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주제별 집중독서를 할 여유나 계기를 못 갖고 있지만 그래도 책을 사모으는 건 게을리 하지 않는 편이다. 번역 문제는 지속적인 관심분야의 하나인데 최근에도 챙겨둘 만한 책들이 나왔다. 아침에 식탁에 있는 안미현 교수의 <경계횡단으로서의 번역>(한국외대 지식출판원)을 뒤적이며 적는 얘기다(책의 구성이 탄탄해서 마음에 든다. 놀란 건 글자크기인데 큰글씨책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저자가 독문학자여서 주로 독문학에서의 번역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번역 일반론적인 주제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번역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흥미를 가질 만하다.

얼마 전에는 하야카와 아쓰코의 <번역이란 무엇인가>(현암사)도 나왔고 좀더 세분화된 주제인 번역과 젠더에 관한 책도 나왔다. 루이즈 폰 플로토우의 <번역과 젠더>(동인)이다(테크니컬한 책이 아닌가 싶어서 아직 주문하지 못했다). 안미현 교수의 책에서 한 장이 번역과 젠더에 할애되고 있다. 이 역시도 책을 모아서 읽을 만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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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아마도 가장 유명한 텍스트일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서출판b, 2017)이 새로 번역돼 나왔다. 여러 벤야민 선집에 들어 있던 텍스트라 중복 번역이긴 하지만, 여러 이유에서 다시 번역되었으면 했던 텍스트라 반갑다. 지난해 말에는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전기가오리, 2016)이라는 제목으로 이 텍스트의 번역본이 나왔었지만 너무 짧은 분량에다가 제목 번역이 번다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현재는 일시품절 상태다). 제목으로는 가장 간결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나는 선호한다.  



새 번역본의 역자 후기에서 역자가 밝힌 번역 동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벤야민 텍스트 중 3판(1939년판)을 정본으로 삼되, 1,2판과의 내용적 변화추이를 반영하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새 번역본에는 불어판까지 포함해 네 가지 판본 간의 본문 및 원주 대조표가 들어가 있다. 독자가 연구자들에게 꽤 유익한 참고가 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동기는 기존 번역서들에 대한 불만이다. "기존 우리말 번역본들 곳곳에서 불명료한 표현과 비문, 오역된 문장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데, 예전에 벤야민의 아벨 강스 인용문에 대해 몇 번 지적한 적이 있음에도 번역본들에는 반영되지 않던 터였다(태그의 '아벨 강스'를 클릭해보면 된다). 그 대목을 새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아벨 강스는 2017년에 이렇게 열광적으로 외쳤다.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도 (만약 그들이 현재 살아 있다면) 영화를 제작할 것이다... 온갖 전설과 신화, 온갖 종교의 창시자, 온갖 종교가... 스크린 위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고, 또 영웅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말했을 때 강스는, 스스로 자각하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전면적인 청산 쪽으로 사람들을 권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의 번역이 교정된 것만으로도 새 번역본의 의의는 충분하다. 기회가 되면 강의 때도 이 판본을 교재로 써야겠다...


17. 04. 23.


P.S. 앞서 언급한 전기가오리판의 번역도 대동소이하다.  

1927년, 아벨 강스가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감독으로) 나타나 영화를 제작할 것이다. (...)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신화적 인물,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가 (...) 감광된 필름을 통한 부활을 기다리며, 모든 영웅도 (영화의) 문전에 몰려든다"고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그는 -물론 그럴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통의) 광범위한 청산에 우리를 초대했던 것이다. 

영화감독 아벨 강스의 대표작은 <나폴레옹>(1927)이다. 사진으로 보건대 우리가 많이 보던 그 나폴레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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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거창해 보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번역 한 대목을 짚어보는 페이퍼다. <시학>은 분량은 얇지만 인류 최초의 문학론으로서 의의가 가볍지 않을 뿐더러 여전히 음미해볼 만한 고전이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립한 뤼케이온 학원의 강의노트였던 <시학>은 2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희극을 다룬 <시학> 2권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이 2권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을 모방(재현)의 양식으로 규정한 서두 이후 아리스토텔렉스는 6장에서부터 본격적인 비극론으로 들어간다. 더 정확하게는 극작법이다. 비극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 하는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여섯 가지 구성소를 나열한 다음에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플롯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대목이 <시학>의 핵심에 해당한다(유명한 '카타르시스'는 비극의 효과로서 한 차례만 언급된다). 원전 번역본 손명현본(고려대출판부/동서문화사)과 천병희본(문예출판사)은 각각 이렇게 옮겼다.

 

 

"이 6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무릇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고, 우리의 생활의 목적도 어떤 행동이지 성질이 아니다."(손명현)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가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천병희)

 

두 분 다 비극의 여섯 요소는 "장경, 성격, 플롯, 조사, 가요(노래), 사상"이라고 대동소이하게 옮겼다(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장경'은 분장을 포함한 무대미술을 가요(노래)는 음악/음향 효과를 가리킨다. 그리고 '조사'는 '언어표현'으로도 옮겨지는데, 지금의 '대본'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용문의 끝에서 '생활의 목적'이 행동이라고 말한 부분과 '비극의 목적'이라고 행동이라고 단언한 대목은 같은 뜻으로 읽기 어렵다. 삶의 목적이나 비극의 목적이나 그게 그거라는 뜻이 성립할 수 없다면(삶=비극?) 둘 중 하나다. 희랍어 원문이 서로 상충하는 해석을 허용하거나(고전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다) 아니면 어느 한 쪽이 오역이거나.

 

 

원문을 대조할 수 없는 처지에서는 다른 번역본을 더 참조하는 수밖에 없는데, 영어본을 옮긴 이상섭(문학과지성사), 김재홍 교수(고려대출판부)의 번역본과 프랑스어본을 옮긴 김한식 교수(펭귄클래식)의 번역본을 차례로 나열해 본다.

 

"이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들의 조직 즉 플롯이다. 왜냐하면 비극은 있는 대로의 사람의 재현이 아니라 행동과 삶의 모방인 까닭이며 행복과 불행은 다같이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은 일종의 행동이지 어떤 질적인 상태가 아니다."(이상섭)

 

"여러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상의 사건을 결합하는 것 즉 구성이다. 비극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의 모방이다.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행동양식을 취하며 우리 삶의 궁극목적도 어떤 종류의 활동이지 성질은 아니다."(김재홍)

 

"이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들을 조직적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실제로 비극은 사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삶과 행복(불행 역시 행동 속에 들어 있다)을 재현하며, 비극이 겨냥하는 목표는 행동이지 성품이 아니다."(김한식)

 

여기서도 이상섭/김재홍본과 김한식본의 번역이 엇갈린다. 단순하게 말하면 영어판과 불어판이 갈리는 것 같은 형국이다(궁금해서 러시아어본을 찾아보니 '비극의 목적'으로 옮겼다). 여기서 '행동'은 우리가 현재 쓰는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며, '성질'이나 '성품' '질적인 상태' 등으로 옮겨진 것은 '에토스' 즉 '성격'을 가리킨다(영어의 '캐릭터'다). 요즘 쓰는 구도로 말하면, '플롯이나 캐릭터냐'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제 삼고 있는 쟁점이다. 그리고 단연 플롯의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다(그는 플롯이 비극의 '영혼'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설사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할지라도 나로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이 '비극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그렇게 강의했다).

 

 

<시학>은 영어로도 다수의 번역본이 존재하고, 이상섭본과 김재홍본의 번역 대본도 같지 않다. 김진성 정암학당 연구원이 옮긴 사무엘 힌리 부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창작예술론>(세창출판사, 2014)의 20세기초에 출간된, 19세기 <시학>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인데(부처와 바이워터가 당시 영어권의 대표 학자다) 여기서는 "비극은 인물들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의 모방이다. 그리고 그 삶을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삶의 목적은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이 아니다."(270쪽)라고 옮겼다. 좀더 현대적인 해석으로는 레온 골든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예림기획, 2002)이 번역돼 있고 예전에 흥미롭게 읽은 책이지만 당장은 손에 들고 있지 않아서 확인이 어렵다. 대신 영어권에서 평판이 높은 스티븐 핼리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 에코의 <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열린책들, 2009)는 <움베르코 에코의 문학강의>(열린책들, 2005)을 마니아판으로 다시 펴낸 것인데(영어판은 <문학론>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이번에 다시 구해서 '<시학>과 우리'란 글을 읽었다. 애초에 학회 발표문으로 쓰인 것인데, 주로 <시학>의 수용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주제지만 독서가 수월하지는 않았는데 역자가 <시학>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탓이 커 보였다. 비극의 여섯 구성 요소를 이렇게 옮긴다면 <시학>을 읽었다고 볼 수 없겠기에.

"하지만 아직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머물러 있습니다. 포는 <어휘 lexis>, <시선 opsis>, <지각 dianoia>, <윤리 ethos>, <음악 melos>의 정확하고도 유기적인 혼합을 계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토스>의 뼈대에 살을 붙였습니다."(352-3쪽)

포는 에드거 앨런 포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열된 용어들이 비극의 구성소로서 미토스는 플롯을, 에토스는 성격을 가리킨다. '볼거리'로도 옮겨지는 옵시스는 분장과 무대장치를, 디아노이아는 사상을 가리킨다. (언어)표현으로도 옮겨지는 렉시스가 대본이다. <시학>과 같은 고전적인 저작에 대한 상식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도 핵심 용어들의 번역어는 통일이 되었으면 싶다(최소한 두 가지 이내로).

 

 

아, <시학> 다시 읽기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강의차 읽기 위한 워밍업이었다. 연휴라지만 부모님 댁에도 가야 하는 와중에 중세 수도원에도 들러야 하니 꽤나 분주한 일정이로군...

 

16.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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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기사가 알파고에게 일승을 거두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장기'라는 게 불과 몇달일 수도 있다) 바둑 역시 체스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게 접수될 가능성이 높다. 바둑의 최고수는 인간이 아니라 알사범(알파고)이 될 거라는 얘기다. 인공지능이 대중적 관심사가 되면서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는데, 공통적인 건 앞으로 상당수의 직업이 인공지능이나 로봇에 의해 대체될 거라는 전망이다. 교육 현장에서 보자면 당장 아이들의 진로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단순하게는 창조적인 일일수록 로봇이나 인공지능과의 관계에서 비교우위를 유지할 거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발전속도로 볼 때 방심은 금물이다. 당장 좀더 '수학적인' 작곡 분야에서 컴퓨터가 인간 이상의 실력을 발휘할 날이 곧 오지 않을까. 문학은 어떨까. 인공지능이 쓴 시와 소설을 읽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우리 세대 안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몇 만권의 시집과 소설을 읽어치운 인공지능을 상상해보라!). 인공지능 대문호의 탄생? 인공지능 셰익스피어? 며칠 피곤한 와중에 이런 잡생각이 좀 들었다.

 

셰익스피어도 꼬투리가 된 건 요즘 강의를 하고 있어서인데(아마도 올해는 자주 그의 작품을 강의하게 될 듯싶다) 레퍼토리의 하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4주 강의라면 보통 4대 비극을 다루지만 5주 강의만 되어도 한 작품을 더 고를 경우 가장 평이하다 싶은, 그리고 가장 유명하다 싶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고르게 된다(판매량을 보니 <햄릿><맥베스><리어왕><로미오와 줄리엣><오셀로> 순이다, 알라딘에서는).

 

 

좀 특이하다 싶은 건 작품의 명성에 비해 생각만큼 번역본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것은 최종철판(민음사)이고, 김정환판(아침이슬)과 (최초의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자인) 김재남판(이건 몇 군데서 나왔는데, 해누리판이 최신판)을 곁들인다. 압도적으로 많이 읽힌다는 점에서 민음사판이 대표 판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막상 강의에서 다룰 때는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역자가 운문 번역을 표방하면서 시 형식을 맞추는 데 너무 욕심을 내다 보니까 의미가 모호하거나 어색한 부분이 많아서다(게다가 역자의 한국어 감각이 상당히 독특하다).

 

 

때로는 좀 황당한 실수도 나온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의 1막 4장의 첫 대사는 로미오의 대사임에도 세계문학전집판에서는 벤볼리오의 대사로 처리되어 있다. 벤볼리오의 대사인 두번째 대사는 머큐쇼의 대사로 되어 있고. 이건 판본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착오다. 새로 나온 <셰익스피어 전집4>(민음사, 2014)에는 바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근까지도 세계문학전집판에서는 수정이 안된 듯하다는 것이다(강의실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 내가 갖고 있는 건 16쇄(2013)다. 이런 착오가 역자의 부주의에 의한 것인지 편집교정 과정의 실수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또 작품해설에서 "이렇게 붙은 하인들끼리의 시비는 캐풀렛의 조카 벤볼리오의 등장에..."(169쪽)라고 되어 있는 것도 좀 무심한 착오다. 로미오의 친구이기도 한 벤볼리오는 몬터규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두 집안이 원수 사이인 걸 생각하면 좀 심한 오류다.

 

번역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보통은 정답이 없는 해석상의 문제나 뉘앙스상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페이퍼의 제목으로도 삼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키스 장면을 보자. 둘의 첫 키스 장면이 1막 5장에 나오는데, 로미오가 짝사랑하는 여인 로잘린을 보기 위해 캐풀렛 가의 파티에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가 줄리엣에게 한눈에 반해서 수작을 거는 장면이기도 하다.

 

줄리엣: 성자상은 기도는 허락하나 움직이진 못해요.

로미오: 그렇다면 기도하는 동안에 움직이지 말아요.(그녀에게 키스한다) 이렇게 내 죄는 그대의 입술로 씻겼소.

줄리엣: 그렇다면 내 입술로 죄가 옮겨 왔군요.

로미오: 내 입술에서요? 오, 이 달콤한 범법 재촉! 내 죄를 돌려줘요. (그녀에게 다시 키스한다)

줄리엣: 키스를 배웠군요.

뭐가 문제인가? 줄리엣의 마지막 대사이다. "키스를 배웠군요."란 번역은 일단 주어가 모호하기에 불친절한 번역이다. 로미오가 연거푸 두 번 키스를 했기에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키스를 배웠다는 말인지, 키스를 능숙하게 하는 걸로 보아 로미오가 어디선가 키스를 배운 것 같다는 말인지 번역만으로는 알 수 없다. 원문은 'You kiss by the book'이다. 그러니 후자 쪽이고 사실 시제는 과거가 아닌 현재여야 맞다. 그런데 뜻은? 일단 전집판에서 역자는 "책에 적힌 키스네요."라고 수정해서 옮겼다. 말하자면 키스를 책에서 배운 대로 한다는 것이다. 키스 교본? 혹은 소설들?

 

한데 'by the book'이란 표현은 옥스포드판의 주석에 따를 때 'according to the rules'란 뜻이다. 그리고 그게 좀더 말이 된다. 줄리엣에게 키스하면서 로미오는 두번 다 어떤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속죄의 키스. 다른 한번은 그 죄를 다시 돌려받는 키스. 즉 키스하고 싶어서 키스한 게 아니고 특별한 이유에 따라 키스한 것처럼 둘러댄 것이다(이게 노련함인가?). 이것을 김정환판에서는 "입맞춤마다 이유가 있으시군요."라고 옮겼고, 김재남판은 "당신은 키스에도 이유를 붙이는군요."라고 옮겼다. 둘다 대동소이한데, 최종철판과는 다른 해석이다. 김재남판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줄리엣: 성자들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요. 비록 기도를 들어주는 일이 있다고 해도 말이에요.

로미오: 그렇다면 내가 기도의 효험을 받는 동안 움직이지 마세요. 이렇게 당신의 입술로 내 입술에서 죄는 씻어지거든요.(키스한다.)

줄리엣: 그러면 나의 입술이 그 죄를 짊어지게 되요.

로미오: 내 입술에서 죄를 넘겨받는다? 오, 달콤한 질책이여! 나의 죄를 되돌려주세요.(키스한다.)

줄리엣: 당신은 키스에도 이유를 붙이는군요.

내가 읽기에 훨씬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대화도 좀더 자연스럽다(아무리 운율을 맞춘다지만 '범법 재촉!'이 뭔가?). 그리고 아무래도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한 키스는 책에서 배운 키스가 아니라 이유를 둘러댄 키스다. 두 주인공의 로맨틱한 키스를 기억하는 독자/관객이라면 최소한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사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나중에는 키스에도 인간은 필요가 없어질까? 아니면 키스할 때만 필요할까? 그것도 궁금해지는군...

 

16.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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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후마니타스의 서평 강좌가 엊그제 마무리되었는데, 강좌에서 서평도서로 다룬 책 가운데 하나가 <능력주의는 허구다>(사이, 2015)이다. '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가'를 부제로 한 책으로 출간 당시 언론 리뷰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수저론이 지난해 한국사회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과학 분야의 서평도서로 골랐던 이유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윌밍턴 캠퍼스의 사회학과 교수 두 명이 21세기 능력주의 신화의 문제점과 그 부작용, 위험 등을 낱낱이 파헤친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이 성공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개인의 능력과는 무관한 비능력적 요인들이 우리 삶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능력주의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요지만으로도 책을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강의를 준비하면서 도서관에서 원서를 구해 대조해본 결과 번역본은 원저와 너무 차이가 났다. 말을 만들자면 전반적인 '번역 성형'이 가해졌다. 원저 자체는 3판까지 나왔고 판이 바뀔 때마다 적잖은 첨삭이 이루어졌다(알라딘에 소개된 정보를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가령 분량만 놓고 보자면 1판(2004)은 240쪽인데 반해 2판(2009)은 285쪽으로 45쪽 가량이 늘어나며, 3판(2013)은 264쪽으로 다시 20쪽이 줄었다. 번역본은 3판을 옮긴 거라서 내가 참고한 1판과는 얼마간 차이를 보일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번역본은 너무 많은 삭제와 윤문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번역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잠식할 정도다.

 

일단 목차가 모두 바뀌어서 원저와 번역본을 대응시켜서 읽기도 어려운데, 그 때문인지 원저에 실린 장별 참고문헌과 색인이 번역본에서 모두 누락되었다(참고문헌과 색인이 빠진 번역서는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원저가 갖고 있는 학술서적 성격이 번역본에서는 모두 제거되고 시사적인 읽을 거리로 탈바꿈했다. 강의에서는 두 대목을 지적했다. 먼저 저자들이 '능력주의'란 말을 '아메리칸 드림'의 동의어로 쓴다는 걸 알게 해주는 대목이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옮겨졌다.   

교육기회의 평등은 능력주의 시스템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교육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 적은 거의 없다.(80)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Equality of educational opportunity is a crucial component of the American Dream, but it has never come close to existing in America. 

미국 사회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는 책을 한국사회에도 통할 만한 얘기로 바꾸려고 하다 보니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은 번역본에서 모두 지워졌다. 원저의 경우 (1판에서는) 1장의 제목이 '아메리칸 드림: 기원과 전망'인데 반하여 번역본은 '금수저, 흙수저, 릴레이 경주, 그리고 능력주의 신화'로 되어 있다. 물론 내용 자체가 맞대응하지 않기도 하지만, 금수저/흙수저를 들먹인 것도 원저와 무관하다. 영어에는 우리도 알고 있듯이 '은수저'란 개념만 있고 책에서도 '은수저(실버 스푼)'만 나온다.   

 

대체적으로 번역이 잘 읽히기 때문에 원저에는 충실하지 못한 책이더라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수룩하게 옮겨진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아래 대목.  

사회적 자본에 대해 최초로 진행된 현대적인 연구 중 하나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1980년대에 발표한 분석이 있다. 부르디외는 특정 그룹에 소속되고 원하는 자원을 직접 만들겠다는 목적을 갖고 사회적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계획적인 시도를 함으로써 개인이 얻는 이익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치 있는 사회적 자본을 만들어내는 전략은 개인의 능력을 암시하거나 반영하지는 않는다. 부모, 친인척, 멘토 등 타인이 투자를 한 자본일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88-89 

어떤 내용인지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 원저에서 해당 대목을 찾았는데(이것도 시간이 걸렸다. 원저 색인에서 '부르디외'가 나오는 페이지들을 찾아 하나씩 대조해보는 방식을 취했다), 뜻밖에도 상당히 긴 문단이었다.    

The social science community is just beginning to catch up to the folk wisdom on this issue. The first systemic modern analysis of social capital was produced in the 1980s by the French sociologist Pierre Bourdieu(1986, 248). Bourdieu focuses attention on the benefits that accrue to individuals from their participation in groups and deliberate attempts by individuals to foster social relations for the purpose of creating this resource. Despite peoples’s efforts to draw social networks to enhance their power, wealth, or status, Bourdieu points out that these investment strategies do not always work. Further, those strategies that are successful, that is, those that produce valuable social capital, are not necessarily attributable to individual merit, especially in cases in which investments are made by others (parents) or involve substantial economic capital that is inherited or otherwise unearned. Through social capital, individuals can get access to economic resources such as desirable jobs, subsidized loans, investment tips, protected markets, and the like. They can increase their cultural capital through contacts with experts or individuals of refinement. In addition, they can affiliate with institutions that confer valued credentials, such as diplomas or degrees.

1판을 기준으로 하면, 이 전체 문단이 번역서에서는 1/3도 안 되게 축약되었다. 부정확하고 불성실하며 그냥 얼버무리는 식의 번역이다. 이것이 원저 1판과 3판 사이의 차이라고는 믿기 어렵다(오히려 3판은 1판보다 분량이 24쪽 더 많다). 나로선 매우 불량한 번역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상에 맞게 말하자면, <능력주의는 허구다>란 번역서는 <능력주의 신화>라는 원저를 저본으로 하여 입맛에 맞게 변형/각색한 책이다(그러면 그렇다고 적시해야 할 게 아닌가).

 

이런 식의 번역이 출판계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언제까지 '관행'으로 방치할 것인가. 정부가 국민을 호구로 아는 것처럼 출판사도 독자를 그저 호구로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는 좀더 나은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

 

16.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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