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불우했던 천재 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 붐이 일고 있다. 그의 미완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2005)가 ‘드디어’ 번역/출간됐고(최근에 절반이 나온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11월에 나온다고 한다), 곧 10권짜리 우리말 벤야민 선집도 연말부터는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벤야민의 세기’가 준비되는 것인가?

 

 

 

사실, 이러한 벤야민 붐은 서양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진작부터 시작된 것이므로 특별히 한국적인 현상은 아니다. 우리도 이제 그러한 물결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것일 뿐. 해서, 자신이 즐겨썼던 말이지만, 그의 ‘사후의 삶’(afterlife)은 더 이상 불우해보이지 않는다. 비록 “수줍음 많고 숫기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20세기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로 평가되는 한편, ‘도시맑스주의’의 선구적 이론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싱긋 미소를 지을 만도 하지 않을까.

 

 

 

입소문이 아니라 본격적인 번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처음 벤야민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 차봉희 교수 편역의 <현대 사회와 예술>, 그리고 1983년 반성완 교수 편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1985년엔 베르너 풀트의 전기 <발터 벤야민>(문학과지성사)이 소개되었다). 이제 25년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인데, 이 시기 ‘벤야민’의 간판 노릇을 한 것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해서, ‘벤야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등식이 통용되던 이 시기의 우리에게 벤야민은 친구인 아도르노에게 영감을 준 문학비평가이자 동시에 매체(미디어) 이론가였다.


벤야민 수용사의 두번째 단계는 1992년 벤야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박설호 교수의 편역으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이 출간되면서 시작된다(거기에는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의 개념>이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서 벤야민의 예술론을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마련되었지만, ‘새로운 벤야민’, 즉 도시 이론가 혹은 도시 ‘관상학자’로서의 벤야민의 모습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계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는 물론이고,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린 ‘발터 벤야민 연보’에도 ‘파사젠베르크’, 곧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전설로만 남아 있다가 뒤늦게 발견되어 독일에서도 지난 1982년에서야 전집에 묶여 출간될 수 있었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우리말로도 소개됨으로써 우리의 벤야민 수용사는 세번째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벤야민 관련서들이 조명하고 있는 것도 대부분 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관련되는바, 한마디로 “발터 벤야민, 도시를 산책하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어떤 도시들인가? 나폴리, 마르세유, 모스크바, 베를린, 그리고 파리 등이 그가 산책하면서 읽고/쓰고 있는 주요 도시들, 아니 도시-텍스트(city-as-text)들이다. 현대성의 상징인 이 도시-텍스트들을 재료로 하여 그가 계획했던 것,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놓은 것이 텍스트-도시(text-as-city)라는 ‘유례없는’ 텍스트로서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우리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것 말이다. 이렇게 말을 건네면서: “웰컴 투 벤야민베가스!”(Welcome to Benjamin Vegas!)


여기서 나의 몫은 아직 다 둘러보지도 못한 벤야민베가스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베가스로 떠나기 위한 간단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나는 ‘가이드’가 아니라 ‘스토커’다). 무작정 떠나보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뭐라도 한 장 들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기 때문이다. 혹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벤야민의 유태인 세 친구의 ‘보고서’를 길잡이 삼아 미리 훑어볼 수도 있겠다.


아도르노가 쓴 <발터 벤야민의 초상>(<프리즘>, 문학동네, 2004)과 한나 아렌트가 쓴 <발터 벤야민>(<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1983), 그리고 게르숌 숄렘이 쓴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한길사, 2002)가 그것들이다(아렌트의 글은 벤야민 선집 <일루미네이션>의 영역본 서문으로도 수록돼 있는데,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문학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이다). 물론 이들을 참조하는 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참고로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글은 꽤 난해하다. 아도르노와 숄렘은 1955년에 나온 최초의 <벤야민 전집>(2권)을 편집하기도 했으니 벤야민 생전에나 사후에나 ‘최측근들’이라 할 만하다).

 


 

 

 

 

 

내가 나름대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샬 버먼의 <발터 벤야민 - 도시의 천사>(<맑스주의의 향연>, 이후, 2001)부터이다. 1996년에 영어로 발간된 벤야민 관련서 세 권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씌어진 이 글은 짤막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전기적/사상적 맥락을 잘 짚어주고 있다. 그러면서 1999년에 발간된 영어본 <아케이드 프로젝트>(하버드대출판부)를 예고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버만의 평가: “나치와 자기 자신의 파멸의 느낌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때조차 벤야민은 독자들에게 길거리에서 춤추는 법과 현대 세계에 대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결론: “벤야민이 센트럴 파크에서 춤추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우리가 춤을 추면서 벤야민을 기억하는 것은 그다지 늦지 않았다.”(348쪽)


‘19세기 세계수도로서의 파리’를 베를린보다도 사랑했던 벤야민이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하지 않고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이후에 ‘20세기의 세계수도 뉴욕’도 사랑하게 됐을까? 자본주의적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는?(라스베가스에 처음 카지노가 들어선 것은 1941년이라고 한다.) 그런 의문은 ‘도시맑스주의’(Metromarxism)란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지리학자 앤리 매리필드도 던지고 있는데, 그가 짐작하기에 “벤야민이 20세기 후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그 역시 전(前)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의 보도(步道) 개혁을 혐오했을 것이고, 노숙자와 노점상, 무단횡단자, 그리고 뉴욕의 노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주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161쪽)


당연한 일이지만,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의 한 장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 아니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에게 바쳐지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많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 연구를 통해 도시를 연구했던 엥겔스와는 달리 도시 연구를 통해서 맑스주의를 연구했던 벤야민의 ‘도시맑스주의’를 그의 전기적 맥락 속에서 명쾌하게 해명하고 있다.   


 

 

 

 

 

각각 ‘도시의 천사’ 벤야민, ‘도시맑스주의자’ 벤야민을 화두로 하고 있는 버먼과 매리필드의 글이 말하자면 워밍업이 되겠다. 거기에 이어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에 대해서 보다 포괄적이면서도 자세한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건 그램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이다. 특히, 서론과 결론은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 데 아주 유용한데, 마치 63빌딩의 전망대 같은 역할을 해준다(유감스럽게도 우리말 번역본은 몇 군데 부정확한 대목을 포함하고 있다).


질로크가 셈하고 있는 벤야민의 도시풍경 연작들은 1924년에 씌어진 <나폴리>를 기점으로 <모스크바>(1927), <바이마르>(1928), <마르세유>(1928), <파리, 거울 속의 도시>(1929), <산 지미냐노>(1928), <북해>(노르웨이의 베르겐시에 대한 스케치, 1930) 등을 포함하며 이들은 ‘사유이미지’로 통칭된다. 물론 19세기 파리에 바쳐진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사유이미지’의 총결산이다. 질로크는 이러한 도시풍경을 관상학, 현상학, 신화, 역사, 정치, 텍스트라는 6개의 범주, 혹은 키워드로써 갈무리한다. 

 

그가 보기에 벤야민의 도시풍경은 “맑스주의적 전통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벤야민만의 아주 독특한 방식이다. 벤야민은 현대성과 현대적 삶의 중핵으로서의 도시를 사랑했고 또한 혐오했다. 도시는 그에게 매혹의 대상이자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었으며,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질로크의 표현을 빌면, 벤야민은 ‘걸어다니는 모순’이었는바, 현대성의 비판과 구원이라는 벤야민 텍스트의 힘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모순 속에서이다.  


질로크의 책을 통해서 벤야민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윤곽에 대한 브리핑을 제공받았다면, 이제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벤야민베가스’를 직접 거닐어볼 차례이다. 여기부터는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를 지참하는 게 좋겠다. 그녀는 벤야민의 프로젝트가 나폴리(남쪽)와 모스크바(동쪽), 베를린(북쪽), 파리(서쪽)라는 네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나폴리에 관한 짧은 텍스트인 <나폴리>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지만(이에 대한 해설은 질로크와 매리필드를 참조), 모스크바에 관한 텍스트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는 올해초에 소개된바 있다. 베를린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은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 등이며(전자가 번역돼 있다), 가장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파리 텍스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것.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수집가’ 벤야민이 마지막 열정을 다 바쳐서 모아놓은 자료들의 거대한 묶음이자 몽타주 재료들이다. 요컨대, 도시 자체이다(그래서 ‘텍스트-도시’이다). 벤야민이 사랑했던 파리의 아케이드는 현대성의 환상(판타스마고리아)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매혹의 장소이며, 또한 그러한 환상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횡단)해야 하는 공간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이 도시의 바깥, 현대성의 바깥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비판도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오직 우리를 찌른 창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도시의 ‘경험’만이 우리를 도시의 환상으로부터 구제해줄 수 있다. 이것이 벤야민의 변증법이며, 그가 우리에게 텍스트-도시의 경험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자, 저것이 우리에게 손짓하는 텍스트-도시, 벤야민베가스의 입구이다. 판돈과 배짱이 충분하다면 한번 들어가 보시라! 나의 동행은 여기까지이다...  

 

 

 

 

 

 

 

05. 08. 20-22.

*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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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8-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이자 지옥이었던...
저에게 공부할 한 가지 일이 더 늘었군요.

여울 2005-08-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오늘 도서관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들었다 놓았다하며 결국 빌리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쯧~. 벤야민 가지치기가 많군요. 이거 어쩐다. 까이거 대충 글을 따라 설명글 많은 것....몇권 꼭 훑어야 쓰것네요. ..ㅎㅎ

로쟈 2005-08-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 까이거 읽어야 할 게 좀 많습니다--;
 

 

 

 

 

전방 GP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민심이 흉흉하다. 브라질전에서 패배한 청소년 축구팀의 패인 분석도 잠시, 언론마다 우리 군복무 여건의 문제점과 대책에 대한 특집기사들로 넘쳐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들뜬 여론은 곧 가라앉겠지만, 쏟아지는 대책들은 그래도 좀 오래 떠있기를 바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건 작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본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2003)이다.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졌던 총기난사 사건(13명 사망)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이 '엘리펀트'인 건 이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이지만 버젓이 일어난 사건이 이해되지 않는, 이해가능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바둑에서의 복기처럼 두 고등학생이 인터넷을 통해 구매한 자동소총을 들고서 D-데이에 학교를 활보하면서 친구들을 '사냥'하는, 자신들의 '게임'에 빠져드는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따라간다. 반복적으로, 다중시점으로 리와인드하면서까지. 하지만 결과는 불가해한 죽음들이며, 비디오로 이걸 반복해서 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손으로 꼽을 만한 원인들이야 차고 넘치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진단이고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않다. 아마도 그들은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고, 그게 재미있을 거라고 상상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의 불모성/불완전성이 거기에 핑계로서 들러리를 서고 있는 것인지도. 영화는 끝장면에서 두 주인공의 자살 이후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들을 잡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유구무언, 혹은 노 코멘트. 그리고 더이상 아무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의 총기난사사건도 그러한 우리의 무능력과 대면하게 하는 듯하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언어폭력으로 인한 인격모독 때문에? '정신이상' 때문에?(김일병은 우발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모욕받은/분노한 자기 자신의 대행자로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어떤 경우이건 대개의 군사고는 특정인에 대한 보복이나 자살로 귀결되는데, 이번 사건의 충격은 그것이 동료 소대원 전체에 대한 보복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에 있다. 김일병은 사건 이전에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은 우리도 수시로/가끔은 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 '말'은 행위에 대한 차폐막 역할을 한다. 즉, 말이 행위를 대신함으로써 말로 그치게 되는 것. 그래서 그러한 행위는 가능한 일의 목록에는 들어가지만  실행가능한 일의 목록에는 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현실(reality)이 아닌, 현실을 넘어선 실재(the real)의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속에는 기입되지 않는 것이다.

해서 이번 사건에서 당사자인 김일병과 함께 우리가 조우하게 되는 것은 '실재의 사막'이고, '엘리펀트'이다. 현실이라는 환상이 제거된 상황에서, 그리하여 가능한 일이 언제라도 실행가능한 일로(마치 소총의 잠금장치가 언제라도 발사에 놓여질 수 있는 것처럼) 전화되는 것,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자신을 괴롭히던 선임병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자동소총을 난사하는 건 김일병 자신이 경험적으로 깨달은 바이겠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마치 게임에 로그인하는 것처럼. 하지만, 적어도 삶이 헛것이 아닌 한도 만큼 죽음은 헛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과는 돌이킬 수 없다. 리와인드할 수 없고, 다시 로그인할 수도 없다. 그가 게임과 현실을 혼동했을까?

문제는 우리 병영의 '현실'도 '게임중독'도 아니다. 물론 그것들은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즉 두 문제의 '개선'이 이번 사건의 재발을 필연적으로 방비해줄 수는 없다. 나는 그 사이에, (고참들에게 갈굼당하는) 현실과 (람보처럼 '적들'을 싸그리 제거하는) 게임 사이에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결여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상식 혹은 공통감각(common sense)이다.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 고참병들의 부모와 가족들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당사자에게는 결락되어 있었던 것. 그런 것들로 구성된 '현실'은 허상이고 판타지일 수 있다. 실재의 적대성을 가로막는. 하지만, 그러한 허상을 놓치게 될 때(그것은 맘먹기에 따라서 무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허상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의 현실을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는 엘리펀트와 만나게 된다.

"고참은 신이고 병역은 신성하다"는 말에 우리는 더이상 속지 않는다.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국적포기자들의 당당한 탈국가적, 국제적 이성(판단)이 그 반증이다(저들의 앞날에 오로지 행운만을!). 하지만, 고참이라는 괴물, 국민이라는 괴물로부터의 해방은 엘리펀트에 대한 충성을 이면으로 갖는다("어디 두고보자, 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마"). 해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자기안의 괴물을 인지하고 그와 친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병영이라는 우리 안에 갇힌, 젊은 '국민들'이 자신의 괴물성을 자각하면서도 "고참은 신이고 병역은 신성하다"고 복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그러는 사이에 공통감각을 늘리고(물론 가장 좋은 건 문학을 읽는 일이다, 게임할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할애해서) 사이공간으로서의 교통공간을 항구적으로 늘려나가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국가고 고참이고 나발이고 좆도 아닌) 세상은 배틀필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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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6-2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방부의 개혁이 왜 이리 먼 길 인지요....

로쟈 2005-06-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많은 부분이 더 개선되고 개혁되어야 하겠지만, 제 생각엔 많은 '대책들'이 이 사건의 '대책없음'이란 충격/외상과 대면하지 않기 위한 방책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건이 터진 자리와 사건을 봉합하는 자리가 왠지 따로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단 보다 정확한 사고 (재)조사 결과가 나와야 할 거 같습니다만(아직은 의문점들이 많으므로)...

돌바람 2005-06-2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주변의 현실을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는 엘리펀트와 만나게 된다'는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매번 추천만 해놓고 도망가는 것 같아, 다시 와서 도장도 찍습니다.

로쟈 2005-06-2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네임과 다르게(?) 여자분이시군요. 너무 묵직하게 찍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난주는 전공 관련 글을 쓰느라고 바쁘게 지냈다. 어제로써 승전 60주년을 맞은 러시아도 못지 않게 바빴을 법하다(푸틴 왈, "그래도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낫다." 이건 슬라보예 지젝의 단골 구호이기도 하다). TV에서 본 외신에 따르면 기념행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크레믈린 광장에서의 불꽃놀이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그걸 보면서 든 단상들이 없지 않아서 몇 자 적어내려가다가 그만 날려버렸다. 다시 쓸 형편은 아닌지라, 그냥 막바로 책 얘기나 하기로 하겠다. 대신에 다른 자리에 남겼던 코멘트 하나만을 옮겨놓고.

(현 푸틴 정부의 독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강경하지 않은, 노골적이지 않은 독재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현 상황에서라면 그건 (아직도 덩치가 제법 큰) 러시아의 해체를 의미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몰락 이후에 러시아라는 다민족 국가를 묶어줄 수 있는 끈이 없거든요. 전승 60주년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체첸 분리주의에 대해서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입니다. 해서 현재로선 (민주주의가 아니라) 애국주의 모드밖에는 없습니다. 먹고 살 만큼 경제적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는 애국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전에 모스크바 통신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농부(=러시아)의 자유와 장사꾼(=서구)의 자유는 의미의 외연이 같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듯이 많은 자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로 대개의 러시아인들이 생각하기엔(물론 경제엘리트 자유주의자들은 또 생각이 다르지만. 대신에 경제엘리트들에겐 관료엘리트들과는 달리 애국심이 결여돼 있습니다). 요컨대, 현단계에서 러시아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그래서 나온 것이 러시아식 민주주의일 겁니다).."

지난주 이건희 삼성회장이 고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러 갔다가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한 뉴스도 여기저기서 도마에 오르고 있는데,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이번주 <씨네21> 의 한 꼭지도 그랬다. 진중권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수령님, 우리들의 수령님"이란 제하에 이 '사건'을 다루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음미할 만한 비유: "이번 사건은 종교적 경지에 달한 북조선 수령 문화의 자본주의적 버전이다." 요컨대,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의 진보주의는 북조선의 수령주의와 남조선의 재벌주의(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똑같이 비판적인 것. "북조선에서는 수령님이 인민을 먹여살린다. 남조선에서는 삼성이 국민을 먹여살린다."

물론 여기엔 비아냥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름대로의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 남조선 '삼성맨'들은 북조선 '주체맨'들을 비판할 근거가 없다는 것. 왜? 똑같은 놈들이니까(수령이나 재벌이나 다 '돼지'라는 아이콘으로 표상된다). 이것이 진중권의 입장이라면, 그것은 나치즘/파시즘과 스탈린주의를 똑같은 '전체주의'로 묶어서 비판한 한나 아렌트식의 '자유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니, 그가 당파성에 보다 충실하다면, 비록 똑같이 종교적 경지에 달했다 하더라도, "(굶어죽는) 북조선의 수령주의가 (소수만 배터지는) 남조선의 재벌주의보다는 더 낫다"고 말해야 한다(스탈린주의가 파시즘보다는 낫다는 맥락에서). 적어도 그는 자칭 '레드 바이러스'이니까.

진중권의 결론: "삼성 철학의 상상력 밖에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 가치는 인문정신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앞장서서 지켰어야 한다. 그들이 방기한 그 일을, 학생드링 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교수들은 그 장한 학생들을 '징계'하겠다고 벼르고 자빠진 모양이다." 일리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제는 좀 의심스럽다. 교수들이 (소위 돈 주고 살 수 없는 가치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인문정신의 전도사요, 어쩌면 전사라는 전제 자체는 너무도 고루하면서 '보수적'이다. 설사 그러한 교수분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주 가끔'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게 (이미 혁신된) '현실' 아닌가?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돈이 지배한다는 걸 보여주는 교수들의 행동이야말로 어줍잖은 반대자들의 비아냥들보다 훨씬 '교육적'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적당한 반대라는 건(수사적인 발언의 '수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체제와 공생적이지 않은가?

또다른 논평: "특히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부총장 이하 보직교수 전원이 총사퇴를 결의하고 시위 학생들에게 징계위협을 가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학교당국의 반응은 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전직 대통령이 정문조차 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고 돌아갔을 때에도 태연하던 이들이 모든 학문적 양심을 480억 원에 팔아치우고 재벌총수에게 굽실거리는 꼴이란 정말 실망스럽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인간보다 돈을 중시하는 이에게 철학박사 학위를 팔아먹고도 당신들이 더 이상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할 수 있겠냐"는 인터넷 상의 한 고려대학교 학생의 울분에 찬 토로는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의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뼛속깊이 실감하게 한다. 이참에 사직서를 제출한 고려대학교 교수들은 보직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아예 교수직까지 반납하고 학교를 떠났으면 한다." 혹 그들의 보직을 내놓으면서까지 '시위'하는 건 (교수직이라는) 자리를 보전하기 위함이 아닐까?

계속. " '옳고 그름'이 아니라 '돈과 이익'에 따라 몰려다니는 교수들의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대학을 더 상품가치가 높은 노동력을 찍어내는 '취업알선소'쯤으로 여기는 교수들이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학생들을 '폭력집단 철부지'로 매도할 줄이나 아는 '어른'들 속에서, 그래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학문의 정신이 있음을 당당히 얘기하고 살아있는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 늦게나마 박수를 보낸다. 나아가 삼성과 같은 악질자본들의 탄압에 맞서 힘겹게 싸워왔던 노동자들의 투쟁에 오랜 기간 꿋꿋이 연대해왔던 학생운동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노동자 사회운동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들을 지지 엄호해야할 때다."(<사회화와 노동>, 263호)

옳은 얘기다. 혹은 옳기로 작정한 얘기다. 하지만, "인민의 재앙과 초절정 사기술책으로 성장한 삼성", 그리고 그 '삼성과 같은 악질자본들의 탄압'에 대한 비판의 칼날은 역시나 동형론적으로, "인민의 재앙과 초절정 사기술책으로 버티고 있는 북조선"에 대해서도 마땅히 겨누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당당하게 "(인간적으로 다수가 굶어죽는) 북조선의 수령주의가 (비인간적으로 소수만 배터지는) 남조선의 재벌주의보다는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으로서의 '참세상'에 대한 비전은 보다 솔직해져야 한다. '모두가 잘 산다는 비전'은 자본주의적 비전/미끼이다(더불어, 모순적이다. '모두가 잘 산다면' 아무도 잘 사는 게 아니다). '모두가 똑같이/적당히 못사는 세상', 그게 보다 솔직한 공산주의 비전이다. 혹은 삶에 대한 평가의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배는 곯더라도 발레 보러 다니는 게 '참인생'이라는 식으로. 그런 게 고상한 비전이다. 인간이란 종의 본성이 그런 비전에 걸맞을 정도로 고상한가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지만. 

 

 

 

 

 

이런 식으로 투덜거리는 나의 온건한 결론은 역시나 이번주 <씨네21>에 실린 '투덜양'의 그것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대한 감상문을 작성하면서 김은형 기자는 이렇게 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현실주의자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패배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구리들은 지는 싸움을 한다. 애당초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목숨 걸고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비장감이 없다. 심각하게 대책회의를 하다가도 '누가 나설래?' 그러면 모두 자는 척을 하고, 또 그러다가 회의 끝나고 햄버거를 하나씩 돌리니 입이 찢어진다." 그 햄버거가 적(인간)들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서 "뭘하든 (이들의) 시작은 창대하지만 그 끝은 미미하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뭐, 어때'라는 식이다.  현실은 이들을 밀쳐내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악질적인 돼지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빨간 바이러스과도 아닌 나로선 이런 너구리과에 분류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나는 현실주의자이고 패배주의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변혁이나 혁명과 달리 다수 의견의 난장으로서의 '정치'란 그런 현실주의/패배주의의 장이다. 그리고 그 장은 소설의 장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소설들의 세계이고 너구리들의 세계이다. 그 세계가 각각 경제적/ 도덕적으로 잘난 체하는 '돼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으면 좋겠다...(하겠다던 책 얘기는 다음에 해야겠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역시 미미하군... )

05.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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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 시간에 너구리 친구 한 명 다녀 갑니다.^^

로쟈 2005-05-1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도 고치기 전에 다녀가셨군요.^^

깍두기 2005-05-1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구린데요.....그래도 진중권의 글은 멋졌어요^^;;;
(햄버거는 어디서 주나요?? =3=3=3)

로쟈 2005-05-1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는 주로 '멋있는' 말을 하죠...

종이 2005-05-1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수의견의 난장으로서의 '정치'가 주는 혐오감이 소설과 같은 장에 두고 말할 수 없게 합니다. 소설이 포함하는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현실정치는 모르니까.
대중인쇄물에서 그나마 진중권과 같은 발언을 확인하는 거는 좋았습니다.

로쟈 2005-05-1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탈린도 박정희도 그런 '정치'를 혐오했지요...
 

4월의 마지막 주말이지만 날씨는 이미 5월 중순을 넘어서 치달리고 있는 듯하다. 초록이 무성하고 꽃들이 만발하다. 하지만 이런 날도 '무능한'(요즘은 '뻔뻔하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가장은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학교에 나와 있다. 책상엔 읽어야 할 책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머릿속에 조만간 쏟아내야 할 글자들이 웅성거린다(제대로 잘 뽑아내야지 그나마 쫓겨나지 않을 텐데). 나도 그렇지만, 주말까지 쉬지 못하는 책들도 안쓰럽긴 마찬가지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 중에는 <일의 발견>(다우)이란 것도 있는데(원제는 'The Working Life'), 책 소개 중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 "지금 세계는 두 부류의 인간종으로 나뉘고 있다. 그들은 바로 노동자와 실업자다. 노동하는 인간은 마치 '인간기계'처럼 괴로워하고, 실업자는 인간축에도 들지 못하는 형편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 왜 일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도 사라졌다. 인간이라면 일을 해야하고, 일을 하는 인간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낙오자의 푸념일 뿐이다."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듯 아주 직설적으로 일에 대해서 까발려놓고 있다. 게다가 너무도 선명한 구도. 노동자냐, 실업자냐. 무엇이든 따져묻는 못된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신의 '신분' 자체의 애매성 때문에 그 이분법에 동의하기 어렵다(법적으로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애매성? 공부도 노동이라면 나도 노동자이긴 한데, 주변에서는 실업자 대우를 받는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보기엔 (준)실업상태에 있으면서 나 혼자 '노동'한다고 피곤해 하는 꼴이다. 그러면서도 '대체 왜 일을 하는가?'란 고민도 끼고 다니는 걸 보면 '일을 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격 조건에도 미달한다(그이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해서 나의 '생각'은 나의 '푸념'인바, 나의 공부 또한 곧 나의 푸념이다. 이건 상호 교차적이어서, 나의 공부는 범주상 '실업자의 노동'이면서 '노동자의 푸념'이다. 소개에 다르면 <일의 발견>이란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철학에서부터 피터 드러커의 경영이론까지를 다룬다고 하는데, 거기서 살짝 암시되는 것이지만, 현대사회에서의 일이란 '비즈니스'이고 '돈버는 일'를 뜻한다. 이게 일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정의이다. 현대인들에게 일이란 돈버는 것이면서 거꾸로 돈버는 게 일이다. 돈되는 일이 아닌 것은, 돈 안되는 일은 일도 아니다.(어느 시에서는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라고 노래되지만).

 

 

 

 

그렇다면, 일로부터의 해방, 곧 노동해방은 돈으로부터의 해방과 사뭇 긴밀한 연관을 갖지 않을까? 화폐(돈)에 대한 사고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 아닐까?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정신의 기원>(이매진, 2003)의 한 장을 바로 그 문제에 할애한다. 지역통화로서의 시민통화를 자본주의 화폐경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혹은 그걸 좀 제어하기 위한 원리이자 장치로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재무적인 사고가 좀 빈곤한 나로서는 그러한 주장을 본격적으로 논평할 형편이 안되지만, 적어도 그런 통화를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조금 바꿔보자는 아이디어가 '도덕적 자본주의'에 대한 기대/요구보다는 '현실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한다.  

지난 4월 19일 한겨레에는 홍세화 위원과 김수행 교수와의 대담이 실렸는데, 신자유주의를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 대담의 후반부에 김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유럽에서는 실업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하고 사회복지도 후퇴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선진국 쪽에서 먼저 무너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후진국으로 신자유주의 해체가 넘어오겠죠... 후진국에서는 선진국보다 더 빈부격차가 심하고, 실업자는 많고, 외국 자본의 횡포는 심해서, 반발이 거세질 것이고요. 결국 세계적인 민중연대가 상당히 진척될 가능성이 큽니다. 선진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터져나오고, 후진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면, 신자유주의는 수년내에 막을 내릴 것이라고 봐요."

 

 

 

 

마지막 문장의 전망에서 방점이 (반대가 터져나오고 움직임이 시작되면, 이라는) '조건'에 놓여 있는 건지, (수년내에, 라는) '시점'에 놓여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진단과 전망은 아주 단순명쾌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홍 위원의 질문은 비록 그에 맞장구치는 것이지만 한술 더뜬다.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김 교수의 대답: "자본 쪽에서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 나갈 것입니다... 자본 이동을 너무 자유롭게 해서 금융공황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규제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요구할 거예요. 자본과 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그 안에서 수익성 위주로만 가는 방식에 규제를 가하게 될 것이고, 생태 문제를 포함해 모든 결정에 더 많은 사람이 주체로 참여하는 경제형태로 갈 것입니다."

이러한 전망의 결론은 '장미빛'이다. "복지국가가 되살아나면서 좀더 평등하고, 좀더 많이 참여하고, 계획성이 더 많이 도입되는 자본주의입니다. 복지국가의 개념에서, 기본적으로는 자본가가 주도권을 갖겠지만,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입니다." 요는 신자유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로의 도약인 것(자본가가 '여전히' 주도권을 갖지만 노동자/시민이 '많이' 참여하는). 아주 듣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나는 이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식의 '참여경제'라면, '정도'의 문제로 포섭될 수 있는 게 아닐까?(저마다의 참여경제!) 

해서 공부가 부족하고 이래저래 의심이 많은 나의 결론은 아직도 푸념이 많이 섞인 것이다. "어져 내 일이야!"(황진이) 같은 것. 그녀의 이 시구를 영어로는 'O my business!'라고 옮겨놓고서 혼자 낄낄대던 적도 있었다.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같잖은 노동'에 매여 있는 나의 '비즈니스'는 상황이 이제나저제나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05.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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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냐 유전이냐"란 글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두 가지 생존방식에 대해 몇 마디 한 바 있는데, 오늘자 한겨레의 한 기고칼럼을 읽으면서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었다. 김형태 변호사는 "평범한 이들을 위한 변명"이란 기고문에서 <지식인의 두 얼굴>(폴 존슨의 이 책에 대해서는 나도 언급한 적이 있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전제하고("이 책은 우리가 떠받드는 위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중 톨스토이의 사례를 들어서 지식인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지식인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행복론을 펼친다.

 

 



 

먼저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교훈소설"을 썼지만, 그 자신이 "평생을 성욕, 물욕, 명예욕에 시달렸다. 저 자신이 여자들에게 욕심을 내놓고는 거꾸로 여자들을 음탕과 방종의 원흉이라며 사람 취급을 안 했다."(이런 위선이!) "톨스토이 자신의 지나친 욕심에 대해 그저 '내 탓이오'라고 조용히 혼자 되뇌었으면 될 것을 성욕 자체를, 나아가 애꿎게 여자들을 마귀 대하듯 했던 그는 세상 그리고 존재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미숙아이지 싶다." 차라리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는 아마 그 이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폴 존슨의 (이전 번역본인) <지식인들>을 읽은 지 자못 오래 되었으므로, 그의 신랄한 지식인 비판의 내용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었다. 나 또한 이후에는 브레히트의 수사적인 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에 대해서만 그가 유난히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 것은 아니고, 또한 톨스토이 자신이 그런 비판으로부터 면제될 이유가 없다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을 가능하게 한 '전거들'이 대부분 러시아문학의 이 '거인'에게서 나왔다는 점도 고려해볼 필요는 있다. 우리가 그의 '성욕, 물욕, 명예욕'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참회록> 등을 필두로 한 톨스토이 자신의 '반성문' 덕분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더라도) 톨스토이에게는 '반성하는 자아'와 '반성되는 자아' 사이의 자기분열이 있었던 셈. '반성되는 자아'에만 초점을 맞추어 ('도덕의 달인'이라 할 만한)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좀 과한 일이지 싶다.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는 아마 그 이치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란 대목도 (존슨의 생각인지 김 변호사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정작 톨스토이 자신이 강조해마지 않은 것이 그 농민들의 미덕이다(1861년에 러시아에서는 농노해방이 단행되었으므로, 1828년생인 톨스토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주로 '농노'가 아니라 '농민'이다. 그러니까 지주-농노 관계가 아니라 지주-소작농 관계이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가르치려 들었던 것은 그 농민들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배계급, 즉 귀족과 지주들이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농민들에겐 책이란 것 자체가 무용지물이었고. 톨스토이 자신은 '농민이 되고자 했던 (참회하는) 귀족/지주'였던 만큼 "그가 가르치려 들었던 보잘것없어 보이는 농노"란 표현은 톨스토이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그는 농민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런 정도의 오해는 문학에 문외한인 '평범한 이들'이 가질 만한 오해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와 같은 (잘난 체하는) 지식인 비판에 이어지는, 김 변호사의 무임승차성 주장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성욕 말고 물욕도 그렇다. 사자는 저 살기 위해 영양 새끼를 갈가리 찢는다. 거기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이 피곤한 세상 겨우 살아가려면 좋은 학교 나와 좋은 직장 가지려고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다. 집 한 채 마련하려면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도 안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처세술이 지식인의 (위선적인) '두 얼굴'과는 다른 '평범한 이들'의 맨얼굴인가?

기본적인 세계관. 우리 사회는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 식의 야생적인, 혹은 양육강식적인 세계이며 서로가 먹고 먹히는 이 세계에는 선도 악도 없다. 있는 건 생존투쟁뿐이다. 이 피곤한 세상, 곧 생존투쟁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 잡아야 한다(이게 사자의 발톱이고 이빨일 테다). 그리고, 더불어 '부동산 투기며 주식 투자' 해야 한다. "안 할 수가 없다"는 이중부정은 무슨 뜻인가? 안 하고 싶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왜?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야 하겠기에.

변호사인 필자는 아마도 좋은 학교를 나왔을 것이고,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도 '안 할 수가 없을 만한' 나름대로의 경제적 여유도 갖고 있을 것이다(현 주미대사의 말대로, 어쩌면 '출발'이 달랐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처지를 일컬어 그는 '평범한 이들'이라고 통칭한다(세칭 '좋은 학교'를 나왔지만, 그런 '여유'와는 거리가 먼 나는 졸지에 '비범한 이들'에 속하게 됐다). 하긴, 과거 한 대통령이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칭한 적도 있으니 변호사가 자신을 우리사회의 '평범한 이들'로 분류한다고 해서 흠이 될 건 아니겠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나'란 에고(ego)나 '존재'는 그 속성상 깨달음이나 성스러움과는 같이할 수가 없다. '나'란 '존재'가 깨닫고 성인 되려는 것 자체가 '나의 확대'라는 더 고차원의 욕심일 터. 깨달으려, 성인되려 안달하지 말고 그저 내 옆의 보기 싫은 인간이며 밤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며 우리를 순식간에 빈털터리로 만드는 태풍과 어찌 화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필부필부인 내 주제에 맞는 일이지 싶다. 삼시 세 때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도 참 즐겁고 암수가 서로 어울려 구름과 비처럼 정을 나눔도 참 즐거운 일이다."

필자의 논리에 따르면, '평범한 이들'이란 '나'라는 '에고'를 포기하지 않는,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깨달음/성스러움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평범한 이들'이란 실상 고차원의 욕심에 들려 있는 위선적인 지식인들이니 성인들이니 하는 부류가 아니라 솔직담백하게 그저 저차원의 욕심이나 충족시켜가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위 (일반적으론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지도층'에 속하는 변호사께서 모기 걱정, 태풍 걱정 하시는 게 대국적인 견지에서인지(이 경우는 나름대로 '고차원' 아닌가?) 직접적인 생존과 관련하여서인지 의문스럽지만, 하여간에 '필부필부'의 소망은 가족들과 같이 식사하고 때로는 ('내 옆의 보기 싫은 인간'은 아닐) 여자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이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요지는 잘난 지식인들/성인들에 주눅들지 말고 우리는 그저 저차원적 욕심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자라는 것이겠다. 저들이 '욕심 내지 말고 살자'라고 꼬드기지만, 다 '고차원적 욕심'에 지나지 않는바, 괜히 도덕적인 자괴감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다는 얘기. 어차피 인생은 생존투쟁이고 거기엔 선도 악도 없지 않은가. 그저 자식들 공부 잘하고 암수 서로 정다우면 장땡이다, 등등. '평범함 이들'에 대해서 좀 특이한 정의를 내리는 걸 제외하면(지식인/성자가 아니면 다 '평범한 이들'이다? 재벌이나 변호사나 노숙자나 노가다나?) 새삼스러운 건 아니므로 그러라고 해두자.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자. 교황이나 성철 스님 같은 성인들도 못 말릴 일을 어찌 말리겠는가?

게다가 고차원적인 걸 기대하지도 않으므로, 문학작품에 대한 '평범한 이'의 사소한 오독 또한 그냥 넘어갈 만한 문제이다. 하지만, '비범한 이'인 나로선 좀스럽게도 그런 거나 지적하고자 한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교훈소설을 썼다. 죽을 둥 살 둥 뛰어다녀 봤자 죽을 때는 제 관이 묻힐 한 평 땅밖에 못 가지니 욕심 부리지 마라. 이 이야기를 읽고는 '맞아, 욕심내지 말고 살아보자'고 다짐해 보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그 다짐은 하루도 못 간다." 일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교훈소설'이 아니다. 그냥 '우화적인 이야기'이다(그리고 초등학생들에게 적합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해가면서). '소설'이란 용어를 오지랖 넓게 사용한다는 점은 물론 필부필부다운 일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아니라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내용이다. 다 비슷비슷한 교훈적인 이야기들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필부필부다운 태도이겠다.

아마도 필자는 톨스토이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을 듯하며, 그저 <지식인들의 두 얼굴>에서 얻은 귀동냥을 밑천삼아 (지난달에 국내에서 대규모 전시회까지 열렸던) 잘난 '톨스토이'도 별거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에 스스로 흡족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친 김에 ‘평범한 이들’의 저차원적 욕심을 적극적으로 옹호해보자는 발상이 들었는지도. 하지만, 심리학 개론에 나오는 기본적인 얘기지만, ‘평범한 이들’도 저차원의 욕심이 충족되면 곧 고차원의 욕심까지 품게 되는바, 그런 욕심의 확대 또한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영양 새끼를 갈가리 찢어먹는 사자 노릇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내가 굳이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란 ‘사자답지 않은’ 고민도 떠안게 되는 것이다(그런 고민을 무시하는 태도는 ‘평범한 이들’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에서 나온다).

성욕, 물욕, 명예욕에 평생 시달렸던 톨스토이이지만, 누구보다도 그러한 욕망과 절연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이도 톨스토이이다. 1910년 82세의 나이로 가출까지 감행하는(그래서 결국엔 객사하는) ‘노익장’은 그러한 자기부정의 안간힘에서 나왔을 법하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서 ‘위선’만을 읽는 건 자유이다(그걸 ‘평범한 이들’의 자유라고 옹호하는 것까지도). 그리고 그 자유는 그냥 다 톨스토이가 쓴 것인 만큼 대충 작품의 제목과 줄거리를 바꿔치기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자유와 상통한다. ‘농노’에 대한 계급주의적이고 차별적인 시각을 가졌던 위선적인 지주로 톨스토이를 이해하는 태도와도.


 

 

  


하지만, 부동산 투기며 주식투자로 아등바등할 시간을 조금만 쪼개서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나 <인생론>이라도 제대로 읽어보는 것은 어떨는지. 자기 자신의 에고를 넘어서 자신의 이웃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이 경우에는 사회적 기득권)에 한번쯤 의문을 던져보는 것이 그토록 ‘비범한 일’이며 ‘성자(만)의 일’일까? 호랑이나 사자는 죽어 가죽을 남기겠지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 또한 (톨스토이의 말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예지이다. 해서, ‘평범한 동물’로서의 실존을 선택한 이들의 자기변호를 ‘평범한 인간들’의 그것으로 슬쩍 바꿔치기하는 건 보기에 흉하다(‘평범한 인간들’의 ‘상식’은 한 변호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귀하며 존엄하다).

05. 04. 25.

P.S. 이 기고문은 한겨레의 여론란에 실렸는데, ‘입바른 소리’들을 주로 해대는, 혹은 그런다고 자부하는 한겨레는 2000년 벽두부터 재테크에 관한(그 실내용이란 게 결국은 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 등의 돈 굴리기인데) 특집기사를 실어 한 애독자를 등 돌리게 하더니(재테크와 자본주의 비판은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이젠 ‘평범한 인간들’과 ‘평범한 동물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젠 ‘평범한’이란 형용사마저도 조심스레 가려서 써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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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4-2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잘 읽었습니다^^

urblue 2005-04-2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퍼 갑니다.

로즈마리 2005-05-02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해서, 저도 비범인 축에 끼게 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