URL
저는 꿈에서 연을 본 게 몇 십년 되는 거 같습니다.^^;

L.SHIN 2008-03-15 14:12   좋아요 0 | URL
전 꿈에 연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원래 그런 꿈은 자주 꾸는 종류인가 보죠?

2008-03-15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5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동안 뜸했던 영화소식이다. 연말에 개봉된 영화들에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나는 판타지류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예외적인 영화라면 리들리 스콧의 신작 <아메리칸 갱스터>가 있다. 안 건드린 장르가 없는 감독이지만 '갱스터 무비'는 그가 처음 손대는 것이며 그만의 독특한 갱스터의 얼굴을 그려냈다는 평을 읽은 바 있다. <아메리칸 갱스터>를 계기로 대표적인 갱스터 영화들을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드라마 <소프라노스>에 대해서는 평으로만 접했는데, 이것도 '미드'로 수입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한겨레(07. 12. 31) 갱스터, 바로 당신의 두 얼굴

제목부터 과감한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극히 미국적인 갱의 초상을 그려낸다. 흑인 갱단 보스 프랭크 루카스는 모든 것을 ‘비즈니스 마인드’로 생각하는 갱이다. 단지 이익을 내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혁신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야말로 가히 ‘미국의 갱스터’라고 부를 만하다. 혹은 아무것도 없었던 사막에, 몽상가의 꿈을 현실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들어낸 벅시 같은 갱은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갱단의 세계야말로 가장 비열하면서도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관철되는 곳일 것이다.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의 걸작 갱스터 영화들이 갱단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사회의 내적 변화를 탁월하게 그려낸 이유도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갱스터의 캐릭터는 우리와는 다른 악인이면서,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다. 하나의 장르로 완벽하게 정착한 갱스터 영화는 현실을 예리하게 담아내는 거울로서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갱스터 영화의 고전이 된 <대부>(1972)의 마이클 콜레오네는 삼형제의 막내였기에, 자신이 보스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큰형이 죽고, 아버지가 위기에 처하자 마이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고 ‘대부’가 된다. 극한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 마이클은 그저 선량한 중산층이었다. 누구나 마이클이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이클이 조직의 보스가 된 뒤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서 마이클은 냉혈한이 된다. 그것이 마치 그의 본성이었던 것처럼, 마이클은 완벽하게 탈바꿈을 한다.

<대부>의 마이클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다. 마이클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모든 거짓과 폭력 그리고 음모를 이용한다. 거기에는 한 치의 후회나 망설임도 없다.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구원하는 대부가 되기 위해서, 마이클은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그것은 바로 성공을 위해 인간성을 방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반면 <좋은 친구들>(1990)의 헨리 힐은 마피아 동네에서 심부름을 하며 자라 자연스럽게 갱단 일원이 된다. 헨리에게 가장 성공적인 미래는 마피아 간부가 되는 것이었다. 트럭 화물을 훔치고, 마약 거래를 하는 등 악행을 일삼던 헨리는 마침내 마피아 일원이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일랜드계였던 헨리가 간부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헨리는 그저 동네 양아치일 뿐이다. 남의 물건과 돈을 훔쳐 흥청망청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향락을 즐기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애초에 위대한 갱스터가 되기에는, 헨리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에프비아이에게 잡힌 헨리는, 조직의 비밀을 증언하는 대신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동네에서, 이제 헨리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꿈꾸었지만, 헨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결국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화려한 스타를 꿈꾸지만, 대부분의 종착점은 소박한 시골역인 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갱은, 영화가 아니라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에서 찾을 수 있다. 토니 소프라노는 뉴저지 북부를 관장하는 조그만 조직의 보스다. 그의 고민은 가정과 조직, 즉 두 개의 패밀리다. ‘급격한 클라이맥스나 사건 없이, 보편적인 삶의 리듬과 맞아 떨어진다’는 분석처럼, <소프라노스>는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은 마피아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과 함께 외식도 해야 하고, 아이들의 진로 문제도 고민해야 하고, 한편으론 애인도 돌봐야 한다. 합법적인 사업에 끼어들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여전히 도둑질이나 도박 사업에도 손을 댄다.

일과 가족 때문에 고민을 하는 여느 가장과 마찬가지로 토니 소프라노 역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결국은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 상담까지 받는 소프라노는 그저 친근한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때로 다정하고, 때로 폭력적이고, 때로 우스꽝스러운. 그들에게는 단지 우리와 같은 일상에 ‘범죄’라는 사업이 하나 더 끼어들어 있는 것뿐이다. 냉정하게 사람을 죽이거나 태연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그게 사업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것처럼.

<아메리칸 갱스터>의 프랭크 루카스 역시 가족을 위해서, 성공적인 사업을 한 것이다. 원산지에서 직접 마약을 입수해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순도는 두 배 높고 가격은 절반인 제품을 팔아 시장을 장악한다. 그것만 본다면 프랭크는 탁월한 사업가다. 미국에서 가장 칭송받는, 혁신적인 사업가인 것이다. 그리고 토니 소프라노의 고민이 두 개의 패밀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프랭크의 고민은 어떻게 시장을 장악하여 ‘가족’을 부유하게 만들 것인가, 였다. 프랭크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갱스터나 보통 사람들이나 목적은 하나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성공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하나인 것이다. 갱스터 영화를 볼 때, 폭력과 범죄의 향연 속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08. 01. 02.

P.S. 역시나 '가족'과 '사업'을 다룬 '코리안 갱스터'로 <우아한 세계>를 떠올려볼 수 있겠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없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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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심각한 갱스터 영화관련 페이퍼를 보면서 저는 에널라이즈 댓과 디스라는 꽤 코믹스럽게 만든 갱스터 영화 생각하면서 혼자 킥킥거리고 있습니다.^^

로쟈 2008-01-02 14:31   좋아요 0 | URL
'가족'만 아니면 얼마든지 코믹해질 수 있는 장르죠.^^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정학적 미학>(현대미학사, 2007)에 대한 한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01). 지난 9월말에 읽을 만한 책 목록(http://blog.aladin.co.kr/mramor/1595932)으로 골라놓고서 아직 부분적으로밖에 참조하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론 러시아의 영화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를 다룬 '소련의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장을 필독할 필요가 있어서 책상맡에 오랫동안 놓아두고 있는 책이다. 출간된 지 몇달이 지났지만 본격적인 서평은 눈에 띄지 않던 차여서 반가운 마음에 챙겨둔다(이런 '이론서'의 독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문득 궁금하다). 한편, 그의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이, 드디어, 근간예정이라는 소식도 들리므로 내년엔 '제임슨 읽기'도 따로 계획해둠 직하다(비록 '고난의 읽기'일 것 같은 예감을 떨치기 어렵지만)...

교수신문(07. 12. 10) '陰謀의 플롯’ 분석해 정치적 무의식 탐색

현대사회에서 영화는 모든 대중문화를 삼켜버릴 만큼 그 몸집이 비대해졌다. 뤼미에르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차의 도착’을 상영한 이래 영화는 현대 대중문화의 절대강자로 군림한 것이다. 영화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산업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만 하더라도 적은 인구에 비해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넘은 영화들이 속속 등장했으며, 영화산업이 문화산업의 우두머리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문화가 곧 산업이 되고 화폐가 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전방위적 사상가이자 문화평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이제 영화를 말한다. ‘이제’라고 했지만, 『지정학적 미학』이 출간된 것은 1992년이니 ‘이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주장했던 정치적 무의식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인식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는 인문학 분야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통용된 지 오래다. 또한 그의 문장 자체가 매우 난해해서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악명을 떨친 지도 오래다.

Cover Image

후기 자본주의의 질료, 영화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며 세계 체제와 사회적 총체성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펼쳐왔던 그가 영화라는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야말로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며, 영화야말로 권력과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오롯하게 재현되고 있는 장르다. 지정학적 미학』의 추천사를 쓴 콜린 맥케이브의 말처럼, 영화는 “자본주의 초기단계의 완전한 발전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가 불가능한 가장 적절한 포스트모던 예술”이자 “가장 세련된 산업생산의 산물”인 “최후의 기계”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를 정치적 판타지로 해석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영화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을 분석하는 중요한 대상이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후기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그 시간과 공간의 분기점들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컴퓨터 미디어 테크놀러지가 요동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의 총체성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텍스트가 영화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영화는 단순히 오락거리가 아니다. 그에게 영화는 “집단적 판타지의 심층적인 수준”을 파헤칠 수 있는 질료이다. 또한 영화는 전 지구적 세계 체제에서 벌어지는 “음모의 플롯”을 내장하고 있는 문화상품이기도 하다.

『지정학적 미학』은 영화를 매개로 정치적 무의식을 탐험하려는 저자의 야심찬 시도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각화 된 인식적 지도그리기’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제1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의 영화를 비롯해 소련의 SF영화, 프랑스, 대만, 필리핀 등 무수히 많은 영화를 대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재현의 문제를 거론한다.

이러한 영화를 읽어내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독법은 잠재적 징후들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그것을 현실의 장으로 끄집어내고, 그것을 세계 체제의 차원에서 재해석하는 일이다. 그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지정학적 무의식”이다. 지정학적 무의식이란 “우리의 새로운 세계-내-존재를 파악하기 위해 민족적 알레고리를 하나의 개념적 도구로 재편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그것은 민족적 알레고리의 차원을 넘어 전 지구적인 차원의 알레고리를 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음모이론’이다. 이는 그가 발 빠른 문화평론가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90년대는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다양한 음모이론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1993년에는 ‘엑스파일’이 20세기 폭스사에서 제작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이 형성됐다. 『지정학적 미학』에서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대통령의 음모’, ‘비디오드롬’,  ‘콘돌’, ‘암살단’ 등에는 모두 우리의 일상 곳곳에 촉수를 뻗고 있는 음모를 폭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욱이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장면은 미디어를 통해 재현됨으로써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을 “독특한 역사 속에서 서로 묶어 며칠 동안을 하나의 거대한 집단성으로 이끌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유토피아적 공공영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음모라는 서사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인간들, 즉 분열되고 파편화된 주체들을 전 지구적으로 묶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민족적 알레고리와 지정학적 무의식
이 순간에도 음모이론은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인류에게 매혹적인 내러티브를 제공해 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드(미국드라마) 열풍’의 일등공신이었던 ‘CSI’는 공중파를 타고 한국인들의 안방을 공습했다. 특히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 테러를 당하자 곧바로 ‘CSI:뉴욕’이 제작돼 공중파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됐다. 더군다나 ‘CSI:뉴욕’의 주인공인 맥 테일러 반장은 해병대 출신이자 9·11테러로 아내를 잃었다. 뉴욕의 안전을 지키는 맥 테일러가 지칠 때 마다 찾는 곳은 ‘그라운드 제로’이고,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 지난 10월 5일 방송에서는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했다. 발칸반도 출신의 미국 유학생들이 플라스틱 폭탄으로 세계 평화의 상징인 UN본부를 테러하려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CSI:뉴욕’뿐만 아니라 ‘24’, ‘앨리어스’ 등은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다. 그런데 이 드라마들의 공통적인 점은 보이지 않는 ‘가상의 적’과 ‘음모’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라는 것이다. ‘CSI’의 과학수사대 요원, ‘24’의 대테러 요원(CTU), ‘앨리어스’의 CIA 요원 등이 한국의 ‘미드 폐인들’을 숨 가쁘게 음모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이를 프레드릭 제임슨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사명감으로 거듭 태어난 미국의 재탈환”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드라마라는 미디어는 영화와 함께 우리의 인식을 점령하는 새로운 무기가 됐다. 할리우드 시스템과 미드 열풍이 ‘합작’해낸 ‘세계 문화산업의 미국화’라는 뻔히 보이는 ‘음모’에 맞설 수 있는 문화적 창조성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이승원 / 한양대 연구교수·국문학)

07. 12. 13.

P.S. 제임슨 읽기의 곤혹스러움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걸 좀 덜어주는 국역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난삽한 문장들도 문제지만 이런저런 부주의도 거기엔 한몫한다. 가령 <지정학적 미학>의 경우에도 저자 서문의 첫번째 각주에 제임슨이 '다국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제3세계 문학'이란 에세이에서 "아프리카 영화 <우스만 셈벤>에 대해서도 아주 간단히 다루었다."라고 해놓았는데, '우스만 셈벤'(1923-2007)은 영화명이 아니라 감독명이다. 그러니까 우스만 셈벤의 영화들에 대해서 몇 마디 적어놓았다는 얘기다. 나도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이 세네갈의 영화감독은 '아프리카 영화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영화명으로 처리해놓고 넘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이런 부주의가 번역서에 대한 신뢰를 침식해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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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7-12-1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페이퍼를 읽고 불현듯 드는 생각은, 태안 원유 유출 사고와 총기 탈취 사건이 괜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명예훼손이라고 할까봐 말은 못하겠지만,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고 구렁이 담넘어 가듯 넘어가려고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해서요...ㅎㅎ

로쟈 2007-12-14 08:34   좋아요 0 | URL
그게 사건마다 다 해명되지 않는 의문점들이 계속 남으니 음모론의 신세를 지더라도 도리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음모론의 3%는 진짜라고도 하고...
 

오랜만에 교수신문에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258). '영화비평 쇠퇴론'에 대한 현장 평론가의 비판을 담고 있다. 필자는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 유운성씨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여서 읽어보고 스크랩해둔다. 이 주제에 관해 씌어진 글들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게 아닌가 싶다(동업자들끼리는 상식일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깔끔하게 씌어졌다.

교수신문(07. 12. 03) "'침묵’은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다”

동시대 영화비평이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영화비평이라는 것이 (예컨대 한때의 문학비평에 맞먹을 만큼의) 대단한 영향력을 지녀본 적도 없는 이곳에서, 벌써 그것의 쇠퇴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기서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그들이 짐짓 취하는 애도의 제스처는 사실 그 이면의 음험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은폐하기 위한 假裝(가장)일 수도 있지 않을까.

1990년, 영화비평은 興했는가
정작 쇠퇴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쇠퇴를 애석해하는 것은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亡者(망자) 없는 장례식장에서 목 놓아 곡을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곡이란 슬픔의 전염을 위한 감상적인 의식에 불과하며 슬픔의 최면술을 위해서라면 장시간 곡을 대신해 줄 이를 돈을 주고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 영화비평의 쇠퇴에 대해 말한다는 건 가짜 장례식장의 텅 빈 관에 눕힐 만한 시신을 찾아 헤매는 우스꽝스러운 작업이 돼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보자. 장례식을 마련해 두고 시신을 찾아다니는 암살자들은 과연 누구인가를.

1990년대는 한국에서 영화문화가 급부상한 시기로 일컬어진다. 불완전하나마-특히 번역의 질이라는 측면에서-유용한 영화관련 서적들이 조금씩 출판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영화전문지들이 창간됐고, 비디오 대여점들은 호황을 누렸고, 예술영화관들이 문을 열었으며, 영화학교 및 대학 영화과엔 신입생들이 몰렸고, 학생영화 및 독립단편영화 제작의 붐이 일었으며, 지금은 아시아 제일의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했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바야흐로 영화적 교양이 문화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정작 그러한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을 생각해보는 작업은 다소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진 시기이기도 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형식의 실험가로 추앙받은 반면 존 포드는 오직 서부극, 그것도 <수색자>의 존 포드로만 논의됐다. 이른바 현대영화라는 것이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고전영화에 대한 반발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전영화를 다른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영화적으로 ‘번역’하려는 지난한 시도의 산물이었다는 인식 같은 건 전혀 들어설 여지조차 없었다.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이나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이 ‘전복적인’ 작업으로 오해되고,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 예술영화로 선전되는가 하면,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구도자적 풍모와 망명의 삶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모델을 발견하는 등,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될 정도의 믿음이 가능했던 것도 1990년대가 영화적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을 누구도 자문해보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교사·교도관의 비평과 왜곡된 교양주의
이런 상황에서 영화비평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는 敎師(교사)의 비평이라 칭할 만한 것이다. 영화를 ‘읽기’ 위한 고유한 독법이 있으며(시네마 리터러시), 한 편의 영화 이면에는 다양한 숨은 의미들이 있다는(징후와 해독) 주장은 이들 교사들이 즐겨 설파하는 강령이었다. 교사의 비평이 1990년대 영화문화에 적잖이 기여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도나 문학청년으로 이전 시기를 보냈던 이들이 영화교사의 길을 택하면서 성립된 것이란 점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영화를 읽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들여다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 같다. 상황이 반대였더라면 우리는 영화적 서커스에 불과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엔 볼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교도관의 비평이다. 영화작품과 영화관련 서적의 수입 및 소개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며 그것들을 뛰어넘는 빼어난 작업들이 저기 바깥에 얼마든지 있음을 역설하는 전문가들의 존재는 쉬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물론 이는 한국 영화문화라는 특정한 울타리의 경계를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그것이 1990년대의 영화광들을 사로잡았던 왜곡된 교양주의-예컨대 “너, 이 영화 봤어? 그럼 이 영화는?”이라는 식의-와 조우함으로써 초래된 폐해도 적지 않다.

영화적 교양은 영화작품의 내면화와 수용의 과정을 통한 세계의 재인식이 아니라 상상적 라이브러리의 항목을 늘려가는 작업으로 그릇되게 정의됐다. 또한 영화비평의 교도관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깥의 존재를 역설하는 것이지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문이 열린다면 그들은 서둘러 또 다른 울타리를 기어이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 왜곡된 시도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정당화한다. 한 편의 영화는 아직 그것이 소개되지 않았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라는. 예컨대 타르코프스키 영화예술의 위대함을 역설하던 많은 이들은 정작 <희생>이 극장에서 개봉되고 나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했다.

여하간 이건 다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이후 한국의 영화문화는 빠르게 변모해갔다. 영화관련 문헌들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우리는 영화비평계의 교사들의 한계를 깨닫게 됐고 예술영화관 및 시네마테크의 설립과 다운로드를 통한 영화감상이 보편화되면서 교도관들의 울타리 또한 점차 무력해졌다. 영화전문지들은 점점 독자를 잃어갔고, 동네마다 있던 비디오 대여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았으며, 예술영화를 본다는 건 더 이상 유별난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반면 영화학교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각종 영화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나는 리뷰어와 영화학자 사이에 위치한 영화비평가의 작업은 일차적으로는 통찰, 수사, 품격 그리고 나아가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어우러질 때 가장 이상적인 결과물을 낳는다고 본다. 리뷰어가 정보를 전달하는 이라면 영화비평가는 취향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자이다. 영화학자가 분석과 논리에 기댈 때 영화비평가는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모호했던 교사와 교도관의 비평은 그 변종들에 의해 삽시간에 대체됐다.

점점 암호해독자의 작업에 가까워지던 교사의 비평은 적절히 수사를 구사해가며 ‘제법 품격을 갖춘 보도자료’에 가까운 글을 써내는 영화기자들의 글쓰기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교도관들의 울타리는 영화제 카탈로그와 예술영화관의 팜플릿, 그리고 국내외 인터넷 사이트의 정보전달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 영화비평은 광고들에 의해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비평적 자질을 갖춘 영화비평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들의 비평적 글쓰기는 광고성 글쓰기로 가득한 영화전문지 편집자들에게 남은 한 줌의 부채감을 위무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었다. 

암살과 자살
그리고 바로 이 때,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비평이 광고로 대체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비판조차도 광고로 활용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영화에 영화비평가가 가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은 비판이 아니라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엔, 침묵은 비평적 소임의 방기가 아니라 사실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위장된 비판의 게임에 뛰어드는 건 사이비 비평가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비평이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는 식의 물음에 답해야 할 것 같다. 발터 벤야민은 비평가에게 있어서 상급심은 대중이 아니라 동료들이라고 쓴 적이 있다. 한국 영화비평이 독자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대중이 비평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예술로서의 비평은 대중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이제는 영화비평가들조차 동료들의 비평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특정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이 영화비평가들 스스로의 세계관과 윤리적 입장을 건 진검승부가 아니라 영화잡지 편집인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기획자의 머리에서 출발하는 이벤트로 전락하고 만 것도 그 때문이다. 이건 암살자들의 추적에 자살로 대응하는 것과 같다.(유운성_영화평론가)

97. 12. 09.

P.S. 필자의 다른 글들을 찾아보다가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에 대한 짧은 리뷰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씨네21(04. 06. 11) 박진감 넘치는 키에슬로프스키 읽기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그의 영화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었고 이 영화는 1990년대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던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뒤이은 삼색 연작은 잠깐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로 간주되었고 곧 잊혀졌다. 물론 마땅히 걸작으로 불려야 할 <십계> 연작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폴란드 내에서는 한때 참여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을- 예컨대 <야간경비원의 시선>이나 <카메라광> 같은 영화들- 만들던 키에슬로프스키가 후기에 가서 점점 심리적이고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영화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만만찮은 비판들이 가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The Fright of Real Tears |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오영숙 외 옮김| 울력 펴냄)는 이러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무엇보다 그의 후기작들에 대한 정치한 구원비평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특히 3부), 지젝의 목표는 좀더 광범위하고 야심적이다. 바로 전반적인 인문학적 사유의 위기와 함께 난관에 봉착한 영화이론을 대안적인 라캉적 독해를 통해 구원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체주의/페미니즘/포스트-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문화이론 등의 ‘이론’(Theory)과 데이비드 보드웰과 노엘 캐롤을 수장으로 하는 인지주의적 ‘포스트-이론’ 내지는 ‘탈-이론’(Post-Theory)의 ‘사이’에서 키에슬로프스키를 읽어내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키에슬로프스키’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확실히 지젝의 이 저서에 자극제가 되었던 것은 <소셜 텍스트>에 게재된 유명한 패러디논문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앨런 소칼의 저서 <지적 사기>와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보드웰과 캐롤의 편저 <포스트-이론> 같은 책들로 인해 빚어진 좌파이론가들 내부의 위기감과 반감이었을 것이다. 지젝은 특유의 정교하고도 유머 넘치는 문장, 그리고 재해석된 헤겔적 개념들을 통해 경험주의적 이론이 가정하는 보편성의 허구를 논박하는가 하면, 이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적 봉합(suture)이론을 새롭게 조명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언뜻 딱딱하기만 한 이론서일 것도 같지만 책에 언급된 (그리고 이제는 국내에서도 대부분 쉽게 구할 수 있는) 영화들을 함께 보면서 찬찬히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이만큼 박진감 넘치는 이론서도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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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대기중인 영화들 가운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은 단연 리안의 신작 <색, 계>이다. 이미 여러 저널들의 호평을 접하면서 오랜만에 영화관 외출을 꿈꾸게 하는 작품인데, 눈에 띄는 대로 한겨레21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11/021015000200711010683007.html)를 옮겨놓고 슬쩍 읽어본다. 감독과 주연 여배우(탕웨이)가 내한하여 기자회견 등도 가졌지만 따로 보태지는 않는다. 대신에 장학우가 부른 주제가는 한번 들어보시길(http://www.youtube.com/watch?v=QDWrZuJKGrk).

한겨레21(07. 11. 01) 색에 빠진 자, 계를 잃을지니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에 대한 오래된 혹은 해묵은 주제다. 이렇게 해묵은 주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데, 리안 감독만큼 적임자도 드물다. 고급스런 대중영화의 장인이자 사랑의 감정을 다루는 기술자인 리안 감독은 오래된 이야기 혹은 통속적 사랑을 사랑이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둔다. 그리고 희열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물의 표정을 날카롭게 잡아내 관객의 마음을 후벼판다. 불가능한 사랑만큼 사랑의 애절함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사랑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는 처연했다. 리안이 이번엔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일본에 점령된 상하이, 친일파 정보부 대장과 그를 암살하려는 여성 사이에 불가능한 사랑이 시작된다. 리안의 <색, 계>(色, 戒)는 서로를 경계(戒)하지만, 서로의 색(色)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uqnBNz5xppQ)

일본의 침략을 피해서 홍콩으로 피난온 왕치아즈(탕웨이)는 외롭다. 그의 친구들은 항일운동에 뛰어들고 그도 자신의 운명을 저항운동에 맡긴다. 밀수업자의 아내인 막 부인으로 위장해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량차오웨이)의 부인(조안첸)에게 접근한다. 그들의 목표는 이의 암살. 어렵게 이 부부에게 접근하지만 갑작스레 부부는 상하이로 돌아가버린다. 사실 왕치아즈는 암살의 주모자인 광위민(왕리훙)을 연모해 암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왕치아즈는 상처만 받는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흐른다. 광위민이 다시 왕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또다시 막 부인이 돼 이에게 접근한다.

적을 유인하며 연인을 유혹하는 마음

이제 모든 행위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 막 부인의 행위는 이에 대한 유인이자 유혹이다. 적을 유인하는 일이자 연인을 유혹하는 행위다. 막 부인은 어느새 자신이 죽여야 하는 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색(色)은 계(戒)를 무장해제시켜버렸다. 이의 거친 숨결은 막 부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까지 달구었다. 이제 상황은 바뀌고 진실마저 모호하다. 나의 편인 저항군은 나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적인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를 이용하는 자와 나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가 모호하다. 영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영화관이 어두워서 영화를 보러가지 않는다는 이도 외롭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못했던 이는 의심에 지쳤다. 그래서 이는 막 부인을 “믿는다” 보다는 “믿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모든 행위는 역설이고, 모든 말은 모호하다. 막 부인은 저항군에게 당신들이 그를 죽여버리는 꿈을 꾼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그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부터 사랑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처음으로 이를 만나고 돌아온 왕치아즈에게 친구가 묻는다. “어떻게 생겼어?” 그는 “상상하곤 다르다”고 대답한다.



적나라한 섹스신엔 체념과 위로가

리안의 영화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색, 계>는 집요한 상반신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감정을 잡아낸다.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는 집요한 클로즈업을 끝까지 견뎌낸다. 20여 년을 연기한 량차오웨이도, 첫 번째 영화에 출연한 탕웨이도 완벽하게 리안의 인물로 변신한다. 미인대회 출신인 탕웨이는 미모보다는 연기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조연배우 누구나 자신의 연기를 해낸다. 이렇게 완벽한 연기에 담긴 무심한 행동이나 스쳐가는 말들은 영화의 공기를 서서히 물들인다. 어느새 쌓인 먼지처럼 어느덧 켜켜이 쌓인 감정에 빠져들게 만드는 <색, 계>는 ‘리안표’ 영화다.

<색, 계>는 스캔들의 영화다. 적나라한 섹스신이 화제를 모았고, 성기와 음모 노출 논란도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30분가량 삭제된 채로 상영됐고, 미국에서도 17살 이하 관람금지 등급(NC-17)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제한상영 판정을 받지 않고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심의를 통과했다. 세 번의 섹스신은 색에 굴복해 계를 포기한 자의 체념한 표정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쓰다듬는 위로로 남는다.

오늘날 리안만큼 종횡사해 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감독은 드물다. 서양과 동양, 시대극과 현대물, 이성애와 동성애, 리안은 무엇을 만들어도 대중성과 작품성의 접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왔다. 리안은 뉴욕에 사는 동양인 게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던 <결혼 피로연>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으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아이스 스톰>에서 1970년대 미국 중산층의 해체를 그렸던 리안은 <와호장룡>으로 홀연히 옛날의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으론 19세기 영국 배경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도 영화로 옮겼다. <색, 계>는 리안이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에 다시 중화권 감독으로 돌아와 만든 영화다. <색, 계>로 그는 2005년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2년만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장을 받는 드문 사례를 남겼다. <색, 계>는 중국의 여성소설가 장아이링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관진펑(관금붕)의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 허우샤오셴의 <해상화>도 장아이링의 소설이 원작이다. <색, 계>는 11월8일 개봉한다.(신윤동욱 기자)

07. 11. 03.

P.S. 그러고 보니 <헐크>를 제외하곤 리안의 영화 대부분을 본 듯하다. <결혼피로연>(1993)의 유쾌한 기억이 어느새 14년전인데, 그 사이에 한 아시아계 영화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시간의 가치는 저마다에게 다른 것이다. 기사의 말미에 장아이링(장애령)이란 이름이 눈에 띈다(그러고 보니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와 <색, 계>의 분위기가 비슷해도 보인다).

이 걸출한 중국(대만) 여성작가의 작품으론 몇 권이 더 번역됐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재작년에 출간된 중단편집 <첫번째 향로>(문학과지성사)와 <경성지련>(문학과지성사) 두 권뿐인 듯하다. 이 작품들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는 이렇다:

중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장아이링(장애령.張愛玲)의 중단편소설집이다. '붉은 장미, 흰 장미', '경성지련'을 포함하여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1944년 상하이에서 장아이링의 유일한 소설집이 <전기(傳奇)>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4년 타이완의 '황관출판사'에서 <장아이링 전집>(전 15권)을 내면서 <경성지련>, <첫번째 향로> 두 권으로 나누어 재출간했다. 한국에 소개되는 두 책은 '황관'의 예를 따랐다.

중국에서는 '루쉰 이후엔 장아이링'이란 평을 듣는다고도 하니까 호기심에라도 읽어봄 직한 작가이다. 이번 늦가을은 장아이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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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가 정말 좋네요. 장아이링은 보관함으로 ost.는 장바구니로 갑니다.

로쟈 2007-11-03 23:51   좋아요 0 | URL
저도 장학우의 목소리는 오랫만에 듣습니다.^^

수유 2007-11-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편안하게, 따라 행복감을 느끼며 보는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을 잘 견뎌야겠지만.

2007-11-04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5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그런 면역력이라면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네요.^^

섬나무 2007-11-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안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투영된 작품은 1995년작 '센스 앤 센서빌리티'까지만이고 이후로는 자신의 모습을 양파껍질 벗듯 벗기 시작했다고 하데요.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보는데 지금은 미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이 영화를 미치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단 말인듯...
양조위에게 그의 눈빛 연기-여자들을 뇌살시키는-는 영화 마지막에만 주문했다던데... 전혀 그렇지 않군요...ㅎㅎ

로쟈 2007-11-05 17:30   좋아요 0 | URL
오늘 필름2.0에서 리안과 탕웨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말들도 잘하더군요...

소경 2007-11-0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XX에서 '장애령'이라 검색하니 그녀의 다른 책들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검색했던 책들인데, 아쉽게도 <색, 계>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합니다...

소경 2007-11-0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 계>까지 번역 되었더라면 이거 친구 밥 한끼에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밖에 없는 빈털털이/수전노임에도 급 선회해서 사려 했을 거에요 ^^; 장학우 노래덕에 <색 계>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