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스타브로긴의 마지막 편지

13년 전에 올렸던 글이다. 그로부터도 수년 전에 썼던 거라고 하니까 정확히 가늠이 되지 않는 언젠가 쓴 글이고 썼다는 사실조차도 여러 번 잊은 글이다. 이렇게 보관돼 있지 않았다면 유실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강의를 내년 상반기에는 내놓을 예정인데 비로소 빚을 좀 덜게 되겠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하여 최근 나의 관심사는 ‘밀 대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대 도스토예프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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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50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푸시킨(푸슈킨)의 유일한 장편소설 <대위의 딸>이 역사소설로 갖는 의미에 대해서 적었다. 리뷰에서 언급한 <푸가초프의 역사>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대위의 딸>과 합본된 형태로 나온다면 가장 이상적이겠다. 지면에 나간 마지막 문장의 오타는 수정했다. 

















주간경향(19. 11. 04) 역사를 보충하는 문학적 진실


제정 러시아 시기 최대 농민반란이었던 푸가초프의 반란(1773~1775)을 소재로 푸시킨은 두 편의 작품을 쓴다. 하나는 역사서 <푸가초프의 역사>(1834)이고(황제 니콜라이 1세의 명령에 따라 <푸가초프 반란사>로 출간된다), 다른 하나가 역사소설 <대위의 딸>(1836)이다. 똑같은 역사적 사건을 각기 다른 두 장르의 글로 다룬 것은 역사와 문학, 어느 한쪽의 진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푸가초프의 역사>에 이어 쓴 <대위의 딸>을 통해서 푸시킨은 무엇을 보충하려고 한 것일까. 혹은 역사적 진실은 어떤 문학적 진실에 의해서 보충되어야 할까. <대위의 딸>을 읽을 때마다 염두에 두게 되는 질문이다.


문학과 역사의 상호 보완관계는 <대위의 딸>에서 ‘역사’와 ‘가족연대기’의 대립구도로 설정된다. 화자이자 수기의 저자인 그리뇨프는 푸가초프 반란의 한 격전지를 둘러보고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렌부르크 봉쇄를 묘사하지 않으련다. 이는 역사의 영역이지 가족연대기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뇨프의 이런 구분법은 그대로 푸시킨의 구분법으로 보아도 좋겠다. 푸시킨 자신이 푸가초프 반란의 격전지를 직접 답사하고 관련자료를 두루 열람하였기에 당시의 참담한 상황과 농민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위의 딸>의 이야기는 그리뇨프의 개인적 경험에 한정된다.

가족연대기이자 한 개인의 수기로 범위가 축소되는 대신에 소설의 방점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귀족 출신의 장교로 지방의 한 요새에 배속되는 그리뇨프는 근무지로 가던 중에 눈보라를 만난다. 다행히 한 농부를 길 안내인으로 만나서 도움을 받고 그에게 답례로 토끼가죽 외투를 건넨다. 이 농부가 정부군을 피해 은신 중이던 푸가초프였다는 사실을 그리뇨프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자신의 요새가 반란군에 의해 함락되고 체포돼 농민 황제를 자처한 푸가초프의 면전에 나가서다. 푸가초프는 적군의 장교지만 그리뇨프의 후의를 상기하고 자비를 베푼다. 두 사람은 각각 반란군 수괴와 제국의 장교지만 서로 우정을 나눈다.


실제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 이러한 장면은 소설의 말미에서 한 번 더 연출된다. 푸가초프의 반란이 진압되고 그리뇨프는 푸가초프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체포돼 반역죄로 처형당할 상황에 처한다. 이때 마샤가 그리뇨프의 구명을 위해 황실을 찾아가 한 귀부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나중에 그녀가 여제 예카테리나 2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푸가초프가 그랬듯이 여제 역시도 그리뇨프에게 선처를 베푼다. 푸가초프의 환대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자비는 실제 역사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비현실적 설정이다.


그렇지만 <대위의 딸>에 나타나는 자비라는 주제는 <푸가초프의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제대로 음미될 수 있다. 그리뇨프의 수기가 끝나자 덧붙여진 발행인의 말에는 푸가초프의 처형 장면이 들어가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반란의 경과도, 진압과정도, 그리고 최후의 처분도 모두 참혹했다. <대위의 딸>에서 푸시킨은 참혹했던 실제 역사를 최소화하는 대신에 가상의 환대와 자비를 집어넣는다. 미적 가상으로서 문학적 진실이란 냉혹한 역사적 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역사와 화해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대위의 딸>은 보여준다.


1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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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266 2019-10-3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 리뷰입니다 냉혹한 역사와 따듯한 인간영혼이 깃든 문학이 서로 조우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문학은 이런 면에서 실제적인 효용은 아니라도 인류가 나가야 할 방향을 가리켜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래도.... 근데 좀 마음이 아프네요 우리 지금의 현실도 푸슈킨의 문학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빵굽는건축가 2019-10-3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연대기와 가족의 연대기 사이에 있는 리뷰처럼 읽었어요.

모맘 2019-10-3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보충하는‘ 문학적 진실.
보충하고 싶은 역사가 많았다면,
보충하고 싶은 생각이 덜 드는 세상을 만들어야될텐데 참 쉽지가
않네요...
 
 전출처 : 로쟈 > 사회주의를 향한 열망과 연민의 무덤

9년 전에 쓴 글이다.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필독 작가인데 요즘은 주로 장편 <체벤구르>를 읽는다. 한권만 읽을 경우 중편 <코틀로반>이 다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코틀로반>을 다룬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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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대로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를 다룬 책이 출간되었다. 러시아 출신으로 현재는 미국 버클리대학의 인류학과에 재직중인 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문학과지성사). 내게는 초면의 저자인데 원저는 2005년에 출간돼 높은 평판을 얻었다고. 슬라보예 지젝도 추천사에서 ˝후기 소비에트 시기를 다룬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했다.

˝2005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왔으며, 후기 소비에트 시기 문화 연구의 붐을 일으킨, 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제목이 함축하는 것처럼, 소비에트 시스템의 ˝붕괴는 그것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감히 예측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막상 붕괴가 시작되자 곧장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흥분되는 사건으로˝ 경험되었다. 이 책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를 살아간 사람들이 현실과 관계 맺었던 방식에 대한 기존의 상투적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소비에트 시스템의 본질에 놓여 있는 이 역설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처럼 흥미와 지적 자극을 던져줄 책이 출간돼 반갑다.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차에 좋은 참고가 될 듯하다. 최근에 나온 스베틀라나 보임의 <공통의 장소>(그린비)와 함께 우선독서목록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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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48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를 하면서 첫 작품으로 다룬 체호프의 <벚꽃동산>에 대해서 적었다. 역사적 과도기에 대한 성찰로 여전히 음미해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주간경향(19. 10. 21) 과도기 러시아 사회 지배계급의 교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낡은 시대, 낡은 삶과의 작별을 통해서다. 그렇지만 이 작별은 순간의 의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의 교체, 혹은 이행은 일련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안톤 체호프의 마지막 장막극 <벚꽃동산>(1904)이 이러한 이행기의 문제와 과제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처음 무대에 올려진 시기가 러시아 역사의 과도기였고 작품의 줄거리도 벚꽃동산의 주인이 바뀌는 이야기다. 어떤 교훈을 음미해볼 수 있을까.


작가가 ‘4막 코미디’로 부른 이 작품에서 주요 배역은 각각 두 계급을 대표한다. 지주 계급의 대표로는 라네프스카야와 그녀의 오빠 가예프가 있다. 선량하지만 세상의 물정에는 너무 둔감하며 게다가 게으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속받은 영지를 바탕으로 무위와 허영의 삶을 살아왔다. 점차 재산을 탕진하고 채무가 늘어가는 바람에 가장 아끼던 벚꽃동산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막연히 친척의 도움만을 기대한다.

연극은 아들을 잃고 5년간 외국생활을 하던 라네프스카야가 영지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 가운데 상인 로파힌이 또 다른 계급의 대표자다. 아버지가 라네프스카야 집안의 농노였기에 스스로 농부라고 칭하지만 로파힌은 수완을 발휘해 재력가가 되었다. 전통적인 지주 귀족계급과 대비해 새롭게 부상한 중간계급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책을 읽어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푸념하지만 현실의 물정에 대해서는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로파힌이 라네프스카야를 기다린 것은 그녀에게 벚꽃동산의 경매와 관련한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다. 비록 가예프에게는 “천박한 구두쇠”라고 조롱받지만 로파힌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라네프스카야를 곤경에서 구해주고자 한다. 그의 제안은 벚꽃동산은 별장지로 분할하여 임대하면 꽤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고 채무도 정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벚꽃동산은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긴 하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낳지는 못한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버찌는 판로도 없다. 파산 직전에 놓인 라네프스카야 남매로서는 귀담아 들어볼 만한 제안이지만 이들은 수용하지 않는다. 임대사업을 위해 아름다운 동산의 벚나무를 베어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로파힌이 보기에 이들은 “경솔하고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사람들”이다.

결국 아무런 방책도 세우지 않아 라네프스카야 남매의 벚꽃동산은 경매에 부쳐지고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로파힌이 새 주인이 된다. 벚꽃동산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확장해서 보면 러시아 사회의 지배계급이 교체된다는 상징적 의미도 갖는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체호프는 다소 특이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로파힌은 벚꽃동산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가련하고 착한 부인’ 라네프스카야가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은 것을 원망한다. 그래서 희희낙락하기보다는 모든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 로파힌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성실한 인물이지만 한편으론 교양이 부족하고 사랑에는 숙맥인 인물로 그려진다. 아직 제대로 된 주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과도기의 사회적 풍경을 ‘코미디’로 감싸고자 한 작가가 체호프였다.


19.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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