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었던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청탁받은 내용은 글의 서두에 적었다. 인터넷상의 인문학활동에 대한 소략한 '보고'라고 볼 수 있겠다.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최종원고를 긁어왔는데, 지면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고유명사 표기 등은 창비식 표기로 돼 있다.  

 

창작과비평(2009년 여름호) 인터넷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내게 주어진 일차적인 과제는 인터넷 공간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학적 활동의 의의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이다. 인터넷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을 조감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이런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은 주로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봐야 인터넷상에 블로그(서재)를 갖고 있고, 한 인터넷 카페에 자주 글을 올린다는 것이 내세울 만한 활동 이력의 전부다. 치명적인 건 활동반경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두루 알지는 못한다는 것. 시간적인 제약과 능력상의 한계 때문이지만, 사실 두루 안다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하며 또 바람직한 것일까도 의문이다.   

학문의 전문화와 함께 인문학에서조차도 자신의 전공분야에 정통하다는 것의 이면은 흔히 타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는 오히려 권장된다. 거꾸로 모든 분야에 두루 식견이 있다는 것이 ‘얄팍한 박식’과 동일시된다. ‘국가적인’ 석학이 아닌 다음에야 깊으면 넓지 못하고 넓으면 깊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통념 아닌가. 새로운 조어를 쓰자면 ‘인터넷 인문학’에 대한 시각도 그러한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싶다.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또 에꼬(Umberto Eco)도 이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한 에꼬의 경우에도 잘 꾸며진 온라인 홈피를 갖고 있고, 일반 독자들은 그에 대한 다수의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인터넷은 단편적인 지식과 기계적인 정보의 대명사이자 표피적인 앎의 상징물이다. 가령, ‘신지식인’ 이후 지식인 사회에 당혹감을 안겨줌과 동시에 새로운 ‘놀림감’이 된 ‘네이버 지식인’을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다. “다크써클 없애는 데 브로콜리가 효과적인가요?”나 “‘카노사의 굴욕’에서 카노사가 도대체 뭐죠?”등의 질문에 네이버 지식인은 신속하고도 유익한 답변을 제공해주지만, ‘그’는 아직까지 움베르또 에꼬 기호학의 특징과 의의에 대해서는 질문하지도 답해주지도 않는다. 물론 이런 질문은 올라와 있다. “움베르또 에꼬 지금 살아 있나요? 현존인물이에요?”   

하지만 이런 표피성이 과연 인터넷 공간 자체의 본질과 연관된 것일까? 그것이 ‘사용 공간’인 한에서 문제는 그 사용자들의 의지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알다시피, 오늘날 대부분의 편지(메일)를 대신하고 있는 건 이메일이다. 전달의 신속성과 편이성에서 편지는 이메일을 따라잡을 수 없다. 물론 이메일 또한 ‘표피적’이며 보내는 이의 정서와 체온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메일 사용자들은 그러한 한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쇄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다시금 예전의 편지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메일의 단점보다는 장점과 효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학술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인터넷 공간은 학술활동의 ‘변방’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학술행사 소식과 관련 정보들을 우리는 인터넷으로 접하고 또 공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술저널이 온라인화됨에 따라 우리는 굳이 도서관에까지 찾아가는 발품을 팔지 않고도 집에 앉아서 관심 있는 주제의 논문들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러한 개방성과 공유성이, 말하자면 인터넷 공간의 최대 강점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직까지 원하는 만큼의 ‘깊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문제는 인터넷에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온라인 인문학’과 ‘오프라인 인문학’의 대립은 임의적인 유사 대립이다.  

알려진 것처럼 국내에서도 각 대학마다 온라인 강좌 혹은 사이버 강좌가 상당수 개설돼 있다. 수강생이 강의 동영상을 보고 필요한 내용을 숙지한 후 온라인을 통해서 과제를 제출하고 평가받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온라인 강좌는 공익을 위해서 선용될 수도 있다. 예컨대, 미국 MIT에서 시작된 강의자료 공개가 점차 확산되고 있고, 유튜브는 하바드대학을 포함한 100여개 대학의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비록 영어권 얘기이긴 하나, 학점만 인정받을 수 없을 뿐 누구나 온라인상에서 이름난 교수들의 강의를 들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현재 몇개 대학이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서 강의 동영상을 시범적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학술활동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둘은 분명 성격이 좀 다르지만 서로 모순적이라거나 대립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각각의 장단점을 갖고서 서로를 보완해준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보면, 이러한 온라인 강의가 대학보다도 더 활성화돼 있는 쪽은 오히려 대학 바깥의 ‘재야’ 학술공간들이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등에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강좌를 오프라인에서 운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대학생이 아닌 직장인과 주부들이 보다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은 온라인 강좌다. 가장 대표적인 온라인 인문학강좌 사이트인 아트앤드스터디(www.artnstudy.com)의 경우에, 유료강의를 듣는 회원만 현재 3만여명에 이른다고 하며, 이는 2001년 6월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 300여명과 비교하면 100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특이한 것은 대학에서는 폐강되기 일쑤인 철학강좌들이 이곳에서는 최고 인기강좌라는 점이다. 한겨레교육문화쎈터가 운영하는 한겨레e한터(e-hanter21.co.kr)도 300여 강좌에 이르는 인문학 관련 온라인 강좌를 제공한다. 전문 강사들 외에 대학의 현직 교수들도 다수 강의에 참여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인터넷은 이렇듯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누구나 인문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통로이면서 또한 직접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흔히 ‘대중 지성’의 공간으로 지칭되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그러한 장으로서 활용되는데,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다음까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을 들 수 있다. 8000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비평고원’에서 주로 활동하는 회원들은 국내외의 인문학 전공 대학강사나 대학원생들이지만 약사·회사원·군인 등 ‘비전공자’도 적잖게 참여하여 익명적 공간에서 인문학 전반에 걸친 비평과 담론들을 쏟아낸다.  

가령, 창비주간논평을 본딴 ‘화요논평’ 코너에 ‘언어현상학과 시차적 관점’에 관한 철학적 입론이 제시되는가 하면,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은 노무현 전(前)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라는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시사적 발언이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갖는지 정밀하게 분석된다. ‘비평공간’ 같은 코너에서는 또 신간도서에 대한 소개와 서평이 올라오고, 하이네의 시가 가곡과 함께 자세하게 음미되기도 하며 베를린의 노동절 행사에 대한 현장르뽀가 ‘해외통신’이란 말머리를 달고서 당일에 게시된다. 이런 것이 ‘인터넷 인문학’이 강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현장성과 순발력이다. 모두 저널리즘이나 학술지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종의 ‘중간지대’의 담론이라 할 만하다.  

물론 전체 회원수에 비해 자발적인 글쓰기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들의 수가 여전히 소수라는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고, 인문교양과 학술담론의 대중화에 일조하고는 있지만 과연 새로운 학술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지적 ‘프론티어’의 공간도 될 수 있는가는 의문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현재적 한계를 본질적인 한계로 간주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닐까. 인터넷은 인문학 활동의 새로운 가능공간이지 미리 앞질러 그 한계를 예단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학에서는 점점 홀대받고 있는 인문교양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오프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하나 노숙자 인문학과 CEO 인문학 ‘열풍’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기꺼이 다수와 주고받고 공유하려는 ‘의지’를 우리가 갖고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겠다. 한데, 그러한 의지를 만약 ‘제도권 인문학’ 혹은 ‘대학 인문학’ 종사자들이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혹시 그런 의지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왜 필요가 없는가? 개인적으론 두 가지 원인을 지목하고 싶다. 하나는 소위 제도권 인문학이 근거하고 있는 물적 토대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그리고 있는 인문학의 상(象)과 관련된다.   

비록 전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나 수년 전부터 제기된 한국사회 ‘인문학 위기’의 특수한 원인에 대하여는 모두가 어림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다. 서울대 철학과 백종현(白琮鉉) 교수의 지적대로(백종현,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 한국학술협의회 편 <인문정신과 인문학>, 아카넷 2007, 136면.), 1980년대 초반 대학의 입학 정원이 대폭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회적 수요와 무관하게 인문학 계열 학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에 따라 인문계열 졸업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된 점이 그것이다. 그로써 대학 졸업자들로 하여금 ‘인문학을 쓸모없는 것’이란 인식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위기의 원인은 대학이 아닌 대학원 졸업자의 초과 배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학과가 늘어남에 따라 교수 요원의 충원이 필요했고, 이는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가수요를 낳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문학 전공 박사의 수는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대학은 재정을 이유로 교수 충원비율을 최소화했다. 인문학이 ‘배고픈 학문’이란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굳어진 것이 아닌지. 게다가 그러한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인문학 전공자들은 비록 공공성을 위해서 국가가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학문분야도 있지만,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대신에 국가에 손을 내미는 ‘손쉬운’ 방법에 의존했다. 대학의 정규직 교수들은 강의에 정성을 쏟기보다는 논문 편수로 평가되는 연구업적에 더 공을 들였고, 비정규직 교수들은 자세를 한층 더 낮추어 대학 주변에 남는 일에 자족하거나 절망했다. 모두가 ‘지속가능한 인문학’의 새로운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여전히 읽을 만한 국내 인문서가 부족하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국외의 고전이나 교양서가 적지 않은 현실은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거기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인문학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백종현 교수는 “교양과목으로서 인문학은 모든 시민이 익혀야 하지만, 한 사회에 인문학 전공자는 매우 탁월한 소수이면 족하다. 그리고 그 탁월한 소수는 사회에서 우대되어야 한다.”(146면)고 말하면서 ‘인적자원 관리에 있어서 공정성과 수월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대로 따르자면 탁월한 국가석학 몇명의 인문강좌를 TV나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서 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인문교육 방안이 될 성싶다. 하지만, 인문학을 하는 원동력이 ‘자유 만끽’과 ‘자기만족’이며(145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평범한 다수’의 인문학에 대한 욕구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人文)이란 말이 ‘사람의 무늬’를 뜻하기도 한다면, 인문학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동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대중적/다중적 매체로서의 인터넷을 그러한 ‘과업’에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다. 

09.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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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도권 밖 인문학의 양상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6 21:31 
    이번주 대학신문에서 '제도권 밖 인문학' 동향에 관해 짚어주고 있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내가 실었던 글도 참조하고 있어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대학신문(09. 09. 12) 제도권 밖 인문학,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재정권 시절. 청년들은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을 들고 자발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시작이었다. 지식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완화된 지금,
 
 
2009-06-18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8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칼럼을 옮겨놓는다. 가와이 쇼이치로의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를 읽은 소감을 현 시국과 연관지어 적은 글이다.  

교수신문(09. 06. 15) 헤라클레스 되기를 포기한 햄릿의 운명에서 ‘고귀함’을 보다  

가와이 쇼이치로의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시그마북스, 2009)를 흥미롭게 읽었다. 셰익스피어만큼 유명한 작가가 없고, 또 『햄릿』만큼 유명한 작품이 없는데 ‘무슨 수수께끼란 말인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가 아직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독자나 관객을 매혹시키는 게 아닐까. 

저자는 ‘우유부단하고 허약한 철학청년’이라는 햄릿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상’으로 치부하면서 그를 헤라클레스 신화와 연관지어 새롭게 해석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헤라클레스란 키워드가 없다면 『햄릿』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 셰익스피어학계에서도 제출된 적이 없는 독창적인 견해라 한다.  

사실 단서가 없지는 않았다. 1막 2장에 나오는 독백에서 햄릿은 숙부이자 계부인 클로디어스를 평하면서 “내 아버지의 동생. 그러나 아버지와는 너무도 다르다. 나와 헤라클레스의 차이만큼이나”라고 말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근거로 흔히 햄릿을 헤라클레스와는 대척점에 놓인 인물로 인지하게 되지만 저자는 뒤집어서 읽는다. 애초에 ‘나는 헤라클레스와 다르다’고 시인한 햄릿이지만 차츰 헤라클레스처럼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 햄릿은 숙부의 범죄를 알게 된 이후에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이 되고자 하며, 그에 따라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어째서 그의 결심은 자꾸 유예됐는가. 사실 햄릿은 격정의 인간이기도 하다. 3막 4장에서 왕비인 어머니의 침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폴로니어스를 “어, 이건 뭐야? 쥐새끼냐?”라고 외치며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은 그의 제어되지 않은 격정이 표출된 사례다. 햄릿은 그러한 격정이 잘못된 상상과 판단, 그리고 행위를 낳을까 염려한다. 그래서 이성에 따라 참을 것인가(To be), 격정에 따라 행동할 것인가(not to be)를 고민한다. 유령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때문에 그가 진정한 행동으로 나서는 데는 또 한번의 변신이 요구된다. 그 변신은 그가 헤라클레스와 같은 행동을 포기하고 모든 일을 신의 뜻에 맡기고자 할 때 달성된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있는 법”이라는 햄릿의 대사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햄릿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의 채찍’이 돼 천벌을 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만약에 이 작품이 진정한 복수극이라면 마지막 장면에서 한번 더 유령이 등장하는 것이 합당할 테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햄릿은 헤라클레스가 되려는 시도를 포기하며 모든 것을 다만 순리에 맡기고자 한다(Let be). 이러한 변신에 따라 ‘To be, or not to be’라는 햄릿의 고민은 ‘Let be’라는 깨달음으로 바뀐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진정한 ‘고귀함’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아는 데, 그리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 햄릿의 저 유명한 대사 “The time is out of joint.”를 다시금 환기하자면, 우리는 시간이 경첩에서 빠진 시대, 이음새에서 풀려난 시대, 그래서 제멋대로 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가와이 쇼이치로의 새로운 해석에 기대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헤라클레스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순리에 따라 행동하면 될 따름.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 

09.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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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6-1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쥐'만 나오면 그 분이 생각나서...폴로니어스마저도...지난 번 소개로 저 책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신의 채찍'으로의 '자기 변용'에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긴합니다.슈바니츠의 <햄릿> 역시 기다리고만 있구..쯥

로쟈 2009-06-16 13:28   좋아요 0 | URL
네, 셰익스피어는 모든 걸 다 써놓았죠.^^ 장문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근접조우했었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꼬마요정 2009-06-1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만 존 에버릿 밀레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죠. 저 책의 표지에 있는 녹색 수초에 쌓인 처연한 여인 오필리어요.. 제 노트북 배경도 이 그림이랍니다. 사람들이 보더니 저더러 미쳤다고 하죠..^^;;

로쟈 2009-06-20 08:34   좋아요 0 | URL
네, 속으로만 맘에 드셨다고 해야겠어요.^^
 

'인간은 업그레이드된 물고기'란 페이퍼를 올려놓고 보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역시나 95년 여름에 쓴 것인데, 제목이 '물고기는 죽는다'이니 <내 안의 물고기>란 책 제목과 맞물려 얼추 연상됨 직하지 않은가. 그래서 옮겨놓는다. 

  

물고기는 죽는다

한 줌의 비가 흩뿌리고 물고기는 눈을 뜬다
몇 채의 집이 먼지처럼 떨어진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한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 공간
물고기는 물결들을 뒤로 뒤로 밀어내며
하나의 이념처럼 눈알이 붉다 새벽이 멀다
물고기는 다만 헤엄을 쳐야 한다
몇 채의 집이 먼지처럼 무너져 앉고 물고기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쪽에 입을 맞춘다

한 줌의 비가 흩뿌리고 물고기는 눈을 뜬다
물고기는 눈을 뜨고 죽는다 

 

09. 06. 13. 

P.S. 20대 후반에 쓴 시작메모를 보니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다: "(...)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고 그림도 그릴 줄 모른다. 달리기도 잘 못하고 수학도 잘 못한다. 고작 책읽는 걸 나는 주로 해왔을 뿐이다. 대학이란 곳이 책읽는 것과 관계가 있어서 나는 그럭저럭 이곳에서 버텨왔다. 그러나 가끔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직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새벽이 멀기 때문이다. 계속 헤엄을 치고는 있지만, 나는 내가 늙어갈 거라는 걸 알고, 언젠가 힘이 빠질 거라는 걸 안다. 자손을 많이 퍼뜨릴 만한 위인도 못 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럴 듯한 유언들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 지상에서 인간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책이 되는 일이다." 책이 못 된다면 저자라도 될 일이다.(나는 저자가 되고 싶었다. '저자의 죽음'이란 얘기가 떠돌 때는 나도 따라서 죽고 싶었다.)"   

 

흠, 그러다 결국 '저자'가 되긴 했다. 이젠 무얼 더 해야 할까.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의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시오랑의 말. "우리는 모두 어릿광대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있으니까." 이걸 조금 비틀어볼 수 있을 듯하다. 물고기 버전으로. "우리는 모두 물고기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엄을 쳐야 하니까." 눈을 뜨고 죽을 때까지. 요즘 같아선 눈을 부릅뜨고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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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09-06-14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들 가르치셔야죠...^^;;;

로쟈 2009-06-14 13:47   좋아요 0 | URL
제가 아직 '학생' 수준입니다.^^; 배우기 위해서 가르칠 따름이에요...

Sati 2009-07-1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읽은 로쟈님의 글이 http://blog.aladdin.co.kr/mramor/842940 이건데, 2004년에 아직 모스크바에 있을 때 읽은 것 같아요. 도블라토프 검색하다가 찾았는데, 누군가 펌질한 것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뭐랄까, '참 친절하신 분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로쟈님 시 가끔 올려주시는 것들도 참 친절함이 느껴져요 알알이. 예쁜 시집도 내주시길 기대합니다.

로쟈 2009-07-12 21:17   좋아요 0 | URL
시집은 제가 낼 수 있는 건 아니고, 아직 제안해오는 곳이 없습니다.^^;

Sati 2009-07-13 12:47   좋아요 0 | URL
시집 나오면 제가 10권은 살 거예요, 선물하게.

로쟈 2009-07-13 23:02   좋아요 0 | URL
네, 기억해 둘게요.^^
 

연세대학원신문 5월호에 기고한 글이지만 내부 사정으로 신문이 나오지 않게 된 바람에 붕 뜨게 된 원고를 옮겨놓는다(나중에라도 나오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혁명'을 키워드로 한 '당신 서재의 나침반'인데, 그냥 김규항의 <예수전>(돌베개, 2009)과 몇 권의 책을 거명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자칭 ‘B급 좌파’ 김규항은 <예수전>(돌베개, 2009)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혁명’이란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이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이 영성이다. 김규항이 보기에 영성 없는 혁명가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 없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개인의 심리적 평온뿐이다. 마르코복음 읽기를 통해서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예수의 참모습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예수는 한 사람의 변화가 우주의 변화인, 그리고 우주의 변화가 한 사람의 변화인 그런 변화와 혁명을 꿈꾸었다고 그는 적는다.  

그렇게 보자면, 개인의 자발적인 변화를 도외시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그러한 영성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 즉 사회주의 패망이 말해주는 것은 ‘영성 없는 혁명’의 필연적인 실패일 뿐이다. 우리에겐 아직 시험되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성과 함께 하는 혁명’이다. 그것이 바로 2000년 전에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가 우리에게 전해준 메시지이며,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된 한 ‘시골 청년’이 꿈꾼 ‘하느님 나라’이고 새로운 세상이다. 그것은 어떤 세상인가?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모든 억압과 착취,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그것이 아무런 과정이나 절차 없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오는가? 가령,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문제로서 ‘정치적인 해방’은 어떻게 달성될 수 있을까?  

김규항은 마르코복음 5장에서 돼지떼에게 귀신이 들게 하여 호수에 빠져 죽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복음서를 통틀어 가장 또렷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돼지 같은 로마군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려 모조리 물에 빠져죽게 했다는 것이 로마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이 이야기의 숨겨진 메시지이자 익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예수의 정치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생각이나 태도로 볼 때 그가 로마에 대해 아무런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좀 허전하다. 로마는 예수의 분명한 적이었을 테지만 정작 이 로마의 지배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이다(김규항은 진정한 변화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고 적어놓긴 했다. 그는 혁명과 변화를 동일시하는 듯하다).  

대신에 복음서에서 예수의 분노는 주로 ‘위선자’ 바리사이인들을 향한다. 그러한 예수의 방식을 따라서 김규항도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은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를 표어를 내걸고 활동한다. 이들은 배운 만큼 배운 사람들로서 나름대로 안정된 경제력을 갖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 정도에 머문다. 이들은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적대세력으로서 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비판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과연 그들의 ‘자발적인 변화’를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김영사, 2009)를 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으로 ‘완고한 신앙’을 가진 대다수 한국 교회도 포함해야 할 듯싶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믿사오니’를 외치는 예수 신자로서 예수 ‘믿으미’는 많아졌으나, 그의 명령을 올곧게 따르는 예수 ‘따르미’는 적어진 것이 한국 교회의 성장사다. 물론 이러한 왜곡이 한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역사적 예수’는 증발하고 대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만 더 강화된 기독교 역사의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주요 개신교 교파마다 세계 제일의 교회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판국이라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는 저자의 충고가 새삼스럽지 않다. 그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의 힘과 조직의 힘을 숭배하며, 그런 교회일수록 예수의 이름을 크게 외치지만 실상과 이름과 현실이 따로 노는 위선적인 행태일 따름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잘못된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온 우리 자신을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그러한 회개를 통해서 거듭날 수 있을까?  

하지만 과연 우리가 진정한 혁명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변화를 창출할 수 있을까? ‘자발적인 변화’와 ‘회개’에 대한 기대가 미덥지 않다면 프랑스혁명에 대해 다시 숙고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것은 근대 혁명의 원점으로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걸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프레시안북, 2009)를 참조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라고 이 혁명가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공화정의 가혹함은 미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인류의 압제자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응징하는 것이 자비다.   

보수주의의 ‘원조’로 평가되는 에드먼드 버크는 1790년에 쓴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2009)에서 이러한 파괴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무정부상태를 초래하고 결국엔 군사적 독재자를 출현시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나 아렌트 또한 1963년작 <혁명론>(한길사, 2004)에서 프랑스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짓고 미국혁명을 혁명의 새로운 모델로 추켜세웠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르벨은 1970년에 펴낸 <마르크스도 예수도 없는 혁명>(법문사, 1972)에서 20세기의 혁명은 미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못박았다. 유혈과 폭력이 없는 혁명, 곧 ‘혁명 없는 혁명’이 바람직한 혁명의 조건이라면 ‘자본주의 혁명’이야말로 그에 부합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0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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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스 2009-06-12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뭔가 예전부터 생각했던 문제였는데 핵심적으로 연결하고 배치하고 설명해주셨네요.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책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곶감 빼먹듯 야금야금 읽고 있죠. 그럼 건필하시길.......

로쟈 2009-06-13 08:26   좋아요 0 | URL
'건필'은 보시는 대로입니다.^^

꼬마요정 2009-06-1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큰 생각은 못 하고... 명박이라도 내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우리 역사를 볼 때 언제나 우리의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면 얼마 뒤 다시 빼앗겨 버리는 게 일쑤라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청산 없는 혁명은 (혁명이라는 뜻 안에 대안과 청산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못 쓰겠네요..) 혁명이 아니라 그저 전복일 뿐이겠죠.. 아.. 짧은 지식으로 말을 하자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ㅠㅠ 사회주의 혁명이니 자본주의 혁명이니 다 좋지만, 정말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혁명이 일어나면 좋겠어요.

로쟈 2009-06-13 08:29   좋아요 0 | URL
'혁명'이란 말도 하도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자체만으론 모호한 감이 있습니다. 그걸 좀 분명하게 해두는 게 좋을 듯해요...

2009-06-15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7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휴일 우울증'이란 게 있다면 나도 그런 우울증 환자인 듯하다. 휴일이면 피로와 무기력의 공세에 매번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책도 읽고 번역도 하고 원고도 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울적하다. 머리만 무겁다. '편두통'이라도 있으면 핑계라도 삼으련만. 그런 울적함에 젖어 있다 보니 '말랑말랑한 빵에게'에 이어서 쓴 시도 뭔가 '대변'해주는 듯싶다.  

 

사과파이는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사과파이는 파이맛을 내고 싶었다. 사과파이는 이미 오랫동안 가슴속에
파이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소중한 파이맛.
사과파이는 당신의 입술에 가 닿고 싶었다.
사과파이는 가슴속 파이맛을 모두 당신에게 주고 싶었다.
당신의 맛있는 사과파이가 되고 싶었다, 당신만의.

사과파이는 너무 울적하다. 사과파이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사과파이는 파이다. 거품이 되어버린 파이맛이
사과파이를 끓어오르게 한다, 사과파이 편두통을 앓는다.
사과파이는 텅 빈 당신의 입술을 닮아간다.
사과파이는 사과파이가 먹고 싶다.
사과파이는 시큼한 파이맛을 모두 먹어치운다.

아작아작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사과파이 텅 빈 입술만이 게걸스럽게 남았다. 탐스런
사과파이, 이제 당신도 사과파이로 보인다. 

 

09. 06. 07. 

P.S. 이미지를 찾다 보니, 내가 먹던 사과파이와는 수준이 다른 파이들이 눈에 띈다. 울적함 이전에 군침이 먼저 돌게 만드는! 시작 메모를 보니 1995년 6월 10일에 쓴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자취하면서 취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침은 대개 빵으로 때우던 때이다. 이날 아침에 편의점에 갔더니, 사과파이가 모두 유효기간이 지나 있었다. 그걸 시로 쓴 것이다. 또 '파이'란 말이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있다고 한 건 '파이다'란 말이 '나쁘다'란 뜻의 방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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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9-06-0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자작시는 이런맛이 있군요 ㅎㅎ 시작메모를 보지 않았으면 그냥 저 사과파이 사진에만 현혹될뻔 했어요 ㅜㅠ 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끼니로 편의점 자주 애용하는데 흑 ㅠ

로쟈 2009-06-08 00:49   좋아요 0 | URL
가끔은 비싼 걸로 먹어주셔야 합니다.^^

L.SHIN 2009-06-0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하핫, 빵 시리즈인겁니까? ^^
언젠가 기회가 되면 빵집에라도 데려가 드리고 싶군요.(웃음)

로쟈 2009-06-08 00:51   좋아요 0 | URL
빵집은 요즘도 자주 가는 편입니다.^^ 사진의 사과파이는 못 봤지만요...

다락방 2009-06-0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자작시는 이런맛이 있군요2
자작시 종종 올려주세요.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저 밑의 글을 읽긴 했으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사진속의 사과파이는 먹음직스러워요!

로쟈 2009-06-08 23:55   좋아요 0 | URL
ㅎㅎ 너무 달아 보이기도 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6-08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히고 싶고 먹고 싶은 사과파이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ㅎㅎ

전 주말이면 평소 출퇴근시에 들고다니기 어려운 무거운 책들을 읽어줘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데 요즘엔 야구가 자꾸 방해를 --;; 역시 사랑은 나뉠 수없는 걸까요?

로쟈 2009-06-08 23:55   좋아요 0 | URL
양다리 걸치시는군요.^^

Joule 2009-06-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당신도 사과파이로 보인다,가 정말 맘에 들어요. 과연 저 정도는 돼야 사과파이에 대해 뭔가 쓸 수 있겠군 하는 기분이 든달까.

로쟈 2009-06-08 23:56   좋아요 0 | URL
먹다 보면 정이 들지요.^^

드팀전 2009-06-08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읽었습니다. 둘째 아이 태어나는 시점에 본 책이지요. 즐거운 시간이있었어요.^^ 제가 로쟈님을 알게된게 2006년쯤이었으니..그 전 글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최근 페이퍼에 비해 모스크바에서 훨씬 유머가 많으셨더군요.^^
물론 이 글을 통해서 드러난 정치적 로쟈와의 입장에 차이가 좀 있겠지만, 제게는 니체의 <짜라> 구절 중 '몰락'에 대한 공통된 정서의 공유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전 무슨 책 읽기의 경험때문은 아닌데 어디서 이런 부정적인(?) 정서를 갖게 되었는지..

마지막 장에 있는 릴케의 시가 좋더군요. 첫 줄 해석에서 반종교적이며 도킨스를 좋아하시는 로쟈님의 관심까지 읽힙니다.반종교적이시잖아요.ㅋㅋ 나머지 줄은 지젝의 '실재'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맥락인 듯 합니다. 로쟈님이 '대문자 진리를 감당할 수 있느냐?'고 하신 것처럼. 사실 언젠가 그런 뉘앙스의 말을 누군가에게 했는데...다른 차원으로 해석된 탓이겠지만..'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주의적'이라는 댓글을 받았습니다.'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전 도달할 수 있다가 오히려 근본주의적 유토피아같은데...그 때 했던 이야기 중에 시오랑- 시오랑은 문학에 과문한 저로서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 에필로그를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이 했다는 '무언가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사기이다'라는 비슷한 뉘앙스의 말도 제가 첨부했었는데...너무 확신에 차있는 토론자이다 보니..결국 '그래 다음으로 넘아가자구'가 되어버렸습니다.ㅋㅋ 제 르상티망인가 봅니다.ㅋㅋ

하여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리뷰도 써야할 터인데. 홍보성리뷰로다가 ㅋㅋ
한 인터뷰 기사에서 인문학에 무심한 MB라고 말하셨는데..만약 MB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통치성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제2명박산성은 하지 않았겠지요.그런면에서 윤리적이지도 못하며 무식하기까지 한 거지요.
역설적이게도 그게 큰 위안이고 역동성의 틈새가 되는 듯 합니다.

로쟈 2009-06-09 07:26   좋아요 0 | URL
득남(?)을 축하합니다.^^ 기대되는 리뷰인데요.^^

드팀전 2009-06-09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득남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새로운 형태의 리뷰 형식을 생각했었는데...아직 한 번도 알라딘에서 본 적 없는...ㅋㅋ 그냥 아이디어여서 실행 과정의 복잡성과 기대효과를 생각하다가 머리가 복잡해져서 일단 유보했습니다. 집에 어른들도 와계시고 이제 첫째는 제가 전적으로 전담마크해야 되다 보니...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