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가 중국고대사상을 다룬 책 몇 권에서 법가에 관한 대목들을 읽으며 같이 들춰본 책은 고명섭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이다. 전작인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을 완독했었지만 <담론의 발견>에까지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건 한겨레의 출판면을 담당하고 있는 저자의 기사 대부분을 이미 지면에서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책으로 통독하는 건 별개의 독서이긴 하지만). '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란 부제대로 책은 150종에 묵직한 책들에 대한 독후감으로 빼곡하다. 여유만 있다면 일종의 '독서 매뉴얼'로 서가에 꽂아둠 직하다(적어도 150종의 책들에 대해서 아는 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론 '노이라트의 배'를 화두로 한 머리말이 인상적이어서 복사까지 했다(그래야 이렇게 옮겨적을 게 아닌가!). 20세기 초반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노이라트는 20세기 역사의 풍랑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이런 명제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5쪽)

한데 어디서 많이 읽어본 듯한 문장 아닌가? 내 기억은 아주 오래전 <성문종합영어> 같은 참고서의 독해 지문에서 읽은 듯하다고 말해주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검색해보니 영어로는 이런 말이다.

"We are like sailors who on the open sea must reconstruct their ship but are never able to start afresh from the bottom. Where a beam is taken away a new one must at once be put there, and for this the rest of the ship is used as support. In this way, by using the old beams and driftwood the ship can be shaped entirely anew, but only by gradual reconstruction."

위키피디아에 인용돼 있는데, 노이라트의 이 말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자신의 책 <말과 대상>에서 이 비유를 인용한 미국 분석철학의 거두 콰인이라고 한다(찾아보니 <논리적 관점에서>를 비롯해 국내에 소개된 콰인 관련서들을 다 소장했던 듯하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말과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고명섭에 따르면 "정치적 진보주의자였던 만큼이나 철학적 실증주의자였던 노이라트는 줄곧 세계를 투명하고 확실하게 해석하게 해줄 인식적 토대를 찾았지만, 끝내 그 단단한 지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노이라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토대 없는 인식론'이 자연스러우며 또한 정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노이라트의 배'에 상응하는 것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아니겠는가. 리처드 로티의 표현을 빌면, '잘 잃어버린 세계'이겠고. 때문에 '노이라트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는 독서의 여정에 대해서 크게 유감스러워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되,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기 때문이다(새로운 비유로 '플로어 없는 댄스'도 덧붙여두자!).

'노이라트'와 함께 이 페이퍼의 또 다른 빌미가 된 건 '들뢰즈'이다. <담론의 발견>에는 들뢰즈와 관련한 책들만 하더라도 꽤 여러 종이 포함돼 있다(다수 포함돼 있는 철학서들 가운데서도 단연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제가 들뢰즈의 생일이었다고도 해서 무슨 페이퍼라도 하나 적어야 하나 싶었는데, 책에서 사소한 '수다'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책에 실린 많은 사진 자료들은 대부분 편집자들이 찾아서 넣었을 법한데, 가령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에는 저자인 하트의 사진과 함께 특이하게도 (영어본이 아니라) 이탈리아어본의 표지가 실렸다(두 남녀의 댄스 사진은 그 표지로 사용된 것이다). 영어본 표지는 아래와 같으니까 단연 보기에 더 좋은 건 이탈리아어본이긴 하다.  

한데, 프랑스 현대 지성사를 다룬 카트린 클레망의 <악마의 창녀>(새물결, 2000)를 다룬 장에는 다소 엉뚱한 표지 사진이 실려 있어 흥미롭다(클레망의 책은 크리스테바와의 대담 <여성과 성스러움>외 몇 권이 더 소개돼 있다). "<앙티 오이디푸스>는 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적 이론서였다."란 클레망의 발언을 보충해주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는 19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 이론서다. 이 책의 영문판 표지."란 설명과 함께 들어간 사진은 영어판 <앙티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유진 홀랜드의 '입문서'인 것. 홀랜드의 이 책은 엉뚱하게도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이란 제목으로 번역됐었다('들루즈와 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정신분열분석입문'란 부제가 붙어 있는 '가장 조야한 번역서'의 하나였다).

 

 

 

 

사실 '들뢰즈 읽기'를 위해 어제 잠시 뒤적인 책은 얼마전에 나온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8)이다. 작년말에 나온 책의 출간년도를 '2008'로 표기하는 건 지난주에 1쇄의 몇몇 사항에 교정이 가해진 2쇄가 나왔기 때문이다(이 책을 구입하려는 독자라면 몇 쇄인가를 확인하시길). 하지만 2쇄에도 '옥에 티'는 남았는데, 그건 뒷표지의 추천사이다.

"들뢰즈와 들뢰즈/가타리의 공동 작업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이 책을 추천한 이가 '엘리자베스 그로스(<불안한 신체> 저자)'라고 표기돼 있는데, 짐작엔 '엘리자베스 그로츠'이고 그녀의 책 'Volatile Bodie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Grosz'을 '그로스'로 읽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로츠' 대신에 '그로스'라고 표기됨으로써 어쨌든 국내에 이미 소개돼 있는 그로츠의 책 <뫼비우스 띠로서 몸>(여이연, 2001)과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정보'가 돼 버렸다('뫼비우스 띠로서 몸'이라고 해놓으니 제목이 좀 엉뚱하긴 하지만).

'가장 명료하고 독창적인 들뢰즈 입문서!'라고 적힌 콜브룩의 책을 추천하고 있는 또 다른 전문가는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의 저자 폴 패튼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브룩은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들(차이, 재현, 욕망, 감응)에서 다양한 영역의 구체적인 문제들로 힘들이지 않고 옮겨간다. 우리를 비판적 사유의 핵심으로 이끄는 책." 해서 말하건대, (가장 독창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명료한 입문서'로서 콜브룩의 책을 추천할 만하다. 먼저 나온 그녀의 책 <질 들뢰즈>(태학사, 2004)와 함께(벌써 읽은 지가 꽤 됐군!).

흥미로운 건 <들뢰즈와 정치>와 <질 들뢰즈>를 우리말로 옮긴 역자가 동양철학 전공자라는 것. 활발하게 전공 관련 연구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백민정씨가 그인데, 오늘 도서관에서 조금 훑어본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태학사, 2005)의 저자이기도 하다. 공부는 그렇게 '가로지르며' 하는 것이다...

08. 01.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콰인의 책 <말과 대상(Word and Object)>의 불역본 제목은 <말과 사물>이다. 복수형으로 하면 딱 푸코의 <말과 사물>과 제목이 똑같다. 푸코의 책이 올해 새로 번역돼 나온다고 하는데 콰인의 책도 같이 소개되면 좋겠다(그리고 공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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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1-21 19:28   좋아요 0 | URL
박사학위논문을 묶은 <정약용의 철학>도 낸 백민정씨의 부군이 강신주씨라고 하더군요^^. 부부가 한동안 들뢰즈를 통해 동양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로지르'게 되는것도 다 속사연이 있나봅니다.

로쟈 2008-01-21 19:25   좋아요 0 | URL
최강의 커플이로군요.^^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을 다룬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12887)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역사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이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전통을 지배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이었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은 현재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단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철학은 이성이 본질적인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철학이 역사와 좀더 능동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23쪽)

 

 

 

 

그리하여 보수적인 성향의 칸트조차도 "과거의 권위를 비롯한 모든 권위에 맞서 개인들에게 자기 독립심을 부여하는 혁명적 정신을 찬양했다. 칸트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자기 확신이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했는데, 왜냐하면 이성만이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칸트와 계몽철학자들의 인식은 아직 철저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단지 인간 종에 속함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갖게 되는 하나의 정신적 능력일 따름이며, 이성의 힘은 역사의 우발적 사건들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역사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What if?)'라는 역사에 대한 가정법, 혹은 '대체역사'는 아마도 '역사 이후의 이성' 혹은 '역사 바깥의 이성'에 가장 잘 상응하는 사례일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연쇄에서 오직 한 가지 변수만을 분리해내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대체역사의 전제는 역사를 마치 물리학에서의 사고 실험 대상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은 그러한 가정/대체의 불가능성과 상관적인 게 아닐까. 그것은 '역사 바깥의 이성'으로부터 '역사 속의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칸트 이후 단지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 헤겔은 이성 그 자체가 역사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와 철학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최후의 일보를 내디뎠다. 헤겔에게 이성은 모든 인간이 구비하게 되거나 또는 자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추상적인 정신적 능력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파생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생각하는 능력이 시간과 문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된다면, 역사에 대한 연구만이 우리의 본성과 세계속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 그 자체는 역사-의존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철학을 제외하면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23-4쪽) 즉, '역사적 인간'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라 조건 자체이다.  

역사와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바로잡게 된다면 자유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만약 이성이 역사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합리적 행위자가 자신을 자율적 단위로 경험할 여지가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이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응이나 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헤겔을 따랐던 사람들의 반응은, 그것이 허구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허구적인 생각'은 'illusory conception'의 번역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 입장은 표면 아래에 있는 심층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으며 또한 개인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하는지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택은 개인들이 모든 종류의 자원들, 즉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심리적, 종교적, 기술적 자원들에 전급할 수 있는가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그 시대의 지배적 힘에 종속되게 만든다."(24-5쪽)

이에 따른 결론: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한다. 외부의 힘과의 영구적인 절충을 통해 개인의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깨달을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따라서 자유는 우리가 이러한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정도에 의해서 평가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힘이 우리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9.11의 의미에 대한 공적 토론에 기여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있다."

08. 01. 12.

P.S.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빼놓았었는데, 보라도리의 서론 '테러리즘과 계몽주의의 유산'은 잘 씌어진 글이다. 하버마스와 데리다 철학의 '입문'으로서 간략하면서도 요긴하다. 해서 몇 차례 '브리핑'을 시도해볼까도 한다. 우선은 '공적 참여의 두 가지 모델'에 관한 절을 브리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이 절은 저자가 한권의 책으로 발전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전에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지난번에 미진하게 끝내놓은 듯해서 마저 정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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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08-01-13 09:55   좋아요 0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1-13 09:59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한번 더 읽어보고 오타들을 수정했습니다.^^
 

'기욤 드 마쇼와 유대인'은 르네 지라르의 책 <희생양>(민음사)의 1장 제목이다. 작년 가을에 나온 신장판과 영역본을 도서관에서 오래 전에 대출했는데(내가 갖고 있는 구판은 박스에나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고작 1장 정도 읽어보고 반납하게 생겼다(무얼 집중해서 읽을 만한 여유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반납하기 전에 단순오역 두 가지를 교정해둔다. 새로운 장정으로 책을 내기 전에 번역이라도 한번 더 살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약간 어이없기도 한데 첫 '오역'은 맨 첫문장에 나온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라는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이 있는데, 그의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Jugement du Roy de Navarre)>은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7쪽)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면 중세의 중요한 시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기욤 드 마쇼의 생몰연대는 1300-1377년이라고 나온다. 16세기 시인이 아니라 14세기 시인인 것이다. 역자가 부주의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불어본에는 로마숫자로 세기가 표기됐던 게 아닌가도 싶다(간혹 그런 경우에는 혼동이 가능하니까. 영역본에는 'mid-fourteenth century'로 돼 있다). 그렇더라도 본문을 주의깊게 읽었다면 그의 '궁정식 문체의 장시(長詩)'가 다루고 있는 사건이 "1349년부터 1350년 사이에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었던 그 유명한 페스트"(8쪽)라거나 "14세기에는 에피디미라는 이 유식한 말에서 항상 '과학성'의 향내가 풍겨나고있었는데"(12쪽)라는 문구들에서 착오를 눈치챌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지라르가 분석하고 있는 그의 작품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은 영어로 'Jugement of the King of Navarre'라고 옮겨진다. '로이'가 고유명사가 아닌 이상 '로이 드 나바르'는 '나바르의 왕'이라고 옮겨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용상 '판단'보다는 '심판'이 더 적절한 번역어로 보인다.

이 장시의 서두에서 기욤은 전혀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제법 그럴 법한 이야기들을 뒤섞어 놓는데, 간추리면 이렇다: "돌들이 쏟아져 내려와 생물체들을 죽여버리고, 마을은 벼락을 맞아 모두 파괴된다.(...) 기욤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사악한 유대인들과 기독교도이면서 그들과 공범인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이 살해된다.(...) 그것은 그들의 강과 식수원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하늘이 폭로함으로써 하늘의 정의가 이들을 일소한다."(7-8쪽)

대략 역사가들은 이 작품에 페스트의 재앙과 유대인 대학살이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어 보이는 기욤의 텍스트가 말해주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지라르는 마치 '(추적) 사건과 진실'의 나레이터처럼 하나하나 따져들어간다. 그걸 다 따라가볼 만한 처지는 아니어서 한 가지 오역만 더 지적한다.

"어쨌든 여기서 사건이 일어난 정황은 그다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결국 우리가 제시하는 해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 이 텍스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희생양이 실재하였기 때문에 이 텍스트는 동시에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15쪽)

세번째 문장 이하는 영역본에서 이렇게 옮겨졌다. "He would conclude that there were probably victims who were unjustly massacred. He would therefore think the text is false, since it claims that the victims were guilty, but true insofar as there really were victims."(5쪽)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는 주술관계가 모호한데, "독자들은 필시 부당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겠다. '정당하게'가 오역인 것은 바로 다음에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라고 나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소한 부주의가 낳은 오역들이지만 덕분에 희생양이 되는 것은 독자들이다...

08.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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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9 14:39   좋아요 0 | URL
'roy'는 'roi'의 고어 표기인데ㅡ예를 들어 Montaigne의 Essais만 보더라도 'moi' 또한 'moy'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ㅡ, 그것을 '로이'라는 표기로 옮겼다는 사실에서 역자가 아마도 'roy'를 보고 엉뚱하게도 영어 이름 'Roy'를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군요(최소한 '루아'라고만 표기했어도 이런 의심은 없었을 텐데요).
희생양으로서의 독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일상다반사' 수준이라 이제는 좀 '무감각'해질 법도 하련만, 이런 쪽으로 촉수를 뻗은 예민함 때문에 '꿋꿋한' 독서가 방해 받곤 하는 경험은 언제나 다시금 독한 편두통을 불러일으킵니다...

로쟈 2008-01-09 14:4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번역서들이 정말 드뭅니다.--;

람혼 2008-01-09 15:19   좋아요 0 | URL
여담이지만, 저는 이렇게 신속한 댓글이 달리는 로쟈님 서재 방문자 여러분들의 민첩한 기동성이 언제나 부럽습니다.^^; 그나저나 'roi'의 한글 표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자면, 일전에 'Guattari'의 표기에 대해서 로쟈님이 언급하셨던 부분을 가끔 떠올려보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roi'나 'bourgeois' 등 [-wa-] 발음이 들어가는 단어의 한글 표기에 있어서 현재는 '-우아-'가 일반적인 표기법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루아', '부르주아'). 로쟈님께서 보셨던 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지만ㅡ알려주세요~^^;ㅡ'Guattari'를 '구아타리'로 표기했던 이는 아마도 저러한 발음과 표기법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원칙 상으로는 분명 '구아타리'라고 표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이게 또 당장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고, 또 예를 들어 '손탁'이냐 '손택'이냐, 혹은 '벤야민'이냐 '베냐민'이냐 등과 관련하여 여러 번 로쟈님께서 쓰셨던 것처럼, 이러한 인명 표기에 있어서 원칙을 적용하느냐 아니면 '관습'과의 타협을 적용하느냐의 문제는ㅡ물론 이것이 이렇게 단순히 양자 사이의 결정의 문제도 아니겠지만ㅡ참 사소한 듯 하면서도 난해한 문제라고 느껴진다는 인상 한 자락 첨부해봅니다.^^ 고견들을 듣고 싶습니다.

로쟈 2008-01-09 16:17   좋아요 0 | URL
구아타리는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에 나옵니다. 저도 '과타리'까지는 봐주겠는데, '구아타리'는 오버라는 새각을 합니다. '망구엘'의 경우도 '망겔'이란 표기를 찾아줄 수는 있지만, 국내에 그렇게 번역/소개된 이상 '망구엘'을 존중해줄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제 주요한 기준은 '통용'입니다. '베르그손'보다 '베르그송'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사실 지금 든 사례들은 발음상 대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통용'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데, 벤야민의 연인 '아샤 라시스'는 최근에 나온 선집에서 '아샤 라치스'로 바로 잡혔더군요(역자조차도 예전에는 '라시스'로 표기했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교정된 표기를 선호하는 것이죠...

2008-01-09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9 16:21   좋아요 0 | URL
그냥 웃고 즐기는 건 괜찮은데, '유료'라서요. 그것도 비싼!^^;

소경 2008-01-09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1장만 대강 읽고 남겨 두었는데.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에 구절에 대해서 전 옯다고 생각 했습니다. 평소 물론 희생양을 두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은 현용하기 어렵지만 지라르는 유태인을 희생양을 둠에 정당하다고 말하는 당시대의 풍토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이니. 누구에게로 책임을 둠으로써, 즉 희생양으로 남김으로 흡족할 수 있는 풍토를. 물론 당시 유태인의 박해에 맞물려,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를 향한 것이라 '정당하게'가 성립되야 하는 것이......

(얼핏 읽고 적으니; 자신이 없네요.)

로쟈 2008-01-09 22:08   좋아요 0 | URL
희생자들이 정당하게 살해됐다는 건 텍스트 서술자의 관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는 희생자들이 무고하게 살해됐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텍스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희생자들이 존재했다는 건 말해주니까 그 점에서는 진실을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소경 2008-01-10 06:41   좋아요 0 | URL
현대의 독자들을 향한 글에 다른 내용을 은근히 집어 넣었군요. 맥락을 잘못 집었네요 ^^:;
 

영국의 평론가이자 책 수집가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르네상스, 2007)는 지난 연말에 소개하기도 했고(http://blog.aladin.co.kr/mramor/1753545) 또 구입해서 처음 몇 장을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20개 장 중에서 6장까지를 읽었다). 한동안 제쳐두어다가 우연히 펼쳐든 책에서 또 '특이한' 대목이 눈에 띄기에 교정해둔다(사실 이런 핑계로 페이퍼를 쓰다간 교정으로만 공치는 날들이 부지기수일 듯하다).

 

 

 

 

책의 7장은 존 케네디 툴(John Kennedy Toole; 1937-1969)이란 작가의 소설 <바보들의 연합(A Confederacy of Dunces)>을 다루고 있는데, 작가와 작품 모두 생소하기 짝이 없다. 한데 게코스키에 따르면 작가는 이 소설 한 권으로 "미국 남부 출신의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이다." 그 '켄 툴'(그의 애칭)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거릿 미첼이나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 등이라고 하니 그의 지명도를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아래 표지를 보니 소설은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다만, 차이라면 미첼이나 리와는 달리 "툴은 자신의 작품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는 것. "대작이라 자신하는 원고를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하자, 낙담에 끝에 1969년에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124쪽) 그래서 그는 흔히 "위대한 유작 하나만을 내놓은 작가"로 기억되곤 한다고(실제로는 놀랄 만한 양의 미출간 원고들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한다).

전혀 뜻밖인 건 그의 책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는 점. '존 케네디 툴르'의 <조롱>(사람과책, 1995)이 그 문제의 책이다. 한술 더 떠서 <별을 좇아가는 길>(말과뜻, 1997)이란 책도 출간돼 있고(<조롱>은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수 있겠다). 짐작엔 '퓰리처상'이란 타이틀에 기대를 걸었던 듯한데, 독자들의 반응은 썰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충분히 다시 소개됨 직한 작품으로 보인다. 표지에서도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퓰리처상 수상 이후에 쏟아진 한 서평은 "가격 대비 웃음량으로 판단한다면 최대 할인을 감행한 올해의 작품은 <바보들의 연합>이다."라고 써놓았을 정도. 18개 언어로 소개되어 15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하니까 세계적인 밀리언셀러이기도 하고(한데, 어째서 한국 독자들에겐 외면 받았던 것일까?).   

 

켄 툴에 대해서는 책이나 읽게 되면 더 늘어놓기로 하고,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구절을 옮겨본다: "일반적으로 어떤 인물을 깊숙이 알게 되면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동정심에 이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알료나 이바노프바 노파의 아파트에서 두 모녀를 살해하고는 문 뒤에서 공포에 전율한다. 이 장면에서 독자 역시 수치를 느끼면서도 동정을 머금게 된다."(125쪽)

두 가지 오류가 있다. 먼저, 전당포 노파의 이름은 '알료나 이바노프바'가 아니라 '알료나 이바노브나'이다. 이게 저자인 게코스키의 오기인지 역자의 오타인지 모르겠지만(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정도면 타이핑상의 문제로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한데, 두번째 오류는 좀 심각한다. '두 모녀'를 살해했다니? 알다시피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끼로 살해한 사람은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녀의 이복 여동생 리자베타이다. 그러니까 '모녀'가 아니라 '자매'이다(저자가 엉뚱하게 적어놓았을 리는 없겠고, 역자가 어떤 단어를 옮긴 것인지 궁금해진다).

<죄와 벌>처럼 널리 알려진 작품의 경우에도 이런 오기/오역이 가능하다는 게 아무튼 좀 의외다. 덕분에 관련자료를 뒤적이다가 알게 된 것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작년에 새로운 버전의 <죄와 벌>이 방송을 탔다. 보아하니 국영인 '제1채널'에서 제작한 것인 듯하다(아마도 TV 시리즈물일 것이다). 아래는 1969년작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코프와 새로운 라스콜리니코프의 얼굴이다.  



이 영화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두 자매를 살해하는 장면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데(http://www.youtube.com/watch?v=BC682qfVvB4), 원작에 아주 충실하게, 그러니까 아주 잔혹하게 묘사돼 있다(임산부나 노약자는 보지 마시길). 짤막한 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TAtwZ033Rtw 참조. 마르멜라도프와 소냐의 모습을 잠깐 볼 수 있다.

한데, 이번 <죄와 벌>의 배역들 가운데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배우는 라스콜리니코프도 아니고 소냐도 아니다. 좀 뜻밖이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 풀헤리야 라스콜리니코바이다. 러시아의 국민배우 엘레나 야코블레바가 맡은 배역이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오래전 <인터걸>(1989)의 주연으로 알려진 배우이다). 한 인터뷰 기사를 보니 안제이 바이다가 연출했던 연극 <악령>에서도 레뱌드키나 역으로 출연한 인연이 있다고(이 연극은 2004년에 초연됐을 때 나도 봤는데!). 오랜만에 낯익은 얼굴을 보니 반갑다...

08.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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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7 17:15   좋아요 0 | URL
저는 러시아스러운(?) 얼굴들이 좋아요.^^

로쟈 2008-01-07 19:32   좋아요 0 | URL
러시아인들의 얼굴도 각양각색이긴 한데, 그래도 구별이 되긴 합니다. 딱 꼬집어서 특징을 말할 수는 없어도...

소경 2008-01-09 21:54   좋아요 0 | URL
이런 섬뜩한 장면을 오랫만에 보네요. 오한이 드는게..

로쟈 2008-01-09 22:09   좋아요 0 | URL
'러시아식'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06 00:15   좋아요 0 | URL
제게 있는 바보들의 연합 번역본은 제목이 <위대한 청개구리> 부제 20세기 동키호테 전.김영일 역 도서출판 예맥1981.퓰리처 상 받자마자 번역했나봐요.제가 구입해 읽을 때가 카트리나로 루이지애나가 폐허가 되었을 때인데 이 소설의 배경이 그 곳이라서 특히 기억에 남네요.물론 헌책방에서 구했습니다.분량이 많아서 독파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로쟈 2008-06-06 20:26   좋아요 0 | URL
그렇게 소개가 됐었군요! 덕분에 많이 알게 됩니다.^^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담을 엮은 <테러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찾지 못해서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복사한 영어본도 눈에 띄지 않아 그마저도 대출했다. 이럴 땐 '소장도서'란 말이 아주 무색하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마도 2005년쯤인가 훑어보았는데, 얼마전 <데리다-하버마스 읽기(The Derrida-Habermas Reader)>(2006)를 구입한 김에 다시 정독해볼 요량으로 찾았던 것이다.

사실 수전 손택의 <문학은 자유다>(이후, 2007)에 대한 페이퍼를 써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얘기가 좀 길어질 듯해서다) 잠시 펼쳐든 게 <테러시대의 철학>인데, 펴자 마자 또 오역이 눈에 띄기에 교정해둔다. 문제의 대목은 서론의 '철학이 역사에 관해 말할 것이 있는가?'란 절에 나온다. 첫문장이다.

"철학이 보편적 원리들과 역사의 개별 사건들을 연구한 이래로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랑스럽게 선언하였다."(22쪽)

 

 

 

 

이건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내용이다(국역본에서 전후맥락을 더 옮겨놓았으면 싶지만 네댓 권이나 갖고 있는 <시학>이 한권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얼핏 그런가 보다 싶지만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명제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가 번역문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원문을 전혀 엉뚱하게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원문은 이렇다.

"Aristotle famously declared that since philosophy studies universal principles and history, singular events, "even poetry is more philosophical than history.""(2쪽)

국역본은 'since'를 '-이래로'로 옮겼는데, 여기서는 '-이기 때문에'란 뜻이다. 그리고 'history'와 'singular events' 사이에는 동사 'studies'가 생략됐다. 다시 옮기면, "유명한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보편적인 원리들을 탐구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사건들을 다루기 때문에 '시조차도 역사보다는 더 철학적'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철학과 역사의 대비는 보편성 대 개별성의 대비이다. 그렇다면 시가 역사보다 철학적이라는 말은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라는 뜻이겠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라는 말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장르는 '비극'이다(알다시피 <시학>은 내용상 '극작술'을 다룬 책이다). "비극은 인간 존재를 움직이는 일련의 감정들을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유사한 길을 가고 있다."(22쪽)란 내용이 뒤이어 나오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뒤집어 말하면, 철학은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역사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은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전통을 지배"했던 것이다(주목할 만한 예외는 비코 정도이다).

대담자이자 해제의 필자인 보라도리가 '철학이 역사에 관해 말할 것이 있는가?'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이다. 과연 철학은 9.11에 대해서 뭔가 말할 수 있는가, 란 의혹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서양철학적 전통에서는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필자는 그러한 의혹에 맞서서 철학이 9.11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더러 말해야만 하는 책임까지도 진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와 하버마스, 당대 최고의 두 철학자를 대담의 자리에 부른 것은 그런 취지에서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렇게 시작된다, 시작되어야 한다...

08.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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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8-01-05 03:11   좋아요 0 | URL
또 하나의 통찰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8-01-05 09:34   좋아요 0 | URL
통찰은 철학자들의 몫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