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 출간된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2008)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근간 예정인 '혁명' 관련서들에 대한 소식을 덧붙였다. 이미지를 찾다 보니 (지면기사에 쓰인 건 못 찾겠고 대신에) 레닌 포스터에 오바마의 얼굴을 붙인 것이 눈길을 끈다. 포스터에 씌어진 문구는 "레닌은 살았다, 레닌은 살아 있다, 레닌은 살아있을 것이다!"이다. 더불어 '1917년'은 '2008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2009년이다...

 

한겨레21(09. 01. 12) 혁명의 시대, 레닌을 생각한다

"레닌은 생각도 하지마!”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자들, 그러니까 반공 우파뿐만 아니라 급진 좌파까지도 공유하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면 그것은 레닌에 대한 ‘사고금지’다. 2008년 5월 국내에도 소개된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펴냄)의 편저자 슬라보예 지젝이 레닌을 반복하려는 기획을 시도하면서 처음 접했던 반응이 빈정거리는 폭소였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마르크스는 좋다, 하지만 레닌이 뭔가?”라는 식이다. 그러한 반문이 전제로 하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의 실패이며, 20세기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역사적 재앙이자, 독재로 치달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의 원흉으로서의 레닌이다. 요컨대, 레닌은 현실사회주의 몰락과 소위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가져온 실패이자 재앙이고 원흉이다. 이것이 혁명가 레닌에게 들씌워진 표준적 이미지다.    

 

‘레닌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출간된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펴냄)은 시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레닌에 대한 표준적이면서도 상투적인 이미지에 괄호를 치고 현재의 자본주의 위기 국면에서 레닌과 러시아혁명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처음 발의된 것은 박노자 교수가 러시아혁명에 대해 강의한 2007년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린비출판사의 학술심포지엄이 개최된 것이 2008년 7월이었다. ‘촛불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레닌과 러시아혁명’이 심포지엄의 타이틀이었다. 이번에 나온 책은 발제자로 나선 세 명의 발표문과 현장 토론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고 보리스 카갈리츠키의 러시아 자본주의론과 루이 알튀세르의 레닌론 등이 보충되었다.     

이 모임의 형식이 ‘심포지엄’이라는 단어로 표현됐지만 러시아어로는 ‘소비에트’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발제자의 한 사람인 박노자 교수가 짚어주는 대로 소비에트란 원래 ‘조언’이란 뜻이며 러시아 혁명기의 소비에트란 무엇보다도 서로 조언을 주고받고 논의하는 기구이자 장소였다. 조언은 명령이 아니며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수평적 소통을 지향한다.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소비에트, 혹은 평의회가 촛불집회를 계기로 레닌을 재평가하기 위해 열렸던 셈이다. 그 ‘소비에트’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지금 레닌을 불러낸다는 것은 뼈아픈 실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실패 속에서 실패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 실패를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는 것이다”는 발언 속에 집약돼 있다.   

‘레닌의 정치학에서 외부성의 문제’를 다룬 이진경 교수는 계급과 당, 국가와 혁명, 사회주의와 이행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외부성’의 사유가 레닌에게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본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그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혁명적 정치 모두가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대해 외부적이고, 외부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가 보기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국가장치를 이용해 국가장치를 사멸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 난감한 역설을 돌파하기보다는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레닌은 외부성을 사유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관철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한편, 조정환 다중네트워크 대표는 ‘제헌권력’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 레닌을 다시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헌법에는 성문화된 헌법을 가리키는 형식적 헌법 외에 헌법을 제정하는 행위로서의 물질적 헌법이 있다. 이 경우 물질적 헌법이 형식적 헌법에 선행하며 더 우선적이다. 레닌은 이 두 가지 헌법의 차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1917년 2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의 물질적 헌법(프롤레타리아 독재)과 형식적 헌법(소비에트 헌법)의 쟁취를 주장한다. 하지만 1917년 7월 이후에는 제헌권력의 최종심을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로 귀속시키게 되며, 조 대표는 이것이 소련 사회주의는 물론 세계 사회주의 역사에 혼란과 불행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닌에게 배우기'는 '레닌을 극복하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발제에 나선 박노자 교수는 레닌에게서 반자유주의적, 혹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이 소비에트의 시발은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을 위한 공장주와의 협상에 대표자를 내보낸 것에서 비롯한다. 소비에트는 혁명기에 볼셰비키들과 ‘협력’했지만 그들의 지도에 ‘순응’하지는 않았으며 특정 정당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지도 않았다. 다른 볼셰비키들과 달리 레닌은 소비에트의 잠재력을 크게 평가하고 소비에트와의 동등한 협력관계를 강조했다. 박 교수가 보기에, 이러한 ‘민주주적인’ 레닌이야말로 정치가로서 그의 비범한 면모다. 하지만 내전으로 치달은 혁명 이후의 과격한 상황은 레닌으로 하여금 자신의 민주적인 원칙을 지킬 수 없도록 했고, 내전의 종료와 함께 소비에트 민주주의도 의미를 상실하게 됐다. 레닌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패와 좌절의 교훈을 지금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되새길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한다.   

 

이미 지난해 ‘촛불 정국’에서도 확인한 바 있지만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와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들이닥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은 새로운 사회와 체제에 대한 사유를 요구한다. 이에 발맞추어 올해 출판계의 한 가지 화두는 ‘혁명’이 될 전망이다. 올해 프레시안북에서는 ‘레볼루션(Revolutions)’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전체 10권 가운데 마오쩌둥의 <실천론․모순론>, 로베스피에르의 <덕치와 공포정치>, 호치민의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예수의 <가스펠>,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등이 1월 중 발간될 1차분에 포함될 예정이다. 그리고 도서출판 마티에서도 이번 봄에 슬라보예 지젝을 포함하여 에티엔 발리바르,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등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철학자들의 레닌론을 묶은 <레닌 재장전>(가제․Lenin Reloaded)을 출간할 계획이다. 바야흐로 출판계에서만큼은 “혁명이 문 앞에 있다!”  

09. 01. 05.  

P.S. <지젝이 만난 레닌>에 대해 작년에 쓴 글은 '자본론보다 더 긴요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46648)을 참조. 그리고 그린비출판사의 학술심포지엄 스케치는 출판사의 블로그(http://greenbee.co.kr/blog/296)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번에 나온 <레닌과 미래의 혁명>은 레닌과 러시아혁명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을 갖고 있다면 흥미로운 독서를 제공한다. 전체 3부 가운데, 초심자라도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은 2부의 토론이다. 발제자들이 자신의 발표를 요약/정리해주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대의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2부를 먼저 읽는 게 좋을 듯싶다. 가령 박노자 교수의 이런 비교는 어떤가. 

레닌의 생명력이 궁금하다면 1917년도, 혁명의 해에 레닌의 움직임들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나중에 레닌이 독재자란 비판을 받짐만, 1917년 10월까지만 해도 레닌은 모범적인 소비에트 민주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1917년 러시아의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이명박 정권하고 어떤 면에서 비슷하기도 했어요. 이명박보다는 훨씬 약했지만, 외부 권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차원에서는 비슷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임시정부는 자구책으로서 독일과의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연합국들의 채권 때문이죠.(...)   

지금 대한민국이 그것보다 국력 상태도 좋고, 여러 가지 점에서 당시 러시아처럼 파산 위기는 아니라고 할 수는 있죠.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이 미국 자본주의에 상당한 의존성을 보이고 있고, 또 그것이 대(對)국민적으로는 굉장히 안 좋게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보면 왠지 1917년의 임시정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시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다른 점은 전자에게는 이렇다 할 경찰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의경이 없었던 것이죠.(166-7쪽)  

흠, 말하자면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케렌스키에게는 이명박과는 달리 어청수가 없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는 얘기겠다...   

P.S.2. 대부분 그렇지만 마감에 쫓겨 원고를 넘긴 탓에 이번에도 제대로 퇴고를 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교열부에서 손을 봐준다는 점인데, 이번호 지면기사에서는 몇 가지 이견도 생겼다. 첫 문단에서 "그러한 반문 전제로 하는 레닌은"이 지면에서는 "그러한 반문 전제로 하는 레닌은"으로 수정됐는데, 나는 전자의 뜻으로 썼다. 그리고 고유명사 표기 두 가지. 지면에서는 '알튀세르'가 '알튀세'로, '호지민'이 '호찌민'으로 수정됐는데, 한겨레의 방침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명한 책에서의 표기는 전자이며 내가 지지하는 쪽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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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닌 재장전' 예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4 12:13 
    2009년에 이어서 2010년에도 '1월의 책'은 '레닌'이다. 두툼한 분량의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부제는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아래가 원서의 표지이고, 번역본의 표지는 좀 크게 넣었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박노자 외, <레닌과 미래의 혁명>(그린비, 2008)에 이어
 
 
2009-01-06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06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시사IN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신병주의 <이지함 평전>(글항아리, 2008)을 다루었다. 곧 기축년 새해를 맞게 되기에('기축년'은 음력에만 해당하는 것인가?)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을 찾은 것인데, 정작 <토정비결>은 토정의 직접적인 저작은 아니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인데 조선 중기 정치적 혼란기에 '비결'류의 책들이 여럿 나왔다고. <남사고비결>, <북창비결>이 <토정비결>과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유행한 '예언서'였다고 한다. 여하튼 나로선 토정비결을 보는 셈치고 읽은 책이다(책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인터넷 토정비결을 봤는데, 두 곳의 운세가 서로 달랐다.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시사IN(09. 01. 03) <토정비결>은 토정이 쓰지 않았다 

기축년(己丑年) 새해를 맞는 만큼 어김없이 토정비결을 찾아보는 이들이 많을 듯싶다. 무슨 사자성어처럼 쓰이지만 ‘토정비결’은 ‘토정의 비결’이란 뜻이다. 흙으로 지은 정자를 가리키는 ‘토정(土亭)’은 알다시피 이지함(1517-1578)의 호이니 고유명사다. <토정비결>은 이지함판 <시크릿>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 <시크릿>이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려 한다면, <토정비결>은 자력구제가 가능하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한 해의 운세를 일러준다. 흥미로운 건 이지함이 상식과는 다르게 <토정비결>의 저자가 아니라는 사실.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토정이란 이름을 빌려 썼을 거라는 얘기다. 그 이유로 저자는 이지함이 점술과 관상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 친숙한 민중 지향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을 든다.   

사화(士禍)의 회오리에서 한 발짝 비켜서 처사(處士)의 삶을 살다 갔지만 이지함은 세상을 잊은 채 현실을 외면한 은둔거사가 아니었다.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 ‘처사형 학자’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갖고서 민생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쓴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이지함 또한 천거를 받고 1573년에 포천현감에, 1578년에는 아산현감에 부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이상을 펴보고자 했다. 

그의 핵심적인 사회 경제사상은 무엇이었나?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포천현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그는 상․중․하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한다. 상책은 국왕이 도덕성을 갖추는 것이고, 중책은 국왕을 보좌하는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청렴성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하책은 땅과 바다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농업이 본업이던 사회에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지함은 덕이 본(本)이고 재물이 말(末)이지만 본말은 상호보완적이며,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리(利)’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대를 앞선 그의 적극적인 국부 증대책과 해상 통상론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며, 이것은 18세기 북학파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이지함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사직했다.  

<주역>에 따르면 변혁에는 시기와 지위와 능력이 필요하지만, 저자는 이지함의 경우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기를 찾지 못했고 현감이라는 지위도 이상을 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평한다. 민중을 위한 ‘토정의 비결’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08. 12. 29. 

 

P.S. 원고를 쓰다가 찾아보니 이문구 선생의 소설 <토정 이지함>(랜덤하우스코리아, 2004)이 눈에 띄었다. 테마로 글을 쓴다면 읽어보고 싶다. 소설 토정비결 류 외에 김서윤의 <토정 이지함, 민중의 낙원을 꿈꾸다>(포럼, 2008)도 소설로 <이지함 평전>과 비슷한 면모를 다루고 있을 듯싶다. 사실 <이지함 평전>은 서두를 읽으면서 가졌던 기대치는 총족시켜주지 못한는 책이었다. 가령 저자가 그리고자 하는 이지함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국부의 증대와 민생에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산업도 개발해야 한다는 신념과 유통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자들의 논리와도 유사성을 갖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지함을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나아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제 이론가이자 실천가라 칭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5쪽) 

이지함은 16세기의 개방적이고 다양한 학문 경향을 보여주는 핵심적 인물이며, 특히 적극적인 국부 증진책을 제시한 그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양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잘 알고 있으면서, 막상 우리 선조인 이지함이 애덤 스미스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그러한 사상을 제시했던 사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애덤 스미스보다 앞선 시기에 적극적인 국부론을 주장하고 실천한 학자 이지함,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지함은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이다.(15쪽)  

인용문만 놓고 보자면 이지함은 서양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에 견줄 만한, 아니 그보다 앞선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이다. 하지만, 본론에서 이러한 주장에 대한 '입증'은 몇 가지 에피소드로 대체되고 있다. '북학 사상의 원조 이지함'에 대한 '본격 재조명'이라고 하기엔 미흡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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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독서평설 12월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세계문학과 국민문학(민족문학)의 관계를 화제로 삼아서 쓴 것으로 '세계화'와 관련한 네 차례 연재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예전에 쓴 '상자 속의 문학과 세계문학'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으며, 몇몇 대목은 편집자가 가독성을 고려하여 풀어썼다. 그럼에도 고등학생들이 읽기 어렵다면 아직은 나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2월호) 세계문학과 국민문학은 공존할 수 있을까?

세계 문학의 출현 - 세상의 빛을 보다
“오늘날에는 국민 문학이란 것이 큰 의미가 없어. 이제 세계 문학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지.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이런 시대의 도래 촉진을 위해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네.”

독일의 문호(文豪) 괴테(J. W. von Goethe, 1749~1832)는 1827년 에커만(J. P. Eckermann, 1792~1854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문학’에 대한 최초의 구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학이란 말의 원조는 독일어 ‘벨트리테라투르(Weltliteratur)’이고, 영어의 ‘월드 리터러쳐(World Literature)’는 이 말의 번역어다.

세계 문학이란 전 세계 각국의 문학을 뜻하기에 오랜 역사를 가졌을 법하지만, 실제로 그 개념 자체가 출현한 지는 불과 2세기도 되지 않는다. 이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세계’가 출현한 것이 근대의 지리상 발견과 산업 자본주의의 도래 이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세계’가 먼저 출현해야 ‘세계 문학’이란 것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문학의 의미 - 세계 문학과 국민 문학의 관계
사실 한국어에서 ‘세계 문학’은 조금 더 폭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네 가지 정도로 간추릴 수 있다. 먼저 국내 문학과 대비해서 국외 문학·해외 문학을 통칭해 세계 문학이라고도 부른다. 곧 외국 문학(Foreign Literature)이란 뜻의 세계 문학이다. 두 번째는 세계 명작(World Classic), 또는 세계 문학의 고전들을 가리키는 세계 문학이 있다. 흔히 세계 문학 전집 등의 출판 기획물에서 세계 문학이라는 말이 이를 뜻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오늘날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 문학’도 가능하다. 이 경우는 ‘지구 문학(Global Literature)’이나 ‘세계적인 문학(Worldwide Literature)’이라는 뜻으로 풀어 볼 수도 있다.

동시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류의 작품처럼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읽히는 문학이다. 이러한 문학은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명작’에 편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곧바로 세계 명작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 반대로 모든 세계 문학이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아니므로, 이 두 개념은 서로 구별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끝으로 괴테가 처음 제시한 문제적 개념으로서의 세계 문학이 있다. 괴테 시대에 막 시작되었고, 그 도래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 일종의 ‘운동’으로서의 세계 문학이다. 이것은 국민 문학(National Literature), 또는 민족 문학을 대응 개념으로 갖는 세계 문학이다. 따라서 세계 명작류를 가리키는 세계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 문학계에서 일찍부터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을 화두로 제시했던 문학 비평가 백낙청은 세계 문학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중요한 것은 “괴테가 ‘세계 문학’이란 용어로 뜻한 바가 세계의 위대한 문학 고전들을 한데 모아 놓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그 당시로서는 당연히 주로 유럽에 국한되었지만)의 지성인들이 개인적인 접촉뿐 아니라 서로의 작품을 읽고 중요한 정기 간행물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유대의 그물망을 만드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즉 이 용어는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는 차라리 세계 문학을 위한 초국적인 운동이라고 부름직한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명작’들을 ‘세계 문학 전집’이라고 한데 모아 놓는 것은 괴테가 말한 세계 문학과 무관하다. 오히려 이 괴테적 세계 문학에 대한 반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도래하게 되면 “일국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국민 문학·지역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문제는 이 세계 문학의 형성이 국민 문학(민족 문학)의 연장선상에서 가능한가, 아니면 그 극복을 통해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과연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일까, 아니면 민족적인 것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세계적인 것에 값할 수 있게 될까? 다시 말하면, 올바른 민족 문학이 곧 올바른 세계 문학일까, 아니면 민족 문학의 틀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세계 문학이 될까?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상자 속의 사나이>를 읽으면서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국민 문학 - ‘상자 속의 사나이’가 살아가는 법
소설의 주인공은 시골 학교의 그리스 어 교사 ‘벨리코프’다. 그가 ‘상자 속의 사나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날씨가 매우 좋을 때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드는데다가, 반드시 솜이 든 방한 외투를 입고 외출하기 때문이다. 벨리코프가 자신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격리시켜 방어하려는 ‘상자들’로 자기를 감쌀수록 그에게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자질, 곧 사회성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 벨리코프가 찬양한 것은 과거의 세계, 그리스어의 세계뿐이며, 심지어 그는 인간을 ‘안트로포스’라는 그리스어로 부른다.

이 단편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나이가 마흔이 넘은 노총각 벨리코프를 타지에서 온 동료 교사의 누이 서른 살의 바렌카와 결혼시키려던 일이 어떻게 실패로 돌아갔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이 사나이에게, 인생의 큰 '일'인 결혼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도 드물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의 모의 덕분에 거의 결혼할 뻔했다. 하지만 결혼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벨리코프는 바렌카에게 청혼하기를 주저했고,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만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사건이라고 해 봐야, 언제나 활달하며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렌카가 어느 일요일에 동생 코발렌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을 벨리코프가 목격하게 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너무도 날씨가 좋아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활기차게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바렌카와는 대조적으로 벨리코프는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로서는 부인네나 처녀가 자전거를 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벨리코프가 보기에 그건 공고로써 ‘허가’된 일도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벨리코프는 다음 날 학교도 결근한 채 저녁 무렵 여름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역시나 두꺼운 옷을 껴입고 주의를 당부하러 코발렌코를 찾아간다. 그러나 오히려 봉변만을 당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바렌카는 또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운 벨리코프는 한 달 뒤에 죽고 만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이렇다. “관 속에 든 그의 표정은 조용하고 편안해 보였으며 명랑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흡사 드디어 상자 속에 들어가게 해 주어서 이제 두 번 다시 그곳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죠, 그는 글자 그대로 자기의 이상에 도달한 셈입니다.”

결국 ‘상자 속의 사나이’의 삶은 상자(관) 속에 들어감으로써 완성되었다. 이는 그의 ‘상자 속의 삶’이란 것 자체가 이미 절반은 죽은 삶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곧 그는 죽음(=상자)이라는 외피를 두름으로써만 연명할 수 있었던 삶,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바로 ‘살아 있는 삶’이자 진정한 의미의 ‘세계’였다. 그렇다면 세계란 무엇인가?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세계 종교론을 조금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세계 문학 - ‘상자 속의 문학’에서 벗어나기
가라타니는 ‘세계 종교’라는 말을 단순히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계’라는 관념을 제시한 종교라는 의미로 쓴다. 이때 ‘세계’는 ‘공동체’의 상대어다. ‘공동체의 종교’란 인간이 집단이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강제되는 다양한 구조 또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공동체 종교는 안(내부)과 바깥(외부)의 구분을 대전제로 삼는다. 반면에 이러한 공동체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출현한 세계 종교는 더 이상 ‘외부가 없는 세계’, 곧 ‘무한한 세계’를 제시하는 종교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유대교에서의 야훼는 다윗이나 솔로몬이 믿는 공동체 신으로서의 야훼와, 공동체를 부정하는 모세의 신 야훼라는 두 가지 성격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모세의 신은 사람들에게 공동체의안녕과 보존을 제공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이른바 ‘사막에 머물라’고 말한다. 이때의 ‘사막’은 꼭 물리적인 사막을 뜻하지는 않으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세계 종교는 ‘사막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세계 문학 또한 ‘사막의 문학’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를 거부하는 공동체 ‘바깥의 문학’이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문학’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공동체의 존속과 안녕을 위한 문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없다. 올바른 민족문학(국민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라는 믿음은 우리의 공동체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국민문학은 세계문학이 아니며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이 아니다. 세계문학이란 유대교의 야훼가 아닌 모세의 신을 섬기는 문학이기에 그러하다. 물론 세계문학의 대척점에서 보면 공동체의 문학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동체 신이 번창하듯이 공동체의 문학 또한 번성해 왔고 번성해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상자 속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상자 속의 문학’은 공동체 문학과 민족 문학의 다른 이름이자, 상업주의 문학의 다른 이름이다. 이 ‘상자 속의 문학’은 모든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종족과 재산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든다. “항상 색안경을 끼고 털 스웨터를 입은데다가 귀를 솜을 싸고, 합승 마차를 타면 반드시 포장을 치게 한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벨리코프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상자 속의 문학’이 가장 편하게 들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상자(관) 속이다.

상자 속의 사나이’ 벨리코프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사막’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사막의 발견’은 근대적 주체의 발견자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주체, 곧 ‘코기토의 발견’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 데카르트는 많은 여행을 통해 코기토의 발견을 얻어냈다. 알다시피 개별 민족은 각기 다른 문화적 관습과 전통, 생활방식 등을 갖고 있다. 데카르트는 여행중에 이처럼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차이를 지각하고, 자기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인류학적’ 코기토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작가 또한 체호프 또한 1890년 사할린 섬을 여행하면서 그런 인류학적 현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러한 체험과 거기서 얻은 깨달음이 작가의 창작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비유컨대,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그러한 ‘사막’에 대응하는 사건은, 가능할 뻔했던 ‘바렌카와의 결혼’이다. 바렌카는 소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타자(他者)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러시아 어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큰 소리로 ‘하하하’ 웃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벨리코프 또한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반하지만, 그에겐 자신의 ‘상자’를 벗어 던지고 타자를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따라서 갑자기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도 결국은 청혼해서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결혼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작중 화자의 예단은 조금 성급해 보인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진정한 사건은 결국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 -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민족 문학
<상자 속의 사나이>를 ‘진짜 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는 밝혀 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면, 진정한 문학은 우리에게 ‘사막’을 보여 주는 문학이며 ‘사막’을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인류학적 여정을 가능하게 문학이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자각하게 함과 동시에, 세상은 넓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문학이다. 그것은 과연 민족문학이라는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가라타니의 세계 종교론을 민족이라는 우상에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한쪽에는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섬기는 '공동체 신의 민족문학'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특정한 공동체를 부정하고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모세의 신의 민족문학'이 있을 법하다. 동일한 종교에서 공동체종교와 세계종교를 분리해 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같은 문학에서도 공동체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을 식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우리가 촉진하고 앞당겨야 할 세계 문학은 모세의 신을 섬기는 민족 문학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민족 문학 자체에서 두 가지 개념을 분별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는, ‘민족’으로도 ‘국민’으로도 번역되는 ‘네이션(nation)’이라는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한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세계문학의 공간은 아직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이념의 공간이며, 네이션 바깥에 또 다른 네이션이 있는 현실 또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과연 민족문학이 공동체문학의 한계를 넘어서 보편적 세계문학과 양립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민족문학을 부정하는 민족문학이 될 것이다. 

08.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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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12-1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로쟈 2008-12-12 21:5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 부쩍 많이 출간된 '글쓰기' 책들에 대한 인상을 적고 있는데, 아이템 자체는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어렵게 작성하진 않았지만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몇 가지 해프닝이 생기는 바람에 마감을 겨우겨우 맞추었다. 글쓰기 책을 몇 권 훑어보아도 글쓰기 자체는 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한 글이기도 하다...

한겨레21(08. 12. 15)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

글쓰기를 권하는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글쓰기’ 자체는 전혀 새로울 게 없지만 그 글쓰기의 주체를 ‘누구나’로 전제한다는 점이 새롭다. 예전의 ‘작문론’이나 시․소설 작법 등과는 성격이 좀 다른 것이다. 바야흐로 “누구나 글을 쓰고, 써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 새로운 시대적 조건을 만들어낸 것은 인터넷이다. 온라인상의 블로그, 미니홈피, 카페와 클럽, 그리고 토론광장 등 글쓰기의 공간은 차고 넘친다. 그에 따라 글쓰기에 대한 유혹 또한 전면적이며 전방위적이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의 <전방위 글쓰기>(바다출판사 펴냄)의 착안점이 그렇다. 인터넷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일방적인 관계를 무너뜨렸다는 것. “따라서 21세기의 글쓰기는 특정한 과정을 거쳐 작가가 된 사람들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났다.” 비록 글쓰기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라 하더라도 그 욕구의 현실화는 멀티미디어 시대, 미디어믹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누구라도 글을 쓸 수 있게 된 시대,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좀더 잘 쓸 수 있을까다. 글쓰기가 타자와의 소통이고 유희라면, 더 잘 소통하고 더 잘 즐기는 법을 아는 것이 유익하지 않겠는가.

<전방위 글쓰기>는 이미 다방면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현장에서 ‘전방위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는 저자의 노하우를 담고 있다. 글쓰기의 필수 교양 세 가지로 철학적 사고와 경제 상식, 그리고 역사에 대한 관점을 드는 것을 ‘저자만의 노하우’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대중문학에서 영화, TV, 만화, 음악, 시사비평까지 다루면서 친절하게 요령을 짚어주는 것은 저자만의 강점이다. 그러한 요령과 비법을 습득한 뒤에 자기만의 ‘색다른 정보’를 가미한다면 “누구나 비평가,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살려 얼마든지 특정 분야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책은 그러한 비평적 글쓰기의 매뉴얼이다.

물론 전방위 문화비평가가 다 짚어준다고 해서 누구나 저절로 그처럼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강제’는 필요하다. 이를테면 반드시 일주일에 원고 2-3매라도 꾸준하게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보면 인터넷 시대라고 하여 특별한 글쓰기 노하우가 있는 건 아닌 듯싶다. 그의 결론 또한 우리 귀에 익은 것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그리고 꾸준하게 쓰는 것,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정도다.”

뭔가 자기만의 주제에 대해서 꾸준히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책을 쓰면 된다. 어떻게? 오병곤과 홍승완이 지은 <내 인생의 첫 책쓰기>(위즈덤하우스 펴냄)는 제목 그대로 ‘첫 책쓰기’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책이다. 저자들이 직장인으로서 실제로 자신의 첫 책을 쓰는 데 성공한 경험을 풀어놓고 있어서 그 노하우는 자못 구체적이다. 책을 출판하기 위한 ‘좋은 출판사를 고르는 3가지 기준’까지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첫 책을 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출판 거절을 경험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란 구절은 이 책이 얼마나 ‘실전적’인가를 말해준다.   

저자들이 ‘첫 책쓰기’에 도전해보도록 권유하는 독자층은 직장생활 10년차 직장인들이다. “대략 3년에 한 번 꼴로 현재 알고 있는 지식의 3분의 1을 새로운 지식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지게” 되기에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는 요즘 직장인들의 10년 공력이면 책 한 권은 너끈하다는 판단이다. “자기만의 노하우나 전문성을 담은 책을 쓰면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저자들은 격려한다. 하지만 이런 대목을 읽게 되면 책 쓰기가 ‘선택’이 아닌 ‘의무’처럼도 여겨진다. “전문가 1.0 시대가 학위나 자격증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면 전문가 2.0 시대에는 책쓰기에 의해 판별될 것이다. 따라서 전문가가 되려면 자신의 책을 써야 한다.”

비록 웹2.0 시대, 전문가 2.0 시대라고는 하지만 글쓰기의 목표가 비평가나 전문가 되기일 수만은 없다. 박미라의 <치유하는 글쓰기>(한겨레출판 펴냄)는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글쓰기의 ‘치유의 힘’을 편안하게 풀어나간다. 기본 전제는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글쓰기 안에 모두 담겨 있다는 점. 곧 나를 표현하기, 거리두기, 직면하기, 명료화하기, 나누기, 사랑하기, 떠나보내기, 수용하기가 모두 글쓰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글쓰기의 노하우는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 그래서 저자는 몸으로 쓰고, 심장으로 쓰라고 권한다.

가령 15살에 가출하여 ‘양아치 오빠들’을 만나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다 18세에 귀가한 한 여성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털어놓는다. “집에 들어갔다. 큰오빠한테 좆나게 맞고 작은오빠한테도 좆나게 맞았다. 하루종일 맞았나보나. 맞다가 오빠들한테 그랬다. 씨발 죽었어. 다시는 집에 안 들어와. 씨발, 하고 나는 다시 집을 나갔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나는 오빠들이 나를 때려서 정말 미웠다.” 고상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처지와 가출의 배경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음의 문을 열고 상처를 어떤 식으로든 글로 표현해내는 것, 그것이 치유하는 글쓰기의 시작이다. 이 치유하는 글쓰기의 목표는 우리가 조금 덜 불행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는 것이다. 

글쓰기에 소질이 좀 있다면, 그리고 열정도 갖추고 있다면 보다 ‘본격적인’ 경지로 나아갈 수도 있겠다. 이른바 ‘글을 쓰는 삶’의 경지다. 미국의 퓰리처상 수상 작가 애니 딜러드의 <창조적 글쓰기>(공존 펴냄)는 그런 삶의 다채로운 면모를 그리고 있다. 그녀는 창조적인 글을 쓰는 삶을 ‘가장 자유로운 상태의 삶’으로 규정한다. 물론 자신의 포부에 호응하는 글을 쓰는 것은 전문적인 글쟁이들에게도 언제나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헨리 소로의 말대로 젊은 시절엔 궁전이나 사원을 지을 재료들을 모으지만 중년이 되면 나무 헛간 정도를 짓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것이 그의 평생의 작업이며 그의 보람이다. 글쓰기는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제하며 고양시킨다.

08.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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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8-12-08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그런데 일주일에 원고 2-3매가 왜 이렇게 안 되냐 이거죠. 어휴어휴. 저 개인적으로는 글쓰기 책 중에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가 제일 좋았어요. 소개해주신 요즘 책 중에선 [전방위 글쓰기]가 궁금해요. (근데 이런 책 읽을 시간에 사실 한 장이라도 더 쓰는 게 좋은 거 아냐? 하는 생각이 할 수 없이 드네요. 킁.)

로쟈 2008-12-09 08:28   좋아요 0 | URL
개인적인 생각으론 일주일에 2-3매가 아니라 하루에 2-3매가 되어야 할 듯싶은데요.^^;

파란여우 2008-12-0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능도 열정도 시시한 사람은 당췌 뭘 해 먹으라는 말에요.

로쟈 2008-12-09 14:20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에겐 염소들도 있잖아욧!^^;

Arch 2008-12-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니 전 서재 닫아야할 것만 같고^^

로쟈 2008-12-09 14:04   좋아요 0 | URL
흠, 다들 '본격적인 글쓰기'를 노리시는 건가요?..

nada 2008-12-0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애니 딜러드.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다고 많이 그러든데 번역되어 나왔군요. 근데 163쪽밖에 안 되는데 가격은 왜 다른 책들하고 같은 수준인 거예요. 군시렁군시렁.

로쟈 2008-12-09 14:05   좋아요 0 | URL
앗, 양배추님. 왜 이렇게 뜸하신 거예요. 궁시렁궁시렁...

토란잎 2008-12-1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꾸준히 쓰는 일...... 글쓰기의 왕도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텐데....
아이궁,
이 게으름이여!

로쟈 2008-12-11 21:06   좋아요 0 | URL
이틀에 이틀치씩 쓰셔도 됩니다...
 

이번주 중대신문에 실은 기획서평을 옮겨놓는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탈식민주의 관련서 몇 권에 대한 언급이다. 분량상 자세한 검토는 다루고 있지 않다. 독서 목록 정도로 쓰일 수 있겠다(지면기사에서 '강철구' 교수가 '강철규' 교수로 오기됐다. 여기서는 정정해둔다).

중대신문(08. 11. 25) 백색신화의 숨길 수 없는 비밀

“세계의 일부는 부유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가난하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그리고 탈식민주의 이론의 가장 정교한 이론적 분석을 제시하는 로버트 영의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도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 ‘세계의 일부’가 주로 유럽과 북미대륙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세 대륙이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그렇게 둘로 분할돼 있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계급으로 분할돼 있는 것처럼 세계자본주의체제 또한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구도는 ‘구대륙이냐 신대륙이냐’ 곧 ‘유럽이냐 미국이냐’가 아니라 ‘유럽이냐 3대륙이냐’다. 그리고 이를 가르는 이념이 ‘식민주의 대 탈식민주의’다.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이 점차 쌓이고 있다. 유럽의 식민지 경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식민주의는 노골적이지만 과학과 학문이라는 외양을 갖춘 유럽 중심주의는 은밀하다. ‘지리적 확산론과 유럽중심적 역사’를 부제로 내세운 역사학자 제임스 블라우트의 『식민주의자의 세계모델』(성균관대출판부)은 그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다(이러한 비판으로 국내에 먼저 소개된 책은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세종출판사)이며, 강철구 교수의 『역사와 이데올로기』(용의숲)도 서양 역사학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유럽중심주의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영역으로 지리학과 역사학을 지목한다. 예컨대, 이제까지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세계의 특정한 한 부분, 곧 유럽과 ‘확장된 유럽’에서 발생했다는 세계사 인식이 대표적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유럽이 역사의 창조자이며 나머지 세계는 굼뜨거나 정체돼 있다. 다시 말해 세계는 지리적으로 영원한 중심부(유럽)와 주변부(제3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거의 신념처럼 굳어진 ‘유럽중심적 확산론’이며 블라우트는 이 신념을 비판하고자 한다.

얼핏 단순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복잡하며 어려운 시도다. ‘유럽적 보편주의’(이매뉴얼 월러스틴)라는 우리 인식의 근간을 건드리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결론에 이르러서 블라우트가 제시하는 비판 과제는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철학적 이원론, 모든 것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확산되었다는 소위 빅뱅이론,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발생하여 유럽으로 확산되었다는 역확산론, 산업혁명 이후 경제발전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산업화 확산론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유럽중심주의 해체도 요원하다는 것이 블라우트의 진단이다. 막스 베버를 비롯한 8명의 유럽중심주의 역사가를 비판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푸른숲)를 『식민주의자의 세계 모델』에 연이어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리라. 



블라우트가 ‘유럽의 기적이라는 신화’라고 부른 것을 로버트 영은 간단하게 ‘백색신화’라고 이름 붙인다. 그 또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 대상으로 삼는데, 이 경우에도 사안은 좀 미묘하며 복잡하다. 그의 공격대상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도마에 올려놓는 것은 아니다. 그의 비판은 유럽적인 시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유럽 마르크스주의’를 향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전복성에도 불구하고 유럽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의 한계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유럽의 한계 내에서만 움직이는 좌파의 역사적 시각을 유럽 외부의 세계에서 시작된 시각과 대결시킨다.”

유럽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대문자 역사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유지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영은 이러한 역사주의가 제국주의와 공모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이 공모관계는 타자를 주체에 환원하는 ‘동일자 철학’에서도 확인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적에 따르면, 이 역사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의 인식론적 비판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러한 비판 자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백색신화’뿐만 아니라 ‘서양’이란 개념 자체의 해체를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는 우리에게 세계와 세계사를 다시 사고하도록 요구한다.

08.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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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2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들 논리대로 하면 근대화를 둘러싼 모든 논쟁은 허깨비를 놓고 싸우는 것이 되지요.근대화의 기준이 되는 서유럽 모델이란 자체가 해체되어 버리니까요.통쾌함과 허망함이 동시에 느껴지네요.

로쟈 2008-11-26 21:48   좋아요 0 | URL
서구식 근대화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논쟁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근대화=서구화 도식을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그렇다고 제3세계 독재자들이 내세우는 해괴한 전통옹호는 딱 질색입니다.

로쟈 2008-11-27 18:13   좋아요 0 | URL
서구화는 근대화의 한 가지이죠. 역사적인 우연적 필연으로 우세종이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