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도울링의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월인, 2000)의 서문 읽기이다. 원서는 <제임슨, 알튀세르, 마르크스(Jameson, Althusser, Marx)>(코넬대학교출판부, 1984)이고, '<정치적 무의식> 입문(An Introduction to the Political Unconscious)'이 부제이다. 국역본은 그 부제를 제목으로 삼았다. 원저는 147쪽의 '가벼운' 책인데, 번역본은 하드카바에다가 저자의 사진까지 (표지뿐만 아니라) 서장을 장식하고 있어서 좀 격에 맞지 않는다(우리 같은 경우 회갑논총이나 정년퇴임기념논총 등에나 그런 사진을 집어넣는다). 자신의 책도 아니고 제임슨 '입문서'에 그런 치장을 한 걸 알면 저자도 좀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 싶다(독자로선 책값이 비싸지니까 유감스럽고).
"주제 넘는 일이지만, 이 책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이다."라고 서문의 첫문장이 시작할 때 내가 떠올리는 '주제 넘는 일'은 이러한 외형과 장정에 관련된 것이다. 말 그대로 '찍찍'읽어보고 치워야 할 입문서를 하드카바로 펴내는 것부터 불만스러운데, 번역이 그런 '하드함'을 전혀 받쳐주지 못하기에 더더욱 유감스러운 것이 이 <서설>이다. 과연 저자가 원하는 바대로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책을 읽는다는 게 단지 '뒷걸음질'에 불과한 건지 이 '서문'에 대한 브리핑을 읽고 판단해보시길(보통 서문은 '곁다리텍스트'에서 다루지만 제대로 된 서문이 아니어서 '브리핑'에 집어넣는다. '곁다리텍스트'도 격이 있어야 한다).
저자는 먼저 책의 용도와 의의에 대해서 규정한다. 이게 연구서나 비평서도 아니고 당대 마르크스주의 비평 혹은 거기서 제임슨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고찰도 아니라는 것. "다만 이 글은 <정치적 무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익히 들어왔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금까지 좌절을 맛보고 있는 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단순히 태생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한 권의 책에 관해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를 시도하려는 것일 뿐이다."(17쪽)
책은 그러니까 <정치적 무의식>에 대해서 '지끔까지 좌절을 맛보고 있는' 영어권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그럼에도 내가 읽은 도울링의 문체는 만연체여서 제임슨만큼이나 읽기 뻑뻑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한국어 독자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아직 <정치적 무의식>조차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해서 <서설>이 먼저 나오는 상황 자체는 코믹하다). <정치적 무의식>? '태생적으로 중요성을 지닌 한 권의 책'이다. '태생적으로'는 'seminally'의 번역인데, 직역하는 '씨눈이 될 만한'이란 뜻이다. 풍부한 열매를 거기서 기대할 수 있다는.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는 'the very demanding argument'의 번역인데, 여기서 'demanding'의 사전적 의미는 '벅찬'이란 뜻이다. 제임슨의 논의를 압축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일이 저자의 능력에 비해 벅찬 일일 수 있다는 겸양의 표현으로 읽힌다. 물론 '매우 부담스러운 논의'는 오역이 아니며 사실에 부합한다. 실제로 이 번역서를 완독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어서 저자는 왜 이런 류의 '안내서'(introduction)가 필요한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물론 복잡한 이유는 아니다. 아주 중요한 책이지만 그만큼 난해한 책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과연 어떤 책인가? 왜 중요한가? "실로, 이 책은 서로 다른 다음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하나에 근거하게 됨으로써 발생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은 "Indeed, the book could claim a seminal importance on either of two separate grounds:"
번역문은 우리말로도 비논리적이다. <정치적 무의식>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근거에서 각각 '배아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하나에 근거하게 됨으로써'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도'란 뜻이다. 그 두 가지 입장/근거란 무엇인가?
"그 두 가지 입장이란, 알튀세르 저작으로부터 비롯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부활을 영어로 된 문화적 연구물들에 확대하고자 한 최초의 지속적 시도로서, 그리고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이 경쟁적으로 전개한 여러 프로그램들을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속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독창적이고 강력한 시도로서의 입장 그것이다."
요컨대 (1)알튀세르적 마르크수즈의를 영어권 문화연구로 확장시키고자 한 시도로서, (2)데리다와 푸코, 들뢰즈 등의 경쟁적인 프로그램을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속에 포섭하고자 한 시도로서 <정치적 무의식>은 의의를 갖는다는 것. 거기에 "지금까지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필적할 만한 사람으로서 영어로 글쓰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제임슨이 유일하다."(18쪽)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워낙의 그의 책들이 난해하기 때문에("최근 그의 사상은 계속해서더 해결하기 어려워지고 복잡해졌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더욱 우회적이고 압축적인 것이 되고 있다")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제임슨이 어렵다는 단순한 사실, 혹은 영어로 저술하는 사람들에게 좀더 평이한 영어로 된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사실이 데리다와 라캉 같은 저술가들의 난해함에 대해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을 격분케 할는지 모른다. 그러한 저술가들에 대하여 항상 질문받게 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어로 저술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밝히고 말할 수 없는가?"(19쪽)
그러니까 데리다나 라캉의 난해함도 부족해서 제임슨까지 머리 아프게 하느냐란 불평이 나올 만하다는 것. "왜 그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쓰는 거야?"(버럭) 거기에 한술 더 뜨는 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평이한 한국어'로 옮겨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원문은 이렇다: "Why, to ask the question that always gets asked about such writers, can't he just come out and say what he means?"(10쪽)
번역문은 'to ask-'하는 삽입문을 목적을 가리키는 부정사구문으로, '질문(question)'를 '문제'로 오독함으로써 혼란을 자초했다. 다시 옮기면, "데리다나 라캉 같은 저자들에게 항상 던져지는 질문을 그에게도 묻자면, 제임슨은 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저자는 "데리다가 여기서 말하려는 게 뭐지?"라고 친구들이 물었을 때 설명하고자 애를 쓰면서 느꼈던 피로감을 되새기면서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의미에 대한 허위이론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자기가 의미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진술할 수 있다는 것이 데리다가 말하고 있었던 바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제임슨은 그 점을 직접 말하지 않았으며, 그리고...(이것들이 우리가 느꼈던 좌절이다.)"
그 '좌절감'을 그대로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번역문은 정서적인 '직역'에 가깝다. 마지막 문장의 주어가 '제임슨'이 아니라 '데리다'란 사실만 빼면. 원문은 이렇다: "What Derrida was saying, I later realized, was that you can come right out and say what you mean only if you've got a false theory of meanng, but even so, he never said that directly, and...(There are the frustrations one felt.)"(11쪽) 그리고 다시 옮기면, "내가 나중에 깨달은 바이지만,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의미에 대한 잘못된 이론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리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실상 데리다는 결코 직접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며, 게다가...(이런 것이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 것인가? "<그라마톨로지> 그리고 <정치적 무의식>에 똑같이 제기된 문제는 다름 아닌 법규로서의 문체 문제이다: 알리고자 애쓰고 있는 것을 말해줄tells 뿐만 아니라 보여주기도shows 하는 글쓰기 방식." 여기서 '법규로서의 문체'는 'style as enactment'의 번역인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 문구에서 'enactment'는 '법규'가 아니라 '연기(演技)' 혹은 '공연'이란 뜻이다. 메시지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보여주기도" 한다는 게 그런 '연기로서의 문체'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는 데리다의 경우 지시적/도구적 언어관에 근거하고 있는 '단순명쾌하게 말하기'에 대한 회의/의문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제임슨에게 있어서 법규(*연기)로서의 문체 문제는 이론과 실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 평이한 문체는, 모든 진실들이 미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불분명해야 할 어떤 필요성도 없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투명한 문체이다."(20쪽) 곧 '평이한 문체'에 대한 요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것.
"어떤 책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이루어내는 진보에는 기쁨보다 고통이 훨씬 많다고 제임슨 박사가 말했다. 그는 소설이나 미스터리 이야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지적 산문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에 관해서 18세기적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변증법적 충격에 의해 제임슨이 의도하는 바에는 그러한 종류의 고통, 즉 어떤 어려운 논의를 따라가고자 하는 경우 우리 모두가 느꼈던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21쪽)
'그러한 종류의 고통(that sort of pain)'에서 'that'이 강조돼 있어서(번역문에는 누락돼 있어서) 굵게 처리했다. 한데, 이런 번역문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어려운 논의를 따라가고자 하는 경우'에 느끼는 고통과 무관하다. '존슨 박사(Doctor Johnson)'가 난데없이 '제임슨 박사'로 오기돼 있어서 겪는 어리둥절함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존슨 박사'란 별명으로도 흔히 불리는 이는 영문학의 거장 새뮤얼 존슨(1709-1783)이다(국내에는 그의 풍자적 산문집 <라셀라스>(민음사, 2005)가 번역돼 있다. 번역/소개된 걸로 치면 '거장'이란 말이 무색하군). 잠시 소개를 옮겨오면, "1709년 영국의 중부 지방인 스태퍼드셔 리치필드에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퍼드의 펨브루크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중퇴했다. 1737년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런던으로 거처를 옮기고 <산사의 잡지>에 의회 기사를 써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잡지 <산책자>를 냈다. 풍자시 '런던', '욕망의 공허', 비극 <아이린> 등을 발표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1747년 방대한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영어사전>을 혼자 힘으로 팔 년 만에 완성시켜 사전편찬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문학상의 업적을 인정받아 이후 '존슨 박사(Dr. Johnson)'라 불렸다."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해인 1759년 <라셀라스>를 집필하고, 1765년에는 셰익스피어 전집의 편찬을 완성하여 출간했다. 이후 십여 년간 정치 논설문 등을 발표했다. 만년에는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하여 열 권의 <영국 시인전>을 펴낸 것으로 유명하다. 1784년 런던에서 숨을 거두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었다. 1979년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제임스 보즈웰은 그의 전기를 출판했다. 저술뿐 아니라 재치 있는 논객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셰익스피어 이후 영국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로, 1995년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지난 천 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저자로 선정하였다."
이 만한 인물을 '제임슨 박사'로 오기하는 건 무성의의 소치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런 불유쾌한 고통과 달리 제임슨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고통은 보다 고차적이다.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또 한 가지 종류의 고통, 즉 유일한 탈출구가 정치적-사회적 혁명에 있을 뿐인 하나의 악몽이 역사라고 생각하는 그런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 역시 제임슨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는 대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같은 안내서가 그 효과를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렇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문학형식으로서의 시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변증법적 충격은 해석을 함으로써 소멸되는 것이다." 원문은 "dialectical shock is, as Robert Frost said of poetry, what is lost in translation." 프로스트는 물론 '가지 않은 길'의 시인 프로스트를 말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란 번역하면 잃어버리는 것"이란 식으로 정의한 바 있다(그러니까 '해석'이 아니다. 왜 임의로 번역하는가?). 도울링이 얘기하는 것은 만약 읽기 어려운 제임슨을 읽기 편하게 옮겨놓으면 고통이 경감되는 만큼 그 효과도 상실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저자의 당부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이 안내서를 통해서 <정치적 무의식>에 다가온 독자는 보다 어려운 제임슨의 논의를 있는 그대로 계속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곧, 이 <서설>을 읽고 나서, 혹은 이 <서설>과 함께 반드시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야 한다는 것. 결코 안내서가 원저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읽는 것은 원저에 대한 배반이 될 것이다. 배신, 배반...
이제까지 읽은 것은 8쪽 짜리 서문의 절반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뒤뚱거리면서 나머지 절반쯤을 더 읽어가야 '서문'을 다 읽게 된다. 그런 수고를 감내할 용의는 있지만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어서 '브리핑'은 이만 줄인다. 책을 덮으려다가 잠시 훑어본 '옮긴이 해설'(저자 서문보다도 앞에 위치해 있다).
"여러 문헌의 도움을 받아 도울링의 저술 의도에 부합하는 번역이 되고자 했으나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역자에게도 이 번역은 'demanding work'였던 것.
"이 번역서를 읽을 때, 문맥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는 짜증스러움을 누구나 가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번역의 난삽함도 난삽함이지만 당혹스러울 정도의 (:)과 (;)의 사용은 독서의 매끄러움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다." -->역자는 '귀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본 의도를 살리기 위해 특별히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원문의 문맥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진 않았다?
"곳곳에 산재하고 있을 오역은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며 관심 있는 선학과 동학의 질정으로 꾸준히 바로잡아 걸 것을 약속한다." -->2000년 가을에 책이 나왔지만 그간에 '관심 있는 선학과 동학의 질정'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짐작엔 이 책을 구입한 사람도 드물겠지만 완독한 사람은 아예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정치적 무의식>을 완독한다면 모를까). 아직 초판도 다 나가지 않은 듯하니 '꾸준히 바로잡는' 일은 언제 가능할는지...
07. 0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