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20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 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고른 건 '빅히스토리'다. 신시아 브라운과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책들이 번역돼 나온 게 계기인데, '지구사 시리즈'도 같은 범주로 묶었다...

 

 

 

책&(13년 7월호) 지구 역사의 퍼즐 맞추기

 

“빅히스토리를 공부하면서 왜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이런 공부를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정도였다. 만약 그랬다면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갖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빅히스토리에 예찬론자 빌 게이츠의 말이다. 역사학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한 빅히스토리(Big History)는 무엇이고 이 ‘거대사’는 어째서 흥미를 끄는가. 여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이야기와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빅히스토리의 세계로 잠시 떠나보려고 한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몇 권의 책을 길잡이삼아서 떠나는 여정이다. 


빅히스토리가 어떤 것인지 적당한 규모로 간명하게 소개하는 책은 신시아 브라운의 <빅히스토리>(웅진지식하우스, 2013)다. '빅뱅에서 현재에 이르는 과학적 창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도 과학적 작업의 한 부분인 이상, 인간이 밝혀낸 이야기를 ‘과학’과 ‘역사’로 따로 구분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배운 역사학에서는 흔히 문자의 발명과 그 기록을 기준으로 역사와 선사 시대를 구분한다. 자연스레 역사의 범위가 지난 5000여 년으로 한정되는데, 따지고 보면 이는 지구 일생의 단지 100만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빅히스토리는 역사의 범위를 기록된 문서에 얽매이지 않고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와 자료를 활용해 최대한 확장한다.


그렇게 역사의 범위가 빅뱅까지 확장되면 역사를 보는 관점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지구가 인간에게 미친 영향과 인간의 행동이 지구에 미친 영향”이 책의 숨어 있는 근본적인 주제라고 말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역사를 아주 큰 덩어리로 보고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 속에 포함하여 다루는 빅히스토리에서도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은 지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생물 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의 양적인 증가’다. 수세기에 걸쳐 인간은 인구와 기대수명을 늘리기 위해 놀라운 기술력을 발휘해왔고, 2000년에 이르러서는 61억의 인구에 도달했다. 이것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500억에서 1000억의 인간 가운데 6%-12%에 해당한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인구는 16억에서 61억으로 늘어났는데, 이러한 증가는 말 그대로 ‘지구에 대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시대에 이 실험이 의미를 공기와 삼림, 토양, 물, 방사능 등의 척도를 통해 기술한다. 빅히스토리적 시각이 갖는 특징이라 할 만하다.


빅히스토리에 대한 개관에 이어서 좀더 깊이 들어가고픈 독자라면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심산, 2013)를 선택할 수 있다. 먼저 소개된 <거대사>(서해문집, 2009)는 빅히스토리(거대사)를 아주 간략하고 쉽게 풀어쓴 책으로 <시간의 지도>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호주의 매콰리대학에서 처음으로 ‘빅히스토리’란 이름의 강좌를 개설해 그 용어를 널리 알린 장본인이다. 그는 역사학도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통합 이야기’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표현을 빌리면 ‘통섭의 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현재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데, 빅히스토리야말로 학생들에게 과학과 인문학이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대단히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한다.


빅뱅 이후 최초 30만년의 이야기로 ‘시간의 지도’를 펼쳐놓지만 저자 역시 20세기 일어난 변화가 인류 역사의 모은 이전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인간 사회는 20세기 초기부터 생물권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지속 가능한 한계를 넘어 살고 있다는 증거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게 빅히스토리의 공통적인 관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빅히스토리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약 40-50억 년쯤 뒤에는 태양이 죽어가기 시작할 것이고, 아주 먼 미래에는 우주가 다시금 평형상태로 접어들면서 황폐해질 것이다. 그러한 거시적 시야에서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빅히스토리는 우리를 좀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데이비드 크리스천과 신시아 브라운, 두 저자의 책과 함께 ‘빅히스토리’란 명칭이 국내에 소개됐지만, 아직 국내 학계에서는 ‘글로벌 히스토리’, 곧 ‘지구사’란 이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빅히스토리처럼 빅뱅까지 포함하여 다루지는 않지만, 지구를 하나의 역사단위로 하여 전 지구적 역사를 다뤄야 한다는 관점으로 출간된 '지구사연구소 총서’(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는 이미 국내 빅히스토리 분야에서 유명하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거대사>와 <시간의 지도>도 이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된 것이다. 이 새로운 세계사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논문 모음집으로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역사>(혜안, 2008)와 <지구사의 도전>(서해문집, 2010)이 출간돼 있다.

 

13.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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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3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탈리 샤롯의 <설계된 망각>(리더스북, 2013)을 읽고 쓴 것이다. 원제는 '낙관 편향'이지만, 망각이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임희택의 <망각의 즐거움>(한빛비즈, 2013)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주간경향(13. 07. 16) 인간은 왜 무의식적 낙관주의자일까

 

‘당신은 낙관주의자입니까?’란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그렇다고 답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관주의란 말이 낙관주의의 짝으로 항상 붙어 다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낙관적이고, 또 어떤 사람은 비관적이라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하지만 신경과학자 탈리 샤롯의 <설계된 망각>에 따르자면, 그러한 통념은 조정될 필요가 있다. ‘낙관 편향’이란 원제가 말해주는 건 낙관적 편향이 우리의 진화적 본성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핵심 논지는 간명하다. 첫째, 우리가 대부분 낙관적이라는 것.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뇌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 편향을 갖고 있다. 부정적인 결과를 염려할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긍정적인 결과를 따지며 보내는 시간보다 적고, 패배나 가슴앓이를 걱정할 때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 편향을 갖는가? 그건 물론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들은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재정계획도 더 잘 짜고, 더 성공한다.” 진화과정에서 낙관주의가 선택됐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가 우리의 생존 확률을 높여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곧 낙관 편향의 진화는 우리의 건강과 진보의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두 번째 주장이다.

뇌과학자들이 보기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가장 큰 특징은 전두엽의 발달에 있다. 기억력과 사고력 등을 관장하는 영역이다. 이 전두엽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서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미래를 내다보고, 자기를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자각 능력과 전망 능력은 생존에 이익이 되지만, 문제는 그 부작용이다. 우리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가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예견은 고통과 공포의 원인이지 결코 낙관의 근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과정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정신적 시간여행은 그릇된 믿음을 동반할 때만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은 긍정적 편향과 함께 발달해야 했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 종의 비범한 성취는 바로 의식적 전망과 낙관의 결합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낙관 편향이 무조건 우리에게 유리한 건 아니다. 낙관주의에도 적정선이 있으며 과격한 낙관주의는 과도한 음주처럼 우리에게 오히려 유해하다. 일례로 한 설문에서 낙관주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 것으로 생각합니까?’란 질문을 던졌다. 대개는 기대수명보다 2~3년쯤 더 길게 보았다. 이들을 이른바 ‘온건한 낙관주의자’라고 한다면 한편에는 20년쯤 과대평가한 ‘과격한 낙관주의자’도 있었다. 자기 수명을 과소평가한 ‘비관주의자’는 아주 소수였다.

이들의 행동은 어떤 차이를 보여줄까? 온건한 낙관주의자들은 더 오랜 시간 일했고, 더 나이가 든 뒤에 은퇴하길 원했으며, 더 많이 저축했고, 담배도 덜 피웠다. 반면에 과격한 낙관주의자들은 적게 일하고, 덜 저축하고, 담배는 더 많이 피웠다. 우리 앞의 장애물을 적당히 과소평가하는 온건한 낙관주의가 우리의 지배적 본성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낙관 편향은 인지적 착각이다. 우리의 낙관적 믿음은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에 대한 시각을 개조한다. 이런 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인 망각까지도 설계했다. 미래에 불운한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스트레스와 불안 수준을 낮추고 결과적으론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어서다.

반면 비관주의자들은 더 일찍 죽었다. 1000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50년에 걸쳐 추적 연구한 결과라나.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 혹은 착각이 심지어는 돈도 더 많이 벌게 한다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생각은 알고보면 전혀 특이할 게 없다. 우리의 본성이 그러할 따름이다.

 

13.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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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요즘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자연스레 그의 <페스트>를 다루게 됐다(언젠가 <최초의 인간>도 이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다). 번역본은 책세상판으로 읽었는데, 김화영 선생의 이 번역본은 민음사판으로 나와 있다. 부분적으로 같이 읽은 건 이휘영 선생의 번역이다(주인공의 이름을 '리외'로 옮긴다). 아마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번역본이지 않았을까 싶다. 고등학생 때 제일 처음 읽었던 건 주우 세계문학 시리즈의 <페스트>였다(돌이켜 보면 꽤 괜찮은 리스트의 전집이었다).

 

 

 

한겨레(13. 07. 08) 카뮈의 인간에 대한 ‘야심’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1947)는 애초에 한 가지 감옥살이를 다른 감옥살이로 표현해보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최대의 걸작’이란 평판을 얻은 이 소설에서 페스트로 인한 오랑 시민들의 ‘감옥살이’는 일차적으로 작가와 동시대인들이 겪은 전쟁의 은유였다. 거기서 더 나아가 카뮈는 그 은유를 삶의 일반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하고 싶어 했다. 페스트는 죽음이란 인간 조건 자체를 비유할 수도 있다. 그 죽음은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의사 리유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 곧 ‘익숙하지 않은 죽음’이다.

 

작품의 또다른 주요 인물인 타루와의 대화에서 리유는 자신이 의사라는 직업을 그냥 한번 해볼 만한 직업 같아서 택했다고 말한다. 소위 ‘추상적인’ 선택이었다. 의사가 된 이상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어떤 여자가 죽는 순간에 “안 돼!”라고 외치는 걸 듣는다. “그때 나는 절대로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이 죽음과의 싸움,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세계의 질서와의 싸움은 일시적인 승리를 포함할지라도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다. 다만 리유는 불의와 마찬가지로 그런 죽음과는 타협하지 않고자 한다. 그것이 시시포스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반항’이다.

 

리유와 몇몇 동료가 환자를 치유하고 페스트의 확산을 막기 위해 결사적으로 애쓰는 가운데서도 페스트는 막무가내로 도시를 점령하고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많은 희생자들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은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죄 없이 죽어가는 자의 오랜 고통 앞에서 주변은 신음과 흐느낌으로 채워진다. 페스트를 신이 내린 고통으로 수용하려는 파늘루 신부에게 리유는 격렬하게 외친다.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항의에 대한 신부의 대답은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라는 것이었다.

 

리유와 파늘루 신부와의 논쟁 장면은 흡사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편을 방불케 한다. 이반 카라마조프 역시 신의 섭리가 무고한 어린아이의 고통을 대가로 구현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이반의 논리를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과 대비하면서 여전히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사랑과 섭리의 편을 들고자 하지만 카뮈의 선택은 단연 파늘루 신부가 아닌 리유 쪽이다. 그렇더라도 어린아이의 무고한 고통과 신의 섭리에 대한 반항만을 주제로 삼았다면 <페스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아류작에 머물렀을 것이다.

 

 

카뮈는 타루와 리유의 대화 장면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간다. 타루가 자신의 관심사는 신이 없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라고 말하자, 리유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의식을 느끼며 자신의 관심은 그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응답한다. 그러자 타루는 “그럼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다만 내가 야심이 덜할 뿐이죠”라고 정리한다. 만약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타루의 ‘성인’은 리유에게 ‘인간’이 된다. 타루에게 성인이라고 불릴 만한 이가 리유에게는 그저 인간일 뿐이라면 리유가 인간에 대해 훨씬 더 높은 기대와 야심을 가진 셈이 된다. 리유를 작가적 분신으로 내세운 카뮈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13.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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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서 '3인 1책 수다'를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705133336&section=01). 이달의 커리로 다룬 건 김욱의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개마고원, 2012)다.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롭게 읽어서 저자의 <영남민국 잔혹사>(개마고원, 2007)도 주문해놓은 상태다. <법은 보는 법>(개마고원, 2009)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

 

 

 

프레시안(13. 07. 05) 전두환은 못 했지만, 박근혜는 할 수 있다!

 

이권우 :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의 부제는 '박근혜·문재인의 사과가 말해주는 것들'입니다. 정치가들이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문제, 그리고 그 과오를 용서하는 문제를 다룬 책이지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부분이지만 사실 대중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되지 않은 주제를 저자 김욱 교수가 한 번에 써내려갔습니다.

저널리즘과 단행본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시사적인 주제를 단기간에 보도하는 저널리즘과 달리, 단행본은 그 주제를 보다 깊이 있게 파고들지요. 일본에서는 이렇게 능동적이고 빠르게 단행본을 펴내는 게 일반적인데, 우리에겐 아직 좀 덜 익숙한 경향입니다.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반가운 책이었습니다. 두 분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현우 : 제목에서 받은 인상보단 책이 훨씬 재밌었고요. 정치적 사과라는 단일한 주제로 한 권 분량을 죽 밀고 가는 힘이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좋았는데, 생각만큼 책이 주목받진 못했다고 하니 아쉽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작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각각 사과했던 내용에서 촉발되어 책을 기획했다고 밝힙니다. 대선 전에 집필을 시작하여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쓴 책이고요. 한때 대선 이후 영화 <레 미제라블>이 '멘붕(멘탈 붕괴) 치유'라는 명목으로 흥행했었는데, 이 책 역시 결코 비관적이지 않은 결론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그런 치유 성격에 좀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용언 : 저도 2012년 대선에 대한 다른 각도의 결산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당시 5.16쿠데타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사과는 크게 보도가 되었는데, 민주당 분당에 관한 문재인 후보의 사과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것 같아요. 저 역시 문재인 후보의 사과가 어떤 면에서 의미 있는지 잘 이해 못한 상황에서 이 책을 읽었고, 민주당 분당이 영호남 갈등의 중요한 열쇳말이었음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사과의 시작을 일제 강점기 청산, 즉 이광수와 최남선 등의 친일 작가로부터 시작하며 방점을 찍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책 자체가 한국사회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박하게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의 장으로 존속되어왔음을 일별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근혜가 사과했다

이권우 :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사과부터 먼저 얘기해볼까요.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받았는데요. 연좌제로 옭아매는 시대도 아닌데 딸이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해야 하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죠. 어쨌든 박근혜 후보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했는데요.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이 헌법 가치를 훼손하고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본 분들과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 94쪽)

여기 대해 저자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일단 '5.16은 정통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에 대해 놀랐다며 그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요. 저자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현우 : 2012년 9월 24일이었죠. 박근혜 후보의 사과가 대대적으로 보도됐을 때 분통을 터뜨린 극우주의자 조갑제의 반응도 인용됐는데요.

"박정희가 만든 역사는 박정희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함께 만든 역사인데, 총체적으로 5.16과 10월 유신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박근혜 씨가 중대한 위기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의 위기다."(168쪽)

조갑제조차 "박근혜 씨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다. 표를 얻기 위한 정치쇼이다"(169쪽)라고 폄훼할 만큼, 상당히 파괴력이 컸던 정치적 사과였다는 거죠. 아무리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린 정략적인 사과라 하더라도 모든 정치적 사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속내와 무관하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전리품이다, 그 의미를 계속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정치적 사과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더 잘 기억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빚을 받으려면 빚을 줬다는 걸 기억해야 하잖아요? 저자의 결론처럼 궁극적으로 정치가 역사를 이길 수 없다고 할 때 그 역사의 승리를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방책이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언 : 저자의 실리적인 현실 분석과 평가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롭게, 배우는 심정으로 동감하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역사가 정치를 이기고야 말 것이라는, 지치지 않는 민중에 대한 낙관적인 결론은 아직까지 확신이 가질 않습니다. 결코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던, 정치적 변화가 아무런 현실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자'로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전두환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이현우 :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심신장애적 사과를 한 적은 있지요.(웃음)

김용언 : 네. 30년이 넘도록 그렇게 어떤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누릴 바만 즐기며 살고 있지요. 과연 역사가 정치를 이기는 것일까, 이 좁은 나라에서 지금껏 정치적·경제적 인맥이 촘촘하게 얽힌 채 서로의 이익 때문에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끈질긴 '노력'이 지속 중인데, 정말 거시적인 관점으로 조금씩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며 확신할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현우 : 2007년 당시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청문회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고, 유신은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완강한 태도가 2012년 바뀌었다는 거죠. 그게 저자 보기에는 나름대로 역사의 진보이자 역사의 힘을 보여준 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있지요. 역사가 지그재그로 좌충우돌할 순 있지만 궁극적으로 진보할 거라는 신뢰, 저자인 김욱 교수 역시 그 같은 신뢰를 이야기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100퍼센트 객관적인 신뢰라기보다는 주관적인 결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즉 역사가 승리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권우 : 박근혜가 박정희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거라고 다수가 생각했었고, 설령 사과한다 하더라도 진정성이 있겠냐 하는 반응이 많았는데 그런 예상이 틀렸던 겁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사과입니다. 102쪽에 보면 "민주주의 제도는 '모든' 정치인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그런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제도로 강제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정치인의 사과도 "'진성성 있는 마음과 말'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이 없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거죠.

당시 박근혜 후보가 사과 발언을 한 직후 부산시당에서 열린 대통령선거대책위 출범식에 참석해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춤으로써 진정성에 대한 공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저자는 그에 대해 "그녀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녀의 사과 언설이 그 자체로 역사의 전리품"이라고 못 박습니다. 일반적 관점과는 다르죠.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 같은 예도 있습니다. 2008년 쇠고기 협상에 반발하여 대대적인 촛불시위가 일어났을 때 "아무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현안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챙겨봤어야 했습니다. 저와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21쪽)라고 사과했지만, 2010년 5월에 이르면 "많은 억측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음에도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어느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30쪽)면서 적반하장의 무책임한 발언을 했죠. 이런 예들 때문에 정치적 사과에 대한 진정성이 늘 의심받으며 평가절하되긴 했습니다만.

이현우 : 보통 냉소적인 지식인이나 대중들은 정략적인 사과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받아들였죠. 하지만 저자는 그런 정치적 사과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걸로 우리가 계속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말대로, 정치인들이 자신의 사과를 번복하려 할 때 우리가 계속 상기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 필요한 거지요.

식민 통치에 대한 일본의 사과에 관련하여, 지금 자민당 정권에서는 과거의 공식적 사과 발언을 부정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사과의 의미를 다시 상기시키고 그 무게를 느끼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적 사과는 역사적 기억 투쟁의 대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5.16쿠데타가 명백히 불법적이었으며 정통성이 없다'고 인정한 사과의 내용을, 그 사과 발언을 한 당사자의 진위와 무관하게 우리가 끝까지 충실하게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권우 : 45쪽 마지막 단락을 함께 볼까요.

"정치적 사과는 결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역류할 수도 있다. 양심의 후퇴가 아니라 정치적 힘 관계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과를 받는 것보다 사과를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집단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서, 정치적 사과를 유효하게 하는 정치적 힘을 발휘해야 하는 거죠. 박근혜가 아버지의 정치적 업적이나 과오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했다면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사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아버지 세대에 이뤄진 결과를 업적으로 칭송했고, 역사적 판단이나 사법적 판단에 대해서도 일반적 상식과 어긋나는 발언을 계속 해왔지 않습니까. 결국 정치적 힘의 균형 관계 속에서, 또 대통령이 되기 위한 지지율 상승을 위해서 진정성과 관계없이 아버지에 대한 정치적 사과를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현우 :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48.4퍼센트의 사람들에게 그나마 전리품이라고 할 만한 게 박근혜의 사과라는 겁니다.

이권우 : 만일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이 40퍼센트 이하였다면 사과를 안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력균형이 상당히 팽팽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정치적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던 듯합니다.

 



문재인도 사과했다

이권우 : 저자는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두고 '뜻밖의 사과'라 불렀고, 문재인 후보의 경우엔 '은밀한 사과'라고 칭했습니다. 문재인 후보의 사과가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던 모양이지요?

이현우 : 2012년 9월 27일 일이었는데, 크게 보도되진 않았어요. 당시 문재인 후보가 광주에 내려가 노무현정부 시절의 분당사태에 대해 사과한 부분을 책에서 잠깐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관여한 일은 아니지만 그 일(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이 참여정부의 큰 과오였다고 생각합니다. 호남에 상처를 안겨주고 참여정부의 개혁역량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지금도 그 상처가 우리 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113~114쪽)

이 사과를 보도한 <한겨레> 신문 기사를 보더라도 "문재인, 호남 찾아 '힐링 행보'"라고 제목을 붙인 걸 보니, 사과의 정치적 의미가 당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에선 박근혜의 사과와 문재인의 사과를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다루고 있어요.

이권우 : 김욱 교수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은 "반(反) 민주당(분당)사태"라고 설명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문제 해결"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호남과 영남을 각각 지배하고 있는 상태"로서는 지역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새 출발한 당에 영남인들이 표를 찍어줘야"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법통"을 끊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민주당을 부정했다고 정리하지요. 동시에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함으로써 김대중 정권을 청산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호남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점도 있었고요.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통해 탄생한 참여정부가 호남의 민심을 배반했던 과거에 대해 문재인 후보가 뒤늦게 사과한 것입니다.

이현우 : 대통령이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섰던, 자신을 당선시켜준 정당과 과격하게 단절하고자 했던 시도는 굉장히 이례적이지요. 세계정치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법한 사건이었는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이 문재인 후보였습니다. 분명 그 분당사태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을 텐데, 바로 그 사람이 광주에 와서 그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한 겁니다. 지금 민주당 쪽에선 친노 세력과의 갈등 관계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요. 박근혜의 사과에 대한 조갑제의 반응과 달리, 문재인의 사과에 대해 친노 세력이 발끈하거나 흥분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실제로 친노들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문재인의 사과를 수없이 호남에 써오던 선거전략 정도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 사과는 마치 호남인들 귀에만 대고 속삭인 은밀한 귓속말처럼 들렸을 것이다.(200쪽)

 

이권우 : 친노 세력도 호남의 몰표 없이는 정권을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했기 때문에, 노무현의 호남 홀대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사과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저자는 전반적으로 참여정부 친노 세력들에 상당히 비판적인 날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용언 : 아마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범위 바깥이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합니다만, 그래도 지역감정을 다루는 이 부분이 다소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노무현의 지역감정 타파 노력이 "아마추어 정치"로 비춰질 수밖에 없던 거친 방식을 비판하고, 이런 식으로 호남으로부터 당연히 민주당지지 몰표가 나올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호남은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한다"(126쪽)고 주장하지요.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영남패권주의처럼, 한국에서 몇 십 년 동안 상처를 덧내왔던 호남 쪽 지역감정을 아예 인정하고 정치세력화하자는 주장일 텐데요. 박정희 정권 이후 차별을 수 십 년 동안 감내했던 호남 입장에선 당연한 주장일 수 있겠으나, 그 반대편인 영남의 기득권 제패에 대한 정밀한 분석 없이 호남의 정치세력화 얘기를 하는 건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현우 : 음, 저는 저자의 결론을 그렇게 보진 않았습니다만. 애초의 문제의식은 공감할 수 있었어요.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말입니다. 참여정부 당시의 해법이라는 게, 민주당을 지역정당으로 규정하고 소위 발전적으로 해체하려는 노력이었죠.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으로부터 빠져나오면 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정치적 힘을 잃을 거라는 계산이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했을 때 성공하기 힘든 시도였습니다. 그 패착이 참여정부 내내 정치적 행보의 발목을 잡게 됐죠.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연정 제안까지 하게 되는데….

모르겠어요. 그게 노무현식 정치의 특징이었을 수 있겠지요. 진정성은 갖고 있지만, 현실성은 없었습니다. 어떤 정치학자가 노무현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불렀는데, 실상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마키아벨리스트의 전형이라면 올 초 개봉했던 영화 <링컨>에서 묘사되는 링컨 대통령 같은 사람이겠죠. 비록 링컨을 롤 모델로 삼기도 했지만 노무현의 리더십은 서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걸 저자는 높이 평가하지요. 거기 대해 제대로 음미해야만 현재의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의 정치가 좀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갖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13.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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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47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신숙옥의 <남편의 서가>(북바이북, 2013)에 대한 서평을 제안받고 쓴 것이다. 며칠 전이 저자의 '남편'이었던 출판평론가 고(故) 최성일의 2주기였다. 남편과 아내의 책에 대해 차례로 서평을 쓴 건 나로선 처음 있는 일인데, 앞으로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기획회의(13. 07. 05) 독서일기를 가장한 곡진한 사부곡

 

‘출판평론가의 아내’ 신순옥이 쓴 『남편의 서가』에 관한 서평을 제안받고 놀라진 않았다. 일종의 서평집이라고 여겨서이고(저자는 ‘가족의 생활기이자 가벼운 독서에세이’로 분류한다), 또 나름대로 최성일과 인연이 없진 않다고 생각해서다. 특별할 건 없지만 최성일의 유고집 『한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작년 여름에 쓴 게 그 인연의 정체다. 남편과 아내의 책에 나란히 서평을 쓰는 모양새가 나름 공정하겠다는 판단을 앞질러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으면서 놀랐다. 이미 『한 권의 책』에 남편 대신 쓴 저자의 서문을 읽고 감동한 기억이 있지만,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이고(저자가 흉내 낸 남편의 육성, “옥아, 너 드디어 해냈구나! 봐라, 너도 되지 않느냐.”가 자화자찬이 아니다), 내가 평소에 잘 읽지 않는 어린이책에 관한 서평이 대다수라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상충한다. 그래도 당혹스러움을 지우고 이렇게 쓸 수 있게 된 것은 후반부에 실린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최성일의 대표작이라고 할 책이다. 남편을 보내고 ‘애도하는 여인’의 시점에서 써나간 글이 궁극에 도달해야 할 지점이자 넘어가야 할 지점이라고나 할까. 서평집에도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남편의 서가』에서는 바로 이 대목일 것이다.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넘어서 저자와 독자의 관계로 만나는 장면이다.

 

이 주목할만한 장면을 아내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오래 망설이다가 드디어 남편의 묵직한 책을 손에 들었다’는 식으로 쓰지 않고 “살다 보니 별일이다. 신문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 전화를 다 받았다”라며 적당히 눙치면서 시작하는 게 ‘신순옥 스타일’이다. 자신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지라 인터뷰를 완곡하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런 평범한 사람을 인터뷰하려고 한다는 기자의 말에 결국 두 손 들고 “졸지에 면접시험을 앞둔 수험생 신세”가 돼 옆구리에 낀 책이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이었다. 무지를 좀 덜어보려는 심사였다나.

 

처음에 다섯 권으로 나왔다가 저자가 병석에 있을 때 합본돼 나온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주간으로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처음 52회분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주 한 명의 사상가를 다룬다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내도 그런 의문을 품는다. “1주일 단위로 원고 쓸 대상을 정하고 그 사상가 관련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게 가능은 한 일일까.” 물론 각 사상가의 책을 짧은 시간에 다 읽고 쓰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의 역할을 도서관 사서에 빗댄 최성일은 “사서가 작성된 목록의 책을 읽거나 완벽하게 소화할 의무는 없다는 점에서 자신 역시 그렇다”고 했다. 출판평론가에겐 개별 저작의 세부보다는 전체의 윤곽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쩜 읽지도 않고 다 읽은 것처럼 이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어요!”라고 경탄했던 기억으로 남편의 글재주를 칭송한 후에 저자는 본격적으로 남편의 작업을 재평가한다. 그것은 ‘사상가=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이란 남편의 정의에서 출발해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남이 뭐라 하든 제 갈 길을 간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 곧 사상가이기도 했다는 결론에 이르는 여정이다.

 

남편의 모든 원고의 첫 독자였을 테지만 “책에 등장하는 사상가의 이름들이 참으로 생소하다”는 게 아내의 소감이다. 남편에게는 친숙했을 이름들인 걸 고려하면 부부 사이란 가깝고도 멀다. 하지만 그 거리는 공감과 비판을 위한 거리이기도 하다. 아내는 제임스 러브록, 팀 플래너리 등 남편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인물들을 책에 포함시킨 것은 ‘사상가 등용’에 실패한 게 아닌가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사상가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것에 암묵적인 동의가 있는 법”이라는 생각에서다. 게다가 연재 초기에는 정통 사상가를 우대하다가 뒤로 갈수록 그는 사상가의 범주를 널리 확장했다. 사실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사상가’ 목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로선 즐거운 일이지만, 분명 통상적인 건 아니다(러시아에서는 철학사 책에도 들어가 있지만). 그런 덕분에 『책으로 읽는 사상가들』은 저자 고유한 안목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책이 됐다.

 

남편에게 책은 어떤 존재였을까. 『한 권의 책』에서 최성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닉 혼비처럼 책이 재미있어서 읽는다. 그러나 책이 야구보다 재미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책은 고작해야 야구만큼 재미있다.” 『책으로 읽는 사상가들』에서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아내의 인용을 옮기자면 “내게 책은 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또 책은 아주 귀중하지도 매우 하찮지도 않다. 책을 향한 애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책이 정말 좋다고 드러내놓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게 남편의 생각이었다. 열렬한 독서가였지만 책에 대한 그의 애정은 뜨뜻미지근하다. 그런 태도는 독서운동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꼭 그렇게 해서까지 책을 읽힐 필요가 있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보다는 사회 전반적인 인식과 분위기가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쪽으로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책에 대한 뜨뜻미지근한 태도와 다르게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그의 평가는 호오가 분명했다. 그는 직구형 스타일이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강연을 두고 “이 정도의 내용을 꼭 외국인 연사를 초청해 들어야 하는가”라고 비판하고, 거꾸로 눈물샘을 자극한 책의 한 장면을 들이대면서 “콧등이 시큰해지지 않은 자와 상종하지 않기로 다짐”하기도 한다. 아내는 그것을 남편의 ‘순진성’이라고 적는다. 그리고 덧붙이길 자신은 ‘눈시울이 차가운 자’ 여서 남편이 언급한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런 무감동을 차마 발설하지는 못했다는 게 아내의 뒤늦은 고백이다. 차분하고 담담한 애도의 정서가 지배적인 책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한 대목이다.

 

남편에게는 출판사에서 보낸 책들이 주기적으로 배달됐는데 그 책들을 정리하면서 저자의 입에서는 울먹임이 새어나왔다고 한다. “이 책을 다 어쩌라고, 나에게 어쩌라고…” 『남편의 서가』가 그런 울먹임을 진정하는 모양새로 마무리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결국 남편이 남긴 장서는 나의 밥벌이가 돼주고, 아빠를 잃은 아이들의 상실감을 덜어주고 있다. 가족들에게 살 길을 책에서 찾으란 의미로, 그는 이 많은 장서를 남기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독서일기를 가장한 아내의 곡진한 사부곡이 주인이 없는 ‘남편의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다.

 

13.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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