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서부터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도 그 흔한 어학연수나 워킹 홀리데이 등에 대한 열망에 적었다. 아니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한때 yBa(Young British Artists)에 푹 빠졌을 때는 뱅크시의 Graffiti를 찾아 런던 거리를 헤메고, Tate Modern에서 데미안 허스트의 전시회를 보는 상상을 한적은 있었지만, 실행에 옮길 만큼의 절실함은 없었다. 


새로운 것과 낯선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이 적었던 걸까?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 없는 삶에 대해 불만도 없었고 나름 만족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나니, 나의 정주 관성은 단순히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 부족이나 부재가 아닌 외부 세계에 대한 던져지는 두려움의 발로였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은 집이라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공간을 벗어나 불확실성에 내 몸을 던지는 행위다. 나의 정주 관성은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존의 세계관/가치관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수동성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부도 명예도 없이 우울한 심정으로 4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던 연암 박지원에게 중원대륙을 유람할 기회가 찾아왔다.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연암을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5월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오는 장장 6개월 걸친 대장정, 열하일기의 시작이다.  


여전히 오랑캐 '청'이 미개하고 후진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던 박지원이었지만, 먼저 청에 가본 적이 있는 '궁핍한 벗' 박제가와 홍대용에게 전해 들은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드디어 압록강을 도강하는 배를 탈 때, 연암이 수역 에게 출사표와도 같은 화두를 던진다. 


"자네 길을 아는가(君知道乎)"

 수역 홍명복에게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씀을 이르시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라는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다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법이지.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의 한 획을 변증하면서 선 하나를 가지고 가르쳤다네. 그런데도 그 미세한 부분을 다 변증하지 못해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라고 말했어. 이건 바로, 부처가 말한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그 경지일세.러므로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옛날 장자산 같은 사람이라야 될 걸." - p 52 - 


연암이 말한 길이란 무엇일까? 우리(조선)의 관습, 철학, 가치관과 저들(청)에 대헤 가지고 있는 편견을 뛰어넘는 자유로움과 새로움의 출발점 아닐까?


도강을 하고 봉황산을 지날 때 우뚝 솟아난 산의 형세에 잠시 넋을 놓기도 했으나, 허공에 떠 있는 빛과 기운은 한양의 도봉산이나 삼각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되놈들이나 사는 시골인 줄 알았던 마을의 북적임과 화려함에 연암은 주눅이 든다. 기존의 청에 대한 편견에 금이 간 것이다.  

등마루는 훤칠하고 대문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길가로 먹줄을 친 듯하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다. 사람용 수레들이 길을 마구 지난다. 벌여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도자기다. 그 모양새가 어디로 보나 시골티라곤 조금도 없다. 예전에 나의 벗 홍대용에게 중국 문물의 거대한 규모와 세밀한 수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중국 동쪽 끝 촌구석도 이 정돈데 도회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니 기가 팍 죽는다. 돌아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후끈거린다. 순간 나는 통렬히 반성한다.- p 73 -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이 그치면 세계 최고의 여행기를 쓴 연암이 아니다. 


장복을 돌아보면 물었다.

"네가 만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

"중국은 되놈 나라잖아요. 소인을 싫습니다요."

"맙소사!"

때마침 소경 하나가 지나간다. 어깨에는 비단 주머니를 둘러메고 손으로는 월금을 뜯는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저이야말로 평등안(平等眼)을 가진 것 아니겠느냐."- p 73 -  


실제 눈으로 보니 더 없이 화려하고 조선을 압도하는 선진화된 청나라에 시기하는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던 연암이지만, 이 또한 청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을 뿐, 청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는 말은 장복이에게 우화적으로 말하며 흔들리는 마음에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한다. 


여행을 떠난 지 보름 가까이 된 7월 8일 연암을 요동 벌판의 지평선에 압도되어 '호곡장론'이라는

빼어난 사유와 이에 걸맞는 명문을 탄생시킨다. 그 동안 조선 땅에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끝 없는 지평선에 압도당한 연암은 실존에 대한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벅찬 감동에 빠져든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디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중략)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저도 의당 선생과 함께 한번 통곡을 해야 되겠습니다그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건 갓난아이에게 물어봐야 될 것이네. 그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그 애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으로는 눈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으 보니 그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 같은 기쁨이 늙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이치가 전혀 없이 즐겁게 웃기만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도리어 분노하고 한스러워하는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끝없이 울부짖기만 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삶이란 성인이든 우매한 백성이든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온갖 근심 걱정을 두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 울음을 터뜨려서 자기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의 본래 정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오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임없는 소리를 본 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 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의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이."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헤 한 점도 산도 없는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 p 136 - 


요동을 광활한 평원을 본 연암은,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태초의 시공간에 들어선 경이로움을 느끼며, 반대급부로 좁디 좁은 조선 땅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 바탕 울어볼만하다는 심정의 표현은 그런 존재론적 사자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백탑시파의 수장으로 한양에서 박제가와 홍대용, 이덕무 등과 술과 시로 교류한 이곳의 연암과 도강을 거쳐 연경 그리고 다시 건륭제가 있는 열하를 왕복하며 청의 다양한 도시와 사람과 교류한  저곳의 연암은 몸뚱이는 동일한 사람이지만, 그 내면은 천양지차 다른 사람이다. 이곳의 연암이 변방에 갇힌, 편견에 사로잡힌 좁은 의미의 연암이었다면, 길을 알고 길을 건너 저곳을 다녀온 연암을 (물리적/심리적인) 변방을 벗어나, 다시 태어난 연암인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어라"는 임제록의 구절처럼 기존 가치관과 세계관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 올 초에 읽은 열하일기를 오랜만에 다시 떠올린 건 EBS가 기획한 '김연수의 열하일기'라는 다큐를 보고 나서다. 연암이 거쳐 갔던 도시들의 발자취를 따라 소설가 김연수가 여행하며,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고 연암을 흔적을 찾는 서사를 지닌 근사한 여행 다큐다. 말(馬)이 아니더라도 말의 가장 유사한 대체재인 모터사이클를 타고 여행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있지만,여진히 대중적이지 않은 소설가와 누구나 알지만 읽어본 이 거의 없을 고전의 콜라보를 현실화 시켰다는 것만으로도 EBS에 큰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래는 다큐 홍보글인 듯한 EBS 블로그

http://ebsstory.blog.me/2208450941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겨레신문 북섹션 신간 소개에서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도발적인 제목이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책 편집자의 작전이 성공할 걸까? 하지만 책소개란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거부감부터 들었다.

벌써 16년이 지났지만(무려 20세기 이야기다!) 먼 이국 땅의 나조차도 사건이 벌어진 장소만 듣고도 단번에 알아챈 사건. 바로 학교 총기사건의 전범으로 불리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이다. 

괴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 '볼링 포 콜럼바인'과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 두 편으로 영화화 되었을 만큼 미국에서도 최악의 살인 사건으로 각인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주범의 엄마가 쓴 책이라고? '가해자의 엄마가 아니라 살인자의 엄마구만,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지'라는 괜한 불쾌감이 일어 책 소개를 끝까지 읽지 않고 신문을 덮었다.

 

다시 이 책을 접하게 된 건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다. 이동진 님이 소개하는 책속의 아래 글을 듣고 이전의 불쾌감은 애잔함으로 탈바꿈했다. 자식을 얼른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엄마의 심정이란. 사실 생각만 해도 너무 비통해 상상이 되질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수가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던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리틀턴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가 안전하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 아이가 남을 더 해치기 전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했어요." 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사실이고, 우리 아이가 살아남아서 재판을 받고 사형 판결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두 번 아이를 잃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전까지 해본 적이 없는 간곡한 기도를 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달라고요. 그러면 적어도 애가 죽고 싶었다는 것을 알 테고, 경찰의 총에 맞고 죽었다면 결코 답을 알 수 없을 의문들이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기도한 것을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내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요."- p 18 -


동서양을 막론해서 내면의 고통을 원동력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흔하다. 하지만 이 책을 저자 수 클리볼드처럼 내면의 고통과 더불어 외부의 고통(타인의 비난)이란 이중고를 감수하고, 고통을 꾹꾹 눌러담아 쓴 글은 글이라기 보다는 투쟁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을 거다.  

이 책은 단지 아들 살인에 대한 옹호나 변명이 아닌, 자신이 겪은 고통과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체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하는 몸부림의 흔적이다. 특히 여전히 취약한(우리나라는 말 할 것도 없지만) 정신 건강에 대한 인식 확대와 연구를 촉구하는 책이다. 물론 비록 남들에게는 추악한 살인자에 불과하지만 자신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리운 아들 딜런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나니 당장 네 살짜리 딸 육아에 대한 걱정부터 든다. 

 

 

 

"부모가 그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세상에서 나만큼 더 잘 아는 부모가 없을 진실이 있다. 바로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거다. 나는 딜런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래도 딜런을 지키지 못했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살해된 열 세명도, 그 밖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딜런이 심리적으로 악화되어가는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만약 내가 제대로 보았다면 딜런이나 딜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p 25 -


결국은 줄 수 있는 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 밖에 없는 뻔한 결론에 이르니 슬프기도 하다. 


G.K 체스터튼은 "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적어도 자기 입장에서는 온 세상을 없앤 것이므로."라고 썼다.-p 16-

처음 만났을 때, 수가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던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리틀턴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가 안전하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 아이가 남을 더 해치기 전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했어요." 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사실이고, 우리 아이가 살아남아서 재판을 받고 사형 판결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두 번 아이를 잃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전까지 해본 적이 없는 간곡한 기도를 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달라고요. 그러면 적어도 애가 죽고 싶었다는 것을 알 테고, 경찰의 총에 맞고 죽었다면 결코 답을 알 수 없을 의문들이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기도한 것을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내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요.- p 18 -

수 클리볼드의 책은 딜런에서 바치는 책이며 변명에 빠지지 않으면서 정신 건강에 대한 인식 확대와 연구를 촉구하는 책이다. - p 20 -

책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려고 쓴, 카타르시스 효과를 노린 기록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고통을 동력으로 삼아 세상에서 그녀 자신이나 그녀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인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을 줄어들게 하려는 기록, 즉 수용의 이야기이자 투쟁의 이야기일 뿐이다. - p 21 -

부모가 그 무엇보다도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세상에서 나만큼 더 잘 아는 부모가 없을 진실이 있다. 바로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거다. 나는 딜런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래도 딜런을 지키지 못했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살해된 열 세명도, 그 밖에 상처입고 고통 받은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딜런이 심리적으로 악화되어가는 징후를 파악하지 못했고, 만약 내가 제대로 보았다면 딜런이나 딜런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을까.- p 25 -

자살 시도를 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연구자들도 이 미스터리를 엿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자살 경향을 감지한 친구나 가족들의 염려를 가라앉하기 위해서 일부로 이런 미래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이 자해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가다가도, 그 사람이 크루즈 여행을 예약했다면 걱정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 p 49 -

이 극악모두한 참극의 배후에 있는 불편한 진실은, "좋은 가정"에서 걱정없이 자란 수줍음 많고 호감 가는 젊은이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 p 105-

가족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면,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안도감은 거짓일 것이다. - P 105 -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야. 슬퍼하고 있잖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의 정치학자 도미니크 모이시는 <감정의 지정학>이라는 책에서 20세기가 이데올로기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정체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글로벌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이 정체성이 불안정해지고 감정이 쉽게 동요되는 상황에 주목한다. 그는 대륙에 따라 공유되는 감정의 색깔을 3등분하여 지정학적으로 분석한다. 두려움에 젖어 있는 서양, 굴욕감에 시달리는 이슬람, 희망에 부푼 아시아라고 지구촌의 정황을 도식화하면서 세 가지 감정의 본질을 대비시킨다.-p 31-

여기에서 수치심은 본인의 잘못이나 결함에 대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면서서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이고, 모욕감은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화가 나는 감정으로 대비되고 있다.-p 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6월자 녹색평론을 읽다가 두 번째 꼭지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녹색당 하승수 공동운영위원장의 '정치 혁명,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이다.

 

선거제도를 현재의 혼합형 다수제에서 혼합형 비례제(정당명부식 비례제)로 바꾸자는 게 이 글의 고갱이다.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군소정당의 원내 진입을 가능케 하고,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바꾸는 합법적인 정치 혁명을 이루자는 것이다.

 

사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제도의 필요성은 예전부터 여러 진보 성향의 매체에서부터 (친구따라 청강했던) 대학시절 정치학 수업에서도 여러 차례 들어온지라 필요성은 늘 공감했지만, 오랫동안 굳건히 유지돼 온 양당 체제 하의 정치 구조를 생각하면, 국회 제적의원 수 3분의 2가 찬성해야 가능한 선거제 헌법 개정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 왔다. 1881년 벨기에, 1906년 핀란드, 1907년 스웨덴이 혼합형 비례제를 도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몽상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글을 보니 우리나라처럼 양당 체제의 정치 구조 하에 혼합형 다수제를 운영하다 근래 혼합형 비례제로 개정을 한 나라가 있다. 바로 뉴질랜드다. 뉴질랜드는 1993년 실시한 국민투표를 통해 지역구 소선거구제(혼합형 다수제)에서 독일과 유사한 혼합형 비례제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기존의 노동당과 국민당의 양당 체제에서 녹색당, 마오리당(원주민으로만 구성된 정당도 있다!) 등 군소정당이 원내 진입하는데 성공했고(14년 총선에 7개 정당 원내진입), 정치 의사 결정 시스템에 활력이 생겼다고.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정당투표 1표, 지역구 투표 1표를 행사한다. 다만 우리는 투표용지 2장(지역구 1장, 정당 1장)을 받지만, 뉴질랜드는 하나의 투표용지로 정당과 지역구에 각각 투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투표 용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구글링 해보니 투표용지가 나온다.

요렇게 생겼다.(왼쪽은 정당투표, 오른쪽은 지역구 후보 투표다. 그만큼 정당투표가 중요하다는 뜻) 

 

[뉴질랜드 투표 용지]

 

뉴질랜드는 기득권 양당이 국회의석 대부분을 차지한 상태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이뤄냈다.비결이 뭘까? 비결은 시민단체, 소수정당, 그리고 기득권 양당 내부의 양심적 정치인 등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선거제도개혁시민연합(ERC)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져서 혼합형 비례제 도입 운동을 꾸준히 해왔고 노동조합과 언론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뭔가 희망이 보였다. 1881년 아니고 1993년이지 않은가! 그래서 20대 총선 결과를 바탕으로 혼합형 비례제 도입을 가정 하에 정당 별 득표 수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아래는 현 선거제도인 혼합형 다수제로 치뤄진 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다.(데이터는 선관위 자료 참조해 만듬) 20대 국회의원 수는 지역구 247석, 비례대표 53석, 총 300석이다. 지역구 비중이 너무 크고, 정당에 투표하는 비례대표 의석수가 너무 적다 보니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과 비례대표(정당) 득표율이 실제 정당별 의석 비중과 비교해 큰 차이가 난다. 선거 결과에 대한 유권자의 민심이 정확하게 반영되지 않고, 사표가 발생하고 마는 구조다. 현 혼합형 다수제가 사이비 비례대표제라 비난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 기득권 정당인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양당은 지역구 득표율/비례대표 득표율 대비 실제 차지한 의석수 비중이 높은 반면, 그 외 정당의 의석수는 초라하기만 하다. 심지어 국민의당, 정의당을 제외한 나머지 군소정당은 1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

 

반면 혼합형 비례제는 지역구의 후보들이 얻은 표를 계산해서 지역구 당선자를 정한다. 그리고 각 정당이 득표율에 따라 배분받는 의석 숫자에서 지역구 당선자는 먼저 확정이 되고, 나머지 당선자는 각 정당이 작성한 비례대표 후보자 명부의 순서대로 확정한다. 뉴질랜드의 전체 의석은 121석.(뭔가 적당해 보인다) 이중 지역구는 71석, 비례대표는 50석이다.

예를 들어 국민당이 정당투표에서 50%의 지지를 받았다고 가정하면, 국민당의 전체 국회의원 의석수는 전체 의석수의 절반인 대략 60석이 된다. 그 중 지역구 당선자가 40명이 나왔다고 치면, 20명이 비례대표 후보 명부에 올라 있는 순서대로 국회의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정당투표가 정당 의석수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해 간혹 정당 득표율로 인한 의석수보다 지역구 당선자수가 많아 '초과 의석'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도 인정이 된다.(정당득표율로 전체의석수가 10석이 되었지만, 지역구 당선자수가 12석이 나오면 최종 의석수는 12석으로 인정) 

 

그럼 혼합형 비례제로 20대 총선을 치루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현재 우리나라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 허들은 3%다. 하지만 이번 시뮬레이션에서는 네덜란드의 0.67%로 가정해 보았다.(녹색당의 원내진입 목표로 한 건 아니다) 

 

[ 20대 국회의원 선거 연동형 비례 대표제 도입 시 의석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내 진입을 이룬 정당이 기존 4개에서 기독자유당(무려 9석--;), 민주당(짝퉁 민주당이 이렇게 많은 득표를 한 걸 이번에야 알았다), 녹색당(3석/ 황윤, 이계삼, 김주온 당선!) 3개 더 늘었다. 정당 득표율 대비 과도한(?) 지역구 당선자를 낸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의석수가 줄어 들고, 너무 많은 지역구 당선자 덕에 초과 의석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무려 47석, 향후 선거제도 개혁 시에는 지역구 의석수 하향 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지역구 당선자 대비 높은 비례대표 득표율을 보인 국민의당은 무려 81석을 차지하게 된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선전하면서 20대 국회 개원 전부터 3당 체제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그건 간판만 새로운 정치 세력의 국회 입성에 따른 변화의 열망에 대한 기대감일 것이다.  만약 3당이 아니라 7개 정당이 입성하면 어떨까?그 만큼 더 다양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지 않을까? 국회에서 황윤의 동물권, 이계삼의 행복한 교육권, 김주온의 기본소득이 논의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에 보다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모든 투표가 계산되게 하자!(Make Your Vote Count!)' 뉴질랜드의 선거제도개혁시민연합의 운동 슬로건이다. 혼합형 비례제가 도입되는 그 날을 기대하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ㅇㅇ 2017-01-07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거구제 개편때문에 검색해 봤는데 좋은 글이네요.. 개인적으로 국회의원 숫자를 늘려서 지역구:비례 2:1 비율정도로 맞춘 다음에 257+123 총 380의 국회의원 숫자에 뉴질랜드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하면 어떨가 궁금하네요..

에로틱번뇌보이 2017-01-26 11:34   좋아요 0 | URL
네 좋게 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저도 뉴질랜드 식 정당명부제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진짜 작가들의 책이 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