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배제하라? 문예지 신인상 심사에서 '노티'나는 작가들은 암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기사를 읽고 '소설가의 나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기서 '시인의 나이'는 고려되지 않는데, 상업적인 계산과 밀착되어 있는 것은 소설가의 나이이지 시인의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관련기사는 이렇다. 

북데일리(06. 09. 13) 문예지 신인상 아줌마는 배제? 작가의 주장 파문

“문예지 신인상을 심사할 때 편집위원 혹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아줌마를 배제하라’라는 규율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일단 무조건 아줌마 냄새가 나는 작품은 제외시킨다. 요즘은 신인상 공모 공고에 대놓고 ‘우리는 젊은 작가를 원한다’라고 주를 달아놓는 문예지도 있단다. 그럼 젊지 않은 작가는 아예 응모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한겨레출판. 2006)로 제1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조영아가 문예지 신인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시사 주간지 한겨레21(제626호)을 통해서다. 조영아는 “수준이 고만고만한 몇 작품을 뽑아놓고 일일이 전화로 나이를 확인한 다음 연락이 없다. 그중에 나이 제일 어린 누군가가 다시 연락을 받는 행운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모를 준비할 때면 아줌마 티가 나는 작품은 일찌감치 제쳐둔다. 뛰어나게 잘 쓰지 않은 이상 뽑히기 어렵다는 지론에서다”라고 덧붙였다.

-문학상 심사에 나이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들로선 의외로 받아질 대목(*하지만 얼마간은 '상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천 만원의 상금을 내건 신인상들의 경우, 잡지나 출판사에선 '본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이'를 한 가지 변수로 고려하는 것이다. 기사에서 이 '돈'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일단 조영아가 민감할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한 것은 젊은 작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문학판의 풍토를 지적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깊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조만간 문학상 공모에 나이 제한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고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아줌마 티가 난다는 이유로 심사 대상에서 일찌감치 제외된다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나라를 떠나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

-올해는 유독 신춘문예, 문학상에서 나이든 늦깎이 신인들의 출현이 돋보였다. 오래 묵혀 온 문학에의 열정과, 탄탄한 습작 과정을 통해 등단한 실력 있는 신인들에게 ‘나이’란 문제조차 되지 않는 납득할 수 없는 잣대다. 따라서 만약 신인상에 그같은 풍토가 작용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신인상에 거액의 상금만 내걸지 않으면 된다. 혹은 수상작가가 상금을 거절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독자가 작가의 나이와 무관하게 책을 좀 사주든가).

-조영아 역시 나이 마흔에 등단한 아줌마 작가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른 넘어 시작한 부단한 글쓰기의 수련과정을 공개 한 바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결혼 후 전업주부로 생활하면서도 늘 ‘글밭’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 살림을 이끌어야 하는 주부에게 창작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 시키고 고시원에 출퇴근하며 이를 악물고 글을 썼다.

-동화는 물론 단편, 중편 습작을 거듭했으나 등단은 쉽지 않았다. 각종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에 도전했지만 최종심에만 오를 뿐 수상은 하지 못한 것. 그러나 창작을 향한 그의 투지는 쉽게 사그라질 만큼 약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잠든 때를 틈타 밤잠까지 줄여 가며 매일 10시간 이상 글을 쓰며 갈고 닦은 열성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다. 조영아의 이번 칼럼은 그의 이같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번 신춘문예나 문학상에서 드러났듯이 실제로 잘 쓰는 아줌마 작가들, 혹은 나이 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하며 "`우리도 한 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아줌마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라고 일갈했다.

-그의 이번 주장은 고시원, 공공 도서관의 좁은 칸막이에 갇혀 등단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전국의 늦깎이 습작생들에게 띄우는 격려이자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문예지 신인상을 향한 시의적절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기사는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을 떠올리게 했는데, 지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상을 수상한 그의 소설 <짧은 뱀>(문학세계사, 2006)이 그가 76세에 쓴 처녀소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 부슈롱은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다. 항공 산업에서 시작해 텍사스 주의 테제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산업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 사전 습작의 경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2004년, 76세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짧은 뱀>으로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작가의 나이를 불문하는 걸 보면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도 공쿠르 상처럼 상금이 얼마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려나 부슈롱의 '노익장'은 가령 미셸 투르니에처럼 40대에 데뷔하는 늦깎이 작가들조차도 젊어 보이게 만든다.

소개에 따르면 <짧은 뱀>은 "정교한 고증학적 지식과 잔혹한 상상력이 결합된 종교적 모험 이야기. 14세기 말 북극지대에서 펼쳐지는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이 76세에 쓴 생애 첫 소설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다. 야만의 지옥에서 타락의 길을 걷는 북방동토(누벨툴레)의 기독교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한 원정대. 그들이 '짧은 뱀'이라는 선박 한 척에 의지하여 빙산과 폭설로 고립된 혹한의 섬을 찾아가는 과정이 일인칭 시점의 보고서 형식으로 기술된다." 나이로 보아 '긴 여정'을 남겨놓지 않은 작가의 데뷔작이지만, '굵은 여정'의 시발점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한국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늦깎이 작가 박완서(1931- ) 선생의 단편문학전집이 전 6권으로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1999년 출간된 전집을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선보이는 개정판"으로 "초판에는 빠져 있던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추가하여, 총 여섯 권으로 구성했"으며 "1971년 3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발표된 박완서의 단편소설들을 총망라했으며, 각각의 작품은 발표시기 순으로 나누어 실었다"고 한다.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경력이 올해로 서른 여섯 해이다(그간의 업적으로 몇달 전 작가는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가로서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작가로서의 태도, 혹은 각오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나이를 핑계삼는 문단/출판계 일각의 '계산'은 속좁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혹 그러한 계산이 요즘 한국문학의 독자들을 점점 말라붙게 한 것은 아닌가?). 문학의 신이시여, 그들의 소갈머리를 어찌해야 하옵니까?..

06. 09. 16-17.

 

 

 

 

P.S. 마흔도 멀지 않은 요즘 같아선 나도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와 폴 오스터/크누트 함순의 <굶기의 예술>을 (다시) 읽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들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강퍅해야 하며 굶주려야 하는가를 증언해주고 있으니까(기름기 좀 들어간 작가들은 다른 종의 소설가들이다). 하긴 네가 지금 배부른 처지냐고 하면 대답이 사뭇 궁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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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9-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로 나이를 확인'하다니. 참 잔머리라고 해야할지 나름의 고심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국외자가 보기에는 그저 '꼴깝'으로만 보이네요.

로쟈 2006-09-1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이든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면 좀 추해지지요...

니브리티 2006-09-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소설이라... 로카드님도 전에 소설 쓰신다고 조금 올리신 적이 있는데.. 이번 문예중앙 시인들의 대담코너에서 이런 말들이 오가더군요..좀 다른 의미에서 동의하는 말이긴 한데, <장르는 운명이다>

로쟈 2006-09-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는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시켜 준 작가가 쿤데라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하면서 저도 언젠가는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지젝 스타일의 책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도 갖고 있어서 어느 것이 실현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뛰어넘는 게 또한 게으른 일상인지라...

다크아이즈 2006-09-2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묘사적 강박을 주입시키는 경로들(각종 신춘문예나 메이저급 문학 잡지)을 극복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지겹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나저나 '참을 수 없는~' 말고 쿤데라의 어떤 소설을 읽으면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 권만 권해주세요.

로쟈 2006-09-2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쿤데라의 모든 소설이 그런 건데요... 소위 에세이적 소설, 성찰적 소설 류라고...

다크아이즈 2006-09-2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소설을 묘사와 산문적 성찰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거군요. 저는 묘사와 서술(이야기)로 구분할 때 우리 소설은 지나치게 묘사에 올인한다는 뜻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자와 일반독자의 차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또 배우고 싶은 게 있어요.


양파와 문첸가 하는 제목으로 김훈에 대해 언급한 것 읽은 적 있는데(아직 카테고리 성격을 파악 못해 다시 찾아 읽으려니 못 찾겠어요.) 로쟈님 말씀으로는 김훈은 소설가보다 에세이스트로서 탁월하다, 뭐 이렇게 읽혔거든요. 그건 문체만 얘기할 때 그렇다는 것인지요? 즉, 쿤데라 소설이 묘사보다는 성찰이 우선한다는 전제를 두고 볼 때 김훈은 해당 사항이 없는 건가요? 그 미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문체만으로는 '쿤데라적 소설가'(제가 지은 말)가 되기에는 어림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김훈의 문체를 부러워하지만, 소설이나 에세이 두 편 정도만 읽어도 김훈적 문체가 너무 드러나는 바람에 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 질문의 요지는 김훈의 문체로는 쿤데라적 성찰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인가요? 왜냐면 김훈 보고는 에세이스트가 어울린다고 하고 쿤데라는 그 에세이적 성찰 때문에 뛰어난(?) 소설가라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지금 생각난 건데 김훈은 감각(감성)적 에세이스트, 쿤데라는 철학적 에세이스트, 고로 철학적 에세이스트가 더 소설가에 합당하다, 뭐 이렇게 해석해도 되나요? 아휴, 골치 아파, 제 미흡한 독해를 해독해주세요. 요즘 로쟈님 서재 훔쳐보느라 미치도록 즐거워요. 그나 저나 언제 이 보물들을 완독할 수 있을지...

로쟈 2006-09-2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을 간추리면 김훈의 에세이가 쿤데라의 에세이적 소설과 뭐가 다른가쯤 될까요? 저는 쿤데라를 에세이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그가 비평적 에세이들도 썼지만). 그는 작가, 곧 소설가이지요. 거꾸로 저는 김훈을 소설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좀 과도한 주장이지요. 하지만, 그가 아직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 기대에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들은 독백적이며 제겐 김훈 자신의 복화술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3인칭의 시점으로는 세계를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게 에세이스트의 운명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바흐친에 기대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대화적이고 대화적이어야 하지요. 다른 말, 다른 의식, 다른 이데올로기의 간섭과 혼종이 소설의 규정항입니다. 얘기가 너무 거창해지는군요.^^

다크아이즈 2006-09-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수 잘 했습니다. 에세이스트와 에세이적 소설이 이렇게 다른 거군요. 혼자 씨불이느냐,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상충이 있느냐에 따라... 왜 김훈의 소설(문장)이 빛나긴 했지만 지겨웠는지 감이 오네요.
 

이번 학기는 월요일이 죽음이다. 두 군데 대학에서 다섯 시간의 강의가 있고, 덕분에 네 시간 반을 버스와 전철을 타며 보낸다. 아마도 외판원들의 일상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늦은 저녁시간에 집에 돌아오면 또 골골대는 식구들 탓에 마음 한 구석이 무겁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마저 무거워진다. 커피 한잔 마시고, <맥베스>에 관한 글을 마저 정리할까 하다가 잠시 20대에 쓴 시들을 읽어본다. 늦게 저녁을 먹었기에 허기진 상태는 아닌건만 '만두를 생각하며'란 시가 눈에 들어온다(하긴 '닭곰탕을 먹으며'도 옆에 있긴 하다). 냉동실에 유통기한이 지난 물만두도 있긴 하지만, 내가 떠올리는 만두는 설연휴에 온가족이 달려들어 빚어먹는 김치만두국이다(그러고 보니 좀 뜬금없군).

 

다진 고기에 두부와 김치를 잘게 썰어넣고 당면도 넣고

그걸 자루에 넣어 잘 쥐어짜면 만두 속이다, 만두의 속마음

물기 빠진 속마음은 그렇게 잘 다져진 칼로리들의 집적이고

맛의 배합이며 뻗친 정성의 맛깔스런 빛깔이다

만두의 속마음


그걸 끊는 물에 넣어 만두국을 만들고

그걸 튀겨 튀김만두를 만들고

그걸 삶아 물만두를 만든다


피가 너무 얇은 만두는 때로 터지기도 한다

이미 속마음의 핏줄이 보이던 만두

저 혼자 온몸이 부서져라 통곡하기도 한다


터진 만두도 맛은 괜찮다

 

 

옮겨놓고 보니까 좀 싱겁다는 생각도 드는군(간장도 갖다 놓아야 할까?). '만두'하니까 러시아식 '고기만두'인 피로그(복수형은 '피로기')가 생각난다. 하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어떤 모양의 어떤 맛이라고 꼬집이 말하기 어렵지만. 게다가 '고기만두'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은 '파이'에 더 가깝다. 그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헐리우드 영화 <아메리칸 파이>가 러시아판으로는 <아메리칸 피로그>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래는 '치즈를 넣은 피로그'인데 이쯤되면 그냥 피자 아닌가? 그러니까 피로그는 만두이자 파이이고 피자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아주 비싸게 먹은 아르메니아식 만두가 생각나는군. 그건 그래도 우리식 '고기만두'에 가장 가까웠다. 터무니없이 비쌌다는 걸 제외하면...

겉모양으로는 다 제각각이지만 속터지는 마음들만큼은 다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06.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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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9-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터지는 마음들이야 다 비슷비슷해서일지도 모르지요...

마노아 2006-09-12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은 걸요. 근데 이 밤중에 배고파졌어요ㅡ.ㅜ

로쟈 2006-09-12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시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지요.^^

이네파벨 2006-09-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장을 갖다놓아야 할까" 멋진 농담입니다. ^0^
시로는 배를 채울 수 없을뿐더러 더욱 허기지게 만들지요...

만두먹고싶어요!!!
(저도 그 김치 넣고 만든..집에서 손으로 빚어먹는 만두...너무 좋아합니다. 저희 할머니가 이북분이셔서..어릴때 명절이면 실컷 먹곤 했지요...첫애 가져 입덧할때도 다른 음식은 다 먹기 싫은데 이 만두가 먹고싶어서 친정엄마가 잔뜩 만들어서 얼려서 공수해주셨던 기억이....지금은 친정엄마도 기력이 약하셔서 만두만들 엄두를 못내시고 저는 아예 시도조차 해본 일이 없고..남편도 김치만두를 좋아하지 않아서...집에서 만든 수제만두는 먹어볼 일이 없어요....가끔 아들내미 학원 끝나고 데리고 오면서 그 근처 만두집에서 황해도식 만두를 사먹는데...그런대로..꿩대신 닭이예요~)

sommer 2006-09-1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만두 속은 터질 운명이었군요...^^ 들키지 않게 꼭꼭 숨겨 놓아도...

자꾸때리다 2006-09-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만두와 물만두 뭐가 더 맛있을까연?

로쟈 2006-09-13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군만두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만...

노부후사 2006-09-1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이 어떤지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배가 고파서 그런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로쟈 2006-09-1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기 맛이 궁금하신 건가요? 만두도 마찬가지지만, 밀가루피 같은 거에 이것저것 넣어서 싸먹는 걸 총칭하는 게 아닌가 싶고, 맛은 당연히 내용물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제가 먹어본 건 몇 종류 안되지만). 허기를 때울 정도는 됩니다...
 

마땅한 핑계가 없을 때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주일 예배를 다녀온다. 대개는 설교 시간에 졸다가 오기 십상이지만(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설교시간이 아니라 기도시간이다) 그래도 '다윗의 덫'이란 제목의 오늘 설교말씀은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어서 절반은 졸지 않을 수 있었다(이럴 때는 들고 간 한영성경과 러시아어성경을 이리저리 들춰보기도 한다). '다윗의 덫'이란 설교말씀은 사뮤엘하 11장 1-5절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 유명한 '다윗과 바세바'의 일화를 다룬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남의 아내와 동침하고서는 그 남편을 죽게 만든 후에 그 여자를 아예 아내를 맞아들인 다윗의 '색욕'과 '주책'에 관한 일화인데, 다윗에 관한 허다한 일화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재미있는' 일화가 아닌가 한다. 이게 내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건 헐리우드에서 이미 <다윗과 바세바>(1951)란 영화를 만든 바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그레고리 펙과 수잔 헤이워드 주연이다. 그레고리 펙은 '맥아더 장군' 역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여기에 다 늘어놓을 형편이 되지 않기에 성경말씀과 함께 몇 가지 이미지들만을 먼저 저장해둔다. 사무엘하 11장의 1-5절을 읽단 읽어보기 전에 렘브란트가 그린 '바세바'(<다윗왕의 편지를 받은 바세바>)를 잠시 감상해본다. 성경의 구절은 우리말로 읽기 편한 공동번역 성경에서 인용한다.   

1 해가 바뀌는 때가 왕들이 싸움을 일으키는 때였다. 그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 부하 장교들과 이스라엘 전군을 맡겨 내보냈다. 그들은 암몬을 무찌르고 마침내 라빠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2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침대에서 일어나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3 다윗이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니, 사령은 돌아와서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 바쎄바인데 남편은 헷 사람 우리야라고 보고하였다.
4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 보냈다.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5 바쎄바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렸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 목사님이 설교말씀을 하시는 중에 내가 한 딴짓은 4절에서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한 대였다", 즉 '목욕했다'의 시점 문제를 따져본 것이었다. 러시아 성경에서는 다윗과 정을 통한 이후에 목욕하고 집에 돌아갔다는 식으로 번역돼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갖고 있는 한영성경에서는 모두 다윗에게 오기 전에 목욕하고 온 것으로 돼 있다. 러시아어 성경의 오역일까? 하긴 오며가며 했을 목욕일 텐데, 순서야 대수롭지 않을 듯도 하지만. 아래는 영화속에서 목욕하는 바세바 역의 수잔 헤이워드.

50이 넘은 '늙은' 나이에 남의 아낙을 탐한 다윗의 '정력'이 부러워할 만한 것인지 지탄받을 만한 것인지는 다윗과 바세바를 그린 다른 그림들을 보건대, 다윗과 바세바의 관계가 영화에서처럼 멋있는 커플 관계였을 법하진 않다. 한 산부인과 의사는 ''핍쇼' 중독자 다윗'이란 칼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관음증은 다른 사람이 옷을 벗거나, 나체의 모습 혹은 타인의 성관계하는 장면을 몰래 보는 것을 즐기고 성적 쾌감을 느끼는 경우를 말한다. 사춘기를 거쳐 청소년 시기에는 누구나 이러한 경향이 있으므로 병적이고 비정상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청소년기를 지난 후에도 강박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사회생활, 직장생활에 비건전한 악영향을 준다면 진단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위대하고 현명한 유대의 왕으로 추앙받는 다윗 역시 ‘관음증’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큰데, 그림(*어느 그림인지는 모르겠다)에 묘사된 것을 보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떠있고 눈부신 햇살만큼 투명한 알몸을 드러낸 저 멀리 옥상의 아찔한 눈부신 여인의 알몸은 이민족과의 전쟁을 앞두고 깊은 시름에 잠긴 왕의 눈동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번쩍 태양보다도 강렬한 자극에 이성을 잃은 왕은 백성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부녀인 그녀를 차지하고야 만다. 믿을 수 없게도 이 과정에서 음모를 꾸며 그녀를 과부로 만들어 버리는 만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바세바, 그녀가 별볼일 없는 남편에게 실망해 화려한 권력을 꿈꾼 채로 대낮의 목욕이라는 치밀한 각본 끝에 스트레스 쌓인 왕을 유혹한 것인지, 정말로 우연한 대낮의 목욕에 ‘핍쇼’중독자인 늙은 왕이 주책없이 매료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남성의 부정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은 그의 욕망을 추악한 관음증 탓으로 돌리지 않고 천하의 악녀 바세바가 그의 페니스에 술수를 부린 것으로 해석해 남성을 단지 어쩔 수 없었던 희생자로 격상시킨다('스포츠서울' 05. 10. 10).

적어도 이후에 벌어진 결과는 다윗의 '주책'보다 바세바의 '각본'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11장의 나머지 절들을 마저 읽어보기로 하자. 

6 그러자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헷 사람 우리야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요압이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다.
7 우리야가 당도하자 다윗은 요압과 병사들의 안부를 묻고 싸움터의 형편도 알아보고 나서
8 집에 돌아가 푹 쉬라고 하였다. 우리야가 어전에서 물러나올 때 왕은 술상까지 딸려 보냈다.
9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대궐 문간에서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0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가 집에 돌아가 자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야에게 물었다. "그대는 먼 길에서 돌아온 몸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집에 내려가 보지 않았는가?"
11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온 이스라엘 군과 유다 군이 야영 중입니다.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 상관 요압 장군이나 임금님의 부하들도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집에 가서 편히 쉬며 먹고 마시고 아내와 더불어 밤을 지내다니,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12 다윗은 "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도록 하오." 하며 우리야에게 내일은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우리야는 그 날도 예루살렘에서 묵었다.
13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들여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하여 그를 흠뻑 취하게 만들었다. 우리야는 그 날 저녁에도 어전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4 날이 밝자 다윗은 요압 앞으로 편지를 써서 우리야에게 주어 보냈다.
15 다윗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고 너희는 뒤로 물러나서 그를 맞아죽게 하여라."
16 요압은 성을 지켜보고 있다가 강병이 지키고 있는 데를 알아내어 그 곳으로 우리야를 보냈다.
17 그러자 그 성에서 적군이 나와 요압의 군대를 쳤다. 다윗의 부하들은 쓰러지고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
18 요압은 다윗에게 전황을 보고할 전령을 보내면서
19 이렇게 지시하였다. "이번 싸움의 보고를 드리면,
20 왕께서 화를 내시며 '어쩌자고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쳐들어갔었느냐?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올 줄도 몰랐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이 누구의 손에 죽었느냐? 데베스 성벽 위에서 어느 하잘것없는 한 계집이 내려 던진 맷돌에 맞아 죽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성벽 가까이 갔었느냐?' 하고 꾸짖으실 것이다. 그 때 너는 왕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고 아뢰어라."
22 전령은 길을 떠나 다윗에게 와서 요압이 이른 대로 보고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화를 내며 전령에게 호통을 쳤다.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쳐들어갔었느냐? 적군이 성벽에서 화살을 쏘아댈 줄도 몰랐더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이 누구의 손에 죽었느냐? 데베스 성벽 위에서 한 계집이 내려 던진 맷돌에 맞아 죽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성에 가까이 갔었느냐?"
23 전령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적군이 들에까지 나와 우리를 몰아대기에 우리도 마주나가 놈들을 쫓다 보니 성문 가까이까지 쳐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4 그 때 성 위에서 활을 쏘아대는 바람에 임금님의 근위병도 몇이 죽었고 임금님의 부하인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25 이 말을 듣고 다윗은 전령에게 말하였다. "요압에게 돌아가거든, '전장에서는 누구든지 죽을 수 있는 것이니, 이 일로 걱정하지 말고 힘을 다하여 기어이 그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시오.' 하고 일러라." 이런 말로 그에게 용기를 주라고 하였다.
26 우리야가 전사했다는 전갈을 받고 그의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곡을 했다.
27 곡하는 기간이 지난 다음,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여인을 궁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그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다윗이 한 이 일이 야훼의 눈에 거슬렸다.

야훼(여호와)의 눈밖에 난 다윗과 바세바의 아이는 결국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곧 둘째 아들을 갖게 되는바 그가 바로 (생전에!) 다윗의 대를 잇는 솔로몬이다. 우리야의 아내로 남아있었다면 바세바가 솔로몬의 어머니, 곧 국모가 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이 솔로몬은 다윗뿐만 아니라 야훼의 사랑마저도 독차지하게 되는데 말이다(사무엘하 12:24 "다윗이 아내 바쎄바를 위로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니 바쎄바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였다. 야훼께서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내가 들은 설교말씀의 결론은 성도들이 '다윗의 덫'에 빠지지말아야 하다는 것이었는데, 좀 일면적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랬다면 다윗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 악은 선을 잉태한다. 그것이 선악의 변증법인가? 둘 사이에서 낳은 첫째 아들은 죽게 했지만 둘째 아들은 사랑한 게 또한 야훼의 법이었으니 이 또한 사랑과 증오의 변증법이라 할 만하다.

해서, 러시아 화가 마르크 샤갈이 다윗과 바세바에 관한 그림을 이처럼 그릴 때, 그가 염두에 둔 건 '불륜'이 아니라 '섭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은총'이었는지도. 인간의 우연한 의지란 그렇게 역사의 필연을 만들어가는 것 아닌가?..

06. 09. 10.

P.S.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내가 궁금해한 '목욕' 문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답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성경의 난해구에 대한 질의응답인데, 답변은 민영진 목사의 것이다. 바세바/밧세바는 혼용돼 있다.

 

 

 

 

질문: <개역 개정판> 삼하 11장 4절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역>의 이해를 따르면, 1) 다윗이 자기 부하를 바세바에게 보냅니다. 2) 그 들이 바세바를 다윗에게 데려 옵니다. 3) 바세바는 자기 집을 떠나기 전에 벌서 월경(月經) 을 끝내고 깨끗하게 목욕을 하였습니다. 4) 다윗이 바세바와 동침합니다. 5) 그 일이 끝나자 바세바는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의 번역을 따르면, 1) 다윗이 바세바에게 자기 부하를 보냅니다. 2)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합니다. 3) 다윗이 그 여 자와 동침합니다. 4) 다윗이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습 니다). 5) 그래서 그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개역 개정판>)

바세바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것은 그가 자기 집을 떠나기 전입니다. 이 진술 이 다른 진술보다 시제상(時制上)으로 먼저 일어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에 일어난 다른 연 속적 사건들 속에 진술되기 때문에 번역판들은 이 진술을 연속적인 사건 전개 속에 들어 있 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 본문을 괄호 속에 넣기도 합니다. 우리말 <공동번역>도, <표준새번역>도 이러한 <개역>의 이해와 상치하지 않는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만 <개역 개정판>은 "다윗이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 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개정판>) 라고 달리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개정의 배경을 묻고 싶습니다.

Het toilet van Bathseba

대답: 이미 질문 안에 대답이 주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말 번역들을 좀 구체 적으로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보냈다.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공동번역>)
 
    그런데도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데려왔다. 밧세바가 다윗에게로
   오니, 다윗은 그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 (그 여인은 마침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난 다음이었다.) 그런 다음에, 밧세바는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표준새번역>)
  
    다윗이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 여자와 동침하고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개역 개정판>)

<개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이 문제의 본문을 같게 번역하였는데 반하여, <개역 개정판>만이 같은 본문을 달리 번역하였다면, 일단 {개역 개정판}을 의심해 볼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역 개정판>에는 다윗을 가리키는 "그"와 바세바를 가리키는 "그 여자"의 용법에도 부정확한 데가 있습니다. "그가 그 여자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 로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에서, 앞의 "그가"는 다윗인데 반하여, 뒤의 "그가"는 문맥 으로 볼 때 "바세바인데도 불구하고,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다윗을 가리킨 것처럼 들리기 도 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 동사의 주어를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다음 과 같습니다.

1) 부하들을 보낸 이는 다윗이다.
2) 부하들을 시켜 밧세바를 데리고 온 이도 다윗이다.
3) 다윗에게 온 것은 바세바이다.
4) 그 여자와 동참한 것은 다윗이다.
5)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이는 밧세바이다.
6)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은 밧세바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의 발생 순서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건을 히브리어 본문으로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1) 다윗이 부하를 보냈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2) 그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3) 밧세바가 다윗에게 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4)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였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5) 밧세바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다 (히브리어 분사)
6) 밧세바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히브리어 완료태 동사)

위에서 보듯이 여섯 개의 동사 중에서 다섯 번째의 동사를 제외한 다른 다섯 개 동사가 모두 와우 연결법(waw consecutive) 형태를 지니고 있는 완료태 동사임을 확인할 수 있습 니다. 그리고 이들 동사들의 발생 순서는 여기 나열된 순서 그대로입니다. 다만 밧세바가 자 신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한 것만은 완료태가 아닌 분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사 로 표현된 동사의 사건이 다른 완료태 동사와 관련된 다른 사건들과 같은 맥락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본문은 밧세바가 이미 다윗에게 오기에 앞서서 월경을 끝 낸 상태에서 목욕을 하여 자기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고, 그런 상태에서 다윗과 동침하여 임신을 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역 개정판>의 모호한 표현도 다음과 같이 고치면 더 분명해 질 것입니다. 

    다윗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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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6-09-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생물학적으로만 보자면 월경을 막 끝낸 상태에서는 임신이 안되지 않을까요?

로쟈 2006-09-1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 그렇게 디테일하게 서술하는 것 같지는 않구요(^^), 그냥 논리적인 순서가 그렇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톡톡캔디 2008-11-25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에서는 월경 중에도 임신하는 여자도 있더군요...(더 엉뚱한 이야기입니다만 -__-ㅋ)
 

아무리 간단하게 저녁식사만 하는 자리라고 해도 '가족행사'가 낀 주말은 그냥 없는 듯이 지나간다. 휴일에 잠시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몸은 좀 가뿐해지지만 밀린 일들이 머리를 무겁게 짓누른다(간혹 '제 정신이야?'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저녁시간에 세탁기로 돌려놓은 빨래를 베란다 빨랫줄에 널면서, 문득 중학생 때 빨리를 널러, 또 걷으러 대야를 들고 (아파트가 아니라) 당시에 살던 단층 단독주택 옥상에 오르락내리락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낭패스럽게도 소나기가 오는 바람에 널어놓은 빨래를 다시 걷어다가 세탁해야 했던 일들도(그러니까 빗방울이 떨어지자 마자 가장 먼저 떠올려야 했던 일은 '옥상의 빨래'였다!).

돌이켜보면, 그런 게 또 '행복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베란다에 너는 빨래는 그런 '모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에 젖은 빨래를 다시 빨아 널어야 하는 불편은 덜게 됐지만, 덩달아 덜게 된 건 '일상의 모험' 한 가지이다. 그러한 손익계산을 하자치면, 삶은 공평하다. 나아지는 게 없다. 아니, 공평하게 말하자. 삶은 언제나 퇴색한다. 더이상 청춘을 찾아보기 어려운 부모님의 얼굴처럼(내가 중학생일 때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으셨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탁기 이야기'나 옮겨적을까 하고 옛날에(10년 전에) 만든 시집들을 들춰보다가 다소 엉뚱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 세상의 소금을 노래함'이란 시에 눈길이 간 것. 약간 교정해서 옮겨놓는다.  

이 세상의 소금을 노래함

소금은 짜다. 소금은 단순하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소금은 말한다, 아니면

퍽퍽하리라고, 맹탕이 되리라고, 밥맛이 떨어지리라고-

아무도 소금을 무시할 수는 없다. 된장 공장 같은

삶의 현장에서 짠맛이 빠진다면,

오, 어느 된장국에 우리가 숟가락을 담글 것이냐?

하여 우리는 소금을 묵인한다. 소금의 활동을 묵인한다.

맛소금, 막소금, 더러는 막돼먹은 소금이 도처에서

활발하다. 닭도리탕에도, 미역국에도, 더러는 레미콘에도.

소금은, 맛의 주연이고 베테랑이며 조국 근대화의 주역이니.

보라, 땀에 배인 소금의 과거, 짭짤한 소금의 현재, 빛나는 소금의 미래!

세상에 뿌려진 소금만큼 소금의 끗발은 줄지 않는다.

소금은 미나리가 아니고 미나리 사촌이 아니니

오, 이 땅의 소금들이여!

하여 우리는 눈물을 훔치며 다짐했던 것이다. 인제 다신

맹탕의 삶을 살지 않으리라, 삶을 물말아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맵짜지기로, 소금이 되기로, 소금기둥이 되기로!


소금은 짜다. 소금은 단순하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소금은 말한다, 장조림도 말한다.

아침밥을 먹고 오늘도 삶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숨이,

턱밑까지 찰 때쯤, 우리는

소금의 문턱에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설렁탕집에서 엊저녁에 꼬리찜을 먹은 게 '잔상'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요즘은 국산 소금이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하지. 중국산 소금을 잔뜩 사다가 염전에 뿌리고 그걸 다시 거둬들인다나. 해서, 이 세상의 소금들은 한가지로 다들 빛나지만 실제로는 여러 종류가 있는 것. 내 세대의 386 소금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겠다. '이 세상의 소금들'에 경의를 표하지만, 소금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06. 09. 03.

 

P.S. 시집엔 '이 세상의 소금을 노래함'이란 장의 머리에 키에르케고르의 독설도 함께 인용해놓았는데, 이런 내용이다: "세상에 나서서 큰소리로 질타나 하면 마치 사람의 운명이 변혁되는 줄로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애교이다." 이 덴마크의 철학자에겐 유머가 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내가 젊었을 무렵 요리점에 가면, 나도 세상의 청년들처럼 급사를 향하여 '여봐, 스테이크 하나, 고급 스테이크 한 접시, 등심살로 너무 기름기가 많지 않은 것을 가져와'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급사는 거의 내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것을 황송하게 듣는 일은 없었다. 또한 내 목소리가 주방에까지 들려서 요리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따윈 더더군다나 없었다. 설령 모두가 그러했다 하더라도 스테이크의 품질이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문제는 '스테이크의 품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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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좀 유치한 습성이 있어서, 8월이자 여름의 마지막날이 되면 이성복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을 떠올리곤 한다(10월의 마지막밤에는 '잊혀진 계절'을 흥얼거리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속의 여인'을 듣고, 그날이 화요일이면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을 하나 더 듣고 하는 식이다). 손에 잡히는 그의 시선집을 들춰서 몇 편의 시들을 서둘러 읽어보았다. 가령 표제시인 '그 여름의 끝'은 이런 식이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소위 '연애시편'들로 묶여진 <그 여름의 끝>은 표제작에서도 보듯이 몇몇 선명한 이미지들을 뽐내지만 나로선 관념적/추상적이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고 시인이 말미에 적을 때, 나는 그 장난이 '연애'와 '연애시' 전체에 두루 해당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추상적 타자(=당신)를 두고 벌이는 감정의 자맥질은 비록 그것이 순도 높은 경우일지라도 맥빠진 서정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거기에 비교되는 것이 시인의 데뷔시집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다(시집의 제목이 시인의 바람대로 '정든 유곽에서'가 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스럽다). 가령, 언제 읽어도 가슴 뻐근한 시 '여름산' 같은 경우는 어떤가?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열기와 금속의 투명한 옷자락을 끌어 올리며
솟아오른다 발등에 못 안 박힌 것들은 다 솟아오른다 저기
비행기가 수술톱처럼 하늘을 끊어낸다 은빛 날개가 곤두선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이번 여름엔 꼭
다녀와야겠다고 그 여자는 잠자는 벌레를 밟았다 모르고
밟았다 부서지면서 물 같은 피가 솟아올랐다 내가 거듭 밟았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나는 속으로 욕했다
따지고 보면 욕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마큼 당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내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백 사람 중에 하나가 병들어 아프면 당신도 아프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부질없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여름산은 땀 흘리지 않는다 힘쓰지 않는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우리는 그늘에서 콜라를 마셨다
콜라를 마시며 불란서를 생각하고 울었다 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시멘트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 오르는 여인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흉내를 냈다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척했다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한숨 쉬지 않고 솟아오른다 반짝임과 몽롱함을 뿌리며 솟아오른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 잡힌 손에서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살려줘요!

여름산은 무겁게 솟아오른다
솟아오르지 않는다 솟아오르는 모습만 보여준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먼지, 매연, 악취로 부서지는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에 등장하는 '그 여자'는 '당신'과 같은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다(이성복은 '당신'이 아닌 '그 여자'에 관해서 쓸 때 그다운 시를 쓴다). 해서 여기엔 긴장이 있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절망이 있다. 그 절망은 가령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절망이다. "시멘트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를 오르는 여인들"에 대한 절망이고,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다. 그들을 생각하는 절망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우는 척하는 절망이다(달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젊은 날을 고백하고 있는 아포리즘집 서두에 시인은 "나는 언저리를 사랑한다/ 언저리에는 피멍이 맺혀 있다"고 묘비명처럼 적었다. 이성복의 뜨거운 시들은 그 언저리에서 나온 피멍의 흔적들이었다. 그 흔적은 <그 여름의 끝>에서 "종이 위에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물방울'의 흔적은 '피멍'에 비하면 약소하며 엄살스럽기까지 하다(연애시편들이야말로 엄살과 주책의 파노라마 아닌가?). '그 여름의 끝'에서 '여름산'이 다시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06.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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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8-3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파도치는 사진 넘 멋져요. 어떻게 하신 거에요? 정말 시원하네요

로쟈 2006-08-3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그런 사진을 갖다 붙여놓았을 뿐입니다...

라이더 2006-08-3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도 그림 잘 보고 갑니다. 글은 머리가 아파서;; 좀 쉴려고 알라딘 왔기 땜시. 미안요.

푸른괭이 2006-08-3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은 그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던 듯. 글구, 첫 시집은 뭣 때문인지 늘 <정든 유곽에서>로 각인되어 있네요. 어떻든, 안타깝게도, 이성복 시인도 더 이상 시를 쓰지는 못할 듯. 그렇게 보면, 김춘수, 서정주 같이 '평생' 시를 쓴 시인은 정말 대단해요.

로쟈 2006-08-31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생 쓸 수 있는 시들은 따로 있죠. 자신이 안 다치는 시, 가령 무의미시 같은...

lastmarx 2006-08-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건네 주는 로맨스는 없나 보네요. ^^ 해마다 이성복을 읽으시는군요. 저도 그런 편인데. <그 여름의 끝>에서 제가 좋아하는 짧은 시 세 편입니다. http://blog.naver.com/lastmarx/70005165701

로쟈 2006-08-3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같은 건 태고적 이야기 같은데요(^^;). 연애를 밝히는 편도 아니고 소질도 없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