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에서 뮈토스까지 - 소쉬르 사상의 새로운 지평 한길신인문총서 4
김성도 지음 / 한길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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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에 관한 국내의 단행본 저작으로는 김방한 교수의 <소쉬르- 현대 언어학의 원류>(민음사)에 이어 두번째인 듯싶다. 김방한 교수의 책이 주로 언어학(사) 내지는 언어학사상사적 관점에 국한하여 소쉬르를 조명하고, 그의 <일반언어학 강의>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해설을 의도하고 있다면, 김성도 교수의 책은 보다 폭넓은 시야에서 소쉬르 '혁명'이 가져온 의의를 해명하고자 하는 가운데, 그간의 왜곡 혹은 축소된 소쉬르 상을 교정하고자 한다.

우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문헌학적 접근에 있다. 소쉬르학의 방대한 1, 2차 자료들을 섭렵, 정리하고 있는 저자의 필로로지컬 파워가 이 책에 무게를 실어주며 또 떠받쳐 주고 있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총체적인 소쉬르 상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 작업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은 그동안의 소쉬르 수용, 혹은 소쉬르 사용이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자의적이었다는 저자의 판단이다.

'우리가 읽은 소쉬르는 완전한 사실도 아니며, 완결된 픽션도 아니다. 문헌학적 문제와 상관없이 현대언어학의 '권리장전'이며, 바로 <일반언어학 강의>의 저자 소쉬르는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라캉, 데리다 등이 읽은 소쉬르이다.'(64쪽) 물론 이 소쉬르-사용자 명단에는 바르트도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쉬르를 가장 효과적으로 또 거국적으로 전파시킨 구조주의의 명장들이 바로 소쉬르 이론을 왜곡한 장본인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201쪽) 진단으로부터 저자의 교정에의 의지가 발원한다.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소쉬르를 부당하게, 혹은 '비합법적'으로 왜곡하거나 축소시킴으로써, '구조주의의 아버지'라는 잘못된(!) 소쉬르-이미지를 각인시켰다(프랑스의 언어학자 무넹이 이미 경고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충실한', '정통적인' 소쉬르학도인 저자를 불편하게 하며 다시 소쉬르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유케 한다. 그리하여 그가 다시 읽는 소쉬르는 훨씬 풍부한 소쉬르이며 구조주의 비판까지도 선취하고 있는 소쉬르이다. 어떤 대목에서는 '천재 소쉬르'에 대한 저자의 신앙까지도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소쉬르에 대해 한마디 하려면 일반 독자들까지도 소쉬르 아르키브를 찾아가야만 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모든 '고전적' 학자들은 후학들이 마음껏 덧칠하고 뛰놀 수 있는 그러한 '여백'과 '빈터'를 가지고 있다. 소쉬르에 대한 모든 왜곡과 오류적 해석까지도 사실은 그의 풍부함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 소쉬르의 '발견'을 통해 구조주의의 유행을 창시하고, 인문학의 지리적 풍경을 변모시킨 선구적 구조주의자들이 읽은 소쉬르도 '소쉬르'이다.

하지만 '소쉬르의 언어이론과 현대인문학'장에서 검토되고 있는 메를로-퐁티와 레비-스트로스, 라캉 등에 대해서 저자는 대단히 소략하게 다룬다. 거기에 역시 빠져 있는 것은 메를로-퐁티의 '풍부함'이고, 레비-스트로스의 '풍부함'이며, 라캉의 '풍부함'이다(그리고 데리다의 '풍부함'이다). 소쉬르의 '풍부함'과 대조되기 위해서, 이들의 '풍부함'은 부당하게 축소되어 있다. 문제는 읽기의 '힘'이고 '창조적인 오독'인 것이지, 메마른 사실 확인이 아닐 것이다(물론 이 책에서는 '풍부한' 사실 확인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인문학에 대해서 아직도 그러한 편견을 고집하고 싶다.

하여간에 이 노작(勞作)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소쉬르가 아닌 보다 복잡한 소쉬르, 보다 깊이 있는 소쉬르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후학들에게 다행한 일이면서도 불운한 일이다. 도대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누군가에 대해서 쉽게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또 한번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삶의 근원적인 어려움에 대한 인식(the original difficulty of life)'에 바쳐지는 학문이란 뜻에서 이 책은 지극히 인문학적이다. 이제 우리도 이 정도 규모의 '소쉬르학'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 - 그것이 이 책의 의의이며, 우리 인문학의 자부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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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 십계,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김용규 지음 / 바다출판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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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화관 옆 철학카페>의 저자이기도 한 김용규의 신작 <데칼로그>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소재로 한 '무거운' 신학/철학 이야기이다. 사실 저자가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연작 <데칼로그> 또한 십계가 새겨진 모세의 돌판만큼이나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들이다.

일주일에 한편씩/한장씩 읽기로 한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대목은 다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이다(물론 다 유쾌하지 않은 요즘의 정세탓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음울해보이는 청년 야첵이 바르샤바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택시운전사를 아무런 원한도 없이 잔인하게 살해하고 자신도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줄거리. 흔히 불법적인 살인(=죄)을 응징하기 위한 합법적인 살인(=벌)은 과연 정당한가를 묻는 영화로 이해된다.

저자는 이 영화를 통해서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계명을 모든 인간에 대해 '그 영혼을 죽이지 말라' 즉 '존재론적 살인을 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확장 해석한다. 그리고 그 존재론적 살인을 '소외-시킴'으로 재정의한다. 그렇게 되면, '이 영화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발광하고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까지 파멸시키는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203쪽)이다.

물론 여기서 더 중요한 지적은 '야첵에 의한 살인'이 있기 전에, 이 '야첵에 대한 살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사회가 야첵을 '소외-시킴'(=존재론적 살인)으로써 자신의 존재의미를 상실한 야첵이 그러한 무의미한 살인을 저지르도록 방조했다는 것.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단순히 살인범 야첵을 다시 살인함으로써는 얻어질 수 없다. '소외-시킴' 때문에 악이 나온다면, '사랑-함'을 통해서 그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제5계명은 '소외시키지 말지니라'는 뜻이며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할지니라'는 뜻으로 확대된다(209쪽).

저자는 야첵의 살인을 해명하기 전에 소외된 인간의 한 전형으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분석한다. 이 둘은 모두 세계로부터는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187쪽)이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과 함께 내가 먼저 떠올리게 되는 <죄와 벌>(열린책들, 2002신판)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는 어떨까? 전당포 노파에 대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야첵이나 뫼르소의 경우처럼 아무 생각없이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벌레같은 존재를 해치우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살인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계획적이다.

물론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한 계획의 실행에 여러 우발적인 요인들이 개입되는 과정도 예리하게 묘파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그것이 논리(변증법)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의 진정한 속죄와 갱생의 배경으로 숨막힐 듯한 도시 페테르부르크가 아닌 광활한 시베리아를 설정한다. 작품의 에필로그에 와서야 우리의 주인공은 비로소 사람들로부터의 자신의 소외를 발견하고, 소냐의 사랑을 발견하며, 복음서를 손에 든다. 작가는 그러한 과정을 '변증법 대신에 삶'(809쪽)이 도래했다는 말로 표현한다. 즉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에서의 문제틀은 존재론적 살인에서의 '소외-사랑'이 아니라, 정치적 살인에서의 '변증법-삶'이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정신병자인지 정치적 확신범인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았지만, 각각의 경우에 따라 해법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전자라면그를 소외시키지 말라, 그에게 사랑을 주라. 그리고 만약 그가 후자, 즉 테러리스트라면, 그에게 삶을 주라, 제발 그의 조국을 못살게 굴지 말라. 더불어 대테러전쟁을 통해 수만의 인명을 살육할, 자신이 비범한 나라인 줄 착각하는, 남들 못지 않게 비정상적인 나라 미국의 사전범죄(pre-crime)에 대해서는, 두 가지 처방이 있을 것이다. 미국을 따돌리지 말지니라, 우리 모두 미국을 사랑할지니라. 그리고, 부시 행정부는 제발 선-악의 변증법에서 헤어날지니라. 그것이 너희가 갱생할 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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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 대한 강의 동문선 현대신서 8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 동문선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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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2년 부르디외의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강의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는 그 강의(사회학)를 레이몽 아롱으로부터 물려받는다. 이 강의는 역서의 머리에 명시돼 있듯이 정확히는 1982년 4월 23일 금요일에 행해진 것인데, 우리말로 45쪽 정도 되는 분량(영역으로는 21쪽)이니까 2시간 정도 읽어내려 갔을 듯하다. '강의에 대한 강의'란 제목이 뜻하는 건 자신의 사회학 강의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르디외의 취지에 걸맞는 강의를 우리는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번역본은 실제 부르디외의 강의와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글이 난삽한 건 잘 알려져 있지만, 독해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번역서는 독서불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부르디외를 한참 뛰어넘는다. 부르디외 전공자의 번역이란 말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시작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학에 대해 말하는 부분: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과학의 주제에 적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10쪽) 이 문장을 어느 누가 '사회학이 표명하는 모든 명제들은 이 학문[사회학]을 실행하는 주체[사회학자]에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합니다.'는 뜻으로 읽겠는가?(역자는 여러 곳에서 '주체'를 '주제'로 옮기고 있다.) 많은 걸 기대할 수는 없지만, 공자의 '이름의 정당화'(48쪽)도 '정명(사상)'으로 옮겨야 한다.

제대로 읽히는 대목이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긍정문/부정문을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행위가 왜 일어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45쪽)는 문맥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은 어떤 행위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쯤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부르디외가 말하는 행위는 사회적 행위이고,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자명한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게임]속에 행위자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사실상 뒤르켐이 말한 바, '사회는 신이다'까지 인용할 필요 없이, 저는 '신은 전혀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사회에서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유일하게 인정하는 힘, 인위성 우연성 부조리를 제거하는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50쪽) 이 또한 역자가 사회학자가 맞는지 의심케하는 오역이다. 첫문장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사회를 통해서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사회만이 여러분을[여러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며 사실성, 우연성, 부조리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로 옮겨야 한다.

부르디외에게 있어서 개인과 사회 같은 명사들의 이분법은 가짜이다. 그에겐 사회적 실재는 사회적 관계(구조)뿐이다(이것은 마친 전능한 신과도 같아서 무의미한 실존들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즉 오직 사회 속의 개인, 개인 속의 사회만이 있을 뿐이고, 이것을 표시하는 독창적인 개념들이 장이나 아비투스 같은 것들이다. 사회학적 지식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그 역시 지식과 학문의 장 속에서의 상징적 투쟁[게임]의 산물이다. 부르디외가 사회학에 대한 편견들을 불식시키면서 이 '사회학의 사회학' 강의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학의 성격과 지위이다.

이쯤에서 역자의 변명을 들어보자. '역자는 현학적인 표현 속에서도 엄격하게 사용되는 말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직역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역자는 조금 더 노력해서 가급적이면 이 번역본을 출간하지 말았어야 했다. 또, '번역 수준에 대해 역자 자신은 아직도 불만족스럽다. 이 번역판을 읽는 데에 독자의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를 구한다.'(65쪽) 정말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가 필요하다! 게다가 시간과 돈까지 필요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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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 2010-12-1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피에르 부르디외의 이 책을 영역본으로 읽을려고 하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런는데 영역본 제목을 알 수 있을까요?
 
근대성의 구조
이마무라 히토시 지음, 이수정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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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을 읽기 전만 해도 일본학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들은 요약정리는 잘하지만(그래서 참고서로는 제격이지만) 깊이는 없다는 것. 하지만, 이마무라의 책까지 좀 뒤늦게 읽어 보니까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깊이라기보다는 독특한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요컨대, 이들은 일급의 요리가들이다. 이마무라가 근대성(modernity)이란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낸 요리 또한 생각보다 정갈하고 먹음직스럽다.

맨앞에 놓인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책이 근대(그리고 근대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역사철학적 해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하나의 가설적 해석인데, 그는 그러한 해석을 통해서 근대의 전체상을 그려보고자 '시도'(essai)해 본다. 시도라는 건 한번 해본다는 말인데(따라서 남들은 전혀 다르게 해볼 수도 있다), 저자의 경우는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게다가 이 '시도'라는 것을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근대의 '기도'(projet) 정신과 대비시키기까지 한다.

'근대의 기도 정신은 선취 의식과 구축주의의 일원론으로 일관하여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 왔다. 기도 정신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가능성을 살릴 수 있는 <시도의 정신>에 설 수밖에 없다.'(220쪽)

이 시도의 문학적 장르명은 에세이다. 즉 이 책은 근대성에 관한 A급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A급인 것은 우리의 상식을 돌파해나가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근대=기계론적 세계상'이란 등식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지만, 저자는 거기에서 만드는 의식과 제작으로서의 세계를 끄집어 내고, 또한 진보의 시간관, 개체주의와의 연관성을 밝혀낸다. 개체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의 바탕이 기계론적 세계상이란 걸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지만, 근대사회를 떠받치는 의식이자 도덕의 원리로서 미래에 대한 기도(projet)를 제시하고, 그 점에서 (자본주의)기업가와 (사회주의)혁명가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제값을 하고도 남을 만하다.

저자가 참신한 시각과 개념들을 구사하며 그려내고 있는, 1968년 이후 회의되기 시작한 근대의 초상은 한번쯤 읽어볼 만한다(이 또한 시도이다). 아키라나 고진과 마찬가지로 군더더기없는(사무라이 필법인가?) 간결한 문체에 실린 사고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짐작에 그 힘은 일본의 번역문화에서 나오는 듯한데, 고전의 태반이 미번역된 우리의 경우 서구 문명의 고전들을 원어로 읽어가자면, 한두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에는 도달할 수 있겠지만, 이렇듯 폭넓은 시야의 박람은 얻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려고 해도 우선은 재료가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끝으로, 저자가 근대의 이해/회의를 위한 필독서로 제시하고 있는 책들을 적어둔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기원>(1928),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1929)이 그것들이다. 벤야민의 책이 우리말로 빨리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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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0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재밌을 것 같아요. 서평에 대한 감상은, 저 책을 읽어본 뒤에 하도록 할께요.

(과연 언제가 되려나 -_-)



.. 이런 식으로, 로쟈님 서재에 들락거리게 됐다고 '신고'합니다. *^^*
 
데리다 - 시공 로고스 총서 8 시공 로고스 총서 8
크리스토퍼 노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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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1930- )를 아십니까란 물음에 제법 고개를 끄덕일 만한 독자는 많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그는 정말 중요한 철학자다. 심지어 그에 관한 영화까지 만들어진! 하지만, 디지털 영화제에서 본 <데리다>(2002, 85분)의 번역 자막에도 오역은 드물지 않았던 걸 보면(가령 '부정신학'을 '네거티브 이론'이라고 옮겼다), 그에 대한 이해는 많은 오해와 더 많은 무지 사이에서 한동안 배회할 듯싶다.

미국인 여성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영화 <데리다>는 자신의 삶과 철학에 대해서 대담과 갖가지 다큐 자료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가장 최근의 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책의 표지 대로이다. 백발이고 좀 작은 키에 단단해 보이는 인상인데, 눈웃음이 자상하지만 눈매가 깊고 예리하다. 미국 영화배우 '조 페시의 똑똑한 형' 같은 인상이다(그의 형에 의하면, 데리다의 집안은 전혀 지적이지 않은 집안이다. 그는 집안의 '천재'이다.) 그런 그가 짓궂은 질문들에 대해서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답변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데리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적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의 실물과 목소리를 접할 수 있으니까. 또 그의 철학의 끊임없는 공격대상이긴 하지만, 바로 그 '현전'(presence)의 형이상학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자(중의 한 명, 최소한)와의 85분간의 대면이 그에 대한 과감한 관심(열정)으로 발전한다면, 비로소 우리는 그의 글쓰기의 세계, 문자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이때도 가장 좋은 건 그의 대담들이다. 국내엔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에 실림)이 가장 유용하고, 좀 어렵고 번역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입장들>이 도전해 볼 만하다.

그런 다음에, 본격적으로 그의 저작을 읽어나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사정이 또한 그렇지가 못하다. 번역된 책들 중에 그의 초기 주저라 할만한, <그라마톨로지>나 <글쓰기와 차이>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는 10여쪽을 못 넘기고 포기하기 십상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1987)이다. <해체비평Deconstruction>(1982)으로 명성을 얻은 저자가 쓴 본격적인 데리다 안내서이다. 내가 읽은 <해체비평>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지만, <데리다>에서 노리스는 훨씬 정교한 논리적 분석과 재구성을 통해 데리다의 전략과 실제를 소개한다.

데리다의 저작이나 그에 대한 연구서 번역들이 대개 부정확하고 미흡한 번역으로 독자를 고생시키는 반면에, 직업번역가가 번역한 이 책은 (물론 부정확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명쾌하여 문맥을 살피면서 읽는다면 충분히 독파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 자신도 이전에 절반쯤 읽다가 접어둔 걸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영화 때문에!) 오히려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노리스를 길안내 삼아 데리다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으리라.(<그라마톨로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루소의 텍스트 <인간언어기원론>도 최근에 번역돼 나왔기 때문에 같이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  

후설 현상학에 대한 해체에서부터 해체론이 함축하고 있는 윤리학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87년에 나왔으므로 당연히) 90년대 이후의 데리다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입문서로는 <데리다 입문 Derrida for beginners> 같은 쉬운 책도 번역돼 나왔으면 싶다. 최근의 철학까지 포괄하고 있는 책으로는 카푸토Caputo의 <호두껍질 속의 데리다 Derrida in a nutshell>가 권할 만하다.

그런데, 데리다를 왜 읽어야 하느냐고? 그것은 데리다에 이르러 철학이 다른 가능성(철학의 타자)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철학의 가능성, 또 다른 사유의 가능성, 더 나아가 또 다른 삶의 가능성. 데리다를 읽는 이유는 그 가능성에의 모험이 우리를 잡아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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