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방학을 맞아 볼 만한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문제적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이번주 개봉작 <미스트리스>(2007)도 그 볼 만한 영화에 포함시키고 싶다(미성년자 관람불가이므로 '방학'과는 무관하군!). 원제는 '늙은 정부'. 개괄적인 소개는 이렇다.

세계일보(08. 07. 25) 치명적인 사랑의 쾌감…팜프파탈, 21세기 페미니스트로 격상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은 말은 의외로 더 빨리 달린다고 한다. 고통이 쾌감으로 변해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리 달릴수록 화살은 더 깊게 박히고 결국 말은 죽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유혹. 비단 말뿐인가.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사랑은 지금 당신 곁에도 존재한다.

‘미스트리스’는 이처럼 치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스테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처럼 근대 이전 유럽을 배경으로 여성 중심의 사랑을 그렸다. ‘로망스’ ‘팻걸’ 등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성적 코드로 풀어내던 여성 감독 카트린 브레야가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Une vieille ma?resse

1835년 파리,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적 혼돈을 반영하듯 상류사회에서도 온갖 스캔들이 난무한다. 사교계를 주름잡던 꽃미남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귀족 가문의 규수 에르망갸드(록산 메스키다)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출신 무희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와 깊은 사이다. 둘은 10년 동안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왔다. 마리니는 이 관계를 끝내기 위해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올린 마리니와 에르망갸드는 파리를 떠나 조용한 해변으로 이사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날 벨리니가 이들 앞에 나타난다.

‘미스트리스’는 벨리니와 마리니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붙어있는 존재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애정없는 욕정만을 취하지만 운명처럼 질박한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전쟁터에 나간 말 엉덩이에 박힌 화살처럼 서로의 삶에 파고든다. 사랑의 치명적인 쾌감을 거부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측은하다.



정부(情婦)라는 의미의 제목에서 보듯 벨리니는 결혼 제도를 위협하는 인물, 남성의 삶을 파멸로 모는 위험한 존재다. 이런 여성을 두려워한 남성들은 이들에게 팜므파탈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따라서 남성적 시각에서 벨리니는 요부이자 마녀다. 하지만 영화는 벨리니를 옹호한다. 그녀는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봉건사회의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구현하는 현대적 인물이다. 결국 영화는 고전의 팜므파탈을 현대적 페미니스트로 격상시킨 여성주의 영화다.

‘미스트리스’는 전형적인 유럽 스타일 영화다. 서사는 절제되고 묘사는 튀지 않는다. 정적인 화면과 느린 드라마도 이야기를 곱씹게 만든다. 액션영화 ‘트리플X’로 얼굴이 알려진 아시아 아르젠토는 도발적인 시선과 청순한 눈빛을 동시에 선보이며 벨리니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그는 이탈리아 웨스턴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로도 유명하다.(이성대기자)

영화는 지난주에 국내 첫시사회가 있었던 듯한데, 씨네21에서 가져온 첫 반응은 이렇다.

이 영화

1835년 왕정복고기 파리. 잘난 신사와 귀부인들이 남몰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읽고 있을 무렵이다. 바람둥이 귀족 리노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10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애인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를 인생에서 잘라내고, 어리고 부유하고 정숙한 귀족 처녀 에르망갸드(록산느 메스키다)와 결혼하려 한다. 그러나 벨리니는 중얼거린다. “날 떠날 순 없을걸.” <미스트리스>의 제2장은 아주 긴 플래시백이다. 손녀사위를 둘러싼 추문을 익히 들은 플레르 후작부인이 마리니를 불러 사랑의 역사를 낱낱이 말해달라고 청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스페인 투우사와 이탈리아 공주의 사생아라는 소문의 여인 벨리니에게 도도한 마리니는 초면에 경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파티에서 악마로 분장한 벨리니에게 사로잡힌 마리니는 무모한 구애를 시작하고 급기야 벨리니의 남편과 결투해 중상을 입는다. 여자는 가련한 남편을 차버리고 귀족사회는 들끓는다. 그러나 이것은 노래의 1절일 따름이다. 둘은 한때 먼 나라로 떠났고 행복하였다.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잃었다. 울부짖고 귀를 틀어막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들의 일상에서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남은 나날을 그들은 본능적인 애무로 연명해왔다. 결국 마리니는 에르망갸드와 결혼식을 올리고 파리를 떠나 완벽해 보이는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날 산책을 나간 바닷가 길 위에서 마리니는 벨리니와 맞닥뜨린다.(김혜리기자)

Une vieille ma?resse

100자평

오호! 통재라. 왜 제목을 <미스트리스>라고 하여, 영화의 핵심적 미학을 깎아 먹는단 말인가? <미스트리스>는 19세기 탐미적인 당디(Dandy)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바르베 도르비이’의 소설 <Une Vielle Maitresse>를 원작으로 삼아, 과격하고 야하기로 소문난 여성감독 카트린느 브레야가 영화화한 19세기 시대극으로 2007년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DB등에 <늙은 정부> 혹은 <오래된 여인>등의 이름으로 중복 등재되어 있으며, 국내 개봉 제목은 <미스트리스>이다.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제목은 단연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늙은 정부>이다.) 영화는 19세기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충동적이고 격렬한 사랑과 결국 파멸을 향해 가는 순수정념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들에 의해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정면으로 발언한다. <미스트리스>는 자주 접하기 힘든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영화이다. 장면 하나하나의 미장센이나 감정을 끌고가는 유려하고도 절제된 편집은 모두 감탄스럽다. (특히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이나, 거울과 창문을 이용한 미장센을 눈여겨 보라!) 또한 캐스팅이 완벽하다. 벨리니 역할을 한 '아시아 아르젠토'의 연기는 인물과 배우를 도저히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만들며, 마리니 역할의 ‘후아드 에이트아투’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선을 지닌 얼굴과 몸만으로도 영화의 주제를 150% 전달한다. 또 <팻걸>등의 전작에서 함께 했던 ‘록산느 메스키다’ 역시 냉정하고 고혹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미술도 훌륭하여 소품 하나에도 당시 귀족사회의 정서(혹은 원작자의 복고주의적 태도)가 담겨있는 듯 하다. 로맨틱코미디류의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 좋아하는 관객에겐 비추, <색, 계>가 좋았거나 혹은 불만족스러웠던 관객이라면 간만에 나온 ‘진하고 징하고 찡한 사랑영화’를 놓치지 마시라.(황진미/ 영화평론가)

08. 07. 28.

P.S. 환경을 바꾸다 보니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들쭉날쭉하게 되었다(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페이퍼라니!). <지젝이 만난 레닌>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믿는지 모른다'는 장을 읽다가 둘러본 몇몇 사이트에서 읽은 소개기사들이(그 중 하나는 지난 금요일에 지면에서 읽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카트린 브레야의 전작들은 예전에 다룬 바 있다('카트린느 브레이야'라고 주로 적었다). '100자평'에도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만 마네에 대한 오마주는 그녀의 영화에서 반복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네와 티치아노'(http://blog.aladin.co.kr/mramor/912039)를 참조할 수 있으며,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로망스 대 포르노'(http://blog.aladin.co.kr/mramor/800293)에서 읽어볼 수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유 2008-07-2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에서 전단을 읽었더랬죠. 가봐야죠,^^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저도 동네에 들어오기를 기다려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8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35년이면 7월 혁명으로 샤를르 10세가 쫓겨나고 온건한 루이 필립이 등극하면서 7월 왕정이라고 하는데...그 전인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가 재위한 때를 왕정복고기라고 합니다.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시가전하는 장면이 1830년 7월 혁명입니다.평론가가 착각했네요.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ㅎㅎ 기자가 착각했거나 소개자료의 오류로 보입니다...
 

당장은 '놈놈놈'도 볼 형편이 안되지만 여건만 된다면 챙겨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은 두 대중가수에 관한 것이다. 존 레넌과 밥 딜런. 더 잊어먹기 전에 일단 기사라도 챙겨놓는다. 시사인에서 읽은 리뷰기사들이다(한겨레의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962.html 참조).    

시사인(08. 07. 22) 누구나 아는, 아무도 몰랐던 존 레넌

누군가를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 ‘누군가’는 절친한 지인일 수도, 유명한 공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그는 어떤 사람인가’, 대답이라도 내놓을라치면 그만 말문이 막히고 더러는 숨까지 턱, 막혀버리기 일쑤다. 잘.안.다. 고작 세 음절로 확언하기에는 인간이라는 회로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흔해빠진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일평생 제 존재의 이유 하나 제대로 간파해내기도 버거운 인간이다. 그러니 하물며 남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가 필요할 터이다. 가령 존 레넌 같은 인간에 대해 아는 척할 때는 말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우리가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해온 어느 팝 스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영화가 담아낸 존 레넌은 누구나 잘 아는 존 레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존 레넌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언젠가 어렴풋이 듣긴 했는데 그 누구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의 인생 후반전을 다룬다. 특히 비틀스 이후 존 레넌,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존 레넌의 삶에 집중한다. 당대 최고 팝스타 존 레넌이 왜 별안간 혁명을 노래하게 되었는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라며 시비걸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제작진은 “존 레넌 일생의 진심이 담긴 사회활동이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게 안타까워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던 이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평화를 알리려 했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려고 감독 두 명이 달라붙어 찾아낸 당시 자료 중에는, 들끓는 베트남 전쟁 반대여론에 맞서 누구처럼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애쓴 닉슨 대통령의 ‘특별 담화’도 있다.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연예인은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는 그의 모습은 뇌 용량 2MB짜리 대통령을 우리만 가진 게 아니었구나, 안도(?)하게 만드는 뜻밖의 효과도 있다. 그때 존 레넌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회 불안을 선동하는 ‘배후 세력’으로, 워싱턴에 모인 순수한 촛불 시민(세상에! 그들도 촛불을 들었더라)을 반미·반정부 투쟁으로 이끈 ‘전문 시위꾼’으로 남아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이 97분짜리 다큐멘터리에 소상히 담겨 있다.



존 레넌과 닉슨 정부의 ‘역사적 대결’
<존 레논 컨피덴셜>의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즉 ‘미국 대 존 레넌’이다. 미국에 맞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노래와 행동으로 저항한 아티스트와 그를 두려워하고 미행하며 도청하는 걸로 성이 안 차 결국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 닉슨 정부. 이 역사적인 대결의 거대한 실체를 가볍게 종주해내는 이 늠름한 다큐멘터리는, 존 레넌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 남보다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를 확보했다. 존 레넌의 연인 오노 요코의 회상에서 미국의 대표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의 증언, 존 레넌을 미행한 당시 FBI 요원의 자백까지. 물경 수십명에 달하는 관련자 육성 인터뷰와 흥미진진한 미공개 동영상 자료가 뒷받침된 덕에, 단순한 인물 다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그가 살다 간 한 시대를 통째로 증언하는 생생한 목격담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영화가 있다. ‘감탄’하는 영화, ‘감동’받는 영화,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은 존 레넌의 멋진 인생에 ‘감탄’하고 그의 용감한 노래에 ‘감동’받다가 결국 이 소중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감독에게 ‘감사’까지 하게 만드는 영화다. 충격과 감격을 동시에 선사하는 근사한 다큐멘터리다. 물론, 존 레넌이 워낙 근사한 삶을 살다 간 덕분이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시사인(08. 06. 03) 밥 딜런 그 인간, 참 복잡한 인물이네

he는 her가 되고 her는 here가 되었다가 다시 there로 변한다. <아임 낫 데어>의 제목 ‘I’m not there’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라는 단어에 도달하는 첫 시작은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짐작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인생을 그려내기 위해 ‘그녀’의 연기에 기대는 영화이면서,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인 동시에 그때 ‘그곳’의 혼돈을 증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에 도달하는 시작처럼, 캐릭터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간의 핵심에 이르는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텅 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의 인생을 재구성한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배우 6명이 캐릭터 7개를 연기한다. 각각 다른 인물로 설정된 그들이 사실 모두 같은 인물 밥 딜런의 어느 한 시기를 대변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논란을 일으킨 밥 딜런을 ‘주드’라는 이름으로 연기하는 식이다. 크리스천 베일은 그때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기 전, 시대의 대변자로 사랑받던 전성기의 밥 딜런을 ‘잭’이라는 인물로 연기하다가 훗날 종교에 귀의해 가스펠 음악을 부르던 밥 딜런을 ‘존’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한다. 여기에 벤 위쇼·리처드 기어·히스 레저 같은 유명 배우가 합세해 저마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밥 딜런의 인생, 밥 딜런의 사상, 밥 딜런의 방황과 밥 딜런의 욕망을 감당한다.



<벨벳 골드마인>(1997년)이라는 음악 영화로 여러 사람을 흥분시킨 감독 토드 헤인스는 왜 이리도 복잡한 방식으로 밥 딜런을 그려냈을까. 매우 싱거운 대답이 되겠지만, 밥 딜런이 그만큼 복잡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밥 딜런이 직접 쓴 자서전을 포함해 4년 동안 그에 관한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지루한 독서 끝에 얻은 결론.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 작가들이 모두 실패했으며 픽션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는 거다.



‘시대의 이면’까지 들추어낸 역작

결국 직접 밥 딜런 한번도 만나보지 않고 만든 밥 딜런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밥 딜런 영화로 칭송받는 역설. <아임 낫 데어>는 ‘사실’에 충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건 아니라는, 이 바닥의 얄궂은 아이러니를 새삼 일깨운다. 때로 진실은 이렇게 완벽한 허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전기 영화는 인간의 이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좋은’ 전기 영화는 그 인간이 살다간 시대의 이면까지 함께 들추어낸다. 11년 전 글램 록에 열광하던 1970년대를 느끼게(‘생각하게’가 아니라!) 만든 <벨벳 골드마인>이 그랬듯 토드 헤인스 감독은 이번에도 ‘더 좋은’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아임 낫 데어>를 보고 있으면 말로만 듣던 1960년대의 혼돈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글로만 읽던 ‘반문화’의 위력을 느끼게 된다. 늘 새로운 아티스트를 갈망하면서 정작 그 아티스트가 새로워지는 것에는 야박한 대중과, 가차없이 세상을 공격하면서 정작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는 건 참지 못하는 아티스트 사이. 그때도 지금처럼 쉽게 좁혀지지 않는 틈이 존재함을 깨닫게 만든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7. 25.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8-07-2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임 낫 데어>는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 보는 내내 어떤 '과도함'이 느껴져서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렸습니다. Todd Haynes의 전작들을 떠올려보면 이는 사실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요.^^ 사실에 충실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여러 면모들의 나열과 알레고리화 작업 그 자체가 어떤 '진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님 역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존 레논에 대한 영화가 기대되네요.

로쟈 2008-07-26 00:35   좋아요 0 | URL
이런 쪽 영화들은 꼭 챙겨보시겠군요.^^

클리오 2008-07-2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레논의 영화는 아주 많이 보고 싶은데, 다큐멘터리라 어떻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지 모르겠네요.. 더운 여름 잘 지내시죠? ^^

로쟈 2008-07-26 00:36   좋아요 0 | URL
오늘도 비가 와서 더운 건 모르겠습니다. 별로 잘 지내지는 못하구요.^^;

2008-07-2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2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나침반 2008-08-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레논컨피덴셜, 어제 봤는데요. 중간 부분이 생각보다 지루했어요. 좀 늘어지는 감도 있고. 다큐도 좀더 재밌게 만들 수 있을텐데, 암튼 아쉬웠더랬지요. :)
 

학술저널 담비에서 영화이론서 번역문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482). 동국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되었던 것인데,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에 대해서 꼬집고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한 참고자료로 챙겨놓는다.

동국대 대학원신문(148호) '무지’보다 ‘무시’에서 비롯된 오역

국내에서 영화가 학문적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영화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1990년대에 들어 겨우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영화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현재는 체계적인 발전단계를 거치지 못한 무수한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는 양상이다.
또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이론보다 정신분석학, 기호학, 서사학 등 타 학문의 방법론을 그대로 이식하며 형성된 이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국내 영화이론 연구는 여전히 어수선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영화용어’에 대한 오역'
외국 영화이론서의 허술한 번역도 국내 영화이론 연구의 부실화에 한몫을 했다. 영어권 이론서를 제외한 여타 외국어 영화이론서들의 경우, 번역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해당 외국어에 대한 독해 능력과 영화이론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역자가 매우 드문 현실에서 비전문가들의 마구잡이 번역이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이론서의 번역은 타 분야의 이론서 번역에 비해 후진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은 다양한 차원에서 발견되지만,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영화용어’들에 대한 오역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원서의 번역과정에서 행해지는 주요 영화용어들의 오역은 저자의 이론들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종종 원서 전체의 독서를 불가능하게 한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프랑스 영화이론서들의 경우, 상당수의 영화용어들이 본래의 뜻과 다른 엉뚱한 단어로 번역돼 정상적인 독서가 불가능할 때가 많다. 가령, 파스칼 보니체의 저서를 번역한 『영화와 회화. 탈배치』에서는 ‘쇼트’를 뜻하는 불어 단어 ‘plan’이 ‘영상’으로 번역돼 번역서 곳곳에서 숱한 오류로 이어진다. 그리고 책의 제목이자 핵심 용어인 ‘decadrage’는 이미 국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인 ‘탈프레이밍’이나 ‘탈프레임화’ 대신 ‘탈영상배치’라는 모호한 용어로 번역돼 저자의 논지를 완전히 흐트러뜨린다. 또 다른 예로, 자크 오몽의 『이마주』에서도 ‘illusion’이라는 단어가 ‘착시’가 아닌 ‘환영’으로 번역돼 ‘헤링의 착시’와 ‘뮐러-라이어의 착시’ 같은 초보적인 시각이론 용어들이 ‘헤링의 환영’과 ‘뮐러리어의 환영’이라는 엉뚱한 용어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오역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일단 위의 예들만으로도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현황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이중, ‘탈프레이밍’과 ‘착시’에 관한 오역은 그나마 역자의 불성실함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쇼트’라는 용어에 대한 오역은 그 정도가 민망할 정도로 지나치다. 쇼트는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영화용어로서, 소설과 비교할 경우 ‘주어’나 ‘문장’ 등에 해당하고 음악의 경우 ‘음표’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역자는 역서 내내 쇼트의 의미를 모른 채 어려운 영화이론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도대체 주어나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문학이론서를 번역하는 이가 있겠는가? 또 음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음악이론서를 번역하는 이가 있겠는가?

번역의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번역은 한 사람의 학식(Scholarship)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학문의 한 분야와 관련될 경우, 이론서 번역은 그 분야의 학문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잣대가 될 수 있다. 국내 영화학의 경우, 영화이론에 대한 학습이 전무하고 영화사에 대한 지식과 영화감상의 경험도 턱없이 부족한 비전문가들이 외국어 독해능력 하나만을 믿고 쉽게 영화이론서 번역에 뛰어들고 있어, 학문적 성숙도를 끌어올리는 일이 여전히 먼 미래의 일처럼 요원해 보인다.

영화이론 번역의 이 같은 문제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선, 번역의 질적 수준과 충실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내 출판현실이 그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작업에 대한 대우가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현실에서, 가뜩이나 어렵고 인기도 없는 이론서 번역은 기피 대상일 수밖에 없다. 다음, 국내 영화학계의 안일한 태도와 정확한 영화용어집의 부재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아직도 국내에는 모두가 공신할만한 영화용어사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수의 영화학자들이 각자 편할 대로 영화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화에 대한 국내 인문학자들과 출판계 종사자들의 인식 자체에 있다. 사실,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들은 영화에 대한 ‘무지’보다는 ‘무시’에서 비롯된다. 여전히 국내 학계나 출판계에는 일정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외국어에 능한 연구자라면 외국의 전문적인 영화이론서도 손쉽게 번역해낼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국내 영화 연구자들이 제대로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 정도로, 외국의 유명 영화이론서들은 국내에 알려지기 무섭게 인문학 전공 번역자들에 의해 접수된다. 요컨대,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과 영화학에 대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멸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영화이론 번역의 정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김호영/ 한양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08. 06. 04.

Pascal Bonitzer

P.S.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파스칼 보니체의 책은 오역으로 악명이 높지만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130쪽도 안되는 책이 18,000원이다. 견적이 안 나오는, 숭고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비가시영역: 리얼리즘에 관하여>(정주, 2001)는 또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 일찍 절판되었고(대학 도서관들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런데, 필자가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했다면 그나마 잘된 번역서, 잘 읽히는 번역서의 경우에도 혹 문제는 없는 것인지 살펴보았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최악의 번역서를 사례로 삼아서 '일반화'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대다수 번역서들이 '쇼트'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영화이론서들을 읽다가 골탕을 먹은 적이 여러 번 되기에 '번역의 질적 수준과 충실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불비한 여건에 대한 필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국내 영화학계의 안일한 태도와 정확한 영화용어집의 부재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아직도 국내에는 모두가 공신할만한 영화용어사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수의 영화학자들이 각자 편할 대로 영화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은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지적이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한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과 영화학에 대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멸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영화이론 번역의 정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영화학이 인문학의 바깥인지, 더 좁혀서 '영화이론'이 '이론'의 바깥인지 의문이 들 뿐더러 현대 영화이론이 흡수하고 있는 다양한 이론적 담론들의 경우 과연 '쇼트'가 무엇인지, '탈프레이밍'이 무엇인지 아는 영화학도만이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이론과 접속하고 있는 기호학(언어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의 다양한 담론들을 소화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영화학도에게만 주어지는 것일까? "국내 영화 연구자들이 제대로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 정도로, 외국의 유명 영화이론서들은 국내에 알려지기 무섭게 인문학 전공 번역자들에 의해 접수된다"는 판단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최근의 이론가들은 제쳐놓더라도 영화이론의 고전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도 번역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영화이론의 기본서라 할 만한 크리스티앙 메츠의 책들도 국내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때문에 영화학 전공자들이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다는 것은 아무래도 엄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워 보인다. '영화이론서 번역, 이렇게 한다'라고 본때를 보여줄 만한 책들을 냄으로써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에 한방 먹이는 것이 '무지'를 극복하고 '무시'를 불식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일 듯싶다... 

P.S. 메츠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상상적 기표>(문학과지성사, 2009)가 드디어 출간됐다. 모처럼 도전해볼만한 영화이론서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09. 06.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주 필름2.0을 보다가 알게 된 건데, 오는 5일부터 개막하는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에서 러시아의 여성 영화감독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의 <최고의 날들>이 개막작으로 상영된다고 한다('프로스쿠리나 Svetlana Proskurina'란 이름이 왜 '프로슈리나'로 표기되는지 모르겠다). 내게도 생소한 이름이지만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과 공동작업을 하는 '러시아 예술영화의 대모'라고 한다(찾아보니 <러시아 방주>의 각본을 썼다). 관련소식을 옮겨놓는다. 영화를 몇 편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소식]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특별전

2008년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가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여름의 시작과 함께 관객들을 찾아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1990년 <우연한 왈츠(The Accidental Waltz)>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수상했고 올해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회고전까지 열린 러시아 여성 감독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 특별전'이 바로 그것!

첫 작품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부터 2008년 최근작 <최고의 날들(The Best of Times)>에 이르기까지 위태로운 인간존재의 모습과 내면을 특유의 세밀함으로 묘파해 온 프로슈리나 감독은 알렉산더 소쿠로프(Alexander Sokurov) 감독과 공동 작업을 하는 등 러시아 예술영화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감독이다.

이번 서울국제영화제에서는 그녀의 특별전을 마련하면서 이 노년의 감독이 직접 방한해 자신의 장편 전 작품 6편과 그녀의 친구이자 멘토인 알렉산더 소쿠로프에 대한 개인적인 오마주인 다큐멘터리 1작품을 소개하고, 관객들과 직접 자신의 영화세계와 러시아 영화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마스터 클래스'도 마련한다.

제9회 서울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감독 특별전(Svetlana Proskurina Retrospective)' 에서 인물들 사이의 친밀성과 질투, 욕망과 죄 등 인간 실존의 조건들을 내밀하게 그러나 최소의 것으로 응집시키고 있는 작품들을 통해 그녀의 영화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만나는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자.

Светлана Проскурина
биография

*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특별전' 상영작 목록

-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1Ⅰ30min
Molodost 영화제 신인감독상, 최우수단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6Ⅰ77min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경쟁부문



- <우연한 왈츠(Accidental Waltz)>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89Ⅰ92min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마르세이유 페스티발 여우주연상, 까르띠에 특별상
산 세바스티안, 토론토, 몬트리올, 이스탄불, 로테르담, 예테보리 영화제 상영

- <거울 속의 투영(The reflection in the mirror)>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1992Ⅰ80min
깐느 영화제 감독주간
뮌헨, 토론토, 몬트리올, 로테르담 영화제 상영
1995년 뉴욕 링컨센터 회고전



- <섬. 알렉산더 소쿠로프(Islands. Alexander Sokurov)>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3Ⅰ38min

- <원격 접속(Remote Access)>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4Ⅰ88min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러시아 키노쇼크 영화제 최우수 여자주연상
모스크바 영화제 최우수 작품을 위한 필름클럽상
블라디보스토크 Pacific Meridians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최우수 여우조연상



- <최고의 날들(The Best of Times)>
스베틀라나 프로슈리나 Svetlana ProskurinaⅠRussiaⅠ2007Ⅰ93min
2008 로테르담 영화제 회고전

08. 06. 0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유 2008-06-0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도 그렇고, <최고의 날들>의 주연들인가요? 배우들의 모습도 시선을 끄네요..

로쟈 2008-06-04 00:11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들이긴 한데, 이번주도 올스톱이어서.--;

노이에자이트 2008-06-0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소련 여배우는 루드밀라 사벨리에바가 제일 좋아요.<해바라기>에서 눈밭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면...관람석에서 탄성을 지르는 이들이 많았어요.이 장면에서...이런 누나들은 안 늙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예전 교육방송에서 이 배우가 나타샤 역으로 나오는 전쟁과 평화 방영할 때는 너무 길어서 (며칠 한 것 같음)못 봤지요.근데 영화 해바라기를 검색창에 알아보니 김래원 허이제 주연 해바라기만 나오네요.인터넷 정보의 한계...

로쟈 2008-06-04 18:11   좋아요 0 | URL
<전쟁과 평화>가 데뷔작이었죠.^^
 

주중에 읽어보려고 했던 기사를 시간을 내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희곡 <세자매> 공연에 대한 리뷰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이윤택 연출이어서 눈길을 끈다. 공연을 직접 관람할 여유는 없지만 리뷰만으로도 감은 잡아볼 수 있겠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4&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160).

컬처뉴스(08. 04. 16)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통속성

19세기 사실주의 연극의 거장 안톤 체홉은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하게 매몰되어가는 인생의 모습을 특유의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면 비극적인 작품으로 ‘오독’되곤 하는 그의 희곡들은, 사소한 것들에 집착해 결국 생의 진수를 놓쳐 버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블랙코미디와 같은 강한 희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는 4월20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세자매>는 선이 굵은 중견 연출가로 이름난 이윤택 씨가, 이러한 원작의 희극성을 증폭시켜 ‘대중통속극’의 맥락으로 재해석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낸 올가, 마샤, 이리나는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변방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로 내려왔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이들 자매는, 원치 않은 현실을 견디며 늘 아름다웠던 도시 ‘모스크바’를 꿈꾸며 살아간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직장 때문에 늘 갈등하는 맏딸 올가, 결혼하면서 처음 품었던 기대와 너무나 다른 남편의 모습으로 인해 불행해 하는 마샤, 그리고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꿈꾸기를 단념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막내 이리나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다지 낯설지 않은 청춘의 모습이다. 사방이 가로 막혀 있는 갑갑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 자매는 그녀들의 구원으로서 ‘모스크바’를 외친다. 하지만 꿈꾸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을 꾼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혹은 정말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꿈으로 그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비루할지언정 너무나 안정되어 버린 일상을 걷어차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지의 시간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선택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1막에서 ‘모스크바’를 외치던 세 자매는 2막과 3막 그리고 4막에서도 여전히 그 곳에 머물러 있다. 교사직을 그만두려고 하던 올가는 교장이 되고, 마샤는 마찬가지로 불행한 결혼 생활로 고통스러워하는 ‘베르시닌’ 중령과 동병상련의 힘겨운 사랑에 빠지며, 이리나는 무의미한 직장 생활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세 자매에게 희망과 같았던 남동생 ‘안드레이’는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한 ‘나타샤’의 유혹에 빠져, 너무 쉽게 교수가 되려던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만다.

그렇게 멈추어 서 있는 세 자매의 삶은 점점 더 감당할 길 없는 가혹한 현실에 질식당해 간다. 오직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안녕 밖에는 관심이 없는 나타샤에 의해 자신의 방을 빼앗기는 순간, 이리나는 깨닫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모스크바’를 꿈꿀 수 없다. 정말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듯 체홉은 그저 멈추어 서 있었기에 좌절된 꿈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던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말한다. 갔어야 했다. 떠났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결단했어야 했다. 하지만 늘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일과 기회 그리고 사랑은 어느 덧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꿈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군대의 이동과 함께 텅 비어버린 도시에 남겨진 세 자매 곁에는 속물스런 시의회 의원이 된 안드레이와 이기적인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 버린 그의 아내 나타샤 만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 본능을 위한 이해타산에 밝은 나타샤의 세계는 점차 꿈의 흔적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서 있는 세 자매의 세계를 거침없이 침식해 들어온다. 이런 이유로 서로를 힘겹게 의지한 채 삶의 의미와 미래의 희망을 애써 부르짖는 세 자매의 마지막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지 못하고 현실을 맴돌고 주저앉고 마는 허다한 인생의 모습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 그린 체홉의 <세자매>에서, 이윤택 연출은 그 이면에서 꿈틀대고 있는 격렬한 욕망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는 원작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방식으로서 은유와 절제의 방식을 파하고, 도리어 노골적인 표현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본심을 폭로한다.

당시 사회 통념상 은밀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던 나타샤의 유혹은 안드레이를 거의 덮치는 식의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원작에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통스러워하는 마샤와 베르시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렬한 키스와 포옹을 주저하지 않는다. 군의 이동으로 인해 무기력하게 떠나는 베르시닌의 등에 뛰어 올라 머리채를 움켜쥐는 마샤의 파격적인 모습은 이전의 어떠한 <세자매> 공연에서도 볼 수 없는 ‘통속적인’ 동시에 한국적인 정한의 표현 방식이었다.

사실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의 공연들에서 <세자매>의 등장인물들은 비록 내면에는 인생의 고뇌와 욕망이 꿈틀대고 있을지언정, 겉으로는 세련되고 예의바른 태도로 각자의 진심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이윤택 연출은 이런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지극히 ‘속물적인’ 보통 사람들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고 해석한다. 베르시닌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감추기 위해 늘 인류나 조국의 미래에 관한 멋진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심한 사람이며, 그런 베르시닌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에 빠진 마샤는 그와 헤어지는 마당에도 자신의 신발을 챙기는, 말 그대로 ‘아줌마’다.

안드레이는 점차 몰락해 가는 집안의 현실은 물론, 아내 나타샤의 공공연한 외도를 애써 외면한 채 다만 안정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의 아내 나타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해 성공하려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화신과 같은 존재이다. 이윤택 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체홉의 매력이란 지극히 속물적인, 그런 까닭에 우리와 같이 평범한 보통 사람의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을 담아낼 수 있는 특유의 통속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체홉 작품 특유의 침묵과 절제의 미학을 포기하고, 통속극 방식의 자극과 도발의 독법을 선택한 이윤택 연출의 <세자매>는 분명 쉽고 재미있는 대중적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원작이 지닌 정서, 곧 가고 싶고, 말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었지만, 결국 끊임없는 망설임 속에 인생을 놓쳐버린 세 자매의 회한어린 정서는 느끼기 힘들어졌다. 어떤 방식의 해석이 원작 또는 관객의 취향에 보다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다. 다만 과거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과 차별화 된 방식의 새로운 <세자매>가 체홉의 작품 보는 즐거움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듯 보인다.(박준용_연극평론가)

08. 04. 18.

P.S. 로렌스 올리비에가 감독한 영화 버전의 <세자매>(1970)는 http://www.youtube.com/watch?v=saiH6HJH2Zw 참조. 도입 장면에서 암시되지만 세자매는 세월에 흐름에 맞서고자 하는 운명의 세 여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윤택 버전에서는 너무 '속물'로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도 싶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소설은 재밌는데 희곡은 아직...왜 희곡은 읽기가 싫은지 모르겠어요.그래서 셰익스피어 전집도 사놓은지 5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안보고 있어요.

로쟈 2008-04-20 00:25   좋아요 0 | URL
독서일기를 내려면 읽어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