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8회째를 맞은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개인적으로는 3년째 예심과 본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이번에도 번역 부분의 심사평을 맡아 적었다. 번역 부분은 올해 공동수상작이 나왔다. 심사평을 옮겨놓는다. 



번역 부문 심사평 "한국사회에서 갖는 현재적 의의에 중점 둬"


올해 번역 부문의 후보작들은 책의 의의나 번역자의 공력을 모두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두 권의 책이 자연스레 경합작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피터 프랭코판의 ‘실크로드 세계사’다. 두 책의 역자가 모두 전문번역가이고 두툼한 분량의 역사서라는 점이 공통적이었다. 번역상인만큼 역자의 번역 경력과 번역 수준에 대해서도 의견이 오갔지만, 토론의 중점은 두 책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현재적 의의에 두어졌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1950년대에 집필되어 1964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현대사 분야의 고전이다. 저자는 유럽의 세속화 물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이 반지성주의의 바탕이 되었고, 이것이 20세기 중반에는 반공산주의 열풍(매카시즘)으로도 이어졌다고 본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확장하면 오늘날 트럼프 시대를 낳은 것도 미국의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다.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비단 미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미국식 복음주의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한국사회도 되돌아보게끔 한다.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라는 부제에 걸맞게 ‘실크로드 세계사’는 고대 종교의 탄생기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 지역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그렇다고 특정 지역사의 재조명에 머물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사’를 표방하면서 저자는 세계사의 중심을 유럽(서방)에서 동방, 정확하게는 서방과 동방의 중간지점으로 옮겨놓는다. 중심을 그렇게 이동시킬 때 세계사의 전개과정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초점 이동과 각도 변경의 효과이며, 이를 통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안목과 시야도 대폭 확장된다.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실크로드 세계사’는 그 풍부한 내용과 함께 오늘을 사는 시민들의 교양서로서 매우 훌륭한 책이라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최종적으로 어떤 책을 수상작으로 선정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오갔지만, 두 권 모두 수상작으로 손색이 없기에 공동수상작으로 하자는 제안이 쉽게 동의를 얻었다. 두 역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17.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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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들어갈 책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번역의 탄생>의 저자 이희재의 신작 <번역전쟁>(궁리)이 나왔기에 지나는 길에 광화문 교보에 들렀지만 아직 입고되지 않아 헛걸음했다(헛걸음만 할 수는 없어서 다른 책을 몆권 구입했다).

‘첫단추 시리즈‘로 매슈 레이놀즈의 <번역>(교유서가)도 나왔기에 겸사겸사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이런 걸 묶어서 다루면 주제 서평이 될 텐데, 요즘 그런 글을 쓸 여력이 없다. 특별히 누가 대신해주는 것 같지도 않고). <번역전쟁>에 대한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을 쓴 저자 이희재는 현재 런던대 SOAS(아시아아프리카대학)에서 영한 번역을 가르치고 있으며, 지난 20여 년간 수많은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에는 번역가로서 말이 제대로 옮겨지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차차 세상 자체가 제대로 옮겨지는지에 의문을 품으면서 이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번역·해석되고 가공되고 많은 경우 날조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 과정을 하나로 연결하는 개념도 넓은 뜻의 ‘번역’이라 이름지었다.

’다원주의, 포퓰리즘, 민영화, 인턴, 모병제, 핵우산, 독립국, 홀로코스트…‘ 등 저자가 <번역전쟁>에서 다룬 주제는, 바로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한국 사회 전체가 ‘오역’하기 쉬운 키워드들이다. 영국에서 17년째 살고 있는 저자는 ‘말과 언어’를 대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국내외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그동안 꽤 자주 목격했다. 

다원주의를 바라보는 각 국가의 시선들, 진보와 극우의 진정한 의미, 평생직장과 인턴의 이면, 민영화의 진짜 속내, 한국과 그 주변국가의 미묘한 입장들, 카다피와 만델라 등 정치인들의 빛과 그림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마약전쟁과 테러전쟁 등 이 책은 다양한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의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와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서 연말의 독서목록 가운데 앞자리에 놓을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내년 2월의 인문특강 후보로도 다른 두어 권의 책과 함께 검토중이다. 혹은 서평강의에서 다루게 될지도 모르겠다. 교보에서 득템에 실패했으니 다시 알라딘에서나(에서나?)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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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주제별 집중독서를 할 여유나 계기를 못 갖고 있지만 그래도 책을 사모으는 건 게을리 하지 않는 편이다. 번역 문제는 지속적인 관심분야의 하나인데 최근에도 챙겨둘 만한 책들이 나왔다. 아침에 식탁에 있는 안미현 교수의 <경계횡단으로서의 번역>(한국외대 지식출판원)을 뒤적이며 적는 얘기다(책의 구성이 탄탄해서 마음에 든다. 놀란 건 글자크기인데 큰글씨책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저자가 독문학자여서 주로 독문학에서의 번역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번역 일반론적인 주제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번역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흥미를 가질 만하다.

얼마 전에는 하야카와 아쓰코의 <번역이란 무엇인가>(현암사)도 나왔고 좀더 세분화된 주제인 번역과 젠더에 관한 책도 나왔다. 루이즈 폰 플로토우의 <번역과 젠더>(동인)이다(테크니컬한 책이 아닌가 싶어서 아직 주문하지 못했다). 안미현 교수의 책에서 한 장이 번역과 젠더에 할애되고 있다. 이 역시도 책을 모아서 읽을 만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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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아마도 가장 유명한 텍스트일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서출판b, 2017)이 새로 번역돼 나왔다. 여러 벤야민 선집에 들어 있던 텍스트라 중복 번역이긴 하지만, 여러 이유에서 다시 번역되었으면 했던 텍스트라 반갑다. 지난해 말에는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전기가오리, 2016)이라는 제목으로 이 텍스트의 번역본이 나왔었지만 너무 짧은 분량에다가 제목 번역이 번다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현재는 일시품절 상태다). 제목으로는 가장 간결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나는 선호한다.  



새 번역본의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밝힌 번역 동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벤야민 텍스트 중 3판(1939년판)을 정본으로 삼되, 1,2판과의 내용적 변화추이를 반영하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새 번역본에는 불어판까지 포함해 네 가지 판본 간의 본문 및 원주 대조표가 들어가 있다. 독자가 연구자들에게 꽤 유익한 참고가 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동기는 기존 번역서들에 대한 불만이다. "기존 우리말 번역본들 곳곳에서 불명료한 표현과 비문, 오역된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데, 예전에 벤야민의 아벨 강스 인용문에 대해 몇 번 지적한 적이 있음에도 번역본들에는 반영되지 않던 터였다(태그의 '아벨 강스'를 클릭해보면 된다). 그 대목을 새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아벨 강스는 2017년에 이렇게 열광적으로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도 (만약 그들이 현재 살아 있다면) 영화를 제작할 것이다... 온갖 전설과 신화, 온갖 종교의 창시자, 온갖 종교가... 스크린 위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고, 또 영웅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말했을 때 강스는, 스스로 자각하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전면적인 청산 쪽으로 사람들을 권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의 번역이 교정된 것만으로도 새 번역본의 의의는 충분하다. 기회가 되면 강의 때도 이 판본을 교재로 써야겠다...


17. 04. 23.


P.S. 앞서 언급한 전기가오리판의 번역도 대동소이하다.  

1927년, 아벨 강스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감독으로) 나타나 영화를 제작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신화적 인물,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가 (...) 감광된 필름을 통한 부활을 기다리며, 모든 영웅도 (영화의) 문전에 몰려든다"고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그는 -물론 그럴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통의) 광범위한 청산에 우리를 초대했던 것이다. 

영화감독 아벨 강스의 대표작은 <나폴레옹>(1927)이다. 사진으로 보건대 우리가 많이 보던 그 나폴레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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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거창해 보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번역 한 대목을 짚어보는 페이퍼다. <시학>은 분량은 얇지만 인류 최초의 문학론으로서 의의가 가볍지 않을 뿐더러 여전히 음미해볼 만한 고전이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립한 뤼케이온 학원의 강의노트였던 <시학>은 2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희극을 다룬 <시학> 2권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이 2권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을 모방(재현)의 양식으로 규정한 서두 이후 아리스토텔렉스는 6장에서부터 본격적인 비극론으로 들어간다. 더 정확하게는 극작법이다. 비극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 하는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여섯 가지 구성소를 나열한 다음에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플롯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대목이 <시학>의 핵심에 해당한다(유명한 '카타르시스'는 비극의 효과로서 한 차례만 언급된다). 원전 번역본 손명현본(고려대출판부/동서문화사)과 천병희본(문예출판사)은 각각 이렇게 옮겼다.

 

 

"이 6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무릇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고, 우리의 생활의 목적도 어떤 행동이지 성질이 아니다."(손명현)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가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천병희)

 

두 분 다 비극의 여섯 요소는 "장경, 성격, 플롯, 조사, 가요(노래), 사상"이라고 대동소이하게 옮겼다(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장경'은 분장을 포함한 무대미술을 가요(노래)는 음악/음향 효과를 가리킨다. 그리고 '조사'는 '언어표현'으로도 옮겨지는데, 지금의 '대본'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용문의 끝에서 '생활의 목적'이 행동이라고 말한 부분과 '비극의 목적'이라고 행동이라고 단언한 대목은 같은 뜻으로 읽기 어렵다. 삶의 목적이나 비극의 목적이나 그게 그거라는 뜻이 성립할 수 없다면(삶=비극?) 둘 중 하나다. 희랍어 원문이 서로 상충하는 해석을 허용하거나(고전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다) 아니면 어느 한 쪽이 오역이거나.

 

 

원문을 대조할 수 없는 처지에서는 다른 번역본을 더 참조하는 수밖에 없는데, 영어본을 옮긴 이상섭(문학과지성사), 김재홍 교수(고려대출판부)의 번역본과 프랑스어본을 옮긴 김한식 교수(펭귄클래식)의 번역본을 차례로 나열해 본다.

 

"이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들의 조직 즉 플롯이다. 왜냐하면 비극은 있는 대로의 사람의 재현이 아니라 행동과 삶의 모방인 까닭이며 행복과 불행은 다같이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은 일종의 행동이지 어떤 질적인 상태가 아니다."(이상섭)

 

"여러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상의 사건을 결합하는 것 즉 구성이다. 비극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의 모방이다.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행동양식을 취하며 우리 삶의 궁극목적도 어떤 종류의 활동이지 성질은 아니다."(김재홍)

 

"이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들을 조직적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실제로 비극은 사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삶과 행복(불행 역시 행동 속에 들어 있다)을 재현하며, 비극이 겨냥하는 목표는 행동이지 성품이 아니다."(김한식)

 

여기서도 이상섭/김재홍본과 김한식본의 번역이 엇갈린다. 단순하게 말하면 영어판과 불어판이 갈리는 것 같은 형국이다(궁금해서 러시아어본을 찾아보니 '비극의 목적'으로 옮겼다). 여기서 '행동'은 우리가 현재 쓰는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며, '성질'이나 '성품' '질적인 상태' 등으로 옮겨진 것은 '에토스' 즉 '성격'을 가리킨다(영어의 '캐릭터'다). 요즘 쓰는 구도로 말하면, '플롯이나 캐릭터냐'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제 삼고 있는 쟁점이다. 그리고 단연 플롯의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다(그는 플롯이 비극의 '영혼'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설사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할지라도 나로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이 '비극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그렇게 강의했다).

 

 

<시학>은 영어로도 다수의 번역본이 존재하고, 이상섭본과 김재홍본의 번역 대본도 같지 않다. 김진성 정암학당 연구원이 옮긴 사무엘 힌리 부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창작예술론>(세창출판사, 2014)의 20세기초에 출간된, 19세기 <시학>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인데(부처와 바이워터가 당시 영어권의 대표 학자다) 여기서는 "비극은 인물들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의 모방이다. 그리고 그 삶을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삶의 목적은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이 아니다."(270쪽)라고 옮겼다. 좀더 현대적인 해석으로는 레온 골든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예림기획, 2002)이 번역돼 있고 예전에 흥미롭게 읽은 책이지만 당장은 손에 들고 있지 않아서 확인이 어렵다. 대신 영어권에서 평판이 높은 스티븐 핼리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 에코의 <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열린책들, 2009)는 <움베르코 에코의 문학강의>(열린책들, 2005)을 마니아판으로 다시 펴낸 것인데(영어판은 <문학론>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이번에 다시 구해서 '<시학>과 우리'란 글을 읽었다. 애초에 학회 발표문으로 쓰인 것인데, 주로 <시학>의 수용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주제지만 독서가 수월하지는 않았는데 역자가 <시학>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탓이 커 보였다. 비극의 여섯 구성 요소를 이렇게 옮긴다면 <시학>을 읽었다고 볼 수 없겠기에.

"하지만 아직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머물러 있습니다. 포는 <어휘 lexis>, <시선 opsis>, <지각 dianoia>, <윤리 ethos>, <음악 melos>의 정확하고도 유기적인 혼합을 계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토스>의 뼈대에 살을 붙였습니다."(352-3쪽)

포는 에드거 앨런 포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열된 용어들이 비극의 구성소로서 미토스는 플롯을, 에토스는 성격을 가리킨다. '볼거리'로도 옮겨지는 옵시스는 분장과 무대장치를, 디아노이아는 사상을 가리킨다. (언어)표현으로도 옮겨지는 렉시스가 대본이다. <시학>과 같은 고전적인 저작에 대한 상식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도 핵심 용어들의 번역어는 통일이 되었으면 싶다(최소한 두 가지 이내로).

 

 

아, <시학> 다시 읽기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강의차 읽기 위한 워밍업이었다. 연휴라지만 부모님 댁에도 가야 하는 와중에 중세 수도원에도 들러야 하니 꽤나 분주한 일정이로군...

 

16.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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