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뿐인 삶 VS 영원회귀

출판저널(1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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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10년 1월호) '결혼'과 '불륜'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가 예고도 없이 토마스를 찾아 프라하에 온 날 그녀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은 <안나 카레니나>였다. 덕분에, 두 사람이 친구에게서 얻은 강아지의 이름이 ‘카레닌’이 됐다. 처음에 토마스는 ‘톨스토이’라 부르자는 제안을 하지만, 테레사는 암캉아지이기 때문에 ‘안나 카레니나’가 더 낫겠다고 한다. 하지만 토마스는 강아지의 장난기 있게 생긴 얼굴에는 ‘카레닌’이란 이름이 더 적당하다면서 카레닌으로 정한다. 남자 이름이 붙여진 때문인지 카레닌은 토마스보다 테레사를 더 따른다. 그리고 쿤데라는 두 사람의 전원생활과 카레닌의 죽음을 다룬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을 아예 ‘카레닌의 미소’라고 붙인다. 작가 톨스토이와 그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애독자 쿤데라에게 ‘책 속의 한 장면’을 골라달라고 하면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안나의 자살 장면을 꼽지 않을까 싶다. 이미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란 물음을 던지고 “전혀 뜻밖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답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녀의 행위가 뜻 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뜻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과성 너머에서 찾아진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또 다른 에세이집 <커튼>에서는 이 장면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내보인다. 요지는 안나가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브론스키와 재회하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가지만 플랫폼에서 갑자기 브론스키와 처음 만나던 날 기차에 깔려죽은 인부를 기억해내고서야 비로소 자신도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자살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 이야기에 아름답고 완전한 형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의 자살은 도덕적 자살이 아니라 심미적 자살이다. 그녀는 자살을 통해 삶을 응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안나의 이러한 자살은 분명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등장하는 키릴로프의 자살과 대비된다. 그 차이를 쿤데라는 <소설이 기술>에서 이렇게 대비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논리의 끝까지 가기를 고집하는 이성의 광기를 포착한다. 톨스토이는 그 반대다. 그는 비논리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의 개입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비논리적인 것’ 혹은 ‘비합리적인 것’은 소설에서 어떤 생기의 ‘과잉’으로 묘사된다.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안나와 처음 조우하는 장면에서 그가 갖는 느낌을 묘사한 대목을 보라. “마치 과잉된 뭔가가 그녀의 몸속에 넘쳐흐르다가 그녀의 의지에 반해서 때론 그 눈의 반짝임 속에, 때론 그 미소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빛은 그녀의 의지를 거슬러 그 엷은 미소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이렇듯 브론스키를 매혹시킨 것은 그녀의 의지에 반하여 흘러넘치던 생기였고 ‘과잉된 뭔가’였다. 그것은 안나라는 ‘주체’를 넘어선 어떤 것이면서, 안나라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비인칭적 생명의 운동이다. 

안나의 그러한 생기는 오빠의 가정불화를 중재하기 위해 갔던 모스크바에서 오랜만에 활짝 꽃피지만 남편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녀는 옷을 벗고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와 미소에서 뿜어져 나온 생기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지금은 그녀 안의 불꽃이 꺼져 버렸거나 어딘가 멀리 숨은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카레닌과의 결혼생활이 그녀에겐 ‘살아있는 삶’이 아니라 ‘죽어있는 삶’이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면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브론스키와의 만남 이후에 안나에게 가로놓인 건 ‘도덕적이지만 죽어있는 삶’(결혼)과 ‘부도덕하지만 살아있는 삶’(불륜) 사이의 양자택일이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안나의 곤경을 가장 잘 말해주는 건 그녀의 소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꿈이다. 브론스키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밤마다 같은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그녀의 남편이고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에게 애무를 퍼붓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아, 난 지금 정말 행복하오!’ 그리고 알렉세이 브론스키도 거기에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그녀의 남편이었다.” 두 명의 알렉세이 모두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면 이보다 더 간단한 해결책이 없을 테지만, 그것은 불행하게도 안나의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안나는 결국 남편에 대한 의무 대신에 브론스키에 대한 열정을 선택하고, 이 선택은 그녀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비밀스런 불륜은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안나가 자신의 불륜을 굳이 숨기고자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러한 솔직함을 사교계는 용납하지 않았다. 더불어, 사교계는 안나가 갖고 있는 대단한 열정, 혹은 두 사람 몫의 생기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꿈속에서처럼 두 남자, 두 명의 알렉세이에게서 동시에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안나 또한 두 사람 몫의 열정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은 후 산욕열로 죽어가던 안나가 열에 들떠서 남편 카레닌에게 이렇게 고백하는 장면을 보라. “내 안에 다른 여자가 있어요. 난 그녀가 무서워요. 그녀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난 당신을 증오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나를 잊을 수 없었어요. 그 여자는 내가 아니에요. 지금 내가 진짜예요.”   

말하자면 두 명의 안나가 있는 셈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안나는 카레닌에게 용서를 구하고, 한술 더 떠서 곁에 있던 브론스키까지 용서해달라고 부탁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브론스키에게는 “얼굴을 보여줘요. 이분을 봐요. 이분은 성자예요”라고 말한다. 브론스키는 고뇌와 수치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카레닌은 눈물을 흘리며 브론스키에게 손을 내민다. 예사 소설이라면 이러한 화해의 장면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의사들의 예측과 달리 되살아난다. 그리고 다시금 전혀 ‘다른 여자’가 된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아예 외국여행을 떠나버리며, 소설은 아직도 절반의 이야기를 남겨놓게 된다. 안나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생기 혹은 과잉의 자기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쿤데라가 ‘자살의 산문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탐구’라고 부른 <안나 카레니나>는 ‘비인칭적 열정’의 자기전개를 다룬 드라마이기도 하다. 

10. 01. 06. 

P.S. 알다시피 <안나 카레니나>는 여러 차례 영화화됐는데, 러시아에서 제작된 <안나 카레니나>(1967)는 http://www.youtube.com/watch?v=BCO2NimE3I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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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04 00:15 
    저녁강의가 있어서 늦게 귀가해보니 식탁에 이번달 <출판저널>(3울호)이 놓여 있다. 원래는 지난달에 실려야 할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 원고가 한달 늦춰졌고, 이번이 마지막 글이 됐다. 나대로의 '이어 읽기'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루고 있으며, 4월호 원고까지 썼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래도 원고 부담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
 
 
rolla 2010-01-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민음사판으로 읽었는데, 브론스키와의 첫 대면을 묘사한 부분의 느낌이 색다르네요. 아마 문학동네판이거나, 아니면 로쟈님께서 직접 번역하신 걸까요. (뒷부분 카레닌의 집으로 돌아온 부분은 민음사판과 같네요.) 번역에 따라서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니, 이거 문학동네판도 읽어보고 싶어지는데요^^ 위엄있는 느낌의 민음사판 표지도 멋지지만, 감성적인 느낌의 문학동네판도 끌려요. 어젯밤에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과 <커튼>을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는데, 오늘 로쟈님 블로그에 링크된 걸 보니 넘 반갑기도하고 신기하기도 하네요. (자주 방문하다보면 주인장과 텔레파시도 통하게 되는걸까요??)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니 구매욕이 더 불타오르네요. 로쟈님 블로그에 자주 방문하다보니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이 되어버렸는데, 이걸 어쩌죠? 허허허.

로쟈 2010-01-06 21:43   좋아요 0 | URL
예리하신데요.^^ 글을 쓰면서 두 가지 판을 모두 참조했습니다. 범우사판까지 세 종. 제가 강의에서 즐겨쓰던 건 범우사판이었는데, 이젠 뭘 써야 하나 고민중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0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이리 잘 쓰시나요?‘도덕적이지만 죽어있는 삶’과‘부도덕하지만 살아있는 삶’그 경계에서 '과잉된 그 무엇'쪽으로 기울면 그게 소설이 되고, 안나의 운명이 되는 건가요? 저야 뭐, 과잉된 그 무엇 때문에 번민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소망하는, 태생이 불온한 자입니다.

로쟈 2010-01-06 21:48   좋아요 0 | URL
생명 혹은 생기란 게 사실 초도덕적이죠. 저는 그런 과잉 때문에, 보바리 부인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모두 안나 카레니나다"라고 말하긴 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그만한 열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죠...

2010-01-07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8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파벨 2010-01-07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에서 종종 쿤데라를 만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누렇게 된 책들을 다시금 읽어봐야겠어요. 20년 전의 감동을 되찾을 수 있을까....그게 너무 두렵지만요^^ (사실 작년에 미국에서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영문판으로 읽으면서...뭐랄까...토마스나 테레사에 대해 냉소적으로 비판하게 되는 저 자신에 흠칫 놀랐어요. 너무....늙었나봐요ㅠ.ㅠ)

안나 카레리나도........이 기회에 읽어봐야 할 듯. 부끄럽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랍니다.

로쟈 2010-01-08 00:23   좋아요 0 | URL
읽을 시간이 아직 충분하지요. 인생 기니까요.^^

페크(pek0501) 2010-01-0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로 시작하는 소설이죠(범우사).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안나 카레니나>를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몇 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있어, 얼마나 재밌길래, 하는 궁금증으로 사 본 책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의 이웃에 사는 한 여자가 남편과 미모의 가정교사 사이를 질투하여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의 하나라고 함. 처음엔 톨스토이가 안나를 밉쌀스런 여자로 구상했는데 이 소설을 완성할 즈음엔 안나에 대해 애정을 품게 되었다고 함. 이것에 대해 쿤데라는 "그는(톨스토이는) 제가 즐겨 소설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라고 썼습니다.-<소설의 기술>p170 안나를 불륜을 저지른 비도덕적인 여자로 보기보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되고 가여운 여자로 여겨지는 소설입니다. 차라리 사랑하지도 않는 안나를 체면의 중시 등의 이유로 이혼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비난의 화살이 갈 수 있는 작품...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10-01-08 00:23   좋아요 0 | URL
이미 많이 알고 계신데요.^^

blanca 2010-01-0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안나 카레니나를 시도해 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런 페이퍼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은근 스포일러인데요--; 로쟈님 페이퍼를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고 다시 한 번 정독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1-08 00:24   좋아요 0 | URL
이게 책 속의 한 장명을 소개하는 거라 스포일러가 불가피하네요. 담엔 미리 주의를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kumun 2010-01-07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우사 판으로만 읽어봤는데 민음사판과 문학동네의 번역은 어떤가요?
또 굳이 최고의 번역을 꼽으신다면?

로쟈 2010-01-08 00:22   좋아요 0 | URL
제가 일부분만 대조해봐서 아직 전체적으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서점에서 그냥 몇 페이지 대조해보시고 취향에 맞는 걸 고르셔도 될 듯해요...

2010-01-07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8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갈무리, 2009)를 다루고 있다. 관심을 끄는 주제이기도 하고 물망에 올랐던 책들 가운데 가장 얇다는 점도 고려됐다. 원고 마감 전날에야 '압구정 커피'를 마시며 읽고 이튿날 아침에 계절강의를 나가기 직전 부랴부랴 써서 넘긴 원고였다. 2010년의 시작이다.   

 

한겨레21(10. 01.11) 인지과학이 도달한 맹자와 대승불교

책을 읽는 중요한 목적이 배움이라면, <윤리적 노하우>(갈무리 펴냄)는 제목부터 그러한 목적에 충실하다. 조합은 새롭다. 윤리적 노하우? 노하우가 ‘기술’이나 ‘비법’을 뜻하는 말이니 윤리적 행위의 기술이나 비법을 전수해준다는 말일까? 힌트가 되는 건 ‘윤리의 본질에 관한 인지과학적 성찰’이란 부제다. 윤리의 본질을 다룬 책은 많으므로 이 책의 방점은 ‘인지과학적 성찰’에 두어진다. 그것이 ‘노하우’와 연결되는 것이겠다.   

저자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칠레 출신의 저명한 생물학자이자 인지과학자다. 과학자로서 생각하는 윤리 사상을 세 차례 강의를 통해 풀어나가고 있는데, 일단 그가 보기에 윤리는 '노홧'(know-what)의 문제가 아니라 '노하우'(know-how)의 문제다. 즉 이성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발적 대처의 문제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일상적인 윤리적 행위는 반사적이면서 즉각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는 규칙보다는 습관을 따른다. 이것은 흔히 윤리적 행위를 윤리적 판단과 결부시켜서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함축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구성적 인지주의’ 혹은 ‘구성주의’에 토대한다. 그것은 같은 인지과학 내에서도 ‘계산주의’와는 대조되는 입장이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했던 계산주의는 지식을 추상적 논리의 대응물로 간주한 반면에 구성주의는 구체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계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것이 아니고 우리가 움직이고 만지고 숨 쉬고 먹으면서 만들어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당신이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두판매대에서 담배 한 갑을 사고 느긋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불현듯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안다. 당연한 일이지만, 느긋했던 상태는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고 생각은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곧 바쁘게 가두판매대로 되돌아가보는 당신에게 주변의 가로수와 행인들은 더 이상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새로운 상황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이니까. 이렇듯 우리는 ‘항상’ 주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살아간다. 이때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반복적인 행동이 체화된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윤리적 행위 또한 그런 노하우의 산물이다.   

윤리적 노하우의 관점에 서면, 중요한 것은 윤리적 인식이 아니라 윤리적 숙련 혹은 훈련이다. 앎이 아니라 습관, 더 나아가 성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구성적 인지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윤리에 대한 동양의 전통적 관점과 만난다. 바렐라는 특히 맹자의 인간 본성론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맹자는 인간에게 선한 본성이 내재돼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계발하고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란 오랜 수신(修身)을 통해서 형성된 품성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행동이 이루어지는 사람이다.” 

이 정도의 ‘윤리적 노하우’라면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적’ 행위자의 행동이 중앙 통제적인 자아가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면 어떨까? 즉 우리의 자아라는 것이 실체성을 갖지 않는 ‘가상적 인격’에 불과하다면 조금 놀랄 만하지 않을까? 바렐라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자아가 가상적이고 비어 있다는 것이 현대 서구과학의 발견이다. 이것은 통일된 중심 자아를 부정하는 정신분석의 윤리와 만나면서, 자아에 대한 집착을 경계해온 불교적 관점과도 조우한다. 사실 무아(無我)에 대한 불교의 오랜 가르침을 고려하면 그것은 ‘오래된 발견’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교리가 ‘비어있음(공성)’과 ‘자비’라고 하면, 인지과학은 긴 우회를 거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이쯤 되면 저자가 티베트 불교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다). ‘윤리적 노하우’가 열어줄 새로운 실천에 대한 명상으로 한 해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10. 01. 05.  

P.S.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무아 혹은 가상적 인격으로서의 자아에 대해서는 좀더 공부해볼 생각인데, 좀 어려운 분야이긴 하다. 바렐라의 동료 마투라나의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 외 <자유는 진화한다>(동녘사이언스, 2009) 같은 데닛의 책 몇 권, 그리고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 읽어볼 책들이다. <시차적 관점>에서는 4장 '자유의 고리'가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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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10-01-05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는 진화한다...얼마전 읽다가 포기...는 아니고 보류...하고 있습니다.
넘 어려워요.........ㅡ,.ㅡ 그의 논리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디선가 휙 안내자를 잃어버리고 홀로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

제가 데넷을 접하게 된건...호프스태터와의 공저, 도킨스의 불독...뭐 그런 이미지여서...왠지...적어도....도킨스나 호프스태터에게 접근하듯 접근할 수 있는 철학자가 아닐까 했는데...

역시 철학자는 철학자...(제게는 외계인)...싶더군요.^^

로쟈 2010-01-05 20:24   좋아요 0 | URL
<다윈의 위험한 생각>도 너무 난해해서 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군요..

來而 2010-01-05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적 노하우>는 오늘 지하철에서 처음 읽어봤는데, 너무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더불어 <앎의 나무>도 다시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0-01-05 23:51   좋아요 0 | URL
네, 어떤 얘기들을 하는 건지 윤곽을 잡는 데 요긴한 책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1-0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설 때문에 <한겨레21> 지면이 아닌 로쟈님 서재에서 먼저 서평을 보게 되네요. 인지과학 혹은 인지심리학에 관해서라면 <물질과 의식>에 있는 몇몇 구절을 접해본게 전부인데요.왠지 그 쪽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먼 훗날에는 철학(아마 인식론 분야겠죠)이나 정신분석은 모조리 과학이 대체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윤리가 인식이 아니라 숙련의 문제라...로쟈님은 맹자와 대승불교를 연결시키셨는데, 저는 그 구절을 읽으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르더군요. 그 뭐라더라. 숙련된(훈련된) 성품의 탁월함이었던가...좀 가물가물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읽은 듯 한데, 찾아볼려니 책이 어디있는지 모르겠네요.^^;;

로쟈 2010-01-05 23:52   좋아요 0 | URL
프로네시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좀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카프라까지 생각나더라구요...

빵가게재습격 2010-01-06 01:17   좋아요 0 | URL
......
전문용어의 압박에...체할 뻔 했습니다...(갑자기 턱! 던지시면 이렇게 체합니다.^^;;;;) 그런데 프로네시스가 그거였나요? 제 기억엔 프로네시스는 덕성의 기준이 되는 사람 내지 속성 뭐 이런 정도였던 것 같은데...아무튼 가물가물입니다.(하필이면 책이 없네요. 아까 책장을 모조리 훑어봤는데 안 보이네요.) 카프라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을 쓴 카프라 말씀하시는 거죠?

로쟈 2010-01-06 21:11   좋아요 0 | URL
보통 '실천지'라고 하는데, '실천적 앎'입니다. '이론적 앎'을 뜻하는 에피스테메와 대비되는. 네, 카프라는 그 카프라죠...

빵가게재습격 2010-01-06 23:16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카프라 책은 전에 도서관에서 <통섭>을 빌리면서 같이빌려왔다가, 끝내 못 읽은 책인데요. 호기심이 생기네요. 아무튼 요새 출퇴근 대란입니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다이조부 2010-01-0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에 실린 선생님의 글 잘 봤습니다. 내용이 어려워서 잘 이해는 안 가지만,

마지막 구절에 샘의 대학신입생 시절 일화가 인상적 이었어요. 한 동안 500원 짜리

동전 보면 로쟈님 생각 날듯...

책 읽는 경향에 예전에 선생님도 책 추천하셨더군요.. 하루자 신문에 2번이나 실렸네요

ㅎㅎㅎㅎ 그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요. 내용은 난이도가 있을것 같지만,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찬찬히 읽어보고 싶네요

로쟈 2010-01-05 23:53   좋아요 0 | URL
흠, 중학생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좀 오버한 건가요?^^;

펠릭스 2010-01-07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리 밀리건-스물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다니엘 키스/황금부엉이>의
다중인격체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읽을 만하겠는데요.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새벽녘에야 구상을 해서 낮에 써보낸 원고인데, 마침 폭설이 내렸기에 아귀를 맞추었다. 칼럼의 제목도 그렇게 나갔다. 원고를 보내고 아이와 30분 동안 눈사람을 만들어보려고 애쎴지만, 어찌된 일인지 잘 뭉쳐지지 않았다. 눈의 성분도 예전과는 다른 모양이다.  

 

경향신문(10. 01. 05)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포틀래치’라는 게 있다. 북미 원주민의 말로 ‘선물’이란 뜻인데, 보통은 선물을 주면서 크게 벌인 잔치를 가리킨다. 많은 손님을 초대해 생선과 고기, 모피와 담요 따위를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더 큰 포틀래치를 열어서 자기도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면 예의에 어긋날뿐더러 선물을 준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걸 뜻하기에 과도한 잔치를 경쟁적으로 벌였다고도 한다.

선물 교환양식이긴 하지만, 포틀래치는 선물이나 교환과 구별된다. 선물은 정의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관대한 행위이다. 반면에 교환은 반드시 뭔가를 반대급부로 기대하면서 주는 호혜적 행위이다. 포틀래치는 이 두 가지 행위의 교집합 같다. 즉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한 턱을 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받는 쪽에서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턱을 내야만 한다. ‘자발적 의무’를 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자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인류학자 모스는 이 수수께끼 같은 교환방식 속에서 뭔가 신비로운 것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 핵심을 호혜적 교환 자체에서 찾았다.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상호교환의 의미라고 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까지 가세해서는 포틀래치의 핵심이 선물과 답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라고 주장했다.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지만 대칭적인 두 행동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누군가 선물을 받은 즉시 상대방에게 답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물을 거절한다는 인상을 줄 테니까. 모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포틀래치는 호혜적 교환처럼 비치면 안된다.

교환의 호혜성은 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까? 또 다른 인류학자 살린스에 의하면, 교환은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며 받은 대로 되갚는 보복의 논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각각의 선물주기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척해야 한다. 그것이 포틀래치라는 선물경제의 특징이라면, 이와 대조적인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다. 화폐를 매개로 한 등가교환 말이다. 거기엔 관대함도 베풂의 호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선물이 주인의 행위이고 포틀래치가 주인들 사이의 행위라면, 교환은 노예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오래 전 일화가 떠오른다. 대학 1학년생이던 나는 서울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의 부모님께 다녀오곤 했다. 하루는 늦은 저녁 그렇게 돌아오던 길에 세탁소에 들렀다. 양복 상의에 떨어진 단추를 달기 위해서였다. 세탁소 주인이 특이한 요구라는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는 동안 나는 이 품값을 어떻게 치러야 할까 꽤 고민했다. ‘무상의 호의’일 수도 있는 일을 두고 “얼마예요?”라고 묻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인 듯싶었다. 결국 옷을 받아들고 엉거주춤하게 목례를 하고 나서려다가 그냥 가느냐는 타박을 받았다. 품값으로 500원을 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속내를 말하진 못했다. 대신 나의 짧은 생각을 자책했고, ‘서울 인심’에 대한 씁쓸함을 곱씹었다. 그런 등가교환을 통해서 그날 세탁소 주인과 나는 서로에게 노예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호의를 베푸는 대신에 노동을 했고 나는 고마운 마음 대신에 돈을 지불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돈이 모든 걸 대신할 수 있는 세상은 노예들의 세상이다.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10. 01. 04. 

 

P.S. 포틀래치에 대해서는 이상의 책들을 참고했다. 물론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지젝의 정리이다. 한데, 지젝이 말하는 선물경제의 주인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것 없이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짧은 글에 그런 내막까지 자세히 적을 수는 없어서 약간 비튼 결과가 됐지만, 또 비튼 대로 말은 통하는 듯싶다. 저녁에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기행 첫 강의를 하러 외출했다가 들어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강의실 분위기도 좋았고 귀가길도 무난했다. 폭설이 내린 날 치고는 뒷끝이 좋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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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미 2010-01-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과 연초를 보내며 읽는 좋은 글이네요. 특히나 이맘때면 무상으로 받았던 수많은 호의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하나 고민 아닌 고민을 하거든요. 사람이란 또 표현을 하지 않으면 그 속마음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무상의 친절로' 보내주신 책을 너무나 잘 보고 있는데 마음으로만 그걸 담고 있으면 제 마음이 어떤건지 과연 제대로 아실까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천냥 빚이지만 말로라도 가늠을 하는게 나을지... 정중하게 다시, "정성스레 친필을 더해 보내주신 책, 제게는 정말 좋은 선물이었답니다. 올 한해 로쟈님 마음이 폭설만큼 풍요롭길 바라겠습니다. 꾸벅~"

로쟈 2010-01-05 08:51   좋아요 0 | URL
잘 받아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그곳도 폭설은 자주 내리죠?^^

2010-01-05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10-01-05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옵니다. 눈이 내리고 난 뒤 몇 시간 지나서 대량의 눈을(무게의 힘으로)
뭉치다 보면...저처럼 거대한 눈사람이 탄생되옵니다.ㅎㅎㅎ (인증샷까지 올렸는걸요)

로쟈 2010-01-05 08:48   좋아요 0 | URL
지역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sasac 2010-01-0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눈이 내리고 나서 표면이 약간 녹았을때 잘 뭉쳐진답니다.
그러니까 내리고 있는 눈보다는 쌓인 눈...
시골에 살다보니...경험으로 아는 거예요^^

로쟈 2010-01-05 14:26   좋아요 0 | URL
시골 눈은 아무래도 다를 듯해요. 저도 작년에는 눈사람을 만들었으니 어제 내린 눈만 좀 이상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1-0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고, 로쟈님 너무 꾀가 없으셨네요. 떨어진 단추는 기숙사 옆동 여학생에게 부탁해야 무상의 의미에다 덤으로 데이트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이렇게 되면 무상 아닌가?), 영업하는 세탁소 가서 부탁해 놓고 '무상의 호의'나 '인심'을 바라면 어떡해요? ㅋㅋ 제가 세탁소 주인이라도 로쟈님의 깊은 뜻을 오해했을 것 같아요.

로쟈 2010-01-05 14:27   좋아요 0 | URL
남학생만 있는 기숙사였어요. 그리고 오는 길에 단추가 흘러내렸는데, 양복 상의는 바지랑 다르잖아요.^^;

2010-01-05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1-0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호의를 베푸는 대신에 노동을 했고 나는 고마운 마음 대신에 돈을 지불했다"-좋은 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뒤돌아보게 만듭니다. 욕을 먹지 않으려면 선의로써 행하는 도움마저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야 하는 세상은 씁슬하게 느껴지네요. 살면서 인간으로서의 처신이 쉽지 않음을 가끔 깨닫습니다. 어떤 경우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어요. 무엇을 받는 행위도 간단치 않습니다. 답례를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섭섭하게 생각할 것 같고, 그렇다고 매번 답례를 한다면 '너도 받으면 꼭 답례를 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은연중 주는 것 같고... 그 적절함이란 어느 쯤인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결국 중요한 건 상대방에 대한 파악이겠죠. 어떤 인간인가, 즉 어떻게 해 줘야 상대방은 기분 좋은가, 하는 것이 관건. 정보란 이럴 때도 중요하네요.

페크(pek0501) 2010-01-0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라는 제목이 참 좋습니다. 글과 어울리는, 탁월하게 뽑은 제목임.

로쟈 2010-01-06 21:12   좋아요 0 | URL
제목은 편집부에서 정합니다.^^

펠릭스 2010-01-0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과 노동(수고)의 댓가를 분명히 구별하게 된 나이가 되면 현명(지혜)하게되는 나이입니다. 지젝도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대부'에서도 적과 아군에 대한 분명한 구별의 지혜는 경험의 세월만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로쟈 2010-01-08 12:48   좋아요 0 | URL
그게 상호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니 미묘한 것이고, 미묘한 것을 아는 게 지혜일 수 있겠습니다...

펠릭스 2010-01-08 17:31   좋아요 0 | URL
예,,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1840)은 작가가 재판에 붙인 서문으로도 유명한 소설이다. 그는 1841년에 결투로 세상을 떠났다.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 페초린이 결투로 동료인 그루슈니츠키를 죽게 만들지만 정작 현실의 결투에서 사관학교 동창의 총탄에 쓰러진 것은 레르몬토프 자신이었다.

  

스스로도 불행한 인간이자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든 낭만적 환멸의 주인공 페초린을 두고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고 칭한 데 대해 의견이 분분하자 따로 서문을 붙인 것인데, 특별히 마지막 구절이 유명하다.  

저자는 단지 그가 이해하는 방식대로 이 동시대인을 그려가는 일에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러한 종류의 인간은 아주 자주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저자의 몫이라면 이 질병의 존재를 알리는 것일 뿐,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는 신만이 아시는 것이다! 

서문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1830-40년대 독자를 겨냥한 것으로 당대 독자들의 오독과 오해를 유감스러워 하는 내용이다.  

우리의 대중은 아직도 너무나 미숙하고 순박하기만 해서, 마지막에 교훈을 찾을 수 없는 우화라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농담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풍자를 눈치 채지도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형편없는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고상한 사교계나 책 속에는 노골적인 욕설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동시대 교육이 보이지는 않지만 더욱 날카롭고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 무기는 아첨하는 척하다가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정확한 공격을 날린다.

새로 나온 <우리 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에서 인용했는데, '풍자'라고 옮겨진 것은 원래 '아이러니'이다. 종종 그렇게 번역되지만 나는 '아이러니'는 '아이러니'로 옮겨지는 게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요는 독자들이 농담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이러니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독서 대중을 레르몬토프는 순박한 시골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의 대중은 마치 전쟁 중인 양 진영으로부터 온 외교 사절들의 대화를 엿듣는 시골 사람과도 같다. 즉, 그들이 서로 간의 연약한 우정을 위해 각자의 정부를 배신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피터 싱어를 인용하면 '당신은 공리주의자로군!'이라고 혀를 차는 현학자의 태도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조롱'을 본다. 레르몬토프는 자신의 소설에 쏟아진 비판에 이렇게 응수했다.  

불행히도 최근에 이 책은 낱말 그대로의 의미를 믿어 버리는 독자들이나 심지어 잡지들의 질타로 인해 애를 먹었다. 그들 중 몇몇은 '우리 시대의 영웅' 같이 부도덕한 인물을 한 전형으로 제시한 점에 대해 정말로 몹시 화를 냈다. 다른 몇몇은 이 인물이 작가 자신이거나 작가가 아는 다른 사람의 초상일 거라는 애매한 지적만 남겼다... 이 얼마나 낡아 빠지고 가여운 농담이란 말인가! 

타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는 자유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수준의 것만을 본다. 그런 수작에서 '낡아 빠지고 가여운 농담'만을 읽는 것이 나의 수준이고 나의 불행이다...  

10.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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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3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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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 2010-01-03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여전히 내 눈에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착한 신부는 '윤리적 소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윤리적인 척 하는 알라딘으로 보이는 걸 어쩌나요.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윤리적인 척 하는 노무현/김대중 씨는 옹호를 하면서, 윤리적일 것을 주장하는 알라디너들에게는 철퇴를 아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도 윤리적 소비라는 전략은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때로 맞는 말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로쟈 씨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문제제기를 했던 것은 아니죠. 이 싸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올바른가의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로쟈씨는 왜 문제제기를 하냐고 문제제기를 했어요. 그리고 그게 제가 불쾌한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너무 거만해요.

로쟈 2010-01-03 22:10   좋아요 0 | URL
"왜 문제제기를 하냐고 문제제기를 했어요"가 핵심인가요? 거만한 독법이 어떤 건지 시범적으로 보여주는군요.

NA 2010-01-0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스는 파리 코뮌 대중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봉기 전략에 대해서 효과적이지 못하며 무모하다는 비판을 했지만, 막상 대중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는 함께 가서 싸웠습니다. 로쟈씨는 확실히 너무 거만하다는 겁니다.

푸하 2010-01-03 21:41   좋아요 0 | URL
으아... 최원님... 저도 님의 견해와 많은 부분 접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상대가 거만하다는 지칭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말씀인가요???

최원님은 이번 댓글에서 분명 '글을 통한 실천'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도하시는 바는 분명 '알라딘불매운동'이 효과적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님의 댓글은 알라딘불매운동에 도움이 되려는 의도(맞나요?)와는 정반대의 실천적 효과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태도가 거만하다고 느껴지시나요? 그래서 싫은 거세요? 그럼 님이 거만하게 이야기하지마시길 바래요. 님의 언급이 다시 '안티로쟈'(저는 단연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의 존재를 많은 분들에게 확증하는 역할을 하게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주장을 하시려거든 최대한 예의바르게 공격성을 눅여서 깔끔하게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물론 아닐때도 있구요.) 지금이 그럴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을 쓰실 때(하다못해 댓글을 다실때) 전략적으로 의도한 바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쓰시길 바랍니다.

NA 2010-01-03 21:47   좋아요 0 | URL
이 정도의 공격성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공격성이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공격성은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푸하 2010-01-03 22:12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논의를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기억하는 논쟁이 불필요하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억에 의존하여 쓰겠습니다.)당초 로쟈님의 페이퍼에 대한 볼빨간님, 판다님, 정군님 등...이 문제를 제기했지요. 로쟈님의 인터뷰에서 나타난 "불매운동에 대한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지칭-표현"순수한 가장"-에 대해 로쟈님에게 댓글로 따져 물었습니다. 더불어 바슈타님(지금은 볼빨간님과 바슈타님이 서재를 접었습니다.)이 페이퍼로 로쟈님에 대한 '강한풍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의문제기가 과도하였는지 로쟈님은 서재를 잠시 쉬신다는 포스트를 올리셨지요. 아마도 그때 남기셨던 포스트의 내용엔 로쟈님이 (이것도 제 기억입니다. 틀릴 수 있지만 쓸께요.) 관망조차 '기회주의'매도되고 로쟈에 대한 격문도 나오니 자숙하는 의미에서 좀 쉬겠습니다.'의 요지로 글을 남기시고 서재를 접으셨지요.

......

제가 파악한 상황을 전제하고
제가 논쟁에서 많이 아쉬웠던 부분은 로쟈님이 평소에는 자신에 대한 '오독'(로쟈님의 관점에서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로쟈님이 느끼시는 것과 주장을 간단히 핵심만 짚어서잘 이야기 하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진술의 참과 거짓을 떠나) 평소처럼 로쟈님은 볼빨간님과 바슈타님 판다님 등에게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잘 이야기 하셨을 수도 있는데 이 때는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로쟈님의 반응이 이해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래 댓글에서도 남아있지만 로쟈님의 인터뷰에 대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내용과는 다르게 공격성을 담고 있고 또한 재차 하시는 질문들이 마치 취조하듯이 이루어진 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로쟈님이 그렇게 반응을 보이신 것 같기도 하구요.(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여기서도 로쟈님 정도면 가볍게 넘기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공격성을 드러내는 분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또 공격성을 드러내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분들의 주장은 분명 생각하고 논의해야 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로쟈님의 입장에 온전히 설 수 없기 때문에 '안티로쟈'의 존재를 느끼시는 로쟈님의 견해에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나름 알라딘의 공기에 익숙한 한 사람으로서는 저는 '알라딘불매운동'과정에서 로쟈님이나 혹은 다른 블로거들에 대한 무작정 안티, 밑도 끝도 없는 안티는 없거나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로쟈님이 자신에 대한 안티가 있다고 주장하는 핵심에 자신을 향한 공격성, 그것이 전제하는 로쟈님에 대한 '오독', 소통불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저는 다르게 생각하지만요.)

이와 같이
제가 파악한 맥락에서 최원님의 '공격성'이 담뿍 담긴 댓글은 로쟈님에게 그리고 지금 알라딘에 안티가 적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실제로 안티가 있음을 '확증'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큽니다. 그러니 댓글을 쓰시려거든 댓글이 파급하게 될 효과나 상황을 고려해서 쓰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파악한 상황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키릴 2010-01-04 12:26   좋아요 0 | URL
푸하님, 최원님과 로쟈씨가 논쟁하고 있잖습니까. 그걸 좀 지켜보려 했는데, 푸하님이 끼어들어 마치 자신이 불매진영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최원님의 말을 저지하면 어떻게 합니까? 참고로 저는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불매 관련 푸하님의 입장도 매우 모호해 보입니다)입니다만, 최원님이 언급하신 '공격성'에 크게 공감합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이 푸하님이 줄곧 외치는 '예의'에 해당한다고 보십니까? 푸하님이 마치 토론장의 사회자 역할을 하는 꼴이군요.

푸하 2010-01-04 13:51   좋아요 0 | URL
제가 월권(부당하게 사회자처럼 행동한 점)을 했네요.
나중에 로쟈님에 대한 제 생각을 따로 포스팅하려고 했는데 최원님의 글에 대해 쓰다보니 혼재되었네요. 분리해서 쓸수도 있었는데 어찌되었는지 그리 못했어요. 키릴님의 지적 감사합니다.
적절한 방식으로 제 의견을 밝히지 못한점 (로쟈님) 죄송합니다.

키릴님, 키릴님은 최원님의 공격성에 공감하셔서... 그리고 최원님과 로쟈님이 논쟁하려는 상황에서 제가 불매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끼어들어 흐트려놓았다고 저를 비판하시는 건가요? 제가 개입하든 하지 않든 최원님은 본인이 가진 생각대로 계속이야기 하실 수 있는 것이구요. 제 언급은 최원님에 대한 것이고 그걸 수용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최원님의 몫입니다. 행동의 최종 책임은 행동의 당사자가 지지만 그 전에 의견교환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닌가요? 그점에서 님의 언급-푸하가 최원님의 말을 저지한다는-은 적절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를 제약합니다. 키릴님도 저에게 하는 말씀이 사회자 역할을 하지말라는 언급이기도 하시니까요. 그리고 제가 불매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시는데 그런식으로 글을 쓰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지닌 생각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키릴님도 제 입장이 모호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다른 이야기이지만 입장이 모호한 것은 나쁜 것인가요?

2010-01-03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phie 2010-01-04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도 아이러니라고 번역한 것이 더 이해하기가 쉽네요. 서문에 나온 유명한 구절도 흥미롭고요. 어설픈 해법을 찾으려다 작품성이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꼽아놔야겠네요. 그런데 어째 러시아에서 쓸만한 작가는 다 결투로 목숨을 잃는 것 같네요... 거 참.

로쟈 2010-01-04 23:55   좋아요 0 | URL
푸슈킨과 레르몬토프가 대표적인데, 그 다음엔 다행히도 드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1-0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거실바닥에 붙여놓은 껌을 낑낑거리며 떼고는, 눈내리는 출근길도 조금 걱정하며, 소박하게 새해인사도 드릴겸해서 서재에 들렸다가...이런, 깜짝 놀랐습니다. 태풍이 지나가는 것 같네요.-너무 소심한가요?^^- '알라딘 불매 운동'에 관련되어 이렇게 놀라운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논란을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불만감을 털어 놓으시는 분들의 출발지점에 그리 큰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민주적인 가치를 옹호해 왔던 로쟈님의 이 무덤덤한 반응(혹은 약간의 빈정같은?)이라니' 정도 아닐까요.-그 문제는 로쟈님이 이미 답하셨고, 저도 그 답변에 공감합니다.- 그것에 '안티로쟈'나 '6년간의 블로거 생활로 무슨 덕을 쌓은 것인지 심각하게 회의' 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순이 있다면 해소되겠죠. 의지가 필요하겠지만요. 새해 인사를 하러 와서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건강하셔야 합니다.^^

로쟈 2010-01-04 23:57   좋아요 0 | URL
정치적 입장은 마치 최종심급처럼 인간을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자초지종은 저도 적었지만 본의 아니게 무슨 원흉처럼 돼버려서 씁쓸하네요...
 
무엇이 문제인가

나대로의 입장을 표명한 글을 올렸지만, 역시나 '로쟈씨'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정도로 간주되는 듯하다. 이번에 새삼 알게 된 것인데, 서재 활동이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꼴 사납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지지해준 분들이 더 많은 듯싶지만, '안티 로쟈'도 적잖다. 절충책으로 내년(내일)부터는 쓰는 글들을 나의서재 & 즐겨찾는 서재브리핑에만 노출하도록 하겠다. 애써 서재를 찾는 분들만 읽고 가시면 되겠다.  

세밑에 따로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논쟁을 길게 끌고 갈 생각도 없다. 어차피 평행선을 달릴 테니까. 대신에 5년전 바로 이맘때 쓴 글을 리바이벌해놓는다. 아마 모스크바통신에 '서비스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올려놓았던 듯하다. 모스크바통신을 비공개로 전환한 이후에도 한번 수정본을 올려놓았을 텐데, 다시 찾아보지는 않았다. 비정규직 착취 문제나 인터넷서점의 '착취적' 물류 시스템에 대한 나의 생각으로 가름한다.   

2005년 새해가 밝았다. 어제의 일이다. 러시아는 어제부터 1월 9일까지가 공식 휴일이다. 연말에 개정된 법에 따라 그렇게 됐는데, 덕분에 다음 한 주 내내 생활이 불편할 듯하다. 일단 휴일이면 기숙사가 있는 본관 건물의 중앙통로를 막아놓는 탓에 전철역이건 인터넷카페건 밖에 좀 나가자면 400미터쯤을 돌아나가야 한다. 게다가 인문대학 구내의 PC방이 놀기 때문에 디스켓을 사용하려면 카페막스(인터넷카페)에 가서 매번 10루블(400원)을 더 내야 한다.

10시간짜리 인터넷 이용료는 이미 지난달에 400루블에서 550루블로 대폭 올랐다(러시아는 인터넷 이용료가 더 비싸지는 드문 나라일 것이다). 그렇다고 1시간 단위로 끊자니 최고 90루블까지 하므로 (왜 이렇게 비싸냐고 따지는 대신에) 결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550루블을 주고 끊는 수밖에 없다(10시간을 한 달 이내에 써야 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이라는 카페막스도 12월 31일에는 문을 닫았고, 듣기에 어제도 단축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연초인바, 다시금 새겨둘 것은 “착취가 없으면 서비스도 없다”는 문구이다(이건 거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서비스가 없으면 착취도 없다.” 이걸 운동주의적인 문구로 바꾸면, “서비스를 없애야만 착취도 없어진다.”).

자본주의화(민영화) 이후에 러시아 또한 ‘서비스(=착취) 없는 사회’에서 ‘서비스(=착취)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바, 아직은 초보적인 구석이 많아서 어느 상점이나 식당에서건 불친절은 예사로 경험하는 일이다(그러니까 아직도 ‘서비스’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러시아와는 반대로 ‘서비스 사회’에서 ‘서비스 없는 사회’로 얼마간 거꾸로 이행해간 나라들도 있으니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의 ‘선진국’들이다(서로 비슷하게 ‘불편한’ 나라인 영국과 러시아는 둘 다 석유 수출로 먹고 산다는 점에서도 처지가 닮았다).

지난달에, 인구가 고작 100만 명임에도 영국의 제2도시라는 버밍엄에 유학중인 후배가 모스크바에 잠깐 들러서 전해준 얘기에 따르면, 멀쩡한 지하철이 예고도 없이 안 다니고, 버스 기사가 운전중에 손님들에게 그냥 다 내리라고 요구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일반 시민들은 거기에 익숙해서인지 곧바로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다고 한다(후배의 말이 프랑스는 이런 영국보다도 한술 더 뜬다고). 일반 교통요금이 모스크바보다 10배는 더 비싼 도시에서(전철요금이 모스크바가 400원인 데 반해, 버밍엄은 4,000원이다, 그것도 한 구간이) 그런 불편을 겪으면서도 불평 없이 살아간다는 건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런 식으로 서비스가 없는/부족한 만큼 착취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 ‘인간적’일 거라는 것. 적어도 ‘인간적인 사회’를 ‘착취 없는 사회’로 우리가 정의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서비스’란 무엇인가? 외래어로서 이미 국어사전에도 올라가 있는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먼저, “생산된 재화를 운반/배급하거나 생산/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함”이란 뜻이다. 서비스 없는 사회, 즉 ‘보다 인간적인 사회’는 그런 재화나 노무를 제때에(혹은 아예) 배급/제공하지 않는 사회이다(생산자/노동자에겐 쉴 권리가 있다!). 당연히 ‘인간적인 사회’는 ‘없는 게 많은 사회’이며 ‘줄이 긴 사회’이다(‘인간적인 사회’가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필요(need)이지 욕망(desire)이 아니다). 부족한 재화나 노무를 배급/제공받기 위해서 ‘평등한’ 인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줄을 서는 것밖에 없다. 이 ‘줄 문화’를 전면적으로 다룬 문학작품이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소로킨의 <줄>이다(우리말로는 <세계의 문학>에 전재된 바 있는데, 단행본으로는 출간되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아직도 러시아에는 상점에서의 줄서기 문화가 남아있으며(불과 10년전만 하더라도 모스크바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는 1시간 이상씩 줄을 서야 했다. 그때 유학왔던 친구는 그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한번에 3-4인분씩 폭식을 하곤 했었다. 하긴 지금도 맥도널드에 가면 10-15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2004년판 회화교재에조차도 ‘상점회화’의 핵심으로 ‘줄서기’가 다루어진다. 가령, “당신이 (이 줄의) 마지막 사람입니까?”라거나 “제 자리 좀 맡아주세요” 같은 표현이 그런 것들이다. 당신 생각에 이 (인간적인) ‘줄 서기’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맡아달라고 해놓고 한 번에 여러 군데에 줄을 서기 때문이다(물건을 한 종류만 사는 게 아니므로).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줄을 짧게 서기 위해서는 절묘한 시간 계산과 순발력이 요구된다.

오랜 줄 문화의 경험 때문인지 러시아 사람들은 웬만한 줄서기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는 듯하지만, 이런 걸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욕이 나온다. 가령, 공항 입국장에서부터 짐을 들고 2시간씩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모스크바 국제공항에서의 그런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하는데(거기에 익숙한 사람은 1시간 내로 입국장을 빠져나올 경우 ‘만세!’를 부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국제공항이야말로 가장 ‘사회주의적’이며, 가장 ‘인간적’이라고 할 만하다. 일반적으론, 그걸 뭉뚱그려서 ‘러시아적’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불충분한 일반화이다. 요는 그러한 ‘인간적인’ 태도의 전제인바,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왜 굳이 당신한테 애써 봉사해야 하는가?”이다(“당신이 그렇게 잘났나?”). 인간은 평등하지 않은가?!

거기서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 ‘서비스’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인바, 그것은 “개인적으로 남을 위하여 돕거나 시중을 듦”을 뜻한다. 이걸 달리 ‘봉사’ 혹은 ‘접대’라고 말한다. ‘봉사’란 ‘접대’를 순화시킨 말인바,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서비스가 없는 사회’로서의 ‘인간적인 사회’란 ‘접대가 없는 사회’이다. 그리고 그와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돈만 있으면 ‘서비스 만땅’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예컨대, ‘돈 있는’ VIP는 모스크바 공항도 귀빈실을 통해서 바로 빠져 나간다.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2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건 ‘돈 없는 사람들’이지 자본가들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기본 원료는 봉사료/접대료이다(그래서 ‘봉사비/접대비’가 된다). “난 네가 돈을 주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자본주의의 캐치프레이즈다. 이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이현세 만화의 구호이자(‘까치’의 대사) 이장호의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를 패러프레이즈한 것인데, 그러한 패러프레이즈가 암시하는 바는 이 둘이 동형적이라는 것이다. 둘 모두에 걸려 있는 것은 ‘욕망(desire)’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욕망의 무한성에 대응하는 지표이다. 때문에 “돈을 그 정도 벌었으면 됐지”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동형성을 간과하는 태도가 ‘순진한 태도’이며, ‘소녀적 태도’이다. 즉,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에 감동하는 태도가 ‘소녀적 태도’인바, 물론 이것은 곧 ‘아줌마적 태도’로 전화하게 된다. “돈이나 벌어오면서 그런 소리를 해!”

자본주의의 기본 원료가 봉사/접대인 한에서, ‘접대 없는 자본주의’란 말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만큼이나 모순형용이다. 혹은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아편 없는 아편’ 정도쯤 될까? 그렇다면, 접대의 한 유형이자 대표종(種)으로서의 성접대는 어떤가? 몇 달 전부터 한국에서는 새로운 성매매 방지법이 발효/적용 중인 듯한데, 좌파라면, (개량주의적/타협적 좌파가 아니라) 적어도 자본주의의 타파만이 인간적인 사회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근본주의적/비타협적 좌파라면 그러한 법안에 대해 반대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존권’을 주장하는 접대여성들(성노동자들)이나 포주들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 말이다. 

“우리가 레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즉 진심으로 빈민의 곤경을 동정하는 어떤 선한 신부를 동료 볼셰비키가 칭찬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레닌처럼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술에 취해 농민들에게서 부족한 자원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도 강탈하고 그들의 아내들을 강간하는 신부들이라고 논파했다. 그들은 신부가 객관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농민들로 하여금 분명히 자각하도록 한 반면, ‘선한’ 신부들을 그들의 통찰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지젝, <이라크>, 198쪽)

조금 번안해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타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연말 보너스를 챙겨주는) ‘선한’ 자본가들이 아니라 (보너스는커녕 월급까지도 떼먹는) ‘악독한/악랄한’ 자본가들이다(다행히도/불행히도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자본가들이야말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자각하도록”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사정은 성접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의 표본으로서의, 성의 무한 상품화이고 성노동자에 대한 악독한/악랄한 착취이다(군산에서인가 이리에서인가 시범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한 착취만이 전선(戰線)을 교란시키지 않고 분명하게 해줄 것이기에.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지젝은 금융 투기와 인도주의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소로스 같은 인물들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시장 폭리자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아이러니컬한 것은 헝가리 출신이자 칼 포퍼의 제자임을 자임하는 그 소로스가 하는 ‘인도주의적 활동’에 구 공산권 국가들의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을 위한” 재정지원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고, 러시아에서 출간된 지젝의 책들도, 전부는 아니지만, 이 소로스 펀드의 지원하에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지젝이 지난 미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된 사실에 전혀 유감스러워하지 않은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한 레닌주의적 정신에 충실할 때, 이라크 파병(연장)에 반대하는 것은 개량주의적 좌파들, 혹은 얼치기 좌파들의 행태이다(물론 반대하는 척할 수는 있다). 오히려 적극 찬성해야 마땅하다(그래야지 ‘자본주의와의 전쟁’도 빨리 끝장을 볼 게 아닌가?). 즉, 친미 수구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그건 성매매 방지 법안을 놓고서도 마찬가지이다. 포주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비록 전혀 다른 이유/계산에서이긴 하지만.(해방공간에서 제출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도 ‘반탁’에서 돌연 ‘친탁’으로 돌아선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적과의 동침’은 레닌주의이건 마오주의이건 간에 A급 좌파의 기본 ‘전술’이다(수단으로서의 모든 ‘전술’을 정당화하는 건 목적으로서의 ‘전략’이다).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량주의적 좌파(가령,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와 자유주의자(가령, 고종석) 간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가령, 고종석은 ‘마약 없는 마약’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지지하며, ‘섹스 없는 섹스’ 사이버-섹스를 지지할 법하다. 민노당도 마리화나와 사이버-섹스를 지지하나?). 적어도, 근본주의적 좌파나 우파(수구반동)와 비교해본다면 말이다.

이상에서 ‘서비스’ 문제에 대해 덧붙인 몇 마디는 내가 연말에 읽은 몇 개의 글을 따오기 위한 ‘서론’인바 이 또한 일종의 ‘서비스’이기도 하다. 서비스의 세 번째 사전적 정의란 “장사에서, 값을 깎아 주거나 덤을 붙여 줌”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덤으로서의 군말이었던 셈. 헤겔이 이미 지적한 바이지만, 모든 ‘서론’은 완전한 체계로서의 본론에 잉여적이란 의미에서 ‘군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상품의 제값의, 제대로 된 상품이라면 거기에 들러붙는 서비스 상품은 불필요한 잉여이다.(*그 서비스는 서비스하지 않는다.)  

0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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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10-01-0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게 올해 제가 내린 결론이네요. 나이가 드는 건지 상식과 원칙, 예의, 친절 이런 것에 더 공감이 갑니다.

로쟈 2010-01-01 10:12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유토피아도 상식과 원칙,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요. 대신에 친절은 한 것 같아요. 서비스 정신...

Joule 2010-01-0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세 받으신 걸로 그분들께 장안동식 풀코스 마사지 쿠폰 한 장씩 돌리시는 건 어때요?

로쟈 2010-01-03 14:14   좋아요 0 | URL
쿠폰도 있나 보군요. 글쎄요, 싫어하시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