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읽는 논어
오구라 기조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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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만 봐서는 식상하기 이를 데 없다. "00살에 읽는 논어" 등의 책이 유행 한 지가 한참 지나서 이렇게 평범한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라면 외면하기 일쑤다. 로쟈님과 같은 너무나도 감사한 책 길라잡이가 없었으면 그냥 스쳐 지나 갔을 책 이었지만 로쟈님의 추천을 놓치지 않고(여전히 반신반의해서) 도서관에서 빌려 책을 읽어 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는 누구인가? 노나라 출신의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유가의 창시자로서 중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특히 한국)의 문화와 관습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공자의 사상을 일컫는 유교는 과거 주나라 왕조의 규범이었던 예를 회복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고, 예를 내면화했을 때 인(仁)한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인간을 소인과 대비한 군자라고 지칭하며 칭송했다. 그러한 공자의 사상과 어록을 모아 제자들이 집대성하여 만든 게 [논어]라고 우리는 흔히 알고 있다. 논어 각 장의 해석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의 규범으로서의 유교의 역할론을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공자를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규정한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애니미즘이라니? 저자가 말하는 <애니미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생명>에 대한 해석을 들어봐야 한다. 

"내 생각에 공자는 생명에 대한 동아시아의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한쪽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두 가지 해석이란 <애니미즘>과 <범령론>이다. 그리고 공자는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던 것이다. <범령론>이라는 단어는 귀에 익은 말이 아닐 것이다. '범신론'이라 해도 좋겠지만, '신'이라는 글자가 일신교적 신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신'이라는 글자를 피하여 여기서는 <범령론>이라 부르기로 한다. <범령론>이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p18-

그럼 저자가 말하는 <애니미즘>은 기존의 우리가 말하는 애니미즘과 같은 개념일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애니미즘이라는 세계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보통 애니미즘이라는 것을 '삼라만상에 생명, 아니마, 신 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고, 그래서 바위나 나무 등에도 생명,아니마,신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할까.(중략) 그렇다면 무엇이 '생명이나 신'이 되고, 무엇이 생명이나 신이 되지 않는 것일까. '하늘'이라는 초월적 존재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마을이나 지역, 공동체 등의 구성원 다수가 어떤 돌에서 모종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이 귀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작동하는 인식에 따라 공동주관적으로 권위를 받으면 '생명이나 신'이 되는 것이다. -p21-

 

"공자는 <애니미즘> 사상가였다고 내가 한 말을 부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제 1장에서 말한 것을 다시 되풀이하자면, 내가 <>를 붙여 <애니미즘>이라 한 것은 종래에 사람들이 흔히 애니미즘이라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종래의 애니미즘은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는 세계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고 나는 생각한다.(중략) 이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아니마이다'라는 유형의 애니미즘과는 명벽히 다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별도로 <애니미즘>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p62-

 

저자가 말하는 <애니미즘>과 연관하여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개념이 바로 <제 3의 생명>이다. <애니미즘>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며 이 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제 1의 생명>, <제 2의 생명>과 대비시켜 <애니미즘>을 추동한다.

 

"<제3의 생명>이란 이제까지 인류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을 가리킨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명관을 가리킨다.(중략) 인류가 이제까지 명확하게 인식해온 생명은 크게 나누면 ① 육체적,생물학적 생명 ② 정신적,종교적 생명, 두 종류였다.

이제 이 두 가지 생명관을 각각 <제1의 생명>, <제2의 생명>이라 부르기로 하자. <제1의 생명>이란 육체적,생물학적 생명이고, <제2의 생명>이란 정신적, 종교적 생명이다.(중략)

<제 3의 생명>이란 생물학적 생명도 종교적 생명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애니미즘>에서의 생명관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적 <애니미즘>에서는 마을 등의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어떤 돌에서 모종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이 공동주관적으로 권위를 받으면 '생명이나 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은 육체적,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며, 어떤 보편성을 표방하는 종교적 생명도 아니다. 우연성,우발성의 지배를 받은, 관계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지 알 수 어떨지 예측할 수 없은 <생명>이다. 이 책에는 그것을 <제 3의 생명>이라 부르기로 한다"-p28-

 

낯선 개념이라서 단번에 이해하기는 여렵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지배하는(혹은 그 속에 내재하는) 공통된 "기"나 "영"이 있다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범령론>과 연관되는 <제2의 생명>론이라면, 공자로 대표되는 <애니미즘>은 <제3의 생명>관이다. 저자는 공자가 외친 "인仁"이라는 개념은 흔히 '도덕'이나 '사랑'등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관계성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인人"은 <사이의 생명>이라 설명한다.

 

저자는 기존의 '예禮'라는 개념도 전복시킨다.

 

"공자 자신이 귀족이 아니어서, 군주의 통치에 직접 참가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중략) 훗날 노나라 종묘에 처음 들어갔을 때, 비천한 신분에서 갑자기 출세한 공자는 진짜 군자들에게 '이런 기본적인 예도 모르느냐'고 모멸당하는 굴욕을 겪었다.(중략) 그 대신 공자가 직접 몸으로 알고 있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향당에서 보이는 장로들의 행동거지, 예의범절, 세간에서 일을 결정하는 방법 따위였다. 향당이라는 것을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며 지역에서 정해둔 일, 연중행사, 제사,교육 등을 공동으로 행하는 일정한 규모의 집단이다. 젊은 공구가 실제로 경험하고 알았던 것은 군주가 종묘나 조정에서 행하는 정치와 의식이 아니라, 지역의 자치회 같은 조직에서 보이는 일상적인 풍습 전반이다."-p109-

 

"예부터 전해져온 '예'라는 형식은 결코 획일화를 위한 형식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 아래서 어떻게 할 때 <생명>이 가장 두르러지게 빛을 발하고, 공동체가 아름다움과 생명을 공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혜가 축적된 체계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예'라는 것은 사람들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공동체적인 <생명>을 자유롭게 개방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을 알아차렸다"-p47-

 

유교라 하면 획일화되고 그 유래도 아는 사람이 없는 제사와 같은 '예'와 동일시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다. 저자에 따르면 본래 공자에게 '예'는 인을 빛내기 위한 법칙성이었다. 인은 우연적인 성질이 있기 때문에, 그 우연성에 완전히 맡겨버리면 공동체의 질서가 성립되지 않아 <제3의 생명>으로서의 인을 컨트롤하고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예를 배우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3의 생명>으로서의 인을 컨트롤하고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예를 배우는 것이 필요했으며, 그 예란 위에서 말한대로 향당이나 자치회 등의 작은 공동체에서 벌인 일상적인 풍습의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공자가 죽은뒤 예의 규범성을 고정화하고 기호화하는 세력이 출현했다. 이들은 예를 획일화 시켰으며, 예를 규범화하여,(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개념인)예를 통해 인을 내면화 할 수 있다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자는 군자와 소인의 개념도 이러한 논리로 해석한다.

예를 하나 보자

 

子曰, 君子上達, 小人下達[헌문]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군자는 고상한 것으로 통하지만, 소인은 비천한 것에 통한다"(가나야 오사무)고 해석한다고 한다. 우노 데쏘토는 주자의 신주에 충실히 따라, "군자는 평소 바른 도를 따르므로, 그 덕이 날로 향상되어, 고명의 극에 도달한다. 소인은 평소 사욕을 따르므로, 그 덕이 날로 내려가 오하의 극에 도달한다"번역했다.[논어신역]

 

하지만 저자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군자의 세계인식은 자잘하고 구체적인 것(下)을 귀납적으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뒤풀어 하면서 도를 향해 올라가는 것이 '군자는 상달한다'는 문장의 의미이다. 구체적인 사물에서 배우는 것에서 도라는 추상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소인들은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더딘 일을 하지 않는다. 이미 진리가 어딘가 있다면, 재빠르게 그 위에 있는 권위적인 가치를 연역적으로 아래로 끌어내려서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가르치려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다."-p126-

 

저자가 이러한 소인들의 이데로올기를 만들고 공자의 <애니미즘> 사상을 현재의 <범령론>적 사상으로 왜곡시킨 장본인으로  맹자를 지목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맹자는 공자의 계승자가 아니라 논어를 왜곡하여 현재의 논어의 주류적 세계관을 확립시킨 인물이라 평가하다.

 

"논어의 <애니미즘=소울리즘>적 세계관은 맹자에 이르러 일변한다. 보통은 논어와 맹자 혹은 '공자와 맹자'하는 식으로 둘을 병칭하여 마치 같은 사상인 것처럼 생각들을 한다. 나는 분명 거기에 유교라는 것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공자는 <애니미즘=소울리즘>이라는 방에, 맹자는 <범령론>이라는 방에 살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공자는 <제3의 생명>을 믿었고, 맹자는 <제2의 생명>을 믿었다. 공자가 죽은 뒤 중국사상사는 극적인 전개를 보였다. 이미 몇 번이나 서술한 대로, <범령론>이 대두한 것이다.(중략) 중국에서 <범령론>의 대두는 명백히 도가라는 사상 집단이 주도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도'와 '기'는 양쪽 다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궁극존재이고 영적인 물질이다."-p214-

 

"맹자의 세계관은 보편적이고 또한 수직적이다. '인간 한명 한명의 신체,마음과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생겼다고 보는 사고'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왕과 성인과 대인은 그 보편적인 세계에서 샤먼처럼 영적인 존재로서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수직적이다.

공자의 경우, 보편적인 인간관은 아직 '기'라는 물질성이나 '성선'이라는 도덕성에 의해 뒷받침디고 있지 않았다. 공자의 <애니미즘=소울리즘>은 인간이나 자연에 대해 영적인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이었다"-p215-

 

"공자가 죽은 후 전국시대를 거쳐 진한 통일제국이 탄생하기 까지 수백년 간, 공자의 사상은 오해되고, 곡해당하고 비판받고 부정당했으며, 타도의 대상이고 웃음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걷어차이며 멸시당했다"-p222-

 

 

공자와 유교에 대한 멸시의 분위기는 8~90년 대 우리나라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독재 정권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유교는 6~70년 대 획일화된 규범/예절을 앞세워 그 영향력을 공고히 했으며 권위주의적 시대가 물러가고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한 8~90년대에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주의로 낙인찍힌 시기였다.

공자의 논어가 다시 부활한 건 신자유주의 이데로올기 부흥을 위한 도구로서 자기 계발서로(200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의 피로감을 덜고 상처를 보듬는 힐링/명상서(2010년 대)로서였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그 역할도 계속 바뀌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대의 논어와 공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저자의 공자에 대한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가 규정한 공자의 <애니미즘> 사상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가 말한 공자의 <애니미즘>은 가라타진 고진이 세계사의 구조에서 얘기한 교환양식에 근거한 사회구성체의 원리 中 '교환양식 A'와 닮아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교환양식에 근거한 사회 구성체 원리를 네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교환양식 A'는 증여와 답례 같은 상호부조적인 공동체의 호수성을 원리에 기반한 사회 구성체를 의미한다. 제국의 확립되기 전, 그러니까 향당/씨족 공동체의 생활규범의 주된 생활 원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약탈과 재분배의 교환 양식을 '교환양식B'로 규정했다. 이는 제국의 주된 체제 논리로 볼 수 있다. 또한 상품과 화폐가 교환되는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 논리를 상품  '교환양식C'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진은 '교환양식 D'를 덧붙인다. 이 사회구성체 원리는 국가를 뛰어넘는 이론인데, 자유로운 개인들이 호수성의 원리를 근거로 하는 사회구성체를 말하는다. 교환양식 A의 증여/답례의 원리를 계승하되, 그것을 뛰어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애니미즘-교환양식 A>를 승계하되, 세계적인 연대/공동체로 발전시키는 것(교환양식 D). 이러한 논리에 근거를 부여하는 게 신자유주의의 한계에 봉착한 현재, 가장 필요한 공자와 논어의 시대적 역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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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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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려서부터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도 그 흔한 어학연수나 워킹 홀리데이 등에 대한 열망에 적었다. 아니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한때 yBa(Young British Artists)에 푹 빠졌을 때는 뱅크시의 Graffiti를 찾아 런던 거리를 헤메고, Tate Modern에서 데미안 허스트의 전시회를 보는 상상을 한적은 있었지만, 실행에 옮길 만큼의 절실함은 없었다. 


새로운 것과 낯선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이 적었던 걸까?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 없는 삶에 대해 불만도 없었고 나름 만족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나니, 나의 정주 관성은 단순히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 부족이나 부재가 아닌 외부 세계에 대한 던져지는 두려움의 발로였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은 집이라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공간을 벗어나 불확실성에 내 몸을 던지는 행위다. 나의 정주 관성은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기존의 세계관/가치관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수동성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80년, 부도 명예도 없이 우울한 심정으로 40대 중반을 통과하고 있던 연암 박지원에게 중원대륙을 유람할 기회가 찾아왔다.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연암을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5월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오는 장장 6개월 걸친 대장정, 열하일기의 시작이다.  


여전히 오랑캐 '청'이 미개하고 후진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던 박지원이었지만, 먼저 청에 가본 적이 있는 '궁핍한 벗' 박제가와 홍대용에게 전해 들은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드디어 압록강을 도강하는 배를 탈 때, 연암이 수역 에게 출사표와도 같은 화두를 던진다. 


"자네 길을 아는가(君知道乎)"

 수역 홍명복에게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씀을 이르시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라는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다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법이지.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의 한 획을 변증하면서 선 하나를 가지고 가르쳤다네. 그런데도 그 미세한 부분을 다 변증하지 못해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라고 말했어. 이건 바로, 부처가 말한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그 경지일세.러므로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옛날 장자산 같은 사람이라야 될 걸." - p 52 - 


연암이 말한 길이란 무엇일까? 우리(조선)의 관습, 철학, 가치관과 저들(청)에 대헤 가지고 있는 편견을 뛰어넘는 자유로움과 새로움의 출발점 아닐까?


도강을 하고 봉황산을 지날 때 우뚝 솟아난 산의 형세에 잠시 넋을 놓기도 했으나, 허공에 떠 있는 빛과 기운은 한양의 도봉산이나 삼각산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되놈들이나 사는 시골인 줄 알았던 마을의 북적임과 화려함에 연암은 주눅이 든다. 기존의 청에 대한 편견에 금이 간 것이다.  

등마루는 훤칠하고 대문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길가로 먹줄을 친 듯하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다. 사람용 수레들이 길을 마구 지난다. 벌여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도자기다. 그 모양새가 어디로 보나 시골티라곤 조금도 없다. 예전에 나의 벗 홍대용에게 중국 문물의 거대한 규모와 세밀한 수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중국 동쪽 끝 촌구석도 이 정돈데 도회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니 기가 팍 죽는다. 돌아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후끈거린다. 순간 나는 통렬히 반성한다.- p 73 -


하지만 여기에서 생각이 그치면 세계 최고의 여행기를 쓴 연암이 아니다. 


장복을 돌아보면 물었다.

"네가 만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

"중국은 되놈 나라잖아요. 소인을 싫습니다요."

"맙소사!"

때마침 소경 하나가 지나간다. 어깨에는 비단 주머니를 둘러메고 손으로는 월금을 뜯는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저이야말로 평등안(平等眼)을 가진 것 아니겠느냐."- p 73 -  


실제 눈으로 보니 더 없이 화려하고 조선을 압도하는 선진화된 청나라에 시기하는 마음과 부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던 연암이지만, 이 또한 청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을 뿐, 청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라는 말은 장복이에게 우화적으로 말하며 흔들리는 마음에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한다. 


여행을 떠난 지 보름 가까이 된 7월 8일 연암을 요동 벌판의 지평선에 압도되어 '호곡장론'이라는

빼어난 사유와 이에 걸맞는 명문을 탄생시킨다. 그 동안 조선 땅에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끝 없는 지평선에 압도당한 연암은 실존에 대한 기존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벅찬 감동에 빠져든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디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중략)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저도 의당 선생과 함께 한번 통곡을 해야 되겠습니다그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건 갓난아이에게 물어봐야 될 것이네. 그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그 애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으로는 눈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으 보니 그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 같은 기쁨이 늙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이치가 전혀 없이 즐겁게 웃기만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도리어 분노하고 한스러워하는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끝없이 울부짖기만 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삶이란 성인이든 우매한 백성이든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온갖 근심 걱정을 두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 울음을 터뜨려서 자기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의 본래 정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오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임없는 소리를 본 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 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의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이."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헤 한 점도 산도 없는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 p 136 - 


요동을 광활한 평원을 본 연암은,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태초의 시공간에 들어선 경이로움을 느끼며, 반대급부로 좁디 좁은 조선 땅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 바탕 울어볼만하다는 심정의 표현은 그런 존재론적 사자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백탑시파의 수장으로 한양에서 박제가와 홍대용, 이덕무 등과 술과 시로 교류한 이곳의 연암과 도강을 거쳐 연경 그리고 다시 건륭제가 있는 열하를 왕복하며 청의 다양한 도시와 사람과 교류한  저곳의 연암은 몸뚱이는 동일한 사람이지만, 그 내면은 천양지차 다른 사람이다. 이곳의 연암이 변방에 갇힌, 편견에 사로잡힌 좁은 의미의 연암이었다면, 길을 알고 길을 건너 저곳을 다녀온 연암을 (물리적/심리적인) 변방을 벗어나, 다시 태어난 연암인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어라"는 임제록의 구절처럼 기존 가치관과 세계관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 올 초에 읽은 열하일기를 오랜만에 다시 떠올린 건 EBS가 기획한 '김연수의 열하일기'라는 다큐를 보고 나서다. 연암이 거쳐 갔던 도시들의 발자취를 따라 소설가 김연수가 여행하며,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고 연암을 흔적을 찾는 서사를 지닌 근사한 여행 다큐다. 말(馬)이 아니더라도 말의 가장 유사한 대체재인 모터사이클를 타고 여행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있지만,여진히 대중적이지 않은 소설가와 누구나 알지만 읽어본 이 거의 없을 고전의 콜라보를 현실화 시켰다는 것만으로도 EBS에 큰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래는 다큐 홍보글인 듯한 EBS 블로그

http://ebsstory.blog.me/22084509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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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진짜 작가들의 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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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로서 장정일을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서평집 <공부>시리즈로 통해 파생된 독서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추천한 책이 실망감을 안겨 준적도 드물었다. 이러한 이유로 시사인에 연재하는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꼼꼼히 챙겨보는 책이다. 














<김종대, 정욱식의 진짜 안보>는 시사인 400호에 연재된 독서일기에 소개돼서 읽게 된 책이다. 

장정일은 허울 좋은 인문학 열풍을 비판하며 아래와 같이 일갈한다.

바람직한 사회는 예컨대 천안함-세월호 사건 직후, 거기에 대한 논픽션이 20여 권이나 쏟아져 나오는 사회다. 그 가운데 어느 한 권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술자리 화제가 되고 저녁 9시 뉴스를 열고 닫는 인사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준비된 논픽션 작가가 있어야 하고, ‘쟤들은 문학을 할 능력이 없어서 저런 걸 쓰는 거야’라는 편견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소설보다 논픽션 독자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 뒤에야, 문학 지망생을 경유하지 않고 처음부터 논픽션 작가가 목표인 양질의 논픽션 작가가 나올 수 있다.

논픽션은 민주 사회를 지키는 보루이며, 나아가 공공의 가치를 지키는 데 필요한 무기다. 독서에 진도(進度)라는 게 있다면, 이런 믿음과 상응하는 노작을 검토하고 지지하면서 ‘아는 것이 힘’이라는 실체와 만나는 것이다.


이런 논지 하에 장정일은 최근에 읽은 <김종대, 정욱식의 진짜 안보>를 추천한다. 진짜 안보를 걱정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대선 불법 댓글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과 기무사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은 그들이 벌인 일이 국가 안보를 위한 거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행동은 한낱 조직의 안위에 불과한 가짜 안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가짜 보수의 민낯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MD(미사일 방어체체)나 차세대 전투기 도입사업 등의 막전막후, 동북아 4국의 이해 관계 등을 심도있게 알 수 있는 좋은 읽을 거리였다. 


개인적으론 맨 마지막 챕터인 '한반도 통일, 독일 통일로부터 배운다'가 가장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남한과 북한이 통일에 합의한 후 과연 통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북한 정권의 핵심 인물들을 인권유린이나 경제적 몰락의 혐의로 처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문제이며 해결이 쉽게 도출되지 않는 문제인 것 같다. 김정은과 통일에 합의하고, 김정은을 처벌할 수 있느냐의 문제.


 "통일을 대박이다"라는 관념적인 레토릭을 남발하는 대통령의 화두를 미시적으로 하나씩 접근하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미리 차근 차근 준비하지 않으면 통일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관념어로만 남게 될 것이다.  



최근 동북아에선 "OO가 위협이다." "OO가 위협이 아니다"이런 얘기들이 많은데요. 국제정치학에 구성주의라는 이론도 있지만, 결국 위협이라는 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물리적으로 아무리 강해도 내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거꾸로 힘은 별로 강하지 않은데 내가 위협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인식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거죠. 최근 대표적인 건 결국 `중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겠죠. 중국이 미국이라고 하는 패권국에 도전해서 미국이 만든 기존 질서를 바꾸려고 하는 수정주의 세력이냐, 아니면 현존 질서에 순응하는 세력이냐, 바로 여기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고요. 이것 때문에 지금 새로운 질서, 새로운 위협이 또 생겨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나오는 것이죠.(Page 200)

제가 만난 중국의 대다수 정책결정자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은 수정주의 세력이 아니라고 얘기해요. 그러니깐, 그건 미국과 일본, 특히 워싱턴과 도쿄에 있는 보수적인 학자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인벤션(Invention), 창조물이라는 겁니다. 중국 공산단의 가장 큰 목표는 2020년 까지 소강사회 건설, 즉 대다수의 중국 사람들이 유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횔르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 대외적으로 평화관계, 대내적으로 사회조화관계가 필요하다는 논리입니다.(Page 201)

일본의 동북아 전문가가 저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면 일본처럼 장기불황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과 다른 게 딱 한가지 있다"고요. "그게 뭡니까?"그러니깐 "북한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만큼 나라밖에 있는 경제학자들조차도 한국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유력한 땅이 북한에 있고 북한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으로 가는 길에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러한 지정학적, 혹은 지경학적 기회 자체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폐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Page 254)

사실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한 비전이 이른바 종북, 또 공안통치와는 양립을 못 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남북긴장과 안보 불안이 조성되어야만 종북몰이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고 금강산 관광객이 늘어나고 개성공단이 확장되는 상황에서는 종북공세를 못 하거든요. 그러니깐 국내정치가 결국 발목을 잡는 겁니다.(Page 254)

이와 관련해서 키신저 박사가 한 얘기가 재미있습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작고 약한 나라다. 인구 2000만의 나라를 상대로 해서, 세계 최강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남한까지 있는데, 이걸 외교로 풀 수 없다면 외교라는 것은 그럼 어디다가 쓰는 것이냐?"(Page 258)

`통일 후에 이런 인권 문제 또는 경제적 몰락에 대한 책임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하는 것은 통일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는 지에 따라서 상당히 차이가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 어려운 것으로, 인권 문제를 일으킨 가해자들을 100% 처벌하기란 사실 힘든 것 같습니다. 독일 같은 경우에는 1990년 통일 직후에 이런 인권 문제 가해자를 처벌하고 과거사를 청산하는 과정이 굉장히 빨리 진행됐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굉장히 소수의 사람만이 처벌을 받게 됐고 아직까지도 많은 희생자 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독일 안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고 사회 전반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조금 미흡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정치인들이 협상하고 문제를 논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고 사회 전반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Page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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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화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쓴 <윤리21>(2011년, 사회평론)에는 말년의 마르크스가 생각한 코뮤니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만약 연합한 협동조합 조직의 단체들이 공동 계획에 근거해 전국적으로 생산을 조정하고, 그렇게 해서 그것을 여러 단체들의 조정 아래에 두며 자본제 생산의 숙명인 끊임없는 무정부와 주기적 변동을 끝내게 할 수 있다면, 여러분, 그것은 공산주의, 다시 말해 '가능한 코뮤니즘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프랑스 내란]

의회에 의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던 말년의 엥겔스와 폭력혁명과 전 생산의 국유화를 주창했던 레닌과는 달리 말년의 마르크스는 진정한 코뮤니즘을 소비-생산협동조합에서 찾았다. 마르크스가 생각한 코뮤니즘이란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 연합사회(Association)다. 이러한 소비-생산협동조합의 연합사회가 전 지구로 확대되어 국가를 대체하는(국가가 사멸하는) 것이 코뮤니즘이라고 봤던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을 생산의 도구가 아닌 주체로 탈바꿈하는 사회를 꿈꾼 것이다. 이는 가라타니 고진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지상명령이 실현된 사회다. 

협동조합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소비-생산협동조합이 실제로 구현된 기업 형태다. "협동조합, 참 좋다"는 아직은 협동조합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를 위해 협동조합의 개념과 세계 각국의 사례를 소개한다. 이와 동시에 국내 협동조합 이야기를 다루고 '어떻게 협동조합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이 함께 담겨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단어인 협동조합(Coperative)이란 과연 무엇인가? 잠시 국제협동조합연맹의 선언문의 정의를 살펴보자.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을 통해 공동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율적 단체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문(1985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기업은 이윤 창출과 이를 통한 주주이익을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주식회사다. 직원들의 애사심을 고취시키려 '회사의 주인은 우리다'라는 허울 좋은 구호를 더러 외치게 하는 회사도 있지만, 주식회사에서 회사의 주인은 엄연히 주주다. 이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가입한 조합원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율, 독립적으로 소유하는 기업이다. 따라서 이익 또한 주주가 아닌 조합원이 실적에 비례해 배당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낯선 기업의 형태지만 유럽에서는 농업에서 금융서비스, 주택에서 건강관리, 소매점에서 재생에너지까지 경제의 모든 분야를 존재하며 큰 경제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성지라 불리우는 이탈리아의 볼로냐만 보아도, 400여개의 협동조합이 활동하게 활동하고,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5퍼센트에 이른다. 협동조합 기업의 천국이라 불리우는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은 얼마나 국민의 삶에 밀착되어 있을까?

"20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산 교민 김현숙 씨에게도 협동조합은 친숙하다. 김씨는 "어디를 가도 협동조합을 접한다. 택시 기사도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한다. 이곳 사람들은 '시장에 간다'는 말 대신 '콥coop  간다'는 말이 입에 붙었다." 라고 말했다. '콥'은 협동조합(코페라테, cooperativa)을 줄인 이탈리아 말이다. 콥은 이탈리아의 매장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page 47)

이처럼 유럽에서의 콥은 생활 속 깊숙히 침투해 있다. 우리에게 알프스의 나라로 알려진 스위스는 '소비자 협동조합의 왕국' 같은 나라다. 미그로와 코프 스위스, 두 소비자 협동조합의 식품시장 점유율은 40퍼센트에 달한다. 소비자 협동조합의 힘이 막강해 일반 기업은 맥을 못 춘다고. 협동조합의 영향력이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한 가지.

"2009년 1월, 스위스의 한 일간지는 스위스 국민 1,000명을 상대로 '스위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을 물었다. 1위는 아인슈타인이 차지했다. 3위는 테니스 스타 로저 페더러, 4위는 교육학자  페스탈로치, 5위는 적십자 청설자 앙리 뒤낭, 모두 들어봤음직한 이름이다. 그런데 2위에 오른 인물은 생소하다. 고트리브 두트바일러. 스위스의 협동조합 미그로를 창립한 사업가다. 스위스 국민은 왜 그를 아이슈타인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로 꼽았을까?"(page 164)

이처럼 그들에게 협동조합은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한 축인 동시에 윤리의 근간이다. 협동하여 함께 같이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완전히 잊은 듯 개개인이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이제는 유럽의 그들처럼 함께 멀리 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지금은 낯설지만 협동조합 기업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그날이 온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대로 우리는 서로를 목적으로 보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지 않을까?

"Coop is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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