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처음 낸 휴가였다. 간만에 찾아온 여유로운 평일이었기에 집에만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고 알찬 휴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강박에 점심을 서둘러 해치우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우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피해 한가로운 시네마테크로 가서 영화 한편을 보기로 했다.(수도 세올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가 시네마테크가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무채색의 강렬함(!)"이 느껴진다는 네이버 영화평을 보고 미하넬 하네케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하얀 리본>을 보고 싶었으나, 시간대가 맞지 않아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을 보기로 결정. <시네코드 선재>로 향했다.  


 

 

 

 

 

 

 

 

 

역사의 적은 망각이라고 했던가. <노근리 사건>(1950년 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 있었던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의 적은 망각이 분명하지만, 이 망각은 거대 권력의 은폐로 인한 강요된 망각이었다.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60년이 지나서야 AP의 탐사보도 끝에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위해 아파하지 않으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명백하고도 잔혹한 진실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확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비극을 만든 주체가 우리를 공산당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준 미국이었기에. 우리의 형제인 미군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혹은 근현대사의 반민주 독재세력에 의해 벌어졌다면 이렇게 쉽게 잊혀졌을까라는 의문이 머리 속에 떠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건의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뜨거워졌다.

영화 시작 전 결말을 미리 알고 보는 영화는 지루하다. 특히 그 결말이 등장인물(특히 주인공인 경우는 더욱이)의 죽음이라면 (결말 직전의) 영화 Context의 탄탄함과는 상관없이 그 영화 관람은 그 자체로 실패다. 이러한 이유로 <노근리 사건>의 비극성을 미리 알고 있던 나는 영화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영화는 예측가능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울림의 이유는 그 안에 감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사의 비극을 전달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노개런티로 출연한 수많은 영화배우들과 (수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영화를 제작한 스태프들의 감정과 진심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화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역사란 사실로서의 의미를 잃게 된다"고 말했다. <노근리 사건>은 AP의 탐사보도로 가까스로 세상에 나왔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작은 연못>이란 영화로 새 생명(감정)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노개런티로 출연/제작한 배우들과 제작진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많은 관객들이 나와 같은 큰 울림을 느낄 수 있도록 재개봉 또는 상영관 확대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ps. 잊혀진 역사의 가슴 아픈 진실을 좇는 이런 영화에 조차 이념의 색깔을 덧칠하고 불순한 의도를 찾고자 노력하는 인간(조직)이 있다면 그(그들)가 바로 괴물이다. 홍상수 말대로 사람은 못 되도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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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06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개봉할것 같지 않은 상영관에서 웬일로 개봉해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참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어요~이런 영화가 여러 군데에서 상영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ㅠ

다이조부 2010-12-12 23:20   좋아요 0 | URL


네이버 에 영화관련 카페에 가입했는데 이렇게 규모가 작은 영화를

주로 같이 감상하는 동호회입니다 관심있으면 한 번 들려보는것도.....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카페명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제가 인디영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다이조부 2010-12-15 07:12   좋아요 0 | URL


다음 영화는 뭐죠?


언니네이발관의 노래제목에서 따왔다네요 ㅋ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언니네 이발관에 그런 노래가 있었군요(저는 마이앤트메리를 더 좋아합니다 ㅋㅋ)~

얼른 가서 가입해야겠습니다~

다이조부 2010-12-15 15:12   좋아요 0 | URL


닉네임이 기대되는군요~ ㅋ 설마 여기서 쓰는 닉네임을 거기서도 ㅎㅎ

저는 동일 닉 쓰니까 반갑게 인사해요 ㅋ

마이앤트메리 앨범 저스트 팝은 정말 좋긴 한데 저는 그 친구들 인간이

싫어요 ㅋㅋㅋㅋ

에로틱번뇌보이 2010-12-1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아이디 똑같이 만들었다는 ㅋㅋ
어찌 그렇게 좋은 카페를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는지~

2010-12-16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7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시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8
장문석 지음 / 책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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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혹은 '파시스트'는 모호함 개념이다. 물론 말의 출처는 분명하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1883~1945) 등이 주도해 1919년 3월 23일 밀라노 산세폴크로 광장 옆에 있는 상공회의소 홀에서 결성한 최초의 파시스트 운동 단체 '이탈리아 전투 파쇼'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이란 원래 '이탈리아 전투 파쇼'의 이념을 가리키는 것이다. -10쪽

그렇다면 무솔리는 '파시즘'이라는 말을 어디서 끌어왔는가? 파시즘의 어원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최고 정무관인 콘솔 consol(집정관)의 대권 auctoritas을 상징하는 일종의 왕의 홀, 즉 '파스케스 fasces'이다. 파스케는 콘솔의 징벌권을 표상하는 도끼를 나뭇가지들로 한데 동여맨 형태였다. 따라서 파스케스 자체는 '묶음'이나 '다발'을 가르킨다. -11쪽

적어도 파시즘은 19세기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철학적 기반은 명백히 개인주의였고,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민족의 독립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려고 했다. 반면에 파시즘은 민족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해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런 만큼 파시즘은 개인주의에 반대하는 집산주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집산주의의 또 다른 형태인 사회주의가 주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민족의 특수성 대신 계급의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국제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파시즘의 집산주의는 사회주의의 집산주의와 근본적으로 구별되었다. 그러므로 파시즘이란 반 자유주의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민족주의인 것이다. -13쪽

파시즘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된 데는 파시즘의 개념이 원래부터 모호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개념이 광범위하게 남용되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다. -16쪽

(파시즘 개념 정의) 대안은 역사적으로 파시즘이라고 명확하게 명명디고 나아가 충분히 발달한 단계의 현상들, 즉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으로 대상을 한정해 파시즘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은 인간 해부가 원숭이 해부의 열쇠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과도 부합한다. -20쪽

이탈리아 파시즘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이 왜 등장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곧 파시즘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탈리아의 저명한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크로제의 명쾌한 답변이 있다. 그는 이탈리아 근대사를 자유가 점진적으로 확산된 역사로 파악하면서 파시스트들을 이 자유의 역사에 난입한 야민인들에 비유했다. -34쪽

이러한 크로체의 견해는 서로 연관된 그의 두 가지 당파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하나는 이탈리아의 자유주의적 전통에 대한 간단없는 옹호와 긍정이다. 또 다른 크로체의 당파적 입장은 자유주의 반명제로서의 파시즘에 대한 간단없는 비판과 부정이다. -35쪽

일찍이 파시즘의 발생을 이탈리아 역사의 필연적 귀결로 파악한 이들은 다름 아닌 파시스트들이었다. 무솔리니도 파시즘이 리소르지멘토의 대업을 이어받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고 천명했다. -38 쪽

이탈리아에 앞서 국가 구성의 과정을 겪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가 보여주었듯이, 국가와 민족의 실질적인 일치화 과정은 비단 법적, 정치적 제도를 완비하는 과정을 그치지 않고 주민 전체의 의식, 가치, 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거대한 문화 혁명을 수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파시즘은 이러한 문화 혁명의 과제가 미완으로 남겨진 역사적 상황에서 등장한 현상이었다. -43쪽

이러한 파시즘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파시즘이 풍기는 피의 냄새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철정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좌에 무혈 입성했다는 사실이다. -48쪽

2장에서 살펴본 파시즘의 기원은 이탈리아의 국가 구성 과정이라는 긴 역사적 맥락에서 작동한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난 파시즘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는 이탈리아의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또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작동한 복잡한 사회적 역학 관계를 이해하는 일 또한 필수적이다. -54쪽

기실 오늘날의 많은 연구자들은 파시즘을 계급적 현상으로 환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파시즘을 거대 자본의 하수인으로 보는 견해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파시즘과 거대 자본 사이의 조화와 협력보다는 긴장과 갈등의 국면을 강조한다. -57쪽

당대의 사회주의자 치보르다는 파시즘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항한 중간 계급들의 반혁명으로 파악했다. 이는 아무런 계급적, 사회적 귀속 의식도 없는 이들이 파시즘의 주된 지지자였음을 강력히 시시한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희망의 표현이 아니라 절망의 표현이었다. -60쪽

파시스트들이 실패한 더 중요한 이유는 모든 계급에게 똑같이 무엇인가를 약속하려는 파시즘의 발상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73쪽

파시즘은 이탈리아에서 국가가 건설되었으되 민족이 국가에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 상황을 비판하면서 민족 국가의 완성을 내세우며 등장했다.이탈리아 민족 국가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은 이미 파시즘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탈리아 사회에 널이 유포되어 있었다. -79쪽

파시즘 이전의 독재자가 민중이 광장에 나오는 것에 본능적인 공포심을 느꼈다면, 파시스트들은 오히려 민중을 광장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집단적 열정을 조직함으로써 이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으려고 했다. -83쪽

파시즘은 세속적인 대상을 숭배하고 신성화하기 위해서는 신화와 상징과 제의가 필요했다. -85쪽

재차 언급하거니와 역사를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파시즘의 몰락의 원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그 어떤 정부도 달성하지 못한 20여 년간의 장기 집권에 파시즘에 성공한 이유일 것이다. -108쪽

요컨대 이 명제는 나치즘의 병리학이 근대성의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성 자체 혹은 과잉 근대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134쪽

다시 말해서, 파시즘은 패망했고 그 뒤에 악마화되어 현대 민주주의 세계에서 추방되었지만, 파시즘을 역사의 예외 상대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파시즘이 지나간 과거의 일회적 경험이 아니라 눈 앞의 현실적인 위협일 수 있다는 말이다. -136쪽

거듭 강조하거니와, 파시즘을 일회적 현상으로 일축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공통되는 맥락 context은 유사한 현상 text이 다시 나타날 개연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수용소의 참상을 보고해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려고 한 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모든 시대는 그 자신의 파시즘을 갖고 있다."-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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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14-05-07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 사용하겠습니다. 정말 좋은 말들이고 이러하기에 항상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합니다.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감시에 비례하는 것은 이러한 파시즘을 두고 하는 말이죠.
 

 

 

 

 

 

 

 

68 운동만큼 전 세계사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영향을 많이 끼쳤던 사건이 있었을까? 68 운동이 벌어졌던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현대 정치, 경제 체계 및 문화는 사실 상 68 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도 될 만큼 68 운동 사상은 이후 이들 국가 제도와 그 곳 국민들의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68 운동은 1960년대 후반 유럽, 아메리카, 동유럽, 일본 등지에서 권위주의 타파, 기성 질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새로운 창의성과 상상력의 구호를 내걸고 전개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한다.(p.12) 그럼 68 운동의 원인을 무엇이었을까? 그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책 안에 언급되어 있는 68 운동의 원인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째, 대학의 문제 - 대학 공간의 협소함, 대형 강의의 범람, 암기와 주입식에 의존하는 교수, 행정의 집중화와 관료주의, 교수와 학생들 간의 위계적 관계, 대학 교원 수의 부족 등에 대한 불만이 학생들 사이에 점점 더 쌓여갔다. 이러한 환경에서 학생들은 대학 생활에서 자유를 느끼기보다는 숨 막히는 타율성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었다.  

둘째, 세대 간의 갈등 - 경험과 연륜이 되는 사회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구조 속에서 젊은이들은 답답함을 느꼈으며, 기성 세대의 권위주의에 불만이 쌓여갔으며, 이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셋째,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 - 안정과 권위를 주장했던 우파(집권세력)과 유연성이 부족한 좌파에 대한 환멸이 쌓여갔으며, 명분이 없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 더 나아가 제 3세계의 해방으로까지 관심을 넓혀 갔다.  

 그럼 68 운동은 어떤 성격을 띄었을까? 

첫째, 68 운동은 지속적인 축제였다. 실제로 19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구호와 주장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이 운동은 예전의 가치가 붕괴되고 '포스트 산업' 사회의 서막이 열리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또 이 축제는 엄격한 위계제와 규율에 대한 저항을 그 기치로 내걸고 있었다.  

둘째, 무정부주의적이었으며 초현실주의적 전통에 매우 충실했다. 68 운동에서 학생들은 "파괴의 열정은 일종의 창조적 희열"이라는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이자 혁명가 바쿠닌의 말을 상기하면서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의 무기다', '혁명적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벽에 새겼다. 

셋째, 68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사회 전역에 퍼진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권위주의는 학교에서의 권위,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권위, 국제 사회에서의 강대국의 권위, 여성에 대한 권위, 회사에서의 사장의 권위가 모두 속한다.  

넷째, 욕망과 상상력의 해방을 외쳤으며, 꿈꾸었다.   

다섯 째, 유럽 68세대의 요구에는 물질주의적 소비 사회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68운동의 개론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흥미로웠던 점은 68 운동의 기원과 원인, 성격과 성과를 열거한 후 마지막 장에 68운동과 2008년 여름 한국의 촛불 집회의 유사성을 논했다는 점이다.  촛불집회가 68운동과 같이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기성 정당의 조직적 틀을 거부했다는 점, 시위가 축제와 결합했다는 점 등이 그 유사성을 뒷받침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68운동이 일어났던 프랑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는 운동 이후 교육, 정치, 사회, 경제 각 분야에서 일말의 성과와 변화가 일어났지만, 촛불 집회 이 후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권위주의가 판치고 있으며, 소비사회에 대한 찬양이 난무하고 있다. 또한 정부는 귀를 틀어 막고 (촛불 집회에서 시위대들이 요구했던) 최소한의 소통 조차 하지 않고 있는 디스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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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에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장마가 시작된 줄도 모르고 낡은 컨버스화를 신고  출근하다 신발을 흠뻑 적셨다. 분노와 불안의 기운이 감도는 회사의 상황과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축축해진 신발 처럼 몸과 마음이 무겁다. 7월에는 온갖 잡념 모두 떨쳐버리고 휴가를 이용해 밀린 독서를 할 생각이다.  

1.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고병권 지음/그린비 

 

 

 

 

 

 

 

 2. Vita Activa 시리즈 <파시즘>/ 장문석 지음/ 책세상 

 

 

 

 

 

 

 

3. Vita Active 시리즈 <68운동>/ 이성재 지음/ 책세상 

 

 

 

 

 

 

 

4. 개인적인 체험/오에 겐자부로 지음/ 을유 문화사 

 

 

 

 

 

 

 5. 아불류 시불류/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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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2
이성재 지음 / 책세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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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은 1960년대 후반 유럽, 아메리카, 동유럽, 일본 등지에서 권위주의 타파, 기성 질서에 대한 거부 그리고 새로운 창의성과 상상력의 확대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개된 역사적 사건을 의미한다. -12쪽

1968년대 초에는 1964년보다 실업자가 네 배나 증가했으며 그중 절반이 25세 이하의 청년들이었다. 이와 함께 기존 좌파 정당에 대한 실망 또한 68운동의 원인이었다. 당시의 좌파 정당들은 겉으로는 혁명을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았다. 노동조합 역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노동귀족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22쪽

이미 1966년부터 학생들의 정치의식은 매우 고양되고 있었는데 그 기저에는 미국의 명분없는 베트남 전쟁이 있었다. 68운동 당시 마오쩌둥,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호치민같은 제3세계 혁명가들에 대한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23쪽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과 사회의 권위주의에 저항했으며, 체 게바라와 호치민은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32쪽

1967년에는 상황주의자 라울 바이네겜이 <일상생활의 혁명>을 펴내고 새로운 폭동의 물결이 젊은이들을 서서히 결집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네이겜은 정치 체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혁이 진정한 혁명임을 강조했다. -34쪽

마침내 3월 22일에 학생들의 저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날 낭테르에서는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그 전날 대학생 8명이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을 습격하고 미국 국기를 불태운 죄로 체포되었다. 다네엘 콘 벤디트와 학생들은 대형 강의실을 돌며 학생을 모았고 대학 본부를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3월 22일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프랑스 68운동의 기원으로 본다. -36쪽

상황주의자(situationnists) :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은 아방가르드 예술가, 지식인모임에서 출발했으며, 권태를 타파하려 했으며, 특히 인간의 창조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당하고 있다고 보고 일상의 혁명을 통해 인간 소외를 극복하려 했다. 1970년대 초에 내부 분쟁으로 해체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기 드보르와 라울 바이네겜이 있다. -27쪽

피에르 부르디외 : 프랑스와 사회학자로 후기 구조주의 입장에서 구조와 행위의 관계를 설명했다. 특히 아비투스 개념을 통해 사고,행동, 감정표현 등을 생활양식을 계급이 아닌 제도와 문화 차원에서 분석했다. 실업자 운동, 문명 파괴 반대 운동에 참여했으며, 범세계적인 지식인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구별짓기>, <호모 아카데미쿠스>, <텔레비전에 대하여> 등이 있다. -42쪽

68운동의 강점이자 약점인 무정향성과 무조직성은 내부 분열을 가져왔다. -45쪽

"섹스를 해, 전쟁을 하지 말고(make love, no war)"-56쪽

하르베르트 마르쿠제 :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신좌파 사상가로 68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다. 헤겔,마르크스,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산업 사회가 인간에게 물질적 만족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인간의 사상과 행동 체게 안에 완전히 내재화해 변혁의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에르스와 문명, <일차원적 인간>, <반혁명과 폭동> 등이 있다. -59쪽

영국의 사회학자 에릭 홉스봄은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를 보면서 "처음으로 세계가, 아니 적어도 학생 이념가들이 살던 세계는 참으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68쪽

그의 말처럼 이 시기에 로마, 파리, 베를린, 함부르크, 프라하, 도쿄 대학가에서는 동일한 담론이 퍼져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68운동에서 학생들은 기성의 권위주의에 저항했으며 전체주의와 전쟁에 반대했다. 또한 소비사회를 비판하고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으며, 낡은 세계에서 소외되었던 흑인과 여성, 사회적 소소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제반문제를 포괄했다. -68쪽

"파괴의 열정은 일종의 창조적 희열"이라는 러시아의무정부주의자이자 혁명가 바쿠닌의 말을 상기했다.-72쪽

"혁명적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내일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오늘의 권태를 보상하지 못한다"-75쪽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0년대 이후에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 참가한 학자들을 말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로는 막스 호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발터 벤야민, 에리히 프롬 등이 있으며, 전후 세대로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알프레드 슈미트 등이 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으며, 1932년에 기관지 <사회 연구>를 창간했다. 그러나 나치의 탄압에 해외로 망명했다가 1950년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비판 이론'이라고 불리지만 통일성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의 능동성, 자율성, 창조성을 통해 현대 소비사회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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