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 광고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5년 1월
절판


시간의 완고함, 혹은 기억의 집요함이라고 할 만한 어떤 불편함이 소설들 위에 얹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생의 막다른 지점에 도달한 사람의 내면에서 내 소설들은 자주 죄책감을 발견해낸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기억의 집요함에 잡히고 시간의 무거움에 눌리고 회한에 빠짐으로써 사람임을 증명한다는 투의 생각이 이 소설 속에 들어 있다. 좀처럼 소설들이 명랑해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기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1쪽

그가 우리의 진지한 말을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터뜨린 웃음 때문에 가볍게 받아들이지 모른다는 우려가 다시 정색을 하게 했다.-15쪽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처럼 아래로 처져 있었다.-51쪽

그녀가 완강하기 때문에 내가 물러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물러서 그녀가 완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55쪽

어쩌면 특혜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언제 이 세상에 떠나게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마지막을 맞지하지 않느냐. 감사할 일이다. 내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 보자면 아무래도 혼자인 게 좋을 것 같구나.-75쪽

소설 속에서 시간은 리얼리티와 개연성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그것의 틀 안에 있어야 하고, 리얼리티의 룰을 준수한다는 걸 분명하게 증명해야 한다. 그 때문에 우연과 불합리와 부조리가 대부분인 현실 속의 사건들이 소설 속으로 들어올 때는 필연과 합리와 조리로 무장되고 재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종종 현실 속의 사건들은, 소설가들로부터, 이번 경우에서 보듯이 그 필연과 합리와 조리를 추궁당한다.-94쪽

소문 따위는, 연인 사이에 믿음이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한쪽이 믿음을 잃어 버리는 순간, 또는 사랑을 포기해 버리는 순간 사소한 얼룩도 돌이킬 수 없는 큰 허물이 되어 버린다. 그 순간, 그 사소한얼룩은 상대방을 더 크게 불신하고 사랑하기를 부담없이 중단하기 위한, 효율적인 핑계의 기능을 한다. -99쪽

과거의 시간이 그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과거가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과거는 기억의 형태로 화석화되었다가 어는 순간 발굴된다. 기억이란 단순한 과거의 집적이 아니라 편집된 과거이다. 편집한다고 하는 것은 지우거나 덮어쓰거나 도려내거나 이어 쓰거나 돌출시키는 제 과정을 포함한다. 발굴된 기억의 화석앞에서 현실은 대체로 허술해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거나 수습을 해보겠다고 끙끙거리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마음을 다잡고 감춰 두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그가 어느 대목에선가 어쩔 수 없이 마음의 평형을 잃고 흔들린 것이 그 본보기다.-150쪽

그녀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으려면 내 기억이 아주 많이 흐리멍텅해져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내 기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갔다. 이제 그 기억은 화석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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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박민규가 100회를 맞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 역시 이전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시선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경쟁사회에서 패배한 루저에 향해 있다. 아직 읽어 보진 못했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던 전작과 달리 웃음기를 쫙 뺀듯한 작품같아 더욱 더 기대된다.(물론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도 웃음기를 녹여넣는 것이 박민규의 능력아닌가) 언제나 현실세계 속 사회적, 문화적 콘텍스트와 그물망처럼 엮여 있는 그의 작품은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다. 그나저나 그가 새롭게 구상하고 있다는 미국의 포르노그래피와 관련된 소설은 벌써부터 기대된다.

 

 

 

 

 

 

 

한겨레(10.10.08) "34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박민규씨"   

올해로 탄생 100돌을 맞은 작가 이상이 자신을 빼닮은 후배를 만났다. 단편 <아침의 문>으로 문학사상사가 주관하는 제34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박민규(42·사진)씨의 이야기다. ‘21세기의 이상’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과감한 형식 실험과 개성 넘치는 주제의식을 선보여 온 박씨는 “문학상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우리 세대의 로망이자 존경하는 작가인 이상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을 받게 된 것은 기쁘다”고 말했다. 수상을 고사할까 고민하다가 뒤늦게 나왔다는 7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였다.

2003년 장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지구영웅전설>로 한겨레문학상과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을 동시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박씨는 2007년 이효석문학상과 지난해 황순원문학상에 이어 새해 벽두에 최고 권위의 이상문학상 역시 품에 안음으로써 21세기 한국문학의 기대주임을 입증했다.

수상작 <아침의 문>은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이들이 주인공의 자취방에서 약을 나눠 먹고 동반 자살을 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다른 세 사람이 죽은 상태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을 토하고 되살아난 주인공이 다시 목을 매 죽으려고 의자에 올랐다가,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남 몰래 낳은 아기를 죽이려는 여자를 발견하고 소리쳐 말린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사위원들(김윤식·권영민·윤후명·신경숙·권지예)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성을 근원적인 생명의 가치에 대한 파괴적인 해석을 통해 새롭게 형상화하고 있”는 점을 수상 이유로 들었다.

“세상에는 모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남 몰래 아기를 낳아서 제 손으로 죽이는 여자도 있더군요. 문득, 그 두 존재가 서로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 쓴 작품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들은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함께 모여서 자살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어린 생명 역시 답이 안 나오는 탄생이라 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 힘든데도 살아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박씨는 올해 ‘더블’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소설집을 한꺼번에 묶어 낸 뒤 역시 두 편의 장편을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이어지는 ‘80년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으로 88 올림픽을 전후한 무렵을 배경으로 매스게임 이야기를 다룰 거구요, 또 하나는 미국을 무대로 포르노그라피의 세계를 다룰 생각입니다.” 한 달에 3주 정도는 춘천 집필실에서 책 읽고 글 쓰는 단순한 삶을 살며 1주는 집에 와서 가족들과 지낸다는 그는 “이제 등단 8년차일 뿐이기 때문에 여전히 신인이라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쓰려 한다”고 말했다.(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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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의 논리정연하며 젠체하지 않고 쉽게 쓰여진 문체를 나는 좋아하며, 그의 이러한 글쓰기 능력을 존경한다.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하진 않지만 그의 일관된 사상과 이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언행일치는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한겨레 실린 그의 칼럼 하나를 싣는다. 더불어 작년 말에 실린 그의 저작 <예수전>과 그 전에 출간된 칼럼집 또한 함께 싣는다.    

 

 

 

 
 

  


민주주의의 씨앗

민주주의의 회복’이니 ‘민주세력의 연대’니,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바야흐로 민주주의라는 말의 홍수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역시 어원 그대로 ‘인민의 자기 지배’가 가장 보편적인 정의일 것이다. 인민이,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이 주인인 세상, 그게 민주주의다. 인민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건 단지 인민들이 언론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인 건 인민들이 바로 그 실제 삶에서 끝없이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 노동’은 그 가장 주요한 현실이다. 비정규 노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한국처럼 완전하게 자본의 이해만을 구현하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비정규노동엔 두 가지 의미만 존재한다. 총매출에서 노동자 임금의 비율을 최대한 줄여 자본의 몫을 최대화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과 조직력을 약화시켜 자본이 노동자를 멋대로 부릴 수 있도록 하는 것. 현재 비정규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8퍼센트인 880만인데, 임금은 정규노동자의 49퍼센트이며 노동조합 조직율은 고작 3퍼센트다. 여기에 청년 세대로 갈수록 비정규노동의 비율이 현격히 높아진다는 점을 보태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가 아니라 이미 파탄 난 상태라 할 수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자본의 탐욕 때문인가? 물론 자본은 탐욕스럽지만 탐욕은 자본의 본디 속성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그 탐욕은 어떤 식으로든 품고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의 탐욕 자체가 아니라 자본의 탐욕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다. 그걸 조정하고 관리하는 게 바로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이 자본의 편에 서면 인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적절히 제한하면 인민들의 삶이 살아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권이란 바로 자본의 탐욕을 적절히 제한하면서 인민들의 살림을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정권이다.
오늘 비정규 노동의 참상이 불과 10여년 동안 진행된 일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경이롭게 여겨지곤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가권력이 지난 10년 동안 어지간히 열심히 자본의 편에 섰다는 뜻이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 중 두 개의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의 편에 섰고 한 개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의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어떻게든 이명박의 세상에서만 빠져나가면 살 것 같은 싶은 심정이야 누가 다르랴만, 그렇다고 해서‘민주주의의 수호자를 가장한 자본의 수호자’를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인정할 순 없지 않은가?
체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우리가 지난 10년의 체험에서 분명히 배울 때, 이명박뿐 아니라 그 파렴치한 자본의 수호자들 또한 넘어서는 걸 고민할 때, 우리가 좌절과 무력감을 뿌리치고 저 너머 세상을 함께 상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얻을 것이다. (한겨레)  

<출처> : gyuhang.net by 김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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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화 시키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소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읽고 난 후 엄청난 양의 사유거리를 던져주는 소설과 그렇지 못한 소설.   

이번에 읽게 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당연 전자의 소설에 속한다. 최근에 나온 신작 '구월의 이틀'을 읽고 난 후 자꾸 장정일이란 작가의 사유세계가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아 찾아 읽게 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이상의 필모그래피를 내놓지 않고 있는 감독 중 여균동 감독과 함께 가장 후속작이 기대되는 감독인, 여하튼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언뜻 본 기억이 있는 장선우 감독의 유명한 90년대 영화의 원작이다. 중학교 시절 대학생 누나가 빌려온 비디오로 몰래 한번 본 것이 전부여서, 텍스트로 접하긴 처음인 장정일의 대표 장편 소설이다.     

 

 

 

 

 

 

 

소설가 이승우가 말했듯이 모든 소설은 결국 글쓴이의 이야기이며, 어떤 식이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누군가의 사유과 관념을 훔쳐보는 은밀함'이란 매력이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소설읽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저자인 장정일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세상을 향한 자신의 주장을 쉴새없이 내뱉는다. 저자가 독자에게 배설하고자 하는 것은 90년대 초 한국이란 현실세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던 사회적, 문화적 화두와 맞닿아있다. 저자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사회 안의 성과 권력 그리고 문학과 소설가의 사회적 역할 등의 수많은 화두를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은 표절작가란 낙인이 찍긴 삼류 소설가 <나>와 여덟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은행이라는 억압된 공간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발기부전환자 <은행원>, 어린 시절 남근주의 피해자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바지입은 여자>를 큰 축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하지만 이 세명의 등장인물을 포함한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은 결국 저자의 의견을 독자들에게 피력하는 메신저에 불과한 것이다. 시인이자 희곡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이번엔 소설이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여러 사유과 관념을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문학이 사회를 변혁 혹은 변화 시킨다는 믿음에 대하여 이는 소설가들의 자아도취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여전히 문학과 소설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여전히 믿고 있다. 다만 그가 무학의 사회적 역할에 비관적으로 답하는 것은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나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정치, 경제, 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로 흩어져 '운동권이자 인텔리'였다는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변절자들에 대한 조롱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또한 여타 소설 속의 일관된 매개체라 할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이 소설에서도 역시 화두로 던지며 세상 사람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쾌락의 자유를 주창한다. 그에겐 섹스란 초등학생이 받아쓰기 만점을 맞으면 찍어주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같으며, 삶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그 무엇이다.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사건이 뒤엉켜있고, 결말도 급진적이어서 전체적으로 다소 판타지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저자의 풍부한 사유세계와 사회문화적인 박학다식함을 엿볼 수 있는, 최근에 본 것 가운데 으뜸이 되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ps. 너무 오랜 전에,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감상했던 영화라서, 문성근(나)과 정선경(바지입은 여자)을 제외하곤 그 외의 등장인물들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은행원>은 여균동이었나?  아님 <색안경>이 여균동이었나? 암튼 다시 한번 영화를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이젠 이런 파격적이고 의식있는 영화는 안 나올 것인가? 

ps2. 소설을 보다 보니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속 이름이 선댄스다. 어라 선댄스라면 미국 최고 권위의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 아닌가? 로버트 레드포드가 후원하여 시작되었다는 그 선댄스 영화제. 그 소설 속 주인공 선댄스가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가 맞나 싶어, 박학다식하고 친절한 네이버에 물어보니 역시 맞다. 인간이란 역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사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 작은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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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정일 문학선집 2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5년 10월
품절


우리 사회에서 문학적이 된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알아? 그건 나약함, 겁쟁이, 패배자 같은 어감을 풍기지. 그래서 이런 구절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얕보이는 꼬투리가 된단 말씀이야... 나느 오늘 같은 일로 여행을 할 기회가 많은데 절대 비행기 속에서나 기차 속에서 소설을 보지 않아. 그건 '나 병신이오' 하는 광고와 같은 거니깐 말이야. 실제로 소설이나 시집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경멸하고 싶거든. 추리소설이라면 또 다르지만 말이야. -86쪽

창녀인 나의 어머니가 나를 죽였어요!
건달인 나의 아버지가 나를 먹었어요!
내 어린 동생이 뼈를 주워서 시원한 곳에 묻어주었어요.
그래서 나는 예쁜 숲 속의 새가 되어 날아갑니다! 날아갑니다!

죽은 새, 날개를 지닌 채로
죽은 새. 불쌍한 것들
땅 위에 죽어 있다니,
움직이지 않는 날개를 지닌 채, 땅 위에 가련한 것들
죽은 새, 움직이지 않는 날개를 지닌 채.
저 푸른 창공 대신에 이 땅 위에 누워 있다니!-96쪽

이 시인은, 시쓰기나 우표수집이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감히, 나는 모든 '열망(욕망)' 간의 등가를 말한다. 우표수집이 하찮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방든 시인들에게 그는 너의 시쓰기도 하찮은 것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시를 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거라면 당신의 시쓰기란, 스토크북 속에 없는 희귀 우표를 구해 꽂는 우표수집가 다를 게 뭐 있는가? 희귀 우표를 찾았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듯이, 위대한 시를 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우표수집가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 우표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본받아야 한다. -135쪽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된 세계, 그리고 권태만이 지배하는 세계, 감정이나 욕망이 개입되어선 안 되는 세계. 거기엔 모든 것이 근무규정과 사규로 지시되어 있고 제한되어 있어. 어떤 문제든 미리 준비된 해답 속에 해결되어 있는 세계. 이런 세계에서는 눈물을 흘리거나 혀를 내밀어도 안 돼. 그 세계는 수정으로 되어 있고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도록 서계되어 있어. 그런 세계가 있느냐구? 수정궁이 있느냐고? 바로 내가 수정궁의 국민이야. 국민일 뿐이야. 주인이 아니지.-170쪽

현대의 독자는 소설읽기에서 무엇을 구한다고 생각하나? 당신은 독자가 없더라도 글을 쓰겠는가?

- 오늘날의 사회에는 아주 강력한 종교가 없고, 사회계층의 견실한 체계도 없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작은 한 부분을 이루는 커다란 조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소설들을 읽는다는 건 그들에게 옆집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려고, 즉 똑같은 열등감과 똑같은 죄악과 똑같은 유혹을 겪는지 보려고 열쇠구명으로 들여다보는 행위와 약간 비슷한 데가 있다. 이것이 오늘의 독자가 소설에서 추구하는 바다. 나 자신을 위해서, 밤이면 밤마다, 난 그것을 출판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쓸 수도 있다.-188쪽

나이 든 남자가 영계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의 신화야. 암, 신화지. 원시인들을 지배한 사유법칙은 모두가 유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가 밝혔듯이 아주 단순한 '동종법칙'과 '감염법칙'이야말로 원시인들의 사고축이지. 동종법칙에 따라 그들은 형상이나 성질이 비슷한 것은 서로 똑같은 효과를 가졌다고 믿었고, 감염법칙에 따라 어떤 사물을 만지면 그것과 똑같은 성질이 자신에게로 옮겨 붙는다고 생각했어. 이런 생각은 곧바로 어린 계집아이를 껴안으면 그 아이의 젊음과 활력이 늙은 노인에게 옮겨와 회춘할 수 있다고 믿게 했지. 세계 여러 나라의 고문이나 전설에서 돈 많은 노인이 어린 여자아이를 사서 품에 안고 자거나 의붓딸을 끼고 자느 이야기가 드물지 않게 보이는데 학자들은 그것을 '동기설화'라고 불러. '동기'란 요샛말로 하자면, 영계지. 하긴 요즘엔 영계라는 표현 대신 계란이란 표현을 쓰지만.-209쪽

이 씹새야. 독후감을 다시 고쳐써서 보내라고 했더니, 뭐...후쿠야마이 말처럼 거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는 마당이라면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야마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려는 부르주아들의 심정은, 우리의 '마음 속에 든 없어지지 않는 공산주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안정과 복지, 민주를 먼저 선취한 쪽에서 통일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제안에 비추어 볼 때 불법사찰과 고문, 감금 등등의 반민주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남한 정부가 통일의 주도권을 온전히 거머쥐기 위해서는 군정 종식과 공안정치가 사라져야 한다고?-228쪽

문학과 작가를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나는 작가가 된다는 것, 혹은 글을 쓴다는 것이 아주 못되어먹은 사회분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깐 현대사회가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내버린 도덕이나 윤리 따위를 작가들이 맡아 간수하고 있는 셈인데, 그건 쓰레기를 치우는 일과 같다. 나는 이 쓰레기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도 있다. 하긴 쓰레기를 태우면 연기가 나고 냄새도 나는데, 그 때문에 눈물을 쏟는 사람도 있고 가슴을 저리는 이도 있다. -358쪽

문학이 사회를 변화, 혹은 변혁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이며, 작가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흑마술이며 작가가 사회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믿음은 그들의 자아도취다. 문학이나 철학 등은 항상 현실을 사후적이고 선택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예를 들면 고리키의 [어머니]와 러시아 혁명, 스토 부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미국의 남북전쟁 사이에 아무런 인과성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가들에 대한 일반인의 통념은 그들이 거짓말쟁이들이며 난봉꾼 집단이라는 정도지. 결코 작가들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시대나 사회의 선구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360쪽

구성이란 인물과 인물 간이나 사건과 사건 간, 혹은 인물과 사건 간의 연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도색소설에서는 구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구성이 아예 없는 듯이 여겨진다. 도색소설이란, 아주 순수한 관점에서 '더 많은 교접'을 보여 주기 위해 씌어지기 때문에 도색소설의 작가는 '더 많은 교접'을 위해서 사건과 인물을 방사선적으로 증식하려는 강력한 유혹을 벗아나기 힘들다. 또 도색소설은 오로지 '교접'만이 사건의 전개축이 되고 동기가 되기 때문에 도색소설에서 묘사되는 모든 만남은 '교접'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안되는 한정된 조건을 안고 있으며, 도색소설의 등장인물은 그가 왜 이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뚜렷한 이유를 알고 태어난다. 예를 들어, 사드의 소설 <소돔 120일>을 보자. 이 소설이야말로 너무 구성이 많기 때문에 구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도색소설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백여 명의 등장인물은 서로 '교접'을 하기 위해 주어진 '무제한적이고 방사선적 구성'에 의해 촘촘히 연관되어진다.-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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