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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화 시키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소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읽고 난 후 엄청난 양의 사유거리를 던져주는 소설과 그렇지 못한 소설.   

이번에 읽게 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당연 전자의 소설에 속한다. 최근에 나온 신작 '구월의 이틀'을 읽고 난 후 자꾸 장정일이란 작가의 사유세계가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아 찾아 읽게 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이상의 필모그래피를 내놓지 않고 있는 감독 중 여균동 감독과 함께 가장 후속작이 기대되는 감독인, 여하튼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언뜻 본 기억이 있는 장선우 감독의 유명한 90년대 영화의 원작이다. 중학교 시절 대학생 누나가 빌려온 비디오로 몰래 한번 본 것이 전부여서, 텍스트로 접하긴 처음인 장정일의 대표 장편 소설이다.     

 

 

 

 

 

 

 

소설가 이승우가 말했듯이 모든 소설은 결국 글쓴이의 이야기이며, 어떤 식이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누군가의 사유과 관념을 훔쳐보는 은밀함'이란 매력이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소설읽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저자인 장정일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세상을 향한 자신의 주장을 쉴새없이 내뱉는다. 저자가 독자에게 배설하고자 하는 것은 90년대 초 한국이란 현실세계에서 활발히 논의되었던 사회적, 문화적 화두와 맞닿아있다. 저자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사회 안의 성과 권력 그리고 문학과 소설가의 사회적 역할 등의 수많은 화두를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답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은 표절작가란 낙인이 찍긴 삼류 소설가 <나>와 여덟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은행이라는 억압된 공간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발기부전환자 <은행원>, 어린 시절 남근주의 피해자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바지입은 여자>를 큰 축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하지만 이 세명의 등장인물을 포함한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은 결국 저자의 의견을 독자들에게 피력하는 메신저에 불과한 것이다. 시인이자 희곡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이번엔 소설이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여러 사유과 관념을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문학이 사회를 변혁 혹은 변화 시킨다는 믿음에 대하여 이는 소설가들의 자아도취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여전히 문학과 소설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여전히 믿고 있다. 다만 그가 무학의 사회적 역할에 비관적으로 답하는 것은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나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정치, 경제, 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로 흩어져 '운동권이자 인텔리'였다는 후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변절자들에 대한 조롱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또한 여타 소설 속의 일관된 매개체라 할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이 소설에서도 역시 화두로 던지며 세상 사람들의 위선을 조롱하고, 쾌락의 자유를 주창한다. 그에겐 섹스란 초등학생이 받아쓰기 만점을 맞으면 찍어주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같으며, 삶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그 무엇이다.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사건이 뒤엉켜있고, 결말도 급진적이어서 전체적으로 다소 판타지스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저자의 풍부한 사유세계와 사회문화적인 박학다식함을 엿볼 수 있는, 최근에 본 것 가운데 으뜸이 되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ps. 너무 오랜 전에, 그리고 너무 어린 나이(?)에 감상했던 영화라서, 문성근(나)과 정선경(바지입은 여자)을 제외하곤 그 외의 등장인물들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은행원>은 여균동이었나?  아님 <색안경>이 여균동이었나? 암튼 다시 한번 영화를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이젠 이런 파격적이고 의식있는 영화는 안 나올 것인가? 

ps2. 소설을 보다 보니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속 이름이 선댄스다. 어라 선댄스라면 미국 최고 권위의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 아닌가? 로버트 레드포드가 후원하여 시작되었다는 그 선댄스 영화제. 그 소설 속 주인공 선댄스가 선댄스 영화제의 그 선댄스가 맞나 싶어, 박학다식하고 친절한 네이버에 물어보니 역시 맞다. 인간이란 역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사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 작은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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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조금 뜸하다지만 나 어릴 적부터 이미 문단문학계의 핫이슈로 그 지위를 굳건히 한 장정일의 장편 소설이다. 90년대에는 나름 신세대 축에 속했던 나에게 장정일의 문학은 ‘텍스트’가 아니라 ‘영상’으로 기억된다. 중학교 시절 대학생 누나가 빌려온 비디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정선경의 엉덩이로 추억되고, 대학 시절 P2P사이트에 불법 다운로드한 무삭제판 ‘거짓말’ 김태연의 교복으로 회고된다. 
 

 

 

 

 

 

 

 

 

 

 

 

 이전 소설 ‘보트하우스’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소설에서도 저자는 위선과 욕망으로 가득 찬 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소설 속 ‘그’는 처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언니와 결혼한 별난 사람이지만,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은 너무나 익숙하다. 잠에 취해 간신히 일어나 출근하고, 비디오와 양파링으로 시간을 죽인다. 토할 것 같이 지루한 일상에서 쾌락과 성적 욕망만이 그를 구원해 줄 수 있다. 삶의 원동력이자 근근히 버텨낼 수 있는 모르핀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서부터 시가작하지. 원죄니 윤회, 구원이니 해탈 따위가 모두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에 물들어 있다는 수작 아니야? 그들은 나약하고 비천한 인간의 심리를 담보로 잡고서 이성과 금제의 규율을 하늘 높이 세우지.”

그에게 종교란 인간의 원죄를 덮어 씌워 금욕을 강요한 악에 불과하다. 종교적 유토피아란 없다. 쾌락과 자유만이(그게 상상에 그칠지라도)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단언한다.

너희가 쾌락을 믿느냐? 장정일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답은 명확해진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내면의 수치심’은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의 그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이 위선과 욕망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자기 기만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PS. 책을 다 읽고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다.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르주아들과 기독교의 어색한 교접. 욕망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에게 종교가 웬 말인가?
쾌락적 욕망의 완성체인 자본주의, 그 세계의 맹주로 자리 잡은 부르주아와 금욕과 금제의 규율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조합. 언뜻 보면 비키니 입은 씨름 선수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비틀어 생각해 보니 그 조합은 어느 무엇보다 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부르주아들에게 기독교란 자신의 자본주의적 쾌락과 욕망에 손대기 전 (더 큰 욕망을 위해) 깨끗이 손을 씻는 성수이며, 자기 안의 욕망을 불사르기 전 행하는 거짓 구원이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쾌락 추구를 위한 수단이며 한갓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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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씌어졌다’며 여러 대상자를 죽 나열하는 서문이 나온다. 그 대상은 과로에 지쳐 있는, 혹은 노동현장의 부자유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노동자, 자신의 밭이 공장화되는 것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농민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빠진 대상자 중 한 명을 추가하고 싶다. 바로 우리의 당선인 이명박씨. 7%의 경제 성장이란 고전적 망령에 집착하고 있는 그. 이 책의 제목은 고스란히 그의 천박하고 철 지난 경제 성장론에 대한 반기다. 처음에는 책 제목 때문에 이번 대통령 선거 이후에 맞춰서 나온 책이라 생각했는데 발행 시기를 보니 2002년이다. 2002년에 발행된 책이라고 하기엔 그 소재와 내용이 너무 시의적절하다. 특히나 마지막 부록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를 보고서는 혀를 내둘렀다.(이경숙씨도 추가요)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이라 가볍고 투박해 읽기에도 무난했다. 특히나 그 적절한 분량이란.  





  

 

 

 

 

 

 

 

 

 

  

지난 수십 년 간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과 피해를 고스란히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우리지만 현재까지도 우리는 ‘경제성장’이란 망령에서 벋어나지 못했다. 파이가 커지면 그 조각도 커진다는 거짓은 여전히 유효하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면서도 나 자신은 예외일 것이라는 신화에 허덕인다. 저자인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대로 그는 새로운 것을 독자들에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그 것을 공통상식으로 변화되길 기대할 뿐이다.



 저자의 언어 중 인상 깊은 것 중 하나가 바로 ‘타이타닉 현실주의’다. 우리는 자연 파괴와 그로 인한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등의 자연 재해 등에 대한 학자들의 경고를 매스컴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어, 또 그 소리!’라며 흘려  듣는다. 이 같은 현실을 저자는 빙산을 향해 돌진하는 타이타닉호에 비유한다. 우리는 지구의 멸망이라는 빙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는 마침내 빙산에 부딪힐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진하는 행위를 멈추지 못하고 여전히 자연 파괴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엔진을 멈추는 행위를 현실주의라고 부른다. 흔히 우리는 삼림보호, 반전, 비핵 등을 현실을 간과한 이상주의자의 수사라고 치부하지만 사실 그들의 의식과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들과 산을 간직한 시골의 풍경을 보고 발전이 덜 된 지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발전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제 모습을 잃고 수세기에 걸쳐 우리만의 전통문화가 사라진, 콘크리트에 덩어리의 집합체를 과연 발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저자의 말대로 경제성장, 경제 발전은 하나의 자연스런 현상(누구나 바라는)이 아닌 이데올로기란 말이 옳다. 지배세력의 힘의 의해 주입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빈곤의 근대화라는 말은 그래서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이다. 빈곤은 근대화와 뗄려야 뗄 수 없는 종속변수다.



 빈곤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빈곤이다. 이는 자급자족의 사회에 존재하던 빈곤이다. 이들 사회에서는 필요한 만큼만 자연에서 얻고 그 만큼 소비했기에 큰 불편함이 없었다. 두 번째는 세계은행에서 말하는 ‘절대빈곤’이다. 이는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어 가난해 시달리는 빈곤이다. 지금의 아프리카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세 번째가 부자의 전제가 되어 있는 빈곤이다. 흔히 말하는 상대적인 빈곤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우리 사회를 떠오르면 이해가 쉽다. 경제발전이란 바로 이 세 가지 빈곤 가운데 첫 번째, 두번째를 세 번째로 고쳐 만드는 과정이다. 백년 전에는 자급자족의 생활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상당히 많았지만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우는 ‘南’의 나라들은 자급자족 사회에 다수 존재했던 ‘北’의 여러 나라들을 ‘경제 발전’이라는 강제적인 이데올로기(이는 식민지 주의 → 제국주의 → 경제발전론 → 세계화 라는 허울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를 이용해 ‘北 ’의 나라들을 착취하고 자연 파괴를 일삼았다. 수십 년 간 꾸준히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나라만 봐도 상대빈곤의 수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먹고 사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를 위협한다. 
 

 저자는 이러한 경제 발전의 망령을 걷어내고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을 이루어 나가자고 단언한다. 그 동안의 성장을 멈추고 줄이는 발전을 하자고 공언한다. 빙산을 향해 질주하는 경제성장을 부정하고 경제 이외의 가치, 이외의 활동, 시장 이외의 모든 즐거움, 행동, 문화, 그런 것을 발전시켜 진짜 행복을 추구하자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진짜 ’현실주의‘인 것이다. 현재의 상식이 비상식이 되는 사회. 현재의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사회. 그것 역시 내가 바라는 사회이자 지구에게 이로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경제 성장이 안되도 우리는 풍요로울 수 있다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일 것이다.  가짜 '현실주의'를 유난히도 강조하는 새로운 정부의 구성원들에게 정중히 한 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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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치 : 자기의 약점, 잘못 또는 무가치함이 남들 앞에 탄로되었다고 생각할 때 일어나는 감정
사실 '로쟈'라는 이름은 나에겐 '수치'라는 단어로 연상된다. 로쟈를 실제로 만나 모욕을 당했냐고? 물론 아니다. 그의 박학다식한 글을 접한 후 스스로의 무식함에 한 동안 치를 떨었으니 사전적 의미의 '수치'를 제대로 경험한 셈이다. 

로쟈의 글을 처음 접한 건 어느 신문에 인문학에 대한 기사에 소개된 다음 카페 '비평고원'였을 게다. 얕은 지식의 소유자지만 누구보다 인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나로써는 새로운 놀이터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놀이터. 미끄럼틀, 그네만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무서워 탈 엄두도 못내는 자이로드롭, 자이로스윙 등으로 넘쳐났다. 

니체, 헤겔은 그렇다치자.(물론 이 유망한 철학자의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러시아 문학 번역비평은 뭐고 지젝은 또 뭔가. 얕은 지식을 꾹꾹 누르며 버텨 봤지만 어느 순간 희박한 공기로 둘러쌓여진 그들만의 공간인 '비평고원'은 내 놀이터로써는 부적합해 보였다. 물론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놀이터에서 나는 크리스토프 하인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만나게 되었고, 러시아 문학에 대한 곁다리 지식도 습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쟈의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하기 어려운 문체에 나는 수치감을 느꼈으며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비평고원에 더 이상 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오랜만에 접한 로쟈. 내가 알던 로쟈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책 속에는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었던(?)  니체, 헤겔, 지젝, 러시아 문학비평도 있었지만 나의 관심사인 김훈, 김규항도 있었고 심지어 김기덕(!)도 존재했다. 비평고원은 그렇다 쳐도 그의 알라딘 서재는 충분히 내 놀이터가 될 가능성이 보였다. '수치의 감정'은 책을 읽는 순간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전에 사두었던 지젝의 책을 다시 펼쳐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물론 이러한 '열망의 감정'이 얼마나 오래 갈진 의문이지만 로쟈는 이미 내 마음속의 또 '한명의 Mento'로 자리잡았다. 그의 넘쳐나는 지식의 양과 끊임없는 노력에 자연스레 무릎이 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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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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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지면으로 폭넓고 방대한 지식을 압축해 히틀러의 생애와 사상을 담아낸 탁월한 역사가이자 비평가. 3년 전에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을 단숨에 읽고 기억하는 저자 '제바스티안 하프너'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그 뒤로 저자의 글이 번역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독일인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 읽게 된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가 연이어 출간되었다. 독일 근대사 3부작이라 할만하다.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보다 개인적으론 가독성이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제3제국이 등장하기 전 도이치 연방과 제국 그리고 바이마르 공국에 대한 나의 무지와 관심 부족일게다. 다만 무지한 만큼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그 사실과 현재 우리의 현실의 모습이 겹쳐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부분이 곳곳에 눈에 밟혔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라는 맑스의 시대를 관통하는 문구가 절로 떠올랐다. 1920~40년 도이치에서 있었던 역사적/시대적 오류가 100년이 지난 이곳. 대한민국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역사적 실패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지헤를 얻는다는 것이 과한 가능한 일일까?

경제 부흥이라는 신화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모습. 아군과 적을 구분하는 지배자의 뻔한 논리에 순응을 넘어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군중 심리. 

프레모 레비처럼 우리는 '가라앉은 자'의 희생을 밟고 운 좋게 살아남은 '구조된 자'로써 역사적 진보와는 거리가 먼 역사적 퇴보에 동참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이 늘 긴장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낯빛을 바꿔 구세주의 모습을 띄고 등장하는 그들과 우리 자신을 감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대한민국)의 행복과 번영만을 앞세워 저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선동하는 자들을 견제해야 하는 이유다. 그들의 행동들은 파시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 사이 바뀐 도이치 정부는 두 번째로 전쟁 배상금 부담, 심지어는 영 플랜 아래 새로 나타난 규칙까지 포함하여 배상금 부담을 털어낸 기회로 잡았다. 이번에는 1920년대 초반처럼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의도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서였다. 이번의 디플레이션은 도이칠란트를 가난하게 만들어 더 이상은 전쟁배상금을 갚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채권자들도 그 점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P 188-

1930~33년에 점점 더 가난해진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체로 세계 경제공항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잠깐 지적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만 맞는 말이다. 그보다 그 이전 1919~1923년 사이의 인플레이션이 패배한 전쟁의 결과라는 말도 일부만 맞는다. 두번 다 그렇다. 전쟁이 끝나고 제때에 화폐개혁을 단행했더라면, 도이칠란트의 모든 저축 자산의 몰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경제정책을 취했더라면, 도이칠란트에서 세계 경제공항의 결과가 더 악화되는 대신 매우 많이 완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중략) 브뤼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정책을 실천했다. -P189-

1930년에 이 정당(민족주의-사회주의 정당)을 대규모 정당으로, 이어서 1932년에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만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유는 경제공항에서 찾을 수 있다.(중략) 실업자가 600만 명에 이르렀던 1932년에, 플래카드 하나에는 표현주의 양식으로 굶주린 대중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아래 쪽에 "히틀러,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구절만 적혀 있었다. 그것이 적중했다. 가난이 현실이었다.(중략) 대중을 히틀러에게로 몰아간 첫째 이유는 가난이었다.
둘째 이유는 갑자기 다시 강해진 민족주의였다. 그동안 민족주의는 이 시기의 경제적 곤궁처럼 그렇게 구체적으로 쉽사리 설명되지 않았다.(중략) 아무도 나치만큼 그렇게 강력한 확신을 품고, 따라서 설득력을 지니고 민족주의 감정, 민족의 자부심, 민족의 원한에 호소하지 않았다. 도이칠란트가 1차 대전에게 이겨야 마땅했다. 다만 간계와 배신을 통해 그런 승리를 도로 빼았겼다고 그들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P208-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이 선거에서 이긴 셋째 이유는 히틀러 개인에게 있었다. 이 말이 많은 사람을 화나게 하겠지만, 그래도 이말을 해야 한다. 히틀러는 자기 시대 도이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 것이 아니라 매력적으로 보였다. 매력을 넘어 사람을 사로잡았다.-P210-

나 자신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는데 ‘민족주의 봉기‘는 두 가지 뿌리에서 자라 나왔다. 첫째로는 1933년 이전 몇 해 동안의 정치적 불확실성에 대한 피로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자기가 대체 어디 있는지 알고자 했고, 확고한 손길과 확고한 의지를 지닌 한 남자가 정상에 있기를, 질서가 잡히기를 원했다.(중략) 히틀러가 정당을 없앴을 때, 3월 5일 나치당이 얻은 유권자 수를 훨씬 넘어서는 시민 계층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가 그를 찬성했다.
이런 분위기가 옛날 시민 계층 정당들의 대표들에게 저항하기 힘든 인상을 주었다.(중략) 하지만 1933년 3~7월에 일어난 일의 증상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그 온갖 불법에도 불구하고, 강제수용소 설치나 마구잡이 체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한 반유대주의 정책의 처음 징후들에도 불구하고,광범위한 주민 계층 사이에서 하나의 확신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위대한 순간이다.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순간, 신이 보내신 한 사람, 민중 한가운데서 일어선 지도자를 찾아낸 순간이다. 그가 기율과 질서를 찾을 거고, 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아, 도이치 제국이 새롭고 위대한 시간을 맞이하게 해줄 거다"

동시에 히틀러의 경제 기적도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1933~37년 사이에 대량 실질 상태를 완전 고용 상태로 바꾸어준 경제의 활성화인데, 이로써 히틀러는 옛날 사민당 추종자 거의 전부와 옛날 공산당에 표를 찍은 사람의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려놓거나, 적어도 중립으로 만들었다. -P235-

괴벨스는 전 국민이 나치 이념을 고백하게 하려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미디어를 동원해서 도이치 국민에게 총통 통치 아래, 나치의 상징 아래 재건된 건강한 사회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괴벨스의 영화 산업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났다. 선전부 장관은 이따금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서 몇 개의 선정용 영화를 제작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전체 영화 생산은 명랑하고 해롭지 않는, 그 밖에도 기술적,예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들로 채워졌다.(중략)
제3제국의 배우와 감독들은 대부분 당시 사람들이 ‘반대파‘라고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말하지만 제3제국을 무시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많은 이들이 심지어 일종의 저항을 한다는 망상까지 지녔다. 이렇게 해롭지 않은, 그리고 민족주의-사회주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을 만들어서 도이치 국민을 기만하는 괴벨스의 작업을 함께 도와주었다는 것, 그러니깐 모든 일이 그냥 조금만 나쁠 뿐이고, 근본적으로 여전히 극히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느낌을 만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P243-

처음으로 실패의 가능성이 드러난 1941년 말에 벌써, 그는 외국 외교관들을 개인적으로 접견한 가운데 이런 발언을 했다. "도이치 민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린 만큼 충분히 강하고 또 희생의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이 민족은 스러져서 더욱 강한 다른 세력에게 파괴되어야 합니다. 나는 도이치 민족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오." 도이치 정치가의 입에서는 참으로 다시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전재 마지막에 실제로 히틀러는 동료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군사적 패배를 도이치 민족 전체의 몰락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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