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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대학원신문에 번역과 관련하여 두 문학비평가의 '만담'이 실렸기에 옮겨놓는다(두 사람은 모두 지행네트워크의 멤버다). 첫머리에 '로쟈'란 이름도 나온다. 특별히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번역을 통한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라는 문제의식에는 전폭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09. 04. 19) 번역을 통한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

학문의 기반이 되는 번역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학문은 번역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다보니 번역과 관련된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번호에는 번역이 갖는 의의와 한국 번역물 출판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오창은(이하 오) : 최근에 번역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어요.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랑시에르 논문의 번역을 두고 인터넷 논객 로쟈가 문제제기를 한 거죠. 그런데 진태원씨가 좋은 선례로 남을만한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오역을 인정하고, 로쟈에게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독자에게는 사과를 했어요. 뿐만 아니라 정오표를 만들어서 인터넷에 뿌린 거예요. 물론 3쇄부터는 바로 잡겠다는 약속을 했고요.  

이명원(이하 이)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얼마 전에 김현의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를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는데, 그 책에서 김현은 김윤식의 <소설의 이론>이라는 지라르 책의 번역을 문제 삼고 있더군요. 일단 김윤식 교수가 지라르의 프랑스어 저작이 아닌, 영문판 저작을 참고로 번역했고 게다가 발췌번역을 해놓은 터라 아주 심각한 오역이 발생했다는 비판이었어요. 그러나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김현의 바슐라르 번역에 대해 동료교수인 불문과의 곽광수 교수가 비판한 것입니다. 김현의 번역 역시 오역 투성이라고 말이지요.  

오 : 번역과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죠.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 등이 오역 논의가 전개된 바 있고, 2004년에는 자크 데리다의 <불량배들>이, 2003년에는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 논쟁에 휩싸였고요.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혹은 <천의 고원>도 번역과 관련된 대표적인 논쟁 사례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이런 논쟁이 개별적 사례로 갑론을박하는 형태였고, 번역 문화 전체의 논의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 :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 상의 근본적인 문제―가령 번역불가능성의 문제―를 제외하고,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번역’작업의 힘든 과정이나 이를 연구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역과 같이 아주 심각한 문제가 구조적으로 양산되는 겁니다. 대학원생시절에 아르바이트 삼아 번역을 한 적이 있는데, 이런 번역자 취급 방식이 사실 더 큰 문제에요. 제가 <악기사전>을 번역했다니까요. 글쎄. 

오 : 하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책을 번역하면서 충분한 대우는 받으셨어요? 

이 : 천만에요. 역자도 딴 이름으로 나가고(아마 감수자였겠죠), 번역료 역시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책이 제대로 출간되었는지도 확인해 본 바가 없고요.  

오 : 그렇군요. 이명원 선생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문구의 <관촌수필>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군요. 1960~70년대 풍경인데, 조그만 쪽방에 앉은 두세 명의 번역자가 번역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사기행위예요.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을 윤문해서는 새로 번역한 것인양 장사를 해 먹는 거죠. 한국의 번역문화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출판시장으로부터 박대 받으며 성장해 온 것 같아요. 번역이 언어의 문제이고, 두 개의 언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심오한 지적 사유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어요. 출판사는 인부 부리듯이 번역자를 다루려고 하고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 : 언젠가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번역된 영미작품의 번역수준을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1950년대의 최초 번역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다 최초번역본을 토대로 베껴쓴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어요. 요는 출판학술계가 번역을 무슨 덤핑사업 취급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도대체 전문학자가 그 힘든 작업을 하면 뭐합니까. 소모되는 것은 시간뿐인데. 그런 점에서 보면 발터 벤야민 전집을 십수 년 동안 번역하고 있는 이화여대 최성만 교수는 그야말로 존경할 만한 분이죠. 

오 : 교수업적 평가나 임용에서도 번역은 전공논문, 단행본 저술, 학술활동과 창작 및 공연, 지적재산권 다음에 위치해 있는 실정이죠. 현실이 이렇다 보니 상업적 번역만 성행하고 의미 있는 번역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 전문학술서 및 고전에 대한 엄밀한 번역을 ‘박사학위’로 인정한다고 해요.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번역과 주석 및 해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 한국에서도 미국ㆍ일본 등과 같이 주목할만한 학술적 번역을 높게 평가하는 학술문화적 풍토가 조성돼야 해요. 그래서 한국 학문의 자생성이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 이러한 사실과 함께 ‘번역어’의 성립에 깃든 근본적인 어려움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habitus’같은 개념은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습속’ 정도로 할 수도 있지만, 그랬을 때 이 개념의 생성적인 의미를 포함시킬 수가 없죠. 네그리와 하트의 ‘multitude’의 경우도 지금은 일반적으로 ‘다중’이라고 사용하고 있지만, 이 역시 확정적인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오역의 문제에서 이런 개념의 근본적인 번역불가능성의 문제가 중요한 논점을 형성하는 게 아닐까요. 

오 : 한 연구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국 번역의 문제는 ‘정확성과 가독성’에만 치우쳐있다는 것이라며 번역의 창조성을 이야기하더라고요. 상투적인 번역을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번역어를 개발한다든지 닫힌 언어가 아닌 열린 언어를 통해 의미를 해방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요.   

이 : 사실 번역자들은 새로운 표현을 창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언어체계 바깥의 언어를 체계 안의 언어로 치환시키는 매우 고달픈 작업이지요. 그러면서도 원저작의 언어에 깃들어 있는 의미론적ㆍ뉘앙스적 퇴적물을 옮겨오는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저작을 번역해도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한국어 번역어들이 다 상이합니다. 가령 들뢰즈 번역을 둘러싼 차이들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죠. 그러니까 어떻게 표준번역어를 설정하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 : 그게 바로 근대학문 체계의 핵심인 ‘개념사’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한국적 개념의 창출이나, 한국 학문의 토대라는 것이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번역’이라는 화두를 통해서도 사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 학계는 전반적으로 원전ㆍ원어 중심주의가 무소불위의 권능을 행사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엄연히 번역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인용이 권장되고 있고 심지어 몇몇 교수ㆍ연구자들은 원서를 번역해 놓고도 학문적 공유를 위해 출간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적으로 소유한 채 자신의 학문적 권위를 시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번역의 가치보다 원전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사회는 후진 학문사회예요. 한국 학문의 종속적 풍토가 ‘번역의 가치 재설정’을 통해 극복되지 않는 한 관성화된 수입 학문의 유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 번역작업은 지식의 민주화와 대중화의 토대입니다. 종교혁명 당시 자국어 성경번역도 그런 성격을 갖고 있었죠. 학자들 역시 자신의 번역행위가 학문적 축적의 중요한 매개고리역할을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고 봅니다. 지식의 독점이 아니라, 그것을 접근하기 힘든 대중들에게 개방하는 일에 번역의 중심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오 :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번역에 대한 연구자들의 검증시스템도 중요한 것 같아요. 앞에서 이명원 선생께서 언급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가 그 좋은 예인 것 같아요. 영미문학연구회에서 이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러한 학계의 검증작업이 우리 번역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이 : ‘번역학’이나 ‘번역론’과 같은 학문적 검토도 필요합니다. 최근에 몇몇 대학에 ‘번역학’ 전공이 개설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동시에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전문번역자를 존중하는 사회적 상식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구요. 또 우리가 끝없이 외국저작의 번역에 의존하는 반면, 우리 저작의 해외번역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는 한계에 대한 자각도 드는군요. 

오 :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지요. 

이 : 그래야겠군요. 사실 요즘 같은 때는 서로의 한국어도 번역이 안 되는 듯한 소통불능의 시대라는 생각도 듭니다. 고생하셨어요. 

09. 04. 25.   

P.S. 대담 중에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한 번역과 주석 및 해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란 말이 나오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내가 알기에 스피박은 예이츠 시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이다(폴 드만이 지도교수였다). <그라마톨로지>로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은 건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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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 안의 불편함
뉴레프트리뷰 랑시에르 논문 정오표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에서 제기한 오역 문제에 대해 역자인 balmas님이 정오표를 작성해 올려주신 적이 있는데, 그게 기사화되었다. 이번 '오역 논란' 사례에서 역자가 보여준 태도가 '올바른 번역 문화의 확립'에 좋은 선례가 되리라는 것이 기자의 판단이다. 대놓고 불편함을 토로하여 '악역'을 맡긴 했는데,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보람이 없지는 않다. <뉴레프트리뷰>에 국한하더라도 앞으로 나올 2권부터는 보다 주의 깊게 교정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교수신문(09. 03. 09) 알라딘 블로그의 ‘오역 논란’이 유쾌한 이유 

마르고 닳도록 강조되는 번역의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오역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오역의 당사자로 주목된 역자들이 ‘나 몰라’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역자가 자신의 오역에 대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사과하고, 정오표를 올려 작은 화제가 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명 인터넷 논객인 로쟈의 알라딘 블로그에서 시작됐다. 지난달 20일 로쟈는 자신의 블로그에 얼마 전 출간된 『뉴레프트리뷰(페리 앤더슨 외 지음, 진태원 외 옮김, 도서출판 길)』의 번역을 문제 삼고 나섰다. 로쟈가 문제 삼은 논문은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인데,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가 번역한 논문이었다.  

진태원 연구교수는 ‘FTA반대Balmas’라는 알라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데리다, 알튀세르의 책도 번역한 연구자로 유명하다. 특히 평소 이런저런 지면을 통해 프랑스어 철학서의 오역에 대한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해, 번역비평에 대해서는 일군의 독자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그런데 그가 편집위원으로까지 있는 책에 번역한 논문이 형편없는 오역 투성이었다는 점을 로쟈가 하나하나 짚어낸 것이다.

로쟈는 'configuration'의 역어로 역자가 채택하고 있는 ‘공형상화’라는 단어가 한국어가 아니라는 지적에서부터 물꼬를 틀었다. 문맥상 그림 장식의 ‘주제’를 의미하는 ‘subject’를 주체로 옮긴 것도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라는 지적이다. 말라르메에 대한 구절에서 ‘unfolding of a fan’은 ‘선풍기의 회전’이 아니라, ‘부채 펼치기’라는 언급도 잇달았다. 

베테랑의 실수였나
여기까지 보면 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정도의 번역인데, 뭐 그리 호들갑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로쟈는 이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한다”면서 본격적으로 공격의 활시위를 당긴다. 우선 ‘The statue, in Hegel's view, is art not so much because...but rather because’라는 구절에 대해 역자가 엉뚱하게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예술이 아닌데...A 때문이 아니라, B 때문이다”로 오역했음을 지적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각상은 A라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예술이다”가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진 연구교수의 오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로쟈의 전언이다. “When art is no more than art, it vanishes”라는 문장을 “예술이 더 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로 황당하게 번역했다는 것이다. “요즘은 똑똑한 초등학생도 알 만한 관용구”인 ‘no more than’을 ‘단지, 고작’이 아니라 ‘더 이상 -가 아닐 때’라고 “직역(?)”했다는 지적이다. 이 경우 랑시에르가 강조한 고도의 역설, 곧 ‘예술은 단지 예술일 때 사라진다’를 동어반복으로 격하한 격이 된다.

“교환방식에 대한 이론적 설명”인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을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이라고 번역한 것도 엉뚱하긴 마찬가지라고 일침을 놓았다(물론 로쟈의 제안인 ‘이론적 설명’도 논란의 소지는 있다. 그래서인지 진태원 연구교수는 로쟈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재현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In the aesthetic regime of art nothing is 'unrepresentable'”을 “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 불가능'하다”고 정반대로 옮긴 부분은 “미스테리하다”고까지 말했다. 그 밖에 많은 오역을 지적하면서 로쟈는 “베테랑 역자가 실수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말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진태원 연구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영어 논문인데다가 랑시에르의 글이 간명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번역을 한 게 이런 불상사를 초래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독자들과 책의 다른 역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또 오역을 지적한 로쟈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예술이 더는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를 “예술이 단지 예술에 불과할 때 예술은 사라진다”로 정정하는 등 문제된 부분 중 8개의 문장에 대해서 정오표를 올렸다.

진 연구교수의 발 빠른 대응에는 두 사람이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도 대중과 소통에 민감하다는 점에 일차적으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초등학생’, ‘미스테리’등의 다소 과격한 용어를 써가며 신랄하게 전개된 오역 지적에 거의 실시간으로 수긍을 한 점은, 진 연구교수의 전향적인 자세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문제된 부분 가운데 8개 문장 바로잡아
대부분의 역자들이 체면이나 혹은 개인적 원한 또는 책에 대한 대중적인 평 등을 우려해 쉬쉬하며 오리발을 내미는 상황에서 솔직한 사과와 정정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설령 정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수정판을 낼 때, 은근슬쩍 정정돼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 연구교수의 태도는 올바른 번역 문화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점이 많다. 

한편 출판사 측은 오역 지적이 있고난 뒤인 3쇄부터는 오역된 부분을 수정할 것이며, 3쇄까지 가지 않는다면, 뉴레프트리뷰 2권을 낼 때, 별도로 1권의 오역에 대해서 사과와 정정을 할 것이라 밝혔다. 체면차리기에 바쁜 우리 풍토에 새로운 번역 문화 정착의 사례로 기대해봄직하다.(오주훈 기자) 

09. 03. 10. 

P.S. 기자도 지적했다시피 '초등학생’ ‘미스테리’등의 과격한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역자에게 죄송하게 생각한다('미스테리'는 내가 자주 쓰는 표현이긴 하다. '악의적' 표현은 아니다). 사실 내가 겨냥한 건,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 서두에 적었듯이, 번역 자체보다는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을 질타하는 출간의 변이었다. 번역상의 실수들이야 조용히 짚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협량한 지적 풍토" 운운은 너무 고압적이면서 오만하게 여겨졌다. 일부 신랄한 표현은 그에 대한 나대로의 '불편함'을 표출한 것이다.  

그리고, 기자가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한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번역 문제. 역자는 정오표에서 "교환방식에 대한 합리화'라고 옮겼는데, 누구라도 일감으론 그렇게 옮겼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rationalization'을 '합리화'로 옮겼다가 '이론적 설명'이 조금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이론적 설명'은 내가 궁리해낸 말이 아니라 영한사전에 등재된 설명어다(나는 매번 사전을 찾아본다).  

전체 문장은 이렇다. "The critique of culture can be seen as the epist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 내가 보기에 'the episte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과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는 둘다 'The critique of culture(문화비평)'의 (동격)보어다. 즉, 'rationalization'은 여기서 'epistemological face'와 대등한 말이다. 내가 좀더 과감했다면, 'rationalization'을 '인식론적 설명'으로 옮겼을 것이다. 물론 '합리화'라고 옮기는 게 무난하다. 하지만 '합리화'라는 우리말이 갖는 약간의 부정적 뉘앙스(가령 '잘못된 견해나 행동 따위를 그럴 듯한 이유를 대어 정당화하는 일'도 '합리화'이다) 때문에 좀 주저하다가 '이론적 설명'으로 대체한 것인데, 이것이 '논란의 소지'까지 되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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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생각
    from seoulrain's me2DAY 2009-03-11 08:48 
    "오역 논란의 한 가지 사례"
  2. 오늘의 오역계 잡동사니
    from 잠보니스틱스 2009-10-23 00:10 
    ★영화 역사상 가장 오역된 제목은 (대밋님)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오역이다? (즈망푸님) ★'가을의 전설'이 오역인가? (전쟁과 평화님) ★Traduttore, traditore - Legends of the Fall (ουτις님) ★[질문] 이 영화의 제목도 혹시 오역인가요? (anakin님) ★영화 역사상 가장 왜곡된 대사 (Zannah님) ★"내가 니 애비다."와 "내가- 네 아버지다." 의 차이 (슈르님) ★한국 스...
 
 
paul 2009-03-1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일까요, 오역 문제에 대한 의미있는 목소리들은 번역 작업에 있어서 또다른 검열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창작에 임한 작가가 그렇듯이 번역자도 지나치게 오역의 혐의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죠. 이 경우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전에 말씀하셨던 '책임'이나 '자유'의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는 사안이겠죠.^^
번역서를 즐겨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오역 지적의 '책임'있는 목소리에 대해 번역자들도 '책임'이 걸린 번역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로쟈 2009-03-11 23:29   좋아요 0 | URL
오역을 없앨 수는 없죠. 불가피한 면도 있구요. 다만, 불필요한 오역을 줄일 수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각자가 '책임'을 다하면요...

2009-03-11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1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가 학원에 다녀올 때까지 한두 시간 '재택'을 해야 할 상황이어서 무얼 할까 하다가, 지난주말에 미뤄놓은 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사실 오전에 네댓 시간을 원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15매를 쓰면서 그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는 게 좀 우울하긴 하다. 사전준비가 부족한 탓이다) 여가를 좀 가졌으면 싶지만 요즘 형편이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또 막바로 '생계'와 관련한 일을 하자니 스스로를 너무 혹사시키는 듯하여(?) '무보수 알바'을 하기로 한 것(서재일이 내겐 '무보수 알바'에 해당한다). 게다가 오늘은 무보수에다 '불편한 알바'로군...     

 

<뉴레프트 리뷰>(길, 2009)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게 두어 주 전이다. 나는 격월간인 이 잡지가 연간으로 번역된다는 게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서구 이론/담론의 한 수준을 보여주는 잡지(혹은 학술지)이기에 소개되는 것 자체는 환영한다. 그래서 바로 구입을 하고 가장 먼저 읽을 논문으로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테리 이글턴의 '자본주의와 형식'을 꼽고서 원문까지 구했다(랑시에르의 원문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참에 랑시에르의 미학, 혹은 '미학과 정치'를 정리해보자는 게 개인적인 계산이었다.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과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 그리고 작년 12월 방한 강연문의 하나인 '감성적/미학적 전복'이 정리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관심사는 '뉴레프트 리뷰'와는 별로 상관이 없고, 다만 랑시에르의 미학에 한정돼 있었던 것.  

랑시에르의 글을 읽으며 그런 관심에 걸맞는 '한정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면 좋았겠다. 한데, 막상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불편과 당혹감이다. 그 불편은 먼저 두 가지 출처를 갖는다. <뉴레프트 리뷰>의 출간을 소개하는 기사의 이런 대목: "출판사측은 “현재 국내에 있는 좌파적 성격의 잡지들은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을 반영할 뿐”이라며 “1년간의 준비 끝에 나오는 <뉴 레프트 리뷰>의 한국어판은 우리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고 밝혔다."(한국일보) 그리고,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옮긴이 서문'에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런 대목: "이런 의문들이 드는 것은 랑시에르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여러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글들이, 그리고 그 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들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결국 현실과 분리된 채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말장난 하는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생각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21쪽)  

물론 정확하게 똑같은 대상을 두고 평한 것은 아니지만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거명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 바디우 등인 걸 보면,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에서 보드리야르나 바디우, 랑시에르의 글도 읽을 수 있는 걸 보면 서구산 '고담준론'에 대한 두 가지 평가는 사뭇 대조된다. 그들의 이론/철학은 "한국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의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둘다 불편하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두 가지 평가가 모두 번역이란 매개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라면 어떻게 고급 수준의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이 나올 수가 있을까?(그러니까 낮은 담론 수준 운운은 누워서 침뱉기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말장난"이라도 우리에게 제대로 번역/소개된 적이 있을까?(사실 '메시지'야 어떻게 전달한다손 치더라도 '말장난'을 옮기는 건 매우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한다. 역자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랑시에르의 말장난을 옮기고 있는 것인지?)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를 읽기 시작한 건 몇 주 됐지만 처음 서너 쪽을 읽은 게 전부였고 다른 일들 때문에 미루다가 마저 읽은 게 지난 일요일쯤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청하, 1995)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랑시에르의 다른 글들에도 보인다. 그러니까 겹쳐 놓으면 겹치는 부분도 아주 적지는 않다. 따라서 하나의 글만 온전하게 해독할 수 있다면 대강의 요지는 파악한 것이 되며 다른 글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물론 그 '하나'를 이해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중반쯤 읽다가 나는 그것이 랑시에르 탓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이 글에서 'configuration'란 단어를 역자는 '공형상화'라고 옮기는데('con-figuration'으로 읽어서), 의미를 유추해볼 수는 있지만 '공형상화'는 한국어가 아니다. 그것이 차라리 '콘피겨레이션'이라고 음역해주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는지 의문이다(철학계에서는 '위버멘쉬'란 음역도 번역어로 쓰지 않는가). 혹은 그냥 '모양새'나 '형태'로 옮기는 건 무식한 일일까?  

번역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건 또 어떨까. "이마누엘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미감적 파악의 중요한 사례로 그림 장식을 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이 장식들은 어떤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하는 한에서 '자유미'다."(476쪽) 원문은 "It is no coincidence tht in Kant's Critique of Judgement significant examples of aesthetic apprehension were takedn from painted decors that were 'free beauty' in so far as they represented no subject, but simply 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139쪽)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 같은 번역은 직역이면서 전형적인 번역투인데, 나라면 "사교 공간을 쾌적하게 해주는" 정도로 옮기고 싶지만, 원문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subject'를 '주체'로 옮긴 건 의문이다. 물론 다의적인 단어여서 '주체'인지 '주제'인지는 매번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림 장식'과 관련되는 것이라 '주제'가 타당하지 않나 싶다. 다른 대목에서 'subject'를 '주제'라고 옮긴 곳도 있기 때문에 역자 나름대로 선택한 것일 텐데, 의견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다.  

그렇게 의견이 다른 대목이 더 있다. "시인은 표상적인 주제를 일반적인 형상의 디자인으로 대체하고 시를 무용술이나 선풍기의 회전과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477쪽) 원문은 "The poet wants to replace the representational subject-matter of poetry with the design of a general form, to make the poem like a choreography or the unfolding of a fan."(139-140쪽)  

인용문에서 '시인'은 '말라르메'를 가리킨다. 말라르메의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나 그의 시 가운데 '부채' 연작 같은 게 있었던 듯하다. '선풍기의 회전'(unfolding of a fan)이라고 옮긴 건 '부채 펼치기'를 뜻하는 게 아닐까?('선풍기의 회전 같은 시'는 얼른 연상이 안된다.) 그리고 '안무'란 뜻의 'choreography'는 '무용술'이라기보다는 어원적 의미 그대로 '무용 기록(법)'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말라르메는 시어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를 어떤 춤이나 동작의 기록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이 말라르메에 대한 나의 얕은 지식에 부합한다.      

이제 그런 얕은 지식을 가지고 조금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한다. '깊이'라기보다는 '본격적'이라고 해야겠다. 프랑스문학뿐만 아니라 사실 나의 철학적 지식도 교양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전문가적 지식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반적인 교양 수준의 사회적 제고와 확산이라고 생각하기에 소소한 교양이라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공유하고자 애를 쓴다. 가령 나는 <헤겔 미학>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헤겔 미학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양 수준에서 알고 있고, 그런 수준에서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예술이 아닌데, 그것은 이 조각상이 집합적 자유의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각상이, 집합적 삶과 그 조각상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이 거리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479쪽) 같은 문장을 읽으면 그게 맞는 말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조각상은 예술이 아니다"? 

미심쩍어 확인해본다. 원문은 이렇다. "The statue, in Hegel's view, is art not so much because it is the expression of a collective freedom, but rather because it figures the distance between hat collective life and the way it can express itself."(141쪽) "not so much because A but rather because B"구문으로 돼 있다. A라는 이유에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하다, 라는 뜻이겠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각상은 A라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예술이다." 물론 '...is art not...'이라는 연쇄를 '...is not art...'라고 잘못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번역문을 보통은 한번이라도 다시 확인해보지 않는지? 한국어판 편집자 서문은 "좋은 글들을 오역으로 뒤덮어 한탄만 나오게 만드는 문화 속에서 어려운 글들을 꼼꼼하게 손보아 가독성을 높여준 훌륭한 번역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란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오역은 '한탄'은 아니더라도 '한숨'은 나오게 한다. 원문과 대조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  

이 '한숨'은 '긴 한숨'이다. 이런 대목은 어떤가.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480쪽) 이 논문의 부제인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가 무슨 의미인지 가장 확실하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대목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또한 잘못 옮겨졌다. 원문은 "The statue is autonomous in so far as the will that produces it is heteronomous. When art is no more than art, it vanishes."(142쪽)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역자가 이 논문을 직접 옮긴 것이 맞는지(혹은 진지하게 옮긴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됐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아서다. 요즘은 똑똑한 초등학생도 알 만한 관용구인데, 'no more than'은 '단지, 고작(only)'이란 뜻이다. 이걸 '더이상 -가 아닐 때'라고 직역(?)함으로써 번역문은 "예술이 단지 예술에 불과할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랑시에르의 역설을 동어반복으로 바꿔놓았다. 역자나 교열자는 바로 앞문장의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이란 역설과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허무한' 동어반복이 과연 호응한다고 본 것일까?   

헤겔에서 벤야민으로 넘어가보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루이 아라공의 소설 <파리의 농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수잔 벅모스의 인용에 따르면 "나는 밤마다 침대에서 그 책을 읽었는데, 몇 자 읽기도 전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더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 <파사젠베르크>의 최초의 메모는 이때부터 씌어졌다."라고 벤야민은 적었다). 그와 관련된 대목이다. "물론 발자크의 진열장을 가장 탁월하게 변모시킨 것은 파리 오페라 거리에 있는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인데, 루이 아라공은 여기에서 독일 인어의 꿈을 인지하고 있다."(484쪽)   

'오페라 거리'는 '오페라 파사주(Passage de l'Opera)'를 옮긴 것이다. '오페라 아케이드'라고 옮길 수도 있겠다. 아라공이 <파리의 농부들>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나중에 위스망 대로를 만드느라고 다 철거됐다 한다(그러니 지금은 파리에 가봐도 구경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이 아케이드에서도 특히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old-fashioned umbrella-shop)가 자주 언급되는데, '발자크의 진열장'이 '오래된 골동품 진열장'이므로 'old-fashioned'는 '낡은 유형'보다는 '구식'이나 '골동품'이란 뜻으로 새기는 게 더 좋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산 상점(umbrella-shop)'.  

<미학 안의 불편함>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렇게 돼 있다: "바로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오페라 골목의 낡은 지팡이 가게를 신화적 풍경과 놀라운 시로 변형시킨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를 읽고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90쪽) 분명 지시대상이 같을 듯싶은데, 하나는 '우산 상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팡이 가게'다. 우산도 팔고 지팡이도 파는 가게인지, 아니면 불어 단어가 '우산'으로도, '지팡이'로도 번역되는 것인지 오역 여부를 떠나서 궁금하다. 'umbrella'야 우산이 맞지만, <파리의 농부>를 다룬 다른 글들에서도 '지팡이'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건 대체 뭔가 싶다.  

이어서 낭만주의 시학에서 시인의 역할에 대한 설명: "그리하여 시인은 단지 화석들을 캐내고 그것들이 지닌 시적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자연학자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이상적인 사물들의 신체 그 자체 속에 새겨져 있는 전언들을 간파하기 위해 사회의 어두운 밑바닥이나 무의식 속을 파고드는, 일종의 증상학자가 된다."(484쪽) '자연학자'는 'naturalist'를 옮긴 것으로 흔히는 '박물학자'를 가리킨다. 시인은 박물학자이자 고고학자이면서 동시에 증상학자가 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런데, '이상적인 사물들'은 뭔가? 이게 'ordinary things'를 옮긴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들'의 오타인 것. 번역이 굉장히 급하게 이루어졌고, 출간작업 또한 시일을 다투면서 진행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증상학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학은 사회로 하여금 그 자신의 비밀을 깨닫게 만드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으면서, 정치적 주장과 교의로 가득 찬 시끄러운 무대를 떠나 사회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수수께끼와 환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해석학의 틀을 짠다."(484-5쪽) 여기서도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는 'the intimate realities of everyday life'를 옮긴 것인데, '내면적인 실재'처럼 거창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냥 '일상생활의 친근한 현실' 정도의 뜻이 아닐까?    

조금 딱딱하더라도 원문에 충실하게 옮긴다는 것이 다른 번역본들에서 내가 받은 역자의 번역관인데, 기이하게도 이 랑시에르 번역에서는 부주의하거나 불충실한 대목들이 자주 나온다. "상품 물신숭배가 벤야민으로 하여금 파리 아케이드의 지리와 한가로운 구경꾼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485쪽)에서도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는 '보들레르 이미지의 구조(sthructure of Baudelaire's imagery)'를 옮긴 것이다. '이미지의 구조'를 '상상계의 구조'라고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짐작엔 아무래도 'imagery'를 'imaginary'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심증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더 굳어진다: "문화비평은 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으로, 예술의 기호들과 삶의 기호들의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485쪽) 원문은 "The critique of culture can be seen as the episte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145쪽) 놀랍게도 '교환방식에 대한 이론적 설명(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이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이라고 엉뚱하게 옮겨졌다. '탈주술적' 번역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착시'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근본적인 오역이라 할 만한 두 가지를 지적하고 마무리짓기로 한다(실수도 너무 자주 반복되면 필연처럼 보인다). 먼저 재현의 문제를 다룬 대목: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의 상실'은 관계짓는 힘의 상실이 아니라 그 형식들이 복수화된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 불가능'하다."(490-1쪽) 뒷문장의 원문은 "In the aesthetic regime of art nothing is 'unrepresentable'"(149쪽) 아마 역자도 이런 문장을 번역서에서 봤다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재현불가능한 것은 없다"라는 랑시에르의 핵심적인 주장을 역자는 정반대로 옮겨놓았다(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이 가장 나쁜 오역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재현의 가능/불가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현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랑시에르가 홀로코스트 재현 불가능론("홀로코스트는 재현 불가능하며, 예술이 아니라 증언만을 허락한다")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오역은 미스테리하다.  

그리고 끝으로,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랑시에르의 정식화: "미학적 정식이 처음부터 예술을 비예술과 연결하는 한에서, 그 정식은 예술의 삶을 두 개의 소실점, 곧 단순한 삶이 되는 예술이나 단순한 예술이 되는 삶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492쪽) 원문은 "To the extent that aesthetic formular ties art to non-art from the start, it sets up that life between two vanishing points: art becoming mere life or art becoming mere art."(150쪽)  

'삶이 되는 예술'/'예술이 되는 '은 'art becoming mere life'/'art becoming mere art'를 옮긴 것이고, 물론 '예술이 되는 삶'은 '예술이 되는 예술'의 오역이다. 쉽게 말하면 예술의 삶(life of art)은 '삶을 위한 예술'(타율성)과 '예술을 위한 예술'(자율성) 사이에서 진동한다는 것. 랑시에르의 표현으론 이렇다.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의 삶은 정확히 말하면 왕복 운동하는 것, 곧 타율성에 맞서 자율성을 실행하고, 자율성에 맞서 타율성을 실행하고,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한 가지 연결에 맞서 다른 연결방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메시지 전체는 궁극적으로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한 편의 논문을 갖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랑시에르의 사례를 보건대 한국어판 <뉴레프트 리뷰>를 일반 독자가 읽고 제대로 해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원문을 대조해서, 적어도 참조해서 읽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거나 오독할 수 있는 대목들이 적잖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로선 거기까지일 것이다. 조급한 번역과 부실한 교열/편집은 자랑할 게 못되지만 '한국적 현실'이다. 이것을 '우리의 협량한 출판 풍토' 탓이라고 하면 내가 오버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번역은 한 사회의 총체적 문화 역량과 관련된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 결코 높은 수준의 번역이 나오지 않는다. 사회적 보상도 낮고 대우도 부족한 형편에 언제나 '기대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을 들추며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09. 02. 21. 

P.S. 랑시에르 논문의 오역들을 지적했지만 그 다수는 단순한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정오표 등을 통해서라도 바로잡았으면 좋겠다(한데, 그런 부주의는 왜 대부분의 인문 번역서에 만연한 것일까?). 혹자는 번역비평에 대해 '식은 죽먹기'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번역작업에 비하면 번역비평의 수고는 약소하다(그래서 보상도 없을 뿐더러 별로 하는 이도 없는 것 아닌가?). 이건 '프로'의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나는 번역의 동업자가 아닌 한 독자로서 내가 지불한 책값이 정당한지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 확인의 방식이 언제나 '식은 죽먹기'다.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이다. '식은 죽'이되 남이 먹다 남긴 죽이니까. 이런 걸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양서를 읽고 정신을 살 찌우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며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유감스러운 건 한국어로 그런 양서를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것. '식은 죽'이라도 계속 먹어치우면 좀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미학 안의 불편함>의 경우 나는 앞뒤로 조금씩 읽고 더 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현학적으로 기술된 글을 완전히 체계와 문화가 다른 언어로 번역을 했으니 이 책을 읽고 단번에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나아가 무례하기까지 한 요구일 것이다."(9쪽)란 역자의 판단을 존중해서다. 그 요구가 독자의 것인지 역자의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나는 조심하는 차원에서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이 책은 올여름에 <미학과 그 불만(Aesthetics and Its Discontents)>이란 제목으로 영역본이 나올 예정인데, 아마도 가을쯤엔 '체계와 문화가 아주 다르진 않은 언어'로 읽을 수 있을 듯싶다(러시아어로는 마지막 장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환'만이 번역돼 있다). 그때까지는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이 조금 더 누그러지기를 기대해본다(그의 영화론이나 이미지론도 더 번역되면 좋겠고). 덧붙여, 시간이 되면 <뉴레프트 리뷰>의 다른 논문들에 대한 독후감도 나중에 적어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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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역 논란의 한 가지 사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0 14:50 
       교수신문(09. 03. 09) 알라딘 블로그의 ‘오역 논란’이 유쾌한 이유  마르고 닳도록 강조되는 번역의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오역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오역의 당사자로 주목된 역자들이 ‘나 몰라’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역자가 자신의 오역에 대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사과하고, 정오표를 올려 작은 화제가 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명 인터넷 논객인 로쟈의
 
 
기인 2009-02-2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흠.. 지난번부터 알아차린 것이지만, 로쟈님은 한국어 번역본 읽으실때 원문/내지는 같은 서구언어와 대조하면서 읽으시네요. 제 생각에도, 원본/같은 서구언어로만 읽는게 편하기는 한데, '한국어'로 결국 학문을 해야 되기 때문에, 번역본을 참조하면서 개념어들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로쟈님도 이 때문에 원문/서구언어본과 한국어 번역본을 대조해서 읽으시는 거 맞죠? ^^; ㅎㅎ

로쟈 2009-02-21 01:03   좋아요 0 | URL
그런 비밀을 눈치채시다니!^^; 원서로 보는 거야 혼자 보면 되지요. 번역본은 같이 읽을 수 있는 거니까, 관심을 갖고 고쳐도 보고 합니다. '한국어'에 매인 몸이어서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구요...

2009-02-2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2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과연 "식은 죽 먹기"일까요? 해당 언어와 문화, 그리고 문학비평과 번역론 등 전반에 걸친 확고한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인데요???

"no more than art" 에서 no more than 이 art 가 그 정도밖에 안 됨을 강조하는, 혹은 only 를 강조하는 말임을 모르고 한 - 부주의한 차원을 벗어난 - 번역이라면 문제는 문제로군요.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죠...?

로쟈 2009-02-23 21:36   좋아요 0 | URL
베테랑 번역자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나 믿기지 않는 오역들입니다...

람혼 2009-02-2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런 일이... 조금 충격적인데요. '사소한' 실수로 보이는 부분들이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라 그 '파급'이 좀 크게 느껴집니다. 아직 <뉴레프트리뷰>의 랑시에르 논문은 읽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렇게 많은 오역들이 있었군요. 논문 읽을 때 참조해야겠습니다. 아라공의 Paysan de Paris는 예전에 읽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에 관해서는 제 기억으로도 '지팡이(canne)'가 맞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랑시에르의 <미학 내의 불만(Malaise dans l'esthétique)> 원서에서도 이 부분은 "la boutique de cannes obsolète"(Galilée, 2004, p.71)로 되어 있는 걸 봐서도 '지팡이'가 맞을 듯합니다(영역자가 이를 '우산대(canne à parapluie)'로 파악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만...). <뉴레프트리뷰>에 다른 글을 번역한 한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로쟈님, 시간 나시면 제가 번역한 글에서도 오류가 있다면 바로 잡아주셨으면 하는 바람 전해봅니다.

로쟈 2009-02-23 21:34   좋아요 0 | URL
네, 좀 충격적이면서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오역이 원문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하고 명백한 것들인데(하지만 '치명적인' 것들이죠), 베테랑 역자가 실수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이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신현상학> 번역이다. 1998년에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고 쉬운 말로만 번역한 하세가와 히로시의 번역본이 나오자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사정이 달라진 건 또 아니다. 해서 "난해하기로 소문한 헤겔의 저서를 (...)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려하고 명쾌한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독자들에게 충격과 감격을 주었"다는 건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때문에 드는 생각은 <헤겔 사전>(도서출판b, 2009)이 그렇듯이 자체적인 역량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어본 <정신현상학>을 기다리기보다는 하세가와의 일역본을 중역하는 게 더 낫지/빠르지 않을까 싶다.   

일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하세가와의 솜씨를 감상해보면, 그는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명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현실은 아직 이런 사례와는 거리가 멀다. 번역비평에 관한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읽은 논문 중의 하나는 '비트겐슈타인 번역의 미학'(박정일)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이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서광사, 1997)을 번역한 바 있는 필자가 두 가지 종류로 번역돼 나온 <청갈색책> 번역에 대해 비교분석을 시도한 논문이었다. 그 두 종이란 진중권 번역의 <청갈색책>(그린비, 2006)과 이영철 번역의 <청색책. 갈색책>(책세상, 2006)을 말한다. 필자를 따라서 한 대목만 원문과 같이 비교해본다.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을 보고 "이제 일어나려나?"하고 혼잣말을 할 때처럼 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 274쪽) 

"예를 들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의 움직임들을, 어떤 사람이 침대에서 방향 전환하는 것을 내가 예를 들어 "그는 일어나려고 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바라보듯이 바라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가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 250쪽)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 also I don't look at my own movements as I might look at someone turning about in bed, e.g., saying to myself "Is he going to get up?"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But there is not one common difference between so-called voluntary acts and involuntary ones, viz,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 the 'act of volition'."   

먼저, 두 번역에 대한 비교평에서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voluntary acts' 'involuntary ones' 'act of volition' 등의 표현을 '의지적 행위'' '무의지적 행위' 의지 행위'(진중권)라고 옮긴 것이 '수의적 행위' '불수의적 행위' '의지의 작용'(이영철)이라고 옮긴 것에 비해 어색하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act'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킬 때 주로 '활동'이란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근거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see(보다)와 look at(바라보다)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는 데 진중권은 이를 모르거나 놓치고 있다는 것. 이어지는 다수의 사례를 통해서 필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영철본에 비해서 진중권본은 "번역 요건의 최소한의 정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번역자의 학문적 기반을 의심케 하다"고 혹평한다. 그렇지만 진중권본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반면교사로서는 유용하다는 평을 내린다(진중권본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읽는다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다는 증거다!).        

한데, 비트겐슈타인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로서 나의 초점은 좀 다른 데 있다. 대의를 파악하는 데 둘다 별 지장이 없다면 가독성 면에서는 진중권본이 좀 낫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다 지나친 직역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대체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란 첫 구절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나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놀람'이란 명사형도 우리말에서는 어색하지만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는 건 또 뭔가? 뭔가 심오해 보이는, 그래서 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정작 영어에서 그 표현이 그토록 심오하며 시적인 표현인 것인지?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고 옮기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 그냥 "이런 경우에는 놀랄 게 전혀 없다"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와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라는 두 문장에서도 차이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공통점이다.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를 '직역'한 것이긴 하나 '현존이 있다'나 '부재가 있다'는 표현은 한국어가 아니다(동어반복이거나 모순어법이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옮길 수는 없을까? "하지만 소위 수의적 행위와 불수의적 행위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작용'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 같은 문장도 자꾸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수용될 수 있다. 많은 번역투의 문장과 문체가 한국어화된 것처럼. 하지만 한국어의 특성에 맞게 가려쓰고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옮겨주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란 문제가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라면 나는 그쪽을 택하고 싶다. 어떤 쪽인가?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09.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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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은 국어를 잘해야 한다
    from Ellie's Professional Software Insight 2009-02-19 00:53 
    원글 쓰신분의 예는 헤겔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서적을 번역한 예여서 왠지 더 까다롭고 심오한 내용인 것 같지만 ^^ 이런 문제는 기술서적을 번역할 때도 발생한다. 번역할때 같이 공역하던 분들과 계속 토론했었던 것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너무나 장황하고 영어 표현의 특성상 우리나라말과 바로 매치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것을 원문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역할 것인가를 많이 논의했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출판사 측에서는 당연히..
  2.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from weekly님의 서재 2011-06-14 01:39 
    1. 나는 비트겐쉬타인의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중 진중권의 것을 샀다. 그 이유는, 1).초반 몇 문장을 읽어보니 이영철 번역본보다 잘 읽혔다. 2). 적당한 분량의 재미있는 해제가 달려 있었다. 3). 이영철 번역본의 표지가 만화책 표지처럼 조잡해 보였다. 2. 나는 철학책을 살 때, 직역을 위주로 했다느니 저자의 문체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했다느니 하는 역자의 말이 있으면 그 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 책은, 요컨대 가독성이 심하게
 
 
2009-02-16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09-02-1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라...이런 번역이 아직도 완전히 부재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군요^^
박정일씨는 미드를 보면 놀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부재가 존재한다'는 투의 영어식 표현이 미국 중산층 이상의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 미드 대사를, 영어의 명사위주 표현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voluntary의 번역인 '수의적隨意的'이란 표현은, 한문을 공부했던 저에게도 한자 표기가 없으면 알아볼 수 없는 낯선 표현인데요. 번역어의 선택을 보면서 이영철교수가 일본어판을 상당수 차용하지 않았나라는 의심과 함께,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의도적으로, 너무 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일본어역을 참조하거나 거의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경우, 의미는 대충 헤아려지지만 서양어 원본만 보고 번역에 임할 때는 떠올릴 수 없는 한자조어가 많이 등장하면 의심해 볼만 합니다.

로쟈 2009-02-16 15:06   좋아요 0 | URL
'voluntary'가 영한사전에 '수의적'이라고 나옵니다. 생리학 용어로. 영한사전의 모델이 또 영일사전일 테니까 열매님의 의혹도 자연스럽지요. '수의적 행동'이란 말을 의학쪽에서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법해서(의학용어도 일어에서 오잖아요) 놔두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명사형 표현을 직역하면 이상하긴 합니다.의사의 재빠른 도착이 그녀의 빠른 회복을 가져왔다...따위인데,의사가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이 빨랐다로 해야지요.물주구문이 특히 이런 해괴한 번역투 문장을 양산해 냅니다.

로쟈 2009-02-18 22:25   좋아요 0 | URL
수용이란 게, 어느 시점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이후엔 '자기화'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paul 2009-02-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번역문'이 양산되는 한 가지 이유가, 결국 번역의 '정확성'을 '직역'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의미를 쉽게 전달할 것인가'보다는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물론 번역의 정확성은 엄밀히 지켜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언어의 무게중심은 번역되는 문장이기 보다는 번역한 문장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번역이 단순하게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닌, 옮겨지는 말의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창조적 행위라고 보았을 때, 번역의 창조성과 가치는 그런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환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직역과 정확한 원뜻에 집착하는 것도 번역(변혁)의 불안에 대한 자기방어적 제스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9-02-18 22:26   좋아요 0 | URL
제 표현으론 '자신감의 문제'이고 '책임의 문제'인데, '충실성'이라는 이유로 대개는 회피하려고 하지요...

weekly 2011-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먼댓글을 썼다가 바로 지웠는데 시스템에 아직 반영이 되지 않았나 보네요...-.-)

먼댓글보다는 댓글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위에 비트겐쉬타인의 원문 인용 부분에 한정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rising of my arm"과 기지개 켜는 것은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rising of arm"이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는 책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 involuntary를 불수의적이라 번역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심장은 불수의적입니다. 우리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건 비트겐쉬타인의 논의 대상이 아니죠.

3. 로쟈님께서 "... 놀랄 게 전혀 없다"로 옮기신 부분은 그렇게 옮기시면 안됩니다. 비트겐쉬타인이 의도한 바는 진중권이 번역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관찰하는 태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나중에 다시 언급됩니다. 다시 말해 전혀 일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4. "... 차이가 있다"를 "... 다르다"로 번역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뒤에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쟈님식대로 하면 '공통의 다름'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이 생겨날지도 모르겠습니다.

5. 인용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이 있으면 의지적 행위가 되고 의지 작용이 없으면 무의지적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진중권 번역본은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반면 이영철 번역은 밋밋합니다. 저 원문의 번역만 놓고 보아서는 박정일이 주장하는 대로 이영철 번역은 "참으로 아름"다운 반면 진중권 번역은 "최소한의 정도"도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진중권이 원문의 맥락을 탁월하게 부각시켜 놓은 노고는 아무도 칭찬을 하지 않는군요. 번역에 있어 최고로 중요한 항목을 말입니다...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

번역비평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제목은 '번역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철학/이론서 번역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며 옮겨놓는 것은 발표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이다.  

얼마전 알라딘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란 제목의 페이퍼인데(작성자는 ‘빵가게 재습격’님이다), 프랑스 철학서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늘어놓았다. 소위 ‘고급’ 철학/이론서를 읽으며 한번쯤 ‘당해본’ 독자들이라면 공감할 법도 한 내용이어서 잠시 읽어보기로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도대체 프랑스 지식인이란 자기도취와 자폐적인 난잡함을 지껄이는 존재들에 불과한가? 얼마 전에 알렝 투렌의 <현대성 비판>을 읽어보다가, 짜증스러워서 책을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생각난 김에 집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책들을 몇 권 꺼내서 살펴보았는데, 도대체가 그 ‘난잡함’ 이 그 ‘난잡함’ 수준이었다.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설사하듯이 지껄여대는 것. 이건 바로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이하 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인용자)
 
원서 자체의 난해성과 번역의 난해성을 구별하고 있지 않아서(물론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려운 책이어서 어렵게 옮겨진 경우처럼) “그 난잡함이 그 난잡함 수준”이라는 평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진 않지만 강조한 대목처럼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은 생소하지 않다. 만약 그것이 정말 저자의 화법이고 포지션이라면 번역(자)은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까? 일단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빵가게 재습격’님의 불평을 조금 더 들어보자.

“세상에는 학자들이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서가 있고, 그 이론서의 서술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서라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남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정상이다. 가령 ‘초기 독일 미학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매개하여 감각중추의 세계를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일종의 구체적인 논리를 가공해 내려는 기획이다.’(<미학이론>) 같은 서술을 보자. 여기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것’, ‘특수한 것’, ‘감각중추의 세계’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 기획’ 같은 것인데, 독일 미학의 전통에서 보편과 특수의 의미, 미적인 것을 규명하려는 기획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대략 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지식과 서술의 전문성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따라갈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 서술 꼬락서니를 보라.” 



나는 아도르노의 책이나 독일 미학 서적을 프랑스 철학서들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못되어 유독 프랑스 철학서만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사실 난해성의 원조라면 칸트나 헤겔을 따라갈 수 있을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건 프랑스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그래도 끝내 못 따라가는 건 독일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낳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있겠다. 가령 “독일의 전통적인 변기는 변기 구멍이 앞에 있어서 우리 눈앞에 드러난 똥의 냄새로 병이 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는 구멍이 뒤에 있어서 물을 내리면 똥은 빨리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변기는 앞의 두 형태의 중간 형태로 변기에 가득 차 있는 물에 똥이 떠 있지만 자세히 조사할 수는 없다.”고 할 때의 세 가지 다른 변기 스타일처럼 말이다(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의 지리적 삼항을 ‘독일의 반성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로 대비시켰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소설 <날기가 두렵다(Fear of Flying)>에서 에리카 종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화장실은 제3제국의 공포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그와 같은 화장실을 만든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걸 “그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라고 비틀어서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비틀기가 억지스럽다면,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치켜세워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꼬락서니’는 한번 들여다보는 게 좋겠다.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 그들은,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아래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들, 항상적인 조절, 오랫동안의 지속을 거쳐 정상에 달했다가 전복되는 일정한 경향의 현상들,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들,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 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의 ‘이론적’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의 서두 부분이다(내가 갖고 있는 번역서는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이후 2000년에 신판이 나왔지만 인용문을 보건대 번역은 수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딱 40년 전 책이니 액면으로도 시차(時差)를 무시할 수 없는 책이다. 어느 정도의 낯설음은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번역문에 대한, 아니 푸코의 ‘꼬락서니’에 대한 ‘빵가게 습격’님의 불만은 이렇다.  

“‘역사가’는 누구인가? E. H. 카의 역사가인가? 아니면 -주석이 말하는 대로- 아날학파인가? 또한 그들의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안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은 도대체 무슨 운동이며 ‘사건들의 두께’는 어떤 형태의 두께인가? 이런 개념들을 역사학 이론서에서 찾아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도 불명료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 역사가들이 과거를 재단하고 일정한 이론 혹은 패러다임 속에서 인과적으로 나열하는 작업을 암시하려는 것 같은데, 서술이 불투명해서 이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역사서술을 이 따위로 신비스럽고 암시적으로 나타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인용된 대목은 역자의 주석대로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아날학파의 관심과 역사서술을 푸코가 정리하고 있는 부분이다(그러니까 ‘역사서술’이 아니라 ‘역사서술에 대한 서술’, 곧 메타-역사서술이다). ‘아날학파’에 대해서 검색해보거나 관련서를 약간만 들추어보아도 전체적인 요지는 따라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열식 문장의 생경함을 전적으로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보통의 철학/이론서 번역이 그렇듯이 원서의 난해함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역의 난해함이 더 보태진다(한국어 독자들은 이중의 난해함과 대면해야 한다!).  

철학/이론서 번역을 대할 때 ‘전문독자’가 아니라 그저 ‘평균보다 조금 나은 독자’로서 나는 그런 난해함과 접할 경우, 영역본이나 (간혹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게 되는데, <지식의 고고학> 영역본(1972)은 서두의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를 이렇게 옮겼다. “For many years now historians have preferred to turn their attention to long periods,(...)” 계속 이어지는 영역문은 인용문 전체가 한 문장이다. 짐작엔 불어 원문도 그러할 듯싶은데, 한국어본은 이를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이왕 나누는 거라면 세 문장으로 나누는 건 무리였을까?). ‘long periods’를 ‘장기적인 기간’이라 옮긴 것이 (비록 중복이긴 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장기간의 역사’나 ‘장기지속’ 혹은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라고 ‘의역’할 수는 없었을까?

인용문의 후반부는 어떤가.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they were trying to reveal] the great silent, motionless bases that traditional history has covered with a thick layer of events.” 영역본만을 옮기면 “그들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 거대한 무언의, 부동의 토대를 드러내고자 했다.” 정도이겠다. 여기서 먼저 대비되는 것은 ‘전통적인 이야기들’과 ‘전통적인 역사서술’이다. 이건 짐작에 불어의 ‘histoire’가 갖는 중의성에 기인하는 듯싶다(크리스테바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말로는 <사랑의 역사>라고 옮겨질 때처럼). 하지만 그런 중의성을 갖고 있지 않은 영어에서는 역자가 ‘story(tale)’나 ‘history’ 가운데 문맥에 맞게 선택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이야기들’보다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을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과 대비시키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역시나 불어처럼 ‘이스토리야(istorija)’란 말이 중의적인 러시아어본(2004)에서는 ‘전통적인 서사(내러티브)들’이라고 옮겼다. 한데 문제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이란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영역본에서 “전통적인 역사가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이라고 옮긴 대목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더라도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어지럽고 두꺼운 사건들 아래 숨겨진” 정도이다. 그렇게 사건들의 더미에 덮인/숨겨진 ‘주춧돌’(초석)을 드러낸 것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아니라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 아닌가? 바로 그런 맥락에서 국역본의 번역은 명쾌하지 않다. “신비스럽고 암시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역’이다(불어본 원서로 치자면 바로 첫 문장인데, 한국어본의 오역은 초판이 나온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교정되지 않았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recouvrir'를 옮긴 것인데, 영어의 'cover'와 같은 뜻이다. 역자는 'recover'와 혼동한 것일까?).  



사실 아쉬운 대목은 연이어 나온다(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고고학>의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아날의 역사학자들이 동원하고 있는 자료들을 푸코는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풍토와 그의 진동에 관한 연구”이다. 영어로는 “the study of climate and its long-term changes”이다. “기후와 그 장기적인 변화에 관한 연구”라고 옮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어에서도 그런데, ‘기후’라는 단어가 불어에서는 ‘풍토’를 뜻하기도 하는 듯하다(찾아보니 불어의 'climat'를 옮긴 것이고. 기후와 풍토를 모두 뜻할 수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풍토가 어떻게 ‘진동’할 수 있는가?(역자는 ‘지진’과 같은 것을 연상한 것일까?) 러시아어본에 쓰인 단어는 ‘kolebanie’인데 ‘진동’이란 뜻도 갖지만 이런 경우에는 ‘변동’이라고 옮겨준다. 그래서 “기후와 그 변동에 관한 연구”라고 옮길 수 있다. 아무려나 “풍토와 그의 진동”즘 되면 문제는 불어나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소재가 되는 것은 대부분 따로 있지 않다.  

‘빵가게 재습격’님은 이밖에도 몇 가지 사례를 더 인용한 뒤에 평균적인 독자가 가질 법한 실감을 토로한다. “아니, 프랑스인들이란 이런 난해하고, 암시적이며, 정신병자의 헛소리 같은 문구를 암송하며 즐기는 족속들이란 말인가? 고작 100년 전에 쥘 베른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리박고 읽어댔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이런 자폐적인 소리를 지껄이며 ‘68혁명’을 언급하고,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와 파괴성을 공격하고, 탈근대로 가자는 주장을 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내 눈에는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자기도취적인 만족감에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책을 읽으며, 의미를 고구하고 의의를 찾아내는 일이 훌륭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한없이 시간이 남아 머릿속의 개념을 탐구하면서 무한정 탐닉하는 종교인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보인다. (...) 그러니까, 이렇게 결론 내리는 수밖에 없다. 프랑스인. 심오함인지 자폐적인 난잡함인지 신나게 니네끼리만 지절대라. 그리고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  

물론 이러한 불평에는 어떤 전도 혹은 전치가 있다. 거론된 책들은 프랑스인이 저자이지만 한국인이 번역해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낸 책이니만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설사 비난을 하더라도 “이런 거 번역해서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프랑스인들이 자기네 책을 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한). 즉 문제의 출처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 ‘번역가게’는 ‘우리가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오역 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 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지적할/수정할 것(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야 번역서가 나와도 읽지 않고, 읽어도 문제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지적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선가는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 ‘번역’의 현황과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많은 진단과 제언이 제시돼 왔다. 하지만 ‘번역의 문제’를 ‘번역가게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면 아직도 덜 주목받고 있는 성싶은 문제가 있다. 누구를 위한 번역이고, 번역비평인가 하는 점. 번역비평은 그 성격상 번역에 대한 이견과 오역에 대한 지적/교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작업의 시시비비를 번역자와 비평자간의 의견차 문제로 환원하게 되면 자칫 감정적인 문제로 전화될 소지가 있다(실상 많은 경우에 번역비평은 감정적인 대응만을 유발하곤 한다. 심지어는 법적인 대응까지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자나 비평자나 일차적으론 책의 독자이며, 독자로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것, 그것도 더 정확하게, 더 잘 읽는 것이다. 즉, 독자는 번역자-독자와 비평자-독자의 제3항이자 공통항이다. 번역비평은 바로 그 ‘독자’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 인문서의 사례를 들고 싶다. 먼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프로타고라스는 사람들에게 정치 기술을 가르치고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자기의 목적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는데, 언뜻 생각하기에 애국심에 불타는 우파라면 이런 목적을 소중히 여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플라톤이 이상 국가에서는 잘 살아가는 좋은 시민들, 민주적인 시민들 속에 박혀 있는 파괴분자일 뿐이다.”(190-1쪽)

‘급진적 인문학’(원제는 ‘Radical Humanism’)이란 장에서 저자는 줄곧 프로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대비시키면서 프로타고라스를 ‘인문학의 스승’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플라톤은 시인들을 ‘파괴분자’로 낙인을 찍어 추방한 귀족주의자(엘리트주의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문단이라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좀 어색하다. ‘민주적인 시민들’과 ‘파괴분자(프로타고라스)’를 대립시키고 있어서다. 원문을 찾아보니 “Protagoras is a subversive among the good citizens of Plato's idea of a republic, a democrat."(110쪽)이다.  

번역문은 ‘좋은 시민들(good citizens)’과 ‘민주적인 시민들(a democrat)’을 동일시했지만, ‘민주적인 시민들’과 ‘a democrat’는 일단 수(數)가 다르기에 문법적으로 그렇게 보기 어렵다. 문법적으로 보자면 이 ‘민주주의자(a democrat)’는 앞에 나오는 ‘파괴 분자(a subversive)’를 다시 받은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지만, 프로타고라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주의 법전 편찬자’이다. 그는 ‘민주적인 시민들’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민주주의자’였다. 여기서 번역비평자의 자리는 독자를 위한 ‘교정자’의 그것이다. 모두가 서로 고쳐가면서 같이 읽는 것, 그것이 ‘희망의 인문학’이 아닐까. 



얼 쇼리스와 시카고대학의 동창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레오 스트라우스는 불룸 교수를 우파로 끌어들였고, 이 세상은 나를 좌파로 인도했다.”)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범양사, 1989)에서도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이 공평하겠다. “사회과학 분야에 고전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해석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실이 사회 과학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시킨다. 유명한 사학자로서 대학원 과정의 사회과학 방법론 개론을 가르치던 교수가 투키디데스에 대해 내가 천진하게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라는 질문을 던지자 화를 내며 멸시조로 반응하던 일이 기억난다.”(396-7쪽)  

엘리트 고전주의자인 앨런 블룸이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란 말을 한 것인지 미심쩍어서 찾아보니 이 대목도 잘못 번역되었다. 두 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 remember the professor who taught the introductory graduate courses in social science methodology, a famous historian, responding scornfully and angrily to a question I naively put to him about Thucydides with "Thucydides was a fool!"”(펭귄판, 346쪽) 역자는 ‘유명한 사학자’의 반응(responding)에 걸리는 "Thucydides was a fool!"을 불룸의 순진한 질문(question)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단순한 착오이지만 결과는 좀 중하다. 발언자를 바꾸어놓은 셈이니까. ‘독자를 위한 번역비평’의 취지는 (전문가가 아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하여(우리는 모두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일반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품앗이를 동원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비평에 관한 ‘대중지성’의 역할이다...   

09.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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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2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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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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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만두하군 2009-02-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이매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희망의 인문학> 개정판을 준비중입니다.
지적해주신 부분 꼭 반영하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봐야겠습니다.
늘 관심 가져주셔서 로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로쟈 2009-02-14 15:08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계속 업그레이드 되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많이 공유되면 좋겠네요...

2009-02-14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프로타고라스나 투키디데스가 나오는 문장에서는 역시 콤마의 용법을 잘 모르니까 오역이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영어의 구두점은 우리나라 구두점과 다르기 때문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데 학교현장에선 다루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로쟈 2009-02-14 15:06   좋아요 0 | URL
문법을 간과해서 빚어지는 실수도 있고, 문맥을 잘못 이해해서(혹은 무시해서) 벌어지는 착오도 있는 듯해요. 실수야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그게 교정으로 걸러지지 않는 것도 문제죠...

2009-02-1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2-1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가 더 큰가요? 작년에 복이 많아(?) 지인들과 '순수이성비판'과 '정신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요 어렵다 어렵다 하긴 했지만 프랑스 철학책을 대했을때처럼 황당한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빵가게'님의 글이 좀 공감이 갑니다. 번역이 더 큰 문제라면 정말 곤란하네요. 불어를 할 줄 몰라서..그렇다고 영어로 철학책 읽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고 제대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데..-.-;;

로쟈 2009-02-15 00:44   좋아요 0 | URL
<정신현상학>을 독파할 정도면 못 읽을 책은 없으실 듯싶은데요. 안 읽힌다면 십중팔구 번역이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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