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박지향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친일>이라는 표현이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에 비추어 볼때 정작 그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는 창피할 정도로 적다고 안타까워 한다. 특히 친일은 근본적으로 불명예스러운 것, 병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이에 대한 연구 자체가 일천하다고 말하며 저항(반일)에 대한 신화의 해체와 더불어 협력(친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그 복잡성과 다면성을 이해하자고 서두에서 그 집필 의도를 밝힌다.

 

 

 

 

 

 

 

그는 이러한 의도를 설파하고자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파의 거두 중 한 사람인 <윤치호>의 일기를 통해 윤치호의 고뇌와 사상을 면밀히 분석한다. 이를 통해 윤치호의 친일이 일신상의 영화를 위한 기회주의적인 협력이 아니라 애국의 한 방식이었으며 이는 그가 평소 가지고 있던 사상을 고스란히 실천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럼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윤치호의 기본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자유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이라고 믿었으며, 그 외 자유주의의 가치인 근면과 자립, 점진적 역사 발전 등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중간 생략) 중요한 점은 윤치호에게 자유는 악과 싸워서 이기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중간 생략) 여기서 조선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갱생하지 않으면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윤치호 사고의 근거를 볼 수 있다. - page 83 -

윤치호는 민족(혹은 국가)를 위하여 개인의 복리를 희생하라고 강요되었던 당시의 일반적인 유교적 사상(그 후에는 민족주의 사상)을 비판하였으며 집단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적 관점에서 바라봤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 보고 배운 서구적 사상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이 세상의 법칙임을 깨닫고 사회적 다윈주의가 그의 사상이 핵심을 이루었다. 

윤치호는 인간사를 지배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일생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첫째는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다는 것이다.(중간 생략) 이처럼 사악한 인간사의 법칙은 인간관계마이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중간 생략) 그가 받아들인 인간사에 관한 두번째 법칙은 하나님은 인종 간에 우열의 차이를 만들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종속시키게 했으며, 인간 본성 안에는 인종적, 민족적, 신분적, 분파적, 개인적 차별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시하는 것에 분노하지만, 그들이 자만심을 가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자유주의적 시각과 사회적 다윈주의적 시각을 견지했던 윤치호는 강한 인종이 약한 인종을 지배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사상이 고스란히 친일에 대한 긍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무능한 조선의 집권세력과 지배세력들에 지배당하느니 차라리 정치,사회적으로 발달된 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윤치호는 준비되지 않은 저항보다는 인민들의 교육과 계몽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여 국제정치적으로 기회가 찾아왔을 때 독립을 추진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사상은 현실적이었나,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순진했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 같다. 비록 윤치호는 자신의 친일 행위가 향후에 맞게 될 조선의 떳떳한 자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결과적으론 일제의 조선 통치를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준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국주의의 사악함은 그가 생각하는 것하는 것보다 훨씬 악랄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은 조선의 문명의 개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토에 대한 야욕과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또한 저자의 설명하과는 달리 1930년대 말이 되면 윤치호는 조선이 일본에 정치적으로 통합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일 협력에 나섰다. 이와 같은 1930년 말의 각종 부역행위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기록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윤치호가 적극적으로 협력에 나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상황에 타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에 동의할 수 없으며, 1930년대의 적극적 협력은 결국 그의 일신상의 영화를 위한 협력 그 이상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그가 한 협력이 그 시대의 엘리트로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행해진 친일(저자는 이렇게 판단하고 있다)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합리화될 수는 없으며, 그의 그릇된 인식이 결국은 일제의 지배를 강화, 연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데는 일체의 반론이 있을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일제시대의 저항(반일)과 협력(친일)에 대한 보다 유연하고 심층적인 연구가 앞으로 계속 진행되길 기대한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해 달라는" 저자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친일이라는 행위는 긍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불편한 동시에 흥미로운 읽기였다.  

ps.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핵심 공저자로 참여한 의심스런(?) 이력이 있는 저자의 앞으로의 연구,저작활동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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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워드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 레베라 스테포프 지음/ 김영진 옮김 

 

 

 

 

 

 

 

2.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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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모를 내면의 어떤 결핍으로 이유 없이 방황하던 스무 살 시절.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술이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을까 싶어 다른 학교에 다니던 고등학교 동창의 자취방에 찾아가 밤새 술을 마시며 우울한 시대를 향한 무의미한 일갈을 하다 취해 잠이 들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마른 목을 축이러 일어나려 할 때 방에서 나뒹굴고 있는 그의 잡지 <아웃사이더>를 처음 만났다. 새빨간 책 표지 만큼 책의 내용은 강렬했으며 시골에서 상경한 스무 살 청년인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불온했다. 
 

그렇게 난 김규항을 만났고, 그 후 그의 급진적인 글들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길러준 동시에 내 안의 결핍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일깨워 주었다. 이제는 삼십 대가 된 내가 자본주의체제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면서도 여전히 이 체제에 최적화되지 못하며 방황하는 건 일면 그의 영향이 크다. 그의 사상은 나를 지배했으며, 20대의 핵심 키워드를 꼽자면 단연 김규항이다.




 

 

 

 

 

 

 

 

 

그가 이번에 인터뷰어 지승호와 함께 인터뷰집을 냈다. 잡지 <아웃사이더>를 통해 접한 인터뷰어 김규항은 낯설지 않으나 인터뷰이 김규항은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알마의 인터뷰집 시리즈로 그의 책이 나왔다는 것 또한 기뻐할 일이다. 그 만큼 김규항이 대중적이 되었다는 반증 아닐까?

매체에 소개되었던 대부분의 그의 칼럼과 글을 봐 왔던 나지만 김규항의 주요 사상과 단상들을 효과적으로 집약하여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인터뷰집이라 생각해왔었는데 반갑게도 이번 책이 그 형식을 취했다. 
 

이번 책에서도 그렇지만 요즘 그가 자신의 블로그와 여러 칼럼을 통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주장하는 것이 바로 <내 안의 이명박>에 대한 경계이다. 최근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다수의 개혁세력들은 이명박만 아니면 우리 삶이 윤택해지리라 주장하지만, 그들이 (현재) 추앙해 마지 않는 노무현, 김대중 정권 때에도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자본주의 망령에 철저히 갇혀 돈이란 신앙을 위해 복무했으며, 남을 짓밟고 성공해야 한다는 유일한 가치관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주입시켰다. 오히려 그 시기에 신자유주의 체제가 더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명박과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함께 복무하는 동지일 뿐이다.

" 사회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진정한 변화와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 후자를 개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개혁을 경계하는 건 개혁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 의미에 집착할수록 어느새 진정한 변화를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야말로 개혁의 숨겨진 목표다." - page 141 -

 

이는 곧 이명박 정권의 비판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없으며, 체제 안의 비판은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보수세력보단 개혁세력을 진정한 변화를 위한 막는 더 큰 걸림돌이라 주장한다.  

<내 안의 이명박>과 같은 주장을 통해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시선으로 사회 현상을 꿰 뚫어보는 그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날선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비평과 주장 때문에 언뜻 그는 비관론자이자 금욕주의자처럼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를 풀고자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 내 모든 글과 이야기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더 즐겁게 살자는 것인데.. 흠.. 그런 오해 역시 내 숙제다. ”


그럼 즐겁게 살기를 꿈꾸는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 결국 두 가지 였어요. 하나는 관계죠. 사람과의 관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떤 경우에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떤 어려움에 빠져도 그 사람만 생각하면 든든할 때, 그럴때 사람이 행복하죠.
또 하나는 역시 하고 싶은 일을 하는거죠. 돈을 얼마나 버는가를 떠나서, 하면 즐겁고 남보다 잘할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살 때 사람은 행복합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정작 본인은 그 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렇게 불쌍한 사람도 없는거죠. 남들의 부러움에 위롭다면 지옥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매일같이 그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러지 못해요. 수입이 줄어서 초라해질 자신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죠. 더 이상 남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생활을 생각하면 두려워서 그만두지도 못해요. 그렇게 인생을 보내는거죠. 정리하자면, 행복은 행복의 조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오는 겁니다. 그리고 미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오늘에서 온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 - page 309 -

 

그가 말하는 행복에 대한 지론은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는 삶은 살고 있지만, 나는 수입이 줄어서 초라해질 내 자신을 떠올리며 즐겁지 않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앞날에 대한 고민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현재의 나에게, 우리에게 행복의 조건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그의 말대로 행복은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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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읽었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의 미국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와 이번에 읽은 하워드 진 교수의 <살아있는 미국 역사>의 주인공은 그 동안 주류 역사서에서 한번도 주연 아니 심지어 조연의 자리도 차지하지 못해봤던 민중이다.   

 

 

 

 

 

 

 

<살아 있는 미국 역사>란 언제나 다수였지만 소수자 취급받던 흑인, 여성, 노동자의 투쟁기의 다른 말이다. 기존의 미국 역사서의 주인공이 아메리카의 선구자인 크러스토퍼 콜럼버스였다면, 이책의 주인공은 바하마제도에서 콜럼버스를 환대한 아라와크족이다. 아라와크족에게 콜럼버스는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혹은 인지하고 있던) 영웅이 아닌 외부 침입자였으며,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파괴하고 자신의 종족을 몰살한 살인자에 불과했다. 

저자는 지배권력 중심의 역사서에 길들여진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미국의 역사를 논한다. 하워드 진 교수는 노예 해방은 링컨이 이루어 낸 업적이 아니라 수 많은 흑인 노예들이 수 십년 간 피로 이루어 낸 결과물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그렇게 추앙해 마지하지 않는 독립선언서가 실은 자신들의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55명의 특권층 백인 남성이 작성했다는 사실을 설파한다. 

옮긴이의 말처럼 하워드 진 교수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주체 의식>이다. 민중이 주체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회는 더 이상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것이다. 지배는 소수인 그들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이다.     

콜럼버스부터 조지 부시까지 사건 위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읽기가 수월했지만 책의 전체적인 흐름이 단편적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미국 민중사 1,2>의 요약본으로 출판된 태생적 한계라고 생각된다. 조만간 <미국 민중사 1,2>도 구매해서 읽어봐야겠다. 내 안에서 잠 들어 있는 사자를 깨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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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산파를 역할을 해온 <인디다큐 페스티벌>이 올해 10회를 맞는다.  개인적으로는 3회 때 접한 김동원 감독님의 <송환>을 보고 한 동안 다큐멘터리에 대한 열병을 앓았으며, 이 때문에 잠시나마 다큐멘터리 감독의 꿈을 꾸기도 했던, 이로 인해 그 어떤 영화제보다 애정이 깊은 영화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다 뭐다 바쁘다는 핑계로 영화제에 발길을 끊은 지가 서너 해가 넘었다. 올해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으나, 신문기사를 통해 개막 소식을 알 수 있었다.   

10회째를 맞는 영화제의 개막작은 <상계동 올림픽>이다. 맞다. 1986년에 만들어진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의 본좌 그 <상계동 올림픽>이다. 뜬금없이 보이지만 프로그래머의 개막작 초이스는 탁월하며 시의적절하다. 영화가 만들어진지 25년이 흘렀지만 서울에는 여전히 철거민이 있으며, 단지 삶의 보금자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국가권력에 대항하다 시커멓게 타 들어간 서민이 있다. 따라서 <상계동 올림픽> 개막작 초이스는 무자비한 국가 권력에 대한  경각심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어 반가운 귀환이라 반기고 싶지만 서글픈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명박 정부 들어 언론, 문화, 종교계와 더불어 영화계 또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히 미디액트, 인디스페이스의 이해할 수 없는 사업자 선정 등으로 한국의 독립 영화계는 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독립 영화계는 이런 어이없는 역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독립 영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지지자들과 독립영화를 지켜려는 독립영화인들의 굳건한 의지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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