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의 전횡을 당연시하는 한국인의 속성과 더불어, 그가 한국에 와서 받은 충격 가운데 하나는, 유럽사회나 러시아 지식인들이 당연시하는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가지려면, 이 나라에서는 `운동권`이라는 일종의 `반란자` 대열에 속해야만 한다"는 낯선 현실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요즘은 언어적으로 많이 순화되어 빨갱이 대신 좌파라도 불러 주지만, 좌파라는 완곡 어법은 여전히, 곧바로 `공산단 일당 독재,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평등한 분배`를 의미하는 스탈린줄의를 뜻하고, 나아가 김일성, 김정일 세습 왕가의 추족 세력임을 증명해 주는 불도장이다.

서양에서 대학은 그 기원부터 하나의 자치도시로 여겨졌고 그만큼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유럽의 대학은 국가에 대해 진리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요구하며 충돌을 뒤풀이했다. 하지만 근대화의 필요성에 의해 수입된 일본의 대학은 그 사명과 교육의 이념이 국가주의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학문 그 자체가 뒤틀어져 버렸다. 이 사항엔 아주 오래된 "동양적 대학의 특징"이 재차 개입되는데, 유교 교육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교육기관은 "동양적 전제주의에 종속된 관료 기구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라는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위의 두 사항은 일본의 근대화 기획을 고스란히 이식하고 모방해 온 우리에게 딴 나라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승르의 원인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싶어하지만 패배의 원인은 등한시한다. 곧잘 사람들은 승리에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승리는 항상 상황을 운용하는 자의 것이다. 다시 말해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을 이용하고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반면 패배에는 승리가 갖고 있는 않은 불변의 법칙이 있다. 그러니 패배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이 일단 `피박`을 면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책을 들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막 우물로 들어가려는 어린아이를 문득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당연히 두렵고도 측은한 마음이 일 것이다."즉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본 낯선 사람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사람의 마음마다 아이를 걱정하는 `착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오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 그 문장은 분명히 `출척측은(두렵고도 측은한)이라는 네 글자를 사용했다"면서, 왜 측은(가엾음)만을 말하고 출척(두려움)은 말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거기에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종오의 논박에 의하면, `측은`한 마음이 있기 전에 먼저 `출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어린아이`가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우선 내가 있고서야 비로소 아이가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니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우물에 빠질 수도 있고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터이니 두려운 마음을 생길 리가 없다. 내가 없으면 곧 어린아이도 없고, `출척`의 마음이 없으면 `측은`의 마음도 없다."

계속되는 설명에 따르면 어린 아이는 `나`의 확대형이고 측은은 출척의 확대형으로, 맹자가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확대하라고 가르친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측은지심은 출척지심을 확대한 것이라는 말을 삼갔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오해을 일"으켰다고 한다. 송대 유학자들은 이 점을 살펴보지 못한 채 측은지심을 인성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자학은 봉건적 윤리만 남기고 인간의 욕망을 버리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종오는 소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삼국시대 인물부터 시작해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각국 정치가 그리고 주변 친구들의 성공과 실패에 이르는 모든 사안을 곰곰히 분석한 끝에, 두꺼운 얼굴(면후)과 시커먼 마음(흑심)을 가진 자만이 영웅이 되고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는 후흑의 논리를 발견했다. 마키아벨리즘이 저자의 진의와 시대적 문맥을 끊어 낸 채 대중들에게 희화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이종오의 후흑 논리 역시 다분히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가 후흑 교주를 자처하는 그 순간,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성선설, 사단칠정, 춘추필법에 의한 의인관과 명분론 등등, 중국 대륙을 겁박하고 있던 주자학이라는 패러다임이 무너져 버렸다고 해도 좋다.

고미숙이 탐사하는 근대란, 타자의 내면을 규제하고 주체들의 욕망을 작동시키는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과 욕망을 관리하는, 그래서 무수한 `당대의 근대`와 구분되는 그런 근대다.

또 사실대로 말하면 국기, 국가, 국경일 등등의 국가적 표상물은 속이 비어 있는 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불안하게 비끄러매는(단일민족이라고 자랑하는 우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와 대립이 존재하는지!) 급조된 상징 기제(태극기가 얼마나 임의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일 뿐이다. 하지만 문신 새긴 기억은 전자의 여유도 후자의 이성적 판단도 원천 봉쇄한 채, 끝없는 경배만을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살인좌나 강도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경우는 살인을 행하기 직전이거나 강도를 모의할 때이다.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일생 동안 한순간도 살인죄나 강도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즉 `길에 침을 뱉으면 벌금 얼마, 무단 횡단을 하면 벌금 얼마`하는 식으로 법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 것이다. 법이 가진 이런 타성은, 미성년과의 성 매매자를 신상 공개하는 법이 점점 강화되는데도 매번 발표하는 성 범죄자 숫자가 왜 줄어들지 않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렇듯 법이란 어떤 행위에 대해 사후 처벌과 조치를 할 뿐이다. 우리가 법만능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법은 범죄와 사회문제를 억제하는 최고의 예방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후약방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문제나 범죄는 법 이전에, 사회가 함께 관심을 기울여 해결해야지, 처벌의 강도를 높인다고 해서 해결될 게 아니다.

서양 고전음악리란 뭔가? 그것은 대중음악과 어떻게 다른가? 고급 문화는 무엇이고 저급 문화란 무엇인가? 고전이란, 고급 문화란 한마디로 `귀`의 세계를 향해 있다. `나는 대중 음악이 싫어!`라고 말할 때, 진정한 음악 애호가들은 대중음악이 `소음`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게 아니라, 소음에도 미치치 못하며, 소음조차도 거부하는 `눈`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고급과 저급의 차원이 아나라, 귀와 눈이 지향하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담집 <인텔리겐챠>를 통해 친일파에 대한 나름의 판단 기준을 일찌감치 세워 놓고 있다. "저는 친일 문제에 두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일본 식민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고, 또 동아시아 각국이 우려하는 일본의 우경화나 일본의 또 하나의 측면인 전쟁책임과 연관되는 것으로, 일본의 총력전 체제에 대한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명백히 구분되어야 하는 건데요. 조선에 대한 신민지 지배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또는 태평양전쟁 발발의 책임 문제는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굉징히 교묘하게 얽혀져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조선 지배에 협력한 부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일본 침략 전쟁을 수행할 때 전쟁에 협력한 부류가 있습니다. 물론 이건 논리적인 문제겠습니다만, 이걸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친일파라고 하는데 논리적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바그너의 예는 `잘못된 역사에 부역한 예술가들을 어떤 기준으로 단죄할 것인가?`에 준거점을 예시해 줄 수도 있다. 어느 예술가가 나치나 일제와 같은 잘못된 역사에 부역을 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적극성,자발성, 연속성과 더불어 부역이 이루어지던 당시 그가 당명했던 강압도와 부역 이후의 반성도가 함께 참작되어야 한다. 이럴 때 바그너는 우리나라의 이광수처럼 적극성,자발성,연속적이었거나, 반대로 서정주처럼 소극적,수동적,단속적이지도 않았다. 탐욕스러운 성격과 무정견에 가까운 기회주의적 행태로 볼 때, 부역자가 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은 있었으되 그는 일찍 죽는 것으로 시험을 피해 갔다.

우여곡적 끝에 태어난 박정희는 모유를 거의 먹지 못했으며, 어머니로부터 "널 낳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이 일화를 놓치지 않고 낚아챈 신용구는 "아직까지 사고체계가 미숙하고 단순한 5세 이전의 아이가 어른들의 농담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이때 박정희는 "엄마가 진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유기 불안"에 빠져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어머니의 눈길과 손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유아는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믿기 뙤는데, 바로 이것이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자기애의 핵심이다. 건강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심리적 자산`에 해닿나는 자기애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높여주고 쉽게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화되면 일찌감치 유아독존적인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신경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중국의 수필가 임어당이 <생활의 발견> 가운데 `중국인들과 같은 대가족 사회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따위가 생겨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듯이, 오디이푸스 콤플렉스의 문화적 일반화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작년(2005)에 갑작스레 타계하여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전인권은 그의 평판작 <남자의 탄생>에서, 서양과 달리 한국의 육아 문화는 사내아이로부터 어머니를 차단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상대화했다. 서양식 육아는 아이의 성장에 따라 체계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막지만, 한국에서는 심하면 12세가 되기까지 남아에게 동침권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에게 홀대받는 것은 남편(아버지)이다. 이렇듯 대폭적인 구강 만족(젖 빨기)을 맞본 한국의 남아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말 그대로 바다 건너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남성에게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성적 박탈감이나 아버지로부터의 견제(거세 위협)가 문제되는 게 아니라, `동굴 속 황제`로 키워진 유아독존적인 자기애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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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미술`이라는 개념이 형식화되고 고정되면 쉽사리 권력으로 변한다. 가령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만이 `우리`이며 `우리`란 어떤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리는 배타적인 자의식을 공공히 한다. `언어`를 `미의식`으로 치환해보면 `우리 미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닌 위험성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어`와 마찬가지로 미술학교, 미술관, 공공 전시회, 미술 시장의 형성 등을 통해 만들어진 `미술`이라는 제도 역시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며 국가주의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 선생의 술회는 프로모 레비를 떠올리게끔 했다. 아우슈비츠의 강제 노동을 참아내며 살아남은 그는 생환 후, 문학가가 되어 40년 이상에 걸친 증언활동을 이어오다가 지친 나머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에세이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증언의 불가능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문제를 향한 뼈아픈 고찰을 남겼다.

레비는 자신이 진정한 증언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자문한다. 살아남은 자신들은 우연한 행운, 특권적인 지식과 기술, 처세술로 인해 더 약하고 더 성실한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남은 것이다. 진정한 증언자들,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증인인 셈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만이 진정한 증인이라면 도대체 누가 증언할 수 있을까? 이 풀수 없는 의문이 무거운 짐이 되어 생존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 경험한 장례의 기억을 불러와 그렸던 대학 졸업작품이 <초혼행>이다.
근데 이전의 인간에게 죽음은 가까운 대상이었다. 노인과 병자는 오늘날처럼 병원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의 눈 앞에서 죽었다. 우리는 그 감촉과 냄새까지 느껴가며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생활 속에서 인식했고 죽은 자를 저 세상으로 배웅했던 것이다. 물론 산자와 죽은 자의 슬픈 헤어짐이긴 했지만 부조리한 운명은 아니었다. 과학의 힘을 총동원해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으로 여기고 죽음의 감촉과 냄새를 청량한 병원 속에 가두어버린 근대인은 이렇게 죽음과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말하자면 죽음의 소원화-은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산업혁명기에 빠르게 진행됐다.

예술가는 사회적인 리더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예술 자체가 하나의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 힘들어도 "아아, 이건 예술이니까, 아트 프로젝트니깐..."라면서 관대히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은 친구에게 대뜸 "꿈이 뭐에요?"라고 물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지금 제가 예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아하"하면서 이해해주는 식이죠.

`한국인`이란 한국인이라는 `본질`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문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정연두의 작품이 `한국적`인 까닭은 한국이라는 본질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맥을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다.

누가 나에게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센티미터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수 없고 현실 속에서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윤석남)

그리젤다 폴록으 드가와 그의 지인이었던 미국 여성화가 메리 카샛과의 비교를 통해 여성이 그리는 여성상과 남성이 그리는 여성상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보인다고 논증한다.

(카셋의 작품에) 그려진 여성들은 드가 작품에 묘사된 목욕하는 여성과는 달리 훔쳐보는 시선 속에 놓여 있지 않다. 드가의 여성들이 있는 장소는(....) 파리 변두리의 매음굴이나 공창가였을지 모른다. 카샛의 그림 속, 서서 목욕하고 있는 하녀의 모습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여성을 `천한 여성"이라는 성적 범주 속에 가둬놓지 않는다. 동시에 카샛은 자기 주변의 여자들이 일하는 공간을 표현다.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상품화하지 않고 계급적으로 자리매김하여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남산에 있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그 생산과 생명의 물, 생업으로서의 물, 나의 희망으로서의 물이 하필이면 나를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 어떻게 예상했겠습니까? 안기부 놈들이 이른바 나를 물과 맞서게 했고, 결국 그 물에게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날조한 대로 저는 북한에도 두 번이나 왕래한 간첩이 되어버린 거죠.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 후로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되살아나서 완전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도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에 대한 공포를 계속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세계를 이루는 원초적 개념 중 하나인 물에 공포를 가진채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물과 정면대결하자고 생각했어요. 누구도 나를 치료해주지 않을 테니 스스로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거죠. 그때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고문을 받은 환경이 무엇이건 그림을 통해 본격적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 보는 행위로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서정적인 작품만을 골라 전시했던 작품이 <물속에서 스무 날>이라는 연작입니다.

자신과 가족 앞에 펼쳐진 운명을 겪으며 "희망이라는 것의 공허함을 배웠다"던 그는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이 도리어 쉽게 절망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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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선택에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점은 장르에 관계없이 매력적인 영화적 세상이 날 설득하는가다. 대본을 읽었을 때 한번에 빠져들 수 있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이 매력적인 세상을 어떤 연출가가 연출하느냐다. 아무리 대본이 좋아도 연출가의 마인드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외에 또 고려하는 게 잇다면, 주연이든 조연이든 캐릭터가 얼마나 생생한 `존재감`을 지녔는가 하는 것.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영화가 영화계에 기여하는 바가 있는가 하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내가 해보고 싶은 역할에 대해 말하자면) 허구적이건 현실적이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캐릭터를 대 해보고 싶다.(p 224)

크리스토퍼 정과 샘슨 조는 "한국 사회의 강한 집단적 성향"에 정의 근원이 있다고 본다. 헤이르트 호프스테더 교수의 개인주의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100점 만점에 18점을 기록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91점이나 일본의 46점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집단주의적이고 단체 지향적인 나라로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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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구판절판


어차피 이 세상에 네가 원하는 싸움은 없잖아. 몇 푼 더 벌고 몇점 더 얻기 위한 싸움은 다른 머저리 같은 녀석들이나 하라고 해. 그런 보잘것없는 싸움은 처음부터 항복해버리는 거야. 밥벌이로 저녁 6시까지만 일하고, 그다음에는 네 할 일을 하는 거야. 밴드 활동이나 작곡이나 그런 거. 그래도 하루 6시간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잖아. 네 지위에 너만 확신을 가지면 되는 거잖아-55쪽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186쪽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의 일본, 한국은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완성된 사회'의 초입에 접어들었다.-187쪽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188쪽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197쪽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197쪽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197쪽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양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생활에서 문화 예술 및 창작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형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198쪽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 2의 천성이 된다. -199쪽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은 사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판검사나 의사가 되거나 좋은 기업에 취직해 '치열하게' 살다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다. 존경받는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들의 거의 다 이 분류를 해당한다. -200쪽

그런가 하면 '고시 폐인', 범죄자와 사기꾼,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 '악비리' 혹은 '또순이'라는 칭찬을 듣는 저소득층도 이 유형에 속한다. -200쪽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 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여가 시간에 봉사 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대한 의지없이 선의로 정당 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행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200쪽

그러나 그런 활동이 근본적으로 삶의 우선 순위에서 가장 앞에 오는 것이 아니며, 그런 활동들에 대한 욕구도 따지고 보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는 완성된 사회에 대단한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한다.-200쪽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다. 예술가, 종교인, 전업 NGO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업인, "패배자라도 불러도 좋으니 아등바등 살지 않고 속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라며 교직원이나 하급 공무원, 카페 사장 따위를 꿈꾸는 부류도 이에 속한다.-201쪽

이들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경쟁 시스템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게 되면 언제든지 '순응형'이나 '타협형'으로 태도를 바꿀 준비가 돼 있다.-202쪽

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202쪽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인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인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이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202쪽

프랑스나 그리스 등에서 간혹 보는 방향성 없는 학생 폭동이 전자의 예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대단히 공격적이고 반체제적인 환경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그룹 등이 후자의 예이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망설임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은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202쪽

두 번째는 작가를 꿈꾸는 직장인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제안이다(중략)장편소설을 쓰는 작업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비슷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하고 자신이 없었던 게 그랬고, 매번 3분의 1 지점쯤에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그랬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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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구판절판


이 책에서는 자유 시장 이론가들이 '진실'이라고 팔아 온 사실들이 꼭 이기적인 의도에서 만들어 낸 것은 아닐지라도 허술한 추측과 왜곡된 시야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즉,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말해 주지 않는 자본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진실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내 목적이다.-14쪽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 비판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수 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믿는다.-14쪽

<01.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회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19쪽

<01.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자유 시장도 그런 식이다. 일단 특정 규제의 정당성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그 규제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22쪽

<01.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논리는 순전히 정치적인 반면 자신들의 논리는 객관적인 경제학적 진실이라고 우기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만큼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31쪽

<02>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주주들이 법적으로 기업의 주인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기업의 이해 당사자 중에서 가장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의 장기 전망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보유 주식을 다 팔 경우 해당 기업이 위기에 빠질 정도로 지분이 많은 대주주 외에는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주주들을 위한 기업 경영이 결국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32쪽

<02>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전문 경영인과 주주들 간에 결성된 이 '비신성 동맹'은 기업의 기타 이해 당사자들은 착취한 자금으로 유지되었다. 일자라는 무자비할 정도로 줄었고, 수많은 노동자들은 일단 해고당한 뒤 더 낮은 임금에 복지 혜택도 거의 없다시피 한 비(非) 노조원 자격으로 재고용되었다. -40쪽

<02>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최악의 문제는 주주 가치 극대화가 심지어 해당 기업도 전혀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기업이 수입을 늘리기는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고용을 줄여 임금 지출을 삭감하고, 투자를 최소화하여 자본 지출을 줄이는 식으로 비용 지출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다. -42쪽

<02>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문제는 주주들이 기업의 법적 소유주이기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러 이해 당사자 중에서 기업의 장기적 생존에 제일 관심이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43쪽

<0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임금 격차는 개인의 생산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각 정부의 이민 정책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부자 나라의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들의 높은 생산성은 단지 역사적으로 축척해 온 다양한 제도들 덕분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개인이 가치에 맞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만 한다. -47쪽

<0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가난한 나라의 평균 국민소득을 끌어내리는 것은 빈곤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이 모르는 게 있다. 바로 자기 나라가 못사는 이유가 빈곤층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54쪽

<0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간단히 말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 나라의 동일 직종 종사자들과 붙여 놓아도 지지 않는다. 정작 자기 몫을 하지 못하는 것은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그들의 생산성 때문에 나라가 가난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가난하다는 부자들의 불평은 얼토당토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나라 전체를 끌어 내린다고 불평하기 전에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왜 부자나라의 부자들처럼 자신들이 나라 전체를 끌어올리지 못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55쪽

<0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 제도는 사람들이 이기심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은 하되 인간의 다른 본성들을 모두 활용하고 사람들이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제도일 것이다. 결국 최악의 행동을 기대하면 최악의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69쪽

<08.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이런 모든 이유에서 높은 수준의 인적,조직적 역량과 적절한 제도적 여건이 필요한 고도의 기업 활동은 자국에 남게 된다. 자국 편향은 단순히 감정적인 애착이나 역사적 책임감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경제적 이유도 있다. -117쪽

<08.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만일 어느 외국 기업이 같은 산업 분야에 해당하는 국내 기업을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인수하려는 것이라면 이 외국 자본이 국내 사모펀드보다 더 낫다. 하지만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국내 기업이 국가 경제에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할 확률이 더 높다. -123쪽

<09.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탈산업화 현상은 제조업 부문의 급속한 생산성 향상에 따라 제조업 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부자나라의 국민들은 고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탈산업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직 '탈산업 사회'를 공언할 정도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134쪽

<10.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게다가 미국은 다른 선진국보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살수 있는 이유는 이민이 많고 고용 조건이 열악한 덕에 상대적으로 서비스가 싸기 때문이다. -143쪽

<12.정부도 유망주을 고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부의 의사 결정권자들, 즉 정치인들과 행정 관료들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보다는 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더 신경 쓰고, 따라서 경제적 실효성보다는 가장 가시적이고 정치적 상징성이 높은 흰 코끼리 프로젝트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 관료들은 '남의 돈'을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경제적 성공 여부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176쪽

<13.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1차 대전 직후인 1919년, 소련 경제는 엄청난 곤경에 빠져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식량 생산이 정상화되지 않는 한 새로운 체제가 유지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의 핵심 내용은 농업 부문에서 시장 거래를 허용해서 농민들이 돈을 벌수 있도록 한 것이다. -185쪽

<13.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신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소련 공산당은 둘로 갈라졌다. 공산당 중에서도 더 좌파적 성향을 지닌 레온 트로츠키는 신 경제정책이 자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독학으로 경제학을 배운 천재 경제학자 예브게니프레오브라젠스키였다.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소련 경제를 발전시키려하면 제조업 부문의 투자를 늘려야 하낟고 주장했다. -185쪽

<13.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거의 한 세기 전 소련의 마크르스 경제학자에 대해 떠벌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스탈린의 전략, 아니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전략이 오늘날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과 놀랄 정도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188쪽

<13.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노동자들이 소득의 전부를 소비하기 때문에 국민소득에서 노동자들의 소득이 큰 부분을 차지할수록(즉 노동자들이 임금을 많이 받을수록)투자와 경제 성장은 위축될 것이라고 보았다. -189쪽

<13.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추진되기만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가 경제 성장까지 촉진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과 같은 불황기에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이다. 소득이 적을수록 가용 소득에서 더 많은 몫을 지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96쪽

<15.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 공동체 차원에서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웅적인 기업가들이 등장하는 신화를 거부하고 집단 차원의 공동체적 기업가 정신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도록 돕지 않으면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222쪽

<16.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이렇듯 금융 경제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 은행장, 날고 긴다는 펀드매니저, 명문 대학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유명 인사들까지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하는 경제학 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우리 인간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도 될 만큼 똑똑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230쪽

<16.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도 그렇게 제한되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버트 사이먼의 대답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범위와 복잡성을 줄이기 위해 선택의 자유를 의도적으로 제안하자는 것이다. -232쪽

<16.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우리에게 규제가 필요한 이유는, 정부가 당사자인 경제 주체들보다 관련 상황을 반드시 더 잘 알기 때문이 아니다. 규제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제한된 정신적 능력에 대한 겸허한 인정인 것이다. -237쪽

<17.교육을 더 잘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나라의 고등 교육 현실은 영화관에서 화면을 더 잘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한 사람이 서기 시작하면 그 뒷사람도 따라서 서게 되고, 그러다가 일정 비율 이상의 사람들이 결국 모두가 서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말이다.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화면을 더 잘 볼 수도 없으면서 앉아서 보지도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249쪽

<20.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사회 경제적 환경에 돌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할리우드 영화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 또한 말도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기회이 균등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285쪽

<21.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인해 이른바 '기적의 성장기'가 끝난 이후 한국은 온정주의적 정부 개입 정책을 포기하고 무한 경쟁을 강조하는 시장 자유주의를 채택했다.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인다는 명분 때문에 직업의 안정성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아시아 금융 위기 전에도 한국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50퍼센트에 육박해서 선진국 중 가장 노동 시장이 취약한 나라로 꼽혔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 자율화를 했으니 이 비율은 이제 60퍼센트 선에 달한다. -293쪽

<21.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노동자들에게 제2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복지 정책은 노동자를 위한 파산법이라고 볼 수 있다. 파산법이 기업가들로 하여금 위험을 더 적극적으로 감수하게 해 주는 것처럼, 복지정책은 노동자들이 변화에 더 개방적이고, 그에 따른 위험을 더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 -297쪽

<21.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차를 빨리 몰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가 없다면 아무리 능숙한 운전자라도 심각한 사고를 낼까 두려워 시속 40~50킬로 이상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업이 자기 인생을 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큰 정부가 사람들을 변화에 더 개방적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경제도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300쪽

<22.금융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인 필요가 있다>
결국 이른바 금융 혁신의 결과는 실물 자산이라는 기초 위에 금융 자산이라는 빌딩을 높게 쌓아 올린 끝에 전체 건물이 흔들리는 꼴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심각해진다. 금융 상품의 경우 '파생'이 되면 될수록 금융 상품을 궁극적으로 떠받치는 실물 자산과의 거리도 멀어지며 이에 따라 점점 더 파생 금융 상품의 정확한 가격을 매기기가 힘들게 된다.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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