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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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지젝거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최근에 급기야는 ‘지젝거리는’ 이들을 위한 교본까지 등장했으니,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가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통해서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삐딱하기 보기>(시각과 언어, 1995) 이후에 열댓 권이 넘는 지젝의 책들이 우리말로도 번역/소개되었으니 우리 또한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한편으론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 지젝의 지적 파워를 확인시켜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의 말들을 (도대체 알아먹지 못할) 지저귀는 언어로 옮겨놓음으로써 가뜩이나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로 오해받는 지젝에 대한 반발과 미움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마이어스의 책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로서 그러한 오해와 미움을 단번에 불식시켜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한 입 크기로 적당히 썰어놓은 지젝의 아이디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다 보면 “아하, 그렇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결국엔 저자의 이러한 결론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지젝이 라캉으로 ‘되돌아가고’, 라캉이 프로이트로 ‘되돌아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젝에게 ‘되돌아갈’ 것이다.”(231쪽) 

 

이러한 여정의 안내자로서 저자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지젝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 즉 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예비적인 설명을 앞세운 이후에 다섯 가지의 핵심 이슈로 그의 사상을 갈무리한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이 주제들을 다루는 각 장의 말미에 친절하게 요약돼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지젝에게서 과연 무엇이 새로운가는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지젝은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근대적 주체로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그가 말하는 주체(subject)는 ‘자기로의 철회’라는 극단적 상실의 결과로 이르게 되는,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고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이 텅 빈 자리는 주체화(subjectiviz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채워지는바, 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주체’와 ‘주체화’의 차이이며, 이 차이는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견주어 ‘주체론적 차이’라 이름붙일 만한 것이다(지젝의 철학박사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의 주체는 아무런 내용물도 갖지 않는 텅 빈 장소이자 공백이지만, 이 공백은 언제나 주체화가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코기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지젝은 근대(모던) 주체철학의 계보를 계승한다.

 

하지만, 그의 주체철학은 탈근대(포스트모던)의 탈-주체철학 이후에, 그것을 비판/극복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도래 가능한 철학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이후, 즉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젝이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리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를 우리는 그가 다루는 다른 주제들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지젝의 사상을 안내하는 여정의 끝에서 저자는 지젝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소급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고,“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기에 그는 현재 ‘유령’이다). 그러한 예언을 다만 미래의 것으로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1989/1991년 이후의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젝의 작업들은 그가 어쩌면 '우리 시대의 헤겔'일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리고, 마이어스의 책은 이 ‘또 다른 헤겔’ 입문서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제대로 ‘지젝거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의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 비록 그가 유령이라 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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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6-1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거리고 싶은데요, 지젝의 책을 읽어볼까 하는 단계입니다. 이 책으로 시작해도 될까요. 그의 삐딱하게 보기나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읽어내는 '잉여쾌락'의 맥락을 짚어보고 싶어서요. 혹 먼저 추천해주실 만한 책 있나요?

로쟈 2005-06-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이 책이 제일 쉽습니다(몇 가지 오역/오타만 확인하시고 읽어보시길). 이어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정도를 읽으시면 될 텐데, 슬슬 만만찮아집니다. 물론 좀 익숙해지다보면, 지젝을 읽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얼마나 유익한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아시게 될 겁니다.^^

돌바람 2005-06-1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에는 지젝이랑 놀아야겠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고 밑줄그어대는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저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로쟈님!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 9.11과 그에 관련된 날짜에 관한 다섯 가지 논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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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과 이후의 국제정세를 다룬 책들은 제법 나와 있지만,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은 지젝의 것이다. 하지만, 이 국역본은 대개의 지젝 번역서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책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지젝의 고뇌와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게만 할 뿐이다.

잠시 그 몰염치를 추궁해 보면, 먼저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에서 따온 책의 제목부터가 잘못 번역되었다. '실재라는 사막으로의 초대'란 뜻인데, 풀어쓰면, (영화에서처럼)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도이다. 제목의 '환대'란 말은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데, ‘환대’는 '누구누구를 환대하다'나 '어디어디에서의 환대'라는 표현으로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어디로의 환대’라니?

책의 서문은 또 어떤가? 25쪽에서, 체스터튼을 인용하면서 지젝이 자유의 역설을 얘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로 돼 있는 부분은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에 대항하는 가장 안전한 방어벽이라고...'의 오역이다. 역자는 'safeguards against freedom'를 '자유를 지켜내는 보호물'이라고 정반대로 옮겼다. 그렇게 되면, 자유사상과 자유간의 역설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건 시작에 불과하다. 1장의 제목을 역자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 모사에 대한 열정'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지난번 지젝 초청강좌에서의 제목처럼 ‘모사’보다는 '가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며 이해하기에 쉽다. 또, 37쪽의 '외관'은 전부 ‘semblance’의 번역인데, 1장에 제목에서처럼 '모사'라고 했으면, 아예 일관성 있게 ‘모사’라고 하든가, 아니면 '가상'이라고 옮겨줘야 한다. 그것이 외관/외양을 뜻하는 ‘appearance’와 동일하게 번역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리고 'cutters'를 '자르는 자'로 번역했는데, 면도날 등으로 자기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자(대개 여성)를 가리키므로, '면도날 자해자'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8쪽의 ‘심신상관학설’은 ‘holistic’을 옮긴 것인데, holistic이란 건 기계론적(mechanical) 자연관과 대비시켜서 쓰는 말로서, ‘전일론적’ 혹은 ‘전체론적’이란 뜻을 갖는다('심신상관학설'이란 건 영한사전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번역이다).

40쪽에서 '그것을 해내지 못했고'는 '테러(그것)를 한 것이 아니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전형적인 포기자(disclamer)'는 '전형적인 부인 문구'의 오역이다. 즉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실제와는 무관하다'는 식의 문구를 말한다. 이어지는 41쪽의 '리얼리티 소프(reality soap)'는 '리얼리티 비누'라고 안 옮긴 게 그나마 다행인데, 이건 그냥 우리식의 드라마이다(TV연속극). ‘soap’는 TV용 연속극이나 멜로드라마를 뜻하는 ‘soap opera’의 약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여자(participants)'는 '출연자'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같은 쪽에서 '생물발생학설(biogenetics)'는 물론 '생물유전학'의 오역이다. 이걸 '생물은 생물에서만 발생한다는 학설('biogenetic'이 그런 뜻이다)'이라고 역자주까지 달아놓은 건 좋게 봐줘도 코미디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그러니, 아무리 원저가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이 번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다시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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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6-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s a translator, he is one of the worst!...

비로그인 2004-07-2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쿤데라 카페의 로쟈 님이시다ㅇ_ㅇ 알라딘에서 뵈어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일반 교양서로 이 책을 구입하고 싶었습니다만 로쟈님의 말에 따르면 번역가로서 최악인 분께서 옮긴 책인데, 글읽기에 미숙한 제가 제대로 읽어낼런지 시작 전부터 두렵군요.;

2005-04-18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4-18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지 싶습니다'가 아니다, '맞습니다'. 작년 6월이면 제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이고, 한글 쓰는 요령도 알지 못할 때라서 어줍잖은 영어로 댓글을 달다 보니까 오타가 났군요. 다른 지적들도 마음놓고 해주시길...

jo 2013-01-1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안보실거 알지만 흔적을 남깁니다.
책러브에 저희 어머님이 다니시는뎅.......
저도 교보문고에서 하시는 강의도 보러 간 적있고요....
인기가 많으셔서 댓글이 통제되어 있나봐요. ㅎㅎ
아, 2012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2013-01-18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9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 동문선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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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그런 만큼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은 내가 읽은 바로는 가장 쉬운 책이기도 하다. 심지어 책을 읽기도 전에 대충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고, 그게 읽은 후의 소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잘 읽히는 책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같은 역자의 <강의에 대한 강의>를 읽고 느낀 것이지만, 부르디외는 아직 적합한 번역자를 만나지 못했다. 불쌍한 부르디외!...

오역의 몇 가지 사례만 지적한다. 서문에서 저자가 매스미디어들의 부추김 때문에 일전을 불사할 뻔했던 터키와 그리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스 병사의 섬 상륙, 함대의 이동, 그리고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었습니다.”(12쪽) 여기서 “전쟁은 정의를 피했을 뿐”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영역본이 “war was only just avoided.'(전쟁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인 걸로 봐서 역자는 불어의 justesse(혹은 justice)가 들어가는 숙어(‘가까스로’)를 잘못 옮긴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오역/실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역자는 그렇다 쳐도(역자의 실력이 그렇다면) 교정자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단순한 오역을 놓친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은 어떻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저는 말하자면 과거의 온정주의 교육적 텔레비전을 바라는 향수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향수가 대중의 취향과 대규모 방송 수단의 민주적인 이용을 위한, 대중의 자발적 혁명과 선동 정치적 복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48족)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아파오는데, 이유는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역자는 아무런 고통없이 번역했을까?).

두번째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과거의 가족주의적-교육적 텔레비전이야말로 제가 보기엔 (로자 룩셈부르크식의) 대중적 자발주의나 대중적 취향에 대한 선동적인 투항 못지않게 대중매체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사용에 대립됩니다.” 즉 부르디외는 매중매체에 대한 순응이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닌, 민주적인/비판적인 활용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의 번역문을 그런 뜻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식의 오역들이 책에는 드물지 않다. 부르디외의 번역이 쉬운 작업은 아니겠지만, 부르디외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번역이 이 정도 수준에 머문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로서는 하여간에 오역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수밖에 없겠다. 좋은 책을 읽을 권리는 그냥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불성실한 번역서들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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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4-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구해서 읽어야 하는 ... 저는요....흐흐
 
믿음에 대하여 - 행동하는 지성 동문선 현대신서 13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 / 동문선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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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에 방한할 예정이기도 한 지젝으로서 불행한 것은 그 번역서들이 대부분 오역의 진창이라는 사실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그의 ‘영화책’들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주의해서 읽어야 하거나 차라리 안 읽는 게 더 나은 번역서들이다. 그간에 압권은 <향락의 전이>였는데, 그보다 더한 ‘향락’을 선보이는 책이 바로 <믿음에 대하여>이다.

책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오역으로 가득 차 있다. '모세의 형상'을 '모자이크한 모습'으로 옮기기 시작하더니 '인도'를 전부 '인디언'으로 탈바꿈시키고,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난데없이 '실존성'으로, '뉴에이지'는 '신시대'로 옮겼다(뉴에이지는 신시대가 아니다!). '진리의 정치'를 전부 '진실의 정치'로 옮기고, '대상 a'는 ‘대상’ ‘물질’ ‘사물’ 등 갈피를 못잡고 옮긴 걸로 봐서 역자는 라캉/지젝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으며 읽어본 적도 없어 보인다(무슨 사명감으로 번역에 나선 것인지?).

정말 경악스러운 대목. “라캉의 관심은 지배자에 관한 강좌로부터 당시 사회에서 주도적 논의 대상이었던 우주에 대한 강좌로의 이전에 있었다. 논점이 우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38쪽) 전후좌우가 다 오역으로 도배돼 있지만, 이 대목은 정말 하이라이트이다. 믿기지 않을까봐 원문을 인용한다. “Lacan's interest is focused on the passage from the discourse of the Master to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s the hegemonic discourse in contemporary society. No wonder that the revolt was located in the universities.”(30쪽)

중학생도 해독할 수 있는 단순한 구문이다. 라캉의 네 가지 (강의가 아니라) 담론(discourse)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만 갖고 있다면 말이다(라캉 입문서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해서 다시 옮기면, “라캉의 관심은 주인의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지배적 담론인 대학의 담론으로의 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반란이 대학들에서 일어났던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여기서 ‘반란’은 아마도 68혁명을 가리키는 듯하다.)

역자는 무슨 생각에서인지(대문자라서?) ‘대학(University)’을 ‘우주’로 옮긴다. 라캉이 천문학자였단 말인가? ‘대학’이 ‘우주’로 바뀐 것이 역자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몰라도 독자로선 놀라 자빠질 일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번역서에서 역자는 엄청난 누락도 서슴지 않는다. 번역서 52쪽(원서 45쪽) 밑에서 6행 ‘그러나’ 앞에는 2/3쪽(20행)이 누락돼 있다. 정말 집어던지고 싶은 책이다!

해서 책을 더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다. 역자나 출판사측의 책임있는 해명을 요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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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7-15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iverse가 우주 아닌가요? 와하하. 이건 정말 우습네요. 출판사에 항의 하셔도 되겠습니다. ^^;;; 이런 책은 리콜해야 한다고 봅니다. 네.

심심이 2005-02-1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통쾌합니다. 동문선에서 나오는 책들은 대부분 이 수준입니다.
문제는, 동문선에서 좋은 책들을 미리 죄다 선계약 해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범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동문선에 항의하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될 듯....

로쟈 2005-03-0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살펴보았는데, 정말 무슨 생각으로 번역하고 책을 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더군요. 동문선은 '동문악'으로 개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Dieyoung 2005-11-2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라보이 지젝'은 이 책의 번역에 대한 하나의 증상으로 보이는군요(웃음).

고기 2008-12-26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동문선 오역본 시리즈. 개인적으로 동문선은 대한민국 인문학의 적과 같은 출판사라고 생각. 공감합니다.

카니발 2011-01-15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동문선의 불어번역사 가운데 제대로 끝까지 읽어본 책들이 없어요. 개론서 조차도 읽기 어렵게 번역이 되는지!
 
향락의 전이 (개역판)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인간사랑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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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젝은 한나 아렌트와 함께 올 한해 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저자이다. 따라서 지젝의 책이 좀더 많이 번역 소개되기를 누구보다도 바라는 편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제대로 된' 번역들을 통해서 소개되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상당히 유감스럽다.

작년에 두 종이 번역돼 나오고, 이 개역판까지 포함하면 올해는 세 종이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정도를 제외하면(물론 여기에도 오타와 오역이 없지는 않다) 나머지 두 종은 제값을 못하는 번역서들이다. 특히 이 <향락의 전이>의 경우는 차라리 나오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불성실하고 무책임하다.

역자 자신이 개역판의 서문에서 시인하고 있듯이 초판은 '몇 군데 오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역자가 말하는 '몇 군데'라는 건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인데(거의 맞는 게 없었다), 개역판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비록 기본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노고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다. 내 생각에 이 번역은 몇 군데 정도가 읽을 만할 따름이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있다. 그래도 이건 영어가 병기돼 있어서 눈치껏 읽으면 된다. 하지만, 멀쩡한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왜 '쿤스투리카'로 개명해놓고, 거기에 'Kunsturica'(406쪽)라고 병기까지 해놓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역자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있는 교정을 하지 않았다(내가 읽은 1장 등에서 내용이 제대로 고쳐진 대목은 딱 한군데였다).

예컨대, 1장 시작부터 '부모의 성적 착취'(parental sexual abuse)를 역자는 '아버지의 성적 남용'(28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욕동이론과... 해석의 이중성'을 '욕동이론의 이중성'(29쪽)으로 옮기고,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를 줄곧 '개량주의'(30쪽 이하)로 옮겼다. '제2의 본성'(second nature)은 '이차적 자연'(33쪽)으로 옮기고, '억압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는 요구'는 계속 '억압의 모든 장벽을 벗기려는 요구'로 옮겼다. '한순간이라도 멈춰서 생각해본다면'을 '한순간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춘다면'(44쪽)으로 옮기고,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170쪽)으로 옮겼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역자에게는 '몇 군데 오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때문에 '이 역서가 이미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사람들이 그의 글쓰기를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확인해 주기를 바라고,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게는 지젝과의 꾸준하고 의미있는 지적 의사소통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11쪽)는 역자의 바람은 정치코미디에 가깝다.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겐 애꿎은 고역만을 선사한다. 한국의 출판계와 지식사회에선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지는지 정말 궁금하다(물론 이전에 더 심한 오역서들도 수두룩했다. 문제는 21세기 대낮에도 이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몇 군데 오역'을 손본 대가로 출판사는 책값을 10,000원이나 올렸다. 물론 하드커버로 장정이 바뀌긴 했지만(정말 종이가 아깝다), 역시나 무책임한 처사이다. 초판에 문제가 있다면, 전량 회수하여 환불하거나 구입한 독자들이 개역판과 교환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 이후에라면 '독자들의 '너그러운' 다시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라는 역자의 부탁이 덜 민망했을 것이다. 물론 지젝의 열성적인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에 대해서 결코 너그러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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