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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인문학'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소식을 스크랩해놓는다. 번역과 번역학, 번역비평에 대한 관심이 더 고조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수신문(06. 10. 10) '번역과 인문학' 국제학술대회 열려

고려대 문과대학이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오는 19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번역과 인문학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주최 측은 학술대회의 목표가 "우리의 인문학과 관련하여 현금의 번역 역량을 점검하고, 번역 원론과 각론에 걸쳐 학문 분야별‧언어별로 중요 주제들을 검토하여 바람직한 번역문화를 전망함과 동시에 우리의 학문 현실에 적합한 번역학과 번역비평론을 창도하는 데 있다"라고 밝혔다.

번역은 하나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언어 경험을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언어 경험으로 바꾸고, 한 시대에 한 지역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 사고에 시공을 뛰어넘는 보편적 형식과 가치의 시험을 부과하는 고도의 학술적 작업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또한 출발 텍스트와 그 문화를 객관화하는 가운데 목표 문화 속에 그에 대한 정신적‧언어적 터전을 준비하는 번역활동은 대상 문화를 존중하는 일이 자문화의 유연성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일과 통하는 고도의 윤리적 작업이라고 이번 학술대회 프로그램을 풀이한다.  

이번 학술회의는 이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 일련의 개막강연과 네 개의 주제별 분과토론을 3일에 걸쳐서 진행한다. 첫날의 개막강연에서는 앙리 메쇼닉(사진) 파리8대학 교수, 金聖華 홍콩중문대학 교수, 전성기 고려대 교수 등 선도적 연구자들의 발제가 있고 이어서, ‘번역 일반론’ ‘문화 수용으로서의 번역’ ‘번역이론과 번역현장’ ‘한국작품의 외국어 번역의 문제’ 등 네 개의 큰 주제를 둘러싸고 펼쳐질 이틀간의 분과토론에는 30명의 국내외 관련 연구자들이 사회자와 주제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한다.

특히 마지막 날 토론에서는 이연숙 히토츠바시대 교수, 파사레바 라리사 고려대 교수, 삐오 세라노 스페인 베르붐 출판사 대표, 노자끼 미츠히코 오사카시립대 교수 등 우리의 문학작품을 각기 해당 국어로 옮긴 바 있는 번역자들이 토론자로 참석하여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 실태를 살피고 향후의 전망을 논의하게 된다.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다.

첫째 날 10월 19일(목) - 국제관 214호 국제회의실(국제대학원동)

개막식

사회:김재혁 교수

 (고려대)

3:30 ~ 3:40

개회사(조광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장)

3:40 ~ 3:50

축사(윤지관 한국문학번역원장)

3:50 ~ 4:00

감사의 말(대회준비위원장 황현산 교수/고려대)

개막강연

사회:김춘미 교수

     김양순 교수

 (고려대)

4:00 ~ 4:45

앙리 메쇼닉 교수(파리 8대학):번역의 의도는 언어이론을 통째로 바꾸는 데 있다

4:50 ~ 5:35

진성화 교수(홍콩중문대학):문화의 차이와 번역의 책략

5:40 ~ 6:25

전성기 교수(고려대):번역인문학과 번역비평

저녁식사 (6:30 ~    ) : 국제관 교직원식당

둘째 날 10월 20일(금) - 국제관 321호 원형강의실(국제어학원동)

주제발표 1

번역 일반론

사회:김승옥 교수

 (고려대)

9:30 ~ 10:15

발표-김응종 교수(충남대):번역은 제2의 창작인가

토론-김경현 교수(고려대)

10:20 ~ 11:05

발표-서지문 교수(고려대):사랑도 번역이 되나요? - 번역자의 이질적 언어, 문화권 간의 교량역할 -

토론-이성일 교수(연세대)

11:10 ~ 11:55

발표-박여성 교수(제주대):‘번역투’와 번역비평에 대한 텍스트과학적 접근 -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한국어 번역본을 중심으로 -

토론-장영준 교수(중앙대)

점심식사 (12:00 ~ 1:30) : 국제관 카페테리아

주제발표 2

문화 수용으로서의 번역

사회:황현산 교수

 (고려대)

1:30 ~ 2:15

발표-조성택 교수(고려대):번역과 오․이해: 한역불교용어를 통해서 본 동아시아불교

토론-박태원 교수(울산대)

2:20 ~ 3:05

발표-정광 교수(카톨릭대):개화기 시대의 성경번역에 대하

토론-전성기 교수(고려대)

3:10 ~ 3:55

발표-김용민 교수(한국외대):한국에서 루소 사상의 수용과 그 번역문제

토론-박홍규 교수(고려대)

※ 종합토론 (4:05 ~ 5:05) : 사회 최동호 교수(고려대)

저녁식사 (5:30 ~    ) : 인촌기념관 1층 귀빈홀

셋째 날 10월 21일(토) - 국제관 321호 원형강의실(국제어학원동)

주제발표 3

번역이론과 변역현장

사회:이재훈 교수

 (고려대)

9:30 ~ 10:15

발표-이연숙 교수(일본 히도츠바시대학):개념의 번역과 문체의 번역

토론-정병호 교수(고려대)

10:20 ~ 11:05

발표-황현산 교수(고려대):시와 번역

토론-김인환 교수(고려대)

11:10 ~ 11:55

발표-김동준 교수(동덕여대):한국한문문학작품 번역을 위한 제

토론-윤재민 교수(고려대)

점심식사 (12:00 ~ 1:30) : 국제관 교직원식당

주제발표 4

한국작품의 외국어 번역의 문제

사회:김양순 교수

 (고려대)

1:30 ~ 2:15

발표-피사레바 라리사 교수(고려대):한국시의 러시아어 번

토론-최선 교수(고려대)

2:20 ~ 3:05

발표-삐오 세라노(베르붐 출판사 대표):한국문학작품의 스페인어 번역: 성과와 도전

토론-이재학 교수(고려대)

3:10 ~ 3:55

발표-노자끼 미츠히코 교수(오사카 시립대학):일본에서의 한국 고전문학 번역

토론-최관 교수(고려대)

※ 종합토론 (4:05 ~ 5:05) : 사회 민용태 교수(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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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10-1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이런 '번역학'에 대한 세미나가 열리는군요. '번역'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학계 풍토에 대한 자책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번역에 대한 논의가 붐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번역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번역학 즉 번역'에 대한' 논의만 무성한 현 상황은 안타깝습니다.

'번역'에 관한 세미나의 경우, 이제는 '번역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에 대해 기획의 방향을 섬세하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 세미나같은 경우, 개화기 성경번역이나 루소의 수용같은 논문은 역사학 계통의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개화기 번역에 대한 논문은 동아시아학, 국문학의 제일 인기 분야입니다. '번역은 제2의 창조인가'와 같은 논문은 김효중의 <번역학> 한권만 읽어도 왠만한 것은 커버할 수 있을 것인데 무슨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문제는 이 세미나에서의 번역에 대한 여러 논의가 짬뽕이라는 것입니다. '번역학'이 있을 정도로 논의가 복잡한데도 원론, 각론 다 모아 한큐에 진행하겠다는 것인데, 이런 기획 자체가 아직도 번역에 대한 논의의 중요성에 대해 세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일전에 번역과 관련한 리포터를 한편 쓰기 위해 KISS에서 '번역'키워드로 한글 논문 20여편을 찾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태반이 김효중의 개론서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거나, 번역학 개론과 자신의 분야를 적절히 배합한 것들이었습니다.
정말 한국에서 필요한 번역에 대한 논의는, 번역의 강국 일본의 경우 출판사들은 어떻게 번역관련 작업을 하는가, 일본이나 미국의 대학 출판사들은 어떻게 번역을 하는가, 출판물 선정, 필자 섭외, 섭외의 기준, 번역까지의 기간 선정, 편집자와 번역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등에 대한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찾아본 논문 중에는 외대 통번역 교수 두분이 연구비 받고 한국 출판사를 선정해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한 논문이 딱 한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한 대상이 출판사 단 네곳밖에 되지 않아 논문이라고 하기에 턱없이 그 기준이 모자랐습니다.

원래 각국의 번역 상황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고 했으나, 한국에 관한 위 논문을 제외하고는 단 한편도 찾기 힘들었습니다.
번역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인지만 있을 뿐 번역 대국의 번역 상황에 대해 실질적으로 실증적인 취재, 연구가 치밀하게 되지 않는 한, 이러한 '번역학'세미나는 80년대 초반 김용옥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번역에 대해 그리도 강조한 것 이상을 뛰어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번역학' 교수들이 생기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만요...

로쟈 2006-10-13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님/ 유익한 코멘트를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이번 학술대회 조직위에서 열매님 같은 분을 초빙했어야 했는데요^^). 매달린 일들 때문에 제 의견을 본문에 자세히 적지는 못하겠지만, 제기하신 문제들에 공감합니다. '학술대회'란 건 그냥 '행사'이죠. 실질적인 변화를 누가, 어떻게 가져올 수 있고, 또 가져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라이더 2006-10-1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좋은 댓글 이네요.

biosculp 2006-10-1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 들렸다 을유문화사에 신복룡교수가 번역한 군주론이 이 책과 더불어 강정인교수가 번역한 까치판을 같이 사서 읽고 있는데, 같은 책 다른 번역으로 읽은적은 처음입니다. 갈수록 다른면이 많더군요. 술어부터, 강정인은 식민지라고 한곳을 신복룡은 이주민 정책으로 번역하고 각자 잘 이해되는 부분도 다르고. 역시 번역은 두권이상을 동시에 봐야 뭐가 다른지 알수있는것인지. 그러다 보니 이거 영어판이라도 같이 봐야 되겠다 이생각이 들더군요. 영어판도 두권이상(이탈리아어는 모르니)
번역, 읽다가 이해 안되는것은 한권읽었을때고 동시에 두권을 읽어보니 또다른 세상입니다.

로쟈 2007-12-02 10:16   좋아요 0 | URL
뒤늦은 답글인데, 맞습니다. 같은 곡을 각기 다르게 연주하는 하는 것이죠.
 

제시카 알바 주연의 영화 <슬리핑 딕셔너리>(2002)의 배경은 1930년대 영국의 식민지 말레이시아의 사라와크 섬이다. 아버지의 유업인 원주민 계몽사업을 위해 영국군 청년장교 존이 섬에 오게 되는데, 총독은 그에게 원주민 최고의 미인인 셀리마(알바)를 ‘슬리핑 딕셔너리’로 붙여준다.

‘슬리핑 딕셔너리’란 주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원주민 언어를 가르치는 여자를 가리키는데, 존은 자신의 신념에 어긋난다면 거부하지만 곧 셀리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며 둘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영국과 원주민 양편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법적으로도 금지돼 있다. 이들의 사랑은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번역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폴 리쾨르의 <번역론>(철학과현실사, 2006)과 함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해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더글러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동문선, 2002)를 읽다가 문득 떠올리게 된 생각은 텍스트간(더 나아가 ‘문화간’) 번역의 중재자로서의 번역자(혹은 통역자)의 위치와 운명이라는 게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그것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비교불가능한 것을 비교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등가성의 창출을 주된 임무로 하면서 동시에 잠자리도 제공해주는 하녀! 

그러한 생각이 연이어 떠올리게 한 건 번역의 ‘일반론’을 제시하고 있는 리쾨르의 <번역론>이 지닌 ‘특수성’이다. 그의 지적대로 ‘이국적인 것의 시련’과 ‘비교불가능한 것의 충격’이 번역의 대전제이지만, 리쾨르는 언어 내적 번역을 외적 번역 못지않은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그러한 시련/충격을 흡수해버린다: “(내적 번역에서처럼) 이렇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외국어를 번역하는 번역자가 하는 일이다.”(121쪽) 이로써 “(언어) 내적 번역과 언어 외적 번역 간의 가교가 이루어진다”고 리쾨르는 주장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의 맥락에서도 그러할까?


로빈슨이 간결하게 정의한바 “포스트식민주의는 지리적/언어적 전치와 지배와 복종으로 서로 얽혀 있는 동력에 의해 야기된 심리/사회적 변형들인 통문화적 권력을 바라보는 방식이다.”(29쪽) 하면, 문제는 단순하게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까? 가령, “어떻게 멕시코의 스페인어로 씌어진 텍스트를 미국 영어로 다시 써서, 가난한 제3세계 국가의 구성원에게 지니는 의미를 지구상의 가장 부유한 나라의 구성원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할 수 있는가?”(47쪽)


또한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는 시위대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고전적인 사례는 번역의 문제가 언어 내적 번역에서도 단순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번역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관계뿐만이 아니라 지배/복종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국제관계가 국가들간의 (이념적으로)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FTA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세계는 평평한 듯 보이지만, 거기엔 굴곡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곡률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걸 평평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은 균등하게 분배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텍스트번역에서건 문화번역에서건 번역은 불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번역은 이론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나 실제로는 수행 가능한 작업”(100쪽)이다.


다만, “번역 작업은 이국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발생하는 내적 저항을 물리치고 이루어진 회상의 작업”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한 번역이라는 이상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애도의 작업”(118쪽)이라는 것을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때 번역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며, “이국성을 가진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117쪽)가 그 두 주인이다. 번역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독자를 저자에게 데리고 가는 이국화/외국화(foreignizing)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자국화(domesticating)가 번역의 두 가지 양태이다.


포스트식민주의 번역론에 따르면, 이때의 저자와 독자는 추상적인 무국적자가 아니다. “문화의 번역불가(능)성은 가장 첨예한 문제이지만 동시에 경계 지역에서는 실제 해결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즉 그 국경의 양측에 걸쳐 있는 ‘멕시코인들’(그리고 몇몇 ‘북미인들’까지도)은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고, 그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경험을 양쪽 언어로 번역한다.”(47쪽) 역설적이지만, 이렇듯 “이론적으로는 어렵고 고된,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쉽고 순조로운”(리쾨르, 100쪽) 것이 번역 작업인 것이다. 더 나아가 번역은 우리의 일상이기까지 하다.

 


번역의 신화적 기원으로서 흔히 ‘바벨 이후’를 거론하지만,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그 역사적 기원으로서의 ‘바빌론 유수 이후’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다가 하느님께 징벌을 받아서 각기 다른 말들을 하게 됐다는 것이 ‘바벨 이후’가 뜻하는 바라면, 바빌로니아가 유대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들을 강제로 데려가 바빌로니아에 억류시킴으로써 언어가 다른 이민족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다른 말들을 배우게 됐다는 것이 ‘바빌론 유수 이후’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것은 곧 ‘디아스포라’(이산)의 기원이기도 하다.

 

번역의 역사적 기원이 암시해주는 것은 최초의 번역적 상황이라는 것이 항상 제국의 정복/점령과 그로 인한 권력의 분화, 그리고 이산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로빈슨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제국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신민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종속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계발하여 순응적이거나 ‘협력하는’ 신민으로 변모시켜야 했다. 제국으로서 번역의 역사에 대한 초기의 관심 영역 중 하나는,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지인 사이를 매개할 수 있는 통역가들의 선발과 훈련이었다.”(22쪽) 이것이 바로 ‘슬리핑 딕셔너리’의 탄생 배경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전체 포스트식민 세계가 번역의 장으로 계속해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 맥락에서 번역은 하나 이상의 국가 혹은 지역 문화와 관련된 문화적/언어적 재능을 지닌 소수의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언어 텍스트의 의미상 전달은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의사소통의 기초이다. 이렇게 번역은 처음으로 번역을 형성해준 식민 권력의 분화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이다.”(49쪽) 물론 이러한 참여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번역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을 요약하자면, (ⅰ)번역은 식민화의 채널로서 교육에 필적하며, 교육과 연관되고, 제도와 시장의 명백한 혹은 숨어 있는 통제를 받는다, (ⅱ)번역은 식민주의의 붕괴 이후 계속된 문화적 불평등을 위한 피뢰침이다, (ⅲ)번역은 탈식민화의 채널이다(51쪽)가 된다. 여기서 핵심은 번역이 식민화의 채널이면서 동시에 탈식민화의 채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시도하고 있는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번역과 번역행위에 대한 이러한 인류학적 성찰, 정치적 성찰이다.

 

<슬리핑 딕셔너리>에서 존과 셀리마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며 영국군과 원주민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존은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셀리마와 재회하게 되며 둘은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이 정념론적인 차원의 확인은 번역의 관점에서 윤리적인 차원으로까지 승화된다. 리쾨르가 제안하는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주인을 모두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가는 것, 혹은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가는 것은 결국 언어적 환대를 실행하는 것”(119쪽)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속에서 셀리마는 존(영국)과 자기 부족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려다가 두 주인 모두를 배신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언어적)환대’의 요청 때문에. 그러한 환대의 공간은 지리적으론 접경지대이며, 사회적으론 교통공간이고, 문화적으론 혼합공간이며 인종적으론 혼혈공간이다(셀리마는 혼혈이다). “이국의 언어를 모국어라는 자신의 집에 맞아들임으로써 타자의 언어를 체험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리쾨르, 89쪽)으로서의 번역은 그러한 공간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행복한 도전’이다. 더불어,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공간에 처한 이주민들이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험이기도 하다.    

 

 

 

 

 

하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박상익,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지적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뼈아프다. 번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행복을 위해서도, 생존을 위해서도 너무 안이한 것 아닌가?..

 

06. 08. 27.

 

P.S.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본래는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 대한 서평을 기획했었지만, 너무 '뻔한' 얘기들만 늘어놓게 되어 8매 정도를 쓰다가 접었다. 그리고는 결들여서 쓰고자 했던 리쾨르의 <번역론>과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을 중심으로 구도를 다시 짰다. 로빈슨의 책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긴 하지만, 정독할 만한 성격의 책은 아니다.

 

리쾨르의 <번역론>은 읽어볼 만하지만,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국역본의 편제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순한 본문에 비하면 너무 장황하다싶은 해제 '논문'이 책의 성격을 딱딱하게 만들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사실 본문의 각주들도 미주로 돌리는 게 가독성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 것이다) 교정상의 실수들도 적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85쪽의 역주18)에서 낭시의 책은 <경계의 미학>이 아니라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이며, 128쪽 역주23)에서 첼란의 시집 <죽음의 푸가>는 문학과지성사가 아니라 청하출판사에서 나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건 전영애 교수의 첼란 연구서(학위논문)인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이다. 그리고 앙리 메쇼닉에 대한 각주는 같은 내용이 해제(53쪽)와 본문(154쪽)에서 반복되고 있다. 85쪽 역주19)에서 "도야는 독일 신인본주의에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는데..."라는 건 교정이 안된 문장이다. 117쪽에서 "이국성을 가진 있는 이방인과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독자가..."도 마찬가지이다. 71쪽 역주3)에서는 벤야민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기술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오기됐다. 그리고, 62쪽에서 '각주(各主)'의 한자는 엉뚱하다. '각주(脚註)' 아닌가?

 

여하튼 이런 실수들이 공들인 번역에도 불구하고 책이 조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분량에 비하면 저렴한 책도 아닌데, 좀더 세심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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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6-08-2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번역과 슬리핑 딕셔너리가 겹쳐지는 부분이 교묘하네요. 언어적 환대와 육체적 접대를 동시에 제공하는 주체들이 저 바벨의 성 주변에는 아주 많았겠군요. (바벨 그림도 무지 멋집니다.^^)

로쟈 2006-08-2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인상에 남는 영화는 아니지만, 글이 딱딱해질 거 같아서 집어넣어본 거죠. 사실 번역이란 게 허드렛일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구요...

푸른괭이 2006-08-2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선정적이네요(=재미있네요) ㅋㅋㅋ 실상, 번역이라는 것 자체는 허드렛일 정도가 아니라 거의 '고문'인데...

은라라 2011-08-3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환대라는 의미가 와닿ㅈ 않네요. 중요한 키워드 같은데요.
누군가를 환대한다 에 나오는 '환대'를 말씀 하신 것 맞지요.
그리고 번역을 허드렛일 일이라고 하는 건.. 좀
번역 자체는 초고의 지성인(모든 책은 아니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허드렛일로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지요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 역사, 2006) 출간에 대한 소개 기사/인터뷰를 옮겨놓는다.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붙여넣으려다가 따로 떼놓은 것이다. 기사는 국민일보(06.01.20)의 '책과 사람'란에 실렸던 것이며, (*)표를 하고 집어넣은 참견과 강조는 모두 나의 것이다.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제 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써도 그 논문에 인용된 참고 문헌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으면 그 논문이 전개한 아이디어는 우리 문화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정부 내에 번역국을 두고 서양 서적을 조직적으로 번역했는데,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견인차가 됐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은 근대 일본의 번역 열풍을 “동서 문화 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우리 번역은 어떤가?(*"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학계의 고질적인 번역 경시풍조를 비판하면서 번역을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일부로 수행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동양철학자 김용옥이다. 1985년에 출간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상당 부분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번역은 반역인가>, 202쪽. 김용옥에 대한 박교수의 평가에 대해서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니체 전집이 작년 말에야 나왔어요. 니체 전집이 이제야 나왔는데 다른 전집이야 어떻겠어요? 화이트헤드(영국 철학자)는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플라톤 전집이 없습니다. 서양사 공부하는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역사학의 아버지 헤르도투스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가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서양사학자들이 '역사'를 말하려면 좀 쑥쓰럽겠다. 플라톤전집은 몇년전부터 그마나 조금씩 선보이고 있다. 분명 사정이 나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플라톤전집이 다 출간될 쯤이면 앞에 나온 책들이 절판된 상태일 것이다.)


 

  

 


-서양사 교수이자 지금까지 10여권의 학술·교양서를 번역한 박상익 우석대 교수(51)가 작심하고 입을 열었다(*나는 그 책들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역사책들에 손이 덜 가기도 하지만, '-에서 -까지'라는 제명의 책들을 괜히 꺼려하기 때문이었다). 번역을 무시하는 국내 학계와 출판계의 오만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실명까지 거리낌없이 거론하는 박 교수의 격정적인 육성으로 가득한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는 한국의 천민적 번역문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보고서이자 본격 비판서다.

“학자들은 논문만을 학문의 본령으로 취급하고 번역은 소일로 취급합니다. 걸핏하면 원서를 들먹이면서 지적 우월성을 뽐내기도 하죠. 그러나 이런 태도야말로 오만한 엘리트주의요 지식인의 반역입니다. 서양 학문을 수입해다가 팔아 먹기 바쁜 ‘지식 수입상’들이야 번역에 신경쓸 필요가 없겠죠. 그렇지만 지식의 대중화를 고민하는 학자라면 번역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박 교수는 번역은 학문 연구자의 기본 임무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책이 국내에 나와 있지 않을 경우,연구와 병행해 번역서를 출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박 교수는 박사 논문으로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와 표현의 자유’를 쓴 후,번역과 주석을 덧붙여 <언론자유의 경전 아레오파기티카>(소나무)를 출간함으로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국내에는 수많은 루소 연구자들이 있지만 루소의 대표작 <에밀>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는 실정입니다. 로크, 홉스도 마찬가지예요. 구구단도 모르면서 수학을 안다고 하는 꼴이 아닙니까?”(*<에밀>을 비롯해서 몇 권 나와 있기는 하다. 루소 연구자가 그렇게 많은가? <리바이어던>의 정역본이 아직 없는 건 나도 유감스럽다. 홉스 대신에 오스터의 소설 <리바이어던>을 읽으면 되는 건가?)

-한국 번역의 빈곤함은 어느정도 역사적 이유가 있다. 한문 중심의 조선시대와 일본어 중심의 일제시대를 지나 한글이 제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겨우 반세기에 불과하다. 번역작업을 통해 지적 인프라를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우리사회의 무관심과 홀대가 번역의 빈곤을 심화시켜온 것도 사실이다. 학계는 번역을 학문적 작업으로 평가해 주지 않으며, 출판계는 전문번역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실력있는 연구자들이 번역에 나서고 싶어도 못합니다. 열악하다고 소문난 시간강사 수입도 번역료에 비하면 나은 수준이니까요. 그렇다고 정부 지원이 있습니까? 학술진흥재단의 학술명저 번역 지원 프로그램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그 예산이 얼만지 아세요? 연 17억입니다. 한 국가의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고작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이 들어가는 겁니다.”(*때문에 지원 경쟁률이 심하다. 나도 작년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시간강사료는 보통 시간당 3-4만원 수준이다. 그리고 번역료는 매절원고의 경우 지명도 있는 역자가 아니라면 3-4,000원선인 것으로 아는데, 원고지 10매 분량을 한 시간내에 번역하면 강사수준이 되겠다. 한데, 거기엔 강의준비시간이 고려되지 않은 데다가 시간강사가 하루에 8시간씩 강의하는 것도 아니므로 강사와 번역자의 수입에 대한 '도토리 키재기식' 비교는 공정하지 않다.)

-박 교수는 동·서양의 고전조차 제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우리 현실을 “텍스트가 없는 사회”라고 표현한다. 텍스트도 없는 상황이라면 문화의 교류나 확장,창조를 강조하는 최근의 담론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텍스트 없는 사회'가 또 주제파악 못하고 광분하는 것이 '콘텐츠'이다. 요즘은 관료들뿐만 아니라 대학의 일부 교수들도 '문화'와 '문화콘텐츠'를 혼동하는 듯하다. '콘텐츠'면 다 통하는 것! 해서, 내 의견은 번역지원 사업명을 '문화콘텐츠 번역지원사업' 쪽으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어쩌겠는가? '반역'도 입에 풀칠은 해가면서 해야지!) 


06.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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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문학과 번역, 그리고 민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02 17:10 
    격주간 <기획회의>(274호)에서 '<기획회의>'가 만난 사람' 꼭지를 읽었다. 인터뷰이는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밀턴과 칼라일 연구자이자 <서양 문명의 역사> 등 다수 번역서의 역자, 그리고 <번역은 반역이다>의 저자. 인터뷰의 타이틀은 '인문학, 지금부터 '새 역사'를 써야 한다'인데, 번역 문제와 관련하여 경철할 만한 대목들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우리의 경
 
 
2006-02-13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02-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박사 학위를 번역 작업을 통해서 수여받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기만 해도 참 좋으려만.

로쟈 2006-02-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모든 학문에 그런 풍토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인문학쪽은 좀 필요하지요. 그보다 먼저 '번역'에 대한 엄격한 심사/감시와 좋은 번역에 대한 공정한 사회적 대우가 우선되어야겠습니다.

2006-02-13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자는 번역'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도 부르더군요. 번역은 세상을 좀더 '평평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억지스런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2006-02-18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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