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고전'으로는 운문 번역을 표방한 새로운 셰익스피어 전집을 고른다. 최종철 교수의 번역으로 2019년까지 10권짜리로 나온다고 하고, 이번에 1차분 두 권이 출간됐다. 소개는 이렇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하여 꾸준히 그의 극작품을 연구해 온 최종철 교수(연세대 영문과)의 번역으로 선보이는 국내 최초 '운문 번역' 셰익스피어 전집. 셰익스피어 희곡들은 대사의 절반 이상이 운문 형식이며, 그 비율이 80퍼센트 이상인 희곡도 전체 38편 가운데 22편이나 된다. 따라서 이런 운문 형식의 대사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느냐 하는 문제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깊이와 감동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와 곧바로 연결된다. 1993년 처음으로 <맥베스>를 운문 번역한 데 이어 지난 20여 년간 셰익스피어 번역에 매진해 온 최종철 교수는 셰익스피어의 '약강 오보격 무운시'라는 형식을 우리 시의 기본 운율인 삼사조에 적용하여 운문 형식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원문의 뜻을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성공 여부는 역자나 출판사보다는 독자가 판단할 문제이지만, 여하튼 여러 번역본이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번역 시도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더불어, 셰익스피어 일인 번역은 김재남, 신정옥, 김정환에 이은 시도로 의미가 있다. 현재 김재남본은 절판된 상태에서 몇몇 작품만 다시 나와 있고, 김정환본은 아직 완간되지 않은 상태다. 신정옥본은 너무 풀어서 옮긴 대목이 많아서 '운문성'을 감지하기 어렵다. 운문성을 살린 번역으로는 김정환 시인본과 경합이 되겠다. 한국일보의 기사를 더 참고해본다.

최 교수는 시 형식으로 쓴 연극 대사를 산문으로 바꿀 경우 시의 함축성과 상징성 및 긴장감 그리고 음악성이 거의 사라진다면서 "시적 효과와 음악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정확성을 확보하는 우리말 번역"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다.(...) 역자는 "두 언어가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영어의 음악과 리듬을 우리말로 꼭 그대로 재생할 수는 없다"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오보'에 해당하는 단어들의 자모 숫자와 우리말 12~18자에 들어가는 자모 숫자의 평균치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멕베스' 등 셰익스피어의 극작품 중 정수라 불리는 비극이 담길 4, 5권도 내달 출간된다.

 

4대 비극을 포함하여 2차분으로 나올 책들도 사실은 이미 번역본이 나와 있는 상태이므로 전집판으로 판갈이만 되는 게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 최종철본은 "시 형식으로 쓴 연극 대사"에서 '시 형식'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 보니 '연극 대사'라는 점은 간혹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모든 걸 충족시킬 만한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면, 각각을 만족시킨 번역본이 따로 나오는 것도 현실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막바지에 이른 김정환본도 조만간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14. 04. 27.

 

 

P.S.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이번 전집과 함께 가장 최근에 나온 건 펭귄클래식판의 <베니스의 상인>이다. 주요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나와 있고 김정환, 신정옥 전집판으로 있기에 비교해서 읽어볼 만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도 강의에서 종종 다루곤 하는데(<햄릿>과 <맥베스>, <템페스트>,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주로 다뤘다), <오셀로>, <리어왕>과 함께 <베니스의 상인>도 기회가 되면 다루려고 한다. 그러자면 작품 연구를 먼저 해야하는데, 복수의 번역본만큼 요긴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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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책 홍보만 되는 듯싶어서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지만 새움판 <이방인>에 대해서 한마디만 보탠다. 어제 경향신문 기자와 전화 인터뷰한 것이 기사화됐기 때문이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4152119195&code=960205). 기사 내 사진은 오마이뉴스에서 가져왔다.

 

 

카뮈의 <이방인> 번역을 둘러싸고 번역자의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다. 익명으로 원문 번역자를 과도하게 비판해 노이즈 마케팅이란 지적을 받기도 했던 <이방인>(새움출판사·사진)의 번역자 이정서(익명)가 책을 출간한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프랑스어 원문의 오독과 오역을 비판해온 이 대표가 정작 자신은 영어판 <이방인>을 갖고 번역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대식 대표는 15일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글을 올려 “이정서와 새움출판사 대표 이대식이 동일인인 것이 맞다”고 인정했다. 그는 “필명을 써서 번역서를 낸 일을 두고 언론이 ‘도덕적 해이’라고 하는 이유를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들다”며 “같은 출판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출판사의 번역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우려스러워서였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필명을 사용한 이유는)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이 책 <이방인>이 제대로 번역되었는지 아닌지 전문가들이 살펴달라는 취지였다”며 “우리 사회 문화계에 음으로 양으로 큰일을 해주신 김화영 교수님을 욕보인 결과가 되었고, 교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던 많은 후학들의 가슴에도 상처를 드리게 되었다. 그 점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썼다. ‘김화영의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했던 기존 태도와는 달리 “김화영 교수님의 <이방인> 번역이 없었다면 정말이지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을 찾아내면서까지 재번역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번역자가 실명을 밝혔지만 도덕성 논란은 더 커지는 분위기다. 이 대표가 번역 과정에서 프랑스어판이 아니라 영어판을 번역했다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새움출판사 블로그 연재와 이를 묶은 <이방인> ‘역자노트’에서 프랑스어 원문을 제시하며 김화영 교수의 오독과 오역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복수의 출판계 관계자들은 이날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이 대표가 영어판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번역을 한 다음 새움출판사 편집자들이 프랑스어판과 대조하는 작업을 했다”고 주장했다. 서평가 이현우씨는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사기 번역”이라며 “언제까지 비밀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편집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은 이 대표도 인정한 부분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8월부터 6개월 동안 이정서라는 필명으로 김화영 교수의 <이방인> 번역을 비판하는 연재글(경향신문 1월25일자 17면 보도)을 올렸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후 문학계에서는 출판사의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이 출판사가 기존 번역들을 “왜곡과 난삽”이라고 매도하는 출간 기념 고사를 지낸 사실까지 알려지며 논란이 증폭됐다. 급기야 서평가 이현우씨가 13일 밤 자신의 블로그에 이 대표의 정체를 폭로하며 논란은 정점에 달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책 판매를 위해 원로학자를 공격한 것”이라며 “상식에서 벗어난 마케팅”이라고 말했다.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알라딘 고전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2주 연속 2위를 지키고 있다.(경향신문)

다른 건 차치하고, 번역자를 자임한 이정서는 자신이 영어판도 참조했지만 그것도 일개 '번역판'에 불과하기에 그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영어판의 오류들까지 들먹였었다. 영어판을 같이 껴서 판매한 '더클래식'판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일갈하면서 영어판 중역의 문제를 이렇게 꼬집었다(http://saeumbook.tistory.com/429).

그건 원본 번역이랄 수 없습니다. 그건 아마 역자가 자신이 번역에 정확성을 기했다는 걸 내세우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한 것일 수도 있고, 불어를 모르는 독자들이 더 많을 테니 영어 원본이라도 참고하라는 좋은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긴 내가 번역을 잘 몰랐을 때는 그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는데 실제 번역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되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불어 소설은 불어 원본을, 독어 소설은 독어 원본을 실어줘야 그나마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 다만 불어 번역을 말하면서 그에 실린 영어 문장을 가져다 설명하려다 보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자신은 영어본을 대본으로 번역했지만 편집자들이 불어본과 대조했기 때문에 '원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낭패'에서 벗어낫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이휘영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덧붙이자면, 일전에 <이방인> 마지막 대목에서 사이렌 소리와 뱃고동 소리, 두 가지로 번역된 걸 제시하자(http://blog.aladin.co.kr/mramor/6966576) 이렇게 반응했다.

김화영의 이 오역의 시발은 어디서부터일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로쟈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휘영 교수의 번역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김화영 교수 역시 자신의 스승인 이휘영 교수의 번역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나는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거기까지 가면, 정말이지 이 나라의 도제 시스템이 만들어낸 학문 체계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밝히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로쟈라는 젊은 후학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던,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이휘영 교수의 <이방인>을 끝내 보게 하고 말았다.

이런 반응에서 나는 역자가 얼마나 자기도취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방인>의 최초 번역자인 이휘영본이 문제의 시발점이라면 애초에 김화영본이 아니라 이휘영본을 문제삼았어야 논리에 맞다. 도제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기에 김화영본도 이휘영본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게 하고 싶은 말 아닌가(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나는 이정서라는 선학을 둔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전 페이퍼에서 내가 인용한 대로 사이렌 대목은 이휘영본과 김화영본이 다르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이휘영본, 문예출판사)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김화영본, 민음사)

이정서의 근거 없는 예단에 어긋나게도 이 대목에서 김화영은 스승의 번역을 무시하고 감히 반역을 시도하고 있다. 내 식으로 분류하면 '사이렌파'와 '뱃고동파'가 그렇게 갈라졌던 것이다. 이정서가 이 대목의 '뱃고동 소리'를 '사이렌'으로 다시 번역한 건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맨 처음 번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거기에 얹어 '밤의 경계'라는 어색한 말로 얼버무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문제 제기에 답하면서 이정서는 엉뚱하게도 거기에 이어지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김화영)는 문장에 대한 시비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내가 그 대목을 빼먹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서문(역자의 말)에 무얼 적어놓았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걸까? 그가 8-9쪽에서 문제삼은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두 문장이다. 반복이지만,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정서의 주장에 따르면 이 대목이 김화영 오역의 화룡점정이자 피날레다. 애초에 내가 이 대목을 문제삼은 건 그 때문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결정적인 오역이라고 서문에서부터 표나게 윽박지르고 있는 이 대목이 사실은 오역이 아니라는 것. 마무리에서 이렇게 적었다.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더러 불어와 전공인 러시아어판을 비교해보라고 충고까지 했지만(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이런 거 비교한다고 '세계적인 대학자'의 반열에 오르거나 하지 않는다. 매우 단순한 일이라서), 그 페이퍼는 이미 러시아어판 외에 몇 개 국어판을 살펴본 다음에 쓴 것이다. 러시아어판에서도 '뱃고동 소리'(пароходные гудки)라고 옮기고 있어서 더 확신을 갖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옮긴 영어판이나 러시아어판 모두 엉터리이며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사례일까? 하긴 <이방인>을 유일무이하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자임하는 역자에게 이런 식의 방증이 통할지는 의문이지만, 다른 이들이 그런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하하거나 모욕할 권리는 없다...

 

 

 

단순한 역자이기를 넘어서 야심찬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하니까 이 정도 '스캔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캔들은 언제나 매출에 도움이 되므로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독자도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는다. 이번 번역에 잔뜩 고무돼 <마담 보바리>까지 손봐주려는 듯한데, 이번 일로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건투를 빈다! <이방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간의 허접한 엉터리 번역본들을 '싹쓸이'해줄 명번역을 기대한다...

 

14.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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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움판 <이방인> 번역으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역자나 출판사가 바라는 바였는지 모르겠지만(이 번역은 현재 알라딘의 고전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2위를 다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좀 유감스럽다. 새움판의 역자는 김화영본의 오역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 자신의 번역은 오역에서 면제된 듯한 (위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무슨 '번역 무오류설'의 신자라도 되는가?), 모든 번역은 오류(오역)에 열려 있다(역설적이지만 원작보다 나은 번역본이 나오기도 하는 건 이런 개방성 때문이다). 자기 번역에 대한 자부와 독선은 별개의 문제다.

 

 

 

오역에 대한 논란과 함께 익명 비판이 갖는 문제도 따져볼 문제다.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이방인’ 번역 논란에 뒷북을 치면서 이렇게 적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481.html).  

새움판 <이방인> 번역본은 ‘이정서’라는 필명 뒤에 번역자의 정체를 감추고 있다. 그가 역시 같은 필명으로 얼마 전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라는 소설을 낸 것 이외에 다른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계급장 떼고 붙어 보자’는 식의 도전 정신으로 이해되지만, 어쩐지 찜찜하다. 비판 대상은 벌거벗겨 광장에 내다놓고 비판의 주체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꼴이 공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국문학자 이명원이 원로 학자 김윤식의 표절 사실을 들춰냈다가 학교 사회에서 쫓겨난 일을 소재로 삼았다. 이명원은 어디까지나 제 이름을 걸고 원로를 비판했다. ‘이정서’ 역시 신분을 드러내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불필요한 익명 처리가 ‘노이즈마케팅’ 혐의를 자초하는 건 아닐까.

'다른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했지만 약간의 정보는 주어져 있다. <이방인>의 옮긴이 소개에 보면 "대학 시절 여러 문학상을 받고, 학보에 소설을 연재할 만큼 열정적인 문청이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글쓰기를 접고 회사를 경영했다"고 돼 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이방인>의 오역 문제를 발견하고 뛰어들었다는 것. 그러면서 <이방인>과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새움, 2014)를 거의 동시에 출간하는데, 김윤식 교수의 표절 문제를 다룬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십수 년 전 일을 소재로 한 것이라 지금에야 출간된다는 게 다소 의문이었다(이제는 물론 눈치챌 수 있다. 김화영에 대한 이정서의 오역 시비를 김윤식에 대한 이명원의 표절 시비 연장선상에서 정당화하려는 프레임이었던 것. '권위에 대한 약자의 의로운 도전'으로 동일시하려 했던 것이다).

 

 

한데, 책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아무 언급이 없지만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개정판'이다(출판사 홈피에서는 이를 밝히고 있다). 2001년에 같은 제목의 책이 나왔었기 때문이다. 차이라면 2001년판에서는 '김지윤 교수'라고 가명으로 썼다가 이번에는 '김윤식 교수'라고 실명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 '이정서'의 해명은 이렇다.

이 소설에는 실명과 허구의 이름이 동시에 쓰였습니다. 소설에 실명을 등장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나, 언론에 이미 발표된 이름들은 그것을 숨기는 것이 오히려 더 불필요한 상상을 초래할 수 있을 것 같아, 경우에 따라서는 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라면 2001년판의 저자는 '이환'으로 표기돼 있다는 점. "2000년 단편소설 <케네디를 찢다>(비평과전망 제2호)로 작품 발표 시작. 장편소설 <너를 부르마>가 있다. 현재 DESIGN NAMU를 운영하고 있다"가 당시 소개된 약력이다(<비평과 전망>이란 잡지도 새움에서 펴내던 것이다).

 

절판됐지만 <너를 부르마>(새움, 2000)는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보다 조금 앞서 나온 소설이다. 이환=이정서와 새움과의 긴밀한 관계가 눈에 띄는데, <이방인> 번역이 출판사 홈피에 파격적으로 연재됐던 것도 고려하면 이정서는 출판사 대표와 아주 막역한 사이이거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추정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새움출판사 대표와 편집부 직원들이 합작해서 쓴 <출판24시>(새움, 2013)의 첫 대목은 이렇다(여담으로 적자면 이 책은 작년에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이다).

이정서 수비니겨 출판사 대표는 어제 신입사원이 치르고 간 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험지는 곧 출간될 원고에 일부러 오자와 비문을 만들어 넣어 출제해둔 것인데, 응시자는 생각보다 문장을 매만지는 솜씨가 괜찮았다.(9쪽)

<이방인> 역자의 이름으로도 쓰인 '이정서'는 새움출판사의 거의 '간판' 같은 이름인 듯싶다. 이미 트위터상에 떠 있으므로(https://twitter.com/socoopbooks/status/455288254867054592) 에둘러 말하지 않도록 한다. 출판계에서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방인>의 역자 이정서는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다(그는 서울시립대 국문과 출신으로 이명원 평론가의 선배다). 아마도 본인이 밝히길 꺼려 하기에 (이미 알고 있을 법한) 기자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새움출판사 홈피에는 한겨레 고나무 기자의 인터뷰와 기사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역자의 글이 올라와 있는데(http://saeumbook.tistory.com/430) 모순적이게도 모두가 엉터리인 다른 <이방인> 번역에 대해 자신의 번역본이 완벽하게 옳은 번역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불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불어는 한마디도 못한다고 천연스레 적어놓고 있다(불어 원전만 보았지 다른 건 참고하지 않았다는 사람의 말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실제 번역자가 따로 있어서 이정서는 '편집자' 역할만 했거나 아니면 역자가 주장하듯 카뮈와 접신을 했거나...  

 

 

 

개인적으로 새움출판사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랬다면, 다시 나온 이명원의 <타는 혀>와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를 구입하지 않았을 테고, <이방인> 번역서와 함께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도 주문하지 않았을 것이다(출판사에서는 <이방인>을 내가 알라딘에서 구입한 다음주에 보내왔다). 하지만 이번 논란을 보면서 그들의 가면 놀이가 불쾌하고 위험하게 여겨진다. '노이즈마케팅'도 정도껏 하는 게 좋다. 알라딘의 닉네임을 빗대자면 그러다 '외롭고웃긴출판사' 된다. 오랜 경구대로 일부의 사람을 영원히 속이거나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14.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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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도 그렇지만 최근에 나온 화제의 번역서는 <이방인>(새움, 2014) 재번역본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공격적인 카피가 눈길을 끄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김화영 번역의 <이방인>을 주된 타겟으로 삼고 있는 '교정 번역본'이다. 책의 절반 정도가 이 교정과정을 담은 '역자 노트'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김화영판은 민음사판과 책세상판 두 종으로 나와 있으며 근소한 차이가 있다).

 

 

몇달 전인가 출판사 카페에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 번역이 연재되고 있는 걸 알았고 이후에 경향신문에서 번역에 대한 논란이 기사화된 걸 읽기도 했다. 번역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한겨레에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연재하고 있기도 하므로 나 역시 새 번역 과정에 흥미가 있었지만 일단은 책으로 나오면 판단해볼 생각이었다(아무래도 온라인의 문제제기는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다가 출간이 예고돼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본명이 아닌 '이정서'라는 필명으로 출간하겠다고 했다).

 

지지난주에 책을 구해서 일단은 맨앞에 실린 '역자의 말'을 읽었다. 이미 김화영 번역의 몇몇 문제들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하기도 해서 이 책이 한 추천인의 말대로 "프랑스어판 정본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리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용의 준거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좀 유보하게 됐다. 소설의 맨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한 문장의 해석 때문이다. 역자가 이 대목을 '역자의 말'에서 다루고 있는데, 문제 삼고 있는 대목의 김화영 번역은 이렇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민음사판, 135쪽)

특히 문제가 된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는 문장이다. 불어 원문은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이다. 이에 대해 이정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여기서 김화영이 다시 이런 기본적인 단어를 오해한 것은 다음 문장, '한 세계로의 출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 말은, 이제 날이 밝으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뫼르소가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이 세계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런 판단에서 이정서는 문제의 대목을 이렇게 다시 옮겼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새움판)

내가 갖고 있는 불어 실력은 빈약해서 sirène이란 단어가 어떤 뉘앙스의 의미들을 갖는지, 단수와 복수의 차이는 없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데 이정서의 말처럼 그렇게 단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화영이 '한 세계로의 출발'이라는 말과의 조응을 고려하여 '사이렌 소리'를 '뱃고동 소리'로 옮긴 것에 견주면 그냥 '사이렌'이라고 한 것은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는 말과의 연결고리를 과소평가했다는 인상을 준다. 한밤의 경계라면 12시를 가리키는가? 감옥에선 12시에 그런 사이렌이 울리는지도 확인해볼 문제이지만, 한밤중에 울리는(게다가 울부짖는!)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어째서 '세계로의 출발'과 이어지는지 불분명하다. 그 새로운 세계가 뫼르소가 죽은 다음의 세계를 가리킨다면, 더 적절한 건 한밤의 사이렌이 아니라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새벽 6시의 기상 사이렌 같은 것이다(군대에서처럼 감옥에서도 기상 사이렌이 울린다고 하면). 그리고 limite란 단어도 '경계'라는 뜻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끝'이나 '가장자리' 아닌가?

 

 

 

다른 번역본들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해 찾아봤다. <이방인>의 번역본도 꽤 여러 종 갖고 있는 편인데 다 찾을 수는 없고 눈에 띄는 몇 권만 책장에서 빼왔다(시공사에서 나온 최수철본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주요 번역본을 망라하고 있는 듯한데, 먼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이휘영본(문예출판사)은 이렇게 옮겼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문예출판사판)

가장 먼저 이루어진 번역본이라 김화영본도 참고한 번역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를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한국어 '사이렌'에서는 '뱃고동 소리'를 떠올리기 어렵다. 뫼르소가 아무리 선박회사 직원이라 하더라도) 김화영은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고 고쳐 옮겼던 것. 또 다른 번역으로 김예령본(열린책들)도 '사이렌파'에 속한다.

그 순간, 밤의 경계선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세상을 향해 출발을 고하고 있었다.(열린책들판)

반면에 또다른 카뮈 전공자인 이기언은 <이인>(문학동네판)에서 이렇게 옮겼다(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이방인>이란 제목을 <이인>으로 옮긴 건 역자나 출판사의 패착이며, '二人'과 '異人', 두 가지를 뜻하는 의미에서 <이인>으로 고쳤다는 해명도 설득력 빈곤이다).

그 순간,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 고동소리들이 울려퍼졌다. 고동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해져버린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문학동네판)

'밤의 끝'이나 '밤의 경계'로 옮겨진 문구는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라고 풀어서 옮겼다. 그리고 이기언은 sirènes가 복수형인 걸 고려해서 '고동소리들'이라고 옮겼다. 부두에서 출항하는 배가 연거푸 내는 소리다(내가 아는 상식으론 군대나 감옥에서 나오는 사이렌 소리는 길게 한번으로 그칠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이기언본은 김화영본과 함께 '뱃고동파'로 분류될 수 있겠다(최수철본은 어디에 속하는지 미확인이다).

 

 

영역본들은 어떨까. 역자도 불분명하기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역본도 같이 묶인 베스트트랜스본(더클래식판)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는데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였다.(더클래식판)

이것은 영역본 "Then, just on the edge of daybreak, I heard a steamer's siren."에 대응하는 것이다(이 영역본에 따르면 '막 동틀무렵' 뱃고동소리를 들은 게 된다). 펭귄에서 나온 모던클래식판에서는 "At that point, on the verge of daybreak, there was a scream of sirens. They were announcing a departure to a world towards which I would now be forever indifferent."라고 옮긴 대목이다. 영역본들은 la limite de la nuit를 '새벽' 혹은 '동틀녘'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밤이 시작되려는 그때'라거나 '한밤의 경계선'과는 해석이 많이 다르다. 사실 limite는 시간적 의미뿐 아니라 공간적 의미도 갖는 단어다(아니 공간적 의미가 더 우선적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la limite de la nuit '어둠의 저 끝'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밤의 어둠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는 것으로.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4. 04. 06.

 

 

 

P.S. 새움판 <이방인> 때문에 촉발된 오역 논쟁에 대해선 한겨레에서 정리기사를 실었다. 영어판, 일어판과도 대조해놓았는데, 전문을 참고해볼 만하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347.html).

이정서씨의 <이방인>도 숱한 번역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씨가 좀더 주목받는 이유는 ‘내 번역이 낫다’는 번역 논쟁에 그치지 않고 ‘권위자 김화영 교수의 번역은 엉터리다’라며 일종의 ‘문학권력 논쟁’으로 나아간 데 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25년을 속아 온 번역의 비밀, 이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움출판사의 마케팅 띠지 문구다. 이씨가 오역의 주체로 지목한 인물은 김화영(73)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다.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카뮈 대표작을 모두 번역해 전집을 낸 한국의 대표적인 프랑스 문학자·번역가다. 여러 권의 산문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씨의 익명 논쟁 방식도 논란이다. 이씨는 본명과 과거 문학가로서의 경력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름과 권위가 아니라 문장을 보자는 취지라고 이유를 밝혔다. 정혜용씨는 “창작 비평은 작품을 얼마나 깊이 읽는지를 다루는데 번역 비평은 어떤 번역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걸 먼저 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에겐 늘 자기를 옹호하고 항변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정서씨가) 이름도 밝히지 않고 김 교수를 비판하는 것이 정당한 번역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한겨레>가 전자우편으로 이씨에게 재차 학벌 등을 제외하고 번역가나 작가로서의 배경을 추가 설명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씨는 적절치 않다며 거절했다.

 

정혜용씨는 “이씨의 논쟁은 ‘번역도 문학’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알린 점에서 재밌는 현상”이라고 긍정적 측면을 짚었다. 번역가들의 노력은 창작에 버금간다. 번역이 지식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 ‘인권’ ‘사회’ ‘국회’ 등은 모두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이 발명한 번역어였다. 그 번역어로 한국인은 사고하고 말한다. 프랑스어 번역문학계에서 이번 논쟁이 건설적인 번역 논쟁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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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63호)의 특집은 '번역을 바라보는 8가지 시선'이다. 청탁을 받아 쓴 특집의 '여는 글'을 옮겨놓는다.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과 <작가란 무엇인가>(다른, 2014)에 실린 포크너의 인터뷰를 글거리로 삼았다.

 

 

기획회의(14, 03. 05) 왜 번역이 중요한가

 

다시, 번역을 말한다. 왜인가. 물론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특집의 계기가 된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도 원제는 ‘왜 번역이 중요한가’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남녀라면 읽고 공부할 번역물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영어권 독자에게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문학이나 인문사회분야로 한정하면 번역서의 비중이 절반을 넘어선다. 체감으로는 3분의 2는 돼 보인다. 번역물이 빠진 출판이나 독서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이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은 공기가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만큼이나 중언부언이다. 그럼에도 다시 중언부언하는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인식의 공유와 확산이기 때문이다.


번역이론이나 번역비평서, 그리고 번역예찬서까지도 등장했지만 실제 이런 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만약에 번역서가 없다면’이란 가정이 실감나지 않아서일까. 내친김에 책장에서 번역서를 잠시 빼내보자. 몇 권이나 남아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보면 좀 실감이 날지 모른다. 표준적인 사례는 아니겠지만 시험 삼아 책장 한 칸에서 번역서가 몇 권이나 꽂혀 있는지 세 보았다. 영어와 러시아어 책을 뺀 40권 가운데 번역서가 32권, 국내서가 8권이다. 무려 80%가 번역서인 셈. 짐작컨대 어지간한 독서가라면 이 수치가 결코 50% 이하로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우리의 독서 현실이고 조건이다.


“번역은 보편적이고 계몽된 문명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이고 현저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위치에 걸맞은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로스만은 당연히 영어권 특히 미국의 상황을 우려하는데, 우리와는 고민의 방향이 좀 다르다. 일단 번역서의 수가 현저하게 적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 쓰이고 있는 현실 때문이겠지만, 미국에서 번역서의 수는 서유럽 선진국 및 중남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처참할 정도로 적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여기서 그의 비교 대상은 문학작품의 번역인데, 세계문학전집이 여러 곳에서 출간되고 있는 우리는 사정이 조금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세계문학이라고는 해도 일부 언어권(서구와 일본)에 과도하게 편중된 상황은 여전히 개선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경우도 다른 언어권의 문학 번역이 처참할 정도로 적은 건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여와 편중은 어떤 문제를 낳는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영어 번역자로도 유명한 그로스만은 윌리엄 포크너와 마르케스 간의 ‘연속적인 관계’를 예로 든다. 마르케스는 젊은 시절 포크너의 소설이라면 없어서 못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마르케스에게만 그런 건 아니다. 포크너는 20세기 중반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영어권 작가였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바르가스 요사도 포크너에게 진 빚이 크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너 자신이 세르반테스의 열혈 독자였다는 점이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포크너는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매년 읽는 것처럼 자신은 <돈키호테>를 매년 읽는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그가 읽은 건 영어 번역본인데, 그의 만연체 문장이 세르반테스의 영향이라면 중남미 작가들이 포크너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우연히 아니겠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가 포크너에게 영향을 주고 포크너는 다시 마르케스에게 영향을 준 것만큼 마르케스는 영어권의 현대 작가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니 모리슨과 살만 루슈디, 돈 드릴로 등의 경우가 그런데, 마르케스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들의 문학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게 그로스만의 판단이다. 이것이 언어 간의 ‘생산적 교환’이며 이 교환은 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중국의 포크너’로 불리는 모옌의 경우도 고려하면 그 생산적 교환의 범위는 더 확장된다. 문제는 우리다. 노벨문학상에 욕심을 내고 ‘세계문학’에 진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한 ‘생산적 교환’의 생산적인 사례를 우리는 얼마나 떠올릴 수 있을까(베케트 계보로 묶을 수 있는 이인성, 정영문, 한유주 등의 작가를 떠올려보지만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포크너를 예로 들자면 우리는 아직 한국어판 포크너 전집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헤밍웨이의 경우도 대표적인 소설들만 묶은 선집이 출간돼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서 그보다 훨씬 적은 독자를 갖고 있는 포크너는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직후에 몇 권의 작품이 더 출간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가 쓴 작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대표작 <소리와 분노>나 <압살롬, 압살롬>의 새 번역본이 나온 게 한두 해밖에 되지 않았다.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한국소설을 기대한다는 게 아직은 무망할 수밖에 없다.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100권 돌파를 기념하여 작년에 나온 <한국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에는 포크너의 <곰>에 대한 독후감도 실렸는데, 필자는 2009년에 등단해 작년에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펴낸 손보미 작가다. 포크너가 40대 중반에 쓴 이 작품에 대해 “나도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저렇게 정직하게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도 너무 큰 소망인 것 같아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그 대신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적었다. 하지만  포크너가 네 번째 장편소설 <소리와 분노>를 쓴 건 작가보다 더 젊은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세르반테스와 발자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경쟁했던 포크너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예술가는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충고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의 허영심을 갖고 있지요. 옛 작가를 존경하더라도, 그는 그 작가보다 더 잘 쓰기를 바라지요.” 번역은 바로 이런 작가와, 이런 태도와 만나게 해준다. 한국문학은 ‘한국어로 쓴 문학’라고 정의하는 식의 빈곤한 인식으로는 세계문학과 만날 수 없다. 여전히 한국문학만을, 새로 조합하자면 ‘국내문학’만을 비평의 거리로 삼는, 그래서 번역문학은 들러리 정도로 간주하는 관행도 세계문학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문제는 문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나 헤겔의 <대논리학>도 새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읽을 수 없는 게 우리의 독서 현실이다. 왜 번역이 중요한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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