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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할 것도 없이 <논어>는 가장 중요한 동양고전의 하나다. 그 영향력에 있어서 흔히 기독교의 <성경>에 비견될 정도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성경>과 다른 건 소위 '정본'이 없다는 점이다. 국내에 나와 있는 <논어> 번역과 주해만 하더라도 수백 종에 달한다고 하니 좀 역설적이기도 하다(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것만 해도 수십 종이다). 여타 고전들과 다르게 <논어>의 경우에는 너무 많이 번역되어 있는 게 문제라고 할까. 거기에 번역본마다 해석이 불일치한 대목들도 적지 않기에 어느 번역본을 읽어야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조차 불분명하다(나부터도 댓 종의 번역본을 갖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지나간 기사이긴 하지만 논어 번역본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교수신문에 연재되었던 '고전번역비평'에서 <논어>에 관한 것이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7703). 연재의 첫번째 꼭지이기도 했다.

교수신문(05. 05. 31) 고전번역비평_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1)공자의 論語

믿고 읽을 만한 번역본을 선별해주는 것이 전문가들에게주어진 과제 중의 과제이다. 특히 공자의 논어(論語)는 1백종이 넘는 번역본이 있어 일반인이 고르기가 쉽지 않다. 논어는 번역의 역사가 깊고 그 수준도 다른 고전들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강재 서울대 교수는 “이제 논어번역은 원문의 충실성은 기본이고, 얼마나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전달하느냐에 달려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학생 수준에서 읽기 좋은 논어 번역본을 추천해달라”며 관련 전공 교수 3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논어 번역은 연구사를 얼마나 섭렵했느냐, 주희의 역주가 있느냐 없느냐, 창조적 번역의 정도에 있어서 지나치는 면은 없는지,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해제가 있는지 등을 골고루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설문 응답자들은 각각의 책들이 이 중 한두가지를 만족할 뿐, 완벽한 번역본은 아직 없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번 설문에서는 동양연구회(*동양고전연구회)가 번역한 ‘논어’와 유교문화연구소가 번역한 ‘논어’가 각각 6명의 추천을 받아 가장 신뢰할만한 번역본으로 드러났다. 

 

 

 

 

둘다 올해 출간된 것으로 여러 연구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공동번역한 것이며, 현대어로 재번역하는 데 중점을 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동양고전연구회가 옮긴 것은 유건종 교수를 중심으로 고려대 출신 학자들의 작업으로 “고어적 표현이나 어색한 표현을 많이 완화시켰다”, “교양적 수준에서 쉽게 읽힌다”, “기존 번역본들이 지닌 장점을 두루 참조해 오역이 최소화했다”, “현대 사상가들의 주석을 참조해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이 번역본은 9명의 연구자들이 격주 토요일마다 모여 강독하고 옮긴 지 9년여 만에 내놓은 결과물로 전문성에 있어서도 그 수준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추천자들은 말한다.

9년의 되씹음 거쳐 성과 얻었다
유교문화연구소가 옮긴 책은 논어의 ‘언해본’을 바탕으로 작업했는데 가장 정통적인 번역으로 꼽힌다. 이 책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모토를 내걸었는데, 공동번역자들은  일제 때 단절된 조선시대 경전읽기로 다시 돌아가는 마음으로 원전의 고전적 맛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추천 교수들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고쳤으면서도 한문도 적절히 써 고전의 장중한 맛이 살아있다”, “읽기 쉽다” 등을 추천의 이유로 꼽았다. 특히 동양고전을 한 단계 더 들어가서 보고 싶다는 학생들에게 적극 추천된다.

 

 

 



그 다음 총 5명이 추천한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의 번역은 老 대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발휘하고 있다. 김학주 교수는 1970년대부터 동양고전을 선두에서 번역하면서 고전부흥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활약했다. 김 교수는 현직에서 퇴직한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예전의 번역본들을 꼼꼼히 재검토한 전면 개정판을 계속 내놓고 있어 주목을 끈 바 있다. “쉽게 풀어 썼으면서도 전문가들끼리의 논쟁거리를 충분히 던져준다”, “이만큼 탁월한 해제를 보기 어렵다”라는 게 교수들의 평이다. “번역에 있어서 학자적 양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란 말이 따라다니는데, 이미 관용어처럼 굳어져서 형식적으로 해석하고 넘어갈 수 있는 어구들도 더욱더 정확히 풀이해놓았기 때문.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의 번역작업도 많은 추천을 받았다. 이 교수는 ‘논어강설’ 외에도 ‘대학·중용 강설’, ‘노자’, ‘장자’, ‘맹자강설’ 등 수권의 동양고전을 섭렵해 역해서를 내놓고 있어 일가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역본이 네 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는데, 이유는 무엇보다 “역자해설에서 본문의 내용을 주변의 현상과 견주면서 풀이하고 있어 이해를 쉽게 돕는다”라는 것인데, 이는 전문성이 탁월하기에 가능했다는 평들이다. 현대어로 번역된 건 물론이다.

참신함과 날카로움-배병삼·황희경
김학주·이기동 교수의 번역은 주희의 주석을 중심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에 “공자보다는 주희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정통적인 흐름 속에서의 논어를 익힐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늘 듣던 얘기인지라 깊이 음미하지 않으면 자칫 고루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도련 교수가 번역한 ‘논어-주주금석’은 주자의 영향에서 탈피해서 논어를 보려는 가장 선구적인 시도이다. “문맥을 정확히 살피는 데 중점을 두고 자구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경박하게 주희를 다 쳐내지 않으면서, 정약용의 조선적 글읽기를 참조해 잘 번역했다”는 추천을 받았다.

 

 

 



황희경 교수의 번역은 3명에게 추천받았는데, 그의 번역은 “새로운 시각, 날카로운 해석, 장중한 사상적 깊이”로 특징지을 수 있다. 노신, 김근목, 이택후 등 중국 현대사상가들의 논어 주석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참신하다는 것. 그리고 앞의 문맥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중간중간 “번역자의 사상이 번득인다”라는 게 추천자들의 공통적 의견이다. 

배병삼 교수의 번역은 ‘튀는 번역’이라고 해 정통유학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오역 없이 원전과 주석을 널리 활용해서 잘 번역했다는 추천을 3명에게 받았다. 무엇보다 한글세대를 위해 완전히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 또한 사회과학자로서의 안목을 곁들였다는 평이다. “오늘날의 문제의식과 잘 연결되도록 논어를 해석했다”라고 전문가들은 견해를 밝힌다. 김형찬 교수의 번역 또한 3표를 얻었다. 그는 기자 출신이면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의외로 많은 교수들이 추천하고 싶은 번역본이라고 밝혔다. “문장이 고답적이지 않고 일상적인 친근감이 있다”, “젊은 감각에 맞는 언어를 선택했다”라는 게 추천의 변이다.



성백효 번역본-극과 극의 평가
사실 전문가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건 성백효 역이다. 주희의 주를 가장 먼저 한글로 번역했고, 문법에 따라서 교과서처럼 정확하게 옮겼기 때문이다. 이번 선정작업에서도 7명 정도가 다른 책을 추천하면서도, 말꼬리에서 성백효 번역이 “가장 정확하고 해제, 주석, 원문, 번역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고어투가 너무나 많다”라는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번역본을 갖고 학부생에게 강의해본 여러 교수들은 이번 추천의 변에서 “성백효 역을 대부분 학생들이 어려워 한다”라고 말했는데, 만약 논어도 읽고 한문도 정식으로 배우기 위한 것이라면 이 책이 괜찮다는 의견도 3건이나 있었다.

그 외에 박기봉 교수 번역도 2명에게 추천됐는데 “완역이 아니고, 직역도 아니지만 책이 작고 맹자도 함께 언급하고 있어서 학생들이 가지고 다니며 편하게 읽기에 좋다”라는 게 추천의 이유다. 그 외에 단수 추천된 책으로는 이을호 역, 황갑연 역, 윤재근 역, 김종무 역, 남희근 역, 이우재 역(이상 교수) 등이 있었다. 추천자들은 학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배경으로 해서 논어를 읽은 에세이 류를 추천하기도 했는데, 삶 속에 반추된 논어야 말로 ‘진짜배기’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 쪽으로는 남희근·이우재·안병욱 교수 등의 책이 읽어볼 만하다고 추천되었다.

이번 취재결과 또한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 역본들도 있었다. 공자의 논어 자체를 현대적으로 번역시도한 경우 자의적인 해석이 많아도 이에 대해서 쉽게 비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원본과 대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서집주를 번역한 경우는 원본과 곧바로 대조되기에 명백하게 오류들이 드러난다. 김동길·허호구 교수 역은 “다산의 논어고금주를 번역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오역들이 너무 눈에 많이 띈다”라는 지적을 받았다. 정후수 교수가 옮긴 ‘주희가 집주한 논어’(장락 刊, 2000) 역시 “명백한 오역들이 많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류종목 교수가 옮긴 ‘논어의 문법적 이해’(문학과지성사 刊, 2000)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여러모로 자의적이고 무리한 해석이 많다”라는 평을 얻었다.(이은혜 기자)

교수신문(05. 05. 31) 번역의 역사_ 공자의 논어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논어’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논어를 번역하는 일이 오히려 난해한 문헌을 번역하는 것보다 어렵다. 논어에 관한한 최고의 주석가라고 할 만한 주희의 경우도 자신의 ‘논어집주’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未知孰是)”라는 문구를 여러 차례 삽입해 스스로 텍스트의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물며 주석과는 달리 완전한 번역어를 제시해야 하는 번역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논어의 우리말 번역서는 시판되고 있는 것만 1백60여종에 이르고 있으며 절판된 책까지 모두 합치면 3백종이 넘는다. 어떤 동양고전보다 많은 양이다. 하지만 수많은 동양고전 가운데서 논어가 가진 특별한 지위를 감안한다면 그리 많은 양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 논어 번역의 역사는 16세기의 ‘논어언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번역은 1909년 최남선이 간행한 종합잡지 ‘소년’ 9호~12호까지 실렸던 ‘소년논어’라 할 수 있다. ‘소년논어’는 비록 완역은 아니지만 원문의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는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원문의 신성성을 떨쳐버리고 주체적인 의미의 번역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소년논어’는 단순히 한문 문자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삶의 문맥을 활용해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어를 이용해 번역했다는 점에서 깜짝 놀랄 만큼 생동감이 뛰어나다. 완역이 되지 못하고 팔일편 첫부분에서 중단되고 만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최남선 이후 지금까지의 논어 번역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으로는 1974년 박영사에서 문고판으로 간행한 이을호가 옮긴 ‘한글 논어’를 들 수 있다. 이을호 역은 원문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우리의 일상언어로 바꾸어 번역했는데, 자연스러운 대화체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공자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간결 명료한 번역으로 원문과의 대칭적 구조까지 살렸다는 점에서 절묘한 번역이라 할 만하다. 또 이을호 역은 삶의 문법이 분명히 보이는 번역으로 당시 65세, 막 정년을 앞둔 노학자의 치열한 학문역정을 엿볼 수 있을뿐더러 번역을 통해 권위를 굴레를 벗고 일상 속으로 다가오는 공자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앞으로 논어를 번역할 이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탁월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간행된 1백여종에 가까운 논어번역서 가운데에도 훌륭한 것이 많다. 이 시기의 논어 번역서는 주희나 정약용 등 전통 주석가들의 견해를 번역의 근거로 제시하는 한편 현대 학자들의 견해까지 반영하여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논어 원문에 없는 부분까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부기하고 있는 점, 기존의 번역서에서 해결하지 못한 난해처를 많은 부분 해결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기존의 논어 번역보다 한결 심층적인 번역물이 간행되었다. 예컨대 1998년 동녘에서 간행한 한필훈 번역의 ‘한글로 읽는 논어-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하나의 사례로 들 수 있다. 이 책은 논어 본문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올 경우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 앞부분에 당시 공자가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을 간단하게 기술하면서 본문으로 이어지게 편집해서 쉽게 읽히는 논어로 청소년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또 1999년 홍익출판사에서 간행한 김형찬역 ‘논어’는 표현하기 까다로운 특수 용어를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자로편 21장의 ‘狂者’를 ‘꿈이 큰 사람’으로 번역함으로써 기존의 번역서가 모호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난해처를 분명하고 적절하게 해결하고 있다. 아울러 2000년 시공사에서 간행한 황희경 번역의 ‘논어-삶에 집착하는 사람과 함께하는’의 경우는 학이편 4장을 학이편 1장의 내용으로 해설한 내용, 팔일편 24장에 나오는 의봉인과 공자의 만남을 몽타주 기법으로 해설한 내용 등에서 기존의 논어 번역을 넘어서는 참신함이 엿보인다.

우리는 공자가 논어를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공자가 아니라 논어텍스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인으로서의 공자를 가정하고 일상 속의 인간들에게 당신들의 삶은 잘못됐으니 이처럼 비범한 말을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라는 일방적 훈계로 일관된 번역과 해설을 붙여왔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고전 읽기는 우리의 일상을 얕보는 천박한 사고를 부추겨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안락한 도피처를 찾아 떠나게 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전을 해체하고 우리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길만이 참된 의미에서 우리의 고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문법으로 번역한 논어를 기다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전호근 경기대 교수)

교수신문(05. 07. 13) 반론:고전번역 비평 기사에 대한 문제 제기

최근 교수신문에서 기획하여 고전 번역에 대한 비평을 연재하고 있다. 그간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고전 번역에 대한 비평이 없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며, 또한 비평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일반인에게 최고의 번역본을 소개해 준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기획의 의도와는 달리 번역 비평이 이루어지거나 비평 기사가 작성되는 과정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번 기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실명 비평이다. 즉 번역서의 저자 실명을 거론하면서 추천된 번역본과 비판된 변역본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기에 급급한 우리의 학계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면서 번역의 엄밀성에 대한 강조라는 측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실명 비평의 전제는 비평의 대상에 대한 실명만이 아니라 비평 당사자 역시 실명이어야 하며 비평의 이유에 대한 명확한 내용도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다수의 이름 속에서 혹은 익명성 속에서 명확한 비평의 근거도 없이 실명 비평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된 실명 변역자에 대해서 변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일종의 마녀사냥으로 변질되기 쉽다. 이를 좀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사이버상에 난무하는 익명성에 근거한 댓글의 일종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실명 비평의 기획 의도를 잘 살리고자 한다면 실명 비평의 방식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할 것이다.

이번 기획 기사에서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추천의 방식이다. 필자 역시 논어에 대한 30명의 추천 교수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 요구된 추천 방식은 학생들에게 권할만한 논어 번역서가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1-2분 정도 한 차례의 전화 통화뿐이다. 어느 전공 교수라 해도 160여종이 판매되고 있다는 논어의 번역서를 제대로 다 파악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처음 몇몇 전공 교수를 통해 제한된 우수 번역서를 먼저 선정하고 그에 대한 엄밀한 분석 혹은 추천 교수의 토론을 거친 이후에 추천 번역서 혹은 비판 번역서를 선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에 제시된 추천 교수가 어떻게 해서 선정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방적으로 전화 한 통에 의해 실명 비평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신문에 기사화된다는 것은 상당히 무책임한 대목이다. 많은 교수들은 전화 한 통에 의지해서 무책임하게 작성된 일반 신문의 기사에 의해 속상해하거나 피해를 본 경험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교수를 독자로 삼는 교수신문조차도 이러한 취재 방식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한다.

또한 추천 교수 명단에 포함된 교수진은 직간접적으로 해당 번역서와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 대한 고려이다. 논어에 대한 추천 교수 명단을 살펴볼 때, 가장 추천이 많이 된 것으로 기사화된 유교문화연구소 간행본과 직접적으로 관여된 교수만 해도 네 명이며 간접적으로 관련까지 고려한다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수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2005년 3월 20일 발행되어 두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시중에 충분히 배포되지도 않은 도서가 제일 많은 교수의 추천을 받는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갖는다. 또한 동양고전연구회 번역서의 집필에 직접 참여한 교수 중 세 사람이 이번 추천교수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다른 추천교수 명단을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0인의 추천교수 중 논어 번역서를 낸 바 있는 분이 예닐곱 분이 넘으며 해당 번역서를 낸 교수와 동일한 대학, 동일한 학과에 근무하는 교수나 그 제자가 다수 포함된 것을 볼 때 추천의 객관성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덧붙이고 싶은 것은 논어 번역서와 관련된 기사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무성의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해당 책의 출판연도는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사에서는 논어 번역서에 대한 출판연도를 자세히 조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령 동양고전연구회의 번역서는 2005년이 아닌 2002년에 초판이 나온 것이며, 김학주 교수의 번역서는 2003년이 아닌 1985년에 초판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기사에서 주희의 주를 가장 먼저 한글로 번역했다고 되어 있는 성백효 선생 번역본의 경우 1990년 5월 초판이 나왔는데, 이는 같은 해 간행된 김도련 교수의 번역본보다도 약간 늦게 출판된 것이며, 1982년 간행되었던 한상갑 교수의 번역에 비하면 훨씬 뒤늦은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기사가 완성되기 전에 충분한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이것이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전번역 비평에 대한 기획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할 수 있다.(이강재 서울대 중문학과 교수)

[참고] 이는 문제제기와 관련된 참고자료입니다.

추천인 중 논어 역주서 집필자

[개인 집필자]
이동희 (1997, 계명대 출판부, 논어)
이애희 (1992, 민음사, 공자 사상의 발견) - 직접 역주서가 아닐 수 있음.
임종욱 (2002, 나무아래사람, 논어)
장숙필, 정상봉 (2002, 지식산업사, 논어)
황희경 (2000, 시공사, 논어)
배병삼 (2002, 문학동네, 논어)

동양고전연구회 논어 집필진
고재욱 (강원대 철학과)
김백현 (강릉대 철학과)
* 김병채 (한양대 철학과) -- 추천 교수에 포함
유권종 (중앙대 철학과)
이강수 (연세대 철학과)
이명한 (중앙대 철학과)
* 장숙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 추천 교수에 포함
* 정상봉 (고려대 철학과) -- 추천 교수에 포함

논어 추천 교수 중 유교문화연구소 논어 관련 교수 (직접 관련만)
안재순 (강원대) - 교열위원
이천승 (성균관대) - 집필 위원
최영진 (성균관대) - 기획 당시 유교문화연구소 소장
김영호 (영산대) - 초기 기획 참여

추천 교수 중 영산대 교수(추천된 번역서 역자 배병삼 교수 소속 대학)
배병삼 교수, 김영호 교수, 이상익 교수, 조광호 교수, 황희경 교수

<해명>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논어’가 시리즈의 첫회라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 앞으로 계속 보완해나겠습니다. 번역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취재원의 전문성, 구성에서의 공정성을 더욱 철저히 고려하겠습니다. 다만 5회를 진행하면서 1백20명 교수들 중 몇분 안에 취재가 끝난 경우는 적었습니다. 대부분은 장시간 의견을 밝혔고, 원고지 20~30매로 의견을 밝혀주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번역자를 취재원에 포함시킨 건 기존 번역서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이고, 자기 책은 추천하지 못하게 돼 있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이은혜 기자)

08. 01. 22.

Конфуций Суждения и беседыКонфуций Конфуций - Суждения и беседы

P.S. 러시아어 문고본의 <논어>이다. 문고본답게 가격은 저렴해서 3,000원 정도. 제목은 <견해와 대화>로 돼 있다. 오른쪽은 고가 한정본인데 가격은 14만원이 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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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종류의 '번역본'ㅡ이렇듯 <논어>를 '타자화'시키기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ㅡ을 갖고 있지만, 정말 많은 번역본들이 있군요. 소개글에 감사드립니다. 몇 권은 구해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로쟈님 말씀처럼 어떤 의미에서 <논어>의 '정본'이 확정되는 일은 참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성경>에 대한 연구가 '해석학(Hermeneutik)'의 탄생을 촉발했던 것과도 같은 에너지를 <논어>에서도 또한 기대하게 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논어>는 예나 지금이나 '문제적'이고 '징후적'인 텍스트로군요.^^

로쟈 2008-01-24 23:31   좋아요 0 | URL
이번에 새삼 알게 된 것이지만 서로 모순적인 번역/해석까지도 '공식적'으로 허용하더군요. 우리가 '상상하는' 공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얼마전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이란 글을 창비주간논평에 실으며, 현 번역문화와 번역의 컨텍스트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739728). 아는 바대로, 우리 출판/독서 문화에서 번역서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하면 현재의 번역문화는 아직 척박한 수준이다. 번역과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고, 때문에 양산되는 번역서의 질 또한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다(저작권이 있는 책의 경우 번역서가 나오는 게 더 고역일 때도 있다. 한국어로는 제대로 읽을 수가 없게 돼 버리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널리 확산되는 게 일단은 개선의 첫발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침 관련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로쟈란 이름도 언급돼 있어서 모른 체할 수도 없고).    

한국일보(07. 12. 14) "번역물 옥석 가리자" 번역비평 '회초리' 들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하는 <2006년도 출판통계>에 따르면 작년에 나온 신간 중 23%가 번역서다. 그 비율이 7% 수준인 미국과 비교할 것도 없이 한국은 번역서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이런 현실에 발맞춰 번역물의 옥석을 가리는 번역비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특히 학계를 중심으로 기존 번역서의 수준을 평가하는 보고서가 잇따르고, 번역비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지가 발간되는 등 번역비평의 체계를 갖추는 작업이 한창이다.

■ 번역비평의 체계화
한국번역비평학회(학회장 황현산 고려대 교수)는 지난달 연간 학회지 <번역비평> 창간호를 냈다. 첫 번역비평 전문지다. 황현산 교수는 창간사에서 “이 학회지를 통해 깊이 있는 번역론을 개발하고 번역 평가의 방법과 기준을 모색하는 한편 번역 현장의 체험에 귀 기울이고 그 결실을 비평할 것이며, 번역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과 처방들을 위해서도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썼다.

이 잡지는 ‘번역비평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의 특집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러시아어 번역의 문제> <도스토옙스키 한국어 번역의 문제점> 등의 평론을 실은 ‘번역비평’, 서구 번역이론을 소개하는 ‘번역이론 연구와 소개’, ‘신간 번역서평’ 코너 등으로 구성됐다. 번역가이자 출판평론가 표정훈씨, <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 박상익 교수 등이 기고한 번역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코너도 마련했다.

영미문학연구회(학회장 김명환 서울대 교수)는 영미 고전문학 71개 작품의 국내 번역서들을 비교 평가하고 재작년과 올해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발행ㆍ전2권)란 보고서를 발간했다. 번역서의 41%가 표절본이고,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8%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 결과는 국내 번역 수준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통계로 자주 인용된다. 이 학회는 96년 창간한 반년간지 <안과밖>에서 영미문학 번역 실태를 점검하는 고정란을 꾸려오고 있다.

교수신문은 2005년부터 2년간 동서양 대표 고전 번역본에 대한 분석글을 연재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발행ㆍ전2권)로 묶었다. 일부 소장학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수준 있는 번역비평에 나서기도 한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balmas’라는 필명으로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저작 번역본을 집중 검토하는 진태원씨, ‘로쟈’가 필명인 러시아문학 전문가 이현우씨가 대표적이다.

■ 새로운 비평기준 모색
번역비평이 단순한 오역 지적을 넘어 진일보한 평가 잣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특히 번역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져온, 원전의 자구(字句)를 충실히 옮겨야 한다는 ‘충실성’과 번역하는 언어권의 독자가 읽기 편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독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불어권 문학 번역가인 정혜용 서울대 교수는 <번역비평>에 기고한 ‘번역문학 비평을 위하여’라는 글을 통해 “번역비평이라면 당연히 번역가의 번역관, 번역물의 번역 논리를 그 핵심에 둬야 한다”며 “그것이 충실성과 가독성 규범으로 포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잣대는 궁극적으로 폐기돼야할 비평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밋밋한 직역 대신 생생한 의역을 택했던 번역 경험을 소개하면서 “번역자는 특정 표현의 작품 내 기능에 대한 분석과 그 단어가 상징하는 작가의 언어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충실성 규범을 저버릴 수 있다”고 썼다.

영미문학 번역가 왕은철 전북대 교수는 <안과밖> 2007년 하반기호에서 “번역가는 원문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기계적으로 바꾸는 ‘하인’이 아니라 비판적 안목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하고 창작하는 자”로 규정했다. 왕 교수는 “비평가가 번역가의 기준과 원칙을 고려하지 않으면 공정한 비평은커녕 번역가를 ‘혼내는’ 형태의 비평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면서 영미문학연구회의 고전 번역 평가의 문제점을 에둘러 지적했다.

■ 현장 번역가 ‘볼멘 소리’도
학계 중심의 번역비평 본격화에 현장 번역가들은 “열악한 번역 현장을 도외시한 채 일방적 평가 잣대를 들이대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표정훈씨는 <번역비평>에 실은 글에서 부실한 번역을 양산하는 환경을 조목조목 짚었다. 전업 번역가로 생계를 꾸리기 힘들 만큼 번역료가 박하고, 대학 도서관의 외부인 통제로 참고 자료 이용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적이다. 아울러 그는 번역서의 질적 수준을 평가할 서평 시스템의 부재, 분야별 번역 작업의 기반이 될 기초 고전의 번역 미비, 번역을 경시하는 연구자 평가 정책을 비판했다. 일본문학 번역가 김남주씨는 “번역가의 언어 선별은 병아리 감별사의 작업을 닮았다”며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직관에서 좋은 번역이 나온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현우씨는 이달 인터넷 ‘주간창비논평’에 기고한 글에서 장기적 안목의 번역 문화 개선을 주문했다. 이씨는 한국고전번역원, 한국키케로학회 등이 40~50년을 잡고 번역 작업을 진행 중임을 상기시키면서 “대학원생에게 번역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해 교수 이름으로 출판하는 관행부터 타파하는 등 번역 텍스트를 둘러싼 현실적 조건, 즉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해야 한다”고 썼다.(이훈성기자)

0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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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이현우씨였구나요~~~^^ 창비논평 잘 읽었어요

로쟈 2007-12-14 14:44   좋아요 0 | URL
닉네임을 바꾸든지 본명을 바꾸든지 해야겠어요, 이젠...

수유 2007-12-14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명이 낯설어요..그참..

2007-12-14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5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12-1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을 "소장학자"라고 부르니 왠지 좀 거리감이.. "소장학자"라는 보통명사보다는 "로쟈"님이라는 고유명사가 훨씬 좋네요.^^

로쟈 2007-12-15 23:32   좋아요 0 | URL
요즘은 그냥 40대까지를 '소장학자'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로쟈'란 닉네임이 공식직함으로 사용하기는 아직 어려우니까요.^^;

펠릭스 2009-10-13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전번역과 중역에는 차이가 있을 것같은데요?
렬국은 최종 번역자의 능력이 문제일까요?
 

지난 여름에 출간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은 '올해의 이론서' 후보작 중의 하나일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갖는 책이다(관련 페이퍼는 '루만이냐 하버마스냐' http://blog.aladin.co.kr/mramor/1342097 '체계이론과 주체철학' http://blog.aladin.co.kr/mramor/1377766 등 참조). 여름에는 서론부만 좀 훑어보다가 다른 일들에 치여 미뤄두고 말았는데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장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싶다(나는 영역본까지 구해두었었다). 다행히 관련 입문서들도 나온다고 하니 사정도 더 좋아질 듯하고. 연세대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담비에서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654). 국역본의 문제점도 짚고 있어서 유익하다. 

담비(07. 12. 11)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체계이론’을 통해 현대사회학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온 독일 사회학자다. ‘메타는 없다’는 (언뜻 포스트모던한) 테제를 기초로 정교하면서도 거대한 메타 사회이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 루만의 지적 독특함과 거장다운 사유의 넓이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여 평생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으며 다룬 주제의 범위도 사회의 일반이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법 심지어 문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하버마스와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성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서 루만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가 매우 난해한 이론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다’고 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사회체계이론1, 2>가 지난여름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런 답답한 상황이 슬슬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을 위해 두 편의 좋은 소개글을 싣는다. (편집자)

루만과 사회학의 사고 전환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이다.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할 텐데, 왜 굳이 ‘거대’ 이론가라고 부르느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루만이 이룬 사회학적 사고의 전환과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풍부한 개념틀, 그리고 그 방대한 작업 규모에 주목한다면, 다른 이론가들이 인본주의 개념틀에 사로잡혀 얼마나 협소한 범위만 다루고 말았는지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는 그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그 환경에 있는 인간을 닮은 모습(부족, 혈통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현대 이전에는 ‘인간적 사회’라는 관념을 갖고서도, 즉 인간 주체나 사물 객체와 다른 사회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고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여러 기능체계로 분화된 현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그 환경에 있는 인간들을 구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화 형식을 갖게 된다. 오직 경제인이기만 한 사람도 오직 학자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경제나 학문과 같은 기능체계의 작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사회계약론이나 실천이성과 같은 주체철학에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사회구조 모델을 전제하는 것은 비개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인 소통 과정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지금까지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루만의 중기 주저작인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초반, 특히 이중의 우연성을 다룬 3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루만은 기존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인 의미, 소통, 행위, 관찰, 구조, 과정, 인격 등에 모두 새로운 위치값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 일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틀을 이 책에서 마련한다. 사회학 역사에 있어서나 체계이론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더 소개하기 전에 왜 내가 한글판의 제목인 ‘사회체계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칭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루만 번역서의 문제들

한국에 루만에 대한 소개는 그리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번역된 저작은 협소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루만을 다룬 입문서 하나가 번역되긴 했으나, 그조차도 루만의 제자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개론서 전문 저자가 겉핥기식으로 쓴 책이었다. 아직 하버마스의 저작들을 통해 이루어진 루만에 대한 왜곡된 소개, 즉 파슨스의 아류 혹은 기성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체계이론 정도로 여겨버리는 인식을 교정할 만한 한글책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생성(Autopoiesis)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이후 1984년에 나온 Soziale Systeme의 번역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루만의 이론사에 있어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완성한 저작이자, 1997년에 나온 또 다른 주저작인 『사회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회이론 생산의 출발점이었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 연구는 사회를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이자 다른 여러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독18, 한1:63)고 말한다. 사회적 체계를 다루는데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니?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상호작용, 조직, 사회(Gesellschaft)로 분류한다. 이들 사회적 체계는 각각 고유한 작동(Operation) 원리를 갖고 있으며, 그중 사회는 ‘모든 소통을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래서 기업, 정당, 학교 등에 대한 연구가 조직사회학의 과제라면,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는 사회이론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기초를 놓는 책이다. 그래서 soziales Sytem은 social system과 ‘사회적 체계’로, Gesellschaftssystem은 societal system과 ‘사회체계’로 구별해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한글판 옮긴이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사회적-’를 ‘사회-’로 바꾸었고, 그래서 Gesellschaft를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사회”, “공동체” 등 “문맥에 따라 상이한 역동적 번역을 취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역동적 번역은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루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분절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소통들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회들이 있었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하는 루만의 설명법은 위와 같은 역동적 번역 때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더구나 ‘공동체’라는 번역은 사회를 결코 인간 공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루만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식대로 그대로 옮기면 “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사회”(독585)라는 문장은 옮긴이에 의해 “전체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공동체”(한2:290)라는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Gesellschaft라는 단어 자체에는 결코 ‘전체’니 ‘공동체’니 하는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옮긴이의 몰이해는 제목뿐만 아니라 루만 소개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는 1997년에 나온 루만 사회이론의 집대성작인 『사회의 사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등 일련의 사회이론 저작들을 『사회적 체계들』의 각론이라고 말한다. 앞선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기초 개념을 마련한 후 사회이론 작업은 각론들을 먼저 쓰고 이들의 총론을 마지막에 썼다. 옮긴이가 루만 이론의 체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체계이론』을 유일한 “결정판”으로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책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번역의 질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연산(Operation), 외율준거(Fremdreferenz)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 선택은 그렇다 치고, 수십 번에 걸쳐 bewa..hren(입증)을 bewahren(보존)으로, Simplifikation(단순화)를 Implikation(함축)으로, Zumutung(요구)를 Vermutung(추측)으로 잘못 읽는 것은 최소한의 정성 부족을 보여준다. 문장 오역도 무수히 많으며,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 나온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 밝혀둘 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역의 탓도 크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못 읽는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영역판을 추천한다(*역시나 국역본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체계들』의 내용

『사회적 체계들』은 도입과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인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와 기능, 체계와 환경을 다룬 1장과 5장은 루만 체계이론이 파슨스와 달리 구조보다는 기능을 우위에 둔다는 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이룩한 자기생성적 전환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 중심이 아닌 세계(체계/환경-차이의 통일) 중심의 이론이라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체계이론이 보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것이며, 사회의 환경 문제, 즉 인간의 고통이나 배제 문제나 생태적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를 다루는 2장은 루만 이론의 또 하나의 자원인 후설의 지향적 의미 개념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수용해 변형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루만은 70년대 초부터 의미가 행위나 구조보다 앞서는 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책에서 의미 개념은 의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체계(의식체계, 사회적 체계)의 다른 자기생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완성된다. 앞서 말했듯이 3장은 사회적 체계가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임을 밝히고 있으며, 4장에서 소통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사회적 체계의 구성요소가 소통이지 왜 행위일 수 없는지 밝힌다.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의 위상을 밝히는 4장과 8장은 사회학 논쟁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루만은 행위란 체계가 자기생성의 동일성 지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인 정보, 통지, 이해 중 통지행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는 사건들의 연쇄인 소통 과정에서 기대를 제약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구조는 과도한 임의성을 제약하는 것이지 행태 자체를 규제할 수 없고, 따라서 과정은 구조상 비개연적인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행위에 대해 소통을, 구조에 대해 사건과 과정을 우위에 둠으로써, 루만은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이 행한 행위 중심 사회학과 구조 중심 사회학의 절충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며, 하버마스의 소통적 행위 이론이 상호이해지향이라는 확인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의지함으로써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이며, 개인은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는 대목은 6장 상호침투와 7장 심리적 체계들의 개체성이다. 그리고 9장은 헤겔 이래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오늘날도 기능론 대 갈등론이라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며, 10장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사회적 체계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루만은 이 책의 1장을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실재에 비추어 입증되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가 단순한 분석 모델이 아니라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러한 선언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세계란 체계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는 체계는 자신의 관찰이 가진 맹점을 볼 수는 없으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반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루만이라는 관찰자의 맹점에 묶여있는 것이고 세계는 다르게도 관찰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런 맹점을 벗어난 세계를 알 수 없다. 합리성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지시와 합리성, 그리고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을 다루는 11장과 12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들이지만 과감하게 ‘체계들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체계/환경-구별이 세계 기술에 있어 높은 실적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루만 이론의 전면모는 여기까지 읽어야만 밝혀진다. 그리고 11장의 논의는 체계이론을 통한 사회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진다.

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 Eine Einführung.

『사회적 체계들』을 다 읽는 데는 워낙 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친절한 입문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입문서를 추천하자면 독어는 G.Kneer와 A.Nassehi가 함께 쓴 책과 M.Berghaus가 쓴 책을, 영어는 M.King과 C.Thornhill이 함께 쓴 책을 추천한다. 첫 번째 책은 필자의 번역으로 내년 초에 한글판이 나올 것이다.(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0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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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만을 전공하는 분께 이야기 들은 바가 있기도 해서, 아직 번역본은 구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역시나 더욱 구입을 망설이게 하는 글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3 08:4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크게 신뢰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은 덜컥 구입했었는데요, 역시나 문제가 터지는군요.--;

책사랑 2007-12-1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미비에 대해 공감하는 바입니다.

로쟈 2007-12-13 08:39   좋아요 0 | URL
출판계 자체의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 같습니다. 언제나 독자들이 문제를 떠안아야 한다는 건 참...
 

창비주간논평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http://weekly.changbi.com/blog_post_192.aspx). 내가 주문받은 것은 '인문서 번역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일이었고 마침 최근 출간된 <번역비평>을 읽고 있었기에 그걸 실마리 삼아 몇 자 적은 글이다. 새삼스럽지 않은 얘기를 '진지하게' 늘어놓아 멋쩍긴 하다. 그리고 최종원고를 보낸 지 한 시간만에 글이 올라와 놀랍기도 하고(!). 

창비주간논평(07. 12. 04)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최근에 나온 《번역비평》(고려대학교출판부) 창간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작년에 발족한 한국번역비평학회의 연간 학술지이다. 지난 10월 영미문학연구회의 정기학술대회에서도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라는 주제가 다뤄진 걸 보면, 번역에 대한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의식은 어느 때보다도 널리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인터넷을 통해 활성화된 번역비평과 작년에 불거진 대리번역 파문 등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비평》과 학술대회 발표문들을 읽으며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우려할 만한 번역현실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박상익 교수가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통해서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한 바 있다. 그대로 옮겨보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번역에 적대적인 한국현실

이러한 현실이 끌어안고 있는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은 번역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팎의 문제들이다. 일부에서는 오역 집어내기에만 열중하는 번역비평의 비생산성을 꼬집기도 하지만, 사실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라고 할 때 '오역'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대부분 무지와 무성의에서 비롯된 단순오역들이다. 가령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를 서로 바꿔 옮긴다거나 라깡의 '대학담론'(discourse of University)을 '우주에 대한 강좌'로 옮기는 식이라면 독자의 '좌절과 환멸'은 불가피하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혹은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란 '고상한' 번역학적 논란이 우리의 현실에 잘 부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번역 텍스트의 문제라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번역을 양산해내는 번역의 컨텍스트 문제이다. 그래서 《번역비평》에서도 특히 공감하며 읽은 글들은 '번역출판과 현장'의 목소리들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번역이 중요하다 말하지 말라"라고 일갈한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말을 빌리면,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며, 서평의 제도와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며,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 및 이용의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고, 번역의 지형도가 번역에 적대적이고, 학문 제도와 구조가 번역에 적대적"인 현실이 문제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다. 이만하면 총체적으로 적대적인 상황 아닌가? 



인색한 번역료, 척박한 서평문화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란 사실은 인문서 번역의 경우 더욱 실제적이다. 표정훈은 매절번역료 원고지 1매당 4,000원 혹은 인세율 5%를 기준으로 번역료 수입을 계산했지만, 요즘 인문서 번역의 대세인 인세계약을 기준으로 하면 저작권이 있는 도서의 경우 보통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6~8%이다. 정가 20,000원인 책 2,000부를 초판으로 찍는다고 할 때, 역자의 손에 떨어질 수 있는 최대 수입은 240~320만원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인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고급인력'이 최소한 두세 달을 꼬박 투자하여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서는 결코 내세울 만한 수준이 못된다. 게다가 고급 인문서의 독자층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는 현실은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박차고 '불만의 번역자'를 자처하고 나설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동서양명저 번역사업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이 사업에 배정되는 1년 예산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채 값에 불과하다. '언 발에 오줌 누기'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번역서 서평문화도 척박하긴 마찬가지다. 표정훈의 비교에 따르면, 북리뷰의 프론트면의 서평 양에서 《뉴욕타임즈》가 국내 신문보다 3배 많다. 이런 서평란이 《뉴욕타임즈》에서는 30~40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반해서, 국내 주요 신문은 5~8면이다. 게다가 씨스템상으로 책을 꼼꼼히 읽고 평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양산되는 국내의 서평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출판인회의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같은 유관기관에서 문제가 많은 오역서를 '이달의 책'으로 선정하는 코미디가 간혹 벌어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문과 달리 서평은 학술업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학술·교양서적이 번역되어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이 관련 학술지에서조차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다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적인' 인간관계가 고려되는 탓에 실질적인 '번역비평'이 이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돈독한 인간관계 속에서 번역문화만 낙후돼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번역문화'라면 과연 어떻게 개선해가야 할 것인가?



한권의 번역서를 책임진다는 자세로

'가난한' 번역자들이 자주 겪는 것이지만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 이용의 편익을 최대한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해봄직하다. 하지만 고전 번역서들의 번역이 아직 미흡하여 '지식의 지형도'를 제대로 그려볼 수 없다는 불만은 인과응보이기에, 현재로선 감수하는 수밖에 없겠다. 단, 지금 세대가 여전히 필요한 번역에 손을 놓는다면 그러한 불만을 다음 세대에까지 또 물려주는 도리밖에 없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하지만 인문학자나 인문학도 들이 저마다 한권의 번역서는 책임진다는 각오로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바닥에 땀을 좀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족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우리의 고전과 각종 관찬사료 들의 번역을 체계적으로 추진한다고 하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고전문헌 가운데 우선적으로 6,400여 책을 번역자를 양성해가며 다 번역하려면 4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한다. 2003년에 창립된 한국키케로학회에서 30권으로 기획하고 있는 키케로전집 번역에는 50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한다. 각 학회나 전공분야에서 그 정도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향후 반세기 정도 혼신의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일찍이 '번역대국'의 길에 들어선 일본과의 격차를 좀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의 컨텍스트를 바꿔나가야

물론 열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다. "번역이 힘든 건데, 그럼 일본어·영어로 읽으면 쉽지 않은가?" 혹은 "앞으로 100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라는 인식과 판단이 한국어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태도가 된다면, 인문고전 번역의 미래는 없다. 이미 자연과학에서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인문학에서도 한국어는 변방의 언어, 기지촌의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과연 인문학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일까?).

대학강단에서도 영어가 공용어로 '강요'되고 있는 징후적인 현실은 분명 번역에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이 아니라면, 번역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며 번역업적의 평가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학계의 제도와 관행을 이제부터라도 바꾸어야 한다.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하여 교수 이름으로 내던 관행부터 타파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런 관행에 익숙한 이들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할 리는 없지 않은가?).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도 독자들의 좌절과 환멸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는 시험에 계속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현실이어야 할까.

07.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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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05 21:27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
 
 
소경 2007-12-0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원에 읽다 흥미가 달아 올랐는데, 막상 댓글 적으려 하니 사그라져 버리는 군요 ^^:;

로쟈 2007-12-04 21:40   좋아요 0 | URL
그냥 '상식'을 확인하면서 행동을 촉구하는 글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사량 2007-12-0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알라딘 책 소개에는 계간지라고 나오는데, 로쟈님은 연간지라고 말씀하시네요. 어느 쪽이 정확한가요?

로쟈 2007-12-04 21:39   좋아요 0 | URL
책에 연간지라고 돼 있습니다. 학술지가 계간지로 나오긴 힘들 것 같고, 그래도 영향력이 있으려면 반년간지도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7-12-04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4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lapphappy 2007-12-05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번역하신 인문서를 알려주세요.

로쟈 2007-12-05 08:36   좋아요 0 | URL
저도 몇 권을 하고는 있습니다.^^;

누에 2007-12-2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괜찮은 번역어 사전은 없으려나요.

로쟈 2007-12-28 21:58   좋아요 0 | URL
'번역어사전'이란 건 어떤 걸 말씀하시나요? 번역학 용어사전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안 나와 있는 거 같습니다(통역사전 같은 건 있고요)...

누에 2007-12-29 17:54   좋아요 0 | URL
철학이나 정신분석 등의 번역서에서 역자들이 택한 번역어들에 대해서 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서 말이죠...

로쟈 2007-12-29 18:23   좋아요 0 | URL
그건 책마다, 철학자마다 다를 거 같은데요. 요즘은 그런 책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말미에 번역용어 해제와 대조표들이 덧붙여진다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가명 2019-12-0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상황이 변화했나요 문외한이 여쭙습니다

로쟈 2019-12-0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황파악이 정확히 안되지만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놓친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번역비평'에 관한 제언인데, 덕분에 생각이 나서 지난달말에 열렸던 영미문학연구회(영미연)의 학술대회 자료집까지 홈피(http://www.sesk.net/board_focus/content.asp?num=174)에 가서 챙기게 됐다(학술대회에 가보려고는 했지만 여력이 되질 않았다). 한기호 소장은 학회의 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발표문('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가운데 일부를 칼럼기사(한기호의 출판전망대)와 함께 옮겨놓는다. 많은 부분들에서 동의하며 공감할 수 있는 제안들이다. 

한겨레(07. 11. 03) '잡초’ 골라낼 번역비평 필요하다

지난해 10월,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가 따로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 이 땅에서는 번역의 윤리를 질책하는 커다란 광풍이 불었다. 일주일이 넘게 수많은 매체에서 이에 대한 견해와 논평을 요구하는 바람에 전화로 ‘마시멜로’ 소리만 들어도 입에 단내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리번역의 관행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고 번역회사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하긴 요즘 번역회사에 번역을 맡기면 번역료가 싸고, 속도도 빠르며, 문장이 깔끔하다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단다. 하지만 오해 마시길.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은 오역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번역회사가 문장 교열자를 따로 두어 원뜻과 관계없이 그럴싸하게 다듬어주고 있다나.

지난달 27일에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영미문학연구회(이하 영미연) 주최의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영미연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점검한 성과인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1, 2권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날 토론에서는 번역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한 발표자가 인용한, 번역은 “터키 카펫의 뒷면”이라거나 “셰프의 요리를 운반하던 웨이터가 지독하게 진부한 대중적 취향으로 말미암아 위에다 케첩을 뿌려서 내놓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말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영미연의 작업에 대해서도 화초(잘된 번역)를 키울 것이냐 잡초(잘못된 번역)를 골라낼 것이냐는 논쟁이 벌어졌다. 극단적으로 잡초를 고를 시간에 화초를 키우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겠느냐는 지적마저 있었다. 하지만 영미연의 작업은 이 땅의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인문학이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인문학 서적만큼은 최대한 원전의 뜻을 제대로 담은 번역서를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발터 베냐민이 ‘번역자의 사명’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다’의 본질은 누군가 ‘아니다’를 말했을 때 쉽게 드러난다. 영미연의 작업처럼 누가 잡초라고 말하며 호루라기를 불어줄 때에야 화초의 본질이 확실해지는 법이다. 물론 잡초로 지적받은 사람이 고의로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 꾸준히 ‘아니다’라고 말해주었을 때 ‘이다’의 본질을 쉽게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영미연의 작업이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누군가가 계속해야 할 작업이다. 물론 그 일이 상시적으로 지속되려면 번역비평의 저널이 꼭 있어야 할 것이다. 이날 토론에서 나는 내내 마음먹고 있던, 내년 2월에 계간 형태의 저널을 꼭 창간하겠다는 다짐을 그만 털어놓고 말았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인문학의 위기와 번역

발표자가 서두에서 『마시멜로이야기』 사건이 터졌을 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 것은 그런 자기계발서에서는 번역의 질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심정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책은 읽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 외국의 자기계발서는 국내 현실에 맞춰 적당히 가감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요즘 회자되는 ‘인문학의 위기’와 대리번역을 연결시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삶의 길을 터놓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좁다란 길일망정 누군가 터놓기만 하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단지 몇 사람이 지나간 흔적 때문에라도 나중에 터널도 되고 고속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가 길을 내고 누가 다닐 것인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문학은 서유럽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길을 내기 위해 거친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가져와 활용한 면이 크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를 두고 서양의 경험적인 것을 매우 선험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조동일 교수는 온통‘지식의 수입상’만 넘친다고 일갈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인문학은 간단히 말해서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텍스트를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원전부터 충실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계가 많다. 그래서 외국 원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 ‘언어가 되지 않는’ 대중이나 기초연구자는 번역서라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런 사람 중에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데 신뢰할만한 원전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철학, 정치학 등에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플라톤의 경우 일본에서는 기무라 다카타로木村鷹太郎가 1903-1911년에 걸쳐 완역작업을 했고 후잔보冨山房라는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주요 저작들만 중복 출판하다가 올해 4월에서야 전집 간행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네 권 출간된 상태다. 팔릴 것 같은 책은 수십 종, 경우에 따라서는 1백 종이 넘게 변종이 생산되지만 꼭 번역되어야 할 책이 번역되지 않은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번역의 질은 또 어떤가?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번역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인문서의 경우 더 그렇다. 나카야마 겐(中山元)의 『사고용어사전』(2000) ‘번역’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의 의미를 묻고 있다.

“저 쪽으로(trans) 이끈다(ducere)라는 동사에서 생겨난 말인 번역. 여기에 있는 것을 저쪽 물가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이 행위는 항상 배리背理에 시달린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완전히 같은 가치를 가진 언어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가능한 것이며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로 말한 것을 별개의 언어로라도 거의 같은 의미와 가치를 가진 말로 바꾸지 못했다면, 철학의 보편성 자체를 보증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독일어가 없었다면 철학은 불가능했다고 생각한 듯한데, 일본어로도 하이데거의 사고는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와의 커다란 차이이다.

시에서는 단어 하나가 그 작품 자체이고,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이해할 가능성을 상당히 앗아가 버린다. 시인은 언어를 한 번 쓸 수 있는 생물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개념을 사용해 사고하는 작업이다. 개념이라는 것을 번역할 수 있는 한, 철학 텍스트는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번역은 배신행위이며 늘 어떤 의심에 시달린다. 원작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번역은 필터를 거친 전달에 지나지 않으며, 그 텍스트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원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번역된 텍스트는 항상 뒤떨어진 것일까? 번역으로 무엇인가가 새롭게 태어날 수는 없을 것인가?”

나카야마는 이어서 “번역이라는 작업도 원작의 의미에 가장 유사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게 된다(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 번역을 할 때 원작자의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원작자가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말로 바꿀 필요가 있다. 때로 번역자는 원작자가 사용하지 않은 표현도 덧붙인다. 그 쪽이 원작자의 의도를 잘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번역자의 자의적 생각이 존재함은 피해갈 수 없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번역자가 애정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의적 생각을 덧붙인다면, 원작자의 표현과 번역자의 표현은 ‘커다란 언어의 두 가지 파편’처럼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카야마는 “외국어로 표현된 텍스트를 읽는 최선의 방법은 원문 읽기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번역해보는 것이다. 번역해봄으로써, 원문의 텍스트에서 보고 지나쳤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번역이라는 행위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선 무엇으로, 그리고 역으로 언어의 차이로 인해 처음으로 부각되는 것”이라며 인문학 연구자가 스스로 번역해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무엇인가?

사실 번역의 문제는 지금껏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적이 없다. 지난 몇 년간 학술진흥재단 등의 번역지원으로 적지 않은 책이 출간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출간비용에 비해 지원액이 매우 미미해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적지 않다. 국가의 지원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를 몇 가지 정리해본다.

첫째, 텍스트 선정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보공학의 창안자인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에 따르면 정보편집의 중요한 용법 중에 ‘계통수系統數’가 있다. 계통수란 계보系譜이고 계열系列이며, 계도系圖다. 우리 눈앞에 있는 정보나 물건이 과거에 어떤 흐름을 갖고 있었는지 그림으로 그려서 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지식의 툴’이 계통수라는 편집용법이다.

모든 인문학 분야의 책도 계통수로 그려볼 수 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에서 그 분야의 메인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큰 가지에 해당하는 책부터 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원 텍스트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그 텍스트에 대한 비판서는 출간된다. 이런 경우 원전은 보지 못하면서 비판만 접하는 이상한 경우가 된다.

따라서 출판계 전체적으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책을 선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 전문출판사가 더욱 늘어나야 한다. 전문출판사는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책을 출간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1천 부의 수요도 잘 이뤄지지 않는 마당에 책을 펴내려는 출판사가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문학 원전의 경우에도 꼭 필요한 텍스트는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영미문학연구회 같은 단체에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문학원전의 목록을 예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둘째, 전문번역가를 키워야 한다 
지난 5월 17일, 교육부는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교육 분야에서는 인문학 토대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논문형 작품만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온 관행을 바꿔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더라도 박사논문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확대하고, 해마다 번역 전문가 1000명을 선발해 1인당 500만원씩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년에 50억씩 10년 동안 5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발상이다.

이 안이 실행되는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원전번역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우리 사회의 번역이나 번역자에 대한 인식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제로 실행된다고 해서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인가? 게다가 1000명씩이나 선발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인적자원이 있는가?

한 번역가는 번역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글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을 들었다. 영어번역의 경우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우고 영영사전 등을 활용해 그 단어에 맞는 한국어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어를 잘 쓰는 능력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수한 소설가는 번역을 잘 할까? 소설가는 단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글을 쓰기 때문에 번역을 꼭 잘 한다고 볼 수 없다.

번역은 언어능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적 사유를 할 줄 알면서 폭넓은 상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의 독서습관이나 인문서가 팔리는 상황을 갖고 미뤄 짐작해볼 때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해마다 1천 명씩 선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선발이 되었다 해도 번역문만 있으면 뭣하나? 그것이 실제 상품(책)으로 출간되어 독자와 만날 수 없다면 아까운 세금만 낭비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출판사와 연계해 책을 펴낸다는 계약서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500만원은 크게 부족한 돈이다. 돈만 던져놓고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정책을 내놓고 인문학을 살리겠다니,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은 결국 학술번역의 가치를 폄하하고 홀대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전문번역가란 어떻게 키워질까? 2001년에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발표한 「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는데 한국출판은 여기에서 한발작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앞에서 내놓은 방안은 대학(교육기관)과 출판현장과 번역가가 삼위일체가 되는 시스템에서 해결할 수 있다. 

지금 좋은 번역이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실력 있는 번역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번역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번역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상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번역료는 10년 전에 비해 200자 원고지 한 장당 1천 원 정도 오른 것에 불과하다. 영어번역의 경우에도 대부분 장당 2,500-4,000원 수준인데 8,000-10,000원 정도가 되어도 그리 높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2,500원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1만5천원 정가의 책인 경우 1천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이런 출판을 기피한다.

또 베스트셀러가 되더라도 번역자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 있다. 출판사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지만 번역자에게는 처음 받은 번역료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한 번역자가 한 소설시리즈의 번역 인세로 수억 원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그 전에 몇 년간 매절 번역료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일을 하는 희생을 감수한 후에야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셋째, 전문편집자를 키워야 한다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해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심한 경우에는 200자 원고지 1장당 1천원의 번역료로 적당히 눙치기도 한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을 맡기고 그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게 되는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정도다. 일부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가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가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한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요즘에는 싼 번역료에 속도가 빠르고 깔끔하게 번역하는 번역전문회사들도 있다. 전문 ‘교열자’를 두어 거친 번역문도 깔끔한 문장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원문을 대조하며 일일이 교열하는 것이 아니어서 전혀 엉뚱한 문장으로 만들어버릴 확률도 높다. 편집자 또한 그런 문장은 기계적으로 책을 펴내는 경우가 많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 내지만, 그 밖의 경우 대부분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수많은 편집자는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는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주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때도 많다.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새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만약 번역자가 이런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몇 권만 성실하게 번역해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지 않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최근에는 ‘기획출판’이 강조되면서 기획 같은 ‘고상한’ 일은 내부에서 하고 ‘교정․교열 같은 하찮은 일은 아웃소싱으로 처리하는 일이 늘어나 전반적으로 텍스트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능력 있는 편집자를 키우자는 것이 공염불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그것은 우리가 꼭 걸아가야 하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넷째, 번역비평이 있어야 한다 
규칙의 본질은 비규칙적일 때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군가 ‘아니다’라고 호루라기를 불면 ‘이다’라는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간헐적으로 번역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개인 또는 단체가 있지만 이것이 이뤄지는 상시적인 저널이 있어야 한다.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 점검한 것은 사업단이 스스로 밝혔듯이 “좋은 번역을 가려내는 길잡이이자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2회성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저널을 통해 항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만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이다.

다섯째, 도서관 등 공적 수요부터 키워야 한다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은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번역서뿐만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천-1만 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다. 이것은 출판뿐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을 일삼지만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0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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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 2007-11-1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번역의 경우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우고 영영사전 등을 활용해 그 단어에 맞는 한국어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대개의 철학책들은 이 능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듯한데, 니체의 텍스트는 유독 이 능력이 요구되는 듯해서요.

로쟈 2007-11-17 23:33   좋아요 0 | URL
니체가 보다 '문학적'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반조님의 번역은 내년쯤 나오는 건가요?..

반조 2007-11-18 19:3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저는 몇년 뒤 본격적인 번역준비작업에 착수한 뒤, 한 10년 뒤부터 출간해볼까 계획중입니다. 지금은 틈나는대로 니체 책을 읽고 있답니다^^ 아직도 니체에 대해 모르는 면이 너무 많기도 하고요. 그리고 번역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적은 번역료, 성급한 번역, 니체에 대한 이해 부족"인 듯하여 그런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번역하려고요. 그러니까 니체에 너무 충성하는 꼴인데, 저로서는 딱히 다른 멋진 일도 없는 듯해서^^... 이거 말만 앞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7-11-18 20:54   좋아요 0 | URL
10년을 더 기다려야 되는군요! 좀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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