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정치철학 강의 푸른숲 필로소피아 9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푸른숲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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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유태계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의 유작이 번역되었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이나 <정신의 삶>(1971) 등이 칸트가 체계적인 정치철학을 쓰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 책(강의)보다 사실 먼저 출간됐어야 하지만, 순서야 어찌됐든 그녀의 책들이 더 많이 번역되고 더 많이 읽히기를 기대하는 독자로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렌트의 유작을 읽는다는 것은 좀 무리해 보인다. 그녀가 어떤 문제의식을 통해서 판단의 문제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조감하지 않고서는 이 '강의'에 접근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는데 거기서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이다. 사실 사회적 동물로 흔히 번역돼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zoon politikon'이란 말은 '정치적 동물'이란 뜻으로 번역돼야 한다. 그리고 이 '정치적인 것'의 발견/발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할 만하다. 아렌트는 중세 이후로 사장된 정치적인 것을 재발견하고 사적 영역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을 복원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중요한 행위능력인 정치적 행위를 회복하고자 한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즉 정치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동물임(being animal)으로부터 구제되어 비로소 인간임(being human)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만연해 있다면, 그만큼 우리 스스로가 정치적 행위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즉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아렌트는 정치적 진리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정치'철학'에 비판적이다).가령 우리는 2×2=4인가, 아니면 2×2=5인가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가 도는지 마는지를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후보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같은 문제는 정답, 즉 진리를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 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하는 공동행위, 즉 함께-행동함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공동으로 주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판단은 취미판단과 닮았다. '판단, 특히 취미판단은 항상 타인과 타인의 취미를 반성하는 가운데,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가능한 판단들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인간이고 또 인간들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132쪽) 예컨대, 미군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치인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감(common sense)이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이다.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는 일이다.그리하여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이거나 여기저기서 미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정치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우리 정치의 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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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의 역사 2 동문선 문예신서 137
프랑수아 도스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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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처음 책을 보고 반갑고 놀라웠다. <구조주의의 역사> 전 4권 중에서 제1권이 출간된 게 4년전, 그러니까 프랑스월드컵이 열리던 해였다. 이제 한일월드컵 해를 기념해서 2권이 나왔으니까 3권은 아마도 2006년 독일월드컵때 보게 될 것인지!? 하여간에 출판사에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늦게라도 번역돼 나오니 그나마 다행이다(나오다 만 무책임한 책들이 더러 있다).

이 책이 갖는 강점은 현장감이다. 역사학쪽보다는 저널리즘쪽으로 분류되는 게 타당하다 싶을 정도로, 현장감 넘치는 인터뷰들이 페이지 곳곳에 배치돼 있다. 때문에 구조주의가 '숨쉬던 공기'를 느껴보든 데 가장 적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를 넘어서 후기구조주의니 탈구조주의니 하는 말들이 유행하고, 이젠 그나마 시들해져 가지만, 책을 읽다보면 '생생한' 구조주의와 만나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책 1권은 주로 문학전공자 10명의 공역으로 그런대로 읽을 만했지만, 이번 번역은 직역투에다가 짜집기 번역이다. <순진함의 유혹>이나 <20세기 프랑스철학> 같은 몇몇 번역서에서 보여준 역자 김웅권의 솜씨가 아니다(*<20세기 프랑스철학>은 다른 역자의 작품이다). 짜집기 번역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혹은 짜집기 번역의 지표는 고유명사(인명이나 저작명) 표기가 일관적인가를 확인하는 것인데, 22쪽에서는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콩트 형태론'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의 논문 얘기가 나오고, 같은 저작이 27쪽에서는 <민담의 형태론>이라고 표기되는 것은 이 책이 명백한 짜집기 번역이라는 걸 말해준다(물론 후자가 맞는 번역이다).

프로프의 <민담의 형태론>(1928)은 서사학(narratology)의 기원을 여는 저작으로 60년대에 재발견된다. 국내에도 2종의 역서가 나와 있는데, '콩트 형태론' 운운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아마도 장별로 나눠서 번역한 것 같은데, 번역이 좀 들쭉날쭉하다. 오역의 또 다른 사례.

14쪽에서, ''하나의 모음이 움직일 때 그것은 전체 체계를 끌고간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적인 보어'임을 알게 해주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구조주의적인 '보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역자는 무슨 말인지 알고 번역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역자는 아마도 아무생각없이(기계적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그 부분의 영역은 이렇다(불어본과 대조해 보면 더 확실하겠지만). 'completely structualist insofar as when each vowel moves, the whole system moves with it.'이다. 역자가 보어라고 번역한 것은 여기서 completely이다. 짐작에 불어로 '꽁쁠리뜨망'이란 단어일 듯싶은데, 이것을 '꽁쁠리망'(보어)으로 착각한 듯싶다.

사소한 예들일 수도 있지만, 번역에 대한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진다. 이 책이 진지한 역사서라기보다는 저널리즘적인 안내서에 가깝고 굉장히 속도감있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지만, 역자들마저 책을 건성으로 읽는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좋은 책이 좋은 번역을 얻지 못한 듯하여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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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2004-03-0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세기 프랑스 철학] 이 '동문선현대신서 7'이라면 역자는 김웅권씨가 아니라 김종갑 교수입니다. ^^

로쟈 2004-03-04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맞습니다. 알라딘 리뷰를 한번 올리고 나면, 수정하는 게 번거로워서 그냥 놔두었는데, 눈이 밝으시네요^^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7
스튜어트 심 지음, 조현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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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이북스의 아이콘 시리즈는 전철이나 버스에서 읽기에 적당하다. 책상머리에서 정좌하고 읽는 건 이 얇은 문고본 시리즈가 의도하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오며가며 한두 권씩 읽는데, 그렇게 무익하지만은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그렇게 유익하지도 않다는 얘기?). 스튜어트 심의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책은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1994)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이다. 데리다가 뒤늦게 마르크스(주의)와의 친연성을 고백하고 있는 그 책은 하나 이상의 마르크스, 즉 마르크스'들'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했는데, 데리다 자신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위 자신의 정치철학을 개진한다. 그 정치학은 유령의 정치학이라 불릴 말한데, 데리다가 이 유령들을 불러들여서 '괴롭히고자' 하는 것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론이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사회주의 몰락 이후 '우리는 '인류의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종착점'에 도달했다(21쪽). 자유민주주의가 '인간적인 정부의 최종형태'라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했고, 그것은 번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류사에 더이상의 진보는 없을 것이다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요컨대, 우리는 후(post)-역사시대, 역사-부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그에 대해서 데리다는 역사 또한 '차연(차이나며 지연되는)'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때문에 어떠한 단절도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사유에 시작이나 끝은 없으며, 역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47쪽) 이것이 <공산당선언>이나 <햄릿>의 유령(학)을 통해서 데리다가 다시금 일깨우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는 역사의 유령들을 쫓아버릴 수 없으며, 따라서 이런 역사의 유령들은, 마르크스의 '유령', 그리고 공산주의가 시작될 때부터 항상 있어왔던 유령이라는 주목할 만한 예에서처럼, 우리가 그들과 타협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우리를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50쪽)

즉 우리가 역사의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제대로 갚지 못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라는 스토커/유령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 부채는 '역사의 종말'이란 말로 쉽게 결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이 점과 관련한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고이다.'(55쪽)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이러한 데리다의 유령론이 단순한 후쿠야마 비판을 넘어서 보다 급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데리다가 개진한 동일한 논리에 근거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단지 '끝날' 수 없다는 것 역시 증명할 수 있다는 점'(66쪽). 70년의 사회주의 통치 종말 이후에 다시 급속하게 자본주의화된 러시아를 보라. (모든) 유령은 항상 되돌아오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 '아마도 데리다의 논변이 입증하는 유일한 것은 현재의 정치제도가 무엇이든 유령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항구적인 요인들이라는 점, 따라서 그런 유령들과의 모종의 화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유령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67쪽) 우리의 대선후보들도 이 유령의 정치학 세례를 좀 받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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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포스트모더니즘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3
데이브 로빈슨 지음, 박미선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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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거의 모든 각종 철학 운동에서 그를 선구자라고 강제징집하듯 끌어들이고 있는데,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라고 할 이유가 있겠는가?(70쪽) 사실 여기까지 읽고 책을 덮어도 무방할 듯하다. 저자는 니체가 포스트모더니스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유유부단한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니체의 저작이 지닌 '매력과 탁월한 적응가능성'에 있다.

니체는 온갖 종류의 창조적 독해와 해석을 가능하게 하므로, 그는 파시스트이기도 하고, 여성혐오론자이기도 하며, 페미니스트에다 해체주의자이기도 하다(아마 그는 성불구이면서 동시에 동성연애자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전제가 그다지 불쾌하지 않다면, 이제 단숨에 책을 읽어보도록 하자.

저자는 80쪽 분량의 절반을 니체의 간략한 전기와 사상에 할애하고, 나머지 절반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니체를 대질하는 데 사용한다. 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것은 니체의 관점주의와 은유로서의 언어관이다. 그는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부인하며 모든 인식은 다만 일시적인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자기 시대의 모든 '거대서사'가 붕괴상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은 결코 인류가 살아가면서 의거하는 가치들의 원천이 될 수 없었으며, 이성과 논리에 대한 믿음, 과학과 그 '법칙', '진리'와 '지식'은 모두 그 근거를 잃었다. 니체는 심지어 의미가 안정된 언어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주체가 있다는 것까지도 반박했다.'(46쪽)

이런 그의 생각은 저자의 주장대로 '대단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저자가 파악하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회의주의이며, 그 기반은 언어란 항상 은유적이라는 바로 니체적인 언어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나 리오타르, 푸코, 로티 등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니체는 친화적이다.

한편으로 저자는 니체가 관점주의를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지는 않으며 니체식 관점주의가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는데, 그러한 지적은 이 얇은 책에서 건질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데리다식의 해체가 새로운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낳지는 못한다고 비판하는 부분(54쪽) 등 다소 성급한 주장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니체를 위해서는 <말과 사물>에서 니체에 대한 푸코의 언급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니체는 현대철학이 다시 사유를 시작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가 현대철학의 향방을 오랫동안 계속 주도할 것임은 분명하다.'(62쪽) 우리는 그 문턱을 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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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함의 유혹 동문선 현대신서 24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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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순진함의 유혹>은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동문선)과 함께 아주 감명 깊은 에세이이다(나는 이 두 저자의 책은 무조건 사고 본다). 95년에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했다고도 하는 이 에세이는 다분히 '프랑스적'이면서 그 특장이 여실하다. 그 화려한 문체와 독창적이고 집요한 문제의식...

그가 걸고 넘어지고자 하는 문제는 현대인의 유년기적인 행동성향(infantilism)과 희생화 경향(victimisation)이다. 그리고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둘 다 빚을 거부한다는 동일한 관념, 의무에 대한 동일한 부정,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무한한 채권을 가지고 있다는 동일한 확신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어떠한 책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두 방식으로 하나는 우스꽝스럽고 다른 하나는 준엄하다. 그것들은 생존의 투쟁으로부터 피신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희생화 경향은 유년기 행동 경향을 극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122쪽)

이 두 성향을 묶어주는 키워드가 바로 '순진함'(혹은 무죄성)이다. 즉 '자신은 어떠한 불편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자유의 혜택만을 누리고자 하는 기도'이며, 이것은 '자기 행위의 결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주의의 병'(13쪽)이다. 읽어가면서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러한 지적에 따끔함을 느낀다.

이 책은 어른이 된다는 것, 성숙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에겐 매우 유익한 책이다. 더불어 고종석이 개인주의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상한 바(혹은 희망한 바) 있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바람직한'/'좋은' 개인주의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역시 저자의 따끔한 지적:

"개인을 다루는 몇몇 현대 철학자들에게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지나치게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충분히 찬양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개인에 대한 소극적 해석을 제시한다는 것이며, 퇴화를 건강의 증거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것은 주체라는 관념이 건설적인 긴장이나 도달해야 할 이상을 전제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며, 기만은 개인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데도 기득된 것으로 제시할 때 시작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120-1쪽)

요는 개인, 혹은 개인주의 또한 우리가 고투를 통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두 가지 니힐리즘에 대응하여 기억해 둘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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