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과 휴일에 연이어 강연행사에 다녀왔더니 '정신력'이 바닥이다. 써야 했던 원고들이 고스란히 밀렸으니 내주, 아니 당장 오늘 일정이 빡빡해졌다. 혼미한 틈에도 눈에 띄는 기사가 있어서 일단은 스크랩해놓는다. 시 번역에 관한 것인데, 최정례 시인이 자신의 시 영어 번역에 참여한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기억엔 김광규 시인의 경우에도 자신의 시 독일어 번역에 참여했던 듯싶다(시인 자신이 독문학자이다). 이런 경험들을 모아놓아도 번역뿐 아니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가 되지않을까 싶다. 

경향신문(10. 09. 13) “시 번역, 장벽 넘기 어려워… 원작자가 직접 참여 중요”   

“문학작품 창작자가 번역에 직접 참여하면 오역을 피할 가능성이 높겠죠. 특히 낯선 외국어의 표현과 어휘를 접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영감, 창조적 역량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시는 번역되는 순간 원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흔히들 말한다. 국내에 번역돼 출간되는 숱한 해외 문학작품들 가운데 시가 별로 없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최정례 시인(55)은 시 번역에 존재하는 까다로운 장벽을 넘기 위해 원작자가 직접 번역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2008년 말부터 지난해 말까지 1년간 미국 버클리대학에 방문학자 자격으로 머문 최 시인은 미국 시인 브렌다 힐먼(세인트매리대 교수)과 함께 직접 자신의 시 53편을 영어로 공동 번역했다. 미국 시 전문 저널 ‘프리 버스(Free Verse)’에 최 시인의 시 ‘보푸라기들(Motes)’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The Five-thousand-Year-Old Heart I’ve Swallowed)’ ‘없는 나무(The Absent Tree)’ 등 9편이 번역돼 실렸다. 최 시인의 시선집도 출판사 ‘팔로프레스(Parlo Press)’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레바논 감정> <붉은 수수밭> 등의 시집을 통해 밀도 높은 시어로 시간과 기억에 대한 시편들을 선보인 최 시인은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국 시인과 미국 시인이 공동으로 직접 자신의 시를 번역하기는 최 시인이 처음이다. 초벌 번역은 한국문학을 전공한 웨인 드 프레메르(Wayne de Fremere)가 맡았고, 최 시인과 힐먼이 원작의 의미를 해치는 표현을 바로잡고 영문 시 형식에 맞도록 가다듬었다. 최 시인은 “양국의 작가가 원작자이자 동시에 번역자의 역할을 했다”며 “공동 번역은 번역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들을 섬세하게 처리해 번역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번역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로 주어의 명확화, 상투적 시어의 번역, 관용어구의 번역, 잠재적 의미의 파괴 등을 꼽았다. 한국 시의 경우 주어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영시의 경우 구조상 주어가 없으면 문장 구성이 불가능해진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최 시인은 “번역이 불가피하게 변형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생략된 주어를 찾아 새롭게 지시함으로써 모호했던 원전의 의미와 감정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 ‘숲’이란 시의 ‘아름다운’을 영어로 번역할 때 ‘beautiful’이란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조언에 따라 ‘ultimate’ ‘ideal beauty’로 번역하기도 했다. 

“영어로 번역했을 경우 원본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들이 있어 신비하게 느껴졌어요. ‘한 오천 살은 먹은 내 마음이’의 경우 영어로 번역하고 나니 오히려 더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미국에는 김소월·김지하·고은 등 몇몇 한국 시인들의 시가 번역돼 있지만 미국인들에게 잘 읽히지는 않는 상황이다. 최 시인은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경우 해외의 현대 시와 감각이 통하기 때문에 잘 번역될 수 있다면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고 말했다.(이영경기자)  

10. 09. 13.

 

P.S. 잘 읽히지 않는다는 번역이지만, 한국 시의 영역본은 국내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답게 한국문학총서'로 10권이 출간돼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2-3권 갖고 있는 시리즈이고, 아예 이 번역시를 대상으로 한 시 비평을 고려해보기도 했었다. 나중에라도 좀 여유가 생기면 손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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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교수신문에 실린 '번역단상'을 스크랩해놓는다. <번역투의 유혹>(이학사, 2010)의 저자 오경순 박사가 '번역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간추리고 있다. 흔하게 쓰는 말이긴 한데, '번역투'가 실제로 무엇이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한다.

  

교수신문(10. 09. 06) 韓·日語의 편견에 기댄 직역이 ‘일어투’ 과잉 낳았다

번역학은 1983년에야 비로소 하나의 독립된 신생학문으로 정립됐다. 21세기 들어 번역학 연구는 전통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언어학, 사회학, 인류학, 민속학 등 학제간 연구의 관점에서 다양한 분야의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대 지식사회에서 번역을 문화의 힘으로 보는 인식의 확산 때문이다. 

일상 대화에서 자주 사용해 어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글로 표현할 때 어색하고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번역투란 우리말에 남아있는 부자연스러운 외국어의 흔적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글에서 원문이 아닌 번역문이란 흔적이 일정하게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우, 그러한 특성을 바로 번역투라고 한다.

번역학, 1983년 신생학문으로 독립
예를 들어 ‘만나다’, ‘모이다’라고 해야 할 것을 ‘만남을 가지다’, ‘모임을 가지다’라고 번역하는 경우는 영어의 ‘have+명사’를 직역한 번역투이다. ‘즐거운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는 ‘Have a good time.’을 직역한 번역투이며,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나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가 자연스런 번역이다. 

또한 아래 예와 같이 번역한 우리말을 보면 원문인 일본어가 그대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한 직역투 표현 역시 대표적인 번역투라 할 수 있다.

「獨島/竹島硏究における 第三の視覺」
‘독도(다케시마)연구에 있어서 제 3의 시각’
?‘독도(다케시마)연구의 제 3의 시각’

일본식 후치사 ‘~における’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에 있어서’는 글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군더더기 표현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없어도 의미 전달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에 있어서’, ‘~함에 있어서’는 ‘~에’, ‘~데’, ‘~에서’, ‘~에게’, ‘~의’, ‘~이’, ‘~할 적에/때’, ‘~의 경우는’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운 우리말 번역이다. 일한 번역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읽는 많은 말과 글 속에서도 일본식 용어나 구문, 일본식 造語,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직역해놓은 듯한 번역투 표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간절기 패션으로 잘 나가는 상품이에요.”(<한국일보> 2006. 10. 12)

간절기란 일본식 표현을 오역한 것이다. 일본어에는 환절기에 해당하는 한 단어로 된 용어가 없다. 대신 ‘절기의 사이’라고 표현한다. 일본어로 표기하면 ‘節氣の間’이다. ‘間(あいだ)’는 공간과 시간의 간격을 나타내는 용어다. 또는 ‘季節のわり目’라고도 한다. 일본어를 번역하면서 무분별하게 오역한 결과이다.

구체적인 번역투 극복 방법 없어 
한국어와 일본어는 언어 구조상 유사한 점이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 흔히 한·일 양 언어가 유사하단 선입관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양 언어의 문법 구조와 어법, 화용적 특징, 관용어법 등을 고려하지 않은 일대일 대응의 직역 방법이 자칫 번역 오류 및 품질이 좋지 않은 번역투로 이어지기 쉽다.

번역투는 번역자가 원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우리말 구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번역어는 일차적으로는 원문의 언어 내적·외적 의미에 부합하는 정확한 어감 및 의미 전달을 목표로 해야 하며, 이차적으로는 우리말 체계에 적합해 부자연스럽거나 생경하거나 번역투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을 위해서는 우리말 표현 능력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 번역자는 번역투의 문제를 사전에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가급적 줄여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고려할 때 번역과 번역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번역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번역학 논문이나 번역 연구서, 번역 지침서 등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일어일문학계의 일한 번역 관련 논문들을 살펴보면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 분석해 오역 사례를 지적하고 오역을 유형별로 분류·정리해 번역의 중요성을 제시한 논문이 대부분이며, 번역투와 관련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번역투와 일본어투에 관한 기존의 일부 연구는 국어 전공자들이 국어 순화 및 국어 문체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으로, 문제점을 제시한 성과는 있으나 구체적인 번역투 극복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일본어 전공자의 번역투 및 가독성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일본어 전공자의 번역투 문제 인식과 극복 방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다문화·다언어 사회인 지구촌 사회로 급속히 변모하며 국가 간의 관계 및 교류가 한층 긴밀하고 다양하며 광범위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번역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번역 교육의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것은 시대에 부응하는 당연한 결과이다.(오경순 고려대 일본학연구센터) 

10. 09. 10.    

P.S. 저자의 전공분야에 따른 것이지만, 주로 일본어 번역투에 대한 사례를 많이 들고 있는데, 언어적 영향관계에서 불가피한 부분과 불필요한 부분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에 번역학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대중적이진 않지만 이 분야의 책들(주로 학술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최근엔 <번역학 발전사>(이화여대출판부, 2010)도 번역돼 나왔고, 중국 학자의 <신번역학 논고>(한국문화사, 2010)도 눈길을 끈다. 도서출판 동인에서는 '번역학총서'를 출간하고 있는데, 번역투 문제와 관련해서는 <번역과 정체성>(동인, 2010)도 참고해볼 만하다. 번역/통역과 문화적 헤게모니의 관계를 짚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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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1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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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9-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투를 문제삼는 배경에 자리잡는 일종의 민족주의가 좀 꺼림찍하게 느껴집니다. 이와관련해서는 일종의 '실용주의'가 더 좋지 않을까요? 원산지가 어디든지간에 한국어로 전용되었을때 한국어의 표현자체를 풍부하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의"라고 표현할때의 느낌과 "~에 있어서"를 사용할때의 느낌은 서로 다를 수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오히려 "~에 있어서"라는 표현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 아닌가요?

로쟈 2010-09-12 08:45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그런데, 그 뉘앙스 차이에는 '오렌지'와 '어린지'의 차이도 포함되죠. 효과와 역효과를 식별할 필요가 있을 듯해요...

알비스 2010-09-1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투 뿐 만 아니라 일어 단어도 우리말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출산’이라는 단어가 일본어라고 합니다. 우리말은 ‘생산’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언론이나 방송에서 심지어 우리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계속 쓰고 있으니 후자가 오히려 어색하게 들립니다. (간혹, 사극에서 후자의 단어를 쓰긴 합니다만) 이 단어 이외에 다른 말도 우리말로 굳어져 오랜 시간 동안 사용이 돼서 다시 되돌리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시간이 가면서 바뀌기 하지만 그 바뀐, 또 바뀌고 있는 이유가 영 찜찜하죠.

로쟈 2010-09-12 08:48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 건너오거나 경우한 말을 다 배제하는 건 불필요할 뿐더러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좀 의식하고 가려쓰고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에요. 영어식 구문도 우리말에 이미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다못해 인칭대명사만 해도 그렇고, 구두법만 해도 그렇죠. 그렇더라도 '나쁜 번역투'를 가려내고 삼가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저녁을 잘 먹고 소화 안 되는 기사를 읽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의 신작이 출간된 건 반갑고, 게다가 그 책이 지난달에 기대를 표한 <앤디 워홀>(2009)이라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작 '번역서'라고 나온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는 엉뚱하게도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의 하나로, 앤디 워홀의 전기를 소설처럼 꾸며서 간추린 책이다.   

 

청소년들에게 21세기가 원하는 롤모델을 소개시켜주는 '청소년 롤모델' 제10권 '앤디 워홀 이야기'. 미국 원로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가 일상과 예술, 그리고 산업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문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의 창조적 인생 속으로 청소년들을 초대하고 있다. 류머티즘 무도병으로 인해 병약했으나 특유의 예술 세계의 바탕을 다져간 어린 시절부터 따라간다. 특히 앤디 워홀의 인생 속에는 21세기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 가치인 '다양성'과 '컨버전스'가 생생하게 살아숨쉼을 보여준다. '멀티 플레이 창조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롤모델이 되어줄 것이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사는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예술과 비즈니스를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상업미술가이자 순수미술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스로를 '예술 공장 공장장'이라고 부르면서 회화부터 영화까지 풍부한 예술 작품을 남겼다.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도 부수어내, 평범한 사람들도 그것을 마음껏 향유하도록 인도했다. 특히 코카콜라 병마저도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등 평범한 것을 예술로 승화시켜 새로운 것으로 창조시켰다.(아시아경제) 

일단 이런 소개기사에서 "미국 원로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가 일상과 예술, 그리고 산업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문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의 창조적 인생 속으로 청소년들을 초대하고 있다"는 말은 '작문'이거나 '거짓말'이다. 원저의 서문을 읽어보니(물론 번역본엔 번역돼 있지도 않다) 단토는 그런 걸 의도하지도 않았다. 여러 훌륭한 전기를 토대로 자신의 예술철학에 영감을 준 워홀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것이 책의 취지다.  

그렇게 해야 '팔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식으로 원저자와 판권계약을 한 책인지, '아서 단토 지음'이란 말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편집자주에 따르면, "원저작물에 어려운 부분이 많아 엮은이를 따로 두었"다. 차라리 편집자를 '저자'로 해서 책을 냈으면 훨씬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원저와는 관계가 없는 책이니까. 청소년 롤모델로서 '앤디 워홀'이 불만스럽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책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나는 말릴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불만은 왜 엉뚱한 저자의 책을 망쳐놓느냐는 것이다(정식 계약을 한 책이라면, 단토의 이 책은 다시 번역될 수 없다. 최소한 수년간은). 이런 게 출판의 '롤모델'인가?  

기대했던 책이 어이없게 출간돼 더없이 불쾌하다... 

10.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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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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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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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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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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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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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0-08-15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들만 있어서 이어지는 내용이 더 궁금해졌어요!

로쟈 2010-08-15 17:13   좋아요 0 | URL
몇분이 비밀글로 달아놓시는 바람에 저도...

미미달 2010-10-24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처럼 꾸민것은 아니구요. 그냥 간추리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소설같았으면 재미라도 있었겠지요. -_-;ㅋ
 

이번주에 나온 가장 '묵직한' 책은 막스 베버의 사회학 고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 2010)이다. 출간은 예고된 것이긴 한데, 해제와 역주가 원서의 두 배가 넘는 '정본 주석판'이다(일반 독자를 위해서는 조금 더 저렴한 보급판이 나오면 좋겠다). 책은 아직 입수하지 못했지만 '올해의 번역서' 후보로 올려놓음직하다. 흠, 이런 책은 황석영의 <강남몽>(창비, 2010)과 같이 읽어줘야 하나(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을 낳은 '윤리'는 무엇이었나?)...  

한겨레(10. 08. 14) 금욕주의, 자본주의의 정신적 힘이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사진·1864~1920)의 주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하 ‘윤리와 정신’)이 베버 전공 사회학자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번역으로 새로 나왔다. 이번에 출간된 <윤리와 정신>은 200자 원고자 850장에 이르는 상세한 옮긴이 해제와 방대한 역주를 거느리고 있어 분량이 원서의 두 배가 넘는다. 전공 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해 이루어낸 고전 번역이자 우리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꼼꼼한 주해 작업의 모범적 사례로 꼽힐 만한 작업이다. 옮긴이는 이와 함께 베버의 후속 연구논문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과 자본주의 정신’도 번역해 보론으로 실었다.  



베버는 흔히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거론되지만, 대학 시절 그의 전공은 법학이었고 강단에서는 법제사와 경제사를 동시에 가르쳤다. 생애 말년에야 뮌헨대에 사회학 교수로 부임했으나, 이때에도 경제사·경제학 교수직을 겸했다. 말하자면 베버의 학문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발전했으며, 인문·사회과학을 포괄하는 통합과학의 성격을 띠었다. 그의 얼굴과도 같은 저작인 <윤리와 정신>이 바로 그런 통합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베버는 이 저작에서 신학·경제학·역사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문학·문헌학·심리학 같은 여러 학문의 도움을 받아 이론의 건축물을 세웠다.

이 책은 제목이 알려주는 대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는 데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금욕적인 종교적 이념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추적해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온 시민계급의 엄격한 직업정신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인 셈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윤리가 시민계급의 직업정신을 낳았다고 베버는 말한다.

눈여겨볼 것은 이 책의 주제어 가운데 하나인 ‘자본주의’에 관한 베버의 독특한 생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을 논의의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를 영리욕이나 화폐욕과 동일시하는 통념에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영리욕, 이윤 추구, 화폐 취득,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은 화폐 취득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자본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 베버는 자본주의를 ‘탐욕’ 자체와 동일시하는 관점을 ‘천진난만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런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무제한의 탐욕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가는 체제라기보다는 그 탐욕을 합리적으로 억제하고 조절하는 체제라는 것이 베버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단적으로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주체로 지목하는 것이 칼뱅주의와 거기서 발전한 영국의 청교주의(퓨리터니즘)다. 중세 가톨릭에 대항해 기독교를 개혁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1483~1546)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베버는 개념사 연구를 통해 루터가 근대적 의미의 ‘직업 개념’을 창출했음을 밝힌다. 루터는 기독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베루프’(Beruf, 영어 calling)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직업’이라는 뜻과 ‘소명’이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직업이 신의 소명, 부르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직업 정신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베버는 루터주의 안에 가톨릭의 전통적인 관념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루터주의는 중세 가톨릭의 세계관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지 못했다.  

장 칼뱅(1509~1564)의 ‘예정론’에 와서야 가톨릭의 전통적 관념이 완전히 씻겨나갔다. 누가 구원받을지 누가 버림받을지 이미 영원으로부터 예정돼 있어서 그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칼뱅의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이 초래한 심리학적 결과는 “각자 개인이 직면하는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었다고 베버는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은 영원으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설교자도, 성례전(성찬식·세례식)도, 교회도 도울 수 없다. “심지어 신조차도 도울 수 없다.” 처음부터 결정된 것을 신이 뒤늦게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뱅주의와 루터주의의 차이점이었다. 루터주의는 교회에 가고 예배를 봄으로써 구원받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나, 칼뱅주의는 이 구원의 문을 닫아버렸다. 여기에서 베버 사회학의 핵심적 개념인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등장한다. 인간이 주문·기도·예배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다. 베버는 이 과정이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적 사고와 더불어 진전되다가 마침내 칼뱅주의에 이르러 완결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다.” 구원과 저주가 태초에 정해졌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간청도 쓸모없다는 생각에서 주술적인 사고와 행위를 모조리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예정론적 사고방식이 낳은 결과가 투철한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였다는 것이 베버의 통찰이다. 신의 소명, 곧 직업에 헌신하여 이윤을 얻고, 이 이윤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계속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할 일이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칼뱅주의자들은 신의 은총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근면한 노동과 금욕주의적 생활의 결과인 이윤 획득과 사업 번창이 신의 구원을 확증해주는 주관적인 근거였다. 바로 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됐다고 베버는 말한다. 수도원 담장을 넘어 세속으로 나온 금욕주의가 바로 자본주의를 밀고나간 정신적 힘이었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10. 08. 14.  

P.S. 역자 김덕영 교수에 대한 소개와 인터뷰도 덧붙인다.   

김덕영(52) 교수는 베버와 인연이 깊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었던 그는 베버에 대한 호기심에 끌려 사회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도 베버를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93년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베버 사회학에 대한 지성사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5년 뒤에는 카셀대학에서 ‘막스 베버와 게오르크 지멜 비교 연구’로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베버를 연구했던 그는 비교 연구 대상이었던 지멜의 책들은 여러 권 번역했지만, 베버 책 번역은 계속 외면했다고 한다. 1999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번역을 제안받았을 때도 대답은 “할 수 없다”였다. “이 책을 번역하기에는 나의 지적 훈련에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범주가 ‘신학’인데, 그 분야에 대해 거의 공부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김 교수는 결국 뒤늦게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2007년쯤에는 이 책의 번역에 도전할 만큼 루터 이후 서구 기독교 신학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김 교수는 베버의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 종의 영어 번역본과 프랑스어 번역본을 참고했는데, “결정적인 문제에서 영어 번역본에 의존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이 여러 번 있었음”을 고백했다. 중요한 개념이 엉터리로 번역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서 “외국의 지식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어로 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진정한 학문으로부터 배제하고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어로 된 ‘Max Weber’를 수용하고 번역하면 ‘맥스 웨버’는 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막스 베버’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곧 영어화되고 미국화된 베버 논의에 머물 뿐 진정한 의미의 베버 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한 동기가 “고전 번역을 통해 우리 문화자본을 축적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는 이 책이 한국 사회의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한국 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이 책은 실천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교수자격취득논문 ‘막스 베버와 게오르크 지멜 비교 연구’가 아마도 <짐멜이냐 베버냐?>(한울, 2004)의 바탕인 듯싶다. '베버리언'으로서의 면모는 평전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사상사, 2008)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베버에 대한 조금 다른 시각의 비판을 담은 책으론 키어러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삼인, 2010)도 참고해볼 만하다(내가 반경 2미터 내에서 한달 넘게 못 찾고 있는 책이다).   

막스 베버와 뒤르켐, 마르크스 등 고전 사회학자들의 자본주의론을 비교한 책으론 앤서니 기든스의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한길사, 2008)이 요긴하겠다. 특히 뒤르켐과의 비교는 지식인마을 시리즈의 <뒤르켐 & 베버>(김영사, 2007)도 참고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까지 정본 번역이 나오니까 욕심이 나는 것은 뒤르켐의 <자살론> 번역이다. 번역본이 없지는 않지만, 결정판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뒤르켐 전공자들이 '자존심'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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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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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5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6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6 15: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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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왔군요. 문예출판사 본을 갖고 있었는데, 김덕영 번역본을 구매하게 되면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론 <프로테스탄트..>가 중요한 참고문헌이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가진 고전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외국의 지식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어로 해야 한다”는 말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라는 말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어를 몰랐고 많은 경우 아랍어에서 중역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지만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를 무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독일관념론을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과연 독일 관념론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이해'에만 치중했다면 실존주의-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로 이어지는 창조적인 탐구가 가능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독일 관념론의 창조적인 '오독(?)'이 프랑스 현대철학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물론 독일의 관념론도 대륙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창조적인 오독일 수도 있겠지요.^^ 같은 나라에서도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오독했고, 아도르노는 벤야민을 오독했지요. 지젝의 철학도 헤겔-마르크스-라캉의 창조적 오독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정확한 읽기'는 학문적 깊이와 창조적 사고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전자가 후자를 바로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단순한 원리는 대부분 알고 계시지만 전자에 매몰되서 후자를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있는 듯 합니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된 고전의 번역본에 상투적으로 붙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영어본에 오류가 있다'인데 이도 너무 과장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어로 된 것을 직접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제어인 영어본을 통한 이해로도 충분히 깊이있는 학문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영어본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정도가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쟈 2010-08-17 10:00   좋아요 0 | URL
네, 철학사의 오독/오해에 대해선 지젝이 지적한 바 있죠. '정독'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번역관계로 보자면 의미의 변형을 포함하지 않는 번역이란 불가능한데다 무의미한 것인데요. 문제는 생산성이죠. 얼마나 멀리 가느냐는. 못난 부모에게서 잘난 자식이 나왔다고 자식을 탓하는 건 기이한 일이겠죠. 넌 부모를 '오독'했어?...
 

집안일로 지방에 다녀왔다. 직행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들른 대천휴게소에서 잠시 바람에 실려온 바다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올여름 바다와의 '인연'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싶다. 하긴 가뭄과 산불로 '생지옥'이라는 모스크바에서 '휴가'를 보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는지 모른다. 내일자 리뷰기사들을 보다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오역 지적이 기사화된 걸 읽었다. '인문학 가뭄'으로 편집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출판계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 역자와 출판사쪽에서 번역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번역시비'는 일단락짓는다.  

경향신문(10. 08. 14) ‘인문학 가뭄’이 부른 오역 홍수

묵직한 인문·사회과학서를 전문으로 내고 있는 한 출판사는 지난해 말쯤 외국 유명 학자의 두툼한 책을 번역해 출간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어느 전문가가 원서와 대조해서 읽고 번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것이다. 번역자는 대체로 이 지적들을 수긍했다.

일부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번역문을 전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책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판을 적게 찍긴 했지만 재고가 꽤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출판사는 재고를 폐기하고 품절시켰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구매자를 파악해 새로 책이 나오면 교환해 주기로 약속했다. 다행히 인터넷 서점을 통해 팔린 경우가 많아 서점을 통해 구매자를 찾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 출판사 관계자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그간 쌓아온 출판사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인문학 전공자의 층이 엷어지면서 심도 있는 책들을 번역할 사람도, 교정·교열 및 편집 능력을 제대로 갖춘 출판 편집자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출판사들이 편집자들에게 전문성보다는 ‘실적’을 강조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편집자들의 이직이 잦아지면서 당연히 걸러졌어야 할 오·탈자나 비문, 오역이 방치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다른 출판사의 편집주간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편집진이 자주 교체되고 젊어지면서 예전의 꼼꼼함과 치열함이 덜하다고 여겨지는 건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가진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번역에 관한 시비가 또 붙었다. 활발한 강연과 저술·번역, 그리고 날선 비평으로 유명한 철학자 강유원씨가 다른 한 명의 공역자와 번역해 최근 출간한 책에 여러가지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전부터 오역 사례를 많이 지적했던 서평가 ‘로쟈’는 이 책을 원문대조해 곳곳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며 그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그가 지적한 것 중에서 명백한 오역은 쇄를 거듭할 때 고치려 한다”고 밝혔다. 몇몇 문장은 고치겠다고도 했다. 이 책을 출판한 돌베개출판사 역시 “강씨가 번역문을 재검토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자와 탈자, 비문 등은 책이건 신문이건 활자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선 숙명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오·탈자와 비문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굵직한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의역이네, 직역이네, 오역이네 하는 시비가 붙곤한다. 이 또한 번역서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특정인과 특정 출판사를 면박주고 싶은 뜻은 결코 없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나눠질 책임의 무게도 저울질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이야기되고 곱씹어져야 하는 것은 앞서 소개한 우려 때문이다. 오죽하면 과거 이윤기씨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 개역판을 내도록 만든 ‘고수’인 강씨와 차분하게 질좋은 책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 돌베개의 만남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안타까움과 우려 말이다.(김재중 기자) 

10. 08. 13.  

P.S. 참고로 기사의 서두에서 언급된 책은 짐작에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길, 2009)일 텐데, 공개적인 리콜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아봐야겠다(나는 알라딘을 통해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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