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씌어졌다’며 여러 대상자를 죽 나열하는 서문이 나온다. 그 대상은 과로에 지쳐 있는, 혹은 노동현장의 부자유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노동자, 자신의 밭이 공장화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농민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빠진 대상자 중 한 명을 추가하고 싶다. 바로 우리의 당선인 이명박씨. 7%의 경제 성장이란 고전적 망령에 집착하고 있는 그. 이 책의 제목은 고스란히 그의 천박하고 철 지난 경제 성장론에 대한 반기다. 처음에는 책 제목 때문에 이번 대통령 선거 이후에 맞춰서 나온 책이라 생각했는데 발행 시기를 보니 2002년이다. 2002년에 발행된 책이라고 하기엔 그 소재와 내용이 너무 시의적절하다. 특히나 마지막 부록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를 보고서는 혀를 내둘렀다.(이경숙씨도 추가요)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이라 가볍고 투박해 읽기에도 무난했다. 특히나 그 적절한 분량이란.  





  

 

 

 

 

 

 

 

 

 

  

지난 수십 년 간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과 피해를 고스란히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우리지만 현재까지도 우리는 ‘경제성장’이란 망령에서 벋어나지 못했다. 파이가 커지면 그 조각도 커진다는 거짓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면서도 나 자신은 예외일 것이라는 신화에 허덕인다. 저자인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대로 그는 새로운 것을 독자들에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그 것을 공통상식으로 변화되길 기대할 뿐이다.



 저자의 언어 중 인상 깊은 것 중 하나가 바로 ‘타이타닉 현실주의’다. 우리는 자연 파괴와 그로 인한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등의 자연 재해 등에 대한 학자들의 경고를 매스컴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어, 또 그 소리!’라며 흘려  듣는다. 이 같은 현실을 저자는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타이타닉호에 비유한다. 우리는 지구의 멸망이라는 빙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마침내 빙산에 부딪힐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진하는 행위를 멈추지 못하고 여전히 자연 파괴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엔진을 멈추는 행위를 현실주의라고 부른다. 흔히 우리는 삼림보호, 반전, 비핵 등을 현실을 간과한 이상주의자의 수사라고 치부하지만 사실 그들의 의식과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들과 산을 간직한 시골의 풍경을 보고 발전이 덜 된 지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발전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제 모습을 잃고 수세기에 걸쳐 우리만의 전통문화가 사라진, 콘크리트에 덩어리의 집합체를 과연 발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경제성장, 경제 발전은 하나의 자연스런 현상(누구나 바라는)이 아닌 이데올로기란 말이 옳다. 지배세력의 힘의 의해 주입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빈곤의 근대화라는 말은 그래서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이다. 빈곤은 근대화와 뗄려야 뗄 수 없는 종속변수다.



 빈곤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빈곤이다. 이는 자급자족의 사회에 존재하던 빈곤이다. 이들 사회에서는 필요한 만큼만 자연에서 얻고 그 만큼 소비했기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 두 번째는 세계은행에서 말하는 ‘절대빈곤’이다. 이는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 가난해 시달리는 빈곤이다. 지금의 아프리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세 번째가 부자의 전제가 되어 있는 빈곤이다. 흔히 말하는 상대적인 빈곤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우리 사회를 떠오르면 이해가 쉽다. 경제발전이란 바로 이 세 가지 빈곤 가운데 첫 번째, 두번째를 세 번째로 고쳐 만드는 과정이다. 백년 전에는 자급자족의 생활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상당히 많았지만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南’의 나라들은 자급자족 사회에 다수 존재했던 ‘北’의 여러 나라들을 ‘경제 발전’이라는 강제적인 이데올로기(이는 식민지 주의 → 제국주의 → 경제발전론 → 세계화 라는 허울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를 이용해 ‘北 ’의 나라들을 착취하고 자연 파괴를 일삼았다. 수십 년 간 꾸준히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나라만 봐도 상대빈곤의 수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먹고 사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를 위협한다. 
 

 저자는 이러한 경제 발전의 망령을 걷어내고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을 이루어 나가자고 단언한다. 그 동안의 성장을 멈추고 줄이는 발전을 하자고 공언한다. 빙산을 향해 질주하는 경제성장을 부정하고 경제 이외의 가치, 이외의 활동, 시장 이외의 모든 즐거움, 행동, 문화, 그런 것을 발전시켜 진짜 행복을 추구하자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진짜 ’현실주의‘인 것이다. 현재의 상식이 비상식이 되는 사회. 현재의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사회. 그것 역시 내가 바라는 사회이자 지구에게 이로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경제 성장이 안되도 우리는 풍요로울 수 있다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일 것이다.  가짜 '현실주의'를 유난히도 강조하는 새로운 정부의 구성원들에게 정중히 한 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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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치 : 자기의 약점, 잘못 또는 무가치함이 남들 앞에 탄로되었다고 생각할 때 일어나는 감정
사실 '로쟈'라는 이름은 나에겐 '수치'라는 단어로 연상된다. 로쟈를 실제로 만나 모욕을 당했냐고? 물론 아니다. 그의 박학다식한 글을 접한 후 스스로의 무식함에 한 동안 치를 떨었으니 사전적 의미의 '수치'를 제대로 경험한 셈이다. 

로쟈의 글을 처음 접한 건 어느 신문에 인문학에 대한 기사에 소개된 다음 카페 '비평고원'였을 게다. 얕은 지식의 소유자지만 누구보다 인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나로써는 새로운 놀이터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놀이터. 미끄럼틀, 그네만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무서워 탈 엄두도 못내는 자이로드롭, 자이로스윙 등으로 넘쳐났다. 

니체, 헤겔은 그렇다치자.(물론 이 유망한 철학자의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러시아 문학 번역비평은 뭐고 지젝은 또 뭔가. 얕은 지식을 꾹꾹 누르며 버텨 봤지만 어느 순간 희박한 공기로 둘러쌓여진 그들만의 공간인 '비평고원'은 내 놀이터로써는 부적합해 보였다. 물론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놀이터에서 나는 크리스토프 하인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만나게 되었고, 러시아 문학에 대한 곁다리 지식도 습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쟈의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하기 어려운 문체에 나는 수치감을 느꼈으며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비평고원에 더 이상 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오랜만에 접한 로쟈. 내가 알던 로쟈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책 속에는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었던(?)  니체, 헤겔, 지젝, 러시아 문학비평도 있었지만 나의 관심사인 김훈, 김규항도 있었고 심지어 김기덕(!)도 존재했다. 비평고원은 그렇다 쳐도 그의 알라딘 서재는 충분히 내 놀이터가 될 가능성이 보였다. '수치의 감정'은 책을 읽는 순간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전에 사두었던 지젝의 책을 다시 펼쳐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물론 이러한 '열망의 감정'이 얼마나 오래 갈진 의문이지만 로쟈는 이미 내 마음속의 또 '한명의 Mento'로 자리잡았다. 그의 넘쳐나는 지식의 양과 끊임없는 노력에 자연스레 무릎이 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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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품절


고전을 읽는 것은 '그들의 문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 에 '우리의 문화'를 견주는 것이며, '우리의 문화'속에 아직 숨쉬고 있는 그들의 '살아 있는 유산'을 인지하는 것이다.-27쪽

자기 자식(프롤레스)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을 '프롤레타리우스 proletarius'라고 불렀다 한다.-29쪽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하 저항행위다." - 다이엘 페나크 - ,[소설처럼]-30쪽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32쪽

"나는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 - 황지우 --41쪽

인간이라는 종의 사회주의적 종자 개량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45쪽

그 기다림 속에서 '완전한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는 점차 고도 Godot 를 닮아갔고, 소비에트 사회는 점차 부조리한 사회로 변모해갔다. 그러는 사이에 간혹 '수용소군도'의 생활이 폭로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요구가 제기됐다. 그것이 몰락의 징후였던가? 아니면 값싸고 통속적인 인간적 자질이란 것이 떨쳐내야 할 부루주아적 속성이 아니라,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인간본성의 일부였던 것일까?-46쪽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해체로 인하여 많은 '스키'들이 잠적하거나 침묵했지만, 입에 총을 물고 '탕!' 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모두들 보무도 당당하게 공공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 한번 갈기고 너무도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주식에 재미를 붙이고, 벤처로 떼돈을 벌면서 자본주의에 적응해갔다. 비록 러시아 문학이 앙상한 뼈다귀만 남더라도 끝까지 갈만한, 갈 데까지 갈만한 '노인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53쪽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74쪽

언어를 다루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한다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날 지경이다.-78쪽

그 허무주의는 결코 겉멋이나 잘난 체가 아니며, 젊은 치기나 늙은 달관도 아니었다.-80쪽

김훈의 문체가 아름답고 유장한 '유장 敗將의 문체'라면, 김규항의 문체는 '자객의 문체'다." 백전백패를 '자랑하는' '패장의 문체'와는 달리, '자객의 문체'는 '무엇을'에 '어떻게'가 복무하는 문체다. 마치 자토이치의 검술처럼, 그는 짧게 끊어서 군더더기 없이 급소만 공격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때라도 그의 문장에는 매료되었다.-84쪽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86쪽

오늘의 정신, 신자유주의 정신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를 당연시하는, 모든 경제적 실패를 노동자의 책임으로 넘겨지는,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대로 신분을 나누는, 일류대학이 부자의 자식들로 채워지는, 오로지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올바로 살라고 가르치는 일이 자식과 제자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되는, 정신이다." - 김규항 --104쪽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 데리다 , 법의 힘 -111쪽

언제나 그렇지만, 선정적인 건,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다.-137쪽

자신의 판타지를 영화적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영화작가' 홍상수와 구별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부정/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163쪽

기본적으로 판타지란 디테일과 상호배제적이다.-163쪽

이 흉터들은 모두에게 보여지는 '아름다움'은 결코 갖지 못하는 지극한 '개인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존재하도록 요구받지만,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최대한의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188쪽

사실 종교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병리학사 아닌가?-204쪽

'현명함'이란 '살아남은 유치함'의 다른 이름이니까(때문에 '현명함'은 언제나 사후에 소급 적용된다. '현재의 현명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56쪽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문학이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268쪽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 - 지젝- -308쪽

이 세대의 작가들은 환멸과 냉소를 삶과 세계에 대한 주된 태도로 갖는 탈이념적 주인공들을 문학사에 등록시켰고, 이 나르시시스트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회적 소외를 감내하면서 거창한 이념으로부터,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도덕적 명령으로부터 도주하거나 달팽이처럼 자신의 내면으로 기어들어갔다.-323쪽

작가 은희경의 데뷔작인 <새의 선물>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은 '환멸'이며, 이 환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을 환멸의 예외적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만 작동한다. 부정적인 세계 바깥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는 '나'를 온전하게 정립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325쪽

우리의 과제는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하여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죠.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덧붙여, '레닌'은 무엇보다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사고 금지'의 상황을 중단시킬 강력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레닌'이란 기표는 우리가 다시금 사유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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