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늑장을 부린 탓에 급조한 것이지만 몇 가지 추억거리를 담고 있어서 버리기엔 아깝다. 창고에 넣어둔다.

르네 지라르(1923- )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04)에 대해서 몇 자 적어내는 것이 내게 떨어진 몫이었다(이하에서는 <사탄이 번개처럼>으로 줄임). 하지만 일은 콩구워 먹듯이 되진 않았고, 이래저래 미뤄지는 사이에 아마도 가장 요긴한 지라르 입문서가 될 <문화의 기원>(기파랑, 2006)이 장마가 시작될 무렵에 ‘번개처럼’ 출간됐다(한국어판은 전세계에서 네 번째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재작년에 불어본이 나온 이 대담집은 문학과 종교학, 문화인류학 등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이 예외적인 사상가의 ‘지적 자서전’으로 적어도 당분간은 모자람이 없는 책인데,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사들면서도 부담감을 다 떨쳐낼 수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견적이 너무 나오는 거 아니야?’라고 속으로 툴툴댔던 것이다.


사실 지라르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다. <문화의 기원>의 서문에서 대담자들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는 이사야 벌린의 인용구를 재인용하면서(벌린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각각 이 ‘여우’와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이 고슴도치-지라르의 그 대단한 것이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이라는 걸 미리 일러주고 있다. “이 두 가지 가설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40년 이상을, 찰스 다윈의 말대로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을 해오고 있다.”(10쪽)


지라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단순한 것은 그 두 가지 가설만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기나긴 논증’에 대해서 되짚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지적대로 단순성과 명료성은 지라르의 특장이면서 비판의 빌미이다. 나는 이 익숙한 양면성에 대해서 몇 자 거들기보다는 지라르에 대한 사적인 기억 몇 가지를 나열함으로써 내게 떨어진 발등의 불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라르 자신보다 지라르에 대해서 더 잘 말할 자신이 없는 나로선 ‘지라르와 나’ 정도가 감당할 수 있는 주제이긴 하다.

 


 

 

 

 

 

 

 

 

지라르의 출세작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이다. 파리 고문서학교 출신인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소설을 강의하기 시작한 건 그 자신에 따르면 ‘첫 지적 모험’이었는데, 30대 중반에 스탕달과 플로베르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대단한 걸 발견한다: “그 무렵 저는 <적과 흑> <마담 보바리>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연달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원한 남편>을 읽던 때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35쪽)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세르반테스와 완전히 동일한 것을 발견하며 이로써 ‘모방의 리얼리스트’로의 길로 접어든다.

 

지라르의 이 출세작은 비교적 일찍 우리말로 번역됐는데, 전체 12장 중에서 8장이 문학평론가 김윤식에 의해 영역본에서 중역돼 나온 <소설의 이론>(삼영사, 1977)이 그것이다(<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완역본이 나온 것은 2001년의 일이다). ‘소설의 이론’이란 표제는 막바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데(물론 역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역자는 소설이론가 루시앵 골드만이 이 저작들을 ‘소설의 이론’이라 할 만한 단 두 권의 책으로 꼽고 있음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맞은 첫 여름방학에 내가 이 두 권의 책을 손에 든 것은 지극한 당연한 일. 루카치의 책은 난해했지만 지라르의 책은 읽을 만했고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론은 흥미로웠다(<영원한 남편>에 대한 그의 분석은 소설보다도 재미있었다!).  

 

 

 

 

 

 

 

 


다행히도 지라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문학평론가 김현의 노고 덕분이었다. 지라르 이론의 전모를 다루고 있는 최초이자 유일한 연구서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나남, 1987)가 바로 출간되었던 것이다. 240여 쪽의 비교적 얇은 분량이지만 실제 지라르론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 절반은 지라르의 도스토예프스키론과 카뮈론으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은 그럼에도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나 출간된 <문화의 기원> 이전에 르네 지라르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책이었다.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김현이 파악한 지라르 이론의 핵심은 ‘폭력’이고 ‘폭력의 구조’였다.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그는 ‘폭력의 구조’로 묶었던 것(김현은 지라르의 <희생양>을 그의 가장 좋은 책으로 꼽는다). 폭력에 대한 관심은 사실 80년대 중반 김현 비평의 화두이기도 했다. “억압적 세계의 기본적 욕망에 대한 분석․해석”을 시도한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은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며 거기엔 ‘증오와 폭력’ ‘폭력과 왜곡’이라는 두 중요한 평론이 실려 있다.


<폭력의 구조>에도 ‘지라르의 눈으로 한국의 신화 읽기’가 몇 대목 포함돼 있지만 그러한 평론들이 지라르에 대한 관심과 읽기에 힘입은 것이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폭력의 구조>의 글 머리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는다! 그 수태․분만의 과정이 지라르에겐 너무나 자명하고 투명하다. 그 투명성과 자명성이 지라르 이론의 검증 결과를 불안 속에 기다리게 만들지만, 거기에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래서 지라르의 이론을 처음부터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거기에는 더구나, 1980년 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17쪽, 강조는 나의 것) 그는 그 폭력의 의미를 철저하게 질문한 아주 드문 비평가였다.

 


한 비평가에게는 ‘소설의 이론’을, 또 다른 비평가에게는 ‘폭력의 구조’를 의미했던 지라르가 내게 의미했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그의 <도스토예프스키: 이중성에서 단일성으로>(1963)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묵시록’을 마지막 장으로 갖고 있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보유편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새로운 전망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란 절로 <소설의 이론>을 마무리한 젊은 루카치가 이후에 쓴 도스토예프스키론에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두 걸출한 이론가에게서 소설론의 끝은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소설의 이론’ 이후에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으로 나아가며 ‘소설의 진실’을 발견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1972)으로 넘어간다(나는 두 사람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참조한 졸업논문을 쓰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지라르는 문학비평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넘어간 자신의 작업이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우려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되짚어보면, 그의 본류는 ‘모방욕망의 인류학’ ‘종교적인 것의 인류학’이었고, 그러한 작업의 영감을 문학비평에서 가져왔다는 점이 특이할 따름이다.


우리에게도 소개돼 있는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1978)과 짝패를 이루는 책이다. “제가 <폭력과 성스러움>을 쓸 때 처음에는 2부의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부는 고대문화, 2부는 기독교에 관한 내용으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료는 다 모아놓고도 기독교 부분은 제쳐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문화의 기원>, 52쪽)


이 2부는 두 사람의 동료/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대담의 형식으로 출간된다. 말 그대로 기독교에 관한 부분인데, <희생양>(1982, 국역본1998)이 1부의 보유라면, <사탄이 번개처럼(1999)은 2부의 보유쯤 된다. 후자의 경우엔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의 두어 가지 실수를 바로잡은 것이라고 지라르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수란 건 기독교와 연관된 것에 대하여 ‘희생’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백하는데, 실상 <사탄이 번개처럼>에는 ‘희생’이란 말이 낙석처럼 널려 있다.


여느 저작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지라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신화와 기독교를 구별하면서 그 둘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신화가 가해자의 편인 데 반해 기독교는 희생양의 편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신화의 해석은 집단 폭력의 희생물을 죄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완전히 잘못이고 환상이며 그러므로 거짓이다. 반면에 성경의 해석은 이 희생물을 무고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그러므로 참이다.”(14쪽)


이러한 단언은 어떤 기시감으로 우리를 안내하지 않는지? 이를테면, ‘신화의 거짓과 성경의 진실’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 <사탄이 번개처럼>을 구성한다. 모방적 경쟁관계로 빨려 들어감으로써, 즉 스캔들에 불가피하게 말려들어감으로써 ‘모방의 회오리’, 혹은 무차별적 폭력에 도달하게 되는 메커니즘 자체가 바로 사탄이다(예수 가라사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스캔들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에 휩싸인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이 메커니즘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러한 폭로를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전범적이다. 그의 소설들은 나폴레옹 모방에서 그리스도 모방으로의 이행, 곧 신화(변증법)에서 복음서로의 이행을 표시하고 있는 이정표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르네 지라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 두 ‘두더지’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결점도 비슷하고. 지라르에게서 맹목적인 서구 및 기독교 우월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사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맹목적인 러시아 및 정교 우월주의의 냄새를 다 가리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이 '인문학의 다윈'은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 할 만하다(나의 졸업논문은 ‘인류학자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것이었다)!    

 

06. 07. 24.

 

P.S. 물론 투명성과 자명성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미덕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미덕이 아니다.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두 사람의 '두더지적 성향'과 종교적 지향이다. 더 파고들어가면 두더지도 여러 종류가 있다(독백적 두더지, 대화적 두더지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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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7-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르네 지라르에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를 알수있는 글이네요.."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일단 <사탄이 번개처럼..>하고 <문화의 기원>을 보관함에 넣어 봅니다. 근데 지라르에 대해서 가장 유용한 입문서로는 어떤 책이 좋은가요?..
아 그리고 한가지 질문더..본문에서 지라르의 신화와 기독교의 구분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지라르는 왜 신화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지 이해하기 힘들군요. 좀더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

로쟈 2006-07-2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 적은 대로입니다.<문화의 기원>이 가장 좋은 입문서일 텐데, 사실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같은 책을 재미있게 읽어본 경험이 있어야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거 같네요. 신화와 기독교의 구별은 본문에서 적은 바대로이고, <사탄>에서 지라르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모방욕망과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희생양 제의의 메카니즘을 기독교는 폭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지라르는 호교론적인 입장까지 보이는데, 아주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아마 이들 책들에 대한 리뷰들을 참조하신다면 좀 나으실 것 같네요...

푸른괭이 2006-07-2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상 <영원한 남편>은 지라르의 '발견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토에서도 정말 연구 안 된 작품이거든요.(키르포친조차도 내용 훑기 정도 밖에 못했으니까요. 발표도 한 번 한 적 있지만, 참 뛰어난 작품인데 말이죠.) 전체적으로, 지라르는 본원적 의미에서의 도-키 연구자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여하튼 바흐친 급입니다. 개념틀을 선물해주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 루카치가 도-키에 대해 조금만 더 많이 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습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지금 읽으니 더더욱 좋더군요.

로쟈 2006-07-25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보다 지라르를 먼저 읽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시각으로 읽게 되더군요. 그러한 '발견'이 비평가의 진정한 몫이 아닐까 싶고...

로쟈 2006-07-2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얼마전에 전해듣긴 했습니다. '독자들의 힘'에 한몫하셨군요.^^
 

작가 한정희의 소설 <웃으면서 죽는 법>을 <현대문학>(2006년 7월호)에서 읽었다. 시작부터 가관이다. "그날 아침, 나는 드디어 목을 맬 도구를 결정했다.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그의 감색 버버리코트에서 벨트를 빼냈다... 그리곤 벨트를 매달 곳을 찾아다녔다... 매듭을 지은 벨트를 목에 매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목을 맬 곳을 찾아다가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늘어지고 낡은 연하늘색 잠옷을 입고 목에 감색 벨트를 걸고 있는 모습이 아주 기괴하게 보였다. 목 주변은 벌써 벨트에 쓸려 벌게져 있었다."

 

 

 

 

이 정도면 약간의 궁금증은 유발할 만하다. 이 '기괴한' 아줌마의 행동거지와 의식의 흐름을 조금은 더 따라가볼 맘이 생기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고 있지나 실제로 목을 매달면 어떤 기분일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침에에 올라앉아서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는 벨트를 꽉 당겨보았다. 벨트를 바싹 당기자 얼굴에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양손에 힘을 가하자, 손에서 힘이 저절로 빠지면 벨트가 풀어져버렸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이런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문득 아주 오래전에 한 의대생 친구가 '무용담'처럼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수 끝에 의대에 들어간지라 대학생활의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모이면 좌중을 압도한 건 이 의대생 친구였다. 특히나 해부학 실습을 하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우리는 숨도 크게 못 쉬었다(구역질을 하는 여학생 얘기는 꼭 들어갔다). 사체를 한 구씩 사서 해부학 연습을 하기도 하고 여자 사체는 지방이 많아서 애로가 많다는 이야기 등등으로 아직 여자 친구도 없던 주변 친구들의 야코를 한껏 죽여놓더니, "너네 그거 알아?"하면서 보탠 이야기는 넥타이로 목을 맨 다음에 한쪽 발은 침대를 딛고 나머지 한쪽 발로는 바닥을 디디면서 자빠지듯 목을 뒤로 쭉 빼는 사이 두 팔로는 넥타이를 전방으로 힘껏 잡아당기는 포즈의 자살연습법에 관한 것이었다(아니면 침대 기둥에 걸친 벨트를 목에 걸고 반대방향으로 기어가는 것이었나?).

'자살연습법'이란 표현은 다소 부정확한데, 그러한 기괴한 짓이 실제로 의도하는 건 죽음의 경험이 아니라 오르가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로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거의 유사-오르가즘을 경험한다고 했다. 이게 자위 정도와는 비교도 안된다나 어쩐다나. 짐짓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나는 실제로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자가 단속에 분주했다. 아직 오르가즘에 목숨 걸 나이는 아니었기에.

소설에서 아줌마 화자는 그런 순간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잠시 자살 기도를 방해받는다. 그러고 켜놓은 TV에서 권총 살인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는 다시 자살 생각에 전념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게도 권총이 있다면, 페트병을 사용해서 머리를 관통시켜 시신도 온전한 상태로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은 언젠가 가보았다는 쿠바 교외의 헤밍웨이의 집과 그의자살. "그는 쿠바를 떠나 고국의 아이다호로 돌아가서 카빈총으로 자살했다. 아마도 그는 영화에서처럼 긴 카빈총을 거꾸로 세우고 총신을 입 안에 넣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까? 내 상상으로는 그렇게 했을 것 같다. 그가 사용한 총은 9밀리가 아닌 카빈이었으므로 그의 뒤통수는 절반쯤 산산이 부서져서 사방으로 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줌마 총을 구할 가망성이 희박하다는 현실 때문에 권총자살은 포기한다. 그때 다시 걸려온 전화는 미국에 이민 간 대학동창의 전화였고 두 사람은 루게릭병에 걸려 10년전부터 투병중인 한 친구의 안부를 떠올린다. '나'는 그 친구가 병에 걸렸다고 고백한 초기에 그냥 죽으라고 말함으로써 분위기 아주 썰렁하게 만든 기억이 있다. '나'의 심사로는 "청춘도 지나왔고, 사랑도 했으며, 결혼도 해봤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인생의 행복을 맛보았다는 자조적인 감정에 내몰려서 한 생각이었다."

몹쓸 병에 걸린 친구 '현임'은 대학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얽었고, 붉은빛이 도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검정 터틀넥 스웨터와 하늘거리는 검정색 저지 롱스커트를 입고 반들반들한 생기넘치는 얼굴에 자신감으로 꽉 찬 미소를 짓고 큰 키를 휘청거리며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은 너무 당당했다. 희디흰 손가락 사이로 가늘고 긴 담배를 물고 노동운동과 실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빛나는 미래를 포기하고 금속공장 여공으로 취헙한 시몬느 베이유 이야기를 할 때의 그녀에게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금방 그녀의 추종자가 되었다." 하니, 그 친구 또한 노동운동과 실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삶을 무엇인가에 투척하는 멋드러진 모습을 보여주었을 법하다.

하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의 경우 많은 부분이 그렇듯 현임도 자신의 내면에서 도전할 만한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철학을 전공하고 영화판에 쫒아다니다가 배추장사를 했고 무슨 종교에 빠진 남자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나, 생활은 기승전결이 무시된 컬트영화 같았다. 원래 현임의 기질 속에 타고났던 열정과 외면적 열등감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남자에게 구애를 표현하는 그녀의 강렬함이 합쳐져서 빠르게 두 사람이 맺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의 삶은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학창시절의 그 빛나던 지성은 누추한 일상 속에 엉겨서 흘렀다." 그러니, 루게릭병에 걸렸다고 울었을 때, "죽으라고, 그냥 죽으라고, 그것이 너답게 죽는 거라고, 너를 지켜보는 나의 바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로 그렇다고 해서 그냥 죽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도 남을 죽이는 일만큼의 노고를 필요로 하기에. "80년대만 하더라도 수많은 시위대 앞에서 분신자살 같은 극렬한 항의가 잦았다. 그런 죽음에 비해 목을 매달 자리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헤맸던 내 모습이 오래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득하게 생각되었다. 한낮의 햇볕이 강렬하게 쪼이는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리는 죽음은 어떨까. 물이 떨어지는 육신을 상냥하게 맞아줄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비해 불에 타 죽는 것은 육신에게 못할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약을 구할 수 있으면 그것도 손쉬운 방법일 텐데... 아, 지금 언니가 말한 것처럼 비닐봉지를 이용한 질식사도 신체를 훼손시키지 않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누가 뒤에서 손을 묶어줄 것인가?"

오래전 일이지만 나 또한 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고 잠수교를 건넌 적이 있었다. 요즘처럼 장마철이어서 흙탕물인데다가 유속이 너무 빠라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주변에 건져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이런 시를 잠깐 쓰는 걸로 참아두는 도리밖에 없었다: "거리에 어둠이 내린다. 어둠은 너무도 두꺼운 책,/ 한장씩 찢어 달빛으로 태운다. 어둠의 재가 날린다./ 방안 구석구석에 어둠이 포진한다./ 장회를 신은 유령들! 언젠가,/ 나는 맨발로 물에 빠질 생각을 했었구나/ 발목엔 아직도 그때 물린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나는 자꾸 누군가를 깨물어주고 싶다." 미친 개처럼?

소설의 화자는 루게릭병에 걸린 친구를 만나보기 위해 "개집하고 가죽공장 사이에" 있는 교외의 외딴집을 찾아간다. 그러는 중에 생가죽을 말려서("말이 가죽이지 '살'이라고 불러야 더 적당했다") 가죽을 만드는 인부로부터 그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는 "70도 훨씬 넘긴 노인"처럼 보이는 친구를 만난다. 하지만 "언젠가 너에게 그냥 죽으라고 했던 그 말을 철회하러 왔다는 말을, 널 보고 난 후에 자살하려고 했다는 말을 나는 꺼내지 못했다." 며칠 뒤에는 나는 10여년 동안 아내를 간호하던 현임의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는다.

"나는 삶의 밑바닥의 정체란 도대체 어떤 것이냐고 소리치는 대신에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비명 같은 이상한 소리로 미친 듯이 악을 쓰면서 남편을 불러대었을 현임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내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과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없을 선에 이르렀을 때, 인간의 긍지를 잃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들어선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속에는 더 무시무시한 경우들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죽음보다도 삶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백화점 슈퍼에 들렀다가 상처난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가죽 숄더백을 보고 사든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거울 앞에 앉아 그 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깊이 숨을 쉬고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백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 백의 상처에서 받은 느낌이 그처럼 뚜렷하는 게 너무도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내 볼을 적셨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백 위에 떨어진 내 눈물이 가죽을 적셔서 백의 상처를 점점 더 진하고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러한 에피파니의 순간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다. 모처럼 읽은 '진한' 소설이지만, 몇 가지 불만이 없지는 않다. '웃으면서 죽는 법'이란 제목이 일단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죽' 정도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상징성도 풍부하고. 그랬다면, 이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자살에 관한 무용담들을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흠들을 굳이 들추어 무엇하겠는가?

'세상은 동물원'이란 비유가 있다. 이젠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세상은 가죽공장', 이건 어떤가? 한동안은 버틸 만하지 않을까?

06.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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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철학,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내용에 부합하는 제목이지만, 그냥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라고만 제목을 달았다(시는 철학을 그렇게 유혹한다).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을 일이 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이전에 쓴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내용을 많이 가져왔다. 다시 읽어보지 않아 무얼 쓴 건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은 창고에 넣어둔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물론 O15B의 아주 오래전 음반에 들어 있는 곡명이기도 하다.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가 있다네. 이 싸움은 중요한 것일세, 여보게 글라우콘!.. 적어도 시에 자극되어, 올바름과 그 밖의 다른 훌륭함(덕)에 무관심해질 만큼 되어서는 아니되네.”(플라톤, <국가>)

 

 

 

 

플라톤의 회상에서처럼 시와 철학 사이의 관계는 오래된 불화의 관계이다. 따라서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는 일은 이러한 불화의 내력을 들추는 일과 무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력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불화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어놓는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원인, 혹은 조금 현학적으로 말해서, 불화의 발생론적 구조, 그걸 잠시 생각해볼까 한다.

어떤 ‘오래된’ 불화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지속적인 관계이다. 끈끈한 인연이 아니고서야 서로가 서로를 불만스러워하는 티격태격의 관계가 반복/지속될 리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무감으로 전화를 걸어서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는 ‘아주 오래된 연인들’인 것이다. 서로를 불편해하면서도 끝내 헤어지지는 못하는 연인들 말이다.


그렇다면, 시와 철학을 묶어주는 끈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서로에 대해 ‘넌 정말 아니거든!’이라고 겉으로는 넌더리를 내면서도 ‘그래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라고 아쉬워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공통의 지반(地盤)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그 지반이란 바로 언어, 곧 로고스(logos)를 말한다.

 

 

 

 

 

 

 

 


알려진 바대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시와 철학은 그 로고스의 두 자녀이자 아종(亞種)이다. 그것을 각각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라고 부르기로 하자(횡설수설을 시라고 부르지 않는 이상 시가 자기 나름의 로고스를 갖다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시와 철학이 규범적 범주라면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는 양태적 범주이며, 이 두 범주가 동일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규범적 범주로는 변종적인 사태, 곧 ‘시적인 철학’과 ‘철학적인 시’ 따위를 포괄하여 다루지 못하겠기에 양태적인 유형학의 도움을 빌어서 시와 철학의 관계를 새롭게 말해보자는 것이다.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양 극단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기표-논리의 극대화’와 ‘기의-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이런 시는 어떤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가령 이 시 윤동주의 <팔복(八福)>만 하더라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구절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는바, 이러한 반복은 비록 순수유희가 아닌 정서적인 강도의 강화를 지향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잉여’이다. 기의-논리 극대화의 관점에서라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8”이라 기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간단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적 로고스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철학적 로고스의 강경파들은 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시적 로고스는 단어들에 폭탄 세례를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키고자 한다(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이승훈의 비대상시 등의 계보는 전범적인 사례이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시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 시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러시아어에서 '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이 자움어를 한국의 ‘미래파’ 시인들이라면 ‘시체들의 언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부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을 따라서 조금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시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시는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미국의 신비평가들이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한 건 따라서 자연스럽다.  


시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시는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시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요컨대, 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시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 시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시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시의 언어가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이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

 

 


 

 

 

 

 

 

20세기 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로 특징지을 때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 혹든 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이고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자연스럽다.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 하지만, 이때 철학적 로고스에 치료의 방책으로 주어지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이다. 두 갈래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 <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이 선호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로 오염되지 않은 인공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시어는 자연어의 병리성이 극대화된 구제불능의 것으로 간주될 법하다. 하지만,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한편으론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 <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무엇보다도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이러한 구도하에서라면, 시와 철학의 오래된 불화에 대해서 다시금 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미 들었던 비유를 계속 갖다 쓰자면,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관계란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관계이다.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인공어>로 가고자 할 때, 시적 로고스는 그 대척점에 놓이게 된다. 즉, 철학은 시를 밀어낸다. 가령,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부분

 


 

 

 

 

 

 

 

 

라는 시적 규정을 가지고 사유의 알고리듬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연어→시어>의 방향에서 철학적 로고스는 그 자신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영감을 시적 로고스로부터 제공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철학은 시를 적극적으로 끌어당긴다. 


휴일은 가죽과 망토뿐이네. 휴일이여, 나를 빌려가세요. 언제나 당신을 위해 숨을 쉬겠어요.

-김행숙, <8요일> 부분

 

 

 

 

 

 

 

 

 


에서처럼 철학적 로고스는 시의 가죽과 망토를 빌려다가 새로운 숨을 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철학은 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으며 스스로를 갱신해간다.


이 두 갈래의 방향이 모두 철학적 로고스의 길로 포함된다면, 시와 철학의 관계가 발생론적으로 밀고 당기는 ‘오래된 불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다. 철학은 시라는 항성에 대하여 언제나 가깝고도 먼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자기의 존재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니 여보게 글라우콘, 무엇보다도 시를 조심하게나!”

 

06. 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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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16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행숙 첫 시집을 읽어보려고 들어왔다가... 와, 너무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항상 부러움과 주눅듦을 느끼며 로쟈님 글을 읽기는 합니다만, 이 글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네요. 열광적으로 즐겼습니다!! 브라보...............

미지 2010-07-16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06. 07. 16 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어 다시 보니, 지금은 10. 07. 16 으로 표기되네요 ^^ 인공적 시어 같은데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피터 크레이머의 <우울증에 반대한다>(플래닛, 2006)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책이었다. '우울증 컬렉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증과 관련한 몇몇 책들에 흥미를 갖고 있던 차에 항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쓴 저자의 명성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한데, 주문해서 손에 들기까지도 아무런 리뷰나 서평을 읽어볼 수가 없었다. 언론의 지나친 주목을 받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듯 이유없이 홀대받는 책들도 있는 것(신생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로비'가 부족했던 것일까?). 

해서 언제든지 '프리뷰'의 자리에서 다룰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비오는 날 공치는 '노가다' 인부처럼 일주일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번주는 사정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출판사 리뷰라도 올려놓는다. 그리고, 학위논문의 일부를 떼다가 붙여놓는다. 우울증에 대한 나의 '문학적' 관심이 어디에 걸쳐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비오는 날 우리 아저씨들이 따로 무얼 하겠는가? 연장이나 다듬고 있는 수밖에).    

 -정신의학자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프로작에게 듣는다(Listening to Prozac)>의 지은이인 피터 D. 크레이머가 '질병'으로서의 우울증의 담론을 자세히 살핀다. 수잔 손택의 책 제목을 연상시키는 <우울증에 반대한다(Against Depression)>라는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지은이가 반대하고 있는 대상은 우울증을 우리 몸의 질병으로만 보지 않는 세간의 인식, 더 나아가 '우울증을 낭만화하는 사회'이다.

Peter D. Kramer

-20여년전 항우울제인 '프로작'이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우울증이 과연 (약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인가?" 하는 논쟁이 들끓었다고 한다. 책은 지금에도 역시 우리 사회에는 우울증을 단순한 '마음의 감기' 정도로 치부하거나, 창조성과 감수성, 천재성의 원천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만연해 있음을 지적한다. 지은이는 우울증이 심각한 생리학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최신 뇌 연구 결과를 비롯한 의학/생물학적 근거와 여러 통계를 바탕으로 입증한다.

-또한 지은이 자신의 개인적인 진료 경험,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서 끌어온 사례 제시로 우울증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실제 우울증 환자들을 더욱 고통받게 만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울증을 직시함으로써 자아와 예술, 사랑과 훌륭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이러한 인간 이해에 있어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은 적대적 동반자이다. 요즘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이 그렇듯이).

이제 이어지는 건 '프로이트에게 듣는다'쯤 되겠다(다소간 '학술적'이므로 딱딱한 글에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으시면 되겠다). 크레이머 교수라면 별로 달갑잖게 생각할 듯하지만, 프로이트 또한 "자아와 예술, 사랑과 파탄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적 가정에 따르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은 삶의 파탄이다. 즉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 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보상으로서 주어지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그러한 보상을 찾는 예술가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망상적 돈키호테이다. 그래서 예술사가인 하우저의 말을 빌자면, 모든 예술은 정확하게 말해서 일종의 ‘돈키호테주의’이다(아래 사진은 아르놀트 하우저).

 

그러한 돈키호테주의가 예술사에서 전면화 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이다. 프로이트가 진술한 의미에서 예술가의 개인적인 요구와 사회의 집단적인 요망 간의 불일치는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두드러지기 때문이며, 사실 만족의 대용물이나 보상/위안으로서의 예술 개념 따위는 모두 낭만주의 내지 후기 낭만주의 예술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요컨대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은 삶의 상실을 전제로 하며, 그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된다.

 

 

 

 

 

 

 

 

 

상실에 대한 두 가지 반응 태도를 다룬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1917)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애도와 우울증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우울증의 경우에 자기 존중감, 즉 자기애가 급격하게 추락한다는 것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ⅰ)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ⅱ)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ⅲ)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반응 태도가 정념의 특정한 상태를 지시한다기보다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한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 않았지만, 정념의 진행과정으로서의 애도와 우울증은 분명 내러티브를 함축한다. 그레마스(A. J. Greimas)에 따르면, 일반적인 서사체(혹은 서술체)의 경우 서술 프로그램은, 가장 간단하게는, 이접(disjunction)과 연접(conjunction)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접의 서사는 주체(S)와 대상(O)이 분리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상실하거나(상태) 박탈당하는(행위) 서사이고, 연접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이 결합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회복하거나(상태) 획득하는(행위) 서사이다. 이것을 함수(Function) 형식으로 표시하면,


F1(S)=(S∩O)→(S∪O): 상실/박탈

F2(S)=(S∪O)→(S∩O): 회복/획득


이 된다(∩와 ∪는 각각 연접과 이접을 표시한다). 프로프(V. Propp)와 그레마스의 서사학에서 주로 분석 대상이 되었던 모험 서사의 경우는 주체가 박탈된 대상을 다시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능단위들의 통사적 배치를 통해서 제시된다. 즉 그것의 일반적인 유형은 F1 F2가 결합된 형식을 취한다.


F(S)=(S∩O)→(S∪O)→(S∩O)


이러한 통사론적 배치의 모델과 유형에 대한 탐구는 주로 주체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서사학 혹은 서술기호학은 엄격히 말하면, 행동기호학 혹은 행위기호학이었다. 이 행동기호학에서의 주체는 행위의 한 기능으로서, 즉 행위자로서만 기술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이후의 서사에서 주체의 행위자로서의 역할은 모험서사에서의 그것만큼 중심적이지 않다. 낭만주의의 주체는 자아와 세계를 맞대응시킬 만큼 확장된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기에 오히려 중심적인 것은 이 주체의 주관적 정념이다. 따라서 대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 역시 모험서사에서처럼 즉각적이거나 반사적이지 않으며, 복잡한 내면적 과정을 통해서 표출된다. 그러한 과정을 유형화한 것이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이라면, 이 두 범주는 낭만적 서사를 기술하는 유력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앞에서의 함수 형식을 응용해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 모델을 제시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FT(S)=(S∩O1)→(S∪O1)→(S∩O2): 애도

FM(S)=(S∩O)→(S∪O)→(S↔$): 우울증


여기서 FT에서의 T는 Trauer(애도)의 이니셜이고, FM에서의 M은 Melancholia(우울증)의 이니셜이다. 애도의 함수에서 첫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상실’이고, 두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대상리비도의 전이(O1에서 O2로)인데, 이 전이의 과정을 ‘애도’라고 부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O1≠O2이어야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O1이 O2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O1>O2이기 때문에 그 대체는 완벽한 대체는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O1-O2의 차이가 애도의 크기와 정도를 결정한다.

 

우울증의 경우에는 조금 복잡한데, 먼저 첫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애도 함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과의 이접, 즉 ‘상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우울증의 진행과정에서 주체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상화된 자아(S=O로서의 $)와 원래의 자아가 차지하던 자리에 들어선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Superego) 사이에 자아 분열이 이루어지며(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울증 함수의 1, 2항과 3항에서의 동일한 기표 S는 ‘자아’의 자리만을 표시할 뿐이며, 실제적인 내용, 즉 기의는 다르다는 점이다. 1, 2항에서 S의 기의가 ‘자아’라면 3항에서는 ‘초자아’이다), 이 양자 간에는 애증관계,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가 표시하고자 하는 것이 그러한 애증/대립관계이다. 이렇듯 애도와 우울증은 그것이 함축하는 내러티브 진행과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는 언제 처음 나타나는가?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이 상실에 대한 반응태도라고 할 때, 인간에게서 최초의 근원적/원초적인 상실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서 애도와 우울증을 수반하는 근원적/원초적 상실은 오이디푸스 단계에서 엄마로부터의 분리이다(물론 분만 시 모체로부터의 분리를 가장 원초적인 분리체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인 분리과정이 아니라 생물학적 분리(과정)이며, 인간만의 고유한 체험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반면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비록 인간이 장기간의 의존기간을 거치면서 느리게 성숙해간다는 생물학적 사실의 결과이긴 하지만,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략 만 세살 반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가 자신과 다른 성을 지닌 부모와 신체적, 정서적, 지적으로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만, 자신과 동성인 부모가 가진 우선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보다 우월한 동성의 부모에게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근친상간 욕구와 살인충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이라고 묘사한 초자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이 죄책감이다(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러한 설명에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개념에 대한 자신의 최종적인 생각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리비도론 대신에 대상관계론을 주장하는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상황을 이론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진행과정 또한 일련의 서사적 과정을 함축하며,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때 애도의 서사는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성공적으로 해소해 나가는 과정의 서사이며, 우울증의 서사는 그렇지 못한 과정의 서사이다. 즉 애도의 서사함수 FT(S)=(S∩O1)→(S∪O1)→(S∩O2)는 FT(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자아∩초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고, 우울증의 서사함수 FM(S)=(S∩O)→(S∪O)→(S↔$)는 FM(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초자아↔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보편적 방식이지만,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애도의 서사와 우울증의 서사에 보다 잘 부합하는 것은 자아의 주관성이 극대화되고, 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성장하게 되는 낭만주의 서사이다. 이때 낭만주의 서사라는 말은 이중적인데, 그것은 낭만적 주인공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시인 자신의 전기적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 있어서 창작은 자신의 또 다른 전기, 혹은 진정한 ‘자서전’이다.

 

고전주의 시인의 과제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문학적 관습과 규범을 얼마나 잘 준수하느냐에 놓여 있었다면, 낭만주의 시인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문학적 생애를 창작을 통해서 기술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창작에 바쳐진 질료이면서 동시에 그의 창작이 궁극적으로 그려내야 할 형상이기도 하다. 이때 그가 지향하는 삶은 물론 더 이상 모방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 창조적인 삶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이 그러한 삶의 주체로서 새롭게 규정된다. 만약에 그러한 주체가 없다면,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적 관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자기창조, 혹은 자기 정립을 통해서 세계창조의 입법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혁명적이다. 물론 이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아니 정치적 혁명 이전에, 혁명적인 텍스트로서의 낭만주의 텍스트의 현상성이 낳는 혁명이다(K. H. 보러에 의하면, 그와 같은 현상성에 대한 의미론적 표현형식이 내용을 갖게 되는 시기는 1820년대이며, 대표적인 예가 하이네와 들라크루아의 작품이다). 즉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텍스트적 자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혁명적인 텍스트 혹은 텍스트적 혁명의 주체로서의 낭만주의 시인은 흔히 ‘낭만적 천재’라고 불리는바, 낭만주의 시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천재로서의, 창조의 주체로서의 자기규정, 곧 자기선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서 유독 ‘시인’이란 자기 정체성이 자주 주제화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러한 관심이 어떤 분리와 상실의 체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관적 자아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아를 한정하는 주변의 모든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의문제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세계 간의 분리가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 그 분리는 낭만적 시인의 자기정립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자기정립에의 무한책임을 떠안도록 내맡겨지는 소외의 체험이기도 하다. 상실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다(아래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1514]).

 

 

시인은 바로 그러한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아이면서, 그것을 창작을 통해서 보상받고자 하는 자아, 승화시키고자 하는 자아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실의 체험은 시인의 일상적 자아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자기결단을 통해서, 주관적 의식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자기 존재의 거처/장소를 찾아서 배회하는/표류하는 낭만주의 시인은 자기정립에의 여정의 이정표들을 세우게 된다. 그 이정표들은 시인의 앓고 있는 상실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그가 그 상실을 치유하는 방식이고 그 흔적이다.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실의 반복적인 치유과정을 통해서이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상실의 체험은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있어서 근원적인 조건이며, 시인의 자기창조에 있어서의 가능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실이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 조건이라고 해서, 그 자기정립의 방식이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개성과 그가 처한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마치 상실에 대한 각기 다른 반응 태도로서 애도와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상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자기정립의 두 유형을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유형화는 사실 생소한 것은 아니다. 이미 F. 쉴러는 <소박문학과 감상문학>(1795)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에서 모든 시인을 소박시인과 감상시인으로 대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소박시인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자기 분열과 자기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소박한 감성에 따라 현실에 모방에만 자신을 국한하는 시인이다. 반면에, 감상시인은 회의적이고 자기 분열적이며, 정신과 감정의 갈등에 고민하는 시인이다. 전자는 자연 자체이며, 후자는 자연을 찾는 자이다)...

 

06.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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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pax 2006-09-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사실 저도 우울증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는데(저 자신이 우울한 인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뭔가 우울증에 대한 필이 딱 꽂히는 기분이군요~ 그렇지만 역시 우울한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ㅠㅠ

로쟈 2006-09-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아니라 프로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북매거진 <텍스트>로부터 이메일 인터뷰 요청을 받고서 답한 초안의 내용을 옮겨놓는다. 분량상 책에는 얼마간 걸러진 다음에 게재될 것이다. (-)가 질문이고 (=)가 그에 대한 답변이다.  

-‘로쟈’라는 이름에 관해서 직접 말해달라. 그 이름은 자신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는지도 더불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감사하다. 어떤 용도가 될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또한 자기 존재감의 과시이면서 자기 존재의 '확장'일 테니까. 물론 이건 모두 '로쟈'가 열심히 끄적거려준 덕분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밝혔는데, '로쟈'는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다(즉, 로지온의 애칭이다). 교양있는 분들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대개 연상하고서 '여자' 이름이 아닌가로 판단하는데, 로쟈는 '혁명가'가 아니라 '살인자'의 이름이다(혹 '박노자'의 닉네임이 아닌가란 의견도 예전엔 있었다.^^).

 

인터넷에서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게 지난 99년부터인데, 초기엔 '이가두' '이가휘' 같은 중국풍의 닉네임을 한동안 쓰기도 했다. 그러다 '로쟈'로 정착된 건 기억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보르헤스가 언젠가 '보르헤스와 나'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와 로쟈'도 비슷하다. 많이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는 나의 페르소나(가면)이면서 대변인이고 때론 주인이면서 동시에 하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책읽기 주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bibliological subject' 정도라고 해두자. '나는 책을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란 명제로부터 탄생하는 어떤 주체.

 

-당신의 알라딘 활동(?)이나 비평고원 활동(?)은 이른바 ‘업계(책을 읽고 쓰길 좋아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에서는 꽤 유명한 편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당신의 독서편력에 혀를 내두른다. 당신의 그런 현재를 있게 한 책읽기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내가 글을 쓰는 공간은 그 딱 두 군데인데, 해놓은 일에 비해서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오역에 관한 지적들을 자주 하면서 출판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해서, '내성적인' 성격과는 좀 다르게 많이 나서는/나대는 인물이란 인상도 주는 듯하다(나는 책 얘기가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조용한' 편이다!).

 

'비평고원' 같은 카페는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나는 초창기 멤버인데,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했다), 알라딘의 서재 같은 경우는 어느날 뚝 떨어진 것이다. 알라딘은 책값 좀 벌어보려고 마이 리뷰를 몇 개 쓰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해서 나름대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리뷰를 많이 쓴 건 아니고 아마도 유명세의 8할은 '페이퍼' 때문인 듯하다. 책에 대한 잡담들.  

 

'독서편력'이라고 하면 좀 부끄럽다. 생각만큼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독서의 성격과도 좀 관계가 있는데, 문학 전공자라서 자연스레 갖게 된 태도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세히 읽기'가 필요한 책이 아니면 손에 잘 들게 되지 않는다(더불어 책을 빨리 읽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이 읽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는 체'를 많이 해서인 듯한데(보수만 두둑이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책 이름들을 적어나갈 수 있다), 사실 책들을 둘러보고 찾아보고 하는 일들을 즐기는 편이긴 하다(주변에선 내 전공이 '서지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데, 그건 '독서편력'이 아니라 '도서편력'이라고 해야 맞겠다. 어쩌면 '편력'도 정확하지는 않다. <어린왕자>에 보면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 나오는데, 그는 여행자들이 보고 온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만 한다. 즉, 그가 하는 건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      

 

책읽기의 시작점? 어머니 말씀으론 내 당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백발 도사가 책을 읽는 모습이 나의 당사주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여하튼 8살 때쯤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꽂이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좍 꽂혀 있는 걸 보고 경이감을 느낀 적이 있다(우리 집에는 낱권으로도 책이 별로 없을 때였다). 어쩌자고 세상엔 도대체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책이란 게 있는 것일까?! 그러한 책의 존재 자체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이롭다(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  

 

-당신의 글쓰기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인터넷’이 글쓰기와 관련하여 갖는 어떤 의미가 있나? 지면을 허락받는 게 아니라,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인가?

 

=사이버 공간이란 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원래 독서일기 같은 걸 PC에다 쳐넣곤 했으니까. 다만, 공개된다는 게 다를 뿐인데, 사실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갖긴 한다. 좀더 친절하게 좀더 풀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는 별개로(그건 별로 의식해보지 못했다) 오프라인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은 글쓰기라는 걸 얼마간 의식하고는 있다. 그건 자유로움이면서 동시에 어떤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애정을 갖고 있는데, 가끔씩 들어오는 청탁을 받고 쓰는 게 아닌, 온라인에 직접 쓰는 글들의 대부분은 ‘곁다리 텍스트’들이다. 번듯하지도 않아서 내세우기에는 멋쩍은. 그래서 ‘책’으로 묶이지 않을 텍스트들. 그런 텍스트들을 모아놓을 수 있다는 점이 인터넷 공간의 특장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외국문학, 특히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당신의 학과 진학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치더라도(아니라면, 그 이유도 물론 궁금하거니와), 그것을 당신의 업으로 삼은 것은 엄연히 당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 러시아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당신을 위태롭거나 공허하게 한 적은 없는가(여기서의 위태로움은 경제적인 위태로움에 관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으로 고른 것은 운명이다.^^ 나는 예정조화설 같은 걸 믿기도 하고(‘예정파국설’이어도 무방하다). 애초에는 그냥 ‘문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이었고, 러시아문학에 큰 작가들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경제적인 위태로움’을 논외로 하면, 문학이나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적은 거의 없다. 동료들끼리는 상투적인 푸념들을 늘어놓지만 그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주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성채는 인간들이 써놓은 최우량의 텍스트들로 구성된다. 이 텍스트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을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고답적인 어투의 육법전서 따위를 읽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오만의 대가는 현실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 

 

한편으로, 질문은 ‘외국문학도’로서의 한계 같은 걸 느낀 적은 없는가, 라고도 읽히는데, 전공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러시아문학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 혹은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다. 그저 인생이 짧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미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당신은 이전에 <텍스트>에 출판번역의 오류에 관해서 글을 쓴 적도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하여 글을 쓸 때, 당신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단 당신의 전공인 ‘노어->한국어’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특별히 이런 작업에 대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것인가?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한국인이 한글로 쓴 책만 읽고서 무얼 좀 알게 되고 또 똑똑해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유감스럽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본다. 때문에 필요한 것이 좋은 번역이다. 특히나 고전들의 번역(‘우리시대의 고전’들을 포함해서). 기본적으로 좀더 많은 책들이 좀더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게 총론이다. 번역상의 오류 등에 대한 지적은 각론에 해당한다. 읽을 만한 책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거기엔 겹쳐 있다. 더구나 내 돈 주고 산 책 아닌가?

 

그러한 작업과 관련하여 외국문학 전공자라는 정체성을 크게 의식한 적은 없다. 사실, 내가 문제삼았던 책들은 대부분 문학서들이 아니라 철학서나 이론서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이 교양서라면 일반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적어도 한국어로 된 책 아닌가?).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한 지방대학에서 문화기호학 같은 과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시키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이론서들을 읽다가 나가떨어지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듯하다면서. 그런데, 그들이 읽은 책들 가운데도 주어 술어도 못 맞추는 오역서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게 ‘학문’이고 ‘관행’이라면 어처구니없을 뿐더러 비참한 일이다.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책들과 함께 우리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당신은 교육 잘 받은 세대로서 풍요로움과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직업을 유전 받지 못한 세대로서의 곤궁함과 난처함 또한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풍요로움과 곤궁함에 관해 듣고 싶다.

 

=교육 잘 받은 ‘세대’라는 건 무슨 뜻인가?(어느 세대와 비교해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 세대?) 교육 ‘잘 받은’은 대학원졸을 의미하는 건가? 그런데 백수인? 나의 ‘실상’을 까발려놓으라는 얘기 같다.^^ 나의 풍요로움은 물론 책이다. 책밖에 없기도 하다. 가진 재산이라고는(지방 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는 책값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곤궁함은 정확히 그 풍요로움이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곤궁은 확산력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곤궁에 시달린다(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시달린다!). 이런 문제를 자세히 늘어놓는다는 건 궁상맞은 일이다.^^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한다. 어느 때도 인문학이 위기에 놓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적 역사가 된 듯싶다. 이것이 비록 상투적인 얘기가 되어버렸다고 한들, 당신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을 텐데 (그것이 비록 상투적이라고 하더라도) 들려달라.

 

=사안은 좀 다르지만 문학이고 인문학이고 늘 위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고적으로라도 ‘그때가 좋았지!’ 할 만한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 더불어, 나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사회 속에서의 위상이 저하되고 있다든가 필요가 절하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인)문학 혼자 억울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인문학자의 위기, 내지는 인문학 후속 세대의 위기이다. 물론 이 위기의 빌미는 태생적인데, 그것은 (인)문학이 기생적이라는 데 있는 듯싶다. 자기 스스로 밥벌이하는 게 아니라는 것. 보다 실감나게 말하자면, (인)문학 ‘공부’가 기생적이다. 이 공부는 있는 집 거덜내고 없는 집 주저앉게 한다. 한마디로 멜랑콜리한 공부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굳이 있다면 생태학적이고 진화론적인 것이다. 학문 후속 세대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가 있을 법하다. 그들은 각자의 풍토에 맞는 인문학의 부피와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인문학적 공간(혹은 장) 안에서 자신을 바라봤을 때, 현재의 당신의 자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 같은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게 주어진 자리가 있고 찾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 즉, 해야 할 몫이 있고 나잇값이 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일은 많다. 물론 일차적인 관심은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인문학도로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지분을 넓히면서 인문학이 더 많은 책임을 떠안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인문(人文)은 ‘사람의 무늬’란 뜻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문학의 책임은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이들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많이 읽어야 하며,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자기 고백적인 글을 쓸 때, 시와 시인을 인용하곤 한다. 그리고 어느 글에서인가 ‘시를 읽지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날카로운 태도를 취한 바 있다. 시(인)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20대 초반에 많은 시들을 읽었고 몇 권 분량의 시도 썼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말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이다. 시라는 건 그러한 관심/사랑의 최적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는 시를 ‘영혼의 끼니’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러한 끼니로 ‘비만한’ 영혼들을 좋아한다. 한편으론 ‘찌라시’ 수준의 강파른 언어를 혐오하고. 물론 시인들은 그런 ‘끼니’가 될 만한 시들을 쓸 책임과 의무가 있다. 저급한 시들로 식중독이나 걸리게 하면 안된다.   

 

-당신에게 있어서, 혹은 당신의 글쓰기에 지식이란 어떤 쓸모를 갖는가? 당신은 주로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편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돌이켜보면, 시적인 감수성으로 씌어진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도 엿보인다. 현재 당신의 글쓰기는 당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 있는가.

 

=<텍스트>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이 원래 체질에 잘 맞는 건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도 주정적인 면이 강하다. 한데, 그러한 면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드러나는 걸 혐오하는 편이다. ‘시적인 감수성’이 ‘너절한 감상’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시는 그냥 언어만이 아니다. 시는 삶이고 삶의 파토스이다. 나는 니진스키의 일기를 시로 읽는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라는 걸 읽으며 나는 울고 싶지만, 대신에 쓴다. 이러한 울음이 감상으로 함부로 절하되는 걸 혐오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쓴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가?   

 

-지금 당신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의외이다. 보통은 “당신이 진정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래도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겠다는 걸 더 많이 쓰게 된다. 만약에 직업이 ‘공부’가 아니라 전업 작가라면 한두 달에 한권씩 책을 낼 만큼 쓸 생각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문제는 내가 쾌락적이면서 또한 너무 금욕적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만 한다. 나는 진정 쓰고 싶은 걸 내내 아주 조금씩만 쓰게 될 듯하다...

 

06.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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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6-26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리플이 저에게 남겨졌네요. ^^
로쟈님이 이렇게 대단하고 유명한 분인지 미처 몰라뵈었네요.
우연히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3794 2006-06-26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택스트 라는 잡지는 어디서 구해야 하나요? 지방이라서 안보이는 걸까요?

로쟈 2006-06-26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andhikr님/ 제가 그래도 알라딘에서는 제법 유명한 축에 속합니다(험험)...
양민님/ <텍스트>는 무가지이지만 정기구독이 가능하며 그 경우에는 구독료가 있습니다. text@texttata.com으로 문의해보시길...

기인 2006-06-2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홋홋; 저에게는 책이 여성들만큼 친절하지 않은데요? ㅎㅎ 역시 아직 젊고 학식이 짧아서 그런지. 아님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 농담입니다. (여성들이 책보다 친절한 것은 진담이고요 ^^;;;; ) 안 그래도 학부때 저에게 엄청나게 매몰찼던 헤겔을 다시 읽어보려고 세미나를 조직했습니다. 이번에는 거절당하지 않아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독어를 못하는 저로서는 영역본과 국역본을 가지고 꾸준히 구애해볼 수 밖에요. ^^
항상 로쟈님 글 읽고 도움 많이 받습니다. :)

로쟈 2006-06-2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절한 쪽으로 더 많이 투자하십시오(헤겔은 다이제스트 정도로 때우시구요).^^

가을산 2006-06-2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 룩셈부르크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녀'라는 소리도 들으시잖아요?)

2006-06-27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답글은 안주셔도 된다고 하셨는데,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 사진처럼 운동장 수준의 서재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리는 없지요.^^ 어느 외국서점의 이미지일 겁니다...

Joule 2006-06-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만 잘 쓰시는 게 아니라 말씀도 굉장히 잘 하시네요. 로쟈님처럼 답을 맛나게 잘하시는 분들만 있으면 인터뷰어도 할 만한 일이겠어요.

2006-06-27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교양이 있으시군요.^^
joule님/ 이게 이메일 인터뷰니까 제가 말로 한 게 아니라 글로 쓴 건데요(^^;)...

Joule 2006-06-28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도대체 텍스트를 이렇게 건성으로 읽어서야 원. 쯧. (민망해서 괜히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