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권의 책을 살펴보려고 대형서점에 갔다가 손에 든 책은 리처드 레인의 <장 보드리야르>(앨피, 2008)이다. 덕분에 상기하게 된 거지만 어제가 작년에 세상을 떠난 보드리야르(1929-2007)의 기일이었다. 또 그 덕분에 떠올리게 된 건 작년 이맘때 급하게 청탁을 받아서 쓴 추모기사다(http://blog.aladin.co.kr/mramor/1082396). 몇몇 적임자가 거절하는 바람에 나한테까지 연락이 왔었고 또 어지간한 청탁은 거절하지 않는 편이어서(대신에 기한은 잘 못 지킨다) 나대로 또 '작문'을 했던 것. 레인의 책은 그때 참고하기 위해 교보에서 구입했었다. 국역본을 손에 든 건 그런 인연에서다(지난번에 나온 <리오타르>도 나는 바로 완독했다).

 

 

 

 

그런데, 이 페이퍼는 보드리야르를 위한 것이 아니다(레인의 책을 찾게 되면 몇 마디 적을 수는 있겠다). 요즘 나오는 인문 번역서들의 편집에 대한 몇 가지 불만을 적기 위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도 전철에서 읽어나가다가 몇 번 눈살을 찌푸리게 됐는데, 번역이 아니라 편집상의 오류 때문이다. 맨먼저 이 책에서도 아직 생존해 있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레비스트로스(1908-1991)'라고 표기됐다(38쪽). 이전에도 한번 지적한 바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1807030), 멀쩡히 살아있는 대학자를 '죽은 자'로 취급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원서에는 생몰연대 따위가 들어가 있을 리 없다(는 아니고 표기돼 있다고 한다). 고유명사의 원어병기나 인물의 생몰연대는 보통 편집자가 '서비스' 차원에서 첨가해주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문제는 '서비스의 질'이다.

레비스트로스만 하더라도 한 백과사전에 잘못 기재돼 있다는 설이 있는데 조금 전에 확인해보니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던 '네이버'에서도 '레비스트로스(1908- )'라고 수정돼 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읽은 책들은 모두 이 책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보리스 와이즈먼의 만화책 <레비스트로스>(김영사, 2008)의 첫문장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1908-1991)는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다."(7쪽)이고,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도 "이런 분석의 대가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1908-1991)다."(30쪽)로 돼 있다. 너무 친절한 편집자들이 이왕 나서는 김에 약간의 손품만 더 팔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오류들이다.

 

 

 

 

일단 선입견을 갖게 되니까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나오는 '포래치'를 '포래치'라고 하거나 '바로레아'를 '바로레아'로 표기해놓은 것도, 설혹 역자가 그런 고집을 부렸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포트래치'나 '바카로레아'로 표기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에서 '소모'로 옮겨진 'expenditure'도 단순히 '지출'로만 옮기는 건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지 못한다.  

관련문헌을 소개하고 있는 '보드리야르의 모든 것'에서도 편집자는 굳이 안 해도 될 실수를 범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저작 국역본이 있는 경우 병기해주는 '서비스'를 하는 과정에서, 저명한 연구자인 마이크 게인이 "의심할 바 없이 장 보드리야르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한 <상징적 교환과 죽음>의 국역본이 <불가능한 교환>(울력, 2001)이라고 엉뚱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이 책의 원저명은 국역본 표지에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보드리야르를 다룬 최상의 비평적 해설"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페파니스의 책 'Heterology and the Postmodern: Bataille, Baudrillard, and Lyotard'에 대해서는 국역본을 병기해주고 있지 않다. <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리오타르>(시각과언어, 2000)로 소개돼 있다는 걸 잊은 것이다.  

물론 실수나 착오는 누구나 범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줄여나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홀대 받기를 원하는 독자는 없는 법이니까...

08.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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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03-08 18:55   좋아요 0 | URL
본문 검색을 통해 원서를 찾아보니, 원서에도 생몰연대가 나와 있긴 합니다. 모스(1872-1950), 라캉(1901-1981), 바르트(1915-1980) 식으로요. 원서엔 '레비스트로스(1908-)'라고 잘 적혀 있네요. 어쨌든 "원서에는 생몰연대 따위가 들어가 있을 리 없다"는 말씀은 사실과 다릅니다. 요즘 워낙 뒤숭숭해서 한 마디에도 조심하셔야 할 듯합니다. ㅜㅜ

로쟈 2008-03-08 18: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책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그렇더라도 편집자가 쓸데없는 개입을 한 것이죠. 2000년에 나온 책에도 생존해 있던 양반을 1991년에 죽은 걸로 처리해놓았으니까요...
 

연휴의 후유증인지 숭례문 화재의 여파인지 머리는 무겁고 가슴은 답답하다. 주기적인 우울증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란 제목의 페이퍼를 쓸 생각이었으나(이런 일과 욕심에서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시간도 없고 기력도 부족해서 <롤리타>에 관한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강의준비를 겸하여 몇 자 적어두는 것이기도 한데, 국역본 첫문단의 오류에 관한 것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롤리타>(1997) 서두(http://www.youtube.com/watch?v=8D_Bo0UFxq4)를 먼저 참조하시길. 주인공 험버트 헙버트(제레미 아이언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소설의 처음 문단과 두번째 문단 순서가 바뀌어서 나온다. 여기서 읽을 건 유명한 첫문단이다. 같은 대목을 관련서들에서는 어떻게 옮기고 있는지 비교해보겠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롤리타>, 민음사, 15쪽)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입천장을 세 번 굴러 세 번째는 이를 톡 치는 혀끝. 롤. 리. 타."(<롤리타>, 이룸, 47쪽)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사타구니의 불길, 나의 죄이자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나의 혀끝은 입 천장에서 세 번을 움직여 그 이름을 두드린다.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혀는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세번째는 이를 건드린다. 롤. 리. 타."(<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31쪽)

이 한 문단에서만 '롤리타(Lolita)'란 이름이 세 번 반복되는데, 말 그대로 '롤리타'란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건 말 그대로 '유희적인' 시작이다.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이라는 거창한 '호명'과 롤리타란 이름이 입안에서 어떻게 발음되는가에 대한 묘사/음미가 병치되고 있는 것이다. 잔뜩 무거운 분위기로 처연하게 시작한 에드리안 라인의 <롤리타>가 막바로 이러한 나레이션으로 시작할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와 달리 나보코프는 이렇게 대놓고 시작한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이 서두가 의미심장한 것은 작품의 맨마지막 문장과도 호응하기 때문이다. <롤리타>는 어떻게 끝나는가?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422쪽) 원문은 "And this is the only immortality you and I may share, My Lolita." 이 서두와 결어 사이의 여정(trip)이 바로 <롤리타>의 여정이며 그것은 또한 '불멸성'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 혀끝(tip)의 이동으로 대변될 수 있는 '언어적 여정'이라는 데 이 소설의 비밀이 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 비밀에 대해서 자세히 늘어놓을 자리는 아니고, 인용한 국역본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만 살피도록 한다. 먼저 사소한 불만을 적자면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라는 첫마디가 나는 나보코프의 원문처럼 동사가 빠진 명사구 형태로만 제시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내 삶의 빛이요'라는 식으로 늘어지는 게 개인적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번째 제시한 번역에서처럼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사타구니의 불길" 하는 식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이 경우엔 왜 잘 나가다가 "나의 죄이자 나의 영혼이여"라고 늘어진 것인지?). 즉, 내가 원하는 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하는 식으로 옮기는 것이다.

 

 

 

 

'허리'라고 옮긴 'loins'는 원래 '허리'란 뜻이다. 내가 갖고 있는 주석본 <롤리타>(신아사, 1997)에서 윤효윤 교수에 따르면 "문학에서 말하는 loin은 '허리'를 의미하기보다 생명 또는 생식기를 의미"한다. '생명'이나 '사타구니'란 의역은 그래서 가능하다. 나는 다만 그런 걸 감안하면서도 ' 내 허리의 불꽃' 정도로 옮기는 게 나보코프의 짓궂은 취향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러시아어본에서도 그냥 '허리'를 뜻하는 단어가 쓰였다).  

그리고 두번째 마디.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라고 번역됐는데, '롤-리-타'를 발음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면서"는 발음할 수 없다. 정상적인 경우 'Lo-Lee'를 발음할 때는 혀끝이 이빨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발음의 과정을 풀어서 번역한 것이 "나의 혀끝은 입 천장에서 세 번을 움직여 그 이름을 두드린다.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혀는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세번째는 이를 건드린다."이다. 이게 혀끝의 여정이다. 'Lo'를 발음할 때는 입천장을 치고, 'Lee'를 발음할 때는 약간 앞쪽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Ta'를 발음할 때 비로소 혀끝은 이빨을 톡 치게 된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단계로 톡톡 치며 내려오다가 세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 롤. 리. 타." 그런 여정의 끝에 네가 있다.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내 허벅지의 경련, 내 발가락의 가려움, 아무도 가려주지 못할 나의 슬픔, 나의 공허, 롤. 리. 타...

08.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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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04 00:17 
    저녁강의가 있어서 늦게 귀가해보니 식탁에 이번달 <출판저널>(3울호)이 놓여 있다. 원래는 지난달에 실려야 할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 원고가 한달 늦춰졌고, 이번이 마지막 글이 됐다. 나대로의 '이어 읽기'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루고 있으며, 4월호 원고까지 썼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래도 원고 부담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
 
 
2008-02-12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2 0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2 10:02   좋아요 0 | URL
저도 파일은 없고 프린트된 것만 갖고 있었습니다. '활력소'를 이런 곳에서 찾으시면 안되는데요.^^;

parksang 2008-02-12 14:19   좋아요 0 | URL
색깔 구분 안된 뒷부분 번역문 몹시 맘에 드네요.

로쟈 2008-02-12 17:20   좋아요 0 | URL
^^;

2008-02-1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2 17:20   좋아요 0 | URL
저도 후보들을 더 생각해봤지만 대체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네요.^^;

섬나무 2008-04-14 10:06   좋아요 0 | URL
문장의 미세한 결을 드러내는 솜씨로 보면 로쟈님은 인문학 번역보단 문학류 번역에 적합하신것 같습니다.^^ 롤리타를 읽으면서 저 롤리타 발음에 대한 묘사를 따라하다가 어떻게 이빨을 세 번이나 치나? 하면서 다른 뜻의 표현일거라 생각했어요. 세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롤.리.타. 확연해지고 한결 좋네요. 그런데 저렇게 세 군데의 책을 모두 읽어보시나요? 역시 보통의 열정은 아닙니다. 검은 글씨 두 줄은 '롤리타'의 전부네요.

로쟈 2008-04-14 23:5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문학작품 번역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문체'도 옮겨야 하기 때문에요.^^;

섬나무 2008-04-15 18: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문자 번역이 아니라 문체를 번역하고 싶은 로쟈님의 부담이야 이해되는데요 로쟈님의 깊은 감수성이면 충분히 가능해보입니다. 어쩌면 숨은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로쟈 2008-04-15 21:43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맡은 번역들도 문학쪽이 더 많습니다.^^;

섬나무 2008-04-16 11: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러시아문학 쪽인가요? 번역작품들을 알려주시는 게 불법은 아닐테니 소개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로쟈 2008-04-17 23:41   좋아요 0 | URL
물론 러시아문학쪽이구요, 내년쯤부턴 나올 예정입니다.^^;
 

오후에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가 중국고대사상을 다룬 책 몇 권에서 법가에 관한 대목들을 읽으며 같이 들춰본 책은 고명섭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이다. 전작인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을 완독했었지만 <담론의 발견>에까지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건 한겨레의 출판면을 담당하고 있는 저자의 기사 대부분을 이미 지면에서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책으로 통독하는 건 별개의 독서이긴 하지만). '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란 부제대로 책은 150종에 묵직한 책들에 대한 독후감으로 빼곡하다. 여유만 있다면 일종의 '독서 매뉴얼'로 서가에 꽂아둠 직하다(적어도 150종의 책들에 대해서 아는 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론 '노이라트의 배'를 화두로 한 머리말이 인상적이어서 복사까지 했다(그래야 이렇게 옮겨적을 게 아닌가!). 20세기 초반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노이라트는 20세기 역사의 풍랑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이런 명제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5쪽)

한데 어디서 많이 읽어본 듯한 문장 아닌가? 내 기억은 아주 오래전 <성문종합영어> 같은 참고서의 독해 지문에서 읽은 듯하다고 말해주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검색해보니 영어로는 이런 말이다.

"We are like sailors who on the open sea must reconstruct their ship but are never able to start afresh from the bottom. Where a beam is taken away a new one must at once be put there, and for this the rest of the ship is used as support. In this way, by using the old beams and driftwood the ship can be shaped entirely anew, but only by gradual reconstruction."

위키피디아에 인용돼 있는데, 노이라트의 이 말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자신의 책 <말과 대상>에서 이 비유를 인용한 미국 분석철학의 거두 콰인이라고 한다(찾아보니 <논리적 관점에서>를 비롯해 국내에 소개된 콰인 관련서들을 다 소장했던 듯하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말과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고명섭에 따르면 "정치적 진보주의자였던 만큼이나 철학적 실증주의자였던 노이라트는 줄곧 세계를 투명하고 확실하게 해석하게 해줄 인식적 토대를 찾았지만, 끝내 그 단단한 지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노이라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토대 없는 인식론'이 자연스러우며 또한 정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노이라트의 배'에 상응하는 것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아니겠는가. 리처드 로티의 표현을 빌면, '잘 잃어버린 세계'이겠고. 때문에 '노이라트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는 독서의 여정에 대해서 크게 유감스러워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되,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기 때문이다(새로운 비유로 '플로어 없는 댄스'도 덧붙여두자!).

'노이라트'와 함께 이 페이퍼의 또 다른 빌미가 된 건 '들뢰즈'이다. <담론의 발견>에는 들뢰즈와 관련한 책들만 하더라도 꽤 여러 종이 포함돼 있다(다수 포함돼 있는 철학서들 가운데서도 단연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제가 들뢰즈의 생일이었다고도 해서 무슨 페이퍼라도 하나 적어야 하나 싶었는데, 책에서 사소한 '수다'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책에 실린 많은 사진 자료들은 대부분 편집자들이 찾아서 넣었을 법한데, 가령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에는 저자인 하트의 사진과 함께 특이하게도 (영어본이 아니라) 이탈리아어본의 표지가 실렸다(두 남녀의 댄스 사진은 그 표지로 사용된 것이다). 영어본 표지는 아래와 같으니까 단연 보기에 더 좋은 건 이탈리아어본이긴 하다.  

한데, 프랑스 현대 지성사를 다룬 카트린 클레망의 <악마의 창녀>(새물결, 2000)를 다룬 장에는 다소 엉뚱한 표지 사진이 실려 있어 흥미롭다(클레망의 책은 크리스테바와의 대담 <여성과 성스러움>외 몇 권이 더 소개돼 있다). "<앙티 오이디푸스>는 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적 이론서였다."란 클레망의 발언을 보충해주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는 19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 이론서다. 이 책의 영문판 표지."란 설명과 함께 들어간 사진은 영어판 <앙티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유진 홀랜드의 '입문서'인 것. 홀랜드의 이 책은 엉뚱하게도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이란 제목으로 번역됐었다('들루즈와 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정신분열분석입문'란 부제가 붙어 있는 '가장 조야한 번역서'의 하나였다).

 

 

 

 

사실 '들뢰즈 읽기'를 위해 어제 잠시 뒤적인 책은 얼마전에 나온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8)이다. 작년말에 나온 책의 출간년도를 '2008'로 표기하는 건 지난주에 1쇄의 몇몇 사항에 교정이 가해진 2쇄가 나왔기 때문이다(이 책을 구입하려는 독자라면 몇 쇄인가를 확인하시길). 하지만 2쇄에도 '옥에 티'는 남았는데, 그건 뒷표지의 추천사이다.

"들뢰즈와 들뢰즈/가타리의 공동 작업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이 책을 추천한 이가 '엘리자베스 그로스(<불안한 신체> 저자)'라고 표기돼 있는데, 짐작엔 '엘리자베스 그로츠'이고 그녀의 책 'Volatile Bodie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Grosz'을 '그로스'로 읽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로츠' 대신에 '그로스'라고 표기됨으로써 어쨌든 국내에 이미 소개돼 있는 그로츠의 책 <뫼비우스 띠로서 몸>(여이연, 2001)과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정보'가 돼 버렸다('뫼비우스 띠로서 몸'이라고 해놓으니 제목이 좀 엉뚱하긴 하지만).

'가장 명료하고 독창적인 들뢰즈 입문서!'라고 적힌 콜브룩의 책을 추천하고 있는 또 다른 전문가는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의 저자 폴 패튼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브룩은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들(차이, 재현, 욕망, 감응)에서 다양한 영역의 구체적인 문제들로 힘들이지 않고 옮겨간다. 우리를 비판적 사유의 핵심으로 이끄는 책." 해서 말하건대, (가장 독창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명료한 입문서'로서 콜브룩의 책을 추천할 만하다. 먼저 나온 그녀의 책 <질 들뢰즈>(태학사, 2004)와 함께(벌써 읽은 지가 꽤 됐군!).

흥미로운 건 <들뢰즈와 정치>와 <질 들뢰즈>를 우리말로 옮긴 역자가 동양철학 전공자라는 것. 활발하게 전공 관련 연구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백민정씨가 그인데, 오늘 도서관에서 조금 훑어본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태학사, 2005)의 저자이기도 하다. 공부는 그렇게 '가로지르며' 하는 것이다...

08. 01.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콰인의 책 <말과 대상(Word and Object)>의 불역본 제목은 <말과 사물>이다. 복수형으로 하면 딱 푸코의 <말과 사물>과 제목이 똑같다. 푸코의 책이 올해 새로 번역돼 나온다고 하는데 콰인의 책도 같이 소개되면 좋겠다(그리고 공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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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1-21 19:28   좋아요 0 | URL
박사학위논문을 묶은 <정약용의 철학>도 낸 백민정씨의 부군이 강신주씨라고 하더군요^^. 부부가 한동안 들뢰즈를 통해 동양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로지르'게 되는것도 다 속사연이 있나봅니다.

로쟈 2008-01-21 19:25   좋아요 0 | URL
최강의 커플이로군요.^^
 

<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을 다룬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12887)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역사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이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전통을 지배했다고 했는데, 여기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이었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은 현재가 과거와 근본적으로 단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철학은 이성이 본질적인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철학이 역사와 좀더 능동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23쪽)

 

 

 

 

그리하여 보수적인 성향의 칸트조차도 "과거의 권위를 비롯한 모든 권위에 맞서 개인들에게 자기 독립심을 부여하는 혁명적 정신을 찬양했다. 칸트를 비롯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자기 확신이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했는데, 왜냐하면 이성만이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칸트와 계몽철학자들의 인식은 아직 철저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단지 인간 종에 속함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갖게 되는 하나의 정신적 능력일 따름이며, 이성의 힘은 역사의 우발적 사건들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역사에 대해서 초월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What if?)'라는 역사에 대한 가정법, 혹은 '대체역사'는 아마도 '역사 이후의 이성' 혹은 '역사 바깥의 이성'에 가장 잘 상응하는 사례일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연쇄에서 오직 한 가지 변수만을 분리해내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면 어떻게 됐을 것인가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대체역사의 전제는 역사를 마치 물리학에서의 사고 실험 대상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은 그러한 가정/대체의 불가능성과 상관적인 게 아닐까. 그것은 '역사 바깥의 이성'으로부터 '역사 속의 이성'으로의 이행이다.

"칸트 이후 단지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 헤겔은 이성 그 자체가 역사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와 철학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최후의 일보를 내디뎠다. 헤겔에게 이성은 모든 인간이 구비하게 되거나 또는 자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추상적인 정신적 능력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이해하는 방식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파생되는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생각하는 능력이 시간과 문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된다면, 역사에 대한 연구만이 우리의 본성과 세계속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 그 자체는 역사-의존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철학을 제외하면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23-4쪽) 즉, '역사적 인간'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라 조건 자체이다.  

역사와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바로잡게 된다면 자유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만약 이성이 역사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합리적 행위자가 자신을 자율적 단위로 경험할 여지가 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이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응이나 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헤겔을 따랐던 사람들의 반응은, 그것이 허구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허구적인 생각'은 'illusory conception'의 번역이다.) 왜인가?

"왜냐하면 그 입장은 표면 아래에 있는 심층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으며 또한 개인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하는지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택은 개인들이 모든 종류의 자원들, 즉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심리적, 종교적, 기술적 자원들에 전급할 수 있는가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그 시대의 지배적 힘에 종속되게 만든다."(24-5쪽)

이에 따른 결론: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 것은 없다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함축한다. 외부의 힘과의 영구적인 절충을 통해 개인의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깨달을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따라서 자유는 우리가 이러한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정도에 의해서 평가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힘이 우리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은 9.11의 의미에 대한 공적 토론에 기여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있다."

08. 01. 12.

P.S.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빼놓았었는데, 보라도리의 서론 '테러리즘과 계몽주의의 유산'은 잘 씌어진 글이다. 하버마스와 데리다 철학의 '입문'으로서 간략하면서도 요긴하다. 해서 몇 차례 '브리핑'을 시도해볼까도 한다. 우선은 '공적 참여의 두 가지 모델'에 관한 절을 브리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이 절은 저자가 한권의 책으로 발전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전에 역사와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지난번에 미진하게 끝내놓은 듯해서 마저 정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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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cinema 2008-01-13 09:55   좋아요 0 | URL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1-13 09:59   좋아요 0 | URL
덕분에 한번 더 읽어보고 오타들을 수정했습니다.^^
 

'기욤 드 마쇼와 유대인'은 르네 지라르의 책 <희생양>(민음사)의 1장 제목이다. 작년 가을에 나온 신장판과 영역본을 도서관에서 오래 전에 대출했는데(내가 갖고 있는 구판은 박스에나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고작 1장 정도 읽어보고 반납하게 생겼다(무얼 집중해서 읽을 만한 여유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반납하기 전에 단순오역 두 가지를 교정해둔다. 새로운 장정으로 책을 내기 전에 번역이라도 한번 더 살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약간 어이없기도 한데 첫 '오역'은 맨 첫문장에 나온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라는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이 있는데, 그의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Jugement du Roy de Navarre)>은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7쪽)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면 중세의 중요한 시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기욤 드 마쇼의 생몰연대는 1300-1377년이라고 나온다. 16세기 시인이 아니라 14세기 시인인 것이다. 역자가 부주의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불어본에는 로마숫자로 세기가 표기됐던 게 아닌가도 싶다(간혹 그런 경우에는 혼동이 가능하니까. 영역본에는 'mid-fourteenth century'로 돼 있다). 그렇더라도 본문을 주의깊게 읽었다면 그의 '궁정식 문체의 장시(長詩)'가 다루고 있는 사건이 "1349년부터 1350년 사이에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었던 그 유명한 페스트"(8쪽)라거나 "14세기에는 에피디미라는 이 유식한 말에서 항상 '과학성'의 향내가 풍겨나고있었는데"(12쪽)라는 문구들에서 착오를 눈치챌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지라르가 분석하고 있는 그의 작품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은 영어로 'Jugement of the King of Navarre'라고 옮겨진다. '로이'가 고유명사가 아닌 이상 '로이 드 나바르'는 '나바르의 왕'이라고 옮겨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용상 '판단'보다는 '심판'이 더 적절한 번역어로 보인다.

이 장시의 서두에서 기욤은 전혀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제법 그럴 법한 이야기들을 뒤섞어 놓는데, 간추리면 이렇다: "돌들이 쏟아져 내려와 생물체들을 죽여버리고, 마을은 벼락을 맞아 모두 파괴된다.(...) 기욤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사악한 유대인들과 기독교도이면서 그들과 공범인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이 살해된다.(...) 그것은 그들의 강과 식수원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하늘이 폭로함으로써 하늘의 정의가 이들을 일소한다."(7-8쪽)

대략 역사가들은 이 작품에 페스트의 재앙과 유대인 대학살이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어 보이는 기욤의 텍스트가 말해주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지라르는 마치 '(추적) 사건과 진실'의 나레이터처럼 하나하나 따져들어간다. 그걸 다 따라가볼 만한 처지는 아니어서 한 가지 오역만 더 지적한다.

"어쨌든 여기서 사건이 일어난 정황은 그다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결국 우리가 제시하는 해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 이 텍스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희생양이 실재하였기 때문에 이 텍스트는 동시에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15쪽)

세번째 문장 이하는 영역본에서 이렇게 옮겨졌다. "He would conclude that there were probably victims who were unjustly massacred. He would therefore think the text is false, since it claims that the victims were guilty, but true insofar as there really were victims."(5쪽)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는 주술관계가 모호한데, "독자들은 필시 부당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겠다. '정당하게'가 오역인 것은 바로 다음에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라고 나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소한 부주의가 낳은 오역들이지만 덕분에 희생양이 되는 것은 독자들이다...

08.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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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9 14:39   좋아요 0 | URL
'roy'는 'roi'의 고어 표기인데ㅡ예를 들어 Montaigne의 Essais만 보더라도 'moi' 또한 'moy'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ㅡ, 그것을 '로이'라는 표기로 옮겼다는 사실에서 역자가 아마도 'roy'를 보고 엉뚱하게도 영어 이름 'Roy'를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군요(최소한 '루아'라고만 표기했어도 이런 의심은 없었을 텐데요).
희생양으로서의 독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일상다반사' 수준이라 이제는 좀 '무감각'해질 법도 하련만, 이런 쪽으로 촉수를 뻗은 예민함 때문에 '꿋꿋한' 독서가 방해 받곤 하는 경험은 언제나 다시금 독한 편두통을 불러일으킵니다...

로쟈 2008-01-09 14:4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번역서들이 정말 드뭅니다.--;

람혼 2008-01-09 15:19   좋아요 0 | URL
여담이지만, 저는 이렇게 신속한 댓글이 달리는 로쟈님 서재 방문자 여러분들의 민첩한 기동성이 언제나 부럽습니다.^^; 그나저나 'roi'의 한글 표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자면, 일전에 'Guattari'의 표기에 대해서 로쟈님이 언급하셨던 부분을 가끔 떠올려보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roi'나 'bourgeois' 등 [-wa-] 발음이 들어가는 단어의 한글 표기에 있어서 현재는 '-우아-'가 일반적인 표기법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루아', '부르주아'). 로쟈님께서 보셨던 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지만ㅡ알려주세요~^^;ㅡ'Guattari'를 '구아타리'로 표기했던 이는 아마도 저러한 발음과 표기법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원칙 상으로는 분명 '구아타리'라고 표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이게 또 당장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고, 또 예를 들어 '손탁'이냐 '손택'이냐, 혹은 '벤야민'이냐 '베냐민'이냐 등과 관련하여 여러 번 로쟈님께서 쓰셨던 것처럼, 이러한 인명 표기에 있어서 원칙을 적용하느냐 아니면 '관습'과의 타협을 적용하느냐의 문제는ㅡ물론 이것이 이렇게 단순히 양자 사이의 결정의 문제도 아니겠지만ㅡ참 사소한 듯 하면서도 난해한 문제라고 느껴진다는 인상 한 자락 첨부해봅니다.^^ 고견들을 듣고 싶습니다.

로쟈 2008-01-09 16:17   좋아요 0 | URL
구아타리는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에 나옵니다. 저도 '과타리'까지는 봐주겠는데, '구아타리'는 오버라는 새각을 합니다. '망구엘'의 경우도 '망겔'이란 표기를 찾아줄 수는 있지만, 국내에 그렇게 번역/소개된 이상 '망구엘'을 존중해줄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제 주요한 기준은 '통용'입니다. '베르그손'보다 '베르그송'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사실 지금 든 사례들은 발음상 대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통용'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데, 벤야민의 연인 '아샤 라시스'는 최근에 나온 선집에서 '아샤 라치스'로 바로 잡혔더군요(역자조차도 예전에는 '라시스'로 표기했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교정된 표기를 선호하는 것이죠...

2008-01-09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9 16:21   좋아요 0 | URL
그냥 웃고 즐기는 건 괜찮은데, '유료'라서요. 그것도 비싼!^^;

소경 2008-01-09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1장만 대강 읽고 남겨 두었는데.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에 구절에 대해서 전 옯다고 생각 했습니다. 평소 물론 희생양을 두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은 현용하기 어렵지만 지라르는 유태인을 희생양을 둠에 정당하다고 말하는 당시대의 풍토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이니. 누구에게로 책임을 둠으로써, 즉 희생양으로 남김으로 흡족할 수 있는 풍토를. 물론 당시 유태인의 박해에 맞물려,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를 향한 것이라 '정당하게'가 성립되야 하는 것이......

(얼핏 읽고 적으니; 자신이 없네요.)

로쟈 2008-01-09 22:08   좋아요 0 | URL
희생자들이 정당하게 살해됐다는 건 텍스트 서술자의 관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는 희생자들이 무고하게 살해됐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텍스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희생자들이 존재했다는 건 말해주니까 그 점에서는 진실을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소경 2008-01-10 06:41   좋아요 0 | URL
현대의 독자들을 향한 글에 다른 내용을 은근히 집어 넣었군요. 맥락을 잘못 집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